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영원한 친구 김장환 목사

한종호의 너른마당(62)

 

권력자의 영원한 친구 김장환 목사

"그를 만나면 권력이 보인다"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극동방송 사장일 뿐만 아니라,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이었던 김장환 목사의 성장기는 흥밋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의 화마(火魔) 속에서 헤매고 있던 가난한 나라의 한 소년이 당시에는 꿈꾸기 어려웠던 미국에 건너가 중·고등학교와 신학대학원까지 마치고 돌아와 이제는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큰 것은 실로 입지전적인 이야기이다. 아무런 신앙적 배경도 없던 소년이, 이역(異域)에서 난관을 뚫고 실력을 쌓아 고국에 돌아온 후 영적 사역에 힘쓰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간증이 된다.

 

이와 함께 그가 오늘날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교계 지도자로서 굳건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목사 김장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전기 <김장환 목사 이야기-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출판 기념식에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운집한 것도 김장환 목사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영향력이 막대한 개신교 목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랑이요,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현실에서 소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과 위상이 과연 우리 사회를 위해서 바람직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김장환 목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개인적 성장사에 담겨 있는 고난과 노력 그리고 이후 그가 괄목할 만한 지위를 가지고 여러 일을 해온 것은 결코 가볍게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의 삶과 그의 가치관과 그의 행적, 그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의 성격은 이 나라 이 사회의 불의한 기득권과 깊이 얽혀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중대한 질문이 된다. 

출세지향적 처세관으로 일관한 인생

 

 

침례교세계연맹의 총회장이 될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그 대단함이 담고 있는 진정한 내용을 보자면 우리는 그의 인생 전체에 걸쳐 일관된 출세지향적 처세관과 이를 이루기 위한 '야망의 열정'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한 역사관에 투철한 자세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언제나 힘이 있는 곳에 그의 자리를 정하며, 그러한 일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권력자와의 교분을 통해 그가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는 과정은 뒤집어보자면 그 권력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희생을 치르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연결된다. 그의 전기 <김장환 목사 이야기-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를 읽어보면, 역사의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이라든가 이 땅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한 아픔과 관련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그에게 관심 밖의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이 겪고 있는 불의와 고난의 현실에서, 그는 다소 신랄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골프가 싱글인 목사요, 권력자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유명세를 누리는 상류층 인사일 따름이다. 세상은 상류층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지만 목사는 상류층에 속하는 순간부터 낮은 자리의 섬김과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그가 우리에게 있어서 귀감의 모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가 가난한 나라의 소년으로 전쟁의 과정에서 미군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목회 현장에 자신의 삶을 투신한 것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교회와 방송국을 키우고, 선교 영역을 계속 확대해온 것에 대해 역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보였던 그의 삶과 행적이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기울어 역사의 정의를 외면하고 백성들의 고난과는 거리가 있는 방향으로 치달아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그가 오늘날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기본 성격, 특히 권력자들과의 연결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유념해서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의 목사로서의 정치사회적 위상은 그가 살아온 삶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절, 미국 순회하며 반한 여론 잠재우는데 앞장

 

그의 책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특별히 자서전 출판기념회 서평을 맡아주신 존경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20년 전 우리의 5월은 바로 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된 폭력으로 온 나라가 깊은 질고를 겪었으며, 그로써 역사의 진전은 가로막혔다. 또한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 나라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잃었고, 막강한 폭력 체제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은 좌절되었다. 그런 현실에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던 김장환 목사가 권력자가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여 움직였던 행적은 그의 오늘이 누리는 사회적 영광의 배경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불의한 권력의 죄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위로하며 용기와 희망을 북돋게 하는 대신, 그 권력과 친밀한 것을 과시하는 목사에게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기는 그가 '각계각층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서 당사자인 김장환 목사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전도 대상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얼핏 옳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데 김장환 목사는 전도 대상인 권력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과의 친분 쌓기에 주력하는 전도 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결코 전도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권력자의 벗이 되려는 출세지향적 자세이며, 그로써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는 야망의 표출 외에 다름 아니다.

 

각계각층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는 것이 전도가 되려면, 불의한 정치사회 지도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삭개오처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자들의 불의를 불의로 인식하게 하는 대신, 자신에 대한 이들의 인정을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삼는 일에 골몰했다.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시절, 미주 전역을 순회하면서 당시 이른바 반한(反韓) 여론을 잠재우는 일을 맡는다. 이때의 반한 여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박정희 독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반한 여론 잠재우기란 결국 박정희 독재 체제에 대한 옹호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여 당시 박정희 정부의 관리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김영광 전 의원은 "이들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대통령 특사'나 다름없었다"라고 한다. 당시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나 박정희 정권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사람들의 저항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을 때, 김장환 목사는 불의한 권력자의 편에 서서 폭력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실로 역사의 정의라든가, 폭력과 독선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선함과 평화에 대한 신앙적 신념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5월 폭력'에도 침묵으로 방관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교분은 그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서 차장보로 있을 때 예배에 참석한 후였다는 것이다.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5월의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과의 만남을 가진다. 그의 책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월 초 신록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김장환 목사의 인계동 집 정원에서 전두환 위원장은 실로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보안사 요원들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어 바깥 분위기는 긴장이 감돌았지만 식사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이때가 어떤 때인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로에 서 있고, 군부의 폭력이 역사를 짓밟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정권이 끝나자 이제 새로운 독재자로 등장한 전두환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김장환 목사가 가진 화기애애한 시간에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이 나라 백성들은 피를 묻힌 군홧발에 숨죽여야 했다는 사실을 그가 오늘날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5월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김 목사에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김 목사는 군목을 광주로 내려보내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군목과 광주 현지에 내려가 현장의 소리를 듣고도 그는 전두환에게 이를 직접 알리지 않고 군목에게 떠넘긴다. 폭력 진압을 중지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그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광주 현장이 "한마디로 무법천지였어요"라는 식으로 규정될 뿐이었다. 불의한 권력자의 폭력에 대해 침묵했던 것이다. 

 

"어떻게 대처할까요" 하는 권력자의 물음에 침묵한 것은, 그가 그의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과 다름이 없고 따라서 그는 전두환 체제 성립에 협력한 셈이었다. 그가 이후 전두환 체제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정치 활동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정권 당시 수원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면서, 시애틀 총영사로 있던 죽마고우 안세훈을 대신 천거한다. 전두환 폭력 체제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죽마고우를 활용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권력 교체기인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를 옹호하는 선거관련 강연을 하고 다닌다. 그는 대선 후보의 자격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미국 우방이 믿어주는 후보, 둘째로 군대가 믿어주는 후보, 셋째로 북한이 무서워하는 후보, 넷째로 가정이 건전한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요." 여기서 우리는 그의 국가관이나 역사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김장환 목사는 이 나라의 대권이 미국이 신뢰하고 인정하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얼마나 사대친미적 식민지 근성을 가진 인물인가를 자인하고 있다. 이 나라 대통령이 되어야 할 사람의 제1 조건은 이 나라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여야지, 어찌해서 미국이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김장환 목사가 얼마나 미국에 대한 정치적 사대근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의 생각과 신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대적하는 삶…청산할 구시대의 유산

 

또한 그는 군부의 정치적 개입을 공식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군대가 믿어주는 후보란 군부가 지원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군부독재 체제를 청산해야 할 시대적 과제는 그에게 아랑곳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가 건강한 민주적 시민의식과는 완전히 거리가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 아니라 북한에 대해 적대적 공포를 주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냉전 체제의 존속을 바라는 자세를 보였다. 결국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체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었고, 미국의 지배와 냉전시대의 유지 그리고 군부의 통치에 복종하는 사회를 갈망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의와 평화, 선한 다스림과는 전면으로 대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짓밟고, 나라의 자존은 생각도 아니하며 대국에 머리를 굽히는 자를 지도자로 내세워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김장환 목사가 누려왔던 불의한 기득권을 지켜줄 사람과 질서,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첫째 역사의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바칠 사람, 둘째 백성들의 고난과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면서 섬김의 헌신을 할 사람, 셋째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나라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 넷째 가정의 물질적·영적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등을 내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장환 목사에게는 미국의 관심과 군부의 관심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나라 백성들의 고난과 절박한 현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그가 이 나라 교계의 지도자연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불행이며 수치이다. 그는 우리에게 귀감의 모델이 아니라, 극복의 모델이며 구시대의 유산으로 청산해야 할 유형인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사렛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하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고 질타하셨다. 김장환 목사가 불의한 권력자들과 상류층의 교분을 맺으면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의와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올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의한 기득권층의 벗이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시피 한 김장환 목사의 그간의 행적은 그의 살아온 인생사를 보면 매우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권력과 출세의 정상을 향한 끊임없는 야망, 그것을 위해서라면 주변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강요하는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 처신 등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상류층의 권력적 실세가 되기 위한 이기적인 줄달음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하여 그의 입지전적 삶이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낮고 천한 이들의 삶에 다가가려는 목자보다는 높고 강한 자들의 우군이 되려는 과정이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책제목처럼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오는" 사람들은 불의한 삶을 살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이 김장환 목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자기 자신의 "위선적 은폐"라는 점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 친교 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한 바 없으며 그들의 삶에서 이 땅의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의 인생을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는 결단을 끌어 낸 바도 없다는 것은 김장환 목사가 무엇을 지향하면서 이들과 어울리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들인 것이다. 이런 그가 침례교 세계연맹의 총회장까지 된 것은 사실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헌신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이 깊기 때문이다. 

 

‘하우스보이’ 빌리

 

우리는 앞에서 그가 맺어온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해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성장사에서 중요한 대목을 짚어 김장환 목사의 처세관의 기반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대목은 아무래도 그가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 '빌리'로 그의 삶이 바뀐 그 역정이 경계선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미국 유학이라는 길이 열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란 이 나라가 겪은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와중에서 가난한 백성들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던 일종의 별천지의 축복이기도 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주둔군의 하인'이 되는 일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종의 권력이었고 주변에게 물질적인 은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초콜릿과 껌, 그리고 그밖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 하우스보이는 그런 선망의 대열에 낀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장환 목사는 소년 시절, 수원교도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들어가 가난한 소년 시절의 삶을 지탱하게 된다. 그 후 그곳에서 '빌리 김'이 된 그는 미국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건, 잡지의 상품들은 모두 빌리 김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열망의 재료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이라면 거의 누구에게나 있었던 공통의 사회심리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빌리 김은 '선택된 소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택된 처지는 마침내 미국 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평생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에게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지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그에게 어디까지나 은혜의 나라요, 기회의 땅이었으며 그를 가난에서 구출해준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면서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하우스보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절박하게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 그의 정신은 미국인의 마음과 정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며, 밥존스라는 극우적 학교의 유학은 이러한 성장사의 가치관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만다.

 

하우스보이 빌리가 아무런 기독교적 이해와 경험도 없이, 미국의 극우적 정신세계에 곧바로 끌려들어가, 진정한 인간의 내면적 자유보다는 율법적 권위주의와 미국의 패권적 정치관을 배우게 된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장환 목사의 미국 유학이 그의 개인사에 있어서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는지는 모르나, 그 자신과 이 나라를 위해서는 하우스보이의 굴종적 민족관과 극우적 신학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극우적인 신학교에서 극우적인 가치관 심어져

 

밥존스는 미국에서 가장 극우적인 신학을 지향하는 학교이다. 김장환 목사가 다닌 시절에는 그러한 극우적 성향에 대한 사회적, 신학적 비판과 견제가 더 더욱이나 약했던 때였기에 김장환 목사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돌아볼 기회가 없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교회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던 그가 밥존스에 가서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고통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는 학교생활에 곧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발군의 실력을 나타냈다고 그의 자서전은 적고 있다. 그런데 밥존스가 어떤 학교인지를 보여주는 보기를 책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었을 때 당시 존슨 대통령이 한 달 동안 조기를 달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당시 총장이었던 밥존스 2세가 목사 한 사람이 죽었는데 미국 국기를 한 달 동안 달 필요는 없다며 하루만 게양했다. 그러자 흑인들이 밥존스 재단에 성조기를 계속 달지 않으면 보일러실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학교에서 주 정부에 보호 요청을 하면서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주 정부에서 '공립학교도 다 못 지키는데, 어떻게 사립학교를 지키느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밥존스 재단에서는 성조기를 게양하는 대신 기관총을 사들여 방어에 나섰다."

 

밥존스 대학은 애초부터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에 적대적이었으며,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들의 입학은 아예 봉쇄하고 있다. 이후 김장환 목사가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해서 졸업자 명단에서 제명이 될 정도로, 교단적 폐쇄성이 강한 학교인데다가 위에서 보듯이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겠다는 식의 극우적 백인주의의 가치관이 가득한 학교이다. 이 학교 출신들의 극우적 성향은 미국 사회에서 종종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런 학교에서 교육받은 김장환 목사의 가치관이 어떠할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그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극우적인 군사주의 세력과 아무런 갈등 없이 어울리게 되는 것도 이러한 그의 성장사를 보면, 하등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김장환 목사의 유학과 그의 귀국은 한국 사회에 미국의 극우적 가치관을 심어나가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극우세력이 극우적 종교관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라는 점을 주시하면, 김장환 목사와 전두환·노태우 등 이 땅에서 극우적 폭력을 휘두른 세력 간의 친교와 연대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미국이 이 땅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김장환 목사는 하우스보이 빌리 시절의 역할을 계속해서 톡톡히 수행해나간 셈이라고 하겠다.

 

권위주의적 품성, 혁대로 자식을 때려 순종을 가르치다

 

부인의 입에서 나온 남편의 단점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목사님은 성격이 급해요." 대담자가 이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하자 그녀는 하나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불평하는 것을 조금도 못 참아요." 이것은 사실 그의 권위주의적 품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밥존스에서 받은 엄격한 규율 교육,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행운의 청년, 자신의 성취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 등등이 이러한 권위주의적 자세를 길러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나 권위에 대한 이견을 용납하지 않으며, 이러한 그의 자세는 다른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나 격려의 결여로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수나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보다는 정죄와 질책을 매우 강력하게 드러내는 품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아들 요셉과 요한은 물론 딸 애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김장환 목사에게 혁대로 맞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교육관은 순종에 대한 훈련이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순종에 어긋나면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었다. 순종을 폭력으로 가르쳤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은 여전히 극우적이며, 억압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게 자란 아들 김요셉 목사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에게 자신이 받은 교육과 마찬가지로 혁대로 체벌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혁대로 맞은 경험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손으로 때리지 않고 꼭 혁대로 때리셨어요. 어떻게 아이를 혁대로 때리느냐고 놀라는 분들이 있지만, 사실은 대단히 좋은 기능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버지가 무섭기보다는 혁대가 무서웠어요. 아버지가 혁대를 매지 않는 날은 굉장히 기쁜 날이었어요. 야단 안 맞을지도 모르니까요." 

 

과연, 혁대로 때리면 아이는 그 두려움을 아버지보다는 혁대에게 돌릴까? 사람을 가죽 띠로 때리는 전통은 주인이 노예를 때리는 역사에서 연유한다. 노예는 자신을 가죽 띠로 잔혹하게 때리는 주인보다는 그 가죽 띠에게 두려움과 적대감을 느끼게 될까? 사람을 때려서 순종을 가르치겠다는 발상 자체도 문제거니와, 그 체벌의 수단을 자신이 차고 있는 혁대를 선택하는 품성의 냉혹함은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폭력적 권위에 저항하는 민중에게 자신이 차고 있던 총을 휘두른 세력과, 자신이 차고 있던 혁대를 휘두르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아버님의 성격이 급하십니다. 그래서 말실수를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에 잘못을 나무라고 꾸짖는 반면 격려나 칭찬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와 함께 일을 한 직원들의 공통된 이야기도 그가 격려나 칭찬보다는 질책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우적 교육의 가학적(加虐的) 인간관의 결과이다. 따뜻하고 자상하며, 격려가 풍요한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을 어떤 목표를 위해 짓누르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권력 지향적 권위주의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권세가 강한 이에게는 도리어 매우 따뜻하고 자상한 듯이 군다. 인간에 대한 이중적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장환 목사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매우 엄격하고 질책이 우선되는 사람이자, 두려운 존재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반면에 권력자들은 그로부터 마음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 이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김장환 목사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거나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반면에, 자신의 권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이에게는 굴종적 처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자에겐 군림으로, 강자에겐 굴종으로 일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의 이러한 자세가 주변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신의 출세와 권위를 도모하는 삶을 살아오게 한 동력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일일까? 극동방송 내부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 대한 깊은 불만과 인간적 적대감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있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느낄까?

 

그의 경영관이 이른바 공격적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이러한 공격적 자세는 아들 요셉 목사가 말했듯, "관계 중심보다는 업무 중심"으로 말하자면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향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동원하는 일에 열중하는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해서 성과를 달성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 자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김장환 목사는 깨우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권력자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고 있다는 점, 바로 이러한 면모를 혹 김장환 목사는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김장환 목사의 삶을 짧은 지면을 통해서 분석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출세와 명성은 그가 이 땅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권력자들의 교분을 깊게 하고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온 사람이라는 점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이 한국 교계의 지도적 인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자신이 받은 은사와 기회를 다시 새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도한다. 권세자들과의 교분이 아니라, 진정 이 땅에서 아우성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위해 새로운 헌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생은 완전히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 교회에 중대한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생은 이후 그가 바라는 대로 평가를 받기에는 아마도 참으로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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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해

  • 글쓰신분의 내용은 공감합니다만
    비판의 개념보다는 공동체안에서
    성도에대한 권고와 같이 목회자에 대한 권고가
    이루어져아하는거 아니겠습니까?
    비판은 공동체의 분열 뿐인거같습니다.
    성경적으로봐도
    사랑을 베이스로한 권고가 맞는거 같습니다만.
    (물론 성도들이 말씀과 삶에서 건강하게
    바로 서 있어야겠지요)
    옥한흠 목사님 설교중에
    십자가 공의의 측면도 강조하셨던 걸로 보아
    기득권의 불의에대한 침묵을 말씀하진
    않으셨을 거 같습니다.
    한가지 설교만 보고 단편적인 부분을 가지고
    그럴 것이다 라는 비평은 글쎄요?
    이름 있는 목사님 까서
    본인 높아지려는거 밖에 안보이네요.
    그게 아니시라면
    오정현,이재훈,김지철 목사님 같은
    현사역에 계신 대형교회 목사님들
    설교를 비평해주시는건 어떻습니까?

    Back 2017.07.15 22:15
    • "이름 있는 목사님 까서 본인 높아지려는거 밖에 안보이네요." 벌써 17년이 지났네요. 처음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비평할 때도, 독자님 같은 똑같은 말을 하셨지요.^^

      한종호 2017.07.17 09:19 신고 DEL

설교비평 모음(4)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해

 

 

편집자 주/예전에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는 성서의 ‘비판하지 말라’는 대목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설교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옥한흠 목사는 마태복음의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각도에서 자신의 설교를 구성하고 전개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대목은 교회 내에서 교권적 권위 방어를 위해 비판적 발언을 봉쇄시키려는 자의적 목적으로 자주 등장시키는 수가 많다는 점에서, 본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긴요하다.

 

옥한흠 목사가 이 설교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바가, 비판이라는 명목 아래 날이 선 말로 형제들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일 터이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의 강조가 분명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비판이라도 그 비판의 봉쇄를 통해서 기득권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기가 저간의 중심에 깔려 있다면 이것은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메시지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바로 아는 일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비판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게 하고 모두 뭉뚱그려 비난의 계열에 분류해 버리는 오류를 낳음으로써 ‘교권적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유도하거나 강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비판하지 말라’는 율법주의적 정죄에 대한 비판

 

마태복음 본문의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적 정죄 내지는 상대의 속 깊은 사정에 대하여 사려 깊이 헤아리지 않은 일방적, 단정적 심판에 대한 경계’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적 정죄를 앞세워 교권적 지배를 꾀하였던 당대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과감한 공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논리에 뭇 백성들이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거나 따라가지 말라고 일깨우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율법주의적 정죄론에 사회가 휘말리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논리에 희생당하고 서로에 대한 정죄주의적 추궁과 일방적 심판이 횡행하여 살벌해지는 것을 꿰뚫어 보신 것이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변호 과정도 바로 이러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죄 없음에 대한 자신이 있다면, 혹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못한 처지에서 자신의 의를 절대화하는 율법주의적 단죄 또는 심판은 택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렇게 자신의 불의에 대한 청산 작업은 전혀 하지 않고 타자의 사소한 잘못을 과장하여 정죄의 자리에 세우려는 율법주의적 자세를 겨냥하신 말씀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 현대적 의미에서의 이성적 비판 작업의 중단 내지 금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아픔이나 사연을 도외시한 채 자기 의를 절대적인 우위에 놓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 이 율법주의적 정죄관을 극복하는 자리에서 가능해지는 비판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이것이 분명해져야 우리는 율법주의적 심판과, 건강한 비판 의식의 육성을 가려낼 수 있으며 그로써 이 성서의 대목이 교권적 방어를 위해 본의에 맞지 않게 동원되는 오류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함부로 타인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마땅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특히 신앙공동체를 멍들게 하고 병에 걸리게 하며 신앙으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파괴하고 만다는 점에서도 강력하고 분명하게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사람이 그 입으로 타인의 마음과 영혼의 살을 도려내고 아프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판을 통해 상대를 죽이는 것은 음해

 

옥한흠 목사의 비판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이 그의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인 우리를 보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입니다. 이게 비판이에요. 자기 안경을 쓰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비판이요, 자기의 자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길다 짧다 늘어놓는 것이 비판이지요. 물론 여러분, 비판 중에는 건전한 비판도 있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아예 비판 의식을 모두 정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가 잘못되어 가면 건전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교회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한국 교회가 조금이라도 부패하고 세속화되어 간다면 우리는 이런 교회를 가슴에 안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비판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뭐냐?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을 가지고 형제들을 상처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옥한흠 목사는 비판의 바리새적 문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리해내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의가 뭡니까? 다른 사람 죽이고 자기가 사는 의요. 그렇지요. 다른 사람 까뭉개고 자기가 의로워지는 것이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을 섬긴다는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 거요. 우리에겐 더 나은 의가 필요해요. 더 나은 의가 뭡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입니다. 나를 죽이고 형제를 높이는 의요.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 안의 형제가 아니에요.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가 영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요.”

 

비판을 통해서 자기를 내세우고 상대를 죽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비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음해이자 악의적 공격이며 분열주의적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옥한흠 목사가 경계하고 있는 비판은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그가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이 영적 기준에 의해 비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영적 판단의 여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시 말해서 영적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에게는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앙공동체 내부로 비판의 화살을 돌리지는 말 것이나, 그것이 신앙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향해 쏘아질 때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가 비판의 정의를 매우 이중적으로 또는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세상 사람에 대한 비판은 그가 내린 비판의 정의대로 상대가 세상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 상처 내는 일은 괜찮다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신앙인의 세상 사람에 대한 비판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과 약점을 고쳐서 바로 잡아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상처인 것 같지만 상처 내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만일 비판이라는 것이 옥 목사의 정의대로,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폭력이라면, 그것은 신앙공동체 내부에서나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생명을 바로 세우는 비판, 언어폭력으로서의 비난

 

그런데 그는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의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때의 비판은 이러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이 아니라 건전한 영적 비판 행위를 의미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언어폭력의 성격을 지닌 비판을 세상 사람을 겨냥해서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면 그의 설교는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말하자면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어도 되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셈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독선과 오만이요 자기의 영적 기준을 절대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옥 목사의 의도를 선하게 받아들여 세상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신앙적 기준에 맞추어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비판은 형제에 대한 언어 폭력적 공격이라고 구별해서 이해한다면 문제는 없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앙적 기준에 맞춘 비판은 인정되고 있음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옥 목사가 언급한 건전한 비판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될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바는 그가 말하듯이 누구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 그를 괴롭게 하는 일을 즐기거나 그래서 자기는 살고 상대는 죽이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언어를 통한 폭력적 공세는 비난이지, 건강한 비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도 비판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이니 교회 안에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여 “내가 비판받지 않기를 원하거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 안 하면 자기도 비판 안 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의 이런 것 저런 것 가지고 손가락을 헤아리면서 입으로 쪼아대면 쪼아대는 것만큼 너도 다른 사람의 입에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판받기를 원치 않으면 먼저 내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돼요”라고 말하고 있다.

 

옥 목사의 말대로 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제 삼고 추궁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판이 언어폭력으로서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악의적 동기를 가진 것이라면 그러한 비판은 마땅히 배격해야 옳다. 그러나 비판이 영적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상대를 살리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영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짓밟는 것들이다. 그것마저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그것은 그의 말대로 ‘생명이 떠난 교회’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그가 말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은 신앙적 삶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의 범주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지향하는 비판까지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교회의 생명에 대한 도전이요 그 생명에 대한 폭력이 된다. 성도끼리 아귀다툼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음해와 비난과 험담을 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나고 그것이 특히 교권적 지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을 때에도 침묵하고 그대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영적 비판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그래서 예언의 능력이 죽은 교회가 된다. 개신교의 출발이 중세 교회의 불의에 대한 영적 비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망각하지 않는다면 교권적 불의마저 침묵의 대상으로 삼고 그로써 진정 교회를 바로 살릴 비판의 목소리마저 묵살하거나 봉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요, 병들도록 내버려두는 일이자 성도들의 영적 안목을 가리고 그 영혼을 신음하게 하는 일이다.

 

교권적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

 

옥 목사는 “1-2년 전에 서울에 있는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이 여러 가지 스캔들에 말려서 굉장히 고역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라면서, 특정한 목사를 변호하는 발언을 그의 설교에 담는다.

 

“신문에 가끔 보도가 되고 텔레비전에까지 야단법석을 치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의 평신도 단체들이 비난의 성명을 발표하고, 심지어는 그 목사님이 법정에까지 서고, 그야말로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나오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 대부분은 그 내용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그 목사님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리고 심지어 목회자 가운데는 그 목사님의 목회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즈음에 목사님 몇 분이 모이는 모임에 참석할 일이 있었어요. 제 옆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이 앉아 계셨는데 식사를 하다가 저보고 이런 말을 해요. ‘아, 요사이 자주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목사님 정말 안타까운데 참 야단이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우연히 그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떠봤대요. ‘아니, 그런 말들을 듣고 있는 목사님인데 교회를 계속 나가느냐’고 물었대요. 나간대요. 설교가 귀에 들어오느냐고 물었대요. 들어온대요. 그러더니 그분이 목사님을 향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는요, 우리 교회 목사님 신뢰해요. 소문대로 나쁜 짓을 할 분이 아니란 걸 잘 알아요. 설혹 한두 가지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꼭 교회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흠이 없는 목사가 있어요? 목사님은 흠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감동을 받았대요. 아! 이런 교인이 있기에 그 교회가 살아 있구나.”

 

이어지는 설교에서 옥 목사는 목회자의 비리를 비판하지 않고 감싸 안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 교회가 지금 부흥하고 있다’며 얼마 전에는 ‘한 주에 세례를 1천명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한다.

 

옥 목사의 설교 전체의 흐름으로 비추어보면, 그 목사에 대한 비판은 성서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며 교회 안에 속한 형제를 아프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런가?

 

그 목사의 잘못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바로 서지 않아 교회의 위신은 추락했고 교회의 영적 권위는 손상 받았으며 그로 인해 무수한 신앙인들의 마음과 영혼이 상처 입은 것을 옥한흠 목사는 어떻게 정리해낼 것인가?

 

그의 말대로 “이 세상은 너무 잔인합니다. 날마다 혀에서 나오는 말 몇 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형제를 서로 감싸고 함께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서 서로 위해주는 것이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를 비판하고 헐뜯는 거친 돌이 되지 않도록, 쓴 뿌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항상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바로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가 불의를 그대로 용납하고 그것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묵인하도록 하라는 논리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폭력이 난무하고 비판과 비난이 혼동되고 있는 이 시대에, 위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언어는 그야말로 갈급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교권적 지위를 앞세워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병들게 하는 일에 대한 의의 육성이 바로 서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을 향한 진정한 영적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영적 각성의 뜨거운 육성이 들리지 않는 교회는 옥 목사의 말대로 이미 생명이 떠난 교회가 되지 않겠는가? 부디 영적 비판의 육성마저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의 개념에 집어넣어 하나님의 의가 침묵 당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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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의 숭미 사대주의

설교비평 모음(3)

김진홍 목사의 숭미 사대주의

 

편집자 주/지난 4월 27일 서울신학대학교 춘계신앙수련회 강사로 온 김진홍 목사는 설교 중 제주 ‘4·3 사건’을 ‘4·3 폭동’이라 표현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산 모양이다. 김 목사의 역사관은 사실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예전 그의 왜곡된 역사관이 짙게 드리운 설교를 살펴본다.

 

그의 역사관이 도달한 한계를 안타까워하며

 

김진홍 목사의 역사관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굴절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그 앞에 줄서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목회자가, 미국 등 강대국 앞에 줄 잘 서야 산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강자의 규칙을 배격해야 하는 목사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이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반 테러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 세계를 향해 미국 앞에 줄 설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던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그대로 본 따 신학화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때,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을 소리 높이 외쳐온 김진홍 목사가 민족의 생존이 절박한 지경에 몰려 있을 때 <전쟁의 논리>를 들고 세계를 다니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발언과 사고를 정당화하는 설교를 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늬만 개혁인 개혁적 종교 지도자”

 

여기서 우리는 그의 역사관이 도달한 한계를 목격하면서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이 넘어서야 할 경계선이 무엇인지 절감하게 된다. 그의 개혁운동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의가 빠져 있고 작은 나라들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서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 힘의 논리에 이미 그가 매몰되어 있음을 보는 것은 김진홍 목사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에 비추어 보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는 이제 극언하자면, “무늬만 개혁인 개혁적 종교 지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라크 전쟁 개입 당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있고 난 다음 주인 김진홍 목사가 <미국, 북한, 남한>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설교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 배경과 의도를 보다 이해하고 이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훈계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있으니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고 북한의 생화학 무기 테러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각 가정이 방독면을 갖추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본계 미국인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북한에 대한 철저한 폄하로 일관하고 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생화학 무기 등 대량 살상 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는 것은 괜찮지만 미국이 불량국가라고 지목하고 있는 나라들은 가질 수 없다는 식의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하는 자이다. 미국의 전쟁주의자들이 그를 앞세워 미국의 영광을 칭송하게 하고 미국의 논리에 반기를 드는 나라는 <반문명적>이라고 깔아뭉개려고 하는 현실을 김진홍 목사가 아는지 모르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우리나라는 줄서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설교에서 경악스러웠던 것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줄 서기’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이다. 명분은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동맹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도대체가 자신의 국가적 정체성을 주축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누구 앞에 줄 잘 서야 산다고 하니 이런 비주체적이고 타율적 사고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우리가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나라 국민, 여러 지도자들이 마음이 하나가 돼서 다섯 가지를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나라는 줄서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고 완화되었습니다만 역시 세계는 두 가지 세력이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적으로 열린 체제인 자유 민주 진영하고, 사회주의 전체주의 진영이 지금도 서로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쪽에 어느 편인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 유럽을 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 열린 체제와 동맹관계를 확실히 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중간에 떠 있다가는 나라에 큰 문제가 생기면 백성들이 큰 재난을 받게 됩니다…”

 

미국과 일본, 유럽과 친하게 지내자는 이야기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중국과 러시아와도 국교를 맺어 친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세계 여러 나라와 우호적 선린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김진홍 목사의 논리 속에 강하게 담겨 있는 냉전식 이분법이다. 세계 전체를 두 개의 진영 대립으로 나누어 보는 것도 현실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가 누구 앞에 줄 서기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식의 발상을 하는 것은 민족적, 국가적 주체성을 저버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국가적, 민족적 운명이 언제나 이렇게 강자 앞에 줄서기를 해야 했던 것이 그간의 민족사적 비극이거늘, 그는 친러, 친일, 친중 하지 말고 친미 하자는 식으로 한말 비운의 역사에 등장했던 논리의 하나를 그대로 베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힘도 없는데 무슨 수로 이들 강국을 이겨내는가, 그 가운데 가장 강한 놈 앞에 줄 서면 그나마 살 길이 있다, 이런 식이 아닌가? 성서가 어디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예수께서 언제 그런 말씀을 하신 바가 있는가? 아무리 약자라 하더라도 기죽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일에 헌신하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깃발이 아닌가?

 

결국 미국이 줄서기를 요구하면 그에 응하라는 권고에 다를 바가 없는데, 오늘날 유럽에서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을 비판하고, 미국의 일방주의가 도마 위에 올라간 사실을 김진홍 목사는 어떻게 설명할까? 유럽은 미국이 줄서기를 강요하자 이에 반발하면서 미국 부시정권의 전쟁논리가 가지고 있는 패권주의와 반 생명적 논리를 문제 삼고 있는데, 그렇다면 김진홍 목사의 이야기대로 하는 경우 우리는 미국과 유럽, 그 어느 쪽에 줄서야 할까? 독일의 피셔 외무장관은 미국이 동맹국들을 <위성국가>로 보느냐고 따졌고, 유럽 연합은 미국이 일방주의 외교로 세계를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김진홍 목사가 말하는 이른바 ‘자유진영’ 내부의 논란이다. 미국은 그 자신의 오만한 일방주의와 패권주의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확전을 겨냥한 논리는 세계적 반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부시의 발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지탄의 대상

 

오늘날 미국은 자유와 평화를 말로는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폭력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키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화마 속에 몰아 놓고 있으며, 포로들을 짐승 다루듯 하면서 세계적 지탄 받고 있다. 이것이 과연 자유진영, 민주국가라고 하는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이러한 나라 앞에 줄서기를 해야 한다면, 그런 폭력과 그런 야만성을 그대로 용인하라는 것인데 이는 실로 기독교적 신앙양심에 비추어 본다 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도리어 김진홍 목사는 자신의 강한 힘을 믿고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이 강국의 오만과 야만성을 비판하고,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하나님의 의와 뜻을 믿고 당당히 살자, 그래야 옳은 일 아닌가?

 

김진홍 목사는 우리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부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항의를 하자 이를 “대단히 국가 이익에 맞지 않고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나마 이들 젊은 의원들이 있어서 국가적 자존심이 섰고, 민족적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국가이익 운운하면서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몰아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방한 과정에서 그나마 유화적 제스처를 썼던 것도 우리 내부의 강력한 항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을 그가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젊은 정치인들은 국가이익을 해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항의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 내부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꿀리지 않고 햇볕정책의 장기적 의의를 설득해나갈 수 있는 여력을 가질 수 있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김진홍 목사는 미국의 발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 쪽의 생각은 무슨 생각이냐 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서 햇볕정책을 열심히 추진하고 남북평화를 이루려고 애를 쓰는 것을 인정하는데, 김정일이 한테 이용당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열심히 북한을 도와주고 있는 동안에 그 돈을 가지고 그 기간에 핵무기를 계속 발전시키고 미사일을 만들어서 세계에다가 수출을 하고, 중요한 것은 생화학 무기를 너무 대량으로 생산, 보유하고 있다, 중동에, 북 아프리카에, 여러 나라에 북한이 미사일을 수출하는데, 미사일을 수출하는 것까지는 봐주겠는데, 미사일을 만드는 기술을 수출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걸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생화학 무기를 발전시켜 가지고 미사일을 쏘는 발사대 거기에다가 화학무기, 탄저균 같은 생물무기를 쏘면 서울이나 동경 같은 자유 우방 국가에 탄저균 폭탄이 하나 떨어지면 이거는 글자 그대로 지옥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이해를 해야 되지요.”

 

우선 미국은 우리 남과 북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미국이 간섭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을 반길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에 미국의 시비가 계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시의 발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발언의 내면에 깊이 숨겨진 저의를 온 세상에 밝혀내는 것이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이 교류 협력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평화시스템이 굳건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통찰자로 나서야 하는 김진홍 목사만한 수준의 목회자라면 미국의 이러한 숨겨진 야심과 우리 민족의 처지를 꿰뚫고 우리 민족의 단결과 민족 통일에 대한 꿈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러한 소명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나는 미군이 한국에 있는 것은, 한국에도 절대로 있어야 하고 미국에게도 있어야 됩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서 미군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도 위하지만 미국 자신을 위해서라도 미군이 있습니다. 그걸 분명히 하고 미군이 한국에 있되, 장소는 용산에서 옮겨야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이 말이 맞다 치고, 미국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어쩌는가? 이번처럼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주한미군을 움직이는 경우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할 지 모를 위험한 군대를 우리는 언제까지 용납해야 하는가? 그리고 미국을 위해 있는 군대를 우리가 왜 돈을 줘가면서 있도록 해야 하고 서울 시민들의 식수에 독극물을 버려도 좋다좋다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며, 살인죄를 저질러도 우리는 아무런 재판권도 없이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가, 이게 우리를 위해 있는 군대의 할 짓인가?

 

“가정마다 식구 숫자대로 방독면을 준비하세요”

 

더군다나 앞에서 인용한 김진홍 목사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에 가깝고, 또한 논리적으로 옳을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생화학 무기와 핵무기를 생산, 보유하는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만일 이러한 무기 보유량만으로 악의 축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악의 축 가운데 축은 미국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온 세계 무기시장의 제1 수출국이며, 미국이 오늘날 악의 축이라고 지탄하는 이란, 이라크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판매했던 나라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탄저균 문제도 미국에서 미국 내부의 연구소 유출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탄저균 위협의 진원지는 결국 미국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김진홍 목사는 이런 말까지 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러분 지난 번에 미군에 탄저균 났을 때 우리 나라 기업 중에 재미 본 기업이 있었습니다. 방독면 만들어 가지고 수출한 회사가 밤낮으로 공장 돌렸습니다. 한국제가 세계 제일입니다. 이걸요 만들어 가지고 가정마다 식구 숫자대로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대책을 세워야 됩니다.”

 

이에 이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김진홍 목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유치한 ‘전술가’가 되고 만다. 온 세상이 미국에게 생화학 무기 금지조처를 위한 협정에 서명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까닥도 하지 않고 있다. 생화학 무기를 독점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고, 생화학 무기 금지 조처에 자신은 해당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생화학 무기 금지조처를 취하고 이에 따라서 다른 나라의 생화학 무기를 통제하겠다면 말이 되지만 자신은 더더욱 많은 생화학 무기를 생산, 보유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북한의 경우를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은 모두 시비를 걸기 위함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함락시켜야 할 이 시대의 여리고성은 무엇인가”

 

그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장면을 보기로 들면서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 여리고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데, 그 함락시켜야 할 여리고성이 이 시대에 무엇일까? 그것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남북 분단의 대립을 해결하겠다는 부시 대통령과 같은 반 평화적이고, 반생명적 사고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바로 강대국의 생각이자 우리 민족의 앞날에 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오는 것이라면 더더욱이 이를 우리 민족 전부가 한 목소리로 부르짖어 우리 민족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미국의 이번 악의 축 발언과 전쟁 불사론에 놀라, 민족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서는 현실에서 김진홍 목사와 같은 위치의 인물이 이렇게 미국의 강대국 논리를 추종하고 민족의 생존을 염려하는 사람들을 철없는 사람처럼 몰아대고, 미국 앞에 줄서야 된다는 사대주의적 사고를 설교에 담아 설파하고 있는 것은 실로 실망스럽다. 부디, 김진홍 목사는 자신의 그러한 발언에 대해 깊이 되돌아보고 오늘 민족과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진정한 당사자가 누구인지 통찰하여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선포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란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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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목사의 '저주'로 끝난 설교

설교비평 모음(2)

김홍도 목사의 '저주'로 끝난 설교

 

 

편집자 주/이 글은 ‘세습논쟁’이 한창일 때 쓴 글이다.

 

 

교회의 ‘세습문제’와 기독교 내부의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들이 사회적으로 불거지면서, 안팎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 대한 김홍도 목사의 신학적 방어 내지는 반격이 설교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일곱 금 촛대와 일곱 별>이라는 제목으로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김홍도 목사는 이들은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신봉자들과 좌경세력,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습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들의 진의는 교회 파괴에 있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려는 ‘적 그리스도 마귀’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나아가 김 목사는 이례적으로 이 설교 테이프를 전국교회에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저주로 끝맺고 있습니다.

 

“요사이 제가 읽은 책이 있는데 컬크 커크라는 사람이 쓴 the devils alphabet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악령의 역사와 그 결과를 설명하는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난하는 냉소주의자들의 자손들이 나중에 두고 보면 불구자가 되고 정신질환자가 되어서 고통 당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부모가 사탄 마귀에 사로잡혀서 냉소주의자가 되고 교회를 핍박해서 그런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세습 논쟁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탄 마귀에 사로잡힌 냉소주의자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그 결과로 자손이 마땅히 육신적인 질고를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매우 악랄한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신학적 논리는 우선, 어떤 눈먼 이의 현실을 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묻고 ‘그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하자 ‘아니다’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육신의 고통과 그 정신의 방황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마음을 기울여 생명과 사랑의 손길을 펼치기보다는 사탄 마귀의 간계에 휘둘린 심판의 결과라고 보는 그의 마음속에는 세습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이 강렬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바로 되기를 절절히 바라는 이들을 냉소주의자로 몰아 부치면서 자신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수호자라고 여기는 것은 어찌해서 교회의 세습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지 그 까닭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또는 의식적으로 그 원인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그 뜻을 깊이 헤아리는데 필요한 성서의 말씀을 세습을 비판하는 세력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공격하는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신도들의 신학적 무지나 신학적 사고의 부족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성서적으로 포장하고, 교회의 순결함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이 된 이해관계를 방어하는데 힘을 쏟는다면 이것은 말씀에 대한 폭력이자 신도들의 신앙에 중대한 해악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의 설교가 어떤 문제와 모순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써 그의 신학적 관점이 오로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어떻게 주력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습에 대한 논쟁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세습에 대한 비판을 적 그리스도의 행위로 낙인찍고 그에 가담하는 이들은 모두 대를 이어 불구와 정신질환을 겪을 각오를 하라는 것은 다중에 대한 명백한 위협과 공갈 협박이며, 이러한 교설(狡說)이야말로 교회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왜곡

 

김홍도 목사는 일곱 촛대와 일곱별을 교회와 교회의 목자로 비유하면서, 이토록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조직과 그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은 그 배후에 사탄의 음모가 있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금 촛대 사이로 거니시는 모습은 세상 교회를 돌보시고 주관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오른손의 일곱별은 주님의 교회들에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 혹은 목사들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예수님이 교회와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얼마나 귀중히 보시고 사랑하시고 계시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은 종들을 해치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 손상을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현실은 초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무수한 신앙의 배교자(背敎者)들이 생기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탄압으로 신앙의 확신을 잃고 흩어졌으며 선교운동의 중심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요한 조차 밧모섬에 갇혀 더 이상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믿음을 상실하고, 절망이 지배하는 세대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지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밧모섬에서 놀라운 계시를 받게 됩니다. 지금 거센 힘으로 신앙인들을 위협하는 마귀의 세력은 곧 멸망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이 지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을 예고하고, 이에 굴하지 말고 믿음을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격려의 메시지를 신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별과 일곱 촛대는 바로 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대에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들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하늘은 어둡고 바람은 거세어 별은 보이지 않으며 촛불은 꺼질 것만 같은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별과 촛대를 손에 쥐고 계시니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별은 교회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요, 촛대는 교회에 임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영입니다. 그러니 김홍도 목사는 별을 자신과 같은 목회자로, 촛대를 교회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맥락을 완전히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바로 이 수호천사들을 통해 교회에 보내는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이 일곱교회 가운데 오로지 핍박을 인내로 견뎌낸 빌라델비아 교회를 빼놓고는 모두 회개하라는 질타를 받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라’라고 일갈하고 계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을 요한계시록은 무섭게 일깨우시면서 이 핍박과 혼란,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는 바로 된 믿음을 회복하지 않을 때에는 그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권위와 자격과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재벌 기업 못지않게 ‘거부(巨富)가 된 교회의 기득권’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일곱 별과 일곱 촛대는 교회의 세습을 정당화해주는 성서적 상징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의 현실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치열하게 되돌아보도록 만들어 주시는 근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김홍도 목사는 일곱 별을 교회의 목자로 정의하고 자신과 동일시했고 그로써 자신에 대한 도전은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이며 이들을 통해서 교회 전체에 질타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교회가 귀중한 것은 강조하고 있지만, 교회가 바로 서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질책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초장(初章)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한 교회의 현실에 대한 뼈아픈 고발과 지적, 그리고 이로써 이루어져야 할 미래의 진로에 대하여 밝혀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홍도 목사가 요한계시록의 본문에서 취해야 할 바는 세습을 주장하는 교회의 현실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아닌가를 깊이 묵상하고 돌아보는 일에 있을 것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교회가 많이 세워진 나라는 문명하고 잘 사는 나라이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가난하고 문맹자가 많으며 얼마나 폭력이 난무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이들 나라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가난한 제3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착취하면서 부를 모은 역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교회가 이들 나라를 잘 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면 이들의 부정한 부에 대해서 교회는 도리어 크게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교회가 너무도 중요한 곳이기에 이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있는데 이들은 사탄 마귀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면서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사탄 마귀는 세상의 권세요, 이 권세에 아부하거나 빌붙어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만드는 세력이며 따라서 세상의 부와 권력의 크고 강함을 내세우는 것이야말로 실로 사탄에 투항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세상적 권세와 기득권을 대를 이어 쥐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1대 목사가 뼈를 깎고 피를 토하면서 개척하고 키운 교회의 기득권을 다른 누구에게 상속하기는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습의 절차를 완료하는 순간, 그 교회는 제1대 목사의 집안에 의해 사유화(私有化)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교회의 거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바로 이 사유화된 체제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로써 교회의 진정한 기능은 날이 갈수록 왜곡되고 말 것입니다. 사유화된 체제의 기득권 세력의 이해가 앞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운명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겠다고 했던 교회가 세상의 욕망과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순간부터 중세 가톨릭 교회는 부패하고 무너져 내렸고, 종교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중추를 이루는 대형교회의 현실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어느새 재벌 기업 못지 않게 '거부(巨富)가 된 교회의 기득권'을 놓고 주도권 쟁탈전에 빠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두고 일곱 별과 일곱 촛대를 손에 쥐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실런 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녀사냥식 논리

 

김홍도 목사는 교회의 세습 논리에 대한 비판을 하는 세력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을 모두 마귀로 몰아부치고 있습니다. 잘못된 교회와 목사의 비판세력은 모조리 ‘빨갱이’인 데다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러한 신학적 개념도 잘못된 것입니다) 신봉자’로 낙인찍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개정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황에서 상대를 빨갱이니 공산주의자니 좌경분자니 하고 몰아부치는 것이 어떤 사회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의 분단 역사에서 마녀사냥의 비극을 낳은 냉전논리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바로 이 냉전논리를 자신을 방어하는데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목사를 비판해? 너 빨갱이지?’ 하는 식으로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대의 비판을 이해하는 자세는 실로 어처구니없을 지경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기득권을 대를 이어 상속시키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빨갱이들의 준동' 쯤으로 몰아붙이려 하는 것은 반대파를 빨갱이로 찍어 매장해 버린 과거 군부정권들의 독재논리와 동일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습을 통한 교권 독재를 실현하려는 판이니 다른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는 난데없이 공산주의 사상의 무신론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교회와 공산주의는 서로 상극인데다가 고생하는 작은 교회 목사들의 눈에는 대형교회가 곱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좌경사상의 음모를 모르고 편승하여 대형교회를 파괴하는데 협력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대형교회의 모순과 비리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일체의 행위는 공산주의 사상의 음모에 자기도 모르게 휘말려 들어간 결과라는 논법입니다. 광림교회를 비롯한 대형교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반 평신도들조차도 이러한 논법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조종당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는 칼 마르크스가 ‘기독교가 시대의 아편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거론했는데,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교회가 현실의 모순은 은폐하면서 죽고 나면 천국에 간다고 세뇌시켜 현실의 부정의에 저항하는 능력을 박탈해버리고 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도리어 우리가 새겨들어 교회가 그러한 아편장사가 되는 우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할 부분입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대체로 독재에 아부해왔고,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적 현실에 침묵해왔으며 역사의 변화에 눈을 감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온 신도들의 마음에 신앙이라는 이름의 아편을 놓아줌으로써 현실의 모순에 잠잠케 했고 이기적인 개인주의 신앙을 키워놓았습니다. 그래놓고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들의 소란’으로 몰아부 칠 수 있는 것입니까?

 

대형교회의 문제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은 좌경분자!

 

김홍도 목사는 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을 친북세력으로까지 몰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논법이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완수를 위해서는 ‘먼저 밥통을 잡으라’(경제 장악)하는 것과 ‘마이크를 잡으라’(언론 장악)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론기관에 좌경분자들이 많이 들어가 마이크를 잡고 있고 펜대를 잡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교회 특히 대형교회를 흠집내고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책상 위에는 한국의 대형교회와 목사의 이름이 있고, 교세까지 다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좌경분자들, 좌경 운동권 사람들의 타도의 목표물은 보수정당, 보수언론, 보수재벌, 보수교회입니다. 이들은 남한 공산화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대형교회의 문제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은 김정일을 추종하는 좌경분자가 되는 것이며, 남한 공산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교회부터 타도의 목표물로 정한 세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무슨 정신나간 논법입니까? '좌경언론과 운동권 사람들'의 책동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사고가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적화통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래서 홍경래라든지 전봉준 등을 역사의 주류세력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홍경래나 전봉준 등은 역사의 주류가 아니라, 주류의 기득권에 저항한 세력이었으며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 한 목숨 던졌던 이들입니다. 적화통일과 홍경래, 전봉준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들의 역사적 족적을 귀중히 여기면 그것이 바로 적화통일 분자가 되는 것입니까?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이 감당했던 시대의 모순은 봉건체제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이었습니다.

 

이것은 민족적 요구에 있어서나 역사의 진로를 바로 잡기 위해서나 모두 치열하게 대결해야 할 바였습니다. 그런데 전봉준을 거론하는 것이 곧 적화통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니 가공할 논리입니다. 게다가,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이 이들의 적화통일에 필요한 작업이라는 식으로 몰아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완전한 왜곡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교회적 기득권을 유지할 방법으로 선택한 세습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이들을 위해 이렇게 반대세력을 좌경 적화통일 분자로 몰기 위해 거의 광분(狂奔)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여집니다.

 

좌경분자들이 교회를 까부수려고 하는 음모

 

김홍도 목사는 또한, 교회에 대한 비판세력은 교회를 파괴하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 신봉자이자 이들은 마귀를 따르는 세력이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보태 가지고 교회를 비난하고 주의 종을 고소하면서 어떻게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세습에 진력하려는 이유는 은퇴 후에도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기득권이란 무엇보다도 거대한 돈입니다. 대형교회 가운데 자신의 예산과 수입지출 내력을 투명성 있게 공개할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재정문제에 목사가 전권을 행사하면서 사유재산처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는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이것이 세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운영에 대한 주도권이 제3의 인물에게 이동하게 될 때, 기득권은 무너지고 말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습론자들은 바로 이 점을 염려하여 그토록 세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자신의 재정상태를 철저하게 공개하고, 재정문제에 대하여 목사의 권한이 배제되어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잡히지 않는 한, 사실 세습하지 않아도 여전히 그 기득권은 주도하는 세력만 바뀔 뿐이지 구조적 모순은 여전히 유지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세습 반대 이유들에 대한 논박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는 오로지 세습대상이 되고 있는 후임자인 아들이 자격이 있다고 하는 점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교육받고 후임자가 된 것이 세습입니까? 이것이 좌경분자들이 교회를 까부수려고 하는 음모인 것입니다.’ 김홍도 목사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까부수고"라는 식의 저열한 단어를 설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거니와, 세습 비판의 초점이 아들이 아버지의 후광, 또는 영향력을 업고 대형교회의 상속자가 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그의 논리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세습논의를 비판하는 세력들은 사탄 마귀

 

그토록 자격있는 아들이라면, 그도 개척교회를 통해서 성장하도록 할 것이며 목사 가족의 사유재산처럼 대를 이어 넘기는 식으로 그 아들의 명예를 이토록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 목사로서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닌가 합니다. 그 아들 역시, 분연히 일어서서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는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상황은 바로 잡혀 나갈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저주로 끝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교회의 세습논의를 비판하는 세력들을 얼마나 미워하고 적대하고 있으며 사탄 마귀로 몰아 징계하고 싶어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사가 이래서야 안 되지요. 대형교회의 세습은 대형교회의 모순과 비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발상이라는 점에서 철저한 개혁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세습과 상속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의 사유물로 전락시키려는 세력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대적하는 세력입니다.

 

설교를 통해, 듣는 이들의 마음에 생명과 은혜를 주지 않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자기의 기득권을 방어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이 과연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앞세우는 욕심은 자기파멸적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부디, 세습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추악한 문제로 내흥을 앓고 있는 교회와 목사들은 늦기 전에 이 모든 사태를 바로 잡고 더 이상 교회를 고통스럽게 만들어 신도들을 시험에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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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의 - 세속적 성공주의와 역사의 왜곡 -

설교비평 모음(1)

 

전병욱 목사의 - 세속적 성공주의와 역사의 왜곡 -

 

 

편집자 주/설교비평 모음 꼭지는 예전의 글들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마련한 코너이다. 전병욱 목사가 한창 잘 나갈 때 그의 목회적 관심은 오늘날 이 시대에 생존의 여러 가지 복잡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과 용기와 비전을 주는 데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전 목사의 설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강도와 그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자칫 나약해지기 쉽고 좌절에 빠지기 쉬운 청년들이 말씀과 예배, 교회 공동체 의식을 통해 저력 있고 쉽게 굴하지 않는 의지를 가진 인간형으로 자라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의 왜곡된 메시지와 목회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의 저서인 『영적 강자의 조건』이 나약해지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승리와 성공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준다면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목회적 관심을 풀어나가는 데 사용하는 비유와 성서에 접근하는 신학적 기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에 대해서는 불완전하거나 왜곡된, 신학적으로 포장했을 뿐인 현세에서의 출세론을 사용함으로써 그 본질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누구도 이러한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험악한 생존 경쟁의 직업 전선에서 성서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어떤 가치와 목표를 사명으로 품을 것인가의 도전일 것이다. 이런 당면한 과제 앞에서 전 목사는 도리어 시장의 논리 곧 현실이 요구하는 승패의 논리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승리의 위상과 좌표를 그려주고 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주도하는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 승리자라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선과 의에 대한 본질적 충성보다는 남보다 더 빨리, 더 강하고, 더 높게 자신의 위치를 굳히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들 때문에 더 많은 소외와 빈곤과 착취와 모순과 부당한 압박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실현할 것인가, 정의롭고 선하고 평등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전 목사에게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뇌와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촉구와 격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는 패배자가 된다고 해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 나라 안에서 승리하는 자의 가장 소중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점이 최대한 강조되고 부각되어야 하는데 전 목사의 메시지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다.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워라?

 

『영적 강자의 조건』은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성서윤리적으로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전 목사는 미국의 거부 워렌 버핏의 일화를 들면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이길 수밖에 없는 일에 자신을 건다고 주장한다.

 

워렌 버핏이 어떤 사장과 함께 골프를 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이 골프를 치던 사장이 그에게 내기 골프를 제안했다. “당신이 홀인원을 하면 내가 1만 달러를 주겠고, 만약 하지 못하면 당신은 내게 2달러만 내라.” 그런데 워렌 버핏은 일언지하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왜 그런가? 단돈 2달러이지만, 희박한 확률에 기대하지 않겠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다. 실패하는 사람은 대부분 희박한 확률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운다. 이기는 자는 이기는 법을 안다(『영적 강자의 조건』, 4).

 

여기서 그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인생관과 자세를 거론하는데, 거부의 ‘골프 내기’ 자체가 신앙적으로 제대로 된 비유가 될 수 있는가? 나중에 지적하겠지만,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에서도 인재론과 관련해서 일제의 황군을 모델로 삼고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지위에 오른 사람을 선망의 대상으로 설정해놓고 그들의 인생관과 승리관을 옳은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출발하는 그의 방식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여기서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운다’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유리한 확률’이란 세속에서 이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기실 우리의 ‘십자가 신앙’이란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던지는 것, 당장에는 실패처럼 보여도 궁극적인 승리를 향해 가는 믿음이 아닌가.

 

세상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처절하게 능욕당하는 것을 보았고, 모멸의 극단에 몰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은 죽음의 힘 앞에서 더 이상 기운을 쓰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십자가에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배신을 보았고, 세상의 악함이 얼마나 강한지를 절감했으며 자신들의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이 보지 못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정지해버린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이 진정한 출발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하여 순진해 빠져서 무지(無知)했던 하나님의 실패를 증언한 사건이 아니라,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지치지 않으시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축복의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좌절과 실패의 증거로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부활과 승리의 길이다. ‘신앙의 위기’는 십자가 사건의 반쪽만 볼 때 온다. 그것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다 알아버렸다고 단정하고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아직 알지 못한 자의 무지이다. 세상의 속성을 잘 안다고 여기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는 도리어 눈이 멀게 된다. 이러한 십자가 신앙에서 볼 때 유리한 확률을 기반으로 세속의 승리를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반하는 일이다.

 

 

 

승리는 무엇이고 패배는 무엇인가

 

전 목사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하는데 과연 승리는 무엇이고 패배는 무엇인가? 패배라는 것이 도전과 난관에 부딪치면 쉽게 물러나고 무너지는 패배주의를 말한다면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무엇을 향한 승리인지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서는 현세적 출세주의 논리에 빠지기 쉽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승리라는 것은 세상의 승패와는 전혀 다른 기준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믿음에서 비롯된 일이 불신(不信)의 위기에 처하고, 소망을 쌓으려 했던 일이 절망의 깊이를 보는 일로 결말짓게 되면 이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이 이루어질까? 아, 안 될 거야”하며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는데 이것이야말로 패배주의에 빠지는 일이다.

 

그는 교회 젊은이들에게 “집중하는 인생을 살라”고 하면서 ‘싱글 포커스’(single focus)라는 말을 사용한다. ‘집중하라’는 것은 나머지는 포기하고 자기의 에너지를 어떤 일에 최대한 하나로 모아서 성과를 거두라는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를 이리저리 분산하고 낭비하지 말고, 힘을 압축시키고 집중시켜야 진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학화를 거친다면 다른 차원의 얘기가 필요하다. “무엇을 위한 집중이고 무엇을 위한 포기인가.” 이것이 명확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현세적인 욕심과 목표를 좇는 세상 사람들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선과 의,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헌신, 세상의 악과 맞서는 용기, 평화 등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무망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 일에 관심을 갖고 최대한 영적 에너지를 쏟아 부을 때 집중하는 삶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지침 정도를 주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생명적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에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다.

 

결혼, 현세의 유불리를 따져라?

 

전 목사는 결혼조차도 철저한 현세적 논리로 접근한다. 이 이야기는 『영적 강자의 조건』과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에 반복해서 나오는 대목이다.

 

요즘에는 자매들도 대개 네댓 명의 형제를 사귀다가 결혼합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이렇게 여러 남자들과 교제하다가 그중 하나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A, B, C, D 네 명의 남자가 있는데 심사숙고 끝에 A를 골랐다고 합시다. 그러나 B도 B 나름으로 장점이 있고 C도 C 나름으로 감칠맛이 있을 것입니다. D도 남 주기는 아깝겠지요. 그러나 결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집중입니다. A에 집중한다는 것은 B, C, D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진짜 사랑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례를 맡다 보니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신부가 울면 친정아버지도 따라 웁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신부가 왜 우는지 속사정을 압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결혼식날 신부가 우는 것은 B, C, D가 아까워서 우는 것입니다. ‘그 아까운 놈들…’ 하면서 웁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우는 줄 알고 따라 울고, 주례자인 저는 기가 막혀서 웃습니다(『영적 강자의 조건』, 49-50. 『미래를 결정하라』, 52).

 

그는 딸을 보내면서 느끼는 아버지의 사랑과 슬픔을 끌어안기는커녕 비아냥조로 딸의 눈물을 해석한다. 안타까운 사연을 깊이 이해하기보다 현세에서 유불리의 조건을 따져 하나를 택한다는 식의 접근은 가당치 않다.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

 

역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이해하는 일에 매우 근본 되는 작업이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바르지 못한 권세의 질서를 뒤바꾸고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예언자 전통은 모두 이 역사의 불의에 대한 질타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의한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전병욱 목사는 말로는 “역사를 믿음으로 뒤집어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깊이가 얕고, 편견과 왜곡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믿음의 걸림돌이 ‘피상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말이야말로 자신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뒤집고자 하는 역사 자체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그가 바로 세우려는 것이 도리어 거꾸로 세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뭇 위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 목사의 역사관에 드러난 심각한 왜곡과 오도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선비 중 대표적으로 대원군이나 최익현처럼 옳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 말아먹었습니다. 옳은 소리는 했지만 나라 지킬 힘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에게는 구호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옥쇄’(玉碎)라고 그러죠? 장렬히 죽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했다고 하면서 자폭해버리고 맙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키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영적 강자의 조건』, 263).

 

과연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이 대원군과 최익현 같은 사람들인가? 나라를 팔아먹고 말아먹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으나 당시의 역사와 현실 앞에서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경각에 몰린 나라를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서 고민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가슴 아파해야 하는데 “힘도 없는 게 떠들기만 했다, 선비에게는 구호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당시에 정작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식의 접근은 ‘실력이 없으니까 결국은 일제 식민지가 된 거지 어떻게 해, 별 수 없는 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실력 있는 사람들인데 살려내야지 어떻게 해’ 따위의 해괴한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의 실력과 능력을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의와 선을 좇느냐가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미약하게 보여도, 힘이 없고 약한 것 같아도 정작에는 큰 힘을 드러낸다.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잘하고 대단한 역량을 갖추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앞세워 나가는 것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인간적 처세와 인간적 비전을 길러 엘리트주의식 사고를 종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잘 아는 겨자씨 비유는 세상의 욕망과는 근본적으로, 전격적으로 달리 살아가는 이들을 상징한다. 문제의 근원을 깨달은 이들의, 미미한 듯하나 마침내 거대한 역사를 이루는 그 놀라운 능력과 성취를 증언해준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믿음, 그리고 삶의 자세는 세상이 탐하는 영광이나 대세(大勢)와는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영 현실성 없고 우스우며 미력(微力)하게만 여겨진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존재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도모하기 시작하면 그 끝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주체세력은 과연 어떤 이들인가, 그들이 이루는 나라의 성품은 어떠한가를 밝혀주고 있다. 문제의 근원을 깨달은 이들답게, 이들은 높은 곳을 탐욕스럽게 열망하지 않고 자신을 나누기 위한 낮은 곳을 향해 간다. 교만한 권세에 머리 숙이지 않으며, 겸손의 힘을 믿는다. 크지만 허세를 부리는 강자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고, 작지만 열매가 있는 진실함을 귀히 여긴다.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소박함을 자랑한다.

이들은 부드럽고 따뜻한 온유함이 날카롭고 냉혹한 분노를 마침내 이긴다고 확신한다. 힘 있고 강한 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힘없고 약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 축복과 영광임을 받아들인다. 혼자 자신을 내세워 명예를 차지하기보다는, 함께 손잡고 나가기를 기뻐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러한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모든 악한 권세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작다고 하여 덤벼드는 새들의 공격 앞에서 지레 겁먹고 자신의 생명과 그 생명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인재의 문제와 관련한 그의 역사적 시각을 살펴보자. 전 목사는 역사를 통해 인재의 중요성을 되새겨보자면서 패망한 일본이 어떻게 급속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50-60년대부터 일본은 이미 세계 경영에 참여한 바 있는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아시아를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미얀마,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로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 일본군은 대위쯤 되는 위관급 장교라든지, 소령쯤 되는 영관급 장교들에게 식민지 행정을 맡겼다. …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던 사람이 스물여덟 살이었고 싱가포르 사령관이 서른 살이었다. 스물여덟, 서른 된 청년이 한 나라를 통치한 것이다. 기간은 1년 혹은 2년, 길면 5년쯤 되었다. 패망한 일본은 잿더미에 올라앉았지만 인재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스케일이 크고 세계를 보고 나라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폭넓은 시각을 가진 그들은 군사적 침략전쟁 대신 무역전쟁, 수출전쟁의 일선에 나섰다. 영토가 아니라 무역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세계 경영권을 휘어잡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재가 성공의 관건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100-101).

 

한마디로 기가 막히다. 침략황군이 일본을 재건했다는 얘기이다. 사실, 미군이 일본에 대한 역사 청산을 하면서 과거에 식민지 제국주의 투쟁에 나섰던 세력들을 고스란히 보존했고 전후 일본의 중요한 주도세력을 만들었다. 결국 일본이 과거의 흔적과 유산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그 까닭에 일본은 아직도 진실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여전히 망언을 하고 있다.

 

하기야 당시 지만원(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이란 사람이 친일청산 문제를 얘기하면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병신들이 100년 전 일본에 점령됐을 때 ‘누가 머리 좋아 일본 육사 갔고, 누가 동경제대를 갔는지 조사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른다”고 비난하면서 당시 관료를 지낸 사람들은 당대의 수재들이고 대단한 인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전 목사의 인재론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개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작업은 요원해질 뿐만 아니라, 전 목사가 인재라고 부른 그들이 아시아의 힘없는 무수한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억압한 죄과를 완전히 은폐하고 마는 것이다. 끝으로 설교자로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에 있어서 전병욱 목사의 경우 ‘진정성’의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전 목사는 성서 자체의 메시지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자신의 지식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려는 자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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