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낮의 구별법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요일 4:20-2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하루하루 기쁘게 살고 계시는지요?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전 5:20)고 말하지만, 우리는 마치 근심 걱정이 우리 소명인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은 메시야가 우리에게 틈입(闖入)하는 문이라지요? 자잘하기 이를 데 없는 일들도 잘 살펴보면 그 속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만 분주함에 쫓기느라 그 작고 미묘한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은 ‘지금’을 한껏 누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제는 제법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 보면 서늘한 느낌이 들어 무릎 담요를 가져다 덮기도 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가을 날씨가 왜 이리 덥냐고 투덜거렸는데, 이번 주일에는 영상 4도 아래로 내려간다니 건강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교육관 옆에 있는 대추나무가 해거리를 하는지 열매가 많이 달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대추 수확을 했는데, 나무에서 절반쯤 썩은 것이 많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이걸 잘 말렸다가 송구영신예배 때 차로 만들어 마실 예정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열매를 거두는 일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며칠 전 성서학당 시청자 한 분이 고향인 부여에 갔다가 주웠다며 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목회실 식구들과 나누며 참 기뻤습니다. 밤을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내준 분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알밤을 줍기도 하고, 밤송이를 발로 밟거나 나뭇가지로 발기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흥감스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어른들 속에도 아이들이 숨어 있다지요? 가끔은 그 어린아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우리 삶이 건강해집니다. 놀이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간을 파악했습니다. ‘노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근대인들에게 논다는 말은 부정적인 함의를 지닐 때가 많았습니다. 근면과 성실이 근대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만 하며 살 수 없습니다. 놀 줄 알아야 삶이 주는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놀이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일상의 경험과 구별되기에 비일상적 행위입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일으키는 긴장이 묘한 흥분감을 일으킵니다.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창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는 어느새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도 저는 여전히 일상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한가한 때가 별로 없지만 어쩌다 몇 시간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밖으로 나갈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벼가 무르익는 논, 갈대나 억새가 흔들리는 개울가나 산야를 그저 상상 속에서만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유목적 삶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정착 생활이 주는 안온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리고 홀가분하게 떠도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습니다. 떠돎을 꿈꾸면서 집토끼처럼 사는 삶에 대해 비애를 느끼기도 합니다. ‘은총의 숲’ 조성 문제 때문에 몽골에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도 경험해 보았고, 초원을 가득 채운 야생화에 도취되기도 했고,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어진 별 하늘을 보고 감탄한 적도 있습니다. 몽골 유목민들은 유랑과 정착을 반복합니다. 가축들에게 먹일 신선한 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목민들은 이사를 하기 전에 늘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느 쪽으로 이동할 것인지 의논하는 가족회의를 연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곳, 풀이 무성한 곳, 물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사 장소를 정하면 책력을 뒤져 길한 날을 확인한다.

유목민의 이사 준비는 게르의 중심인 난로를 해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불을 끈 후 난로를 빼고, 아궁이 굴뚝과 연통을 제거한다. 그 뒤 게르를 둘러싼 세 개의 줄을 풀면 본격적인 게르 해체가 시작된다. 게르를 해체하고 짐을 치울 때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시간 남짓, 언제라도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유목민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이삿짐을 다 싸면 그동안 잘 살았음을 감사하는 마음과, 훗날 이곳에 다시 옮겨올 때 풀이 많이 자라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나 우유를 하늘에 바친다.”(대구 MBC HD 특별 기획 10부작, <하늘과 맞닿은 바람의 나라 몽골>, 이른아침, p.228-230)

물론 우리가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모진 비바람을 맞아도 거센 눈보라가 닥쳐도 입에 피리 하나 물고서 언제나 웃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일상의 짐들로부터 벗어나 껄껄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잘 놀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루하루 긴장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 6:26,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장막에 머물며 이런저런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끌어내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 15: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굳이 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바라봄은 일상 속에 더 큰 생기를 끌어들이는 통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연휴 중에 공원에 앉아 두 시간쯤 책을 읽었습니다. 카페에 갈 생각이었지만 신선한 바람이 불어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 옆에는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는 꽤 많은 분들이 인사를 건네고, 또 잠시 그 곁에 머물다 가는 것을 보니, 공원의 단골손님임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다가와도 물리치지 않았고, 간다고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맹자에 나오는 "왕자불추往者不追 내자불거來者不拒"의 경지였습니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와서 말을 하면 다 듣기는 했지만 이러쿵저러쿵 대꾸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떠나는 이에게는 ‘잘 가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단 종파에 속한 것이 분명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친절한 말투와 몸짓으로 할머니를 설득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내내 침묵 속에 있다가 제풀에 지친 그들이 떠날 때면 ‘잘 가요’ 하고 인사했습니다. 역정(逆情)을 내지 않는 그 평안함이 참 놀라웠습니다. 어떤 인생의 과정을 거쳐 왔기에 그런 내공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을 어떤 냉소도 조롱기도 없이 대하는 이들을 보면 우리 마음도 절로 따뜻해집니다. 거친 말이 넘실거리는 세상에 살기 때문일 겁니다.

오래전에 한 랍비가 자기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밤이 지나가고 낮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 한 사람이 “저 먼 데 있는 짐승이 양인지 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는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먼 데 있는 나무가 무화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랍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생각은 어떠한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에게서 형제나 자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일세. 그럴 수 없다면 그 시간이 언제든 여전히 밤이라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형제나 자매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는 늘 경계심을 품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생각과 지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날카로운 눈빛이나 거친 말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그와 연루되기 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난폭함과 뻔뻔함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날 공원에서 저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난해한 시를 읽고 있었지만, 정작 제 마음에 더 큰 빛을 던져준 것은 옆 벤치에 앉아계시던 그 할머니였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서서히 위드 코로나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회복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지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일상회복’이라는 말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우리도 다시 대면 예배의 시간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비대면 예배에 이미 익숙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순례자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당을 비질하고 물을 뿌려 손님을 맞이했던 옛사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준비하겠습니다. 몸과 마음 두루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10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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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편지인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모든 이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어렵고 곤고한 시간을 견디고 계신 교우들이 많습니다.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리는 분도 계시고, 수술을 앞두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시대적 우울감이 우리를 확고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우리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안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끈질기고 확고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 30:5)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한로(寒露) 절기가 다가오는데 여전히 날씨가 덥습니다. 아열대성 고기압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기후 변화는 절기에 대한 우리의 감성조차 바꿔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마쳤습니다. 10월 말부터는 위드 코로나로 전환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방침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서서히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모두가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교우들이 많이 모여서 애찬을 나누는 꿈이었습니다. 솥에서는 쇠고기뭇국이 끓고 있고, 다양한 음식이 상 위에 차려지고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그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땅이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는 세상의 쓸쓸함을 안타까워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또다시,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렘 33:10b-11a). 꿈에서도 이 말씀을 떠올리며 홀로 미소를 지은 것은, 일상의 소음이 더없이 그립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저는 문득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래도 되나? 아직은 모임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러다가 누구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을 하다가 깨곤 했습니다. 꿈에서 깨어서도 불쾌하기는커녕 괜히 흐뭇했습니다. 그리고 제 속에 숨겨졌던 그리움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누리지 못하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를 절절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부디 이런 날이 속히 우리에게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오징어 게임‘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속에 반영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매우 부정적이라지요?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서 다른 사람을 밀어트린 후 자신은 살아남았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 아내를 때리고 딸에게 몹쓸 짓을 한 후에 습관처럼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는 목사, 눈이 가려지고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비 오는 거리에 버려진 주인공을 모두가 외면할 때 그의 안대를 벗겨주며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대신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을 건넨 거리의 전도자.

벌써 여러 해 전입니다만 영화 ‘밀양‘이 나왔을 때 청년 교사들과 함께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이청준 선생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소설은 기독교인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용서의 문제가 우리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작동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작가는 ‘용서하라‘는 말이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애지중지하던 아들 알암이가 참담하게 죽임을 당한 후, 알암이 엄마의 삶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인은 알고 보니 아이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이었습니다. 알암이 엄마는 그 범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오히려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복수의 표적을 빼앗긴 알암이 엄마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주변의 기독교인들이 집요하게 전도를 합니다. 주님께 귀의하지 않으면 그 시련의 시간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알암이 엄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보다 더 열성적인 신도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기독교인들의 집회 모습을 보여줍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 열정적인 설교자 등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알암이 엄마는 교인들에게 교도소에 있는 범인을 찾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지만 기어코 그를 만나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범인과 마주한 알암이 엄마는 범인의 평온함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전도를 받았고, 주님께 귀의한 후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암이 엄마는 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함으로 그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온한 범인의 모습은 알암이 엄마를 내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알암이 엄마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신에 대한 변형된 복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인 이청준 선생은 땅에서 벌어진 일은 땅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애를 써보아도 결국 풀리지 않는 문제는 하나님께로 가져갈 수밖에 없지만요. 영화 ‘밀양‘은 원작의 이 비극적인 결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알암이 엄마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한 존재를 통해 새로운 삶을 이어갈 희망의 싹을 암시하며 끝납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들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들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찬양 인도자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 사람들 눈에 나도 그들처럼 보이겠거니 생각하니 한 대 맞은 것 같아요.” 찬양 인도자의 열정적인 멘트와 몸짓과 태도는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보면 조금 이상해 보일 법도 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 속에 반영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세속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인 게 분명합니다. 거룩함을 말하지만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몽환적 세계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 말입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랭돈 길키가 일본의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산둥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43년에 중국에 있는 한 기독교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서양인들을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파악하여 위현(지금의 산둥) 수용소라는 곳에 가둡니다. 그 수용소는 나찌의 수용소나 구 소련의 수용소처럼 학대와 고문이 자행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끼니는 이어갈 수 있도록 음식이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수용소에서는 나름의 수용소 문화가 형성되었고, 때로는 아주 유쾌한 시간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동기로 중국에 와있던 사람들이 비좁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니 사람들의 특성이 오롯이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곳은 일종의 축소된 인류와 같았습니다. 랭던 길키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서구 사회를 지탱한다고 여겼던 합리성과 공정함의 원리가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지는지를 여실히 경험했습니다.

그나마 종교인들은 신앙이 없는 이들에 비해 조금은 관대한 태도로 다른 이들을 대했습니다. 그들은 삶에는 뜻이 있다고 믿었고, 그 열악한 상황을 일종의 과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은 수도원 생활의 경험 때문인지 그 공동생활에 잘 녹아들었습니다. 쾌활하고 이타적인 모습을 보였고, 용감하고 강인하게 현실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누구하고나 잘 섞였습니다. 술, 도박, 욕설, 음란을 일삼는 사람들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들은 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물리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벽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랭돈 길키는 그 경험을 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길은 경건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도 변덕스러운 형제를 품을 포용력이 없다면 그를 섬길 수 없다.“(랭돈 길키, <산둥수용소>, 이선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p.343) 개신교를 비하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요구되는 태도가 무엇인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의 조롱이 아픕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가 일상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 이미지를 바꾸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고후 3: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먹물로 쓴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입니다.

이 가슴 벅찬 선언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홀로는 감당하기 어렵지만 함께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이 멋진 길에서 여러분의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오늘도 내일도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10월 7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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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 60: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걸어오는 동안 젖은 바짓단이 온 종일 축축합니다.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습니다. 이런 날에 듣는 첼로 소리는 더없이 깊은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어지럽지만 가끔은 그런 분잡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이 우리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홍수 통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말이 넘치는 이 시대에 참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고 등장하고, 파렴치함이 정의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 소란 속에서 우리 영혼은 점점 파리해집니다. 넓고 큰 세계에 대한 비전을 잃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지식의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이지만, 영혼의 국량은 점점 협소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 겁니다.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고, 숲을 거쳐온 바람처럼 청량한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 1:8)는 말이 실감납니다. 뭔지 모를 결핍감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말 가운데 제가 늘 명심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도덕경 44장 중).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같은 교훈을 줍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 6:6) 누가 이 말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마모나스mamonas’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아람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물’ 혹은 ‘돈’이라는 단어를 두고 굳이 이 단어를 택하신 것은 ‘맘몬’은 신격화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돈은 우리의 가치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입니다. 거라사의 광인 속에 머물고 있던 군대 귀신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비탈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멈출 수 없음, 그것이 광기의 본질입니다.

족한 줄 모르고 ‘조금 더’ 차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은 망신을 자초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이들은 멈출 줄을 몰라 앞만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위태로움에 빠지곤 합니다. 만족함과 멈출 줄 앎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를 획득한 이들은 거기에 더해 명예까지 얻으려 하고, 더 나아가 권력까지 쥐고 싶어합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무는 지키지 않은 채, 명예라는 폼 나는 지위까지 다 얻고 싶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영리 추구와 양립할 수 없는 지위를 모두 차지하는 순간, 영리 추구와는 양자택일 관계였던 명예는 자본주의 승자의 전리품으로 변화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명예는 승자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되고, 승리하지 못한 자에겐 명예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조건도 제공되지 않는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p.133-134)

이것은 오늘의 현실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자기 시대의 전도된 현실을 함축적인 말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 5:8) 권력자들은 탐나는 밭이나 집이 있으면 주인을 속여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연대의 뜻으로 곡식을 빌려주는 대신 그들은 집이나 밭을 담보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지 못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만들어서 결국은 그 땅과 집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인간의 삶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땅과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변질된 오늘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경고는 참으로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서민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하며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데, 소위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이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예언자의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말도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욕망의 길을 따르다가는 영혼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니까, 어떤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줄일 수 있어요?” 이 질문 속에는 욕망을 줄이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태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일단 “그냥 해보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싱거운 대답에 싱거운 웃음을 지었습니다. 소비자본주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뭔가를 소비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길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욕망이나 취미 더 나아가 생각까지 대중문화와 매체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습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의 허영심을 조장합니다. 소비하지 않음이 죄인 것처럼 우리를 몰아댑니다. 욕망은 발생하는 즉시 실현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가끔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 포도는 셔서 못 먹어.” 정신 승리법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자유로워집니다. 먼저 질문에 대해 제가 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하겠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 속에 결핍감이 큰 것 같습니다. 마음의 스산함을 가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선망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오롯이 누리려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농어촌에 사시는 분들 가운데 이 시대의 지혜자처럼 여겨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제게 배송된 잡지 ‘전라도닷컴‘에서 읽은 이야기가 좋아서 제 수첩에 적어 놓았습니다.

“묵고 사는 것은 힘들어도 콩 하나라도 서로 나놔묵고 살고, 옛날에가 재밌었어. 백원 벌문 천 원 모탤라는 욕심있듯이 인자는 세상이 좀 각박해졌어.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안마도 어부 서용진씨)

“나는 바다가 젤로 재밌어. 그런께 이것 하제. 날마다 하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젤로 행복한 사람이여.“(안마도 어부 김영식씨)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라는 말은 우리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마치 시 구절처럼 여겨집니다. ‘재미난 세상‘은 어쩌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무와 욕망 사이를 오가는 동안 재미는 사라지고 삶은 잿빛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오전에 ‘웨슬리 설교 강의‘를 녹화했습니다. 44편의 설교 가운데 이제 42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전달하는 저의 부족함을 감안하더라도 웨슬리의 설교는 참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나 칼뱅처럼 많은 신학적 저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교 속에는 감리교 신학과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저의 선생님은 설교가 모든 신학을 종합하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말에 가장 부합하는 분이 존 웨슬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론신학과 성서신학, 실천신학과 윤리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설교 ‘자기 부인否認‘에서 웨슬리는 ‘십자가를 견디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을 구별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십자가를 견디는’ 일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온순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참을 때, 그때는 적절하게 ‘십자가를 견딘다.‘고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을 자진하여 감수할 때, 자신의 뜻에 상반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게 될 때, 또한 현명하고 은혜로우신 창조주의 뜻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을 선택할 때, 우리가 적절하게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됩니다.“(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 3>, 조종남·김홍기·임승안 외 공역, 대한기독교서회, p.255-6)

믿음으로 살려는 이들은 십자가를 견디기도 해야 하지만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은 마치 껍질이 깨지는 순간과 마찬가지입니다. 아픔과 충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길 위의 적당한 지점에 멈추어 선 채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것이지요. 잊지 않으셨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해 길 떠난 순례자들입니다. 어렵더라도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늡늡한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경주를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1년 9월 3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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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하는 날, 이날 당신은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항상 더 많이 행하고,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며, 항상 길 위에 있으십시오. 결코 되돌아가지 말고, 결코,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안셀름 그린,<길 위에서>, 김영룡 옮김, 분도출판사, p.41에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명절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 차량의 행렬도 보이지 않고, 기차도 창가쪽 좌석에만 승객을 앉혔다 합니다. 가족들조차 8명 이상 모일 수 없으니, 옛날처럼 시끌벅적한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희도 아들과 딸네 식구들을 따로 따로 맞아야 했습니다. 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온 아이들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벽에 붙여놓은 키를 재는 판에 서서 자란 키를 자랑했습니다. 거의 넉달만에 만났는데 각각 약 4cm쯤 자라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 놀라운 성장력이 희망이겠지요?

저희는 추석에 음식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간단한 먹을거리를 장만한 아내가 ‘그래도 전(煎)은 좀 준비해야 하지 않나?’ 하고 말했습니다. 웬일로 집에서 전을 부치려나보다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공덕역 근처에 있는 유명한 전 가게에 가서 구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짐꾼으로 발탁되어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전을 구입하려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각자 커다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얇은 비닐장갑을 낀 채 그들은 무드럭지게 쌓여있는 전 가운데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았습니다. 가게 바깥 대로변에는 차들이 즐비하게 서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 줄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저는 바깥 도로변에 서서 아주 무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가족들이 수다를 떨며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구나’, ‘아니, 그런데 명절에는 왜 꼭 전을 먹어야 하는 거야?’,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각종 재료를 튀겨내는 것이 번거롭긴 하지만 잔치 기분은 나겠구나’,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야?’.

뜬금 없이 서홍관 시인의 ‘어머니 알통’도 떠올랐습니다. 시인은 아홉 살 적 기억을 떠올립니다. 뒤주에서 쌀 한 됫박을 꺼내시던 어머니가 문득 아이를 보고 웃음 띤 얼굴로 말합니다. “내 알통 봐라.” 시인에게 그 때의 일이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때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모처럼 어머니 집에 들른 시인의 밥상을 차리느라 어머니가 냉장고를 열고 게장을 꺼내시다가 그만 왈칵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주방은 온통 간장으로 넘쳐 흘렀고, 그 상황이 민망했던 팔십 세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말씀하십니다. ‘손목에 힘이 없다’, ‘이제는 병신 다 됐다’. 짤막한 시 속에 어머니의 한 평생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이 두 사건 사이의 갈피에 묻혀 있었지만요. 시인의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늘이 있어 서 있던 자리에 해가 들어올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후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나타날 거라 예상했지만,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전을 장만했으니 추석 준비는 거의 끝난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아이들이 오고 가는 짬짬이 청소와 설거지를 반복하다가도, 조금 한가해지면 서재에 앉아 가벼운 읽을거리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언론인인 임재경 선생님의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님의 대담집 <문학과의 동행>, 국문학자 겸 민속학자인 김열규 선생님의 <이젠 없는 것들>을 두서없이 설렁설렁 읽었습니다. 어쩌다보니 다 옛 기억들을 더듬는 책들이었네요. 이건 순전히 명절 탓입니다. 김열규 선생님의 책은 제목만 봐도 갖가지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사라진 소리와 냄새들, 삼삼한 정경들을 돌아본 셋째 마당의 제목은 ‘귀에 사무치고 코에 서린 것들’입니다. 제목 속에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낙숫물 소리, 타작 소리, 다듬이 소리, 아낙네들 떨이하는 소리, 방아 소리, 풀피리, 버들피리 소리, 닭 울음, 황소 울음, 할아버지 담뱃대 터는 소리, 할머니 군소리, 깨, 콩 볶는 냄새, 술 익는 냄새, 누룽지, 숭늉, 처마 끝 고드름, 처마 밑 제비집. 이런 소리와 냄새, 그리고 그런 정경에서 멀어진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그리운 시절입니다. ‘얼굴’이라는 노래 기억하시는지요? 우리가 젊은 시절부터 불렀던 이 노래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하여 놀랐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얼굴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이 가사의 핵심은 ‘무심코’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각인된 어떤 기억이 예기치 않은 순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는 정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소월도 같은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이상하지요? 그리움이라는 말 그 자체 속에 어떤 마술이라도 걸려 있는 것일까요? 코로나19 시대여서인지 ‘그립다’는 단어가 더 자주 떠오릅니다. 심심풀이로 성경에서 ‘그리워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꽤 많지만 몇 구절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시 63:1)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시 84:2)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내 두 손을 펴 들고 기도합니다. 메마른 땅처럼 목마른 내 영혼이 주님을 그리워합니다.”(시 143:6)


“나는 임의 것, 임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아 7:10)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고후 7:7)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빌 1:8)


“갓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벧전 2:2)

어느 구절 할 것 없이 그리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동료들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 속에 있는 거칠고 날선 것들을 부드럽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 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위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리움은 ‘나’는 ‘너’를 통해서만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인간일 수 없음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삶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이런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14)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을 가리켜 세상 곳곳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이라 칭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길손과 나그네로 살던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은 더 나은 곳 곧 “하늘의 고향”(히 11:16)을 찾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움이 우리를 밀고 갈 때도 있고, 우리를 앞으로 잡아당기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방탄소년단(BTS)이 유엔 총회 특별 행사 가운데 하나인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 개회 세션에서 청년세대와 미래세대를 대표해서 한 연설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멈춘 줄 알았는데, 분명히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런 데 있습니다. 느닷없는 운명의 타격을 받으면 잠시 동안 당황스러워하지만 다음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합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음울한 전망이 도처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렇지만 BTS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너무 어둡게만 생각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세상을 위해 직접 고민하고, 노력하고, 길을 찾고 있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페이지가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엔딩이 정해진 것처럼 말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변화에 겁먹기보다는 ‘웰컴’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가자는 것입니다. 존재의 용기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사하라 사막 인근에서 은수자로 살다가 순교한 샤를 드 푸꼬의 ‘의탁의 기도’를 저는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겨 드리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궁극적 신뢰입니다. 그 신뢰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계절은 추분에 접어들었습니다. 진정한 가을의 시작입니다. 허장성세를 거두고 내적으로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 속을 걸어가십시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9월 2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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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백로와 추분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 가정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길 빕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이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때입니다. 도시의 소음 때문에 그 소리를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어릴 적에 벽 사이에서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고, 둘이서만 알자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귀뚜라미와 나와’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고요한 귀 기울임의 풍경이 떠올라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크고 새된 소리보다는 작고 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평안해집니다. 시냇물소리, 솔숲이나 대숲을 스쳐온 바람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다시 윤동주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나무’ 전문). 이것은 인과관계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시인에게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나무가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기 때문일 겁니다.

어렵고 난감했던 세월을 살면서도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현실을 외면했다고 탓하면 안 됩니다. 힘겨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아름다움을 한껏 끄집어내야 합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평안한 시절에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그는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폭격기의 굉음이 들려올 때에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들판의 치커리와 카모마일을 꺾어 질겅거리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은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빵 한 조각, 죽 한 모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라는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늘 남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p.187) 

선의 희미한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삶이 저 높은 삶의 차원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많은 영세 상인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원룸의 보증금을 빼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세상을 등진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쇠로 된 감방에 갇힌 듯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이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인 공덕역을 지나는데, 환풍구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며칠 후 그곳 환풍구에 놓인 꽃 몇 송이를 보고서야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환풍구 공사를 하던 20대의 젊은이가 9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자리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조치를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 본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눈앞에서 추락하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까요?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의 몸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피에타는 자식을 잃고 애통하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 해 전 팽목항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떠올렸습니다. 피에타 하면 흔히 바티칸에 있는 작품이 떠오르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만큼 제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은 없습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 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아래로 무너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전후좌우에서 살피다 보면 왠지 호흡이 멎은 예수가 오히려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업고 있는 것 같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인류의 아픔을 온통 짊어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의 아픔 속에 화육하고 계십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마치 세상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런 말조차 부질없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설 땅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외로운 이들 곁에 다가서고 싶어 하십니다.

미국의 영성가이자 설교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책을 읽는 중에 꽤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명 쯤 되는 혼성그룹의 영성 모임을 이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들이 다룬 주제는 ‘구체화된 경건’이었습니다. 그날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팔복이었고 일체 말은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그 말씀을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제시된 말씀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난감해 했습니다.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토론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낯설어 합니다. 자의식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그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팔복을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십 번 이상 들었을 터였습니다. 멤버 중의 목사들은 슬그머니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에 속한 한 사제가 시체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됐기 때문입니다. 15분이 지나 모든 조가 중앙에 모였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는 시체 역할을 자청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섰습니다. 두 번째 여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시체 역할을 하는 이의 머리를 무릎에 뉘였습니다. 다른 두 여성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 위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마치 그 죽은 여인의 몸 위로 고딕식 건물이 세워진 것 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이의 몸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사랑과 슬픔 속에 잠겨 그렇게 멈춰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그들 속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번져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깊은 당혹감 속에 빠졌습니다. 그 슬픈 흐느낌은 누구도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 역할을 하던 분의 몸이 흐느낌으로 흔들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흐느낌은 점점 커졌고 다른 사람이 따라 울기 시작했고, 울림소리도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울음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울음은 죽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Barbara Brown Taylor, , HarperOne, p.48-51 참조)

기쁨보다는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슬픔 혹은 비애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입니다. 슬픔의 강을 따라 흐르다보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슬픔의 강은 국경, 이데올로기, 종교, 문화, 남녀노소, 빈부귀천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슬픔을 배제하는 문화는 천박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슬픔은 극복되어야 할 삶의 부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세계에 접속됩니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참 사람됨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군요. 가족들이 마음 편히 모이기도 어려운 시대이긴 합니다만, 안전하고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평화.

2021년 9월 1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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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먹는 새

한 아이가 쌀새에 대해 물었다.

“저 새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죠, 엄마? 혹시 꽃을 먹는 게 아닐까요?”(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노래>, 강은교 옮기고 엮음, 도서출판 이레, p.17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모처럼 맑은 햇빛을 보니 참 좋습니다. 마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9)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요? 가끔 삶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언덕을 넘고 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언덕이 우리를 기다리곤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꾼 꿈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께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 위에서 서서 들려주신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둘째,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땅 위의 모든 백성이 그들 덕분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내가 너와 동행하면서 너를 지켜주고 반드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감동적인 약속입니다. 큰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일상에서 직면해야 하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시간 속을 기어가야 했습니다. 시련과 고통, 서러움과 두려움을 통과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사 41:14)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처지를 빗대서 한 표현이겠지만 저는 이 속에 담긴 아픔을 읽습니다. 어린 시절,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 시골 신작로를 타박타박 걷다 보면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흙이 가라앉아 고운 바닥에 마치 들판에 난 외길처럼 긴 선이 그어진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 외줄은 지렁이가 온 몸으로 기어간 자취였던 것입니다. 흙 위를 기어간 지렁이의 자취가 왜 그리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심상 속에 또렷하게 각인된 그 이미지 탓인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구절을 볼 때마다 저는 역사의 밑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세상에는 발레리나가 몸을 솟구치듯 가뿐하고 상큼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처럼 허청거리며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짓밟히면서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거미’라는 시에서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설움과 자주 입을 맞추었다는 표현은 시인이 겪어야 했던 신산스런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으로 뻘밭을 기어가는 것처럼 살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더 고귀하고 높은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는 것, 그것이 시인의 드넓은 긍지일 겁니다. 시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의 시인들입니다.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정화하는 이들이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시인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믿음의 반대어는 불신이 아니라 숙명론입니다. 숙명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숙명론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미움을 살까 무서워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나태함입니다. 영어로 나태를 가리키는 단어는 sloth인데, 이 단어는 나무늘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무에 매달려 지내면서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사는 동물입니다. 물론 나무늘보도 급할 때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입니다.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나태는 몸이 굼뜬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메말라 활력과 생기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종의 무기력증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며 자기 일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악산 둘레길


파란 가을 하늘이 우리의 시야를 시원하게 합니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가끔 하늘도 바라보고, 나무도 바라보고, 흘러가는 강물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찰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런 느긋한 시간 경험이 우리를 신성한 시간 앞에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의 마지막 십 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괴테와의 대화>라고 하는 책은 괴테의 작품을 넘어 괴테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참 중요한 자료입니다. 물론 에커만이 괴테를 늘 경외심을 품고 대했던 것을 감안한다 해도 그 글 속에 나타난 괴테는 품격 있고 또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서 읽은 한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에커만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둥지에 들어 있는 새끼 휘파람새를 어미 새와 함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미 새는 실내에서도 쉴 새 없이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놓아주어도 다시 새끼에게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에커만은 위험과 감금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미 새의 사랑에 감동하여 괴테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괴테는 미소를 지은 채 “만약 자네가 신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네”라고 말하며 자기가 쓴 시의 한 대목을 낭송해주었습니다.

“신은 어울리게도 안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자기 안에 자연을, 자연 속에 스스로를 품어 기른다
그러므로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은
신의 힘과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괴테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신이 어미 새에게 자기 새끼 새에 관한 이와 같은 무한한 사랑의 본능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또한 똑같은 본능이 자연 전체의 일체 생물에 미치게 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지속하지 못할 게야!―그와 같이 신의 위력은 세계 어디에나 편재해 있고, 무한한 사랑은 어디에서나 약동하고 있는 것이네.”(요한 페테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곽복록 역, OLJE CLASSICS, p.142-3) 세계의 지속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 속에 불어넣으시는 무한한 사랑의 본능 덕분이라는 말에 저는 크게 감복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누군가의 덕분에 삽니다. 최초에는 부모의 사랑이 그리고 나중에는 운명처럼 다가온 이런저런 사랑이 우리 삶을 든든하게 붙잡아주는 끈이 됩니다. 괴테는 그러한 사랑을 가리켜 “편재하는 신의 상징”이라 말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본 주관식 시험 문제 중에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건 우리도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적었다고 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대답 속에는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아이의 고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게 실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설사 누가 꾸며냈다 해도 이 질문과 대답은 우리 생명이 사랑의 빚임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랑의 빚만 늘어나는 것 같아 하나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삶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겨워도 그 속에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진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 새가 혹시 꽃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묻는 아이를 보고 무지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천진함을 잃어 우리 삶이 무거워졌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생각의 무게 때문에 물속에 빠져 들어갔던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비애 속에 자꾸 잠깁니다. 도처에서 생명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데, 시름에 잠긴 채 그 사이를 절름거리며 걷는 것은 삶의 낭비입니다. 세계 교회는 창조절기 가운데  9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의 기간을  지구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는 기간으로 정했습니다. 이 기간을 지나면서 지구에 대한 문해력이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편재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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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의 빛이 어둡지 않은가?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p.233에 나오는 권정생의 말)

주님의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벌써 9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별고 없이 잘들 계신지요? 격절의 세월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 7:14).

 

‘알지 못함’, 어쩌면 이게 유한한 우리 인생의 비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뜻한 바가 이루어졌다고 너무 으스댈 것도 없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지혜는 우리에게 당도한 삶의 현실을 잘 갈무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흐리고 힘든 날도 있지만, 맑고 상쾌한 날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날이 다가오든 우리 내면의 빛이 어둡지 않다면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우리 교우의 첼로 독주회에 다녀왔습니다. 서정적인 첼로의 선율 속에서 모처럼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와 첼로가 소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다른 소리 위에 또 다른 소리가 유연하게 포개지며 만들어내는 화음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나찌가 만든 절멸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이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지요?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저는 한 장면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날아가 그 유명한 관문인 ‘체크포인트 찰리’ 앞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인 ‘사라방드’를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억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면서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애가였을 겁니다. 저는 신문에서 그 연주 장면을 스크랩 해두고 가끔 꺼내 보곤 했습니다. 음악의 위대함을 전율하며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박하사탕’을 보았습니다. 영화 ‘박하사탕’을 원작으로 하여 세심하게 인물들을 재배치하여 만든 작품이었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작곡가 이건용 선생님이 여러 해에 걸쳐 대작을 작곡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이런 모임에 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우리 교우 가족이 오페라 제작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한 그 오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으깨지고 망가지는 지를 처연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빚어지는 사람들의 연대와 사랑의 아름다움 또한 가슴 시리게 드러냈습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극장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등을 뒤로 기대고 편히 쉴 생각이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기사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오시나봐요.”
“예.”
“무슨 공연이었나요?”
“‘박하사탕’이라는 오페라였어요.“
“요즘 공연자들의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데 그래도 공연을 할 수 있었군요.“
“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공연자들의 형편을 그렇게 잘 아세요?”
“예, 사실 우리 집 아이들 셋이 다 국악을 했어요.”
“그렇군요. 지난 2년 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큰 아이는 경기 민요를 하고, 작은 아이는 판소리를 하고, 막내는 한국 무용을 하는데요. 공연이 끊겨서 어려움이 많았지요.”
“아유, 자제분들이 재능이 많으시군요. 혹시 선생님도 국악을 하시나요?
“나야 뭐, 하하,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하는 정도지요 뭐. 내 아내는 프로는 아니지만 한국 무용을 꽤 잘해요.”

기사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큰길가에 내려달라고 하는 데도 굳이 아파트 앞까지 차를 몰면서 “차가 올라가는 거니까 내가 힘들 건 없어요”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유쾌한 저녁이었습니다. 그 기사님은 지금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아들과 딸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게 마련입니다. 내 속에 기쁨이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뒤흔들고 있을 때는 사소한 일로도 화를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세상이 온통 나에게 적대적인 것처럼 느껴져 우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치유자이신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정결법 위반이라며 나무랐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전통을 지킨다 하면서도 율법의 본 정신을 저버린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 15:11).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성급함, 난폭함, 비방, 무절제, 불평, 불경, 교만함 등은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혼돈과 어둠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권고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눅 11:35).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본本과 말末은 각각 나무 목木 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자의 자형을 보면 ‘본’은 뿌리를 가리키고 ‘말’은 열매를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이 중요하고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도 좋은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입니다. 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도 동일한 고민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제11권 14장, 최민순 역, 성바오로출판사, p.324)


시간에 대한 탐색을 거듭하던 어거스틴은 결국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 하는 것이 그럴 듯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구절이 나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앞의 책, 제11권 20장, p.330). 인간은 시간을 기억, 목격함(직관), 기다림의 형태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화하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겠지요. 과거는 믿음으로, 현재는 사랑으로, 미래는 소망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시간과 연결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삶의 토대가 될 때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위험에 직면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고통에 반응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소명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이 움베르토 에코와의 대화에서 들려준 말이 귀에 생생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책임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존엄성은 단지 내 쪽에서 내린 호의적인 평가나 인도주의적인 충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름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존재는 단지 ‘나’라든가 ‘나의 것’, 또는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움베르토 에코·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p.56)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충실한 것이 생명 존중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삶을 부단히 연습해야겠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은 바로 우리가 의젓한 사람으로 지어져가는 일종의 도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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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아침에 눈떠서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받기만 했다고, 받은 것들을 쌓아놓기만 했다고, 쌓인 것들이 너무 많다고, 그것들이 모두 다시 주어지고 갚아져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살아야겠다고……”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p.94)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수신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고전 1:2)라고 말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구절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특히 ‘각처’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간간이 기도를 부탁하러 교회에 들르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여럿이 모일 수는 없지만 제 사무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혼잣소리로 여러분께 인사를 건넵니다. “거기 다 잘 계시지요?”

 

처서 절기인데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늦장마처럼 흐린 날이 많습니다. 남녘에는 태풍 오마이스가 스쳐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렸습니다. 건물이 침수되고 도로가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매해 반복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자연 재해를 겪을 때마다 인간의 작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효창 공원을 천천히 걷다가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가 얕아서인지, 그 자리에 노박이로 서 있는 것이 지루했는지 나무는 뿌리를 드러낸 채 벌렁 누워 버렸습니다.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텅 비었습니다. 조금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그 광경에 또 익숙해지겠지요? 세상 사는 이치가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교우들이 차마 그가 머물던 공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치 그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겁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그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삶의 다양한 풍경들이 빚어집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재하는 현존? 하나님을 우리는 그렇게 경험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도쿄에서는 패럴림픽이 진행 중입니다. 하계 올림픽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스포츠는 세계와 미래를 바꾸는 힘이 있다’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이 대회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평화의 제전입니다. 신체장애, 지적장애, 시각장애, 뇌성마비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 자기들이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현장은 그 자체로 감동입니다. 장애를 안고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입니다. 몸에 조그만 고통이 찾아와도 우리는 전전긍긍합니다. 당연하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아주 조금 겸손해집니다. 그런데 장애를 안고 태어나거나, 중도 장애를 입은 이들의 고통과 어둠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깊은 좌절의 늪에 빠져들 수도 있고, 원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를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발휘하려는 이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저는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로부터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이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철학적 우회를 거쳐야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존재의 용기란 우리를 공허와 무의미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려는 현실을 경험하면서도 기어코 자기 존재를 지속하고 또한 긍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용기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고백하든 고백하지 않든,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이들은 위대합니다. 많은 이들이 패럴림픽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아내와 길을 걷다가 본 광경이 떠오릅니다. 비둘기 몇 마리가 오졸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도시의 풍경입니다만 어느 순간 아내가 ‘어머, 저기 좀 봐요’ 하고 말했습니다. 비둘기의 가슴께에 광고 전단지 테이프가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어쩌다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둘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걷는 방향을 이러저리 바꿔보고, 깃털도 움직거려 보지만 테이프가 떨어질 리가 없었습니다. 도와주고 싶어 조금 다가서면 위협으로 느꼈는지 비둘기는 다른 방향으로 황급하게 달아났습니다. “한번 날아봐. 그러면 떨어질지도 몰라.” 얼마 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아픈 새끼를 입에 물고 동물 병원을 찾아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살다보면 정말 암담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한계상황처럼 여겨지는 일들 말입니다.

 

주님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는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눅 10:36) 주님은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으로 바꾸셨습니다. 이웃은 지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보복의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처지가 더욱 딱하게 되었습니다. SNS를 통해 탈레반이 기독교 선교사들을 처형하려고 하니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유포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대개 가짜 뉴스로 드러났습니다. 이슬람 신자들을 테러리스트로 특정하려는 의도 때문일 겁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받아들일지의 문제가 국제사회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일단 우리 정부는 탈레반의 보복 위협 아래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 400명을 군용기로 데려오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프간 재건에 협력한 대사관, 병원, 직업 훈련원 직원 및 가족들입니다. 잘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설 땅이 없는 이들에게 설 땅을 제공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피렌체 대성당 건너편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 건물은 청동문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물과 내부의 정교한 모자이크로 유명합니다. 안드레아 피사노가 남쪽문에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관련된 부조물을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희망’(Spes)입니다. 날개 달린 천사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희망을 잡으려고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치 나비나 잠자리를 잡으려고 발 끝을 세운 채 조심조심 걷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등 뒤로는 날개가 달려있지만 천사는 다만 손을 뻗고 있을 뿐입니다. 희망은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피사노는 희망이란 본래 희박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데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이 작품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천사가 잡으려 하는 공중에 있는 어떤 주머니가 희망인 줄 알았지만, 실은 날개를 가진 저 존재가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발터 벤야민의 말, 즉 “희망은 날개를 갖고 있다”는 말을 힌트 삼아 그 천사가 희망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왜 희망일까? 무엇인가 ‘곁으로’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되려면 ‘곁으로’ 움직여야 한다. 손에 닿지 않더라도 ‘곁으로’ 움직이는 순간, 날개 달린 존재는 희망이 된다. ‘곁으로’ 움직이는 순간, 거기에 진실이 있다.”(김응교, <곁으로>, 새물결플러스, p.27)

 

‘곁으로’ 다가서는 움직임이 곧 희망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암시합니다. 다가섬으로 내게 유익이 될 만한 사람 곁으로 가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다가섬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을 때, 그 다가섬은 희망이 됩니다. 누군가의 곁에 다가가 그의 설 땅이 되어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이렇게 힘들고 지친 사람들 곁으로 다가서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인정의 황무지인 이 세상에 희망을 파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재라는 시간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채우는 이들입니다. 온몸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돌보는 분들은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갈 6:2)라고 말했습니다. 남의 짐을 지는 행위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울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8월 마지막 주일이 다가옵니다.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고,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려고 애쓰십시오. 그분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늘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손이 되어 가슴 시린 이들을 감싸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8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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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서 거니시는 분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 나는 너희가 메고 있던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너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였다.”(레 26:11-13)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수고 많으셨지요? 많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흔쾌할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버티며 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세상의 많은 고통 가운데 하나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지요? 유행가 제목이 요즘 우리 마음을 참 적실하게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움만 쌓이네.’ 제 마음이 그러한 것 같이 여러분의 마음도 그러한지요? 

새벽바람이 이젠 선득합니다. 8월 중순 지나면 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어쩜 그리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숙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할 때 말입니다.


세상의 아픔은 여전합니다.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혼돈에 빠진 아이티에 강진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수만 채의 집이 붕괴되거나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기본 의약품은 이미 동이 났고 항생제와 마취제까지 부족하여 수술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를 동반한 열대성 저기압 그레이스가 다가오고 있어 산사태와 건물의 추가 붕괴가 우려된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반갑지 않는 손님이 ‘그레이스’ 곧 ‘은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이 구절은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 즉 차별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재난에도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재난은 대개 가난한 이들에게 집중되곤 합니다. 그들은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모욕을 당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라오서의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성경을 패러디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라오서, <루어투어 시앙쯔>, 최영애 옮김, 통나무, p.495)


라오서는 비가 개이면 시인들은 연잎에 구슬처럼 맺히는 물방울을 노래하고 저 먼데서 떠오르는 쌍무지개를 읊조리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비를 맞고 가장이 감기라도 걸리게 되면 온 식구가 굶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한 차례의 비가 기녀나 좀도둑을 만들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라오서의 눈을 통해 아이티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깨끗한 물과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하도록 돕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우리 교회도 어려움에 처한 아이티를 돕기 위한 모금활동에 참여하려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이 절실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매우 어렵습니다. 20년 간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탈레반이 돌아왔습니다. 카불 공항은 공포에 사로잡혀 탈출하려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막대한 현금을 가지고 국외로 이미 도망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성 각료와 관료들 일부는 피난을 거부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디 무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전문가들은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두고 이런 저런 분석에 여념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고, 미국의 중동 전략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되었던 소련과 무자히딘 간의 전쟁을 숙주로 하여 탄생한 탈레반은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주둔으로 세력을 잃은 듯 보였지만 이제는 엄연한 현실로 세계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상당한 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테러와 공포가 일상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쟁과 테러는 우리 삶을 고양시키는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무너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늪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일상을 가장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붕이 있는 집에서 잠을 자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함께 나누고, 아침이면 일터로 가고, 조금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벗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고, 가끔 여행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당연한 기회가 아닙니다.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 도덕적 주체로서의 삶도 무너지기 쉽습니다. 사회적 일탈 행위를 하는 이들을 함부로 단죄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로 살면서 가족과 생이별한 채 지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이들의 수고 덕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제 농촌이든 어촌이든 이주 노동자들이 없으면 생산 활동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계절노동에 동원되는 이주 노동자들은 비좁은 다인승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비좁은 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의료혜택도 부족하니 감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떠돌며 살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난민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더라도 그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 22:21)

 

성경은 학대당하는 이들이 정의를 호소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제가 늘 마음에 명심하고 있는 몇 가지 경구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다’(야스퍼스). ‘인간(human-being)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being-human)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요구받음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우리 인간성을 결정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일까요?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도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처지는 얼마나 기이한가? 우리들 각자는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를 채 이곳에 잠시 머물 뿐이다. 목적을 알 것 같은 느낌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저 일상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무엇보다 그 미소와 안녕에 우리의 행복이 오롯이 달려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친분은 없지만 공감이라는 끈으로 서로 얽혀 있는 미지의 타인을 위해.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나의 온 삶이 산 자든 죽은 자든 상관없이 타인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받은 만큼을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한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강승희 옮김, 호메로스, p.23-24)


‘우리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는 아인슈타인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이 말은 나의 존재가 이웃 덕분에 지속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과제는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주의 신비와 비밀을 탐구하는 최고의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결국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지근거리에 있는 이들을 아끼고 존중할 줄 모른다면 그는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그런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도량입니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는 말씀이 가슴 벅차게 다가옵니다. 우리들이 맺는 관계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지러운 시절일수록 기초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익에 담백해질 때 우리 속에 여백이 커집니다. 여백이 있어야 다른 이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소낙비가 내린 후 하늘이 청명합니다. 깨끗한 대기는 사물들을 왜곡됨 없이 보여줍니다. 우리도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지내시는지 두루 궁금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9)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평화와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8월 1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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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한다.”(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예담, p.8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입추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달라졌습니다. 새벽이면 홑이불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뭇잎도 그 무성하던 초록이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매미소리도 조금 애잔해졌습니다. 참매미, 말매미, 쓰름매미, 유지매미 소리가 뒤섞여 숲을 가득 채우더니 이제는 제풀에 꺾인 듯 소리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계절은 이렇게 어김없이 순환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시 104:24) 볼 눈과 들을 귀가 있으면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 전에 소개한 척 로퍼의 ‘자연이 들려주는 말’을 다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너그럽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아일랜드 축복 기도>, 로사 신현림 엮음, 사과꽃, p.25)

자연 역시 우리에게는 ‘텍스트’입니다. 고요함에 머물면서 겸허하게 들으려 할 때 자연은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배우려 하기보다는, 자연을 닦달하여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얻으려 합니다. 이때 자연은 자원이 됩니다. 한동안 자연은 자기를 착취하는 인간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그 착취가 정도를 넘게 될 때 자연의 보복이 시작됩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빙하 속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고, 그 때문에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지구의 한쪽에서는 물난리로 야단이고, 다른 쪽에서는 거대한 산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터키의 산불은 어지간히 잡혔다고 하지만, 그리스의 휴양지인 에비아섬은 산불로 인해 오렌지빛 불길과 잿빛 연기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외신이 전하는 사진 한 장이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공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온 자기 집에 불길이 닿는 것을 바라보며 뒤돌아선 81세 할머니는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죄송스러운 표현입니다만 뭉크의 그림 ‘절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기후 위기는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풍요의 신화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가석방을 두고 어떤 이들은 환영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제 논리가 법적 공정을 해쳤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를 부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십시오! 저로서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ho kreittõn)의 편익(이득: to sympheron)’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플라톤,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p.82)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은 암울한 세상입니다.

성경은 공의와 정의가 세상의 토대라고 말합니다. 공의는 미슈팟(mishpat)을 번역한 말인데, 재판관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판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규범, 법령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 하여 치우쳐 두둔해서도 안 되고, 유력한 사람이라 하여 법을 임의로 적용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뢰 사회의 기초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법적 정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의는 쩨다카(tsedaqah)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것은 억압받는 사람에 대한 애타는 동정과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율법은 가난한 자에게 담보물을 잡았을 때는 해가 지기 전에 그것을 돌려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신 24:13b). 이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정의는,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게 행사된다 하더라도 비인간화될 때 죽고 만다. 정의는 그것 자체만이 신격화될 때 죽는다. 모든 정의 너머에 하느님의 동정이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논리는 비인격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의를 향한 관심은 사랑의 행위다.”(아브라함 J.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삼인, p.323)

 

정의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하지만, 사랑을 명분으로 정의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주중에는 여러 건의 장례가 진행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슬픔 속에 잠긴 유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장례를 치를 때마다 고인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함께 지나왔던 시간의 자취를 들추노라면 호탕한 웃음소리도 들리고, 함께 나누던 음식의 맛도 떠오르고, 찬양 속에 함께 머물던 기억도 소환됩니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서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산 사람은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의 존재는 그 동안 만나왔던 이들과의 교섭 속에서 빚어진 무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떠난 분들은 이미 우리 곁에 없지만 그분들은 우리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사람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외줄을 타고 삽니다. 가끔은 괴롭고, 또 가끔은 권태롭지만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잠시 그분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게 인생입니다. 그 일에 충실할 때 삶은 든든해집니다.

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다니러 왔던 청년들이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를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학기부터 새롭게 외국에서의 학업을 시작하는 이들도 여럿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그곳에서 어떻게 지낼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자기 삶을 기획하고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패기가 아름답습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자기 세계를 떠났던 아브람입니다. 그는 안전 보장의 끈을 끊었기에 온전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야 했습니다. 형 에서에게 돌아갈 복을 가로채고는 두려움 속에서 고향을 등져야 했던 야곱의 신산스러운 마음도 떠오릅니다. 벧엘에서 그는 돌베개를 베고 누웠다가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천사들의 모습을 보았고, 어느 곳에 가든지 동행하시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억 속에 새겨졌을 그 약속의 말씀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위기로부터 그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였을 겁니다.

먼 길을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가끔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의 일화입니다. 힌두교 신자였던 그는 어느 날 환상 가운데 주님을 만난 후 예수의 제자가 되어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설산을 넘나들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노년이 되었을 때 누가 물었다지요? 몸도 건강치 않은 분이 어떻게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산을 넘으실 수 있었느냐고.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체로 이런 뜻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을 넘기 전에 정신의 키를 산보다 높이면 산을 넘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할 세상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많이 부르지 않지만 예전에 많이 불렀던 찬송가 445장이 떠오릅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앞에서 인용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처럼 우리가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거듭되는 실패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지향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지향 그 자체가 용기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울 때도 노래를 부릅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우렁우렁한 찬송 소리가 캄캄한 어둠 속에 처한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비대면 상황 속에 있지만, 중심이신 주님과의 연결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의 빛을 받아 건강한 기쁨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평화.

2021년 8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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