한희철의 '두런두런'1160 주님, 오늘 하루도 새벽 4시 20분. 어김없이 자명종이 웁니다. 날랜 벌래 잡듯 울어대는 시계를 끕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습니다. 새벽공기 차가운 마당에 나서면 그제야 잠이 달아납니다. 가을 새벽하늘 별들은 시리도록 맑습니다. 밤새 이슬로 씻은 듯 깨끗합니다. 캄캄한 예배당, 오늘도 아무도 없습니다. 제단 쪽 형광등 2개와 십자가 네온에 불을 켭니다. 새벽종을 치기 전 늘 망설임이 지납니다. 여린 마음 탓입니다. 소리를 낮춰 종을 칩니다. 새벽 어둠속으로, 고단한 잠자리로 종소리는 달려갑니다. 잠시 후 개 짓는 소리, 그리고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들어서는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짐작이 갑니다. 대개는 둘, 간혹 셋이서 예배를 드립니다. 벼 베는 철, 납덩이 같이 무거.. 2021. 9. 16.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가난한 사랑은 그대 가슴에 닿기도 전 스러지고 만다 마른 마음에 슬픔을 키우고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 품을 수 없는 표정들이 집 앞 길로 지나고 무심히 서둘러 지나고 어둠속 부를 이름 없었다 웅크린 잠 꼭 그만큼씩 작아지는 생 하늘은 꿈에나 있고 폐비닐로나 널린 이 땅의 꿈을 두고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가난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 1989년 2021. 9. 15. 땅 투기성 재산증식이라는 천박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땅을 홉. 작이라는 작은 단위까지 나눠 땅에 대해 갖는 인간의 강한 집착은, 유한한 인간이 갖는 무한에의 동경일 수 있으며, 죽음의 기운에 싸여 사는 인간이 땅을 소유함으로 생명의 가능성을 확인하려 하는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보상심리 아닐까. 고향을 향한 회귀본능일 수도 있겠고. - 1989년 2021. 9. 14.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 실내화를 안 가지고 학교를 갔다. 빈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간 것이다. 맨발로 교실에 있었다. 규덕이 보고 실내화를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했는데도 규덕이는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맨발로 지냈다. 집에 와서 물어보니 학교에 가지고 왔는데 잊어버리고 나한테 안 준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챙겨야지. -그렇게도 정신이 없었니? 6.25땐 아기를 업고 간다는 게 베개를 업고 피난을 간 사람도 있었다더라.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 규애가 연필로 쓴 일기 밑에는 빨간색 글씨의 짧은 글들이 있었다. 물으니 담임 선생님께서 써 주시는 것이란다. 반 아이들 일기도 마찬가지란다. 흔히 ‘검’자나 ‘참 잘 했어요’ 도장을 찍어 주는 게 예사인 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은 달랐다. 규애의 일기 밑에는 .. 2021. 9. 13. 식구 아이들이 1일 캠프를 다녀오게 되었다. 동부선교원 어린이들이 캠프를 가는데 같이 가기로 했다. 이숙희 선생님의 배려였다. 저 어린 것들을 보낼 수 있을까. 놀이방 엄마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하룻밤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의 대견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도 했다. 소리와 규민이도 마찬가지였다. 울지나 않을는지, 대소변은 제대로 가릴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떠나기 전날 짐을 꾸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녀석들의 마음가짐을 도와준다.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울고 보채는 거 아냐?” 슬쩍 말을 돌렸더니 뭔가 생각난 듯 소리가 대답했다. “이러면 되겠다. 엄마 아빠 옷 중에서 안 입는 옷을 하나씩 가져가는 거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으면 옷을 꺼내 보면 되잖아. 잠 잘 때도 옷을 만지면서 자면 되고.” 엉뚱한 딸의 .. 2021. 9. 11. 무모한 명분 허전함과 괴로움과 두려움. 언제부터인지 그런 감정들이 서로 뒤섞여 가슴 한쪽 거친 똬리를 틀고 신기하게 날 거기 잡아넣는다. 애써 아닌 척 하지만 그걸 느낄 때마다 가슴이 눌린다. 함께 사는 이들의 속살 보듯 뻔히 뵈는 아픔, 설움, 거짓을 두고 난 그저 무력할 뿐. 그게 두려워 괴로워 모른 척 하고. 또한 바람처럼 쉽게 헐값으로 회자되기도 하는 가벼움. 정말 내 삶은 어디에 소용 닿는 것인지. 견딘다는 건 무모한 명분 아닌지. - 1989년 2021. 9. 10. 공부와 일 도시의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공부해라’라면, 시골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일해라’일 것이다. 학교에서 다녀와 책가방을 놓기가 무섭게 떨어지는 말이란 도시에서는 공부해라요 시골에서는 일해라는 것이다. 서울과 수원에서 교육전도사 생활을 하며 느꼈던 건 대개의 부모들이 신앙보다는 진학문제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까짓 1,2년쯤 예배를 쉬더라도 공부만 열심히 하여 좋은 학교에 진학하면 되는 것이고, 그 후에 교회에 나가 안정된 위치에서 봉사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 대부분 부모들의 심리였다. ‘공부해라’라는 계속되는 말로 심어주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이 아니라 하나의 강박관념뿐이라고 하는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늘 달리는 시골에서는 자연히 공부보다는 일에 대한 요구가.. 2021. 9. 9. 덕이 숨어있는 마을 덕유산(德裕山)이라는 산명(山名)은 그윽했다. 덕이 넉넉하다는 뜻도 그러하려니와, 덕유라는 어감 또한 그 뜻하고 멀지가 않아 그윽한 맛이 풍긴다. 바로 옆 동네 조귀농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충청북도 땅인데 그곳 지명이 덕은리다. 충청 중원군 소태면 덕은리가 된다. 덕은리 입구에는 목판에 새긴 이정표가 서 있다. ‘德隱里’라 한문으로 써 있다. 덕이 숨어있는 마을,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은은히 덕이 배어나는 마을이라는 뜻일까. 흐르는 남한강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덕은리 마을. ‘덕은’이라는 이름이 귀하다. 늘 그 이름 감당하며 사는 좋은 마을 되었으면. - 1989년 2021. 9. 8. 별과 별빛 “별빛을 우리가 보았을 때 그 별은 이미 죽어있을 지도 모른답니다.” 한 귀퉁이, 늘 그만한 네모 크기로 같은 책을 고집스레 소개하는 . 짧게 실리는 글들이 늘 시선을 끌었는데, 며칠 전의 글은 위와 같았다. 기쁨이나 슬픔 그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다른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때론 그것이 이미 때 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어쩜 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아픈 지적이었다. - 1989년 2021. 9. 7.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1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