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6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마태수난곡 249~51

마태복음 27:1~6

음악듣기 : https://youtu.be/XJa0DjXnDyU

49(41)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1. Des Morgens aber hielten alle Hohenpriester und die Ältesten des Volkes einen Rat über Jesum, daß sie ihn töteten. 2. Und bunden ihn, führeten ihn hin, und überantworteten ihn dem Landpfleger Pontio Pilato. 3. Da das sahe Judas, der ihn verraten hatte, daß er verdammt war zum Tode, gereuete es ihn, und brachte her wieder die dreißig Silberlinge den Hohenpriestern und Ältesten, und sprach:

대사

유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4. Ich habe übel getan, daß ich unschuldig Blut verraten habe.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그들이 이르되

Sie sprachen:

대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Was gehet uns das an, da siehe du zu.

50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5. Und er warf die Silberlinge in den Tempel, hub sich davon, ging hin, und erhängete sich selbst. 6. Aber die Hohenpriester nahmen die Silberlinge, und sprachen:

대사

제사장 1&2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Es taugt nicht, daß wir sie in den Gotteskasten legen, denn es ist Blutgeld.

51(42)

코멘트

베이스

아리아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보라, 살인자의 돈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

그 잃어버린 아들이 던져주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의 발아래에 말이다.

Gebt mir meinen Jesum wieder!

Seht, das Geld, den Mörderlohn,

Wirft euch der verlorne Sohn

Zu den Füßen nieder.

 

 

 

새벽에 법을 의논하는 사람들


기나긴 그 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1)’ 우리말 성경은 그 때를 새벽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정확한 때는‘Des Morgens/데스 모르겐스라는 루터 성경의 표현처럼 해가 뜬 이른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공의회는 규정상 해가 떠 있을 때 열려야 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해가 진 밤에 몰래 모여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을 해 놓은 그들은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절차상 하자가 없도록 의결하여 예수를 총독에게 넘겨주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는데 그들은 그토록 치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속전속결로 사형을 집행하길 원했습니다. 또한 그날이 13, 유월절을 앞 둔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다음날 안식일인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도 아침 일찍 산헤드린을 소집한 이유였습니다.

 

악을 도모하는 이들은 무법자일 것 같지만 사실 이토록 치밀하게 법과 규정을 잘 따집니다. 반면 진리와 선함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법과 규정을 존중하고 지키되 궁극적으로는 그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법치주의 사회를 살고 있지만 스스로를 법의 한계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예수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하기 전까지는 법과 규정에 최종적인 질서유지를 맡겨야 하겠지만 예수를 통해 구원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법과 규정에 한계 지워진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법이 최선이 아니라 차악임을 늘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우리 역시 세상의 일부로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질서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또한 내가 피해를 당할 때 법을 올바로 알고 의지해서 억울함을 풀고 정의를 도모할 수도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이 법의 한계선을 양심의 기준선으로 삼거나 저들처럼 법을 악용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 지인 중에 법조인이 있는데 감리회 교단으로부터 법률 자문을 의뢰 받아 재능기부 차원으로 여러 번 참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단법이 세상 법보다 더 허술한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루어지는 사안들과 진행 과정들이 세상 법정보다 더 지저분하고 꼼수가 많으며 그 다툼의 배경이 교회라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의뢰에 응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리하라 권면했습니다.

 

교회법에 연루된 분들은 대부분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성경 말씀을 붙들어야 할 그런 분들이 차악에 불과한 교단법인 장정에 목매여서 아등바등하며 결국 교회에 상처를 안기고야 마는 모습이 지금 법과 규정을 따지면서 예수를 죽이려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법과 규정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의 길을 가로막는다 한들 결국 하나님께서 그 위에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법과 규정을 따르며 서두르고 꼼수를 부렸기에 결국 예수께서 바로 그날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도 그와 같은 섬세한 역사로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바로 그 날


루터 성경에 쓰인 ‘Des Morgens’는 현대 독일어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으로서 바로 그 날 아침에라는 의미의 'dessen Morgens/데센 모르겐스'를 축약한 것입니다. 다른 독일어 성경들은 원문의 뜻을 살려서 이른 아침에라는 의미의 ‘Frühmorgens/프뤼모르겐스혹은 ‘am frühen Morgen/암 프뤼엔 모르겐을 사용하는데 루터는 굳이 바로 그 날 아침에라고 읽고 있습니다.

 

그 누구 보다 성경원문의 이해와 문학적 감수성이 깊었던 루터는 마태복음 27장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 전환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정을 새로운 날의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해가 뜰 때를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새벽에라는 의미는 단순한 시간적 의미뿐만 아니라 새로운 날의 시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 원문에 능통했던 루터는 이 부분까지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날이었습니다. 그 날이 드디어 밝았습니다.

 

유다의 최후


잠시 잊혔던 유다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3)’

 

베드로와 같은 마음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유다 또한 멀찍이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밟았던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 유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니, 도대체 그는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을 벌였으며 왜 자살했을까요? 저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통해서 유다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연재의 아홉 번째 순서에서 그렇게 깨달은 유다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렸는데 그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절에는 유다가 예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었거나 예수를 배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유다는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뉘우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정죄됨, 즉 산헤드린으로부터 사형이 결정된 사실을 확인한 후 유다입장에서는 무언가 완전히 틀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수긍했기에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수 없이 목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유다가 보기에 스승 예수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기적의 능력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교회를 이루고 예루살렘을 접수하고 덩달아 자기 이름도 높아지면 좋겠는데 스승은 계속하여 그 능력을 숨기는 것 같고 낮은 곳의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세상의 지혜와 계산에 서투르기만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예수가 자기 앞에서 행했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바램을 이루기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 빠르고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뒤틀어져버렸습니다. 예수는 잡혀가는 순간부터 무력했고 도살장의 어린 양 같이 잠잠했습니다. 결국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일리야 레핀/Ilya Repin(1885)


예수의 정죄됨을 보고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뉘우친 그는 받은 은 삼십을 돌려주며 ‘Ich habe übel getan, daß ich unschuldig Blut verraten habe/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는 그렇게 모든 걸 되돌리고 예수를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우쳤다면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공동체로 돌아가거나 예수님을 찾으러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생각이었더라면 차라리 죽을 용기로 다시 일어나서 예수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는 것이 나을 뻔했을 것입니다.

 

그는 왜 자살을 택했을 까요? 자아가 너무나 강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홉 번째 글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다는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이었고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똑똑한 사람들, 말 잘하는 사람들, 잘난 사람들, 잘생긴 사람들, 여기저기 강연을 하며 멘토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람들도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 앞에 겸손하지 않고는, 공동체에 속하여 예수와 함께하지 않고는, 진정한 승리가 자기희생으로부터 시작됨을 깨닫지 못하고는 참된 지혜와 진리를 만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똑똑함과 잘남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은 유다처럼 그 똑똑함과 잘남 때문에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참된 신앙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다에게 ‘Was gehet uns das an, da siehe du zu/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그 말을 들은 후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그 은을 다시 거두어 챙깁니다.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유다는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돌려주기 전에 예수를 돌려달라고 해야 마땅했습니다. 베드로같이 단순한 사람이라면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처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모습으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계산적이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실수하고 투박할지언정 단순하고 진실 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베이스 아리아는 그런 마음으로 단순하게 예수를 다시 돌려달라고 외칩니다. 그들이 돌려주지 않을 것을 알지만 예수를 향한 남성적인 사랑으로 불꽃이 마구 튀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살인자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를 마구 쏟아냅니다. 예수를 향한 이 거칠고 용감하고 단순하고 열정적이며 투박한 남성적인 사랑도 예수를 향해 우리가 품어야할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아리아를 부른 가수는 독일이 자랑하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입니다. 16번째 글에 디스카우에 대한 짧은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Gebt mir meinen Jesum wieder!

돌려다오,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유다의 목소리


오늘날의 연주에서는 대부분 극적인 면을 살려서 베드로와 유다를 구분하여 각기 다른 성악가를 쓰지만 지난 시간에 설명 드린 대로 우리가 함께 듣고 있는 칼 리히터의 58년 음반에서는 베드로의 목소리에 특화된 막스 프룁스틀(Max Proebstl)이 유다의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조금 더 젊고 날카로운 목소리였으면 좋았을 유다의 목소리가 아쉽지만 지금까지 더할 나위 없는 베드로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막스 프룁스틀을 원망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과한 처사일 것입니다.

 

유다는 어떤 목소리였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 보면 어떨까요? 만일 여러분이 마태수난곡의 지휘자라면 유다의 역할로 어떤 목소리를 지닌 성악가를 선택하실 것 같나요?

 

그러고 보니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유다의 목소리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비유처럼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자이신 예수의 음성도 알아야 하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유다, 우리 주위에 있는 유다의 목소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듣는 음반의 유다는 유다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규정시킬 뿐 우리와의 연관성을 찾기에는 아쉬움이 많아 보입니다.

 

                                             유다, 제임스 티소/James Tissot(1886-1894)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를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은 그의 악마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마녀를 떠오르게 하는 매부리코는 기본이고 아예 사람이라기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린 그림도 많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18절의 표현에 따라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 모습으로 배신자의 최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 주는 그림도 많습니다. 유다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인과응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형성된 유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유다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 안의 유다를 발견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성격과 외모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우들이 배역을 선택할 때도 최대한 자신의 성격을 닮은 캐릭터와 외모를 닮은 배우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악가들의 경우 성격이 진지하고 골격과 키가 크고 목이 길수록 저음 가수일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런 면에서 유다의 외모를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유다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과 제임스 티소의 그림 사이에 있습니다. 유다는 생각보다 말랐을 것이고 날카롭지만 쾡하니 흔들리기도 했을 눈빛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내면은 완전히 감추어져 음산하면서도 무언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을 법한 독특한 아우라로 드러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흐 역시 유다의 음역은 베드로와 비슷하게 설정했지만 유다에게 주어진 음표의 흐름을 보면 베드로 보다 좀 더 가볍고 예민하고 날카로운 음색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Ich habe übel getan, daß ich unschuldig Blut verraten habe/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의 마지막 목소리, 여러분에게는 이제 어떻게 들리시나요?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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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5)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5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수난곡 247~48

음악듣기 : https://youtu.be/fhyQq8R1lr0

47(38)

기도

알토 아리아

나의 하나님이여,

나 이렇게 눈물 흘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를 보시옵소서!

당신 앞에서 슬피 우는

나의 마음과 나의 눈동자를 보시옵소서!

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

Schaue hier,

Herz und Auge weint

vor dir Bitterlich.

48(39)

코멘트

코랄

나도 그와 같이 당신으로부터 떠났다가

이렇게 당신 앞에 돌아왔습니다

두려움과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당신의 아들이 우리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나의 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은혜와 자비는

지금 고백하는 나의 죄보다 큽니다.

Bin ich gleich von dir gewichen,

StelI' ich mich doch wieder ein,

Hat uns doch dein Sohn verglichen

Durch sein' Angst und Todespein.

Ich verleugne nicht die Schuld,

Aber deine Gnad' und Huld

Ist viel größer als die Sünde,

die ich hier bei mir empfinde.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야바의 집 밖으로 뛰쳐나와 통곡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그 장면에 오버랩 되듯 구슬픈 바이올린 소리가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Erbarme dich Mein Gott/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선 관람객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넓은 곳을 다니기 위해 안내도를 받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해설이 실려 있는 이어폰 기기를 빌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작품 앞에 도착하면 자동으로 해설이 들려오는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기기입니다. 그 두 가지 도구를 길벗삼아 수많은 작품들을 만나고 해설을 듣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모나리자와 마주하게 됩니다. 모나리자 앞에선 관람객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무엇일까요? 손에 들고 있던 안내도를 가지런히 내리고 작품 해설을 듣기 위해 그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을 빼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모나리자에 비견될 만한 이 아름다운 노래를 앞에 두고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이 노래를 만나시기까지의 여정은 잠시 잊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사족이 되어 버릴 설명일랑은 잠시 접어두고자 합니다. 우선은, 듣고 또 듣고, 울고 또 울라는 말 밖에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세 가지 노래

 

이 곡을 감상하실 때 세 가지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매 시간 감상하고 있는 칼 리히터의 1958년 녹음에 들어 있는 헤르타 퇴퍼의 노래입니다. 이 음반은 뮌헨의 중심에 있는 헤라클레스 홀(Herkules-Saal)에서 녹음되었는데 헤르타 퇴퍼(Hertha Töpper, 1924~2020)는 당시 뮌헨을 대표하는 알토파트 오페라 가수였습니다. 그녀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뮌헨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올해 3, 아흔 여섯 번째 생일을 앞두고 뮌헨에서 사망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듯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마태수난곡의 흐름 가운데에서 듣는 것이 가장 감동적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 베드로의 눈물 장면에 이어지는 기도로서 들을 때 이 노래를 가장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음반의 에반겔리스트인 에른스트 헤플리거의 절창과 연결시켜서 들을 때 그 감동은 배가됩니다. 이 글 처음에 있는 표의 음악듣기링크를 누르시면 헤르타 퇴퍼의 노래와 연결이 되는데 이번 시간에는 특별히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부터 들으실 수 있도록 편집하였습니다.

 

두 번째 연주는 원전연주 음반에서 골라봤습니다.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한 1988년 음반에서 이 노래를 부른 안네 소피 폰 오터(Anne Sofie von Otter)는 탄탄한 발성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절제된 눈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지휘자 가디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 중의 한 명입니다. 제가 가장 먼저 구입한 바흐 음반도 그의 연주였습니다. 그는 음악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지휘자입니다. 그가 지휘하는 음악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번뜩이는 그만의 감각과 선율적인 아름다움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음악이나 르네상스 음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다만 바흐 연주에 있어서는 신앙적인 표현과 독일음악 특유의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비교의 대상으로서만 종종 듣곤 합니다. 하지만 독일 출신의 이 시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오터가 지휘자의 멋진 파트너가 되어 독일적 감각과 깊이의 빈자리를 채워줍니다.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English Baroque Soloists)와 이 두 사람의 콜라보레이션은 원전연주 특유의 멜랑콜리를 살리고 너무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현대적 연주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원전 연주는 바흐 당시의 튜닝을 사용하므로 현대 오케스트라 연주 보다 반음 정도 낮게 조율되어 있습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들으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치카토로 지속되어 연주하는 베이스 파트 바소콘티누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템포를 얼마나 감각적이고 섬세하게 끌고 가는지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https://youtu.be/41IAJsKcr5o


세 번째 들으실 연주는 영국의 성악가 캐슬린 페리어의 노래입니다. 이 연주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따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

 

조너선 밀러(Jonathan Miller, 19342019)는 영국의 극작가요 연출가로서 현대 영국의 문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로서 2004BBC의 다큐멘터리 무신론에 대한 기록(The Atheism Tapes)’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언젠가 이 노래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지금 까지 나를 놀라게 하고 가슴 뛰게 하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나 그런 일이 일어났었지요. 그러나 매번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시 만나기 전 마음을 준비하고,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다시 흐느끼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 나의 마음을 숨겨 보려 해도 나를 무너뜨리는 작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입니다. 이 노래가 왜 항상 나를 사로잡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이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내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무신론자의 고백이 사뭇 진실 되게 와 닿습니다. 혹자는 마태수난곡을 일컬어 없던 신앙도 생기게 하는 음악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일이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무신론자인 그에게 생긴 것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절대자의 거룩하심과 완전한 사랑에 압도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비추어진 자신, 인간에 대한 절망을 느낄 때 비로소 시작합니다. 조너선 밀러는 이 노래를 통해서 그 상황을 마주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믿음만을 강조하거나 이성의 필드에서 그들과 논쟁하는 동안 우리 신앙은 우리 신앙만의 고귀한 사랑과 거룩한 초월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 아래에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울고 있는 베드로처럼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그에 비춰진 자신의 절망스런 연약함을 깨달을 때 한 인간은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현대의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교회는 남은 교인들이라도 붙들고 싶어서인지 반지성적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 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성인들의 구미를 맞춰 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몰랐던 것,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영혼이 진정 원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는 현대의 지성인들을 향하여 우리가 던져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의 사랑, 그리고 그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 이야기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마태수난곡은 음악이라는 만민 공용의 언어를 가지고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깊이 있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예수의 십자가 수난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마태수난곡을 들어야 할 이유이며 세상에 알려야 할 이유입니다.

 

 캐슬린 페리어

 

이 노래를 거론할 때는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의 노래로 들어야합니다. 세 번째로 소개해 드리는 연주입니다.

 

1912년 영국에서 태어난 페리어는 원래 전화교환원이었습니다. 오늘날 안드레아 보첼리가 정통 성악가의 계보 밖에서 그 순수하고 깨끗한 음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시절에는 캐슬린 페리어가 있었고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캐슬린 페리어가 보첼리 보다 더 위대한 성악가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영국 민요로부터 가곡이며 오페라까지 짧은 인생가운데 그녀의 음역에 있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최고의 감동적인 노래도 들려주었다는 것입니다.

 

파트가 완전히 달랐지만 캐슬린 페리어를 마리아 칼라스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캐슬린 페리어는 여러 모로 마리아 칼라스의 대척점에 있는 성악가입니다. 그녀는 강한 카리스마 보다는 부드럽고 편안하지만 누구 보다 깊이 있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칼라스 하면 떠오르는 역할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의 카르멘 역할입니다. 칼라스는 연기력과 관능미 그리고 화려함이 가득한 소프라노였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동경의 대상으로서 역사상 최고의 디바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노래와 무대를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 페리어는 종교 오라토리오나 가곡, 영국 민요 등을 통해서 전쟁을 겪은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칼라스는 일찍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그녀의 마지막 10년을 파리에서 칩거하면서 약물에 의지하며 살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캐슬린 페리어는 비록 암으로 인해 마흔 한 살이라는 절정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끝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 직전까지 노래를 계속 했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노래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녹음으로 남긴 노래는 에드먼드 루브라(Edmund Rubbra)가 작곡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였습니다.





페리어는 기교나 화려함보다는 진실한 감동을 주는 성악가였습니다. 그래서 독일어보다 모국어인 영어로 부를 때 훨씬 더 간절하고 감동적으로 들립니다. 페리어는 이 노래를 여러 번 녹음했는데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라고 불리는 카라얀의 지휘 아래 독일어로 부른 버전이 가장 좋은 연주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카라얀이 얼마나 위대한 지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태수난곡만큼은 그와 같이 제왕적이고 음악을 통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함부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닙니다.

 

제가 추천하는 연주는 말콤 써전트가 지휘하는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1946년에 녹음한 연주입니다. 2차 대전의 비극과 아픔에 맞물린 역사적인 연주로 종교를 뛰어 넘어 범인류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 이 노래를 ‘Have mercy, Lord, on me'라는 영어가사로 녹음한 것입니다. 마태수난곡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를 수 없습니다. 바흐가 독일어 가사 하나 하나에 음악의 그림을 입히듯 작곡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곡 만큼은, 게다가 부르는 사람이 캐슬린 페리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꾸밈없이 순수하고 편안한 그녀의 목소리는 이 노래와 가장 잘 어울리며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https://youtu.be/mUeDvVPv8PE

 

더불어 이 녹음에서는 바이올린 솔로를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 노래는 알토 솔로만의 노래가 아니라 바이올린 솔로와의 이중창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녹음에서 바이올린 오블리가토는 데이비드 맥컬럼이 연주하고 있는데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영국을 대표하는 연주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연주 보다 적극적으로 음악에 참여하고 있는데 마치 베드로 곁에서 함께 울어 주며, 알토 곁에서 이 기도를 함께 읊어 내듯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듯한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NCIS’라는 드라마를 아실 것입니다. 그 드라마에 더키라는 법의학자가 나오는데 그 역할을 맡은 배우 이름이 데이비드 맥컬럼이며 바로 이 음반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아들입니다.

 

이어지는 코랄은 1642년 요한 리스트가 작사한 유명한 코랄의 5절로서 이 멜로디는 바흐가 그의 교회 칸타타 147번에서 사용했고 그 곡이 독립적으로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Jesus Joy of Man's Desiring’라는 제목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배신했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다시 돌아와 회개하고 용서받은 우리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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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눈물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4 베드로의 눈물


마태수난곡 245~46

마태복음 26:69~73

음악듣기 : https://youtu.be/YAD8bJc5SPw

45(38)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69. Petrus aber saß draußen im Palast; und es trat zu ihm eine Magd, und sprach:

대사

여종1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Und du warest auch mit dem Jesu aus GaIilaa.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70. Er leugnete aber vor ihnen allen, und sprach:

대사

베드로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Ich weiß nicht, was du sagest.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71. Als er aber zur Tür hinausging, sahe ihn eine andere, und sprach zu denen, die da waren:

대사

여종2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Dieser war auch mit dem Jesu von Nazareth.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72. Und er leugnete abermal und schwur dazu:

대사

베드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73. Und über eine kleine Weile traten hinzu, die da stunden, und sprachen zu Petro :

46

대사

곁에 섰던 사람들

(합창)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Wahrlich, du bist auch einer von denen, denn deine Sprache verrät dich.

코멘트

에반겔리스트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74. Da hub er an sich zu verfluchen und schwören:

대사

베드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Und alsbald krähete der Hahn. 75. Da dachte Petrus an die Worte Jesu, da er zu ihm sagte: ehe der Hahn krähen wird,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

 


에반겔리스트의 숨 고르기

 

장면이 바깥뜰로 바뀝니다. 오페라와 달리 오라토리오나 수난곡은 무대배경이나 분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수난곡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장면 변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귀가 민감하신 분들은 오늘의 부분에서부터 에반겔리스트가 잠시 텀을 둔 후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힘을 빼고 가볍게 노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련한 에반겔리스트인 에른스트 헤플리거는 여기서부터 이전보다 매우 차분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씀 드린 장면의 변화를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뛰기 선수가 출발 전에 힘을 빼듯 가장 중요한 도약을 앞두고 숨고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수난곡 전체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심이 통곡하는 장면을 그는 그렇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종들과 아랫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바깥 뜰 중앙에는 불이 피워져 있는데 불 주변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금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틈바구니 속에 오늘 장면의 주인공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디테일의 장인, 누가복음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이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누가복음의 문학적 묘사가 놀랍기만 합니다. 누가복음 2255절과 56절입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누가복음은 단 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이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의 제자임을 숨기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움츠리면서도 너무 튀어 보이지 않도록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무리 속에 섞여서 불을 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과 감각의 촉수는 건물 안의 상황과 그들 앞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 예수와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 찰나의 빈틈을 알아챈 눈치 빠른 여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가 쌀쌀한 새벽공기 때문이라고 말하듯 베드로는 불 앞에서 연신 손을 비벼가며 움츠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일행의 말에 때때로 반응하며 간간히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데 메인 콘셉트는 원래 별 생각 없는 아랫사람입니다. 뜰 안쪽에서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이 새벽에 주인을 모시고 나온 상황이 짜증스럽고 피곤하기만한 아랫사람인 척을 하는 게 더 편하고 위험부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있다 보니 정말로 피곤이 밀려옵니다. 힘든 하루였습니다. 배도 고픕니다. 스승 예수와의 마지막 저녁식사가 벌써 오랜 옛일처럼 느껴집니다. 예수께서 여러 번 깨우시는 바람에 겟세마네에서도 숙면을 하지 못했고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과 칼을 들고 대치하느라 몸도 천근만근입니다. 따스한 모닥불 앞에서 몸이 노곤해지니 이내 잠이 몰려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타다닥! 장작이 무너지며 불꽃이 타오릅니다. 꿈을 꾸었던 건지 갑작스레 타오르는 모닥불 빛이 화들짝 놀라 깨어난 베드로의 원래의 얼굴을 스칩니다. 순간, 불빛을 사이에 두고 베드로 건너편에 있던 한 여종의 표정이 갑자기 멈춥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22:56’


갈릴리 사람의 낯익은 얼굴과 불안한 눈동자가 그 여종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온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꾸미거나 숨겨도 서울사람의 눈에 시골사람으로 보이는 법이지요. 베드로가 방심한 것도 있지만 중요한 사람들이 오가고 온갖 정치적인 모략이 일어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의 종답게 그 여인의 눈썰미도 대단했습니다.


베드로와 우리들

 

여종의 말은 영어의 ‘And’와 같은 접속사 ‘Und’로 시작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닥불 주변의 사람들이 그 때 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그 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런 저런 말과 생각으로 그 흐름에 동참하며 그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마음과 영혼은 한 가닥의 가녀린 줄로 예수를 붙들고 망망대해 위에서 흔들리는 부표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홀로 떠 있는 세상은 그 흐름이 너무나 거칠고 빠르며 그 깊이의 어두움도 까마득해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베드로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아무 일 없는 척, 그들 중의 하나인 척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은 그를 더 깊은 자괴감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고맙게도 그 이름 없는 여종이 베드로를 그 막막함 가운데서 깨워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로 합니다.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종종 세상 속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태연한 척 무리들에 섞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별생각 없는 아랫사람처럼 살기도 하지만 내면은 외롭고 불안하기만합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베드로와 같은 상황을 겪어 보고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상황을 대면하고 이겨 내도록 이 수난의 길을 담대히 마주하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그 과정을 건너 뛴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현대의 신앙인들이 크고 번듯한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에서의 안정감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는 최대한 세상 사람처럼 살면 되고 교회에서는 그 나름대로 버젓한 건물 속에서 수많은 비슷한 사람들의 틈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안정감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대형화는 현대인의 신앙에 특화 된 현상일 뿐 결코 교회의 성숙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신앙의 필수인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세상 속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특히 한국교회에서 교회가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인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 서야 하며, 예수와의 일대 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또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만의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세상 속에서 외로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신천지나 북한 등 이단성이 강한 집단일수록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자주 여는 특성이 있습니다. 2008년에는 한국에서 유명한 큰 목사님의 생일파티가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리기도 했었지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진정 만나지 못함으로 진정한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그로 인해 존재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때마다 그런 일들을 도모해서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의 길을 따르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뜰 안쪽 공간에서 완전히 홀로 서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예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그를 만나야합니다. 그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 예수의 길을 따르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또한 뜰 바깥쪽의 베드로가 되어 봐야 합니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망망대해 가운데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적 불안을 견뎌 내고, 예수의 사랑을 붙들지 않고는 도무지 이 신앙을 지켜 낼 수 없음을 아는 것, 때때로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하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며 통곡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 막스 프룁스틀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듣고 있는 리히터 58년 음반에서는 한 명의 성악가가 예수와 아리아를 제외한 모든 남성 역할(유다, 베드로, 빌라도, 대제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막스 프룁스틀(Max Proebstl)이라는 성악가입니다. 그 많은 역할 중에서 그의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특히 오늘의 장면에서 그는 당황한 갈릴리 시골 어부, 겉모습은 거칠지만 속은 여리고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성질 급한 베드로를 잘 그려 내고 있습니다.

 

막스 프룁스틀(Max Proebstl)이 역할을 맡은 베드로의 음성은 매우 사실적이고 극적입니다. 녹음 당시 프룁스틀의 나이는 45세였는데 이미 결혼한 베드로의 나이와도 잘 맞는 목소리입니다(8:14). 그의 대사는 투박한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가 당황하여 변명하는 모습이 그대로 표현됩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한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70.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70. Ich weiß nicht, was du sagest.

72.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72.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74.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74.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한 여종이 모닥불 건너편에서 그를 알아보고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하자 당황한 베드로는 우선 그 질문 자체에 대해 모른 척을 합니다. “Ich weiß nicht, was du sagest/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이 말을 하고 얼른 자리를 피하려 나가려는데 다른 여종이 또다시 그를 알아봅니다. 처음 대답이 매끄럽지 못했음을 반성했는지 이번에는 훨씬 더 강한 어조로 화를 내듯 ‘Ich kenne des Menschen nicht/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두 번째 부인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더 추궁하자 그는 세 번째 예수를 부인합니다.

 

이 세 번째 대사를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두 번째 부인할 때와 같은 대사지만 막스 프룁스틀은 끝까지 부인을 하기는 하는데 내면적으로 자포자기하는 마음과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듯한 표현까지 섞어 넣으며 이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해냅니다. 작은 역할이지만 그는 이 음반이 명반으로 길이 남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대사를 하는 도중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다른 작곡가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 장면에 닭이 우는 소리를 집어넣었을 것이지만 바흐는 역시 대가였습니다. 닭소리가 들어가는 순간 전체 작품은 싸구려 뮤지컬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흐는 그가 의도한 바로 그 순간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울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에벤겔리스트, 에른스트 헤플리거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 후에 이어지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74절 마지막 부분과 75절의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를 듣고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에른스트 헤플리거는 이 부분에서 전무후무한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 부분은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이기도합니다.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Und alsbald krähete der Hahn. 75. Da dachte Petrus an die Worte Jesu, da er zu ihm sagte: ehe der Hahn krähen wird,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

 


특히 마지막 분분,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라고 노래하는 부분은 세상의 모든 극음악의 역사에서 최고 수준의 집중도를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고 들으시면 더 경탄하시게 될 것입니다. 헤플리거는 바로 이 부분을 노래하기 위해서 숨고르기를 하고 힘을 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은 그 유명한 아리아 ‘Erbarme dich, Mein Gott/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나님이여를 앞두고 우리의 마음을 눈물이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끌고 가 줍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의 음악 듣기는 다음 곡의 도입부분까지 연결해 보았습니다. 아리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워낙 아름다운 곡이기에 독창회에서 이 곡만 따로 발췌하여 부르기도 하고 바이올린이나 첼로나 피아노 솔로를 위한 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원곡 전체의 흐름 가운데에서 듣는 것이 가장 감동적입니다. 마태수난곡의 일부로서 베드로의 눈물 장면에 이어지는 기도로서 들을 때 이 노래를 가장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습니다.



                               엘 그레코 성 베드로의 눈물’ (c.1587~1596)

멕시코시티 소우마야 미술관 소장




엘 그레코의 베드로의 눈물

 

엘 그레코(1541년경~1614)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의 다른 작품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 크레타섬 출신이라 그레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는 그만의 독특한 신비적인 종교화들을 남겼습니다. 인물을 세로로 길게 표현하고 과감한 구도를 사용한 그의 그림은 삼 백 년 뒤에서야 등장하는 모딜리아니나 피카소를 연상케 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강렬합니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전 유럽을 뒤 감고 있을 때, 스페인 톨레도에서 활동했던 그는 스페인으로 넘어오기 전에 머물렀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당대의 매너리즘(Mannerism)화풍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그리스 출신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핑계 삼아 그만의 개성을 고집스레 표현했고 르네상스의 변방이었던 스페인에 아직 남아있던 중세적 신비의 영성을 그만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반종교개혁 진영에 속한 국가로서 종교개혁의 흐름에 저항하며 가톨릭교회 수호를 위한 작품 의뢰가 많았고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신앙과 종교적 거룩함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풍토가 엘 그레코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어우러져 많은 대작을 남겼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세로형 인물구도가 디자인적인 미와 작가만의 의도적 차별성을 지향하고 있다면 엘그레코의 세로형 인물구도는 그만의 영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로서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영적이다라는 의미를 육체적 감각을 포함하여 전존재로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시공간인 하늘과 영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버티컬적인 연결!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는 인간이 하늘과 영원을 향해 영적으로 연결된 존재로서 세로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엘 그레코의 그림 속의 인물들은 영적인 불꽃처럼 보입니다. 불꽃이기에 경계가 불분명하고 질감도 매우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엘그레코는 그 표현을 하기 위해 소위 잘 그린 그림이기를 포기 했습니다. 톨레도에 정착한 얼마 뒤 그의 실력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린 모피를 걸친 여인의 초상화나 베네치아에 머물던 시절에 그린 그림을 보면 그가 결코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와 같은 동시대 베네치아의 천재들과 같은 매끄러운 그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인기와 부와 명예를 누리진 못했지만 20세기 이후 그의 그림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고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하고 강렬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서 평가 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스페인 중부의 고도인 톨레도를 방문하면 여기저기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원작자의 모사품

 

엘 그레코의 작품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성 베드로의 눈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톨레도 대성당이나 타베라 미술관(Hospital de Tavera)에 있는 작품만을 알고 있는데 같은 이름의 동일한 작품이 톨레도에만 세 점이 전시되어 있고 미국 워싱턴의 필립스 컬렉션, 영국 버나드 캐슬의 보우즈 뮤지엄, 노르웨이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도 같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 작가의 같은 작품이 이렇게 많으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한 점 외에는 모사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았지만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모사품을 버젓이 전시할 이유는 없을 것이고 만일 모사품이라면 최대한 진품과 똑같이 그리려고 했을 텐데 저마다의 작품들이 제각각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토록 과감한 모사품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원작자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 그레코의 일반적인 종교화에 비해서 그렇게 큰 크기가 아니고 작품 자체가 뛰어났기에 이 작품을 본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그림을 주문했고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했던 화가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던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 관점으로 볼 때 그 중에서 가장 걸작은 멕시코시티 소우마야 미술관에 전시된 것입니다. 대서양을 건너고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내는 가운데 그 그림 주변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머물렀던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소우마야 미술관의 그림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림의 제목대로 베드로의 눈물때문입니다. 어떤 그림 보다 소우마야 미술관 그림속의 눈물이 가장 아름답게 글썽이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시점에 있는 베드로가 아니라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노년의 베드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사건 이후로 닭이 울 때 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더 이상 그날 밤 가야바의 집에서 뛰쳐나와서 흘린 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림 속 베드로의 눈가를 적시고 있는 눈물 속에는 십자가의 예수, 부활의 예수께서 보여 주신 용서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이 맺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만나 주었던 한 사람, 갈릴리 예수를 향한 그리움이 맺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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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친 자가 누구냐?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2)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수난곡

No. 23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마태수난곡 242~44

마태복음 26:63b~68

음악듣기 : https://youtu.be/igAoiTIk6Jk

42(3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3b. 대제사장이 이르되

63. Und der Hohepriester antwortete, und sprach zu ihm:

대사

대제사장

63.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3. Ich beschwöre dich bei dem lebendigen Gott, daß du uns sagtest, ob du seiest Christus, der Sohn Gottes.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4.예수께서 이르시되

64. Jesus sprach zu ihm:

대사

예수

64.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64. Du sagst's. Doch sage ich euch: Von nun an wird's geschehen daß ihr sehen werdet des Menschen Sohn sitzen zur Rechten der Kraft, und kommen in den Wolken des Himmels.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5.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65. Da zerriß der Hohepriester seine Kleider, und sprach:

대사

대제사장

65.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65. Er hat Gott gelästert. Was dürfen wir weiter Zeugnis! Siehe, jetzt habt ihr seine Gotteslästerung gehöret. 66. Was dünket euch?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6. 대답하여 이르되

66. Sie antworteten und sprachen:

대사

무리들

(합창)

66.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66. Er ist des Todes schuldig!

43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67. Da speieten sie aus in sein Angesicht, und schlugen ihn mit Fäusten. EtIiche aber schlugen ;ihn ins Angesicht und sprachen:

대사

무리들

(합창)

68.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68. Weissage uns, Christe, wer ist's, der dich schlug?

44(37)

코멘트

코랄

당신을 그렇게 친 자는 누구입니까?

나의 구세주 당신께 이토록 상처를 주고

악독하게 괴롭힌 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당신은 결코 죄인이 아니십니다.

죄인들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 뿐;

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거늘.

Wer hat dich so geschlagen,

Mein Heil, und dich mit Plagen

So übel zugericht.

Du bist ja nicht ein Sünder,

Wie wir und unsre Kinder;

Von Missetaten weißt du nicht.

 

한결같은 종교 지도자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대제사장과 종교인들이 지금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혈안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 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입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슬픈 일입니다. 종교를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고 종교의 껍데기에만 심취하게 되면 기어코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오늘날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 곳곳에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예수의 영과 예수의 뜻과 예수의 길을 죽이려 드는 종교 지도자들로 가득합니다.

 

목회를 시작하고 가장 후회 되는 것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장막을 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목회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기회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빼앗기는 영적 에너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외부적인 핍박이 아니라 교회의 내부적인 타락이 신앙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값 싼 은혜를 지키기 위해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유유자적 잠잠히 내 갈 길만 가면 되는 것일까요? 둘 다 너무나도 무책임한 일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깨어 있는 신앙인이라면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다만 자신의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예수의 눈으로, 예수의 기준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분노하고 회개시키고 보듬고 고치고 치유해야합니다. 특정 사람에 대한 비난과 미움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 그리고 그것을 조종하여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는 악에 대한 단호함과 분노가 그 책임감을 이끌어야 합니다.

 

요즘 윤미향 국회의원, 정의연 전 대표를 향한 비난이 들끓고 있습니다. 여러 모로 바쁜 교회사역을 따라가다 보니 사실관계 파악에 미진한 부분이 많아 분명한 제 견해를 말씀 드릴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윤미향 전 대표는 신학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 운동에 삶을 바친 일종의 사회선교사로서 작은 교회 목회자 정도의 급여를 받아가며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껏 일 해 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528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윤 전 대표가 30년 세월을 하루아침에 배신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 말을 통해서 윤 전 대표가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를 위해 일해 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 속에서 말단 공무원 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나라와 민족, 상처입은 약자들을 위해 그 험한 일을 30년 동안 해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윤 전 대표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사람답게 스스로가 먼저 분명히 인정하여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잘못이 엄중하면 마땅히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연 사역의 의미와 윤 전 대표의 삼십년의 헌신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정의연이 수행하던 일들은 피해자들에 대한 최선의 위로와 한일 양국 간 과거사 문제의 명확한 사과와 용서 치유를 통해 계속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한일 관계도 평화와 새로운 협력관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윤 전 대표에게 들이대었던 잣대를 한국교회의 큰 목사님들에게 적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고급 차와 수많은 해외일정 등 교회에서 온갖 특권은 다 누리고 성직자로서 세상보다 물질관에 있어서 세상보다 더 엄격하고 검소해야 함에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액의 사례비와 은퇴비를 받습니다. 은퇴비 명목으로 성직을 사고파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돈을 쌈짓돈처럼 쓰며 상식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너무 흔하게 발생하면서 다들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윤 전대표의 자녀 유학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상당수는 목회자의 자녀들인데 그들은 대부분 성도들의 귀한 헌금으로 외국 유학을 다녀오고 온갖 편법을 동원한 세습목회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를 예수의 눈으로, 예수의 기준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분노하고 고치고 치유해 나가야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나대로 예수의 영과 늘 함께 하는 가운데 예수의 뜻을 따라 예수의 길을 묵묵히 걸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십자가 예수의 길을 늘 마음에 품는 것, 마태수난곡을 때마다 묵상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대 제사장이 예수께 묻습니다.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살아 계신하나님 운운하기를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 운운하는 자들이 지금 자신들 앞에 살아서 서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하고 있습니다. 묻는 의도도 잘못 되었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는지 궁금했다면 죄인에게 하듯 밤중에 몰래 몽치를 가지고 잡아 올 것이 아니라 정중히 모셔 와야 했을 것입니다. 그마저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조심스러웠다면 니고데모처럼 밤중에 조용히 찾아가 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 제사장은 그 중요한 질문을 다른 부정한 의도를 지닌 채 예수께 던지고 있습니다. 모함하여 죽이기 위함입니다. 진실과 진리는 깨끗한 영혼과 맑은 마음으로 바라 볼 때 보입니다. 진실과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욕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앞에 두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크나큰 비극입니다. 저들은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했지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24:16).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주위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다만, 욕심과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너를 친자가 누구냐?

 

대제사장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한다 하며 하나님을 위하는 척 옷을 찢지만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찢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대제사장은 묻습니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Was dünket euch?” 이러한 물음은 진리에 기반 하지 않는 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의식하는 가운데 조금씩 선동하고 동의를 얻어가면서 자신의 계략을 펼쳐갑니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본분을 잊어버린 일부 언론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진리와 진실 위에 서 있는 사람은 혼자 있어도 불안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며 늘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리들이 답하여 외칩니다. 이어지는 무리들의 합창은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성경의 66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Er ist des Todes schuldig!”라고 외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68절로서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하는 말입니다.

   

바흐의 음향효과

 

마태수난곡에는 두 개의 합창단과 소프라노 단선율을 부르는 또 하나의 리피에노 합창단까지 총 세 개의 합창 그룹이 있습니다. 마태수난곡 첫 번째 곡에 관한 설명을 다시 찾아보시면 그 기능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https://fzari.com/910

 

바흐는 오늘의 두 장면 모두에서 리피에노를 제외한 두 개의 합창단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각 장면에서 합창단을 사용하는 방법이 참 흥미롭습니다. 극음악 작곡가로서 바흐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장면이지요. 앞선 합창에서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라고 말하는 무리들은 아마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자신들의 의견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반면 68절은 몇몇의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며 하는 말로서 우리말 성경에는 어떤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독일어 성경에서는 ‘EtIiche’ 두서너 명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흐는 두 개의 합창단을 가지고 이 장면을 각각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66절의 합창에서는 모든 파트가 순서대로 등장합니다. 각 합창단이 4성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총 8개의 성부가 있는데 한 박자의 시간차를 가지고 8개의 모든 파트가 순서대로 등장합니다. 실로 대단한 입체감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마치 신나는 일이 생긴 양 예수를 죽이려하는 무리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합창단이 소프라노-테너-알터-베이스 순으로 등장하여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Er ist des Todes schuldig!”고 외치는데 한 박자 바로 뒤에 두 번째 합창단이 소프라노-알토-베이스-테너 순으로 똑같이 노래합니다


42번 곡의 합창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Er ist des Todes schuldig’의 도입 부분. 두 개의 합창단 총 8개의 파트가 한 박자의 시간차를 두고 등장함으로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의 광기를 표현한다.


 

제가 얼마 전에 사무실용으로 이어폰을 샀습니다. 귀를 막고 음악을 듣는 것 같아 원래 이어폰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다른 직원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 어쩔 수 없이 구입했습니다. 이왕 사는 거 어떤 기능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조금 비싼 ‘7.1 채널 지원 모델을 선택했는데 얼마 후 제 아들이 데모 음악을 틀어 주며 설명해 준 그 기능에 크게 놀랐습니다. 고작 두 개의 작은 스피커가 달려 있는 줄로만 알고 생각 없이 듣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7개 방향의 각기 다른 스피커에서 들리는 효과를 구현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방향이 따로 따로 구별되어서 들리는 데모 음원을 통해서 들으니 너무나도 놀랍게도 정말 7개의 방향과 높고 낮은 위치마저 구현하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그런데 바흐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두 개의 합창단 여덟 파트를 통해서 그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68절에 해당하는 합창은 몇몇 사람이 예수의 뒤쪽 양 옆에서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희롱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하는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때린 사람을 찾아보라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그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말하며 예수를 희롱합니다. 독일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저들이 얼마나 악한지 더 실감이 됩니다. 예수의 뒤에서 침을 뱉고 뺨을 때려가며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Weissage uns, Christe, wer ist's, der dich schlug/그리스도라니 예언이나 한 번 해보아라, 지금 누가 너를 때렸는지 맞춰보아라!’


                 모욕당하는 그리스도,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5031505),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


바흐는 이 장면에서 두 개의 합창단을 화성적으로 배치합니다. 앞선 합창처럼 8개의 파트가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합창단이 4성부씩 한 번에 노래하게 한 것입니다. 즉 예수의 오른쪽 뒤에서 때리는 사람과 왼쪽 뒤에서 때리는 사람 두 파트로 나눈 것입니다. 대신 화성적으로 울리기 때문에 그 장면의 잔인함과 비극성을 살리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7.1채널이 아니라 양쪽에 놓인 스피커에서 번갈아서 울리며 써라운드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스테레오로 녹음된 음반을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통해 들으시면 그 차이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수난곡의 실황 연주에서도 이 두 개의 합창단을 오케스트라 뒤 양쪽 끝에 나누어 배치하여서 바흐의 음향 효과적 의도를 극대화합니다. 한편, 리피에노 합창단의 위치는 공연장이나 예배당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마태수난곡이 초연되었던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경우에는 예배당 양 옆에 자리한 2층이나 예배당 맨 뒤쪽, 옛날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는 2층 테라스에 리피에노 합창단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때린 자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입니다

 

이 경악스런 합창 뒤에 나오는 코랄은 그 고백이 마치 입에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듯 저들의 조롱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시작합니다. 코랄을 부르는 이들이 얼마나 예수의 수난에 아파하고 그 장면에 몰입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때린 이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코랄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세속노래로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이 작곡한 ‘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인스부르크여, 난 그대를 떠나야만 하네(1485)’의 멜로디에 독일 종교개혁의 중요한 신학자요 시인이었던 파울 하르트(Paul Gerhardt)가 가사를 붙인 곡입니다. 마태수난곡의 16(10)번 곡에서도 쓰였는데 16번곡에는 코랄의 5절 가사가, 오늘의 마지막 장면 44번곡에는 3절 가사가 쓰였습니다. 오늘도 꼭, 우리말로 코랄을 함께 불러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