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는다는 것

껍질을 벗는다는 것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입니다.”(시119:54)

주님의 이름을 높여 기립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코로나 블루니 코로나 레드니 하는 말들이 널리 유통되는 시대입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찾아오는 영혼의 질병인 우울증과 짜증과 분노가 심각합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학생들의 등교도 자꾸 미뤄지면서 가족 간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참 우울하고 암담합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10살, 8살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재가 일어나 다치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어떤 이는 편의점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이리저리 휘젓기도 했습니다. 환각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이도 있고, 만취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성실한 가장을 치어 죽이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전에도 전혀 없었던 일들은 아니지만 요즘 이런 일들이 더욱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이 오히려 특별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만나 왁자지껄하고, 차 한 잔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참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쳤던 온갖 의문들을 놓고 설왕설래하던 시간이 기억의 저편인양 아득하기만 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요즘은 조석으로 바람이 시원합니다. 벌써 여러 날 사용하지 않고 있는 선풍기를 닦아 창고에 들여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공원의 키 큰 나무 밑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이 쓸쓸해 보입니다. 짙은 초록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마치 햇살을 머금은 듯 조금씩 색이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열매들은 단맛이 스며들며 무르익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지인들이 김장배추 모종을 심었다고 알려오네요. 때를 따르며 산다는 게 이런 것일까요? 요즘은 두문불출하며 지내서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춤사위가 몹시 보고 싶습니다.

엊그제 교우 한 분이 알밤을 보내주셨습니다. 작업실 앞에 있는 큰 밤나무에서 떨어진 것을 주웠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 유튜브를 통해 제 설교를 듣고 계셨던 모양인데, 문득 이 밤을 통해 문안인사라도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 설익은 밤을 따서 이빨로 떫은 보늬(*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를 벗겨내고 우둑우둑 밤을 씹어먹던 그 때가 떠올랐습니다. 마을 친구들과 밤나무나 참나무의 상처난 부분을 나뭇가지로 쑤석거리며 턱이 강한 사슴벌레를 찾던 생각도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달콤한 수액을 탐하다가 어린 꼬마들에게 붙잡혀 동족간의 싸움에 내몰렸던 사슴벌레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밤송이를 발로 밟아 껍질을 발기다가 찢어진 고무신 사이를 파고 든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던 기억도 아련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시간 개념에 대해 배웠습니다. 일상적 시간, 시계로 계측할 수 있는 양적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질적 시간, 수직으로 돌입하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한다고 배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결정적 계시의 순간을 이르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에서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광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가 ‘카이로스’의 순간입니다. 

부활 이후 승천을 앞둔 주님께 제자들이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그때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한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1:6, 7) 사람들은 ‘때’의 문제를 자기들의 통제 속에 두고 싶어합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에 때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때를 기다리며 살 뿐입니다. 

뜬금없이 카이로스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신학교 교수님들이 카이로스를 설명하기 위해 때가 되면 누가 흔들지 않아도 후드득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알밤의 이미지를 동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끝날까 궁금해 하십니다. 감염병 학자들도 그 때를 가늠하기 어렵다니 비전문가인 우리가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를 알 수 없다하여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이르셨습니다. 눅진눅진한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밤에 대한 기억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료한 겨울날이면 화롯불 속에 밤을 묻어두었다가 먹곤 했습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터인지라 겨울밤이나 온 식구가 아랫목에 펼쳐둔 이불에 발을 묻고 옛날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면 밤이 타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았지요. 어떤 때는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밤이 튀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밤껍질에 칼집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잘하다가도 한 번 그런 실수를 하고 나면 꼬마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외부 세계에 의해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껍질을 만들곤 합니다. 그 껍질이 두꺼울수록 자아 또한 강해집니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능력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아我‘ 자는 ‘손 수手‘ 자와 ‘창 戈‘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 자아라는 말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과 만나고 나면 우리 마음에 상처가 남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말입니다만 세상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랍스터’는 불사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 하더군요. 랍스터는 거듭 껍질을 벗으면서 새롭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껍질이 너무 두꺼워져 ‘탈피탈각’을 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껍질을 벗는다는 것‘을 신앙적 언어로 말하자면 ‘거듭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은 회개의 열매입니다만, 회개조차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후회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결의와 다짐은 시간과 더불어 퇴색되곤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밴 죄의 버릇은 쉽게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된다’고 했습니다. 필연을 끊어낼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패와 고통, 시련과 무기력, 권태와 허무와 같은 삶의 부정적 계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껍질을 벗기는 기회로 삼기도 하십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언약에서 멀어진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역사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런 논리를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코로나19는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 버린 세계와 한국교회의 실상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확장에 여념이 없었던 개신교회가 얼마나 시민사회의 상식에서 멀어졌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나날입니다. 역사가인 최종원 교수는 “냉정하게 보자면, 우리 개신교회는 아직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점에 있다”(최종원,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비아토르, 2019, p. 97)고 말했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쓰라림과 아픔이 있지만 그것이 은총의 계기일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사회 현실과 유리된 신앙은 종이로 짓는 집처럼 허망합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거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소금’이나 ‘빛’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두렵지만 복된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언해주신 현실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할 수 있다면 으늑한 공간에 모여 두런두런 담소도 나누고, 살아온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우들의 소식을 목말라 합니다. 이 좋은 가을날, 우울이나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넓혀 이웃들을 마음으로 맞아들이십시오. 껄껄 웃으며 주위를 환하게 물들이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9월 1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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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빠져들기

 기꺼이 빠져들기



“온전함은 다른 사람과 연결된 느낌, 우리가 사는 장소에 속해있는 느낌이며 공동체에서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무의식적 자각이다. 따라서 개인의 온전함과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우리는 우리의 건강을 가늠한다. 건강이란 분리되지 않은 상태임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웬델 베리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여러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두루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또 한 주가 이렇게 흘렀습니다. 절서는 속일 수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백로 절기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제법 시원합니다. 어떤 때는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기도 합니다. 어느 분이 여름에서 가을로의 이행을 헤비메탈의 시간에서 재즈의 시간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하더군요. 매미 울음소리 낭자하던 여름이 끝나고 벽 틈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노래가 고즈넉하게 들리는 계절이란 뜻일 겁니다.

다들 조금씩 지쳤지만 이럴 때일수록 소박한 기쁨을 많이 누려야 합니다. 나무에 내려앉는 햇살 한 줌에 눈길을 주고, 차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책상 옆에 놓인 리클라이너에 가만히 기댄 채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바흐의 ‘미뉴엣’부터 시작하여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습니다. 음악의 선율에 잠시 잠겨 들면 어수선하던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제가 생각났다며 좋은 벗이 보내준 ‘거울 속의 거울’이라는 곡도 즐겨 듣습니다. 어느 분이 정성껏 만들어 보내주신 다양한 아로마 향이 슬쩍 코끝을 스치면 잠시 행복하다는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문득 어떤 분이 문자를 보내 ‘나른할 때는 팔굽혀펴기 20번을 하세요. 맨손체조도~그리고 복근 운동’ 하고 말씀하시면, 씩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교우들의 얼굴을 마음에 그려봅니다. 말투, 표정, 웃음소리, 기쁨의 순간들, 슬픔의 순간들...함께 걸어온 시간이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밀려옵니다. 켜켜이 쌓인 기억의 갈피마다 기가 막힌 세월을 함께 했다는 고마운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격절의 세월은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말이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교우들을 생각하며 화살기도를 올립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 시간을 그저 한탄만 하며 지내면 안 됩니다. 얼마 전부터 제가 종종 떠올리는 유대인의 안식일 기도가 있습니다.

“하루씩 지나가고 한 해씩 사라지건만,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갑니다. 저희의 눈을 볼 것들로 채워주시고, 저희의 마음을 알 것들로 채우소서. 당신의 현존이 마치 번갯불처럼 저희가 걸어가는 어둠을 비추는 순간들이 있게 하소서. 저희가 어디를 바라보든, 떨기에 불이 붙었지만,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빚으신 흙덩이인 저희들이 거룩함에 닿게 하시고, 놀라움 가운데 ‘이 얼마나 경외로 가득한 곳인가’ 하고 외치게 하소서.”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은 ‘기적’입니다. 교회 화단에 심긴 붉은색 일일초가 파란 가을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쥐꼬리망초, 영아자도 그 작은 꽃을 내밀었습니다. 파란색 달개비꽃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대지를 응시합니다. 대추도 가을 햇살을 탐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기적의 시간을 교우들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어둠을 이길 힘은 빛을 향해 고개를 들 때 비로소 찾아옵니다.

세상을 방편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이용합니다.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입니다. 그는 늘 외롭습니다. 욕망 주위를 맴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경이의 마음으로 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세상이 선물임을 늘 자각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응답해야 할 부름입니다. 그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떨기나무 속에서 신성한 불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죄의 중력에 속절없이 이끌리지 않습니다.

경외심이 사라진 곳에 깃드는 것이 불화입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다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성난 얼굴들이 도처에서 출몰합니다. 사실과 상상력이 자리를 바꾸고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온통 혼돈입니다. 거짓, 편견, 그릇된 확신, 미움과 저주, 악다구니, 혐오, 분노, 폭력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이해와 소통을 위한 진득한 노력보다는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무모한 열정이 사람들을 마구 휘몰아 갑니다. 거친 말, 냉소, 선동의 말을 자주 듣다 보면 우리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정녕 믿는 사람이라면 잠시 멈추어 서야 합니다. 내 입장과 주장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찬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주체적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이들이 주입한 생각과 관점과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상태를 일러 미성숙이라 했습니다. 미성숙은 자기가 되지 못한 것이기에 자기에게 빚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라는 책에서 “인간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리석음의 독무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타락입니다. 미망에 갇힐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게 마련입니다.

특정한 입장에 갇힐 때 광대한 세계, 신비한 실재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신앙이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적 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뜻에 조율된 존재가 되기 위해 엎드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오만할 수 없습니다. 완고한 태도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오류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거듭거듭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자기를 비울 때 비로소 은총이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가을의 초입에 접어들면서 헤르만 헤세의 ‘고백’이라는 시를 우리 마음의 길잡이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다정한 빛살이여, 너의 반짝임에
기꺼이 빠져드는 나를 보라.
남들은 목적과 목표가 있지만,
나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지난날 내 마음을 흔들던 모든 것들은
언제나 내 가슴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무한하면서도 유일한 것에 대한
비유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러한 상형 문자를 읽는 것은
언제나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일.
영원한 것, 본질적인 것은
바로 내 마음속에 살고 있으므로.”
(헤르만 헤세, <인생의 노래>, 김재혁 옮김, 이레, p.148)

주님의 부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백로 절기, 흰 이슬로 내리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마음의 헛헛함을 씻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의 은총 가운데 당당하게 사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9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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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벼릿줄

우리 삶의 벼릿줄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부지런히 일하여라. 어떤 것이 잘 될지, 이것이 잘 될지 저것이 잘 될지, 아니면 둘 다 잘 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전11:4, 6)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또 한 주가 흘렀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이 어두운 터널의 끝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조바심도 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난감한 이야기만 자꾸 우리 귓전을 어지럽힙니다. 증오와 혐오를 선동하는 이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거짓 뉴스를 만들어 유포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사회를 갈등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 웃고 떠들면 속이 좀 풀릴까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안 되는 것 때문에 애달파할 것 없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조금 더 견뎌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태풍 마이삭이 지나갔습니다. 큰 피해를 입지는 않으셨는지요? 공원을 걷다가 꺾이고 찢기고 뽑힌 나무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가슴이 저릿해졌습니다. 물기가 없어 회복력을 상실했기 때문일 겁니다. 수확을 앞둔 과일들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것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만, 모든 상처는 우리에게 아픔입니다.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시편 시인의 고백이 가끔은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아픔과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가장자리에 살면서 중심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 길이 끊긴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환한 빛을 갈망하지만 캄캄한 어둠이 우리 영혼에 드리워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도들이 나누는 온기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온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결국 어둠 너머의 빛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 곁에 벗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고달픈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반얀나무를 아시는지요? 아열대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이 나무는 뿌리가 얕아서 비바람에 견디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가지에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지요. 땅에 닿은 뿌리는 이내 나무줄기가 되어 나무를 받쳐줍니다. 반얀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숲을 이룬 경우도 있다 합니다. 이 나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크게 감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함께 비바람을 견디고, 뭇 생명들을 먹이고 재우고 품어주는 숲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교회에 대한 조롱과 냉소가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부끄럽다고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 믿음은 절망의 상황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하여 지레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설날이 다가오면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몇 말씩 뽑아오셨습니다. 말랑말랑한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먹는 맛이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다음 날 새벽이면 또각또각 떡 써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 가래떡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했던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꾸덕꾸덕하게 마른 떡을 써는 아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저걸 언제 다 써나’ 하는 생각에 암담했던 기억이 납니다. 애써 잠을 다시 청한 것도 어찌 보면 그 지루한 시간을 견딜 힘이 내게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얼마 후 창호문으로 새어든 햇빛에 찔려 잠에서 깨어나 보면 아버지는 어느새 떡을 다 썰어놓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부지런히 몸을 놀리고 계셨습니다. 그 기억은 아득함과 막막함 사이에서 바장일 때마다 나를 지켜주는 등불입니다.

만리장성도 돌 하나를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지 않습니까. 위대한 미술작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수없이 많은 붓질을 통해 형태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속에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 온축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참을성이 부족합니다. 늘 뭔가 새로운 선택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이드거니 어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늘 새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종교조차 소비재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들은 그물을 던지거나(시몬과 안드레), 배에서 그물을 깁고(야고보와 요한) 있었다고 합니다(막1:16-20). 그들은 부르심을 받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부름에 따른 즉각적인 응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1세기 갈릴리 어부들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는 종주국인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갈릴리 호숫가에 당시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도시 티베리아스를 세웠습니다. 물론 그 재원은 다 백성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어부들도 배 혹은 그물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내야했습니다. 세리들은 조황이 좋든 나쁘든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어쩌다 많은 고기가 잡혀도 어부들은 그 고기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헤롯이 외화벌이를 위해 호숫가에 만들어놓은 염장처리 공장에 헐값으로 넘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부들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뒤집히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기 제자들의 이야기를 저는 늘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름 자체보다 부름 받기 전에 그들이 하고 있었던 일에 눈길이 갑니다. 그들은 바늘코로 한 땀 한 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깁는다는 것은 다른 그물눈에 의지하여 새로운 그물눈을 만드는 일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연결’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란 바로 그런 연결 속으로 들어가고, 다른 이들과 연결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서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기쁨과 슬픔의 연대를 이룰 때 우리는 힘겨운 시간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의 중심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지루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삶이란 어쩌면 그런 지루함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지루함을 무턱대고 견디고 있던 이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지향과 뜻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물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은 벼릿줄(a head rope)입니다. 벼릿줄은 그물을 오므리거나 펼 때 쓰는 로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물이 아무리 커도 벼릿줄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우리 인생의 벼릿줄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저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요8:14)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사무치게 좋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을 수 없습니다. 뜻을 아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백로 절기가 시작됩니다.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시원합니다. 그 바람 앞에 서서 여름 내 우리를 사로잡았던 울울함을 떨쳐버리면 좋겠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창조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진부하고 무질서한 삶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삶으로 옮겨가야 할 때입니다. 좋은 날이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십시오. 삶은 순례입니다. 순례자는 장소와 장소 사이를 그냥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참회와 치유의 시간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순례길의 동반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끔 바람결에라도 사는 이야기 들려주십시오. 믿음 안에서 걸어가는 나날이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순례 여정이 되기를 빕니다. 새로운 태풍 하이선이 다가오고 있다지요? 잘 대비하셔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힘든 때일수록 ‘미소 명상’ 잊지 마십시오. 얼굴이 웃으면 마음도 따라 웃는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0년 9월 5일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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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마가복음 10:13-16)

 

어느 날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다. ‘쓰다듬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가볍게 쓸어 어루만지다’, ‘마음을 달래어 가라앉히다’이다. ‘쓰다듬음’ 혹은 ‘어루만짐’은 참 살가운 행동이다. 쓰다듬음은 상대에게 나의 사랑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행위이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등을 토닥여준다든지 어루만지는 행위는 얼마나 숭고한가? 그것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의 몸짓이다. 주님이 자기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던 이들은 예수와의 접촉을 통해 아이들의 삶도 아름다워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의 장벽에 부딪혔다. 제자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꾸짖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아이들을 쓰다듬는 것은 시급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고 노하셨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가복음 10:14)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가 문자 그대로 어린이이든,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든, 예수님은 그들과의 접촉을 꺼리지 않으신다. 그들을 보듬어 안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어린이의 어떤 점이 그러하냐고 묻는다. 


류연복 판화



몇 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천진난만(天眞爛漫), 경탄, 호기심…. 오늘 우리가 보는 현실 속의 아이들이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이들’이라는 기호를 꾸밈없이 순수하고 참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이들은 근엄하지 않다. 젠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켜야 할 자기가 없다. 그래서 늘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아 ‘어린이’를 잃어버린 채 산다. 삶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늘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는 사람들, 배울 것은 없고 가르칠 것만 있는 사람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한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먼 사람들이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어린이성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 설레느니,/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다면/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유종호 번역). 부드러움은 생명의 징조이고 경직됨은 죽음의 징조이다. 워즈워스가 역설적으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기도*

 

하나님,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더께처럼 내려앉아 우리 영혼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경탄할 줄 모르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삶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은 우리 영혼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십시오. 묵은 땅을 갈아엎고 기쁨의 씨를 뿌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가슴 설레는 일들이 많아지게 해주십시오. 아멘.


<<사랑의 레가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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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 했다. 사로잡힘은 주체적으로 조장할 수도 없고 물리칠 수도 없다.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사로잡힘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느닷없고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에게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다.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일심으로 달리긴 했다. 돌아보면 갈짓자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가섰다 싶은 순간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 다가오는 길,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진 그 길이 참 힘겹다.

 

한국교회가 위기다.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위기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근본적 위기이다. 교세가 확장되고, 대형교회도 많이 등장했지만 복음은 후퇴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경계했던 ‘다른 복음’이 슬그머니 틈입하여 주인 노릇하고 있다. 십자가는 자동차 룸미러에 매달려 대롱거릴 뿐, 많은 이들이 십자가라는 스캔들과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의 루틴을 깨뜨리는 메시지는 수취인 불명이 되어 허공을 맴돈다. 은혜스러운 찬양의 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예수의 벗들의 신음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도 외롭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가인은 도시 건설자가 되었다 한다. 에덴의 동쪽이 가리키는 것은 ‘불안’, ‘안식 없음’, ‘뿌리 뽑힘’이다.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그 폭력의 흐름은 아직도 잦아들지 않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얼굴마다 오랜 피곤이 똬리 틀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졌던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 번째 질문,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책망이다.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났구나.” 아담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 앞이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천진함을 잃어버린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로 숨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후 사람은 그 마음에 깃든 불안을 달래기 위해 어떤 대상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불안의 대용물 말이다. 누군가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허구렁이 있다고 말했다.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려니 삶은 힘겹고 마음의 공허는 깊어간다.

 

두 번째 질문,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이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닐 것이다. 가인은 불퉁거린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하나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아무리 무심해도 그 눌함訥喊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웃을 지키는 자로 만드셨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인간다운 삶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책임이라는 말이 너무 강박적으로 들려서일까? 성경은 ‘책임’을 ‘사랑’으로 바꾸곤 한다.

 

성경 인물 가운데 노아는 순종의 챔피언이다. 그는 폭력과 부패함이 가득찬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신 하나님도 노아만 보면 흐뭇해 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했다.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들고, 짐승들을 이끌어 들이라 하면 그렇게 했고, 들어가라 하면 들어갔다. 마침내 홍수가 끝났음을 알았을 때도 그는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일까? 물론 아브라함도 순종의 사람이다. 떠나라 하면 떠났고, 바치라 하면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있고 노아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책임성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인 동시에, 그를 위해 스스로를 위기에 내던지기도 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정했고,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기 위해 길을 떠난 하나님 일행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순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바로 책임의 윤리이다. 민족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독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 편에 섰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섰다. 그 때 기독교는 젊었다. 야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늙어버렸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벗들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위선적인 종교인과 지도자들을 향해 ‘화가 있을진저!’라고 일갈하던 예수의 얼굴에는 베일을 덮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만 바라봐 달라고 말할 뿐이다.

 

야훼는 제국의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세계에 던져진 혁명의 깃발이었다. 하나님은 힘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을 지푸라기 강아지로 여기셨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초월적 비전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화려하고 늠름한 이들만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꿈 자체가 불온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의 제국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희소성’의 신화를 가지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한다. 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한다. 적당한 경쟁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희소성의 신화에 갇힌 이들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무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루저가 되고 승리한 이들은 득의만면이다. 예수의 세계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불편을 감수하지만, 희소성의 세계는 한 마리 양을 위해 모든 양을 희생시킨다. 욕망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망각이 깊어지면 주체의 몰각이 찾아온다. 거라사 광인을 사로잡고 있던 레기온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떼는 비탈길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다.

 

기독교는 이런 세계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동안 번영의 복음과 죄 경영(sin-management)을 통해 몸집을 불리느라 바빠, 자본주의의 신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왜곡된 정신을 타격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정방향으로 되돌리고, 세속적 가치 질서의 우상적 작동을 막아야 할 교회가 세상에 투항해버리고 만 것이다. 예수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광야 공동체는 애굽과 바로 체제에 대한 대안이었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일은 창조적 노동이 아니라 고역이다. 고역으로서의 노동은 비인간화를 가속화시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들에게 제시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을 일컫는 말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세상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출애굽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은 그 위대한 문명이 사실은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피를 통해 형성된 것임을 가리킨다. 야훼 신앙은 이처럼 당파적이다. 하지만 그 것은 보편을 지향하는 당파성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살 떨리게 경험하는 학교였다. 만나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을 때 주어졌다. 만나는 제대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받아먹는 것이고, 필요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눔으로 그들은 한 식구가 되었고,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서로 함께’라는 뜻의 ‘com’과 ‘선물’이라는 뜻의 ‘munus’가 결합된 단어이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때 든든히 서 간다. 초대교회의 애찬은 바로 이런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신앙 공동체는 또한 하나님의 파토스를 함께 느끼는 이들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할 때 우리는 예수님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약자들 속에 숨겨 놓으셨다. 그들 앞에 멈춰서고,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고, 그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때 생의 비애는 줄어들고 내적 자유의 공간은 늘어난다. 신앙 공동체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적 세계의 민중적 현실에 연루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남은 목회 여정의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별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색하게나마 대답한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삶을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축제로 경험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동화시키려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여 하나님 마음이라는 중심을 향해 순례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하지만 즐거운 탈주이다.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중세의 격언이 떠오른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안내인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출구인 동시에 입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통해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는 일, 그것 말고 목회의 다른 목표를 나는 알지 못한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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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등뼈를 곧추 세우라

김기석의 새로봄(191)

 

삶의 등뼈를 곧추 세우라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신명기 29:29)

 

출애굽 공동체가 모압 땅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른바 호렙산에서 맺었던 언약에 덧붙여서 주어진 모압 언약이 그것이다. 모세는 출애굽의 긴 여정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간략하게 언급한다. 애굽 땅에서 베푸신 이적, 광야에서의 이적은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권능의 행위였다. 백성들은 그런 놀라운 일을 보고 겪었지만 여전히 수동적 객체일 뿐 역사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 모세는 그런 현실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나 바로 오늘까지,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신명기 29:4).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가 열리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독립적 주체로 서지 못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른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이들의 언어를 자기 말로 여기며 산다. 광야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한다. 척박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해져야 한다. 하지만 광야는 중첩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물크러질 수도 있는 공간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필요한 것들을 다 얻을 수 있었고, 위기 때마다 구원을 경험했다. 모세는 그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그들은 새로운 언약관계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힘 있는 이들의 편익을 위해 동원되는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는 순간 평등공동체의 꿈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이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모호함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모호하다고 하여 모든 판단을 유보한 채 되는 대로 살자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신명기 29:29a)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지도 삼아 시간 여행을 하면 된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 혹은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인이다. 그 말씀이 설사 우리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말씀을 척도로 삼아 우리 삶을 조율할 때 삶이 가지런해진다.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익숙해질 때 우리 삶의 등뼈가 곧게 세워진다. 광야를 헤매는 것처럼 삶이 고달프고,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어 어지러울 때면 말씀 한 자락을 붙들고 그 미로를 헤쳐가야 한다.

 

*기도

 

하나님, 삶이 순탄치 않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버릇처럼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우리가 누려야 할 몫까지 독점한 것 같은 이들을 미워합니다. 강자들의 편을 드는 것 같은 사회 시스템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하여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원망하는 버릇을 내려놓고 성실하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미로와 같은 세상을 통과하겠습니다. 우리의 동행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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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김기석의 새로봄(190)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의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일뿐이지만, 악인이 기대할 것은 진노뿐이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 곡식을 저장하여 두기만 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그것을 내어 파는 사람에게는 복이 돌아온다. 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받는다(잠언 11:23-27).

 

“의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일뿐이지만, 악인이 기대할 것은 진노뿐이다.” 의인은 자기 분수를 알고 사는 사람이다. 남을 배려하기에 다른 이의 몫을 대신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억지가 없기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명랑하다. 그는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 필요한 이에게 계산하지 않고 준다. 사람은 아끼지만 재물은 아끼지 않는다. 남에게 주는데도 그는 더욱 부유해진다. 그런데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도 있다. 움켜쥐지만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슬금슬금 줄어들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었다. 하나님은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대로 하자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출애굽기 16:17-18). 그 지시를 어기고 많이 거두어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나? 남겨둔 것에서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겼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고 말한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네페쉬 베라카)이다.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구원사의 일부가 되라고 부르시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창세기 12:3b)이라고 약속하셨다. 바울 사도도 성도들에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면서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사도행전 20:35)라고 말했다.

 

꽃밭에 넉넉히 물을 주는 사람은 향기를 되돌려 받게 마련이다. 내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하여 목마른 이들을 외면할 때 또 다른 목마름이 찾아온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흘러야 하는 법이다. “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받는다”(잠언 11:27). 사람은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 땀 흘려 수고한 일에 결실이 없다고 낙심할 것 없다. 때가 이르면 결과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기도

 

하나님, 많은 이들이 선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삽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겠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누룩이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심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씨가 세상을 밝히는 꽃으로 피어날 날이 올 것임을 믿습니다. 이런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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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김기석의 새로봄(189)

 

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할렐루야. 내가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모두 깊이 연구하는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 그 하신 기이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다(시편 111:1-4).

 

적대감에 가득 찬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달픈 일이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넋을 놓고 걷다가 느닷없는 크랙슨 소리에 놀라 질겁을 하듯이 언제 봉변을 당할지 몰라 우리는 전전긍긍하며 산다. 얼굴빛 환한 사람 만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다. 함석헌 선생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탄식하듯 말한다.

 

“영웅심에 들뜬 청년/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실망한 얼굴,/병에 눌린 얼굴,/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얼굴> 중에서).

 

참 아름다운 얼굴을 만나야 삶이 바로 선다. 히브리의 시인은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정직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샤르yashar’는 ‘곧다’, ‘옳다’, ‘똑바로 서다’라는 뜻으로 두루 쓰인다. 정직한 이들은 바로 선 이들이다. 내면에 기둥 하나가 들어선 이들이라는 말이다. 기둥이 바로 서면 그 위에 어지간한 무게가 얹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이 그러하다. 김흥호 목사님이 ‘믿음’을 ‘밑힘’이라 해석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아주 길쭉하고 홀쭉한 인물상을 많이 만들었다. 불안과 고독과 취약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궁핍한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물들의 눈빛은 형형하다. 마치 자기 운명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대개 직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큼성큼 걷는 그 인물들은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외롭고 고달프지만 불멸을 지향하는 사람의 존엄함을 본다. 직립한 사람은 아름답다.

 

시인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의 모임에 속한 즐거움이 크다고 고백한다. 그 모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꿈을 간직한 채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크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은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눌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시편 111:3).

 

장엄함에 대한 인식을 잃을 때 영혼은 남루해지고 삶은 왜소해진다. 장엄함 앞에 설 때 인간은 겸손해지고 심성은 확장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그의 처소에는 권능과 즐거움이 있다”(역대상 16:27). 주님 앞에 머물 때 푸석푸석하던 삶이 단단해진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밀려드는 일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우리는 떠밀려 가듯 시간 속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시선, 적대적인 시선을 만날 때마다 우리 가슴에는 퍼런 멍이 들곤 합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장엄한 위엄 앞에 서겠습니다. 내면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 하나 세우고 살겠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삶의 꿈을 나눌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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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김기석의 새로봄(188)

 

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먹는 고기일 따름이다. 그러니 나 주가 어찌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느냐?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허물을 벌하여서, 그들을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겠다.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 유다 백성이 견고한 성읍들을 많이 세웠으나, 내가 불을 지르겠다. 궁궐들과 성읍들이 모두 불에 탈 것이다(호세아 8:11-14).

 

예언자들의 말은 거칠다. 사람들의 안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폭풍이다. 느른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소음처럼 들린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그렇기에 예언자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은커녕 박해를 받기 일쑤이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이다. 가까운 이들조차 그들에게 등을 돌릴 때가 많으니 말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예레미야 20:8b)라고 탄식했다. 탄식하면서도 그 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억센 힘에 사로잡힌 자들이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들이 만든 세상에 분노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언명령은 기각되었다. 사람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엄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호세아 8:7).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데 그럴 리 없다고 믿는다. 신실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자의적 신앙일 뿐이다. 믿음이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일이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등지는 이들이 많다. 이 전도된 현실이 한국교회 개신교회의 자화상이다.

 

예언자의 말은 가차 없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호세아 8:11). 두려운 말씀이다. 교회가 늘어날수록 죄가 늘어난다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생각이 없다면 번다한 예배가 무슨 소용인가?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드리고, 더러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하게 보일 수도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호세아 8:14a).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이 죄가 아니던가. 다 잊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두렵고 떨림으로 기억할 때 죄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지 않는다.

 

*기도

 

하나님, 도심의 밤거리 어디에서나 붉은색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십자가를 보며 평안과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공동묘지를 떠올리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단이 늘어날수록 죄도 늘어난다는 말씀이 예리한 통증이 되어 우리를 찌릅니다.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꿈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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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뭄을 겪으며

김기석의 새로봄(

 

인생의 가뭄을 겪으며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예레미야 14:7-9)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제 고집대로 살던 백성들, 죄악에 익숙해져서 선을 행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극심한 가뭄을 내리셨다. 백성들은 기력을 잃은 채 땅바닥에 쓰러져 탄식하고,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땅에서는 풀조차 돋아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동안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도도하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이 잠시 은총을 거두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들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예레미야 14:7)

 

절실한 기도이다. 하지만 이 기도가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삶이 먼저 갱신되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살 권리를 마구 짓밟았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함부로 말했던 죄를 눈물로 씻어야 한다. 남의 골수를 마르게 했던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때때로 고통은 사람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계기가 된다. 버티기 힘든 고통을 겪고 보니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자기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민족사의 어려운 고비마다 지키시고 건져주신 은혜를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마십시오.”

 

80년대에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절박하게 불렀던 노래가 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우리 기도 들으소서/귀 먹은 하나님.” 불경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사 속에는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한 이들의 절규가 담겨 있다. “그래도 당신은 하나 뿐인 늙으신 아버지.” 실낱같은 희망조차 버릴 수 없다.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올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을 품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머무시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 우리가 섞여 살고 있는 사회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소외시킨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불화와 분쟁을 만드는 호전적인 말들을 그쳐야 한다. 누군가를 없앰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인생의 가뭄이 그칠 것이다.

 

*기도

 

하나님, 전도자는 ‘바람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막연한 기다림, 불모의 기다림이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가뭄이 찾아왔을 때,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 마음의 지성소를 차지하고 있는 헛된 것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게 해주십시오.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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