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는다는 것

껍질을 벗는다는 것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입니다.”(시119:54)

주님의 이름을 높여 기립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코로나 블루니 코로나 레드니 하는 말들이 널리 유통되는 시대입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찾아오는 영혼의 질병인 우울증과 짜증과 분노가 심각합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학생들의 등교도 자꾸 미뤄지면서 가족 간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참 우울하고 암담합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10살, 8살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재가 일어나 다치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어떤 이는 편의점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이리저리 휘젓기도 했습니다. 환각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이도 있고, 만취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성실한 가장을 치어 죽이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전에도 전혀 없었던 일들은 아니지만 요즘 이런 일들이 더욱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이 오히려 특별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만나 왁자지껄하고, 차 한 잔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참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쳤던 온갖 의문들을 놓고 설왕설래하던 시간이 기억의 저편인양 아득하기만 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요즘은 조석으로 바람이 시원합니다. 벌써 여러 날 사용하지 않고 있는 선풍기를 닦아 창고에 들여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공원의 키 큰 나무 밑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이 쓸쓸해 보입니다. 짙은 초록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마치 햇살을 머금은 듯 조금씩 색이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열매들은 단맛이 스며들며 무르익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지인들이 김장배추 모종을 심었다고 알려오네요. 때를 따르며 산다는 게 이런 것일까요? 요즘은 두문불출하며 지내서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춤사위가 몹시 보고 싶습니다.

엊그제 교우 한 분이 알밤을 보내주셨습니다. 작업실 앞에 있는 큰 밤나무에서 떨어진 것을 주웠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 유튜브를 통해 제 설교를 듣고 계셨던 모양인데, 문득 이 밤을 통해 문안인사라도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 설익은 밤을 따서 이빨로 떫은 보늬(*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를 벗겨내고 우둑우둑 밤을 씹어먹던 그 때가 떠올랐습니다. 마을 친구들과 밤나무나 참나무의 상처난 부분을 나뭇가지로 쑤석거리며 턱이 강한 사슴벌레를 찾던 생각도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달콤한 수액을 탐하다가 어린 꼬마들에게 붙잡혀 동족간의 싸움에 내몰렸던 사슴벌레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밤송이를 발로 밟아 껍질을 발기다가 찢어진 고무신 사이를 파고 든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던 기억도 아련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시간 개념에 대해 배웠습니다. 일상적 시간, 시계로 계측할 수 있는 양적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질적 시간, 수직으로 돌입하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한다고 배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결정적 계시의 순간을 이르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에서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광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가 ‘카이로스’의 순간입니다. 

부활 이후 승천을 앞둔 주님께 제자들이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그때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한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1:6, 7) 사람들은 ‘때’의 문제를 자기들의 통제 속에 두고 싶어합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에 때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때를 기다리며 살 뿐입니다. 

뜬금없이 카이로스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신학교 교수님들이 카이로스를 설명하기 위해 때가 되면 누가 흔들지 않아도 후드득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알밤의 이미지를 동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끝날까 궁금해 하십니다. 감염병 학자들도 그 때를 가늠하기 어렵다니 비전문가인 우리가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를 알 수 없다하여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이르셨습니다. 눅진눅진한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밤에 대한 기억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료한 겨울날이면 화롯불 속에 밤을 묻어두었다가 먹곤 했습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터인지라 겨울밤이나 온 식구가 아랫목에 펼쳐둔 이불에 발을 묻고 옛날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면 밤이 타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았지요. 어떤 때는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밤이 튀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밤껍질에 칼집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잘하다가도 한 번 그런 실수를 하고 나면 꼬마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외부 세계에 의해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껍질을 만들곤 합니다. 그 껍질이 두꺼울수록 자아 또한 강해집니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능력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아我‘ 자는 ‘손 수手‘ 자와 ‘창 戈‘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 자아라는 말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과 만나고 나면 우리 마음에 상처가 남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말입니다만 세상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랍스터’는 불사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 하더군요. 랍스터는 거듭 껍질을 벗으면서 새롭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껍질이 너무 두꺼워져 ‘탈피탈각’을 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껍질을 벗는다는 것‘을 신앙적 언어로 말하자면 ‘거듭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은 회개의 열매입니다만, 회개조차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후회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결의와 다짐은 시간과 더불어 퇴색되곤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밴 죄의 버릇은 쉽게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된다’고 했습니다. 필연을 끊어낼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패와 고통, 시련과 무기력, 권태와 허무와 같은 삶의 부정적 계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껍질을 벗기는 기회로 삼기도 하십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언약에서 멀어진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역사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런 논리를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코로나19는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 버린 세계와 한국교회의 실상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확장에 여념이 없었던 개신교회가 얼마나 시민사회의 상식에서 멀어졌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나날입니다. 역사가인 최종원 교수는 “냉정하게 보자면, 우리 개신교회는 아직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점에 있다”(최종원,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비아토르, 2019, p. 97)고 말했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쓰라림과 아픔이 있지만 그것이 은총의 계기일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사회 현실과 유리된 신앙은 종이로 짓는 집처럼 허망합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거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소금’이나 ‘빛’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두렵지만 복된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언해주신 현실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할 수 있다면 으늑한 공간에 모여 두런두런 담소도 나누고, 살아온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우들의 소식을 목말라 합니다. 이 좋은 가을날, 우울이나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넓혀 이웃들을 마음으로 맞아들이십시오. 껄껄 웃으며 주위를 환하게 물들이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9월 1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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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벼릿줄

우리 삶의 벼릿줄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부지런히 일하여라. 어떤 것이 잘 될지, 이것이 잘 될지 저것이 잘 될지, 아니면 둘 다 잘 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전11:4, 6)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또 한 주가 흘렀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이 어두운 터널의 끝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조바심도 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난감한 이야기만 자꾸 우리 귓전을 어지럽힙니다. 증오와 혐오를 선동하는 이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거짓 뉴스를 만들어 유포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사회를 갈등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 웃고 떠들면 속이 좀 풀릴까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안 되는 것 때문에 애달파할 것 없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조금 더 견뎌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태풍 마이삭이 지나갔습니다. 큰 피해를 입지는 않으셨는지요? 공원을 걷다가 꺾이고 찢기고 뽑힌 나무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가슴이 저릿해졌습니다. 물기가 없어 회복력을 상실했기 때문일 겁니다. 수확을 앞둔 과일들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것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만, 모든 상처는 우리에게 아픔입니다.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시편 시인의 고백이 가끔은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아픔과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가장자리에 살면서 중심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 길이 끊긴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환한 빛을 갈망하지만 캄캄한 어둠이 우리 영혼에 드리워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도들이 나누는 온기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온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결국 어둠 너머의 빛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 곁에 벗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고달픈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반얀나무를 아시는지요? 아열대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이 나무는 뿌리가 얕아서 비바람에 견디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가지에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지요. 땅에 닿은 뿌리는 이내 나무줄기가 되어 나무를 받쳐줍니다. 반얀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숲을 이룬 경우도 있다 합니다. 이 나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크게 감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함께 비바람을 견디고, 뭇 생명들을 먹이고 재우고 품어주는 숲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교회에 대한 조롱과 냉소가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부끄럽다고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 믿음은 절망의 상황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하여 지레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설날이 다가오면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몇 말씩 뽑아오셨습니다. 말랑말랑한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먹는 맛이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다음 날 새벽이면 또각또각 떡 써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 가래떡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했던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꾸덕꾸덕하게 마른 떡을 써는 아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저걸 언제 다 써나’ 하는 생각에 암담했던 기억이 납니다. 애써 잠을 다시 청한 것도 어찌 보면 그 지루한 시간을 견딜 힘이 내게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얼마 후 창호문으로 새어든 햇빛에 찔려 잠에서 깨어나 보면 아버지는 어느새 떡을 다 썰어놓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부지런히 몸을 놀리고 계셨습니다. 그 기억은 아득함과 막막함 사이에서 바장일 때마다 나를 지켜주는 등불입니다.

만리장성도 돌 하나를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지 않습니까. 위대한 미술작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수없이 많은 붓질을 통해 형태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속에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 온축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참을성이 부족합니다. 늘 뭔가 새로운 선택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이드거니 어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늘 새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종교조차 소비재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들은 그물을 던지거나(시몬과 안드레), 배에서 그물을 깁고(야고보와 요한) 있었다고 합니다(막1:16-20). 그들은 부르심을 받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부름에 따른 즉각적인 응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1세기 갈릴리 어부들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는 종주국인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갈릴리 호숫가에 당시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도시 티베리아스를 세웠습니다. 물론 그 재원은 다 백성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어부들도 배 혹은 그물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내야했습니다. 세리들은 조황이 좋든 나쁘든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어쩌다 많은 고기가 잡혀도 어부들은 그 고기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헤롯이 외화벌이를 위해 호숫가에 만들어놓은 염장처리 공장에 헐값으로 넘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부들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뒤집히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기 제자들의 이야기를 저는 늘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름 자체보다 부름 받기 전에 그들이 하고 있었던 일에 눈길이 갑니다. 그들은 바늘코로 한 땀 한 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깁는다는 것은 다른 그물눈에 의지하여 새로운 그물눈을 만드는 일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연결’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란 바로 그런 연결 속으로 들어가고, 다른 이들과 연결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서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기쁨과 슬픔의 연대를 이룰 때 우리는 힘겨운 시간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의 중심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지루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삶이란 어쩌면 그런 지루함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지루함을 무턱대고 견디고 있던 이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지향과 뜻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물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은 벼릿줄(a head rope)입니다. 벼릿줄은 그물을 오므리거나 펼 때 쓰는 로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물이 아무리 커도 벼릿줄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우리 인생의 벼릿줄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저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요8:14)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사무치게 좋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을 수 없습니다. 뜻을 아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백로 절기가 시작됩니다.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시원합니다. 그 바람 앞에 서서 여름 내 우리를 사로잡았던 울울함을 떨쳐버리면 좋겠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창조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진부하고 무질서한 삶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삶으로 옮겨가야 할 때입니다. 좋은 날이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십시오. 삶은 순례입니다. 순례자는 장소와 장소 사이를 그냥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참회와 치유의 시간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순례길의 동반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끔 바람결에라도 사는 이야기 들려주십시오. 믿음 안에서 걸어가는 나날이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순례 여정이 되기를 빕니다. 새로운 태풍 하이선이 다가오고 있다지요? 잘 대비하셔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힘든 때일수록 ‘미소 명상’ 잊지 마십시오. 얼굴이 웃으면 마음도 따라 웃는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0년 9월 5일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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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 했다. 사로잡힘은 주체적으로 조장할 수도 없고 물리칠 수도 없다.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사로잡힘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느닷없고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에게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다.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일심으로 달리긴 했다. 돌아보면 갈짓자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가섰다 싶은 순간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 다가오는 길,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진 그 길이 참 힘겹다.

 

한국교회가 위기다.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위기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근본적 위기이다. 교세가 확장되고, 대형교회도 많이 등장했지만 복음은 후퇴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경계했던 ‘다른 복음’이 슬그머니 틈입하여 주인 노릇하고 있다. 십자가는 자동차 룸미러에 매달려 대롱거릴 뿐, 많은 이들이 십자가라는 스캔들과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의 루틴을 깨뜨리는 메시지는 수취인 불명이 되어 허공을 맴돈다. 은혜스러운 찬양의 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예수의 벗들의 신음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도 외롭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가인은 도시 건설자가 되었다 한다. 에덴의 동쪽이 가리키는 것은 ‘불안’, ‘안식 없음’, ‘뿌리 뽑힘’이다.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그 폭력의 흐름은 아직도 잦아들지 않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얼굴마다 오랜 피곤이 똬리 틀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졌던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 번째 질문,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책망이다.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났구나.” 아담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 앞이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천진함을 잃어버린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로 숨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후 사람은 그 마음에 깃든 불안을 달래기 위해 어떤 대상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불안의 대용물 말이다. 누군가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허구렁이 있다고 말했다.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려니 삶은 힘겹고 마음의 공허는 깊어간다.

 

두 번째 질문,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이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닐 것이다. 가인은 불퉁거린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하나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아무리 무심해도 그 눌함訥喊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웃을 지키는 자로 만드셨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인간다운 삶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책임이라는 말이 너무 강박적으로 들려서일까? 성경은 ‘책임’을 ‘사랑’으로 바꾸곤 한다.

 

성경 인물 가운데 노아는 순종의 챔피언이다. 그는 폭력과 부패함이 가득찬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신 하나님도 노아만 보면 흐뭇해 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했다.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들고, 짐승들을 이끌어 들이라 하면 그렇게 했고, 들어가라 하면 들어갔다. 마침내 홍수가 끝났음을 알았을 때도 그는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일까? 물론 아브라함도 순종의 사람이다. 떠나라 하면 떠났고, 바치라 하면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있고 노아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책임성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인 동시에, 그를 위해 스스로를 위기에 내던지기도 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정했고,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기 위해 길을 떠난 하나님 일행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순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바로 책임의 윤리이다. 민족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독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 편에 섰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섰다. 그 때 기독교는 젊었다. 야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늙어버렸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벗들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위선적인 종교인과 지도자들을 향해 ‘화가 있을진저!’라고 일갈하던 예수의 얼굴에는 베일을 덮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만 바라봐 달라고 말할 뿐이다.

 

야훼는 제국의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세계에 던져진 혁명의 깃발이었다. 하나님은 힘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을 지푸라기 강아지로 여기셨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초월적 비전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화려하고 늠름한 이들만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꿈 자체가 불온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의 제국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희소성’의 신화를 가지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한다. 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한다. 적당한 경쟁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희소성의 신화에 갇힌 이들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무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루저가 되고 승리한 이들은 득의만면이다. 예수의 세계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불편을 감수하지만, 희소성의 세계는 한 마리 양을 위해 모든 양을 희생시킨다. 욕망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망각이 깊어지면 주체의 몰각이 찾아온다. 거라사 광인을 사로잡고 있던 레기온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떼는 비탈길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다.

 

기독교는 이런 세계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동안 번영의 복음과 죄 경영(sin-management)을 통해 몸집을 불리느라 바빠, 자본주의의 신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왜곡된 정신을 타격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정방향으로 되돌리고, 세속적 가치 질서의 우상적 작동을 막아야 할 교회가 세상에 투항해버리고 만 것이다. 예수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광야 공동체는 애굽과 바로 체제에 대한 대안이었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일은 창조적 노동이 아니라 고역이다. 고역으로서의 노동은 비인간화를 가속화시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들에게 제시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을 일컫는 말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세상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출애굽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은 그 위대한 문명이 사실은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피를 통해 형성된 것임을 가리킨다. 야훼 신앙은 이처럼 당파적이다. 하지만 그 것은 보편을 지향하는 당파성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살 떨리게 경험하는 학교였다. 만나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을 때 주어졌다. 만나는 제대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받아먹는 것이고, 필요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눔으로 그들은 한 식구가 되었고,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서로 함께’라는 뜻의 ‘com’과 ‘선물’이라는 뜻의 ‘munus’가 결합된 단어이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때 든든히 서 간다. 초대교회의 애찬은 바로 이런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신앙 공동체는 또한 하나님의 파토스를 함께 느끼는 이들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할 때 우리는 예수님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약자들 속에 숨겨 놓으셨다. 그들 앞에 멈춰서고,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고, 그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때 생의 비애는 줄어들고 내적 자유의 공간은 늘어난다. 신앙 공동체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적 세계의 민중적 현실에 연루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남은 목회 여정의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별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색하게나마 대답한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삶을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축제로 경험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동화시키려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여 하나님 마음이라는 중심을 향해 순례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하지만 즐거운 탈주이다.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중세의 격언이 떠오른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안내인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출구인 동시에 입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통해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는 일, 그것 말고 목회의 다른 목표를 나는 알지 못한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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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오늘도 여전히 길인가?

김기석의 톺아보기(35)


예수는 오늘도 여전히 길인가?

- 앨버트 놀런 《오늘의 예수》-


“예수의 하나됨 체험은 하느님 아빠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느님은 아빠이시고 공중의 새, 들에 핀 나리꽃,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돌보시는 창조주시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자연과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예수는 자연과 자신과 하느님의 완전한 조화 속에 살았다.”(210쪽)


“예수가 바란 것과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 사이에 충돌이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참자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근원적 자유는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자유이며,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기꺼이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33쪽)


193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서 태어난 앨버트 놀런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 한 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신학자이다. 그 책을 통해 놀런은 예수가 펼친 선교 사역의 정치적 맥락을 강조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물이 많이 소개되지 않던 80년 대 초 그의 책은 신학도들에게 큰 충격과 도전을 주었다. 《세속 도시》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그 책을 가리켜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짧지만 가장 적확하고 균형 잡힌 서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앨버트 놀런은 자족적인 강단 신학자가 아니다.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따라 말하고 실천하는 영성가이기도 했다. 때로는 예언자적 음성으로 그 시대를 질타하고,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그 결과 그는 2003년에 민주주의․인권․정의를 위한 투쟁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던 종교 도그마에 대해 도전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남아공 정부로부터 루틀리 훈장(Order of Lutuli)을 받았다. 이 훈장은 남아공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의장이었던 앨버트 루틀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남아공의 민주화운동 하면 우리는 넬슨 만델라나 데스몬드 투투를 주로 떠올리지만 앨버트 놀런도 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를 출간한지 30년 후에 내놓은 《오늘의 예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를 천착한 후 그 예수의 길을 따라 살아온 한 노신학자가 내놓은 신앙적․신학적 고백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 거대 담론의 퇴조


앨버트 놀런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징표를 살피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라야 우리에게 만 건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 놀런은 먼저 거대 담론의 퇴조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근대화와 인류의 진보라는 이상에 감동하지 않는다. 이상에 대한 열정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불안이다. 전쟁, 살인, 학대, 구조적 폭력, 테러, 환경 파괴, 지진과 쓰나미의 공포가 사람들의 의식을 옭죄고 있다. 사회이론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세계의 특징을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로 요약했다. 국민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통합과 안전을 꾀하던 ‘견고한’ 근대는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생존과 안전에만 매달리게 된다.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 언제든 쓰레기처럼 폐기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 되었다는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산되고, 삶의 자리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단 쓰레기로 분류되면 다시는 재활용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공포에 사람들은 가위 눌리고 있다.


과거에는 자기 나름의 문화적 전통과 관습, 그리고 종교에 기대 이런 불확실성과 공포를 타개해나갔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은 후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은 해체되었고, 종교조차 구체적 삶에서 유리되면서 사람들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술과 약물에 의존하거나 재물과 소유를 통해 불안을 극복하려 한다. 어떤 이들은 의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를 제공하는 권위 아래 즐겨 복종한다. 이것이 근본주의가 득세하는 소이연이다. 어떤 이들은 영성에 탐닉한다.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 받거나,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 뭔가 큰 힘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풍경이다. 앨버트 놀런은 서구의 자기도취적 개인주의가 빚어내는 폐해와 지구적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는 빈부 격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에 특히 주목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의 조건들이 빚어낸 변종으로서의 에고 숭배에 주목한다.


그러나 절망의 조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로부터 분리된 영성의 추구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고, 미국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세계화가 세상을 약육강식의 벌판으로 만들었지만 공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반전 평화운동, 모든 희생자를 향한 연민의 세계화 말이다. 오랜 동안의 해방 투쟁의 결과로 “현실에 엄존하는 새로운 목소리, 즉 여성, 흑인, 원주민, 노동자, 소작농, 빈자,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어린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48쪽)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앨버트 놀런은 기계가 아니라 신비로서의 우주를 말하는 신과학의 등장을 반기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계론적 세계관이 쇠퇴하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다.


희망의 조짐과 절망의 조짐이 공존하고 있는 이 시대, 불확실성과 공포의 세계화가 연민의 세계화가 더불어 길항하고 있는 이 시대를 넘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데 예수는 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앨버트 놀런은 예수의 생애나 가르침보다는 그의 영성에 관심을 집중한다. 물론 이 둘을 칼로 베듯 가를 수는 없다.


• 예수의 영성


유다의 소농이었던 예수의 영성은 히브리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당대의 유대교나 시대정신과는 어느 정도 대척점에 서 있었다. 기존 질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불온한 사람이다. 관습적 신앙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의 이면에 있는 지배의 욕망과 탐욕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쫓겨난 이들, 갈릴래아의 비천한 이들에게서 솟아나오는 것”이다.(78쪽) 그런 열망에서 비롯된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는 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인류이다. 예수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승리자가 아니라 희생자가 되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갈릴리 소작농의 눈으로 시대의 징표를 읽었던 예수는 예언자의 전통 위에 서서 당시 사회와 종교 권력 체제의 관습에 대담하게 도전했지만, 그런 활동을 뒷받침한 것은 끊임없는 기도와 관상이었다. 관상을 통해 그는 자기의 에고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었고, 하나님과의 신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었다. 앨버트 놀런은 이것을 예수의 ‘아빠 체험’이라 요약하면서 바로 그것이 “예수의 지혜와 명료함과 확신과 근원적 자유의 원천”(95쪽)이라고 말한다. 예수에게 있어 정의와 기도, 예언과 신비는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이다. 도로테 죌레도 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죌레는 우리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려면 하느님 현존의 신비를 전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혁명 곧 저항을 내포한 신비주의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저항이 없는 신비주의는 자기 탐닉의 길로 인도하고, 신비 체험이 없는 저항은 메마른 경직성으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앨버트 놀런은 예수가 치유자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예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죄와 허물을 보기보다는 “상처와 낙심, 아픔, 혼란, 두려움을 보았다”(104). 그들은 길을 잃은 자들이었지 도덕적으로 단죄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기득권자들의 위선과 독선을 나무라셨지만 그들을 인격체로서 사랑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예수는 그가 이방인이라 해서 또는 로마인이라 해서 백안시하지 않았다. 그들도 치유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예수의 치유 사역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은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멀기만 한 변화의 길


예수의 영성에 대한 천착이 결국 수렴되어야 할 곳은 우리 인격과 삶의 변화이다. 저자는 ‘제3부’인 ‘인격의 변혁’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앨버트 놀런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영성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큰 장애는 ‘분주함’이라고 말한다. 강박관념처럼 우리를 몰아붙이는 분주함은 삶의 실상과 대면하지 못하도록 한다. 저자는 예수를 따라 침묵과 고독의 장소로 가보자고 제안한다. 성찰과 기도를 통해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스며들 때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교류에서 얻는 통찰도 비로소 창조적인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3부인데, 예수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든지, 그러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지, 삶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라든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이감을 회복해야 한다든지, 집착을 여의고 하나님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리라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저자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이야기를 왜 오랜만에 내놓는 책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느닷없이 깨달음이 장군죽비처럼 내 의식을 강타했다. 우리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예수적 삶에 대한 이런 요약은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진부해 보이는 가르침일망정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함과 개방성이다. 수도회에 들어간 지 50년이 넘어 예수라는 존재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거의 마무리해야 할 노사제가 내놓는 결론을 ‘아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이 아닐까?


• 하나됨을 향한 여정


마지막 장인 ‘제4부’의 핵심어는 ‘하나됨’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찢기고 갈라진 세상에서 공존과 소통을 넘어 하나됨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견 공허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저자가 일치, 화해, 조화, 평화, 사랑이라는 말 대신 하나됨oneness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치나 조화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화해는 갈라진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에 “하나됨은 우리가 이미 하나였고 언제나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172쪽)하기 때문에, 단순히 그 하나됨을 의식하거나 깨닫기만 하면 문제가 풀리게 된다.


앨버트 놀런은 ‘하느님과 하나됨’, ‘우리 자신과 하나됨’, ‘다른 사람들과 하나됨’, ‘우주와 하나됨’을 순차적으로 짚어간다. 하느님과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아빠 체험’이 보여주듯 하느님의 신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발견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자신의 약점과 한계와 부끄러움을 받아들여 자기 인격 안에 통합시킬 때 우리는 에고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참 자기와 접촉한 사람에게 남은 없다. 생명의 상호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더 이상 사람들을 대상물로 다루지 않는다. 타인과의 동일시, 공감과 환대, 그리고 나눔은 그런 하나됨을 경험한 이들의 삶이 맺는 열매이다. 마침내 이런 일치가 당도하는 곳은 우주와의 하나됨이다. 삼라만상 속에 깃든 창조적 생명에 눈을 뜬 사람은 온 세상이 한 몸임을 자각한다. 그들에게 삶은 경이로움 자체이다. 오늘의 과학은 종교의 경쟁자가 아니다. 앨버트 놀런은 “과학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다루면서, 더 위대한 경이와 외경과 이해를 위한 창문을 열어 준다”(214쪽)고 말한다.


이러한 다층적인 하나됨 체험은 고립된 에고의 횡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 성공에 대한 미련, 주위의 평판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모두가 다 하나됨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시간 여행자로 살아가는 인생의 근본 속성은 ‘불안’이다. 사람들은 그 밑도 끝도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용물을 만든다. 그런데 그 대용물을 얻을 힘이 부족할 경우, 자기에게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제도와 자기를 합일화하곤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체주의나 근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유의 길은 홀로는 걸을 수 없는 길이다. 다른 이들의 체험으로부터 배우고 지지를 받을 때 자유에의 감수성도 자란다.


그런데 자유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자유는 더 위대한 어떤 것,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는 자명한 듯하면서도 모호하다. 그렇기에 오용되기 쉽다. 앨버트 놀런은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공동선’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놀라운 제안이다. 자칫 잘못하면 공동선이라는 용어도 오용될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억압적인 정부 혹은 기업이 개인의 권리를 짓밟거나 묵살하기 위해 ‘공공의 이익’ 운운하는 일을 너무나 자주 봐왔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마치 모든 사람을 위한 선인 양 제시되는 것이다. 저자가 어찌 보면 이미 낡아버린 그 단어를 꺼내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옮기는 데 이보다 더 나은 용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공동선을 “온 인류 가족이나 전체 생명 공동체, 광활하게 펼쳐진 전체 우주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232쪽)고 정의한다. 오늘의 예수는 바로 이 지점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예수가 걸어간 길은,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한 예술 작업에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창조적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로, 근원적 자유로 이끌어 주는 길이다.”(236쪽)


앨버트 놀런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뿐 하나님의 일은 매우 서서히 드러난다면서 미래는 안전하다고 말한다.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 도저한 낙관론에 쉽게 공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사제의 낙관론에 잠시나마 기대 쉬고 싶은 마음이다. 예수, 그는 여전히 우리의 길이고 구원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구체적인 삶으로만 할 수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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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과 맨 얼굴

김기석의 톺아보기(31)


가면과 맨 얼굴


●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


“난 점점 기독교가 싫어져요.”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하더라.”


“그래서 행복하세요?”


“뭐야? 내가 왜 행복해?”


“기독교인들의 뜻대로 되었으니 말이에요.”


“얘가 노골적으로 비꼬네. 트럼프를 당선시킨 그 세력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려니와, 기독교인들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과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승리주의와 편협한 도덕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참 유감스러워요.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타겟으로 삼아 동성간의 결혼과 낙태에 반대한다는 도덕주의적 캠페인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렇다더라. 문제는 그들의 도덕주의가 다른 인종, 다른 이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포용할 여백이 없다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보면 그들은 매우 선량한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진실에 충실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역사를 꿰뚫어보는 비전이 없어. 그건 좀 잔인한 말일수도 있지만 죄야. 무지함이야말로 악이 기생하는 텃밭이기 때문이야. 바로 보지 못하면 언제나 악하고 영리한 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마련이야.”


“가장 눈을 크고 뜨고 있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안목이 협소해지고, 생각이 천박해졌지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일 거야.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뭔가를 지키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거든. 부자들이 보수적인 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싶어.”


“언젠가 교회가 단순한 평안을 받아들이자마자 이내 권력에 의해 부패된다고 하셨지요?”


“그건 내 말이 아니라 쟈크 엘룰의 말이야. 콘스탄틴 이후의 교회의 범죄는 정치권력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정당화 과정을 통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힘 있는 사람들 편을 들면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편드는 하나님을 배반하기 시작한 거지.”


“하나님이 편을 든다는 말씀이 좀 낯설게 들리는데요.”


“낯설 것 없어.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이 더 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한 공동체 속에서 소외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야. 고아, 과부, 나그네…. 예수님은 심지어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 이야기를 하시잖아. 그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야.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기독교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보수적인 어느 신문의 논객이 일어나 ‘애국 기독교계’가 다 들고일어나 이 좌파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하겠니. 나는 아주 모멸감을 느꼈어. ‘아, 우리가 여기까지 전락했나’ 하는 생각에 아득해지더라.”





●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에 한 말도 생각나네요. ‘미국 대통령이 하겠다고 일단 말을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 낫다.’ 저는 당시의 그 기사를 보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 떠올랐어요. 바다에서 나오는데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 개나 된다는 짐승 말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 구절이지요?”


“13장일 거야. 한번 찾아서 읽어보렴.


“아, 여기 있네요.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치 아닌가요?”


“그래도 조심해라. 어떤 사람을 곧바로 묵시록에 나오는 이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단다.”


“미국이 반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오폭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무고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들도 다 살고 싶은 생명인데 말이에요. 그 속에서 다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그들은 마음에 새겨진 지옥의 풍경을 평생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야 하겠지요? 어쩌면 그것은 죽음보다도 잔인한 일일 거예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게 아도르노이지요? 정말 세상에 희망은 있나요? 우리는 남산에서 만난 단풍의 고움을 마음껏 노래해도 되는 건가요? 테러를 물리치기 위한 방법이 꼭 폭력이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묻는구나. 그게 질문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이야. 최근에 저 아픔의 땅 시리아에서 사린 가스로 보이는 화학무기가 살포돼 아이들 20명을 포함해 7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어. 특히 볼이 불그레한 예쁜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어.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야. 꾀꼬리가 하나님께 가서 불평을 했다더라. 개구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대. ‘가서 노래를 계속하려므나.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시끄럽잖니.’ 맞아. 그런 거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불러야 할 아름다움의 노래를 포기해서는 안 돼.”


“……”


● 맨 얼굴을 보는 용기


“세상이 가장 어두운 것은 꿈이 사라지는 때일 거야. 정현종 선생의 <요격시 2>가 떠오르는구나. 내가 몇 차례 읽어준 적이 있는 데 기억날 거야.”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떨어지면서 새가 되어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크게 뉘우쳐 자폭했습니다.

재규어 미사일은 떨어지는 순간 꽃이 되었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비둘기가 되었습니다.

지이랄 미사일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도라이 미사일은 사막에 떨어지면서 선인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악마 미사일은 어떤 집 창앞에 떨어지면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디스페어 미사일은 어떤 집 부엌으로 굴러들어가 숟가락이 되었습니다.

플레이보이 미사일은 어떤 아가씨 방으로 숨어들어가 에로스가 되었습니다.

머어니 미사일은 어느 가난한 집 안방에 들어가 금이 되었습니다.

우라누스 미사일은 땅에 꽂히는 순간 호미가 되었습니다.

제구덩이 미사일은 저를 만든 공장으로 날아가 그 공장을 날려버렸습니다.

머커리 미사일은 아주 작아져 어떤 아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속삭였습니다: 이걸로 엿이나 바꿔 먹어.

……

우리는 저 시체들의 폐허 위에서 부르짖습니다

(UN의 힘을 훨씬 더 강화하면서)

UN은 무기 개발을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중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


“정말 발사된 미사일을 새와 나비와 비둘기와 물고기로 변하게 하는 시스템이 개발되면 좋겠네요.”


“허황한 꿈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꿈을 끝끝내 버리지 않아야 그런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결국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이겠구. 문제는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거야.”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오작동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지 않나요? 미움과 불신과 멸시를 생산하고 또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 말이에요.”


“그 시스템이 붕괴된 까닭은 뭘까?”


“욕심 때문이겠지요.”


“욕심?”


“예, 더 가질 욕심, 더 지배하려는 욕심 말이에요.”


“그렇겠구나. 한 번만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면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텐데. 굶주린 아이들의 슬픈 눈망울, 공포에 질린 여인들의 퀭한 눈망울, 몸이 찢기고 잘린 사람들의 이지러진 눈망울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그리고 그 눈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의 인내력만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 난장판이 되지는 않을 텐데….”


“사실 우리는 그런 얼굴과 마주칠 기회조차 박탈당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분들과 맞닥뜨리게 되면 저도 그 눈길을 피할 것만 같아요.”


“왜?


“그 눈은 뭔가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에 색칠을 하나봐. 그들을 비인간화시킴으로 자기들의 지배 욕망을 정당화하는 거지. 피에로는 슬픈 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웃거든. 누군가의 맨 얼굴을 대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화장기 없는 얼굴을 말하는 거 아니지요? 그래요,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도 무거운데 남의 고통과 슬픔과 대면한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인 것 같아요.”


“예수님은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기 눈에서 먼저 티끌을 빼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언제부터인가 우리 이웃들의 남모를 고통에 눈길을 주고 그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어.”


“그게 잘 안 돼요.”



● 가면 쓰기, 가면 씌우기


“자기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고 욕하고 없애려는 이들은 그들에게 어떤 가면을 씌우는 것 같아.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원수이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다’, ‘그들은 사탄이다.’ 이렇게 가면을 씌움으로써 그들은 맨 얼굴을 대하는 고통 없이 그들을 파괴하는 거지. 그런데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을 철저히 타자화시키고 물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얻는 것은 세상의 평화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야. 강자의 이익일 뿐이지.”


“그들은 자기 스스로도 가면을 쓰는 것 아닌가요? '나는 의롭다'는 가면 말이에요?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도록 해주는 보호막으로서의 가면 말이에요.”


“맞아. 그런데 가면 쓰기를 전략으로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략에 부화뇌동하면서 가면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 가운데 <예언자>라는 중편이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가면놀이를 여왕봉이라는 술집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해서 보여주고 있어. 이야기는 여왕봉이라는 살롱에 새로운 마담이 오면서부터 시작되는 데, 마담은 이상한 술집 규칙을 강요하지. 밤 10시가 되면 손님들과 여급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일제히 가면을 써야 한다는 거야.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단골손님들도 어느덧 그 규칙에 익숙해지지. 가면을 쓴 사람들은 맨 얼굴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스스럼없이 해. 그건 손님들이나 여급들이나 마찬가지야. 가면은 인격이 없으니까. 손님들은 일단 가면을 벗으면 가면을 쓰고 했던 행동과 무관한 사람처럼 행동했지. 작가는 이렇게 말해. ‘가면이란 이를테면 우리들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발산을 규범화시켜 주는 풍속적 방편이지요. 그 서양의 가면 무도회라든가 우리 나라의 탈춤처럼…. 가면은 어떤 추악스런 본능적 욕구의 발산도 그것을 덮어씀으로 하여 하나의 당당한 풍속으로 용납받을 수 있습니다. 음흉스런 지혜지요.’ 기가 막힌 통찰 아니니? 가면은 결국 현실을 ‘허위’의 놀이로 바꾸는 기제인 셈이야. 손님들은 그 가면놀이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홍 마담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다는 걸 짐작조차 못하고. 철저한 타자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마담은 손님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한 도붓장수 개 후리듯 그들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거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렇게 가면이 씌워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정치인들이 대표적이지.”


“그들은 가면을 씌우는 사람들 아닌가요?”


“씌우는 사람인 동시에 씌워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거야. 그들은 자기들이 쓴 가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면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필요에 따라 그 가면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그 가면을 자기 얼굴인 줄 알고 사는 거야. 철저한 자기 소외가 일어나는 거지.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하고 모멸감을 안겨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자기들의 위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말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진실을 드러내기는커녕 진실을 은폐 혹은 호도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우가 많아.”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들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요. 그들은 절망과 환멸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들을 정치인이 아닌 맨 얼굴의 이웃으로 만나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글쎄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전칭명제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동시에 정신적 폭력이야. 감정적으로는 나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나의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가끔 실수도 하고, 오버도 하면서 사는 거지요.“


● 다지면서 가야 할 길


“물론 그래. 하지만 타인이 숨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돼. 그의 가면 속에는 분명 말랑말랑한 맨 얼굴이 있지 않겠니? 게다가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의 실체를 온전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거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야.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되는 걸 거야.”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폭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아주 많겠네요?”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성스러움과 폭력은 이웃사촌이야. 예수님은 그런 인과 관계를 끊는 길을 보여주신 거고.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죽음은 철저히 무고한 자의 죽음이고, 가공할 폭력의 사슬을 사랑과 관용으로 녹여버림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일전에 내가 이야기했지?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을 보면서 내 내면에 들려왔던 소리 말이야.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누가복음 19:42). 용서와 사랑과 포용, 그리고 나눔이 아니고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이 없어.”


“옳은 말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건 너무 더딘 길 아닌가요?”


“더디더라도 다지면서 가야 쉽게 깨지지 않지.”


“여하튼 미사일을 새와 나비, 비둘기와 물고기로 바꾸는 시스템이 빨리 가동되면 좋겠어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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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깊이란 무엇일까

김기석의 톺아보기(30)


영성의 깊이란 무엇일까


● 반환점을 돌고 나서


“이렇게 민박집에 머물고, 버너와 코펠로 밥을 해먹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 동안 너무 여백 없이 살았지?”


“그래, 벽에 가득한 낙서를 보니까 우리 신학교 때 입석으로 퇴수회를 갔을 때가 생각나네. 생각나? 누군가가 베니어판 벽면에 매직으로 써놓았던 낙서. ‘신은 죽었다’―니체. 누군가가 그 밑에 이렇게 써놓았지? ‘니체는 죽었다’―신. 그땐 그래도 그게 꽤 신선하게 읽혀졌었는데.”


“저기 저 낙서 좀 봐. ‘A man without a pot belly is a man without an appetite for life ―Salman Rushdi, 『The Moor's Last Sigh』. 누가 써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체형은 짐작할 수 있겠는데. 올챙이배를 한 중년의 사람일 거야 아마. 이런 구절을 외우고 있는 걸 보면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변화된 자기 체형을 삶에 대한 욕구로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일 거야.”


“그래도 그런 포장의 욕구라도 있으니 다행인가?”


“왜 이젠 뭐든 시들한가보지?”


“반환점을 돈지 벌써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내 인생이 오리무중이구나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리 신학교 시절은 나름대로 치열했지?”


“그렇지. 시대적 소명으로서의 정의, 그리고 실존적 진실과 허무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는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했지.”


“그런데 벌써 ‘몸’을 의식하게 되는 나이가 되어서, 젊은 날 우리를 달뜨게 했던 질문들은 사라지고, 또 다른 문제들에 치여 살고….”


“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붙들기보다는 비본래적인 문제들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고….”


“그래도 그 때는 ‘타자’의 세계가 압도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의 문제를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는데.”


“그래, ‘나’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삼십 대 중반쯤에 정현종 선생의 번역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처음 읽었는데, 그 중에 <소나타와 파괴들>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와.


달이 사는 내 황폐한 침실 속에서,

내 식구인 거미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괴들 속에서,

나는 내 잃어버린 자아를 사랑하고, 내 흠 있는 성격,

내 능변의 상처, 그리고 내 영원한 상실을 사랑한다.


―<소나타와 파괴들> 중에서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일종의 정신적 근친성을 느꼈던 것 같아. 나중에 네루다가 이 시를 쓴 게 19세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지. 여하튼 파괴를 좋아하고, 능변이 상처가 되고, 흠 있는 성격도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의 쓸쓸함과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지지 않니?”


“조숙한 천재구만? 남을 기죽이는….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물가로 나가자.”


●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


“네가 전짓불을 그렇게 켰다 껐다 하니까 이청준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혹시 들어봤니? <전짓불 앞의 방백>이라고?”


“아니, 못 들어 봤는데.”


“낮과 밤으로 좌와 우가 뒤바뀌던 뒤숭숭한 세월이 배경인데, 그게 이청준 선생의 개인적 체험인지 창작인지는 모르겠어. 지리산 자락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야. 주민들에게는 생존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던지라, 낮에는 경찰들 편이 되고 밤에는 빨치산 편이 될 수밖에 없었어. 어느 날 밤 누군가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전짓불을 눈앞에 들이대고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거야. 미칠 노릇이지. 불빛 뒤의 상대방이 어느 편인지를 알면 대답은 간단해. 상대방을 기준으로 해서 안전한 대답을 선택하면 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전짓불을 비추고 있는 이가 어느 편인지를 알 수 없다는 거야. 어쩌면 이 물음이야말로 소설가로서의 이청준이 직면할 수밖에 없던 본질적인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길은 다만 한 가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근거로 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제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인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선 자기 진실에 기대어 그것을 지키는 것뿐, 위험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밖에는 자신을 버티고 설자리가 마련될 수 없으리라는 참담한 이야기다.


진실 밖에는 버티고 설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는 절박함과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이 없이는 진정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거지. 이것이 이청준의 문학이 지금까지도 진부해지지 않는 비결이 아닌가 싶어. 아니, 비결이란 말은 적절치 않겠다. 그건 방법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여튼 나는 이 대목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나의 상황으로 환치시켜놓고 생각해보곤 하는데, 과연 내가 진실이라는 위험한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어.”


“그건 자신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지. 맥락도 다르고, 경중도 다르지만 목회 현장에서도 그와 비슷한 선택 앞에 서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아. 예를 들어 교인 A와 교인 B는 아주 앙숙이야. 서로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트집 잡고 말을 만들지. 그런데 그들은 매우 충성스럽고 헌신적이야.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인 거지. 문제는 그들의 충성 경쟁에서 비롯된 갈등이 다른 교인들에게도 파급된다는 데 있어. 목회자는 그 둘 사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겠지. 그러나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가 있어. 그러면 마침내 ‘진실’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


“어떻게?”


“흑백을 가르듯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일일 것이고, 다만 내가 겪어왔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거지.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 그러면 그분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틀을 깨고 제3자를 의식하게 돼.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꾸짖거나 외면하기는 쉬워도 실상을 있는 그대로 되비춰준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결국 그런 진실의 드러냄이 또 다른 상처나 오해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오랜 인내와 수고와 사랑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겠지?”


“간혹 그렇게 교회에 부담을 안겨주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날 때도 있지만, 또 생각해보면 저마다 다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분들이 갈등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약함을 드러내면 공동체는 그런 갈등을 봉합하려고 서두르기보다는 그 상처를 자기 것으로 품고 함께 치유해가야 하겠지. 그게 어쩌면 교회의 치유적 책임이 아닐까?”


“갈등은 다소 혼란스럽게 보이더라도 잠복하는 것보다는 표출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잠14:4)고 하잖아. 교인들은 그렇다 쳐도 목회자들은 언제 그 영혼이 건강해지고 성숙해질까.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거나 자기의 성격적 특색을 드러낼 기회도 별로 없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이야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자꾸 질정을 받아야 나중에 허물을 면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한 것 같아서 말이야.”




● 반성적 성찰의 허실


“스스로 깨어 있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겠지.”


“안톤 체홉의 소설 <공포>에 나오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라고 말해. 그의 공포를 알 것도 같아.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 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자기를 지탱해주는 것, 즉 자기 동일성을 담보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이 고백은 매우 심오한 거야. 그걸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하는 생이나 주어진 생에 대해서 자꾸만 의문부호를 붙여보아야 하는데, 그게 힘겨우니까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반성적 성찰을 포기하고 익숙한 것에 입각해 살게 되지.”


“나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게 무책임한 공론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의지의 변화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 다시 말하면 의지의 변화 없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것은 기껏 해야 자기만족이나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어느 날, 그 날은 새벽기도가 없던 날인데 새벽 일찍 깨어나게 되었어. 다시 잠이 올 것 같진 않고 해서 잠시 망설였지. ‘텔레비전을 켤까, 신문을 볼까?’ 그러다가 문득 내게는 그런 생각들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루의 첫 시간을 세속의 분잡으로 덧칠함으로써 명상적 고요를 망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쳐서, 아주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날 내 마음에 들려온 소리가 바로 의지의 변화가 없는 지성적인 깨달음이나 감성적인 뜨거움은 우리를 허위의식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었어.”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일 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


“진실하려고 애는 쓰고 있지 않나?”


●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


“가끔 나는 ‘내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 때로는 진실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책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와.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절절한 아픔을 겪어본 이가 쏟아내는 이런 소리야말로 참 소리가 아닐까? 그렇게 보면 우리는 어쩌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일 거야.”


“권정생 선생의 글이지?”


“응.”


“……”


“거기에 비하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너무나 창백해 보여. 논리적이긴 하지만 진실의 향기는 맡을 수 없어. 며칠 전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왔던 서울대학교의 어느 교수가 생각나네. 그는 정치권의 과거청산론에는 불순한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특정인을 법률에 의해 죄인으로 몰면 그 시대에 일제에 부역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역사의 원죄로부터 면죄시키는 효과를 발생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앞장서는 인위적인 과거 청산은 해서는 안 된대. 그는 심지어 정신대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다는 식으로 말해서 참석자들을 분노하게 했는데, 자기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빈정거리기까지 했어. 정신대 문제의 해결도 위안소를 이용했던 사람들의 자발적인 고백과 성찰이 우선되어야 한 대. 그가 말끝마다 후렴처럼 사용한 어구가 ‘반성적 성찰’인데, 과연 그가 말하는 성찰이란 뭘까? 그가 말하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말에서 나는 지적인 오만함 이외에는 느낄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면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겠다야.”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화나는 것은 다른 게 아니야. 그가 정신대 할머니들을 비롯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부모 세대들이 겪은 아픔, 고통, 한을 ‘성찰’이라는 단어 속에 우격다짐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고통을 타자화하고 추상화하고, 그로써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 한다는 점이지.”


“내가 의지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게 그 때문이야. 혈기(血氣)에 든 병은 의사나 약을 찾아 고칠 수 있지만, 지기(志氣)에 든 병은 자각(自覺)하고 자수(自修)하여 내심(內心)으로 고칠 수 있대.”


“누가 한 말이야?”


“율곡 이이 선생이 생질인 홍석윤에게 한 이야기 중에 나와. 학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안다’ 하는 것이 병이지. 자기 논리의 폐쇄회로 속에 갇혀 다른 이들의 눈물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절반의 진실 밖에는 볼 수 없는 거겠지.”


“맞아. 사실 우리는 혈기에 든 병은 심각하게 생각하면서도 지기에 든 병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지. 학자들만 그런가, 신앙인들도 심각하지. 그 중에서도 영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함석헌 선생님이 그러셨지. ‘꽃이 아무리 피어도 수정이 못 되면 열매를 못 맺듯이 전체의 뜻으로 수정이 못된 마음은 쓸레 마음이다. 젊음은 전체의 위대한 영으로 수정이 돼야 한다.’ 나는 영성의 깊이란 결국 ‘전체와의 관련성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게 같은 말이 아닌가 싶어. 물론 이런 자각 속에는 의지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이라! 바로 그거구나.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 계시고, 그런 하나님의 정념을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며. 그렇다면 진실은 책장에 갇힌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곳, 또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들에게만 깃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결국 다시 출발선일세 그려. 이제 우리의 남은 시간은 인식의 욕구를 채우려고 애쓰기보다는 어떻게든 앎을 삶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땀흘려야 하겠지?”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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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몸, 고마운 몸

김기석의 톺아보기(29)


슬픈 몸, 고마운 몸


● 몸의 말을 들으라


“오랜만이야. 얼굴 잊어버리겠네 이 사람아.”


“죄송해요. 잠 못 이루는 토요일 밤 때문에….”


“뭐야? 그러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토요일을 잘 보내야 한다니까.”


“건강은 좀 어떠세요? 얼굴빛은 좋아지신 것 같은 데요.”


“그래? 좋아져야지. 안 그래도 여러 사람한테 미안한데.”


“일 좀 줄이세요. 그 동안 몸을 너무 학대하셨어요.”


“그랬나? 어쩌면 성실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일을 적당히, 얼렁뚱땅 하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내 이미지에 자승자박 당한 꼴이었던 것 같아. 성실한 건 좋은데 그게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바뀐 게 문제지. 나는 스스로 그런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전에 마음 따라 살지 말고, 몸 따라 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자칫 오해하기 쉬운 말이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럴 듯한 말이에요.”


“요즘은 몸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사는 게 타락한 실존이라는 생각이 들어.”


“몸의 말을 듣는다는 게 어떤 거죠?”


“글쎄,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몸은 항상 소리 없이 말한대. 웬만하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우리 삶이 균형을 잃을 때면 몸이 우리에게 기별을 해주는 거지. 몸이 편치 않고, 피로하고,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라는 몸의 경고라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경고를 경고로 알아듣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몸의 투정을 다 들어주다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병을 키우는 거고.”


“그렇죠. 병은 처음부터 드러나는 게 아니라면서요. 병의 씨앗을 뿌리는 단계, 그 씨앗에 물을 주는 단계, 그러다가 그것이 고착되는 단계, 그것이 병적인 징후로 나타나는 단계, 그 다음에 나타나는 열매가 병이래요.”


“와, 굉장히 유식하네.”


“그게 아니고요,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래요. 모든 병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병이 마음이나 생활의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지요? 문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 데' 하면서도 실제로 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별 일 없을 거야'라는 자기 암시에 매달린다는 거지요.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베드로가 들은 닭울음소리 비슷한 거겠지. 그래, 분명히 앎과 깨달음에는 차이가 있어. 앎이 곧 행동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깨달음이 필요하지. ‘깨닫다’는 말은 ‘깨다’와 ‘닫다’로 이루어진 거래. 믿거나 말거나. 바깥을 향하던 지각의 창을 닫고, 잘못된 자아가 어떤 형태로든 깨뜨려질 때야말로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야. 깨달은 사람은 이전처럼 살 수 없겠지?”


“그렇게 잘 아시면서 몸을 왜 그렇게 방치하셨어요.”


“깨닫지 못해서지 뭐. 어느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이제부터는 ‘나는 바보다’ 하고 살래. 마음을 좀 푼푼하게 쓰며 살라는 말이겠지. 한동안 그분 말씀이 내 귓가를 떠나지 않더라.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습에 대한 중간 심판처럼 들려서 말이야.”


                    일러스트/고은비


● 몸, 의미 전달의 매개체


“성경에도 몸에 대한 가르침이 있나요?”


“물론 있지. 사람들은 기독교가 영혼에 집중하느라 몸을 소홀히 여기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히브리인들의 삶은 금욕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이지.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경전에 담기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이는 용어들이나 구절들이 많아.”


“적절치 않다는 것은 전문용어(?)인데요.”


“그렇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가리켜 ‘간음’이라고 표현하지.”


“그 만큼 신앙적 순결을 강조한 건가요?”


“그럴 거야. 아직 나라가 꼴을 갖추기 전이었으니, 신앙의 문제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와 곧장 연결되었을 테니까.”


“그렇군요.”


“또 구약의 언어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아. 우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삶의 언어가 고스란히 담겨있지. 때로는 이건 좀 너무 외설적이다 싶은 대목도 많아. 어느 교수님 말씀이 <아가서>를 히브리어 표현대로 번역해 놓으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래.”


“그러시니까, 궁금해지네요.”


“사람하곤. 그렇게 궁금하거든 아쉬운 대로 에스겔서 16장이나 23장을 봐. 히브리인 예언자들은 파리한 얼굴을 한 지식인들이 아니야. 붉은 피가 펄펄 끓는 야인들이지. 그들은 과도한 욕망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꾸짖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부정하지 않았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래서 신약보다는 구약에 더 끌린다고 했대요.”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잖아요.”


“물론이지. 종교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니까. 경건 생활을 위한 금욕 혹은 절제는 꼭 필요한 거 아닐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금욕을 위한 금욕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잔치를 더욱 즐기시지 않았어?”


“저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별명이 참 마음에 들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는 어떻고?”


“좋긴 좋은 데, 제가 그 자리까지 가려면 아직도 내공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건 자신 있고?”


“그럼요.”


“그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고, 낙심했던 이들이 살맛을 회복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


“예수님은 참 다정다감하신 분 같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기도만 하지지 않으시거든.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접촉을 시도하시지. 열병 걸린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든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든지, 앞 못 보는 이의 눈에 손을 대고, 말이 어눌한 사람의 혀에 손을 댄다든지….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나도 가끔 병원에서 경험하는 바이지만 어떤 때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께름칙할 때도 있어. 그러니까 환자들을 어루만지는 예수님의 손길이야말로 말없는 기도라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배를 쓸어 내리시며 '엄마 손은 약손' 하시던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거겠지요.”


“맞아. 만짐 혹은 접촉이야말로 친밀함의 모태가 아닌가 싶어. 접촉은 ‘손으로 빚어내는 개념’(manual concept)이래. 손으로 상징되는 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 전달의 매개체인 거지.”


“말보다는 몸짓이 더 큰 의미를 전달할 때도 많은 것 같아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 알지? 하나님의 손끝이 아담의 손끝에 닿을락말락하잖아? 사람들은 그 미세한 지향 혹은 접촉에서 창조행위를 보아내지. 손가락 하나를 통해 천지창조의 그 오묘한 순간을 남김없이 담아내는 화가의 솜씨가 정말 일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마음이란 몸속에 깃든 마음이니까.”


● 타자화된 몸


“성경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요?”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 나오는 구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공감은 가지만 좀 부담스럽네요.”


“그래도 나는 이 구절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이 구절은 음행을 삼가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 몸이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곳으로 의식하고 산다면,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어도 안 되고, 과식을 해도 안 되겠지.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하는 삶의 방식, 즉 과로나 과욕도 피해야 할 거고.”


“뭐든 과한 것이 문제군요.”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족한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지.”


“일전에 삶의 중심이 하나이면 ‘忠’의 삶을 살게 되지만, 중심이 여러 개이면 ‘患’이 된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어쩌면 우리가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고, 몸도 덩달아 균형을 잃고요.”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의학자인 알크마이온은 인간의 몸이 단순한 물리학적 개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러 요소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건강한 것이고, 그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가 다른 요소를 침범하여 균형이 깨지면 병이 된다고 설명했어. 알크마이온은 병을 ‘모나르키아’라고 했는데, 그건 ‘파탄’ 혹은 ‘한쪽의 지배’라는 뜻이래.”


“세상의 모든 일을 음양과 오행의 원리로 설명하는 동양 철학의 원리와도 비슷하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야 한다는 점인데,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몸적 사고에 지나칠 정도로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웰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포장만 바꾼 소비주의가 아닌가?”


“명상이나 영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요?”


“그것조차 자본주의 시장의 유통 경로를 통해 상품화 된 것 같아. 물론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통해 몸과 마음의 관계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좋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구조로부터 먼저 해방되어야 할 거야.”


“정말 우리 시대는 몸이 상품이 되어 버린 듯한 감이 들어요. 우리 나라에 불고 있는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은 정말 병적이에요. 물론 이런 열풍의 배후에는 서구인들의 체형과 외모를 따라가도록 부추기는 매스컴이 있지요. 하지만 이건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것처럼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쓰려는 것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몸을 갖고 싶은 욕망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 욕망이 자기 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억압하고 타자화한다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지요. 언제쯤이나 우리는 타자에 대한 열등감 없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을까요?”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요즘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느낌이야. 언젠가 여성민우회에서 ‘세계 다이어트 반대의 날’ 행사를 하면서 ‘내 몸의 주인은 나―노 다이어트, 노 성형’ 캠페인을 했다지? 난 이런 소수의 깨어남이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생각해. 한 때 ‘안티 미스 코리아 페스티발’이 열렸잖아. 중요한 것은 ‘선발대회’가 아니라 ‘페스티발’이라는 거야.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적합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함께 긍정해가면서 삶을 축제화 하는 것이지. 간디도 마을 공동체 운동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말했는데, 변혁은 항상 작은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고, 정신이 잠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


●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저는 요즘 몸은 정말 슬픈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학대받는 시리아나 이라크 포로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서 저는 몸을 가진 자가 경험할 수도 있는 어둠의 깊이를 본 것 같아요. 일제시대에 우리 민중들이 겪은 아픔과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이들이 겪었다는 고통,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학대받고 죽어간 유대인과 집시들의 고통도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추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피라미드처럼 겹겹이 쌓인 그 벌거숭이 몸이 남이 아닌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벌거벗기운 채 인간적 모멸감과 공포의 극한에 몰리면서도 어떠한 저항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를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긍정할 수 없다는 것, 그보다 잔인한 일은 없을 거예요. 게다가 그런 그들 곁에서 웃고 있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 이 부조화와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칼을 손에 쥔 사람은 허공이라도 베어보고 싶어하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저갱이 열리면서 사탄이 옥에서 놓여나는 장면이 있는데, 내 마음에는 자꾸만 그런 광경이 떠올라. 사탄은 우리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몰라.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 속에는 이미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다고 하잖아. 어느 쪽 열쇠를 쥐고 사느냐가 중요한데, 전쟁이라는 상황은 아무래도 악마를 풀어놓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할 거야. 토니 모리슨의 소설 <<연인>>에 나오는 한 대목이 기억나는군.


‘오! 나의 사람들이여 그들은 당신들의 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묶고, 구속하고, 자를 때만 손을 사용할 뿐이어서 빈손으로 끝납니다.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세요. 두 손을 높이 들고 두 손에 키스하세요.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시고, 양손으로 서로 두드리고, 얼굴을 쓰다듬으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라고 주신 손으로 묶고 구속하고 자르고 학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실존의 흉한 모습이 아닐까?”


● 몸의 윤리


“몸에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를 통해 어떤 대상들을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분노를 영속화시키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겠지. 나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몸의 윤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어. 그 윤리는 ‘어루만짐’과 ‘보살핌’이야. 우리의 손이 어떤 대상을 어루만지고 보살필 때, 우리 마음도 제 자리를 찾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슬픈 몸’이 ‘고마운 몸’이 되겠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나는 살덩이와 뼈와 피와 땀, 그리고 눈물과 욕망과 꿈으로 가득 찬 자루’라고 말했지만, 그 자루를 잘 간수하지 못할 때 그 모든 것들이 땅에 쏟아질 수밖에 없지. 몸은 소중한 거야.”


“육체에 탐닉할 것도 없지만, 받은 몸을 건강하게 돌보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잘 지키는 길이기도 하겠네요.”


“물론이지. 몸을 사용하여 마음을 이끈다지 않던가. '그늘진 얼굴, 긴장된 근육, 구부정한 자세 속에 불행과 부정적인 것들이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더군. 그러니까 늘 얼굴에 미소를 띠고, 몸의 긴장을 풀고, 자세를 바로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맑아지겠지? 틱낫한 스님의 미소 명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원리에 따른 걸 거야.”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몸에서 힘 빼는 거 같아요.”


“워낙 긴장을 내면화하고 살아왔으니까. 자기 몸과 남의 몸을 공경하고 보살피려고 애쓰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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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이용하지 말라

  • 특권을포기한다라...
    진짜어려운것...

    구름송이 2017.02.13 01:10

김기석의 톺아보기(28)


우정을 이용하지 말라


인맥 만들기 문화


“직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면서?”


“예, 차 타고 한 30분쯤 가야 하지만 오히려 좋아요. 차를 타고 다니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있고, 주변에 맛있는 음식 먹을 곳도 있고, 직장 옥상에 소박하지만 정원도 있고 해서, 짬짬이 쉴 수도 있고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생명이 갖는 친화력 때문일 거야. 목적 지향적인 일직선의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일수록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거야.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은 사실은 순환하는 시간이거든.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어. 사람은 이 순환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지.”


“그 순환하는 시간의 리듬을 타고 사는 사람이 ‘철든 사람’이라면서요?”


“그런데 나는 오염된 ‘철든 사람’이 된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사무실에 하루만 앉아 있으면 알 수 있어. 옆에 있는 공장에서 들려오는 소음,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냄새,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철가루…. 그런 게 호흡을 통해 내 몸 속에 축적된다고 생각하면 영 기분이 찜찜해.”


“그러니까 중금속에 오염된, 그리고 쇠가루가 몸에 쌓인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정말 우울하네요. 해결 방법이 없나요? 주택가에 그런 공장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벌써 공장이 세워진지 여러 해가 되어서 나가라고 하기도 어렵고. 좀 고약한 이웃을 만난 셈이지.”


“그래도 공해배출 업소인데….”


“구청 환경과에서 나와서 시정 명령을 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때 뿐이야.”


“불편함을 참는 것만이 덕스러운 행동은 아니잖아요? 서운할 땐 서운하더라도 행정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궁극적으로는 상생의 길일 텐데요.”


“어떤 때는 힘있는 사람이 ‘전화 한 통’을 넣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금방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지. 더디더라도 공적인 시스템과 절차를 통해서 변화를 이루어야지, 바쁘다고 해서 미시적 동원 맥락(micro-mobilization context)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손쉽게 손에 넣다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서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될 거야.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인맥 만들기에 시간과 정신을 쏟다보면 출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신은 황폐해지는 것 아닐까?”


“살다보면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교수 임용 청탁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똑같은 맥락이잖아요.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사의 관행이 아닌가 싶어요. 학교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실력을 갖춘 사람보다는 윗사람들과의 교제가 좋은 사람들이 공부도 빨리 마치고, 일자리를 빨리 찾게 되는 게 현실이잖아요. 그 때문에 공정한 경쟁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마음에는 원망과 의심이 자라게 되고, 냉소와 환멸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또 그 폐해는 고스란히 아랫사람들에게 전가되고요. 실력 없는 교수들에게 배우는 학생들, 무능력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다 피해자들이에요.”


“참 씁쓸한 현실이야. 물론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소라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야. 공동생활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필요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한다면 그건 곤란하지. 실력보다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찾는 조직이라고 한다면, 그 조직은 사람들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죽이는 닫힌 조직이라고 보아야 할거야.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좀 튄다 싶으면 그는 가혹한 눈길을 받거나 제재를 받게 되잖아.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의 개성은 귀퉁이가 다 닳아빠진 상처럼 남루해져서 파릇파릇한 본래의 매력은 간데 없고, 조직에 순응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만 남는 거지.”


“조금 튀는 사람에게는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는 거지요.”




무지개빛 까마귀


“그런 셈이지. 나는 신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상급자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마치 '무지개빛 까마귀'가 된 느낌이었다니까.”


“그게 뭐지요?”


“아, 저지 코진스키의 소설 제목인데, 숲에 사는 한 남자가 심심했던지 까마귀 한 마리를 잡아서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지. 그리고는 새의 날갯죽지를 비틀어. 새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 동료 새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날아오는 거야. 그때 사내는 무지개빛 까마귀를 공중으로 날려보내지. 억센 손아귀에서 풀려난 새는 죽어라 하고 동료들을 향해 날아오르는데, 까마귀들은 그 낯선 빛깔의 새를 용납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쪼아대지. 이것은 그 소설에 나오는 일화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는 그 까마귀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이 다르고 모습이 다른 이에게 가하는 동료 인간들의 불합리한 폭력과 모욕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 거야.”


“합리(合理)가 아니라 정리(情理)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합리를 말하고, 연줄이 작동하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그 기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다 ‘무지개빛 까마귀’ 신세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몇 번 쪼여본 적이 있어서 그 아픔을 조금은 알아요.”


“시인 김승희의 <제도>라는 시 들어본 적 있지?”


“글쎄요, 어떤 시지요?”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인데, 시의 화자인 엄마는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자문해보면서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울적해지지. 아이는 연신 엄마에게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묻고.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이 대목에 있어.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엄마는 어쩌면 이미 한계에 갇힌 제도인지도 몰라. ‘엄마만 아니라면/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라는 건,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거든.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아이를 어떤 틀 속에 가두는 ‘제도’라고 ‘총독부’라고 자탄하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마디는 비명이나 마찬가지야. ‘엄마를 죽여라! 랄라.’”


“가슴이 찡해 오네요. 사실 저도 세상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삐딱이’여서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사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그럴 거야. 조직생활을 하기에는 다소 감성적이고, 우리 시대의 속도를 따라 살기에는 생각이 많고. 인맥을 형성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질 않고.”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름대로 잘 적응해가며 살고 있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한때 ‘끈끈한 정’이라는 말이 유행했잖아. 좋은 말 같지만 좀 문제가 있는 말이야. 합리에 바탕을 둔 끈끈한 정이라면 좋겠지 하지만 그게 합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작동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지.”


“함석헌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피는 물보다 걸다지만 건[濃] 것이 좋은 것 아닙니다. 맑아야지. 제발 핏줄 소리 하지 마셔요.’ 촌철살인이라고 하나요? 이 말씀은 짧지만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씀 같아요.”


“정말 그러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연줄에 집착하는 걸까요?”


“글쎄, 나라가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니까 자기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니까 혈연·지연·학연 등을 통해 유사-가족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 속에 머물 때라야 비로소 안심하는 거지.”


“그렇다면 인맥 만들기의 뿌리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그 말을 뒤집으면 국가가 공적인 기능을 올바로 수행한다면 사적 관계에 바탕을 둔 정리의 문화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이 되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국가 인권 위원회의 활동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 그 동안 피해자들의 가슴에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한 맺힌 이야기들이 역사의 조명을 받으면서 실체가 밝혀지고 있으니 말이야."


특권을 내려 놓으라


“한 사회를 제도적으로 개혁해나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언제나 문제든 인간 문제로 귀결되는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게 문제지. 이런 문제를 다루는 어떤 토론회를 보아도 열띤 토론 끝에 내놓는 전문가들의 결론이라는 게 기껏해야 ‘의식개혁’을 해야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뿐이잖아.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으면 답답한 거야. 어느 사회학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정부와 기업과 NGO를 들더군. 한 문화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종교 혹은 교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기는 하지만 그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결국 종교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말씀도 원론적으론 맞지요. 하지만 어떻게요? 지금의 교회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온통 정신이 교세 확장에 맞춰져 있는 지금의 교회는 의식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아닐까요?”


“참 뼈아픈 이야기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 거야.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게 뭐였어? ‘자기 부정’이잖아. 먼저 깨어난 사람이 자기가 누리던 특권을 내려놓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지.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나도 목사로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 꽤 많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해야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인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해. 그 말씀을 볼 때마다 나도 손 노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고난 당하는 특권’ 말이에요.”


“그렇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야 우리 삶이 맑아질 거야.”


“조금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요.”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나?”


"그렇지요? 고난 당하는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일도 아닌데,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잘만 하는데, 달콤한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내공이 좀 쌓여야 가능할 것 같아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면서요?”


“맞아. 그러니까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결의이지. 입원실이 없다고 하여 누군가 힘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고, 자기 신분이나 잘 아는 이와의 우정을 이용해 어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은 욕구와도 싸워야 해.”


“뙤약볕 아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제치고 옆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뻔뻔함도 버려야지요.”


“그렇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 전화 한 통 넣어줄 가까운 사람 하나 없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우리 행동을 돌아보아야 할 거야.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상을 실체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가난한 이들의 현실이라는 것이지. 미국의 눈이 아니라 지금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시리아, 이라크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겠어?”


“각자 자기들이 선 자리에서만 현실을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군요.”


섬김이라는 묘약


“문제는 자기가 누리는 것이 특권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할 수도 있다는 거야. 경북대학교 법학과의 김두식 교수가 쓴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에 보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나온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던 애초의 꿈을 그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까닭을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아주 공감이 가더라구. <그들이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특권을 향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특권의식은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그들의 삶 속에 젖어들었습니다.> 이게 무서운 거지.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거 말이야.”


“어쩌면 마하트마 간디가 아무리 일정이 바쁘더라도 경전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물레 잣는 일을 쉬지 않았던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한 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분주한 시간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은 거겠지요?”


“그렇지. 결국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나는 특권의식에 길들여진 사고를 치유하기 위한 묘약은 어쩌면 ‘섬김’이 아닐까 싶어. 예수님이 좌우명이 섬김이었잖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겸손해지려면 많은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소라도 특권을 내려놓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몸으로 섬기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사실 몸이 앞서지 않으면 마음의 변화는 어렵지요.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치열하게 돌아보고 자기를 닦아나가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행화 된 특권에 대해서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것은 귀찮은 일이고, 때로는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지만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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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만한 것이 없다

김기석의 톺아보기(27)


아낌만한 것이 없다


이군,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아침입니다. 불기 없는 사무실에 앉아 아침을 맞는 일이 조금씩 힘들어지네요. 하지만 밤과 낮의 경계선이 무너지며 아침 햇살이 조금씩 비쳐드는 이 시간, 새로운 삶을 살라고 주신 이 복된 순간이 흔감(欣感)할 따름입니다. 주위가 참 고요합니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정겨운 얼굴들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문득 이군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고많은 얼굴 중에 왜 이군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사람들처럼 목마른 표정으로 나를 찾아오는 이군이 나를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엔


일상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선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가끔은 멈추어 설 줄 아는 군이 참 대견합니다. 화가들은 자기 마음에 그린 이미지들을 화폭에 옮기다가 가끔 뒤로 물러나 자기 그림을 살피곤 하지요. 그것은 자기가 그린 형상이 전체 화면과 잘 조화되는지를 살피기 위한 몸짓일 것입니다. 군은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더군요. 나는 삶에 아폴론적인 질서도 필요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일탈과 열정도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일탈과 열정도 더 큰 질서에의 통합을 지향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더 큰 중심을 향한 솟구침이 아니라면 참 곤란한 일입니다. 오늘의 청년 문화의 전모를 볼 눈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청년 문화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직관적으로 느끼는 바는 있습니다. 그것은 '부박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어 그 색깔은 화려하지만 지속성은 없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 아닌가요?


중심을 지향하기보다는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주의 선을 더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속성이 없는 일들은 우리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길 때가 많습니다. 일관된 법칙도 지향도 없는 가치들의 무질서한 율동을 보면서 나는 정서적 충격을 느낍니다. 어디로 발을 내딛든 중심을 향한 여정이기를 소망하며 살아온 내게 리좀(rhizome)적 질서는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가끔 산에 오르다가 바람에 밀려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나무를 봅니다. 어김없이 뿌리를 아래로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잔뿌리만 발달해있는 나무입니다.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물론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어둠과 싸워야 하고, 거친 비바람과 싸워야 하고, 벽처럼 딱딱한 장애와 싸워야 하니까요.


이 암흑 속에 나는 계속 뿌리가 되는 게 싫다.

젖은 흙담 속에 안절부절 밑으로 늘어뜨려진 꿈에 떠는 뿌리,

무엇이든 흡수하고 생각하고 또 날마다 식사를 하는.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 <산보>의 일부입니다. 삶이 무겁다고 생각되어 비틀거릴 때마다 나는 이 시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마치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시를 읊조리고 나면 다시 그 어둠을 향해 팔을 뻗는 것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어쩌면 ‘공감’에서 비롯된 힘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마음을 새롭게 하면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힘이 되어 삶의 대지 위에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되는 것 같더군요.


얼마 전에 만난 선배 목사님은 다짜고짜 내게 “김수영이 앙코르와트에 다녀왔으면 ‘거대한 뿌리’를 다시 썼을 거야”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앙코르와트에 다녀오신 소감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인데, 수 백 년 동안 인간의 발걸음이 닿지 않았던 그곳의 신전 건물을 휘감아 오른 나무를 보고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가를 절감하고 오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요, 만일 김수영이 그곳을 보았더라면 다른 시적 상상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김수영은 이 척박한 슬픔의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도, 어떤 반동도 감내하겠다고 말하면서 “―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은총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김수영처럼 삶이 절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박함이 없기에 현실에 착근하려는 노력도 그만큼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 인생이 부평초처럼 흔들릴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누군가에 대해 품고 있던 꿈을 접어야 할 때 나는 흔들립니다. 참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고통이야말로 은총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없었을 테고, 생명의 고마움을 몰랐을 터이니 말입니다. 생 텍쥐베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바람에 따라 방황한다. 꽃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은 뿌리가 없어 상당히 불편할 거야. 그러나 나는 내 몸에서 뿌리가 돋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고통의 뿌리이다. 고통만이 인간을 대지 위에 뿌리를 뻗게 하는 유일한 은총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문화가 천박한 것은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마치 컴퓨터 게임을 보듯 바라봅니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는 미사일의 섬광은 마치 불꽃놀이와 같습니다. 미디어는 그 미사일이 떨어진 자리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흥건히 흐르는 피, 잘린 손과 발, 그리고 아비규환의 비명소리… 현대문명은 그런 것을 감쪽같이 제거해줍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테러와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로 치환되어 우리에게 제공되고, 우리는 그저 혀를 쯧쯧 참으로써 그들을 망각의 강에 밀어 넣고는 재빨리 일상의 삶으로 복귀합니다. 파괴와 폭력의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평안한 일상을 깨뜨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아픔이 없으니 창조도 없습니다. 무통분만(無痛分娩)의 시대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필요한 것을 생산할 뿐이지요. 그렇기에 생명 가치는 생산구조에 종속됩니다. 기가 막힌 뒤집힘입니다. 우리는 이 뒤집힌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는 사유도 진정한 공감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우리는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무장한 채 갑각류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자크 아탈리는 “시장이 우위를 점하는 곳에서 소비자는 자기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쟁 논리의 종속변수로 변해버린 이들에게 남는 것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사나와집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마에 ‘맹견주의’의 팻말을 써 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뭐냐고 물으셨지요? 나는 서슴없이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낌’입니다.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내게 절실한 도전입니다.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는 세상이니 모든 것을 아껴야 하겠지요. 시간이 촉박합니다. 과민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의 도시 문명이 마치 나발의 잔치와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시지요? 그는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사무엘상 25:10)고 말하며 절박한 처지에 있던 다윗을 조롱한 사람입니다. 모욕당한 다윗이 복수를 다짐하며 부하들을 이끌고 나발의 집을 향하고 있을 때 그는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때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와 함께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아내인 아비가일로부터 지난밤에 있었던 일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져서 열흘을 앓다가 죽고 맙니다. 나발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도취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제 몸집을 불려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 귀신에 들려 비탈길을 내리닫는 돼지 떼의 상황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덕 있는 사람이 존중받던 호시절은 지나갔습니다. 군자는 사라지고 소인배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사람을 아끼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능력이 다소 부족한 이들에게는 일자리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주변부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빈민층 이주 청소년들의 소요 사태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프랑스 말로 대도시의 외곽지역을 일컫는 말이 방리유(Banlieue)라지요? 그런데 프랑스 정부당국은 방리유를 ‘도시민감지역’이라고 부른다더군요. 이것은 주변부를 바라보는 주류 집단의 오만한 눈길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분리의 장벽만 없을 뿐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입니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부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지요? 어쩌면 그것은 강고한 자본주의의 세상에 균열을 내라는 것이 아닐까요? 쉽지 않은 과제이고 도전입니다. 하지만 딱딱한 얼음을 깨는 데는 망치보다 바늘이 유용하듯이,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사람 하나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런 독립한 인격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나는 바른 신앙인은 정신의 독립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형무형의 강제에 의해 떠밀리듯 살아가기보다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유르겐 몰트만은 교회가 ‘출애굽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바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출해 자유의 새 땅을 향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말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말로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지속하는 것이 되겠네요.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자본이라는 바로(Pharoh)가 지배하는 세상의 한 부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크기와 힘에 대한 집착으로 교회는 그 근본인 예수정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군이 교회에 절망했던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 아닌가요? 내가 이미 교회의 질서 속에 깊숙이 몸을 담은 목사가 아니라면 나 또한 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자본이 아닌 예수적 가치가 교회와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몸부림칠 겁니다.



아낌, 참 삶의 시작


나는 예수가 보여준 삶의 핵심이 ‘아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아끼셨습니다. 그가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세리이든, 행실이 나쁜 여자라는 소문이 난 사람이든, 죄인이라고 규정된 사람이든,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백안시되는 병자들이든, 귀신에 들린 사람이든 예수는 모든 이들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인간적인 호오(好惡)의 감정을 떠나, 그들 존재의 중심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아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을 누구라도 물리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존재 이유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뜻을 명백히 드러내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복음 6:39).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겠으며, 건성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인 나는 아직 이 마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젊은 날에 품었던 거룩을 향한 열정은 안락하고 안이한 삶에 잠겨버리고, 얼어죽어 가는 이의 포근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잠들었던 제자들을 깨우며 ‘이제는 일어나 가자’고 말씀하셨던 서른 세 살 청년 예수의 모습은 예순 살 먹은 이 어설픈 제자의 얼굴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일어서야 할 때라고 느낍니다. 이군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 나는 혼곤한 잠에서 깨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지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함께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이군의 열정은 나를 새로운 배움터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너무 거칠고 사나와졌습니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운전자들의 시야가 좁아지고 남에 대한 배려나 너그러움이 줄어들 듯이, 이 무서운 문명의 발전 속도는 심성이 황폐화하는 속도와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느림’이 하나의 상품이 되고 있는 세상이니 새삼스럽게 느림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느림은 우리의 문명병을 치유해주는 가장 소중한 요소입니다.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버림받은 치매노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자들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속도전일 수 없습니다. ‘웰빙’을 위한 느림도 소중하지만, 이웃을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느림을 선택한 사람들이야말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노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으니 治人事天 莫若嗇

무릇 아낌을 일컬어 빨리 돌아감이라 한다 夫惟嗇, 是謂早復

빨리 돌아감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早復, 謂之重積德(老子, 59장)


모두가 이 마음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람을 아끼는 것이 참 삶의 시작일 겁니다. 특히 세상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뒤쳐진 사람들,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을 아낄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경제 발전이라는 파이를 키우기 위해 이런 이들을 버리고 가는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이 실종된 문화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사람 아낌과 하늘 섬김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낌이야말로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지름길입니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그런데 규모가 커지면 아낌의 자리는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인간적인 규모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간디가 마을 공동체를 세상 변혁의 초석으로 보았던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의 허울좋은 구호가 아닙니다. 사과 씨 한 알속에서 과수원을 보아내는 게 믿음이라지요? 안으로 견고하게 생명을 품은 씨앗처럼, 속에 예수의 혼을 품은 사람들 그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규격화된 벽돌과 역청을 가지고 쌓아올리는 욕망의 바벨탑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군처럼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이 답답한 세상에 작은 틈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몇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바위를 쪼며 우물을 파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값진 보화를 얻으리라는 그분의 바람은 허망해 보였지만 그분의 수도자적인 몸짓에서 나는 서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어리석음이 없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고,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누리는 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꿈을 하늘이 외면하지는 않겠지요. 나는 이군의 답답한 마음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 길에서 나는 이군이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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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기

김기석의 톺아보기(27)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기

-한나의 아이 북토크


던져짐과 던짐 사이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은 불안이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놋' 땅에서 살았다. '놋'은 '떠돌아 다님'을 뜻하는 말이다. 정주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것, 흐름 위에 보금자리를 치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홀가분하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삶이다. 찰라의 불꽃처럼 번뜩이는 기쁨은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평강은 언감생심이다. '안식 없음', '고향 상실'이야말로 인간의 운명이다. 삶은 익숙한 곳에서도 늘 낯설기만 하다. 어느 누구도 삶에 대한 영원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이 혹은 우리의 외부 세계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한계가 뚜렷한 자유이다. 나의 자유는 너의 존재 앞에서 비틀거리곤 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가리켜 '내던져진 존재'라 말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우리 삶은 필연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유를 선고 받았으나,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들로 인해 우리는 부자유하다. 운명의 잡아당기는 힘 앞에서 어떤 이들은 속절없이 끌려가고, 어떤 이들은 그 힘을 거슬러가며 자기 삶을 기획한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기획하는 존재인 것이다. '던져짐'과 '던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인간 존재의 운명이다. 그 흔들림은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불안하기에 사람들은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다. 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기도 하고, 늘 새로운 것에 몰두함으로 존재의 불안을 잊으려 한다. 하지만 '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은 우리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늘 새로운 목마름을 안겨줄 뿐이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이성 3부작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를 탐구한다. 그런데 이 세가지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관심한 것은 시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손해보지 않고 자기 이익을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이래 철학의 과제는 인간 존재에 대한 분석에 바쳐졌다. 인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20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우리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그곳에서 겪은 비인간적인 현실을 글로 남겼다. 수용소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였다. 인간에 대한 모든 낙관론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의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곤 했던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괴롭힌 것은 '부조리'였다.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합리적 질서 안에 재배치하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 질서에 포섭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의미 없음이 사람들을 확고하게 사로잡았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작중인물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문득 거대한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 <심판>의 작중인물인 요제프 K는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한 줌의 재로 바뀌거나 세탁용 비누로 변한 사람들의 존재, 세월호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 혹은 터키 앞 바다에 시체로 떠밀린 세 살박이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기표로 서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거침없이 신앙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마치 신의 대변자라도 된 듯 모든 일이 신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멀미를 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흔들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지혜이건만,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노자는 言者不知, 知者不言이라 했다. 美言不信, 信言不美라고도 말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지만, 벽이 되어 소통을 가로막기도 한다. 오늘날 종교적 언어는 다리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벽으로 작동하는가?


아름다운 삶의 본보기였던 욥은 하루 사이에 심연의 고통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친구들은 그를 다그치면서 죄를 토설하라 으르대지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파할 뿐이었다. 그를 괴롭힌 것은 육체의 고통만이 아니었다. 질서정연하던 세계가 무너지자 무의미의 심연이 그를 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의 든든한 토대라고 믿었던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세상 앞에서 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욥기 1,2장과 42장을 본문으로 택하곤 한다. 그곳에서 욥은 신실한 믿음의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기의 핵심은 3장부터 41장에 이르는 대목이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법정으로 소환하려 하기도 한다. 심연과 심연 사이에 놓인 외줄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쉽게 신의 은총에 귀의하려 하지 않는다. 그 까칠한 버팀은 친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 욥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욥은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욥은 마침내 자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가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자기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이 많다는 사실과 인간은 그런 부조리함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얽혀 들어간다는 것

 

정답이 없다고 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해답이 없어도 생은 지속된다. 어떤 이는 망각의 기법을 동원해 인생의 의미 물음을 던지지 않고 사는 길을 택한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이 그로부터 '의미 물음'이 주는 불편함을 소거해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심연에 숨겨진 어떤 핵심과 만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정신이 큰 사람들은 모두 무의미의 심연 혹은 영혼의 어둔 밤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존재 망각의 길이나 영웅적 정신의 길을 단호하게 추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은 "인간이란 희망이나 절망의 이원론적 서술을 벗어나는 다른 범주를 마련해야 비로소 서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청계천이 피난민들의 거주지였던 때의 한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그는 옷을 수선하기 위해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으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은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해준다."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청년사, p.412-413)그 아주머니는 궁핍한 시대를 멋지게 살아낸 삶의 시인이 아니었을까? 정진홍 박사는 그 때부터 그 꽃과 아주머니는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착함을 가늠하는 잣대처럼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한다. 새로운 범주가 마련된 것이다. 기로망양岐路亡羊이라는 말이 있다. 갈림길에서 양을 잃었다는 말이다. 양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생의 본질적 가치라고 한다면 수없이 많은 길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그 양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럴 때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필요와 충족, 욕망과 쾌락의 원은 그의 실존의 모든 것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좁다"((<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56)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그런 것들로 충족될 수 없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든 모르든, 우주적인 연극의 한 역을 맡는 것"(앞의 책, p.65)이라고 말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한 방법은 누군가와 기꺼이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참 난해하다.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는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자, 기회가 왔으니 그 동안에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베케트, 133쪽)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일 테니까 인류를 향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쓰러진 사람 앞에 그들은 인류의 대표로 서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베케트가 암시하는 희망을 본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된다.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온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auther)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오리지널'로 태어나 '카피'로 사는 것이 타락이라 했다. 옳다. 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앞서 바른 길을 걸어간 이를 모방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many ways)이 있지만, 우리에게 예수는 '그 길'(the Way)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삼는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10:10) 이 단호한 한 마디 속에 예수를 추동한 삶의 원리가 담겨있다. 그는 자기 앞에 현전하여 있는 모든 대상을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존재'로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만나는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존재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은 자들의 기쁨이 있었다. 자기 욕망 주변을 맴돌며 살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며 살면서, 우정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타자들 속에 숨겨진 신적 광휘를 보았다. 예수가 있는 곳에서 거룩과 속됨,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던 경계선은 철폐되었다. 경계선을 만듦으로써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체제의 토대를 흔드는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제국의 토대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민한 정치가인 빌라도가 몰랐을 리가 없다. 불의의 공모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한나의 아이> p.375)이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제자들이 그 사람을 보고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9:2,3).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를 삶의 문제로 바꿔놓고 있다. 어차피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붙들려서 고통 당하는 사람의 현실을 해석의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그를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불의를 획책하는 이들과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시스템이 있다. 그것을 철저히 파헤치고, 더 이상 그런 불의가 작동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서 고통을 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이 가끔은 붙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른다. 예수는 그 짐을 벗겨주기는커녕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 하신다. 예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허덕이는 이에게 십자가를 지라니 너무 가혹한 것 같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신앙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삶의 매순간이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예수는 그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걷기 시작할 때, 비록 흔들릴 수는 있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그 길이 진리라고 고백할 것인가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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