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흙내음으로 태어난 ‘칠칠한’ 옛말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7. 1. 08:26

 

 

 

‘속담(俗談)’은 “예부터 민간에 내려오는 쉬운 격언이나 잠언”이라고 합니다. ‘민간(民間)’은 “여느 사람들 사이”를 가리키고, ‘격언(格言)’은 “겪은 이야기”를 가리키며, ‘잠언(箴言)’은 “가르치는 말”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옛날부터 여느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던 말이란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지는 일을 하는 동안 내려오던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속담 = 시골말’인 셈이요, ‘시골 이야기’인 셈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진 말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겪은 이야기예요.

 

“칠칠하지 못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칠칠하면 되었을 텐데, 왜 우리는 칠칠하지 못하다는 야단만 맞았을 뿐 칠칠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31쪽).

 

“그가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바위옷이 이쁘잖아요? 지금은 말랐지만 물을 주면 다시 살아날지도 몰라요.” ‘바위옷’이라고 했다”(58쪽).

 

시골마을에서 목사로 일하는 한희철 님이 쓴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를 읽습니다. 한희철 님은 ‘속담’이라는 말보다는 ‘옛글’이라는 말을 씁니다. 197가지 옛글을 놓고 오늘날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손수 시골일(흙일)을 하기도 하면서 옛글(속담)을 되새긴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한테 ‘살아가는 뜻’을 교회에서 들려주려고 옛글을 되읽는다고 해요.

 

“한숨도 버릇되는 것이라면 절망도 원망도 슬픔도 버릇 아닐까? 웃음도 희망도 사랑도 버릇일지 모른다. 타고난 성품으로서가 아니라 순간순간 내가 가진 마음의 결과가 켜켜 쌓여 만든 결과일 것이다”(75쪽).

 

“어느새 우리들의 삶은 농사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비가 올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말 몇 개쯤은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84쪽).

 

‘시루에 물은 채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라든지 ‘늘 쓰는 가래는 녹이 슬지 않는다’라든지 ‘호미 빌려간 놈이 감자 캐 간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입니다. ‘썩은 감자 하나가 섬 감자를 썩힌다’나 ‘윗논에 물이 있으면 아랫논도 물 걱정 않는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이에요.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는 동안 시골사람이 스스로 겪은 삶을 짤막한 말로 남겨서 흘러온 이야기예요.

 

 

오늘 우리는 흔히 ‘속담·격언·잠언’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곰곰이 따진다면 ‘시골말’이나 ‘시골슬기’나 ‘흙말’이나 ‘흙슬기’ 같은 새 이름을 붙여 볼 만하구나 싶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은 시골에서 태어났고, 흙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속(俗)’이나 ‘옛’이라는 이름하고는 사뭇 다른 자리에서 흐르는 말이지 싶어요.

 

시골에서 살며 시골일을 하는 시골사람은 ‘논밭’이라 말합니다. ‘콩’하고 ‘팥’을 말합니다. ‘호미·낫·쟁기’를 말합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말합니다. ‘씨앗·가을걷이·설·한가위’를 말합니다. ‘도랑·고랑’을 말합니다. ‘날씨’를 말하고 ‘바람·하늘·비·눈’을 말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이런 시골말을 놓고 도시에서는 으레 ‘한자로 옷을 입힌 다른 말’을 쓰기 마련입니다. 흙을 만지지 않는 관청 일꾼도 시골말을 잘 안 써 버릇합니다.

 

“‘돌이’와 관련된 말 중에 ‘돌이마음’이란 것이 있다. “사심을 돌려 바르고 착한 길로 들어서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돌려먹는다” 해서 ‘돌이마음’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136쪽)

 

‘옹달’이란 말이 들어가는 낱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옹달솥’은 “작고 오목한 솥”이란 뜻이다. ‘옹달시루’란 “작고 오목한 시루”라는 뜻이요, ‘옹달우물’은 “작고 오목한 우물”이란 뜻이다(146쪽).

 

한희철 님은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을 빌어서 ‘돌이마음’이나 ‘바위옷’이나 ‘옹달’이나 ‘겉볼안’이나 ‘언구럭’이나 ‘도사리’ 같은 시골말을 새롭게 살려서 오늘날에도 넉넉히 쓸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흙을 가꾸면서 살림을 짓던 오래된 말마디마다 깃든 따사로운 슬기를 돌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매우 많이 살고, 흙을 만지기보다는 흙하고 멀어진 일을 하더라도, 누구나 밥을 먹는 살림인 만큼 ‘밥이 태어난 흙자리’를 되새기는 말(슬기로운 말)을 마음에 얹어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보다도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이다”(291-292쪽).

 

“다 같이 듣고 있어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귓등’으로 들을 수도 있고, ‘귀담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314쪽).

 

옛날부터 흔히 썼기에 ‘옛말’입니다. 옛말이라 해서 오늘날에 안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삶(살다)·사랑·살림·사랑·슬기’ 같은 낱말은 아주 오래된 한국말인데, 이 말을 쓰면서 ‘오래된 말’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지 싶어요. 예나 이제나 즐겁게 쓰고 새롭게 쓰기도 해요.

 

그러나 어떤 말이든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사라지지 싶습니다. 이런 뜻에서 ‘옛말(어제 말)’을 되새기면서 ‘새말(오늘 말)’을 짓는 살림으로 나아가는 슬기로 북돋우지 싶습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살림도 ‘옛말(어른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새말(아이 말)’을 가꾸어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이끌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에서 첫머리에 다루는 ‘칠칠하다’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참말 ‘칠칠하지 못하다’나 ‘칠칠치 못하다’ 꼴로만 흔히 쓸 뿐입니다. “넌 참 칠칠하구나.”라든지 “우리 칠칠하게 살림을 지어요.”처럼 말하는 일이 매우 드물지 싶어요.

 

칠칠하다

 

1. 나무, 풀, 머리털이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

2.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고 얌전하다

3. 결이나 일 매무새가 반듯하고 야무지다

 

“칠칠한 나무”나 “칠칠한 나물”이나 “칠칠한 머리카락”처럼 “칠칠한 차림새”나 “칠칠한 사람”이나 “칠칠한 나라”로 나아가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칠칠하지 ‘못한’ 모습이 아닌, ‘칠칠한’ 아름다움을 기쁘게 찾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못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한다’는 생각으로 칠칠한 말과 넋과 삶으로 거듭나는 길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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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적 관조의 삶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6. 12. 07:35

 

존경하는 페친 최창남 목사님이 내신 책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꽃자리)를 단숨에 읽었다. 술술 잘 읽힌다. 아포리즘처럼 읽히고 수필처럼 읽히고, 또 거친 역사의 시간을 헤쳐온 한 인간의 자성적 고백처럼도 읽힌다.

최 목사님은 군부독재, 졸속근대화 시기의 거친 세월을 노동운동, 빈민운동, 문화운동과 같은 운동권에서 살아오시면서 많은 고난과 상처를 온 몸으로 겪어내셨다. 그러다가 연세 70이 가까운 시점에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집을 만들어 그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은자처럼 사신다. 많은 시간 주변의 자연물을 관조하고 지난 삶을 성찰하면서, 또 떠돌이 고양이들 친구 삼아 밥 주면서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 자족적으로 안돈하며 사신다.

 

 

이 책의 글들은 어찌 보면 고대 스토아 사상가들이 추구한 '초연한 무관심'(adiaphora)의 자세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자세의 태반이 우주적 이성의 조화가 아니라 자연만물의 여여한 이치에 깃들어 있는 점이 좀 다르다. 또 스토아 사상가들이 발명하여 바울 사도도 참조한 '자족'(autarkeia)의 가치를 내면화한 글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들과 달리 최 목사님은 특별한 목표를 향해 달음박질하는 외곬의 지향점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바람과 풀과 같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삶, 여유와 여백의 강조, 늙어가고 죽어가는 뭇 생명과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극진하고도 성의어린 배려의 태도, 시시비비를 초월한 원융적 화엄의 경지에 잇닿은 달관의 자세, 노자가 설파한 공과 허, 적요와 고독의 미덕 등을 부드러운 성찰과 권유의 말들로 풀어내며 그 견고한 지향의 자리를 대신한다.

 

간간이 80년대 경험한 투쟁적 변혁 운동의 상처와 회한이 묻어나는 글들에서는 실패의 기억들이 무성한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늘날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품고 더 잘 사랑하는 자양분으로 승화시키는 담백한 마음이 퍽 인상적이다. 역시 고상한 명분은 위험하고 강인한 용기와 도전, 투쟁의 열정은 그 앞길에 함정이 많다. 이제 70세에 근접하여 최 목사님은 그 함정을 피해가는 묘법을 체득한 듯 보이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무슨 거창한 지혜로 강변하지도 않는다.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데, 이런 것, 저런 것 두루 감싸면서 넘어가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최 목사님이 살아내신 거친 삶의 이력에 대한 동정적 혜안이 없이 이 책을 읽으면 그 달관의 언어들과 관조적 삶의 태도가 상처의 후유증을 달래는 일종의 보호기제나 이 세상사를 통달한 것처럼 보이는 턱없는 '겉멋'의 허영처럼 오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의 대안적 가치를 몸으로 깨치며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실행하고자 외로운 섬의 깊은 산속에 은자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삶이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글과 삶의 거리는 항상 아득한 것이지만 그 간격을 조율하고 줄여나가고자 애쓰는 일을 이 땅에 말깨나 하고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이 최 목사님만큼만 할 수 있다면 이 나라, 이 땅은 머잖아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모할 것이다.

 

*췌언: 이 책에서 비교를 나타내는 격조사 "~보다"는 그 앞의 명사나 대명사에 붙여 쓰는 것이 맞는데 대부분 띄어서 썼다. 이런 군더더기 지적을 하는 것은, 첫째, 이 책이 많이 팔려 2쇄, 3쇄 낼 때 그 편집 오류를 교정하여 책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서이고, 둘째, 글 쓰는 것을 전문업으로 삼아 몇 권의 책까지 내신 정** 작가를 비롯해 유명한 작가들 중에도 이곳 페북 글에 이 "~보다"를 늘 띄어 쓰는 오류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기에 고쳤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차정식/한일장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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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5. 28. 12:45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속담이나 우리말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리네 삶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가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 옛 어른들은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실 때 나는 냄새’라 했다. 생각해보면 그윽하다.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옛 어른들에게 석 달 동안 가뭄이 든다는 것은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곡식이 될만한 풀포기는 모두 새빨갛게 타들어가고 논바닥은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졌을 터. 식구들을 먹여 살릴 길이 보이지 않으니 농부의 마음은 갈라진 논바닥보다 더 깊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하루하루 애(창자)가 타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하늘,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천둥소리가 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천둥지기’라 했다)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를 대 로 마른땅을 적시며 스민다. 그때 피어나는 냄새는 세상 그 어떤 냄새와도 비교할 수 없는 냄새였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하늘 은총의 향기였을 터이니 말이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환경과 일상의 삶 등을 녹여 낸 197개의 속담과 생소한 29개의 우리말에 대한 간결한 해설과 마음에 새길 교훈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가 무서운 시절이다. 옛 어른들의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아무리 무섭다 하여도 호랑이 입은 한 번에 사람 한 명이나 동물 한 마리밖에는 물지를 못한다. 아무리 재빠르고 사납다하여도 한꺼번에 사냥감 둘을 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입은 다르다. 말 한 마디로도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잘못된 말 한 마디로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을 다치게 하거나 쓰러져 죽게 만든다. 사람의 입이 호랑이 입보다 무섭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아 세상 평온해질까.

 

그 외에 이 책에 수록된 몇 가지를 살펴보자.

 

“시루에 물은 채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

시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에 물을 채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시루에 물을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는 일은 시루에 물을 채우는 일보다도 어려운 것이어서, 불가능의 끝이라 여겨진다.

 

“어머니는 살아서는 서푼이고 죽으면 만 냥이다”

살아생전 어머니의 모습을 철없는 자식들은 서푼의 초라함으로 보곤 한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모습이 서푼이 아니라 만 냥이었음을, 만 냥이 아니라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때쯤 어머니는 이 땅을 떠나시고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다 씻어 먹어도 물은 못 씻어 먹는다”

다른 것이 더러워지면 물에 씻으면 되지만 물이 더러워지면 물을 씻을 것은 따로 없다. 이 말 속에는 무엇이 우리 삶의 최후 보루인지가 담겨 있다. 자연과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그 어떤 말보다도 깊은 울림을 가진 잠언으로 다가온다.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

이 말은 단지 냇물을 건널 때만 필요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우리 인생을 위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겉모습만 보고 ‘얕은 내’로 여겨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그렇게 하면 실수하게 되고 결국 좋은 사람을 놓치게 된다는 엄한 가르침으로도 다가온다. 누구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그윽한 가르침을 옛 어른들은 냇물 이야기로 편하게 했지 싶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것은, 먼 길을 나설 때는 눈썹조차도 빼놓고 가라는 뜻이다. ‘눈썹조차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다 빼놓고 가라는 것이다. 온갖 것을 다 챙겨가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네 삶에 눈썹의 무게 이야기는 얼마만한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을지.

 

“흉년 손님은 뒤꼭지가 예쁘다”

흉년 때에는 손님이 찾아오는 것보다도 왔던 손님이 가는 것이 더 반갑다는 뜻이다. 돌아서야 할 때 돌아서는 것이 아름다운 법, 남는 것보다도 떠나는 뒷모습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

물 때 물을지언정 함부로 짖지 않는다. ‘받는 소는 소리치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다. 일을 능히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은 공연히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속이 허전한 이가 요란할 뿐 정말 능력이 있고 속이 알찬 사람은 대개가 말이 없다. 무림의 고수가 언제 함부로 제 실력을 입방아로 대신하고, 함부로 칼을 빼들던 가.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는 말이 있거니와, 말 많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더욱 가볍게 하지는 말 일이다.

 

“제가 똥 눈 우물물 제가 도로 마신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재미있고, 통쾌하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급하다고 아무도 안 본다고 앞 뒤 가림 없이 행동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은 우물에 똥을 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는 이 없다고 슬쩍 쓰레기를 버리거나, 돈에 눈이 멀어 비 오는 날 하수구에 독성이 있는 공해물질을 함부로 흘려버리거나, 화가 났다고 자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든지, 그 때는 편할지 몰라도 그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선생님은 늘 애가 타고 속이 썩는다. 애가 타고 속이 썩는 사람이 눈 똥이 다른 사람이 눈 똥과 같을 수가 없다. 아무리 먹을 게 궁한 개에게도 훈장이 눈 똥은 쓰디써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개도 그랬을까,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은 선생님 노릇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거지가 빨래하면 눈이 온다”

거지가 빨래를 하면 눈이 온단다. 거지가 눈 오는 날을 용케 알아맞힌다는 게 아니다. 거지가 빨래를 하는 날은 날이 푹한 날이고, 그런 날은 눈이 올 가능성이 많을 뿐이다. 거지가 빨래하는 모습을 본 지가 오래 돼서 그러는 것일까, 이제는 날씨의 징조도 신문이나 방송의 일기예보에 의존을 하며 살아간다. 거지의 빨래에서 눈을 짐작하는 마음조차 잃어버린 이 시대에 시대의 징조를 헤아리는 눈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봄비는 일비고 여름비는 잠비고 가을비는 떡비고 겨울비는 술비다”

내 인생의 계절이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을 건강하고 여유 있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마음 아닐까? 언제 어떤 비가 오면 어떠랴, 은총으로 받으면 모두 은혜의 단비인 것을….

 

“삼 년 가는 거짓말 없다”

 

거짓말로 잠깐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아주 속일 수는 없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을 속일 수는 없다. 결국은 모두 드러난다. 그런데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음보다도 악함 때문이다.

 

“좋은 목수한테는 버리는 나무가 없다”

좋은 목수는 무엇보다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나무를 안다. 꼭 필요한 나무를 꼭 필요한 곳에 쓴다. 그러기에 좋은 목수는 그 어떤 나무도 함부로 버리지를 않는다. 다른 사람이 버리는 나무라 할지라도 그 나무를 잘 보관하였다가 그 나무의 소용에 꼭 맞는 곳에 사용을 한다. 버리는 나무가 없는 목수가 좋은 목수다. 버리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정성만 있으면 앵두 따 가지고 세배 간다”

아무리 때가 늦었다 하여도 정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마음을 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때를 놓쳤다고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비춰 생각해 보면 때를 놓친 것보다는 정성이 부족한 경우가 더 많다. 부족한 정성을 때 놓친 탓으로 돌리는 것은 못된 버릇이다.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 벼슬길에 오를 길이 막막하니, 혹시 역모라도 일어나 그 참에 벼슬자리나 얻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을 두고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고 했다.

 

"속 빈 자루는 곧게 설 수 없다"

자루는 제 스스로는 힘이 없어 무엇인가로 채워지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 지독하게도 가난했던 시절 아마도 이 속담은 먹는 것과 관련하여 ‘굶주린 사람은 체면을 차리고 올바로 살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오늘날은 다르지 않을까? 마음이 비면 똑바로 설 수가 없다. ‘비면’이라는 말은 ‘비우면’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마음을 스스로 비우면 천국이려니와, 있을 게 없어 속이 비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결국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산이 울면 들이 웃고 들이 울면 산이 웃는다”

어떤 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즐거워하는 이가 있으면 괴로워하는 이가 있는 법이다. 내가 즐거워할 때 혹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볼 일이다. 그러면 이기적인 기쁨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눈물 흘릴 때 혹 누군가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돌아볼 일이다. 그러면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반보기’

반보기란 시집간 딸과 친정의 가족들이 양가의 중간쯤에서 만나 그리움과 정담을 나누는 풍습이었다. 친정으로 가지 않기 때문에 시댁의 가사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고, 또한 친정 갈 때 준비해가야 하는 음식(그것을 정받이 또는 정성이라고 불렀다)도 장만하지 않아도 되고, 당일로 다녀올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풍속으로 이용되었다. 서로 반쯤 다가가 눈물겨운 만남을 가졌던 반보기, 옛 시집살이는 그만큼 섧고 고달팠던 것이리라.

 

‘집손’

‘집손’이란 허술하고 초라한 차림으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밥 도 얻어먹고 잠자리도 얻어서 자는 사람인데, 겉모습만으로 보면 거지와 다름없지만 그냥 밥을 얻어먹고 잠만 얻어 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을 통해 그 집에 있는 문제를 꿰뚫어보면서 넌지시 해결책을 일러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없이 허술한 차림으로 바람처럼 살아가지만 어디에도 속해있지를 않으면서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 티내는 일없이 구원의 빛과 길을 전해주는 사람, 그들을 ‘집손’이라 한다고 했다.

 

‘언구럭’

‘사특하고 교묘한 말로 떠벌리며 남을 농락하는 짓’이다. ‘괜히 죽는 소리를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떠보는 일’을 ‘언구럭을 떤다’고 한다.

 

‘땅 타박’

말 그대로 ‘땅이 나쁘다고 타박하는 것’을 말한다. ‘타박’이란 말이 ‘허물이나 결함을 잡아 핀잔하거나 탓함’을 뜻하니, 땅 타박이란 공연히 땅만 나쁘다고 땅만 야단치는 경우를 말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상사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하늘 탓을 한다면 그야말로 땅 타박을 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돌이마음’

‘사심을 돌려 바르고 착한 길로 들어서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묵무덤’

‘오래도록 거두지 않고 내버려두어서 거칠게 된 무덤’이 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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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댐 없이, 드러남 없이, 흔적 없이”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5. 5. 06:17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저자와 나는 공유한 역사의 시간대가 넓게 겹친다. 비록 같은 하늘 밑에 살았어도, 그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았고, 나는 현장과는 철저히 격리된 상아탑 속에서 스스로 갇혀 살았다. 학문적으로도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 관심과 수용, 우리의 민중신학에 대한 성서학 쪽에서의 지원을 자처했으나, 나 자신의 공헌은 미흡했다. 


70년대 말, 어느 날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피폐해진 모습의 청년을 만났다. 그는 한때 모 대학 기독학생회에서 내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모진 고문 끝에, 건강을 잃었다. 그때 거기에서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한 국립대학교와 두 사립대학교의 기독학생회에서, 정기적으로 때로는 부정기적으로 인도하던 성경공부를 나 스스로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학생들의 요청을 진작 거절하지 못한 것, 위험한 책 성경을, 아무런 예비지식 제공 없이, 예방 조처도 없이, 민감한 비전공 수재들에게 그대로 읽힌 것이 후회막급이다. 실천을 강조하다가, 결과적으로 내가 참여하지 못한 고난의 현장에 내 아우, 내 자식을 대신 보낸 격이 되었으니, 내 죄가 크다. 


은퇴하고 나서도 한 참 후, 은퇴한 사람이 마치 현역처럼 바쁘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를 나무라는 한 친구가 있었다. 이젠 인생 좀 조용히 살라고, 지난 삶을 뒤돌아보며, 자기 성찰을 하며, 참회하는 삶을 살라고, 내게 권한 책들이 있다. 2016-17년에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조지 기싱, 시어도어 젤딘의 책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자서전 같기도 하고, 수상록 같기도 하고, 명상록 같기도 한,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한 해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인생 끝자락만이라도 후회하지 않고 살 것을 다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문의 탓일는지 몰라도, 이 세 명, 영국과 미국 지성인 말고, 우리나라에서도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이들 중에 이런 종류의 명상록이나 수상록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이번에 꽃자리출판사에서 나온 최창남의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를 만났다. 

 


삶의 지혜가 번득인다.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다. 저자의 경륜이 있다. 삶에 대한 성찰이 있다. 시와 산문과 SNS 문자 같은 것이 섞여 나오는가 하면, 이야기의 문체도 유려하다.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 읽히면 그냥 읽어나갈 것이지, 남의 글 읽으며 분석하고 평가하고 장르를 규정짓는 못된 버릇 평생 못 버리고, 최창남의 “하는 말”을 연구한답시고 자빠져 있다. 나의 첫 마디, “이건 아포리즘이다.” 20여 년 전에 읽은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책이 떠오른다. 내가 알기로는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아포리즘”이란 말을 책 제목과 함께 나열한 첫 책이다. 독서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시가 끝나면 산문이 나온다. 산문은 ‘하다체’와 ‘하게체’와 ‘합니다체’로 구분된다. 왜 그랬을까? 내가 나를 재촉한다.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계속 읽어, 어서 읽으라고! 독백 같은 것은 ‘하다체’로, 누군가 듣는 이가 설정되어 있을 때는 ‘하게체’와 ‘합니다체’다. 시도 마찬가지다.

이 책 1/3쯤 읽어왔을 때 나는 이 책의 성격을 규명해 버리고 말았다. “명상록이다”, “수상록이다”, “더러는 회고록이다”(109, 113-114, 133쪽 이하). “더러는 참회록이다”(111쪽). 내 멋대로 어쩌구, 저쩌구.... 이 책 절반을 넘기면서부터는 나는 이 책을 그만 “구약성서 <전도서>류의 지혜문학”으로 분류하고 말았다. 울릉도간첩단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울룽도1974>를 쓰기 위해 생존자 손두익 선생을 만나러 가는 저자(133쪽)를 보면서, 나는 구약 <전도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의 관찰이다. 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과, 억압당하는 이의 억울한 처지를 목격한다. 힘없는 이들이 억울하게 억압을 당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에게는 억울함을 위로해주거나, 맺힌 한을 풀어주는 보복자가 없는 현실을 확인하고 한탄한다(전 4:1). 최창남은 한탄만 하고 있지 않고, 참여하여 위로하고, 실천하러 나선다. 그 결과물이 2012년에 출간된 <울릉도1974>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 1979년 YH사건, 198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 탄압인 '원풍모방사건, 1980년대 콘트롤데이터 노동조합 사건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산동네 목회 현장, 노동 현장의 위장취업에 이르기까지 지역 운동에 참여한다. 


내가 이 책을 <전도서>류의 지혜문학이라고 한, 두 번째 까닭은 그에게서 발견되는 해학 때문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296쪽 이하), “서툴게 살 수 있어 좋다”(318쪽 이하)를 위시하여, 2014년부터 삶의 터전을 서울 신도림에서 제주도의 어느 중산간으로 옮기고, 미친 듯이 쏘다니며 살던 삶을 그치고, “나댐 없이, 드러남 없이, 흔적 없이” “그냥저냥 대충대충 드문드문 서툴게 살기로”(372쪽), “그저 ‘알 수 없는 채’로 살기로 했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무엇인가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안다고 아는 것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안다고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순간 순간 내 삶에, 내가 머무는 공간에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성의를 다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뿐”(373쪽)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코헬렛의 숨겨둔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한창 때는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 게재된 동화 <개똥이 이야기>(2000/2007), <그것이 그것에게>(2005), 50일간의 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2009), <울릉도 1974>(2012), <숲에서 만나다>(2013) 등의 역작을 냈다. 그는 노동가요 "노동의 새벽"을 비롯한 민청련의 주제가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소로우, 기싱, 젤딘에 필적할 사상가를 만난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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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연세대학교와 히브리대학교(Ph. D.)에서 공부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와 대한성 서공회 총무, 세계성서공회연합회 이사를 엮임하였다. 어지간하면 열정 따위는 시드럭부드럭 스러질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명징한 인식과 탐구하는 열정은 아직도 줄어들지 않으신 듯하다. 2003년 <창조문예>에 황금찬, 이성교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성서신학자와 성경번역자로 살아오는 동안 누구보다도 언어에 예민하였기에, 그 여정이 시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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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별하였다> 읽기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4. 13. 07:09

 

곡의 여운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콘서트가 있습니다. 2010년 여름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로 루체른 패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은 서서히 작아지다가 사라지듯 끝납니다. 작곡자는 피아니시시모, 즉 가장 작은 소리로 음악을 끝내라는 요구에 더해 ‘죽어가듯이’(ersterbend)란 악상기호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말러 교향곡 9번이 작곡자 자신의 죽음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아바도는 연주가 끝났지만 지휘 동작을 풀지 않았고, 객석에서는 박수를 중단한 채 지휘자의 두 팔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객석은 무려 180초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음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과시하듯 앙코르를 외치거나 박수를 치는 관객을 너무 자주 보았던 터라 충격이 컸습니다. 작곡가 말러와 그 날 연주자를 향한 관객의 배려는 연주만큼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 특히 제2장에 실린 네 저자의 글은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 9번 교향곡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게 왜, 그리고 어떻게 문제가 될까요?

 

<나는 사별하였다>는 한희철 목사와 신학자 민영진 박사의 감동적인 추천사로 시작합니다. 1장은 네 저자가 살아낸 가슴시린 사별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심장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분량도 6장까지 중 가장 깁니다. 1장 끝에는 저자들에게 보내는 김기석 목사의 사려 깊은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실었습니다. 1장이 총론이라면 2장부터 4장까지는 각론입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읽는 사별자들에게 각각의 상황에 필요한 코멘트를 해줍니다. 4장 끝에는 아빠를 잃은 자녀들의 고백을 담은 소중한 기록과 만날 수 있습니다. 5장은 사별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18명이 나서서 아내나 남편을 막 떠나 보낸 후배 사별자들에게 주는 조언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6장은 갑작스레 사별을 당한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 이를테면 상속 문제의 처리, 사망자 금융자산조회 방법, 아내나 남편이 타던 차나 지급받고 있던 연금 처리, 한부모가정에 대한 국가 지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나 모임 등을 친철하게 안내합니다. 편집 후기에는 김민웅 목사와 한종호 꽃자리 대표가 이 책을 내기까지의 과정과 저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록 내지 꿀팁으로는 번역되거나 국내에서 씌어진 모든 연령을 커버하는 20권의 죽음 관련 서적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종종 만나는 한종호 대표를 통해 편집 과정에서부터 이 책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를 손에 넣기 전에 페이스북에 올라온 리뷰 또한 읽었던 터라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앞과 뒤에 배치된 편집후기와 추천의 글들을 뒤로 물리고 1장으로 직행했습니다.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이 겪은 사별 이야기 읽기는 한없이 늘어졌습니다. 읽기를 중단하고 멍 때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눈시울은 자주 붉어졌고 전율에 가까운 충격과 그것들이 불러낸 실존적 질문들로 머리는 꽉 찼습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봉을 못 내리고 3분간 말러 교향곡 9번의 여운에 몸을 맡겼듯 저 역시 마음의 파문이 가라앉기를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명의 저자들은 남편과 아내를 사별한 자기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만 저는 아내를 먼저 보냈을 때와 내 죽음이 저벅저벅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두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1장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아니 1장에 갇히길 자청했습니다.

 

독후감은 써야 하겠는데 앞에 놓인 두 편의 추천사와 저자들에게 보낸 중간의 편지, 그리고 책 뒤에 붙은 두 편의 글로부터 자꾸 달아나게 되더군요. 한희철, 민영진, 김기석, 김민웅 목사는 개인적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글과 삶 모두에서 늘 배우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양한 죽음과 사별자들을 가장 많이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성직자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입니다. 네 분의 목사와 신학자의 글을 실은 건 바로 그 때문이라 추론합니다. 그렇다면 2장에서 4장까지도 저자들이 아니라 의학이나 정신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로 하여금 정보의 객관적 신뢰성을 높이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목회 전문가와 의학 전문가들이 네 분의 저자 이야기를 앞과 뒤에서 보증해 주고 격려하는 방식도 잠시 그려보았습니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보는 다른 책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권쯤은 이 책의 네 저자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죽음과 사별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습니다.

 

통상 앙코르는 연주자가 평소 즐기는 곡이나 짧은 시간에 연주자의 기량을 마음 껏 뽐낼 수 있는 곡 중에서 선택합니다. 코믹하고 신나는 음악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앙코르 전통도 나라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유럽과 달리 앙코르에 야박하지 않습니다. 아니 요즘은 많은 클래식 연주회에서 앙코르 곡을 아예 사전 공지합니다. 그런 전통이 나라밖에도 많이 알려졌는지 외국 연주자들도 과거와 달리 우리나라에 오면 앙코르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클래식 공연장에서 브람스나 말러의 중후하고 심오한 교향곡 연주 후에는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전통이 있습니다. 곡의 여운이나 감동을 해치거나 또다른 정서와 뒤섞지 않으려는 배려이자 안전 장치인 셈입니다. 관객들 또한 무겁고 심오한 음악을 듣고 쉽고 발랄한 앙코르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말러 9번이나 브람스 4번 교향곡을 들은 날은 그 음악의 여운을 갖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분들은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성찰적이고 충격적인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네 저자의 글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습니다. 네 분 목사와 신학자의 글이 내용과 문장 모두에서 최고란 사실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저자들에게 이들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지도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사별하였다>는 4악장의 빼어난 교향곡만 듣고 책을 덮음으로 각자가 그 여운 속에 오래 머물렀다면 좋았겠다는 하나마나한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꽃자리 출판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조금은 압니다. 단 한 권이라도 판매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이런 맥빠지게 만드는 글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네 분 목사는 물론 꽃자리 출판사에도 미안한 맘이 큽니다. 그렇지만 혹시 저와 비슷한 독자들도 있을 거 같아 용기를 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에선 이 책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1장의 네 편 글의 어떤 부분에서 감동하거나 배움을 얻었는지를 중심해서 써보겠습니다.

 

 

 

택배로 이 책을 받은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활자화되는 서평도 아닌데 며칠째 못 끝내고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네 분 저자들이 맞딱뜨렸던 비통한 상황과 겪었던 슬픔이 방향을 바꿔 제게로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인지라 찔끔찔끔 글을 올렸습니다. 의사, 간호사, 장의사처럼 매일 죽음과 대면하는 직업인이라면 모를까, 비사별자라면 누구든 네 분 저자들에게만 감정이입을 하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지는 못하지 싶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를 읽으며 거듭해 물었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다면 사별 온라인 카페에 글을 쓰고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갈 거냐?'고. 대답은 'NO!'였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40대 초반에 아내를 잃었더라도 온라인 사별 카페를 거부할 자신 있느냐?'고. 대답은 여전했습니다. 누구든 앞날은 장담치 못하니 사별 카페에 가입할 수 있다는 여지는 남겨 둡니다. 만약 가입한다면 해가 몇 번 바뀔 때까지 활동을 계속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권오균 님처럼 마음 한 켠에선 온라인 사별 카페가 없어서 안 될 존재라고 느끼면서 또 한 편으론 이런 저런 이유로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겉돌고 있지 않을까. 내가 사별자가 아님은 사소해 보이는 온라인 사별 카페 가입 여부에서 분명해졌습니다.

 

먼저 떠난 보낸 남편이나 아내를 많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사별자들이 표현했다는 점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사별자와 자녀들이야 당연 그래야 하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까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희생자나 겨레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지 우린 충분하게 학습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의 문제가 사적인 사별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점을 비사별자인 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더군요. 역시 저는 비사별자가 맞습니다.

 

많은 사별자들이 기록에 욕구를 갖고 있다는 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피터슨 선교사를 통해 아팠던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 치유가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저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별자들에게 기록이 단순한 기억을 넘어 앞으로 살아가야할 방향성을 찾게 했다는 고백 또한 인상 깊었습니다.

 

"사별 초에 온라인 사별자 카페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일기처럼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나의 마음을 기록했었는데, 글을 써 가면서 차츰 내가 가야 할 방향성을 찾기 시작했다."(200)

 

이 책을 통해 정신이 번쩍 든 건 함부로 하는 사별자 앞에서의 말입니다. "위로랍시고 건네는 어떤 말도 듣기 싫어서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189)거나 "하나님이 너를 어찌 쓰시려고 자꾸 너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말이 "삼켜지지 않는 음식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49)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습니다.

 

이 글을 완성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 건 비사별자였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아내를 두고 그가 죽었을 때를 상정하며 구체적인 내용으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힘들었고, 네 저자들의 글로 촉발된 내 죽음과 관련된 생각들을 글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곤혹스러웠습니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겠으나 갑작스레 세상을 떠날 때를 대비하여 정리 좀 하며 살자는 다짐입니다. 뒷 처리를 깔끔하게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뒷 처리가 필요 없는 삶을 살아야 함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제가 이것뿐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 되겠습니다.

 

-이정숙

이정숙의 글을 읽으며 인용을 하거나 아름다운 문장이라 생각해서 친 밑줄 옆에 단 번호가 28번까지 이어졌습니다. 번호 없이 밑줄만 그은 문장도 여럿입니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쓸 문장이 아니더군요. 사유의 깊이에 놀랐습니다. 심리 전문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 외로움을 정의하기 어렵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외로움은 '내가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무언가를 공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가깝다."(69)

 

이제부터 인용하는 문장은 이정숙의 아포리즘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 남편이 떠났고 나는 길에 떨어진 낙엽 하나 마음에 담지 못했다."(44)

"고통은 나의 믿음을 절망과 의심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신은 내게 변명하지 않았고, 내 분노 앞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는 그를 비웃고 의심하는 나로 인해 초라해졌고 모욕당했으며 상처받았다."(51)

"그의 삶이 여기까지로 족했다면 그와의 인연도 이것으로 족하다."(78)

"사별 후 나는 제일 위험한 사람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이성적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적으로 되어 가는 사람, 나를 수렁에 빠뜨릴 수도 있고 내게 가장 크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사별 후의 나를 관찰하며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과 벌이는 전쟁인지도 모른다."(67)

 

이쯤해서 이정숙 문장 옆에 끄적거린 메모 하나 소개합니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든 문장은 정성을 들여 고치고 또 고친 게 아니다. 있는 감정 그대로를 쉽고 편안하게 쓴 문장이 날 울렸다."

 

그의 문장은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울린 이정숙의 문장은 평범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나를 웃기던 그의 못짓과 언어들이 그립다. 내 기억 깊은 언저리에 새겨진 나를 웃기던 그의 우스운 몸짓들이 이젠 나를 울린다."(59)

 

이 문장에 멈춰 왜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 한계를 벗어납니다. 가슴이 먹먹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여기에 적을 수 있을 뿐입니다.

 

 

네 저자들이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다룰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관심사였습니다. 누구보다 처절하게 슬픔과 절망에 직면했던 사별자들이 인간의 모순과 비합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책을 내는 저자들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주제가 이성 교제나 재혼 이야기일 듯합니다. 임규홍은 "외로움을 달래려고 이성을 만나고, 홀로임이 두려워 이성을 만나”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사별자들은 "떠난 자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길 원할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떠난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끌어안고 평생을 외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믿는 듯합니다(167-8). 시댁과 처가의 새로운 관계를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로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어려운 이야기도 빼놓지 않습니다. 떠나 보낸 이가 평생 모은 재산 처리는 사별자 위주로 해결할 것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사별자는 이제 이전의 며느리나 사위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별은 하늘이 인연의 끈을 스스로 풀어 준 것이다. 결코, 사별자의 잘못도 아니고 흠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니다. 그래서 남은 삶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형태로 거듭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이 그렇게 정해 준 것이다."(165)

 

상처한 여성을 과부라 부르는 사회적 편견에 도전하여 스스로를 과부로 부르면서 그 호칭이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게 선방을 날린 이정숙의 시도는 통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더 빛나는 대목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그는 옳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때로는 틀렸고, 확신하는 삶을 원했지만 세상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성실했지만 때로는 절망했고, 그는 신실했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는 배려심이 좋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77)

 

권오균은 불치병에 걸린 신자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치유 집회를 비판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죽고 난 후 불교 공부에 심취했음을 밝힐 뿐 아니라 처음 참석했던 사별자 오프라인 모임이 먹고 마시며 노는 데 실망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별자란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기 위해 그걸 용인한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김민경은 사별 초기에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옷, 신발, 주방 도구, 각종 침구류, 액세서리, 화장품 등의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풀어보지도 못한 택배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이 집안에 쌓이기 시작했다는, 주부로 하기 힘든 이야길 털어놓았습니다. 네 저자들의 이야기에 많은 독자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하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가 저들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담보해 주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연애 기간을 포함해 평생 단 한 차례도 말 다툼을 하지 않았던 부부였으나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아내를 떠나 보낸 권오균은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사별한) 다른 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게 떠오른 생각은 인간은 참 사소한 일에도 괴로워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사별한 나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나 배우자가 다정하지 않은 것 정도는 괴로워할만 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매우 작은 일로 보이는 그 문제가 그들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 너무 뚜렷하게 보였다."(106)

 

이제 독후감을 끝내려고 합니다. 네 사람의 사별 이야긴 각자가 당했던 사별의 이유 만큼 반응의 표정과 회복 방법도 달랐습니다. 이정숙이 내면으로 파고 들면서 사유의 폭을 넓히며 의미를 추구했다면 김민경과 임규홍은 몸을 움직여 현실과 씨름하는 일에 더 매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정숙을 읽을 땐 문장에 빠져들었고, 김민경을 읽을 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지런하게 잘 정돈된, 너무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에 놀랐습니다. 단순성이 최고의 디자인이라는 걸 생각나게 만든, 또는 절제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생각나게 만든 글이었습니다. 네 분이 보여 준 표정과 시도했던 노력들은 앞으로 사별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도전이자 먼저 걸어간 위로와 새로운 희망의 발자취가 되리라 믿습니다.

 

지강유철/작가, 전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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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25. 08:49

 

꽃자리출판사(발행인:한종호)에서 출판할 책이니 뻔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은 않아서 흔쾌히 리뷰 부탁을 승낙했다. 하루 날을 잡아 최종 편집원고를 읽었는데, 새벽부터 앉아 읽기 시작한 원고는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나는 여덟 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 집중하여 정독했던 것에 스스로도 무척 놀랐다. 온종일 한 권의 책에 푹 빠졌던 것은 나의 뚝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사별하였다의 작가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체험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별을 이야기한다. 네 명의 스토리텔러들이 사별 체험과 같은 주제를 제각기 다른 각도에서 풀어가는 그 이야기는 지닌 내용의 무게도 무게려니와 사별 주제를 풀어나가면서 독자를 견인해 내는 놀라운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나 또한 꼬박 하루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독자가 저항 없이, 아니 독자가 스스로 진지하게 스토리텔러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만드는 작가들의 이야기 솜씨가 놀랍다. 각 작가들마다 들려주는 사별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빨려들어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 이야기를 읽어 가는 동안 눈물 없이 지나갈 만한 대목을 자주 만났다. 이런 경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며 잠시나마 숙연해지기도 하고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작가들의 사별 이야기는 한 편으로는 아직 사별 체험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사별을 하게 될 독자에게 지금 누리고 있는 부부생활이나 가족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어떻게 더 성실하게 노력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다른 한 편으로는 사별의 슬픔과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고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결단과 각오로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책의 내용은 부부가 함께 읽으면 좋을 이야기들이 많다.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먼저 읽고 다른 한쪽이 나중에 읽은 후 서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은 누구나 맞이할 사별의 때를 준비하는 효과적인 독서가 될 것 같다.

 

한편, 한 가정의 비극이 이처럼 아름다운 스토리텔링 문학으로 탄생되어 사별을 경험하거나 사별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깊은 감동과 큰 위로와 귀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몹시 잔인하고 가혹하다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독자가 받는 위로와 감동이 누군가의 가정이 당한 희생을 딛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자신들의 사별을 이야기하는 필자들에게 죄송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지금 사별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작가’, ‘저자’, ‘필자등 여러 칭호로 부르고 있다. 이야기하니까 스토리텔러혹은 이야기꾼이고 이 책의 공동저작자들이니 저자이고 공동으로 집필했으니 필자. 억지로 통일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그때 문맥에 맞는 표현을 쓰는 것을 독자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

 

1994, 50대 중반이던 나는 우연히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처음 만났다. 각당복지재단이 19914월에 설립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회장 김옥라)가 정기간행물 월간 <삶과 죽음>을 창간한 것이 19916월이었다. 삶과 죽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 정기간행물은 곧이어 외국인 죽음학 전공자를 초청하여 죽음학 공개강좌를 여러 날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죽음의 문제를 금기로 여기던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公論化)하기 시작하였다. 공개강좌는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30여 년 동안 한 해에 3개월 동안 20여 강좌를 개강하여 죽음준비 교육지도자를 양성해오고 있다. 성서학을 전공한 나도 죽음학 강사가 되어 성서와 기독교 신학 쪽에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 왔는지 그 역사와 내용을 살피는 강연을 계속해 왔다.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가 출범했을 때도 그리고 정기간행물 <삶과 죽음>이 창간되었을 때도 주변에서는 비아냥이 많았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죽음을 생각해?”, “왜 하필 죽음이야? (듣기에 기분 나쁘잖아!)”, “말이 씨가 된다고, 죽는 이야기 자주 하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어!” 하며 수군거리는 이들이 많았다.

 

동료 교수 중에는 죽음학 공개강좌에 강사로 초청을 받기라도 하면 질겁을 하고 손사래를 치곤 했다. 그 정도는 약과였다. “사람을 뭘로 보고 내게 죽음을 주제로 강연을 하라는 거냐?”고 역정을 내고 달려드는 교수도 있었다. 나도 그런 교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가 여러 분야 교수들을 강사로 초청했던 것은 그들이 죽음학 전문교수들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음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그 중에 더러 자신들의 전공분야에 죽음학을 접목하여 죽음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일에 공헌하도록 양성할 목적으로 초청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죽음과 관련된 문제를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어했던 것은 공개강좌에 초대받은 강사들뿐만 아니라 공개강좌에 초청된 청중도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은 당연히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강사들도 스스로 배우면서 바뀌었고 청중도 배우면서 바뀌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 직전까지 최근 강좌의 청중은 젊은 청장년이 다수였고 오히려 노년층의 참여가 저조했다. 세상이 그만큼 바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별하였다도 이제는 말하기에 부담이 되거나 듣기에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고 수많은 독자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 배우자가 사별자가 된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가 먼저 간다면 홀로 남는 아내를 위해 평소에 무엇을 해 놓고 가야하나? 이런 걱정도 해보지만 현명한 나의 아내는 내가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홀로 남았을 때 어떻게 살 것인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것 같다. 노년에 이르러 사별자가 되는 경우는 한창 나이에 졸지에 당하는 사별과는 달리 이런 준비 과정이 있다는 것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내가 사별자가 되었을 때를 걱정하기보다는 사별자가 된 그가 나를 너무나도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 같아서 서운하다.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이 서운하다면 그것은 나의 이기적 과욕일 것이다.

 

아파트 생활에서 제일 흉물은 학자의 서재다. 현직 때는 교수실이나 연구실을 서재로 사용했다. 은퇴하면서 추려 가져온 책만 해도 방 네 칸 아파트에서 서재가 방 두 칸을 차지하니 집을 좀 우아하게 꾸미고 싶어 하는 주부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다. 나 죽으면 제일 먼저 서재 두 칸을 싹 비우겠다는 것이 내 아내의 평소 생각이다(당연하지!). 20여 권의 저서와 일기, 사진을 포함한 내 평생의 기록물은 용량이 겨우 500기가바이트 미만이어서 1테라짜리 외장 하드 디스크 하나면 넉넉하니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는 후학들에게 적당한 때에 미리 주면 될 것이다.

 

내가 사별자가 된다면?

 

나의 아내가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하여 내가 사별자가 된다면? 내가 사별자로 남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권오균 님과 임규홍 님처럼 한창 나이에 사별자가 되든, 나처럼 망구(望九)의 나이에 사별자가 되든, 비록 문제 처리방식은 달라도 봉착하는 문제는 같을 것 같다. 나는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서서히 잊히는 나이를 살고 있다. 우리 내외가 혼인 50주년을 자축한 것도 벌써 3년 전이다. 남녀가 서로 만나 두 아들을 낳고 두 며느리를 맞이하고 손자 손녀를 네 명이나 보았으니 이만하면 백년해로(百年偕老)요 백년해락(百年偕樂)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내외의 사별이다. 우리 내외지간 누가 먼저 사별을 당하더라도 나나 내 아내나 둘 다 고종명(考終命)일 터이니 젊은 날에 예기치 못한 순간에 급습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사별과는 다를 것이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두 여성과 두 남성 사별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독자든 자신의 처지를 살펴보게 될 것 같다. 누구나 다 사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늘 잊고 사는 것이 우리인데 이 책은 사별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상실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치유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나는 이 필자들에게서 배운다. 그들의 경험담을 듣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어떤 것은 나도 따라 하고 싶다. 이 책의 저자들은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을 사별인생 선배로서 후배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기도 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이정숙 님에게서는 사별자인 내 아내가 고인이 된 나를 좋게 기억하려면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권오균 님이 소개한 사별 카페는 나나 내 아내가 사별자가 되면 즐겨 찾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받는 소통의 마당이 될 것이다. 임규홍 님에게서는 사별 후 시댁과 처가의 관계 재조정의 지혜를 배운다. 김민경 님에게서는 나를 위한 위로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볼 아이디어를 얻는다.

 

 

사별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놀랐던 것은 한창 나이에 홀로된 배우자들이 모여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동병상련하는 온라인 사별 카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덕분이긴 하겠지만 홀로된 이들이 자신들의 삶과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마당이 있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인터넷 카페인 만큼 24시간 열려 있는 마당이다. 아마도 이 책의 공동집필자 네 분도 온라인 사별 카페에서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이 책을 펴내기로 한 것 같다.

 

임규홍 님은 저자의 머리말에서 사별은 우리가 슬픔과 고통의 광야를 걷게 했고, 우리는 그 광야에서 울고 있는 서로를 만났다. 배우자와 사별한 이들이 같이 울어 주고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는 사별 카페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고통과 슬픔과 그리움을 온라인 사별 카페에서 글로 토해냈다. 우리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수많은 사별 경험자들의 글을 통해 적절한 위로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기에 그 경험을 다른 사별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5쪽 발췌)고 말한다.

 

이정숙 님은 자신이 “5남매의 엄마였던 가난한 41살 나의 엄마밑에서 자라던 과거가 있어서 온라인 사별 카페를 드나들면서 배우자를 잃고 혼자 키우고 있는 어린 자녀들이 사회에서 한부모 가정이라고 차별당하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글을 자주 확인하며(26) 그쪽으로 관심을 키워간다.

 

권오균 님은 자신이 사별 카페에 가입하게 된 경위와 온·오프라인 카페 모임에 대한 기대, 그리고 좌절과 적응과 창조적 참여의 단계를 비교적 상세히 이야기한다. 독자들은 지금 자기들이 읽고 있는 나는 사별하였다라는 이 책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도 발견한다. “(사별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별자들을 위한 책을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 친구가 다른 분과 책을 쓰려고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기에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어찌하다 보니 같이 책을 쓰게 되었다. 사람 일은 참 모르겠다. 사별 카페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70).

 

김민경 님도 사별 카페에서 등단한 작가다. 사별 초에 온라인 사별자 카페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일기처럼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나의 마음을 기록했었는데 글을 써 가면서 차츰 내가 가야 할 방향성을 찾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고,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세워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51).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지던 초창기, 비비안 로드리고 라이스(Vivienne R. Reich)라고 하는 시인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고하는 편지인 A Letter to Humanity라는 장문의 서사시를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시는 삽시간에 여러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고,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있다.

 

그 여성 시인의 시도 시지만 나는 그가 홀로된 남녀 배우자들을 위한 정기간행물 월간지 REINVENTION의 편집장이라는 것에 더 관심이 갔다. “, 이런 정기간행물도 있구나!” 온라인 사별 카페가 나는 사별하였다라고 하는 감동적인 작품의 모체가 되었다면 홀로된 이들을 위한 온·오프라인 정기간행물도 나와서 사별과 독신과 죽음과 애도와 상실 치유와 한부모자녀를 위한 법률제정과 죽음학 전반에 관한 다양한 주제들을 사회 전반적인 관심사로 공론화(公論化)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도 함께 내다본다.

 

이정숙 님의 나는 무엇을 잃었는가?”

 

이정숙 님의 이야기 중에 그가 남편을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가 남편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이 부럽다. “그는 옳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때로는 틀렸고, 확신하는 삶을 원했지만 세상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성실했지만 때로는 절망했고, 그는 신실했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는 배려심이 좋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는 그의 삶이 완벽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부터 1주기 추모식까지 1년 동안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마주하며 그의 삶을 다시 곱씹어 생각해 보니 그는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아 냈다는 생각이 든다”(40). 나도 이처럼 후한 평가를 아내에게 받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평소에도 아내가 감동할 만큼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그동안 아내에게 어떠했을까?

 

그는 또 상실의 치유가 자신의 상실을 똑바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나는 남편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기억의 빗장을 풀고 그에 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그가 내게 누구였는지 자문했다”(21)고 하면서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남편이라면 남편이 자기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일고여덟 가지로 확인한다.

 

그는 자기의 남편을 두고 그는 내가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사랑, 어떤 부끄럼도 없이 나를 사랑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내 남자였다.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보호자였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다. 내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내가 할머니가 될 때 내 손주들의 좋은 할아버지였을 것이고), 매사에 나를 편들어 주는 지지자였다. 나를 웃게 하는 코미디언이었다. 내가 맘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오빠이자 아버지였다”(21~24쪽 요약)고 회고한다. 이 성적을 학점으로 계산한다면 A+. 나는 살아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죽고 나서도 이런 성적은 못 받을 것이다.

 

권오균 님의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권오균 님은 아내와는 16년 반을 같이 살았고 그들의 삶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말다툼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슬하에 자식은 두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교인으로서 모태신앙이었던 그의 아내는 암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 나가고자 했고 치유집회에도 가 보았지만이는 사실상 사기행위에 불과했고 아내의 투병의지는 계속 굳건했으나 남편 권오균 님의 신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져 갔다고 회고한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남편은 불교에 심취한다.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불교에서 배운다. 불교를 공부하며 그가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인간에게 죽음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사별의 아픔은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67)는 것임을 깨닫는다.

 

오히려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서 아내에 대한 정이 더 깊어진다. 그래서 그는 침실과 거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아내의 사진을 놓아두거나 걸어둔다. 그의 가방에도 사진을 넣은 배지를 만들어서 붙이고 다닌다(73).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동영상을 만들어서 아내의 SNS 게시판에 올리기도 하고 그 동영상에는 아내와 그의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들이 있고 그가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들어 있다(74). 드디어 그는 합성사진을 만드는 방법까지 익혀 아내가 아프기 전에 같이 찍은 인물 사진만 오려 내어 새로운 풍경사진 속에 집어넣기도 한다(75).

 

이 밖에도 그는 운동모임, 등산모임, 독서모임 등 5~6개의 동호회 모임에 가입했고(77), 외로움을 잊으려고 취미생활의 폭을 넓힌다. 경비행기 파일럿, 패러글라이딩, 스킨스쿠버 등을 시도하다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등산임을 발견한다(86). 그러다가 끝내 사별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쓰자고 해서(88), 아마도 친구들과의 공저 나는 사별하였다가 나온 것 같다. 네 명의 공저자에게 이 수기작품을 가지고 어느 문학단체에든지 신인작가 등단을 시도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임규홍 님의 사별 후

 

임규홍 님의 경우는 상실의 아픔과 함께 상실 이후의 삶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가까운 주변과의 슬기로운 관계 조정의 필요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돋보인다. 그중 나의 관심을 끄는 하나가 사별 후 시댁과 처가의 관계재정립에 대한 저자의 지혜다. 더욱이 저자의 경우는 아내가 오녀일남 중 장녀였고, 아내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홀로된 어머니를 도와 처가의 대들보 구실을 했으니 아내의 죽음은 처가에도 큰 충격이었고 장모도 석 달 후 고인이 되고 말았으니 처가와의 관계는 불가원(不可遠) 불가근(不可近)이 되고 만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데는 서로 간의 이해와 배려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두 가지를 더 지적한다. 하나는 남편 잃은 여성 사별자가 시가와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시어머니로서는 아들을 잃은 슬픔이 누구보다도 크겠지만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를 잃은 며느리의 슬픔과 고통 또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클 것이다. 사별 후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서 시가나 처가와의 갈등이 생긴다면 사별자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102) 라고 하면서 사별자의 양가 가족들은 이제 가장이 되어서 혼자 어린 자녀들을 키우며,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하는 사별자의 고통과 외로움을 헤아리고 배려해 주어야”(102) 할 것을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살아갈 날이 아직 창창한 사별자의 경우 재혼을 고려해 보도록 권면한다. 사랑할 대상이 따로 있다면 굳이 재혼이 아니어도 된다. “일편단심으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려면 망자를 안고 가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살아야 할 시간이 길게 남아 있다면 평생을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다. 그 기나긴 세월을 어찌하려나. 하지만 사랑의 대상은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111).

 

김민경 님의 나를 위한 위로

 

김민경 님의 경우는 아픔을 스스로 치료하는 처방에 대해 본인 스스로 찾아낸 방법을 기꺼이 활용한다. 남편의 간암 선고를 받고서 그 와중에도 김민경 님이 제일 먼저 주선한 것이 가족여행이었다고 한다. 남편과의 사별 후 그를 위로한 것 역시 여행이었다고 한다. 남편의 기일 3주기 직전에는 사별자는 자기 아이들과 함께 3주간 북미와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다. 자기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여행도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가끔 나에게 선물을 한다. 일상의 업무와 지친 하루를 보낸 내가 안쓰러울 때,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에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그리고 이제는 기억해 줄 사람이 없는 결혼기념일”(142)을 맞았을 때, 저자는 자신을 위한 선물의 구실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

 

나 혼자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몰려올 때면 나는 늘 나에게 선물을 사 주었었다. 나를 위한 선물이란 것이 별것은 아니다. 새로 생긴 카페로 투어를 간다거나 하루 날 잡아 영화를 세 편 정도 연이어 본다거나, 혼자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본다거나, 화초나 생화 꽃을 한 아름 산다거나 하는 것들이 주로 내게 주는 선물이다”(142-143). 발상의 전환이다. 마구잡이 쇼핑이나 소비가 아니라 치유를 위한 유익한 낭비. 그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김민경 저자의 이러한 생각과 실천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가끔 혼자 커피를 마시려 카페에 들려선 두 잔의 음료를 주문해 들고나와서 한 잔은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좋아하는 아이스아메리카노야!’”(141), 그가 문득 사무치게 생각나는 날이면 그가 좋아했던 자장면을 먹으러 중국음식점에 들어가 짬뽕 하나 자장면 하나를 주문해서 한 그릇은 앞에 두고 먹은 날도있었던 것을 회고한다(142). 이 대목에서는 나 역시 이 비슷한 경우를 직접 보았기에 이럴 수도 있겠다 싶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우리 사회에서 잘 알려진 어느 인사와 대중식당에서 저녁을 같이한 적이 있다. 우리 둘이 먹는 식탁에 4인분이 차려져 있었다. 누가 더 오느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무도 더 오지 않았다. 빠진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가 먹은 음식과 똑같은 2인분 식사는 그대로 상에 남았었다. 나를 초대한 그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식당 종업원에게 슬쩍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를 수행하는 비서가 내 궁금증을 풀어준다. 혼자 식사할 때도 가끔 저렇게 고인이 되신 부모님의 식탁을 함께 차린다는 것이다. 남편을 여읜 부인이 혼자 식사하면서 2인분을 주문하여 남편의 현존을 체감하려고 하는 애틋한 심정이나 고인이 된 부모님 밥상을 차리는 자식의 효성이나 낯설지만 둘 다 존경스럽다.

 

사별자를 위한 안내

 

죽을 준비와 사별 준비는 다르다. 이게 문제다. 묫자리를 봐둔다든가, 장의사(葬儀社) 보험을 들어둔다든가, 배우자가 사별자가 되었을 때 살아갈 경제적 기반을 닦아놓는다든가, 유산을 분배하는 원칙을 법에 따라 정해놓는다든가, 유언을 미리 해둔다든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것들은 모두 자기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다. 그러나 나 자신이 사별자가 되면 내가 살아남아서 죽은 자를 보내는 장례예식 일체를 주관하고 배우자의 장례 이후 그가 고인이 됨으로써 유가족에게 남겨지는 온갖 문제와 사별자로서는 처음 당하는 여러 가지 익숙하지 않은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사별자 자신이 배우자 상실로 인해 가지게 되는 슬픔, 그리움, 외로움, 가족 구성원들(특히 자녀)이 저마다 겪는 고통을 함께 치유해야 한다.

 

이 책의 3장과 4장은 사별자의 슬픔 치유의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5장은 부모를 여읜 자녀들의 문제를 다룬다. 독자는 부모의 사별을 경험한 자녀의 이야기를 직접 듣게 한다. 6장은 사별을 경험한 이들에게 듣는 조언을 모아놓은 것이고 7장은 사별자들이 자주 제기하는 질문과 대답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소개된 추천도서는 나는 사별하였다를 읽고 나서도 사별에 관한 관심이 오히려 더 생겼다면 보충하여 읽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죽음 준비에 관한 정보제공은 어느 정도 쉽게 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사별 준비에 관한 자료로서는 이 책이 이 방면에서는 우리말 이야기꾼들이 우리말로 이야기해준 첫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 삶이라는 신비(저자들에게 띄우는 김기석 목사의 편지) fzari.tistory.com/2467

 

삶이라는 신비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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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편집자의 글)fzari.tistory.com/2460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물세 번째의 시도, 그렇게 해서 이 원고는 책으로( 세상과 만났습니다. 사별,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떠난 이들의 슬픔을 듣는 일은 괴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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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한희철 목사의 추천 글)fzari.tistory.com/2475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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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김민웅 교수의 서평) fzari.tistory.com/2478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

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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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16. 06:21

 

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겪는 충격과 고독 그리고 고통의 삶을 끌어안고 그 힘겨운 내면 풍경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아무래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슬며시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한 선택이다. 이들이 그걸 모를까?

폐허가 따로 없다

 

귀담아 들어주고 알아주는 이야기도 아닌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사별하였다는 이 정직한 제목은 사실 가혹하면서 도발적이다. 책장을 넘기고 들춰보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 도발성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난데없이 평안한 일상에 끌어들이는 우격다짐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평안한 일상에 난데없이 습격해 들어온 배우자의 죽음. 그러자 지금까지 지탱해온 삶이 온통 구겨지고 허물어진다. 폐허가 따로 없다. 혼자 이 모든 폭풍을 견뎌내야 한다. 죽은 것은 배우자인데 온몸과 영혼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시련은 언제나 혹독하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시간의 속도는 느려지고 그 시간 속에 잠겨가는 존재는 이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온 힘을 다시 끌어모아 일어나려 해도 마음은 끝없이 흩어지고 인생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아침은 태양이 아니고 저녁은 고요가 아니다.

 

네 명의 사별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이 붕괴되는 것을 절절하게 겪는다. 지금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으며, 계획했던 미래는 불투명한 안개의 강철같은 벽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하나씩 놓아버린다. 시간의 위로를 기다리기에는 이미 그 영혼이 지쳐있고 육신은 제 것이 아니다. 그러다 퍼뜩 가슴에 날아드는 생각 하나가 이들을 살려내기 시작한다.

 

배우자의 죽음을 부둥켜안고 마냥 슬픔에 잠겨 삶을 포기하거나 망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간 배우자들이 그토록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시간임을 절감했고,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고 허망한 것인지도 체감했다. 우리는 상실의 고통과 시간을 통해 남들은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온 세상에 자기만 가장 아프고 힘겨운 줄 알았다가 이들은 한걸음 더 내디딘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은 것처럼 지금 어딘가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별자에게 이 책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38)

 

죽음을 넘은 자리에 마련된 자리

 

하소연을 쏟아내려 한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강으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것도 아니다.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 네 분의 사별자들은 자기 삶의 테두리에 묶여 지내지 않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이들이 그렇게 밟아온 길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따뜻한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나의 상실과 슬픔에만 집중해 있을 때 나의 슬픔과 고통은 거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상실과 아픔을 깊이 마주할수록 거대했던 나의 고통과 슬픔이 점점 작아진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깊이 마주하면서 위로를 받았고 내가 혼자 광야에 던져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그들을 통해 애통하는 가운데 광야를 건너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47-48)

 

애통하는 이여,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다시 새겨진다. 이어지는 말씀은 무엇이었던가?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니.”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위로받는 이를 넘어 위로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넘은 자리에 이들에게 마련된 자리다.

 

아프지만 고맙다

 

문득 돌아보니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서 피어나는 것은 감사다. 인생사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세어보면 축복 또한 적지 않다. 그걸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후회스러움이 밀려온다.

 

결혼생활을 할 때는 내가 훌륭한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떠나고 나니 네게 잘해 준 것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고 못해 준 것만 자꾸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고 너를 만났기에 내 삶은 의미가 있고 축복된 것이었어. 소중한 추억을 항상 기억하며 살고 싶구나.”(131-132)

 

생의 의미는 이렇게 복원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각난 것들이 다시 하나의 그림으로 돌아온다. 치유와 회복이다.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상실의 슬픔은 하루아침에 무디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은 시간이 기억을 지우면서 천천히 슬픔을 지워 갈 것이다. 그러니 사별 초기라면 지금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나는 버리고 싶었고, 아이들은 어미의 흔적을 안고 싶어 했다. 나는 피하고 버리면서 잊으려 했고, 아이들은 품으면서 잊으려 했을 뿐이다. 세월이 더 지나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이 잦아들면 언젠가 본인들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151, 154-155)

 

사별자의 삶은 기력을 찾아간다. 그것이 사랑하는 배우자를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도 마침내 꺼낸다.

 

사별 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서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며 죽은 배우자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다시 사랑하는 것은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빠질 일이 아니다.”(169)

 

인간의 삶은 누구의 것이든 존중받아야 하며 그로써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야 한다. 배우자의 죽음이 남은 이의 종착역이 아니다. 애도와 회복, 그 이후의 삶은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의 사연을 하나 하나 내면화하면서 인간은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인생의 지혜자가 된다.

 

남편을 땅에 묻고 처음으로 친정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평생 강한 분이신 줄 알았던 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로 인해 눈이 빨갛게 충혈되도록 우셨다.”(188)

 

나만 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눈물 앞에서 사별자는 서서히 깨달아간다. “슬픔으로 인해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202)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넘어져야 보이는 것이 있다. 보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보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 사별자들의 고해성사는 아직 그 길에 들어서지 않는 이들에게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별자들이 고통으로 토로한 이야기 속에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감사를 하게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희극과 비극을 발명해냈다. 비극은 언제나 죽음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신들의 농간과 인간의 어리석음이 하나가 되어 비극은 탄생한다. 그러나 그 비극을 넘는 길을 이들은 갈망했다. 카타르시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다. 막은 비장하게 내리지만 극을 보고 흩어지는 관객의 마음속에는 그 다음 장면이 각기 이어질 것이다.

 

나는 사별하였다역시 책을 덮고 나면 각자 다음 장면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가혹하지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으며 결코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아프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고마운 책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 그 서사를 다시 쓰게 할 것이기 때문에.

 

김민웅/경희대 미래 문명원 교수

 

 

* 삶이라는 신비(저자들에게 띄우는 김기석 목사의 편지) fzari.tistory.com/2467

 

삶이라는 신비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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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편집자의 글)fzari.tistory.com/2460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물세 번째의 시도, 그렇게 해서 이 원고는 책으로 세상과 만났습니다. 사별,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떠난 이들의 슬픔을 듣는 일은 괴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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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한희철 목사의 추천 글)fzari.tistory.com/2475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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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민영진 목사의 추천 글)fzari.tistory.com/2491

 

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

꽃자리출판사(발행인:한종호)에서 출판할 책이니 뻔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은 않아서 흔쾌히 리뷰 부탁을 승낙했다. 하루 날을 잡아 최종 편집원고를 읽었는데, 새벽부터 앉아 읽기 시작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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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14. 08:20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는 마음이 그랬습니다. ‘사별자와 대조가 되는 비사별자란 말도 그랬고, ‘비사별자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해와 공감은 되면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원고를 다 읽은 뒤에야 항복하듯 서너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이별 중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 사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 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은 근원적인 아픔이라는 것 등입니다. 분명 처음 해보는 생각은 아닌데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얼음장 아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금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북미원주민들은 그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목회의 길을 걸어오며 적지 않은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대부분은 교우들이나 교우 가족들과의 헤어짐이어서 집례를 맡게 되었고, 집례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인 슬픔을 위로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주 떠올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라 했던 모리 교수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비록 헤어진다 해도 소중한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말하고는 했지요.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는 말도 종종 떠올렸습니다. 모든 만남 뒤엔 헤어짐이 따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어서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있으니 소망을 갖자며 위로를 구하고는 했습니다.

 

너무 서둘러 떠났다 싶은 죽음 앞에서는 조선시대 시인 박은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자고 약속한 그의 아내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시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슬픔을 두고 인명기능구, 이갈여우잠’(人命豈能久, 亦碣如牛暫)이라 노래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게 어찌 오래 가랴, 소 발자국에 고인 물처럼 쉬 마를 테지라는 뜻입니다. 소 발자국에 잠깐 고였다가 이내 마르고 마는 물의 이미지는 아침 안개와 같고 풀의 꽃과 같다는 말씀보다도 인생의 덧없음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천붕이나 참척이란 말을 떠올릴 때도 있었습니다. ‘천붕’(天崩)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말하고, ‘참혹할 참근심할 척을 쓰는 참척’(慘慽)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단장지애(斷腸之哀)의 고통은 참척이 아닐까 짐작하고는 했습니다.

 

많은 장례식에 참여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이들의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을 위로하며 지내왔다 싶었던 내게 나는 사별하였다에 실린 글들은 묵중하고도 날카로운 통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슬픔을 당한 이의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했구나, 그들이 겪고 있는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의 일부만을 헤아렸구나, 쉽게 가닿을 수 없는 아픔을 두고 상당 부분 교리에 기댔구나 싶었습니다.

 

속 깊이 울어야 하는 마음의 몸살을, 하나님께 독기 든 언어로 대드는, 창자까지 꼬이는, 더듬이를 잃어버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개미의 심정을, 슬픔에 절망하는 나와 그런 나를 망연히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를, 하루씩만 살아가기로 겨우 다짐하는 이의 심정을, 지붕이 사라진 추운 집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머무는 시린 느낌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자신도 모르게 겪어야 하는 대인기피증과 혼자서는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는 안쓰러운 결정장애를, 익숙했던 일이 갈수록 서툴러지는 퇴화현상을, 버리면서 지우기와 품으면서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때마다 확인해야 하는 허전함과 당혹감을, 여행이나 일이나 쇼핑이나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것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근원적인 공허함을, 시간이 지나가도 결코 옅어지거나 가벼워지지 않는, 그런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을 나는 다 모르고 있었구나, 충분히 짐작하지 못했구나, 그동안 이만하면 됐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깊은 자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김남조 시인의 <사랑초서>를 좋아했습니다. 사랑에 관한 가장 깊고 맑은 절창이다 싶었지요. 세월이 지나가면서도 아직 다 끝나지 않은 메아리처럼 마음에 남은 대목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부싯돌을 그어 불을 붙인 듯 나는 사별하였다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사랑초서의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름 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먼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어느 날 만나, 처음 세상이 열리듯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모시고, 내가 너인 듯 그대가 나인 듯 하나 되어 걸어온 길,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훌쩍 곁을 떠나는 것은 나의 절반이 아니라 나의 전부가, 나의 반쪽이 아니라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원하지도 않았고 준비되지도 않은 순간 영혼의 동맹이 깨어진다는 것은 내 영혼이 흔적조차 찾지 못할 만큼 사라지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가까이 지내는 원로장로님 내외분과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인 장로님은 사진을 찍고 아내인 권사님은 시를 씁니다. 서너 해 전부터 두 분은 달력을 만듭니다. 남편의 사진과 아내의 시가 어울린 달력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달력으로, 두 사람의 어울림 자체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합니다.

 

여든이 넘어 늘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두 분께 막 읽기를 마친 나는 사별하였다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 중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 자체도 있겠거니와 함께 살아온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권사님이 갑자기 두 눈을 손으로 감쌌습니다. 그런 모습은 한참을 이어졌습니다. 권사님은 울고 있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일,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죄송하다고 하자 어렵게 눈물을 닦은 권사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요즘 권사님에겐 드는 생각이 들곤 한답니다. 내가 먼저 떠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밥도 못하고 빨래도 못 하는 사람이 집에 들어서다가 대문 비밀번호도 잊어버린 채 문 앞에 오래 서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찾아들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듣게 된 사별자’ ‘비사별자’ ‘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이 권사님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꽃을 사랑하는 진짜 이유는 꽃의 빛깔이나 모양 혹은 향기가 아니라 꽃이 시들기 때문, 꽃이 시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피어있는 그 순간을 사랑하는 것, 다른 욕심 없이 다만 함께 있는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그게 최선의 걸음일 거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젖는 두 눈을 닦으며, 어떤 때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다 읽고는 불씨처럼 마음에 담아둔 생각이 있습니다. 사별의 아픔을 경험한 이들이 한결같이 들려주는 경험담이 있었습니다. 광야에 홀로 내던져진 것처럼 혼자가 되고 나니 가까운 이들의 마땅한 관심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이들의 무관심도 모두가 부담과 원망으로 다가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문 위로가 되었던 것은 따로 있었는데, 같은 일을 경험한 이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같은 아픔을 경험한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송두리째 삶의 뿌리가 뽑힌 듯한 상처와 허전함을 어루만져 주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것은 그 손을 단번에 녹여주는 뜨거운 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차가움을 단번에 녹여주는 뜨거운 손은 분명 고맙겠지만, 까닭모를 아픔이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손은, 그 손을 오래도록 잡아주는 언 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우 중 얼마 전에 남편을 떠나보내신 권사님이 있습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터인지 권사님은 담담하게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랬던 권사님이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단 오 분만이라도 남편과 함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남들이 그런 말 할 땐 그 심정 전혀 몰랐는데 이제는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고 말이지요. 다음에 권사님을 만나면 권사님의 손을 오래 잡아드리려고 합니다. 내 손이 충분히 따뜻하지 못해도 그럴수록 오래 마주잡아야지 싶습니다.

 

누군가의 언 손을 마주잡기 위해 큰 용기를 가지고 내밀한 아픔을 털어놓고 있는 언 손들을, 부디 하늘이 가없는 사랑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기를 빕니다.

 

한희철/정릉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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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신비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8. 06:53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하면 아물어 가고 있던 상처를 후벼파거나, 슬픔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편지를 올리는 것은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슬픔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삶은 다양한 만남의 점철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태도와 지향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라는 단어는 빗장이라는 뜻의 잇다라는 뜻의 가 결합된 것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어 그와 연결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관계 맺음은 그런 의미에서 결단입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타자들과 만나지만 우리 인생에 소중한 타자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삶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일 겁니다. 소속과 연결이야말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기본 바람일 겁니다. 하지만 그 연결이 지나치게 많거나, 그 연결이 오히려 우리 삶을 옥죄는 사슬이 될 때 우리는 고독에의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연결을 원하는 동시에 그 연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모순된 소망을 품고 우리는 시간 속을 바장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섬세하게 키워가다가 마침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파트너의 이름을 호명함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삶의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평생 함께 걷겠다는 결혼 서약은 그 신비 속으로 성큼 들어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의 선택이지만 결혼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약은 그렇기에 엄중한 것입니다.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겠지만 더 근본적 외연은 서약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다보면 사랑의 감정이 식을 때도 있고, 권태감이 찾아들 때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관계의 위기가 찾아와 결국 헤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벌어지는 갈등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 만남의 기억은 쉽게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그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영혼에 흔적을 남겨놓게 마련입니다. 중도에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이든, 부부간의 관계이든, 가장 가까운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면 세상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낯선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말입니다. 나가사키의 바닷가에는 소설 침묵을 썼던 엔도 슈사쿠의 비문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설명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일 겁니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 말은 그의 철학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유한성을 알 뿐 아니라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의식하지만 죽음은 우리 경험 속에 없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것이 진짜 죽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경험은 사실은 가장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우리 속에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상실감 그리고 쓸쓸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 이런 전제를 한다고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생각은 우리 삶에 안정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한 사건과 사고에서 나만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는 덧없는 생각의 반향일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죽음, 죄책, 질병, 우연 등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고, 우리 생의 유한함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한계 상황은 우리를 몹시 힘들게 만들지만 본래적 삶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예기치 않는 시간에 닥쳐온 아픔과 슬픔을 경험한 분들입니다.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분도 계시고, 질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분들도 계십니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혹은 파트너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삶의 토대가 흔들렸다는 고백은 참 적실합니다. 든든한 줄 알았던 터전이 흔들릴 때 우리는 멀미를 느낍니다. 돌연 익숙하던 세계가 낯선 곳으로 변하고,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 찾아들 때 어떻게들 견디셨습니까? 앞서 잠시 언급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문장에 이르러 멍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사를 다룬 이 소설은 참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려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을 끝내 지켜주고 싶었던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한 사나이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후미에라고 하는 성화상에 발을 올려놓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는 텅 빈 안마당에 하얀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며 삶의 부조리함에 몸서리칩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매미가 계속 울고 있다. 바람은 없다. 파리 한 마리도 여전히 그의 주위를 윙윙거리며 날고 있다. 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데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 일이, 이럴 수가.’ 신부는 창살을 꼭 잡은 채 현기증을 일으켰다”(엔도 슈사쿠, 침묵, 김윤성 옮김, 바오로딸, 209).

 

그에게 현기증을 일으킨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한 인간이 죽었는데 외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심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안마당의 고요함과 매미소리, 그리고 윙윙거리는 파리소리가 그렇게 부조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별자들이 겪는 일도 마찬가지라지요? 나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데 세상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지속되는 현실에 분노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상실감이 일으키는 우울증에 대한 반응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멜랑콜리입니다. 성찰적 거리를 두고 자기가 겪은 일을 돌아보기보다는 우울 속으로 더 깊이 침강하는 심리적 태도가 그것입니다. 멜랑콜리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원망, 히스테리, 자학 등을 낳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하나의 반응은 애도입니다. 자기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상실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애도는 삶의 에너지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노력을 포함합니다. 애도자는 상실한 사랑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기억함으로 자기 삶의 일부가 되게 합니다. 기질이나 삶의 여건에 따라 이런 반응으로 갈리는 것 같습니다. 삶의 가장자리로 떠밀렸는데 중심에 이르는 길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길을 찾을 의욕도 없고, 기다림조차 부질없어 보일 때, 희망의 불빛은 가물거리게 마련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에 직면하곤 합니다.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줄 알았던 세상이 사실은 혼돈 그 자체이고,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슬픔의 지층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의 이면입니다. 소설가 이승우는 마음의 부력이라는 소설에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큰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간직하고 사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이렇게 자책합니다.

 

상실감과 슬픔은 시간과 함께 묽어지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시간과 함께 더 진해진다는 사실을, 상실감과 슬픔은 특정 사건에 대한 자각적 반응이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무자각적 반응이어서 통제하기가 훨씬 까다롭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상실감과 슬픔은 회한과 죄책감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상실감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44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승우, 마음의 부력, 문학사상, 47).

 

아마 여러분의 마음도 이럴 거라고 짐작합니다. 사별의 고통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아니라, ‘나 때문에혹은 더 잘해 줄 걸이라는 자책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당연히 여기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때로는 다정하게 지내지만, 때로는 성을 내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한 그의 존재가 비존재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시인 김승희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2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너무 뻔한가요? 그런데 시인은 당연의 세계에서 나는 당연하지 못하여/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라고 노래합니다.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설기만 하다는 것처럼 아뜩한 노릇이 또 있을까요? 삶은 이렇게 처연한 것이지만 그런데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데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공과금 내야 하는 시간은 꼬박꼬박 돌아오고, 돌보아 주어야 할 이들이 눈에 밟히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일상이 우리의 삶을 존속 가능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은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시간은 지속될 것이고, 계절의 변화 또한 지속됩니다. 바로 그것이 은총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삶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물론 쓰나미처럼 몰려와 우리 삶을 뒤흔드는 자연재해도 그렇지만 선한 이들에게 닥치는 불행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 시스템 속에 내재된 불의에서 비롯되는 악도 많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마음에 익혀온 권선징악의 윤리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을 목도한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편의 시인들도 이런 현실 앞에서 탄식하곤 했습니다. ‘어찌하여’, ‘언제까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조리한 현실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 당혹감을 안고 사는 것이 인생인가요?

 

마치 삶에 정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대개 삶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다른 이들을 오도함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삶이란 어쩌면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급전직하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며칠 사이에 재산을 다 잃고, 자식도 다 죽고, 아내에게 버림받았고, 몸에는 사람들이 혐오할 만한 질병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칠일 낮과 밤을 친구 곁에 머물렀습니다.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만한 우정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욥이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자 친구들은 깊은 침묵을 깨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욥이 그런 처지에 떨어진 것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논쟁이 계속되지만 기본 전제는 욥의 죄가 그런 현실을 잉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세상의 질서정연함을 확신합니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오만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다만 그 현실을 겪어낼 뿐입니다. 비극적이지만 그건 어김없는 삶의 실상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알 수 없는 일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고 하여 꾸중을 듣습니다. 모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그 불행의 와중에 사람들이 들려주는 섣부른 위로의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시더군요. 좋은 의도로 하는 바른 말이 때로는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애도의 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어진 사건을 제멋대로 해석하려는 이들을 보면 분노의 감정이 일기도 합니다. 말이 오히려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장 큰 슬픔의 시간에 제일 고마운 사람은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요? 물론 홀로 있고 싶은 시간도 있겠습니다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은 우리가 삶의 세계로 복귀하려 할 때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핍에 집중되어 있는 우리 시선을 있는 것에 돌리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숙명의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할 힘을 우리 속에 채워주기도 합니다.

 

사별자들의 모임은 어쩌면 슬픔의 강에 놓인 징검다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다 아픔과 상실감을 겪은 이들이기에 서로의 감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격려하고 보듬고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모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곳은 장벽이 무너진 세계라지요? 차마 다른 이들에게는 할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용기도 북돋워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그곳에서 함께 글로 공유했던 이야기들은 사별자들이 슬픔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준 아리아드네의 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화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글은 쓰는 이의 주관이 들어가지만 그의 경험을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전하기 위해서는 객관화 작업이 필수입니다. 가장 깊은 내면의 고백이라 해도 거리두기는 필수입니다. 글의 내용을 살아냈던 나와 글을 쓰는 나는 같은 나이면서도 다릅니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쓰기 전까지는 내 생각과 감정의 빛깔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씀을 통해 우리는 가장 내밀한 자신과 만납니다. 과거의 나와도 만나지만 미래의 나와도 만납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새로운 삶을 향한 발돋움입니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저는 생텍쥐페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그는 1935년에 파리와 사이공 사이의 장거리 항로 개척 비행 중에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막 한복판에 추락했던 적이 있습니다. 산채로 모래바다 위에 내던져진 것만도 기적이었습니다. 침착한 그는 치밀한 과학자의 계산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여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갈 길을 찾아 헤맸습니다.

 

습도가 낮은 이곳에서 이대로 가면 24시간이 지나면 목숨이 가랑잎처럼 말라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동북풍이 바다 쪽에서 불어오니 습도는 약간 높아질 것이다. 그래, 동북쪽으로 가자.”

 

그는 밤에는 낙하산 천을 찢어 모래 위에 깔아놓았다가 새벽에 이슬을 짜서 목을 축였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구원의 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냉철한 그는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합니다. 비행기의 잔재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불을 다룰 수 있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니, 누군가가 사막에서 일어나는 불꽃을 본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찾아와 주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라디오 앞에 앉아 이지러진 얼굴로 절망에 잠겨 기다릴 아내의 얼굴과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친구들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때 섬광처럼 조난자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이긴 합니다만 생텍쥐페리는 다른 소설에서도 안데스에서 조난당했다가 귀환한 기요메라는 비행사의 말을 들려줍니다.

 

내가 한 일은 결단코 어떤 짐승도 일찍이 한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하네”(인간의 대지/야간비행/어린왕자/남방우편기, 안응렬 옮김, 동서문화사, 41).

 

그가 한 일은 절망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조난자는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이들인지도 모른다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한 걸음씩 희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겠다는 결의야말로 우리 앞을 비춰주는 등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의 자비에 맡기십시오. 그리고 용감하게, 씩씩하게 주어진 길을 걸으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사별의 고통을 경험한 모든 이들을 감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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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3. 19:06

 

 

스물세 번째의 시도, 그렇게 해서 이 원고는 책으로( 세상과 만났습니다. 사별,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떠난 이들의 슬픔을 듣는 일은 괴롭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담은 원고를 들고 여기 저기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반기는 이가 별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출판사 문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물두 번의 시도는 사별의 아픔에 더하여 좌절의 고통을 주었을 것입니다. <꽃자리>는 이 원고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빨려들 듯이 읽었습니다. 전문적으로 글을 써온 이들도 아닌데 이들이 토로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치유하고 일어나는 과정은 어느 글장이보다 더 깊게 가슴에 파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실과 충격,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삶. 방황할 수밖에 없고 비탄의 시간이 쉽게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로 모두가 우울하게 지나는 세월에 이런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것 자체도 힘겨움을 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들 멈칫했을 것입니다. 그런 판단과 결정이 충분히 이해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했습니다. 초연결의 시대에 그 연결이 끊어지고 고립되고 만남 자체가 불안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별은 그런 고립감의 극단에 있는 경험이 됩니다. 그 지점에서 다시 사람들과 이어지고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며 일으키는 마음이 만나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이들 사별자의 경험과 지혜는 우리 시대 모두에게 일깨우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잃어버리고 이어지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이겨내면서 다시 연결되는 우리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여기에 녹아 있습니다. 당연히 배우자의 사별은 시간과 순서만 다를 뿐이지 우리 모두가 겪었거나 겪게 될 일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인생사의 사건입니다. 노년의 죽음이 당연한 듯하지만 그 역시도 충격이며 어쩌면 더 큰 상실감으로 남은 이는 예정보다 더 빨리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별자들의 고통이 남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건 경우와 상황만 다를 뿐이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순서대로 실린 글의 주인공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의 사연은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사별 이후의 삶에서 넘어지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내디디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방황하지 않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권오균 님은 사별 3년 차로 슬픔에 빠져있기 보다는 나는 지구라는 별을 방문한 여행자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이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하고 배우고 느끼며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끝이나 소멸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아내와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책을 쓰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아내가 원하는 일일 것이라 생각해서 이 책의 총괄책임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사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홈페이지 제작/운영을 꿈꾸고 있는 분입니다.

 

임규홍 님은 사별 5년 차인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행복한 삶을 위한 대화외에 국어 교육과 우리말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는 분입니다. 사별 초기 그가 쓴 사별 카페의 글은 국어학자의 지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아내를 잃은 고통으로 횡설수설하는 원초적 슬픔의 글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낸 후, 그는 자신과 같이 슬픔으로 절망하는 사별자들을 돕고 싶어 했습니다. 사별자에게 보편적이고 실제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책이라고 생각하여, 이 책을 쓰자고 최초로 제안했습니다.

 

김민경 님은 사별 8년 차로, 사별 후 친정에 갔을 때, 시뻘건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자신을 마중하던 아버지를 보며 자신은 부모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은 죄인이 되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합니다. 그 죄짐을 벗는 것은 자신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난 8년간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어린 두 자녀를 키우고 자신의 삶을 잘 살아냈습니다. 그녀는 별이 된 그대라는 온라인 사별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벤트를 통해 사별자들에게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추후 사별심리학을 공부하여 사별자를 위로하는 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형편과 상황이 다른 이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묶인 것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홀로 남겨져 이기기 어려운 고독과 싸우고 삶 자체의 무게로 무너지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일을 결국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물두 번의 좌절을 겪고야 비로소 책을 낼 수 있게 되긴 했으나 그 과정이 또한 이분들에게 사별자와 세상이 서로 대화하는 방식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별자들이 최초로 겪는 일은 바로 이 세상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고통을 남들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세상이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가?” 이 모두가 다 고난도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내보이는 용기를 키워왔습니다. 그리고 이 용기가 다른 이들의 안내판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 또는 문화에서 죽음을 일상의 화제로 떠올리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것은 두렵거나 불쾌해지거나 불편하던가 아니면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주제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요?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별자들은 사별이 자신에게 어느날 갑자기 닥칠 일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았을까요?

 

그런 까닭에 이들의 증언과 고백 그리고 경험과 나름의 조언은 누구에게나 귀중하다 할 것입니다. 비극적인 일은 막상 겪으면 정신이 없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마음에 여러 상념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누구에게나 권하게 되는 책이라고 믿습니다.

 

서양의 경우, 사별자가 쓰거나 사별자를 위로하는 책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례식의 풍속이 다른 까닭도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도 요즈음은 서양식 장례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대성통곡을 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조용히 안으로 삭이는 분위기입니다. 그건 예전 같으면 장례 예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슬픔은 밖으로 드러나 해소되지 못한 채 내면화되고 응어리지기도 합니다. 그건 충격 이후의 우울과 불안의 증세를 더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슬픔과 비탄을 내놓고 표현하지 못하니 속은 더욱 아프고 쓰리며 외로워집니다. 내색하지 않는 슬픔이란 언제나 비탄의 극단에 갈 준비를 하기 마련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모두가 다 떠난 자리에서 사별자는 혼자 덩그렇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진짜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나는 사별하였다는>는 바로 그 지점에서 풀어놓게 되는 속사정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걸 듣는 우리 자신이 이걸 말하는 이의 삶 속에 들어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위로하고 함께 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에서 죽음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별리(別離)가 가져올 아픔은 상상하고 싶지 않으나 언젠가 닥칠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고맙습니다.

 

이미 겪은 이의 고통에서 위로의 길을 미리 발견한다는 것은 어쩌면 미안한 일이지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별자들은 그 발견이 곧 자신에게도 위로가 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이어져서 서로 다독거리며 죽음의 강이 갈라놓은 인연의 무게를 새롭게 정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스물세 번째의 시도는, 편집자로서는 감사이며 축복입니다. 낙담하고 좌절했다면 오지 않았을 기회였습니다. 그 기회를 열어준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읽혀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하고 힘차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별은 사랑의 종식이 아니라 확인이며 그 사랑으로 다시 살아갈 길을 찾는 용기 있는 여정의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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