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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75

하얀 구절초 곁으로 하얀 구절초 곁으로 가을걷이를 다한 빈 들녘 빈 들녘 곁으로 옛 서라벌 토함산 능선을 배경으로 하얀 구절초를 찍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서 곁에 앉았더니 흰빛을 잃은 구절초 내 그림자가 그랬구나 보이지 않던 해가 바로 내 등 뒤에 있었구나 토함산 자락을 넘어가는 저 하얀 구름을 따라서 나도 슬쩍 푸른 동해로 고개를 기울인다 이 땅 어디를 가든 해를 등진 순간마다 회색빛 그림이 되는 한 점의 나를 보며 착한 길벗 하얀 구절초가 하얗게 웃어준다 2022. 11. 18.
지구별 학교, 이태원 교실 얘들아 있잖아 엄마가 어릴적에 뛰놀던 골목길에선 동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지 아침 밥숟가락 놓자마자 뛰쳐나가서 뛰놀던 그 옛날 엄마의 골목길은 신나는 놀이터였고 생의 맨 처음 배움터였지 아랫집과 윗집을 이어주는 앞집과 앞집을 이어주는 놀이에서는 그 누구든지 친구가 될 수 있는 어디로든 통하는 길 그 골목길 사이로 우물만한 하늘이 보이는 우리들의 땅 오늘도 골목길에서 언니들을 따라부르던 동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노래를 부르며 자라난 온 세상 아이들이 오늘은 친구와 친구끼리 .. 2022. 11. 13.
가을에는 밥만 먹어도 맛있지 칠십 노모 주름진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말소리 오십을 바라보는 딸이 입으로 저절로 받는 메아리 가을에는 밥만 먹어도 맛있지 경주 토함산 자락 사금처럼 빛나는 가을 들녘 천년의 고도 이곳 황금의 땅에서 황금벼가 누렇게 익어갑니다 옆으로는 푸릇푸릇 배춧잎들이 가을 하늘을 우러르며 키가 자라니 덩달아 입과 입이 춤을 춥니다 겨울에는 밥하고 김치만 먹어도 맛있지 들녘을 달리던 가을 바람이 구절초 꽃잎에 머물러 옳지옳지 맞장구를 칩니다 2022. 10. 26.
2022년 한글의 탈곡(한글날) 쌀알 같은 낱알의 한글들 정의와 자유 진리와 사랑이 시월의 가을볕에 구구절절 익어갑니다 저잣거리엔 욕지거리도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한글로 무르익어서 새끼줄을 꼬아 드리운 바지랑대 끝 푸른 하늘에 걸리었습니다 이제는 이 땅에서도 탈곡할 날이 머지 않았나봅니다 민중이 배가 부를 날이 하늘이 살아 숨쉬는 날이 한글과 한글로 이어져온 푸른 바람이 너른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이 푸른 가을 날 불씨가 되어준 동학농민의 횃불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삼월의 육성으로 피어올라 윗물로부터 썩어가던 이 땅에 다시금 시월의 촛불대행진으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쌀알 같은 우리의 한글들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을볕에 무르익어갑니다 썩은 밥을 먹을 수 없다 갖 탈곡한 쌀알로 밥을 지어 모두가 더불어 나누어 먹으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2022. 10. 9.
석류 중학생 아들이 마루에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단다 핸드폰 문자도 못 보낸단다 석류를 발라먹느라고 아, 가을이구나 한 알 한 알 석류알을 석류알을 매만지는 두 손이 석류 열매보다 큼직하다 문득 고개를 들더니 벽시계를 읽더니 "열 시네" 아침 햇살도 덩달아 좋아서 엄마손에 먼저 떨구어 준 석류알이 보석같다 2022. 10. 1.
다시 쓰고 싶은 인생이지만 지우고 다시 쓰고 싶은 인생이지만 평범한 오늘 이 하루가 내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란 사실을 밤새 어둔 가슴 해처럼 떠올린다 숨으로 허공을 더듬어 가슴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지 순수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매순간 숨으로 가늠해본다 한 톨의 먼지처럼 일어났다가 떠도는 이 모든 것들이 머물러 안식을 얻는 숨 이 평안한 집에서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단 하나는 영혼의 탯줄과도 같은 가슴에 드리우신 숨줄 내게 있어 숨은 하느님이 다시 새 숨을 불어넣으시며 처음 마음을 잊지 말라 하시면 상한 심령이 숨으로 이 순수에 기대어 2022. 8. 26.
이 침묵에 기대어 한 생각이 풀썩 일으키는 있음 이어서 있음 이 틈새로 흐르는 늘 고요한 없음 없는 듯 있는 이 침묵에 기대어 쉼 없는 생각이 쉼을 얻지요 2022. 7. 28.
나무 곁에 앉아서 나무 곁에 앉아서 나도 나무가 되고 싶은 날 움직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멈춤과 침묵이 이상하지 않은 이 곳 어느 사람들의 나라에서 숨과 숨으로 구석구석 몸을 지우며 한 톨의 없음으로 돌아가는 좁은길 좁은문 나를 멈추어 침묵과 침묵으로 지구의 심장으로 뿌리를 내리며 푸른 떡잎처럼 포갠 두 발끝을 돌아 맑은 수액이 냇물처럼 흐르는 숨과 숨으로 제 몸을 살라먹으며 타오르는 촛불처럼 푸르게 그리고 붉게 하늘을 우러르는 한 송이 불꽃처럼 숨과 숨으로 걸어 들어가는 무심한 길 실핏줄 같은 뿌리와 뿌리로 묵묵히 이 땅을 끌어 안으며 기도하는 언제나 평화로운 한 그루 나무처럼 나무가 되고 싶은 날 나무 곁에 앉아서 2022. 7. 21.
지금 한반도호, 공영 안내 방송은 조작 중 2014년 4월 16일 아침 7시 40분 경 텔레비전에서 자막으로 보도되던 수학여행객을 태운 여객선의 기울어짐. 놀란 마음에 무사하길 기도했으나 의심은 하지 않았다. 저 커다란 배가 가라앉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테고, 대한민국은 얼마든지 구조 능력을 갖춘 조선 강국이 아니던가. 그때까지만 해도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영언론의 보도를 믿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의 뉴스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날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명 구조에 주어진 시간을 가늠하면서 뛰어난 대한민국 육해공 구조대의 활약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분과 초를 다투어야 할 육해공 구조대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전에 곧장 깊은 바닷속으로 침잠한 듯 감감했었다. 인근 바다에는 민간.. 2022.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