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김기석의 새로봄(189)

 

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할렐루야. 내가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모두 깊이 연구하는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 그 하신 기이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다(시편 111:1-4).

 

적대감에 가득 찬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달픈 일이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넋을 놓고 걷다가 느닷없는 크랙슨 소리에 놀라 질겁을 하듯이 언제 봉변을 당할지 몰라 우리는 전전긍긍하며 산다. 얼굴빛 환한 사람 만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다. 함석헌 선생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탄식하듯 말한다.

 

“영웅심에 들뜬 청년/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실망한 얼굴,/병에 눌린 얼굴,/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얼굴> 중에서).

 

참 아름다운 얼굴을 만나야 삶이 바로 선다. 히브리의 시인은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정직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샤르yashar’는 ‘곧다’, ‘옳다’, ‘똑바로 서다’라는 뜻으로 두루 쓰인다. 정직한 이들은 바로 선 이들이다. 내면에 기둥 하나가 들어선 이들이라는 말이다. 기둥이 바로 서면 그 위에 어지간한 무게가 얹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이 그러하다. 김흥호 목사님이 ‘믿음’을 ‘밑힘’이라 해석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아주 길쭉하고 홀쭉한 인물상을 많이 만들었다. 불안과 고독과 취약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궁핍한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물들의 눈빛은 형형하다. 마치 자기 운명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대개 직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큼성큼 걷는 그 인물들은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외롭고 고달프지만 불멸을 지향하는 사람의 존엄함을 본다. 직립한 사람은 아름답다.

 

시인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의 모임에 속한 즐거움이 크다고 고백한다. 그 모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꿈을 간직한 채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크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은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눌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시편 111:3).

 

장엄함에 대한 인식을 잃을 때 영혼은 남루해지고 삶은 왜소해진다. 장엄함 앞에 설 때 인간은 겸손해지고 심성은 확장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그의 처소에는 권능과 즐거움이 있다”(역대상 16:27). 주님 앞에 머물 때 푸석푸석하던 삶이 단단해진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밀려드는 일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우리는 떠밀려 가듯 시간 속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시선, 적대적인 시선을 만날 때마다 우리 가슴에는 퍼런 멍이 들곤 합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장엄한 위엄 앞에 서겠습니다. 내면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 하나 세우고 살겠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삶의 꿈을 나눌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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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김기석의 새로봄(188)

 

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먹는 고기일 따름이다. 그러니 나 주가 어찌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느냐?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허물을 벌하여서, 그들을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겠다.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 유다 백성이 견고한 성읍들을 많이 세웠으나, 내가 불을 지르겠다. 궁궐들과 성읍들이 모두 불에 탈 것이다(호세아 8:11-14).

 

예언자들의 말은 거칠다. 사람들의 안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폭풍이다. 느른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소음처럼 들린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그렇기에 예언자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은커녕 박해를 받기 일쑤이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이다. 가까운 이들조차 그들에게 등을 돌릴 때가 많으니 말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예레미야 20:8b)라고 탄식했다. 탄식하면서도 그 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억센 힘에 사로잡힌 자들이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들이 만든 세상에 분노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언명령은 기각되었다. 사람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엄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호세아 8:7).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데 그럴 리 없다고 믿는다. 신실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자의적 신앙일 뿐이다. 믿음이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일이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등지는 이들이 많다. 이 전도된 현실이 한국교회 개신교회의 자화상이다.

 

예언자의 말은 가차 없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호세아 8:11). 두려운 말씀이다. 교회가 늘어날수록 죄가 늘어난다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생각이 없다면 번다한 예배가 무슨 소용인가?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드리고, 더러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하게 보일 수도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호세아 8:14a).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이 죄가 아니던가. 다 잊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두렵고 떨림으로 기억할 때 죄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지 않는다.

 

*기도

 

하나님, 도심의 밤거리 어디에서나 붉은색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십자가를 보며 평안과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공동묘지를 떠올리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단이 늘어날수록 죄도 늘어난다는 말씀이 예리한 통증이 되어 우리를 찌릅니다.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꿈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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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뭄을 겪으며

김기석의 새로봄(

 

인생의 가뭄을 겪으며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예레미야 14:7-9)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제 고집대로 살던 백성들, 죄악에 익숙해져서 선을 행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극심한 가뭄을 내리셨다. 백성들은 기력을 잃은 채 땅바닥에 쓰러져 탄식하고,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땅에서는 풀조차 돋아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동안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도도하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이 잠시 은총을 거두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들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예레미야 14:7)

 

절실한 기도이다. 하지만 이 기도가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삶이 먼저 갱신되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살 권리를 마구 짓밟았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함부로 말했던 죄를 눈물로 씻어야 한다. 남의 골수를 마르게 했던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때때로 고통은 사람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계기가 된다. 버티기 힘든 고통을 겪고 보니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자기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민족사의 어려운 고비마다 지키시고 건져주신 은혜를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마십시오.”

 

80년대에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절박하게 불렀던 노래가 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우리 기도 들으소서/귀 먹은 하나님.” 불경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사 속에는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한 이들의 절규가 담겨 있다. “그래도 당신은 하나 뿐인 늙으신 아버지.” 실낱같은 희망조차 버릴 수 없다.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올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을 품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머무시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 우리가 섞여 살고 있는 사회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소외시킨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불화와 분쟁을 만드는 호전적인 말들을 그쳐야 한다. 누군가를 없앰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인생의 가뭄이 그칠 것이다.

 

*기도

 

하나님, 전도자는 ‘바람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막연한 기다림, 불모의 기다림이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가뭄이 찾아왔을 때,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 마음의 지성소를 차지하고 있는 헛된 것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게 해주십시오.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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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는 끝나고

김기석의 새로봄(187)

 

잔치는 끝나고

 

벨사살 왕이 귀한 손님 천 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 벨사살 왕은 술을 마시면서 명령을 내려서,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였다.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모두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할 참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들을 꺼내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다니엘 5:1-4)

 

벨사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쇠퇴기에 등장한 사람으로, 그 이름은 ‘벨이시여, 임금을 지키소서’라는 뜻이다. ‘벨’은 바벨론의 최고신인 마르둑의 다른 이름이다. 벨사살은 어느 날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귀한 손님 천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거나해져 기분이 한껏 고조된 벨사살은 자기 위세를 만방에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선왕인 느부갓네살이 전쟁 중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거기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힘에 대한 과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소국에 대한 조롱인 동시에 야훼에 대한 모독이었다. 스스로를 전능자로 인식하는 이의 부박함이여!

 

가장 거룩한 일을 위해 구별했던 성전 기물을 술자리의 여흥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이 야훼에 대한 모독과 조롱인 것은 그들이 한 다음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다니엘 5:4) 그들은 바벨론 제국과 그 신들의 우월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순간 흥겹던 잔치는 공포로 변하고 말았다.

 

갑자기 사람 손 하나가 나타나더니 촛대 앞에 있는 왕궁 석고 벽 그러니까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제국의 모든 지혜자들이 그 글씨를 해독하려고 애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이것은 제국이 자랑하던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오직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인 다니엘만이 그 글씨를 해독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기록된 글자가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5:25)이라고 말하며 그 뜻을 풀어준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임금님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임금님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임금님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다니엘 5:26-27)

 

사실 ‘메네’ ‘데겔’ ‘바르신’이라는 글자 속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담겨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다니엘이 암호화된 단어를 그렇게 해석했을 뿐이다. 성경은 바로 그 날 밤에 벨사살이 살해되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가 그 나라를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흥겨운 잔치, 벽에 쓰인 글씨, 심판 예고, 심판의 실현이라는 사건의 흐름이 이렇게 신속할 수가 없다. 과시적인 소비, 흥청망청, 경외심이 없는 삶의 결국은 파멸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인상 깊게 들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도

 

하나님, 가끔은 자기 권력을 과신한 나머지 하나님을 모독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버릇입니다. 권력의 들큼함에 취하면 실상을 볼 수 없습니다. 독선과 오만에 빠진 권력은 하나님의 주권을 넘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인생의 순간순간을 삼가는 마음으로 살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위임된 힘과 권력을 오직 사랑과 정의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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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권력의 몰락

김기석의 새로봄(186)

 

오만한 권력의 몰락

 

르호보암 왕은 부왕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에, 부왕을 섬긴 원로들과 상의하였다. “이 백성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경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원로들이 이렇게 충고하였지만, 그는 원로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자란, 자기를 받드는 젊은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나에게, 부왕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가볍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소. 이 백성에게 내가 어떤 말로 대답하여야 할지, 그대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왕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은,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메우신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임금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희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겠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너희를 쇠 채찍으로 치겠다’ 하고 말씀하십시오.” 왕이 백성에게 사흘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으므로, 여로보암과 온 백성은 사흘째 되는 날에 르호보암 앞에 나아왔다. (열왕기상 12:6-12)

 

왕위를 계승한 르호보암은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통치 경험은 전무하고, 다스려야 할 나라는 컸다. 어느 날 여로보암을 대표자로 한 북부 지파 동맹 사람들이 세겜에 있는 왕을 찾아왔다. 그들은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부과했던 세금과 노역이 너무 과중하여 견딜 수 없으니 그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했다. 솔로몬 시대의 영화로움은 백성들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황한 르호보암은 먼저 선왕과 함께 나라를 일으켜 세웠던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러자 그들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고언한다.

 

 

 

 

 

원로들은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기는 했지만, 아직 출애굽 정신을 다 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왕에게 주어진 권한은 백성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 백성들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잖게 일깨워준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그 충언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벗들에게도 충고를 구한다. 성서 기자는 그 젊은 관료들이 누구인지를 두 가지 말로 표현한다. “그와 함께 자란”, “그를 받드는.”

 

그들은 왕실 가까이에 머물면서 온갖 특권적인 삶을 누려온 이들이다. 또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는 길임을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과중한 조세 부담에 허리가 휜 민중들의 처지를 알 리가 없다. 그들에게 세상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로 나뉠 뿐이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말을 듣다가는 통치를 할 수 없다면서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는 그 젊은이들의 조언을 달콤하게 들었다. 몰락은 그렇게 시작된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이다.

 

르호보암은 고통을 호소하며 부담을 경감시켜달라는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저 아래 땅의 사람들이 겪는 삶의 애환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과 연루되는 것을 꺼리지 않는 분이시다. 성육신의 신비는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가르쳐준다. 르호보암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이전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고, 쇠 채찍으로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멍에’와 ‘채찍’이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은 출애굽 정신에 대한 부정의 상징이 아닌가. 어느 사이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애굽이 되고 만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면서 멍에와 채찍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르호보암은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임을 잊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오만한 권력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결여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주십시오. 아름답고 장엄해 보이는 것들 속에 깃든 약자들의 피와 눈물과 한숨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특권의 포기야말로 공동체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기둥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쓴 소리보다 단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역사를 혼돈 속으로 밀어넣었던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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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을 견주지 말라

김기석의 새로봄(185)

 

 

소명을 견주지 말라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요한복음 21:20-25)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내 양떼를 먹여라’, ‘나를 따라라!’ 하고 명령하셨다. 20절은 ‘베드로가 돌아다보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나를 따라라!” 하는 명령과 “돌아다보니”라는 단어가 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따르기 위해서는 부르신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뒤를 돌아본다. 어쩌면 이게 연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흘낏 바라보고는 주님께 묻는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박한 호기심이다. 다른 사람의 소명과 나의 소명을 견줘보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유혹의 뿌리이다.

 

자기와 다른 이를 비교하는 순간 원망과 시샘이 나온다. 주님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베드로를 책망하시고는 재차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요한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그는 신실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고, 그 복음의 기록자 역할을 잘 감당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면서 몸에 있는 다양한 지체가 하는 일이 다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부름 받는다(에베소서 4:11). 역할에 경중은 없다. 모두가 다 소중한 일들이다. 각자가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든든히 세워진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값비싼 은총보다 값싼 은총을 좋아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런 값싼 은혜를 맹렬히 비판한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이고,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총이란 무엇인가?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요,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 묵상 52>, 이신건 편, 102-3쪽)

 

값싼 은혜에 중독된 이들은 따라야 할 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길을 잃을 때가 많다. 주님은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우리보다 앞서서 가고 계시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는 곳, 그곳에 갈 때 우리 신앙의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남이 어떻게 하는 가 눈치 볼 것 없다.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게 중요하다.

 

*기도

 

하나님, 주님을 등지고 떠났던 제자를 지싯지싯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는 예수님의 그 끈질긴 사랑에 우리는 할 말을 잊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이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셨기에 버리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가끔은 유난히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가장 무거운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부여하셨음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남과 비교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게 하시고, 끈질기게 소명을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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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이 달라지면

김기석의 새로봄(184)

 

지향이 달라지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0-13)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는 경력의 절정기인 40대 초반에 백혈병에 걸렸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는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기도를 올렸다. 힘겨운 화학치료를 견뎌야 했지만 그는 결국 회복되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 정리해서 백혈병 재단을 만들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그는 재물과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고,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지향이 달라지면 삶의 빛깔도 달라진다.

 

 

 

 

 

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바울은 행여라도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말한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립보서 4:11-12) 바울은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의지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자꾸만 뭘 먹어도 헛헛증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위胃가 비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안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닻을 내렸기에 바울은 이런저런 시련의 바람에 나부끼지 않는다.

 

바울이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편리함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은 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널뛰기를 하게 마련이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법석을 떤다. 어지간한 거리는 차를 타고 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을 토해낸다.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독된 이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이미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길손과 나그네’라고 말했다(히브리서 11:13). 그들은 하늘의 고향을 찾는 이들이다.

 

하늘 고향을 찾는 이들은 자기 욕망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자기 삶을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기꺼이 내준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3)는 구절은 '그도 할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류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류의 사고에서 강조되는 것은 자기 강화의 욕망이다. 하지만 바울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은혜 안에서 타자들에게 자신을 유보 없이 선물로 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연거푸 다가오는 시련은 삶의 의욕과 용기를 깎아내립니다. 이래저래 시르죽어 지내다 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원한 감정이 우리를 사로잡기도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바울 사도의 말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그 확고하고도 담백한 고백 속에서 한 자유인의 초상을 봅니다. 그런 흔쾌한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욕망의 활화산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내주며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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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과 화 사이

김기석의 새로봄

 

복과 화 사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누가복음 6:20-26)

 

“복이 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 너희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헬라어의 어순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다. ‘복이 있다’는 선언이 앞에 나오고 그 대상 혹은 이유가 뒤에 나온다. 단언적일 뿐만 아니라, 같은 구가 반복되기에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복’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너무 낡은 말이 되어 버려서 원문의 뜻을 담아내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복’으로 번역된 ‘마카리오스’를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셨던 김교신 선생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하는 내적 환희의 샘”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 안에서 사람 된 자의 진정한 도를 따르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김교신 전집4, <성서연구>, 노평구 편, 32쪽)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요즘으로 치면 영 복 같지 않은 복이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이것은 오히려 화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지금 정말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기보다는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화를 내기도 한다. 마치 주님이 불의한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 엄연한 고통의 현실에 눈을 뜨고 또 저항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영혼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약이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 속에서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한 때도 있었기에 마르크스의 말은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이나 굶주림을 미화하실 생각이 없다. 네 가지의 복은 24절부터 나오는 네 가지 화에 대한 선포를 배경으로 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눅6:24-26)

 

이 대목 역시 원문에는 ‘화가 있다’는 구절이 맨 앞에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온다.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모든 이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 이 구절도 얼핏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담겨 있는 속뜻을 헤아리려면 상상력이 조금 필요하다. 여기서 화가 있다고 선언된 사람들은 '타자' 혹은 '이웃'의 고통이나 불행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 우월감에 들떠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공감할 줄 모른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울 줄도 모르고,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줄도 모른다. 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화일 때가 많다.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말씀은 가끔 우리의 일상적 판단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풍요로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슬픔을 한사코 피하려는 이들에게 지금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전복적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시오. 믿음은 관념도 이론도 아닌 현실임을 깨우쳐주십시오. 지금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줄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 가운데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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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김기석의 새로봄(

 

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이사야 19:23-25)

 

꿈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꿈꾸는 이들은 몽상가 혹은 현실 부적응자 취급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이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는 법이다. 꿈을 버리는 순간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우리를 확고하게 지배한다. 평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꿈은 어처구니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 꿈은 강고한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드는 법이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정현경 박사는 알자지라 TV에서 본 한 광고를 즐겁게 기억한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이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축구공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은 시멘트 담 너머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실망한 소년은 시멘트 담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팔레스타인 쪽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고 있던 또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그 공을 힘껏 차 담을 넘겨 돌려보내준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126쪽)

 

 

 

 

 

중요한 것은 그 ‘틈’이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없었다면 이런 멋진 장면은 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있는 장벽 사이에 시소가 놓이자, 이쪽과 저쪽의 아이들이 시소를 타고 노는 장면을 보았다. 장벽을 깨뜨리는 상상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틈으로 평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혀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선을 가로지른 분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 성과 속 사이에 길을 내 서로 통하게 만드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삶으로 만드신 그 길을 우리 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이사야 19:23)

 

이사야는 기존질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대관계였던 나라들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세상 여러 나라에 복을 매개하는 꿈을 꾼다. 이런 꿈이 없어 세상은 거칠고 빈곤해졌다. 역사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세상을 시장으로 바꾸는 정치를 바로잡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꿈이라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도

 

하나님,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동안 우리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살고 있습니다. 몸은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왜소해졌고, 땅의 현실에 몰두하다보니 하늘을 잊었습니다. 경쟁과 불화가 우리의 자연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서로에게 복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그 꿈을 우리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는 강고한 편견과 적대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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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의 초대

김기석의 새로봄(200)

 

공동체로의 초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마가복음 6:39-44)

 

‘빈들’, ‘어둠’, ‘배고픔.’ 예수를 따라왔던 이들이 처한 상황이 딱하기는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이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주님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허기진 그들을 차마 그냥 돌려보내실 수 없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그들을 먹이려면 적어도 200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필요한데, 그럴 돈도 없고 또 설사 있다 해도 빵을 구할 데도 없다고 말씀드렸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알아본 후에 말한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많다 적다 평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시켜 무리들을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무리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앉았다. 우리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안다. 주님은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니 열 두 광주리가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도록 하셨다는 대목이다. 배분의 편의를 위한 조치였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무리를 공동체로 초대하신 것이다.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아니 좀 더 현실적으로 보아 대다수가―자기중심이라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공동체와 성장>, 17쪽)라고 말했다. 무리는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기는 하지만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느끼고 괴로워하고, 서로의 필요에 응답한다. 공동체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소속감을 회복시켜 준다. 공동체는 우리의 새로운 고향이다.

 

예수님은 자칫하면 익명성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들을 공동체로 초대하신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랑의 기적을 함께 체험한 사람들이 되었다. 함께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자 내면의 어둠이 스러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현대인들은 익명의 대중이 되어 살아간다. 외로움은 당연한 귀결이다. 적대적인 눈빛, 경계하는 눈빛들이 우리 가슴에 자꾸만 생채기를 낸다. 주님은 익명의 대중들이 경계심을 풀고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공동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입구임을 보여주셨다.

 

*기도

 

하나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그칠 때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림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외로운 세상이지만 곁에 선 이들의 손을 붙잡아 주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순례를 멈추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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