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4 겟세마네

 

마태 수난곡 1부 24번

마태복음 26:36~38

음악듣기 : https://youtu.be/R-AEzm3v630

내러티브

18(24)

에반겔리스트

36. Da kam Jesus mit ihnen zu einem Hofe, der hieß Gethsemane, und sprach zu seinen Jüngern:

36.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사

예수

Setzet euch hier, bis daß ich dorthin gehe und bete.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7. Und nahm zu sich Petrum und die zween Söhne Zebedäi,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38. Da sprach Jesus zu ihnen: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 bleibet hie, und wachet mit mir.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겟세마네와 아인잠카이트(Einsamkeit)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한 날 특별한 목적으로 그곳에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무르실 때면 습관처럼 매일 밤 그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누가복음 22:39)

 

왜 예수께서는 그곳을 그렇게 자주 찾아가셨을까요?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무가 우거지고 조용한 그 곳을 좋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라는 강렬한 사건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열광주의적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매일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뜨거운 철야 산기도를 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겟세마네는 예수께 있어 쉼과 평화와 고요함의 장소였습니다. 복음서, 특히 예수 수난 이야기는 사건의 나열입니다. 예수의 말씀과 성경의 기록을 통해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그 사이의 일상을 읽을 수 있어야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누가복음 21:37)

 

반면, 우리들의 교회와 우리들의 삶에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위기 상황에는 목 놓아 부르짖어야 하고 영적 전쟁과도 같은 신앙 여정에서 긴장과 간절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침해 할 수 없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매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프로그램이 가득하고 우리는 저마다 맡은 일들과 인간관계와 표정관리로 분주합니다. 예배 중에도 말이 끊기거나 소리가 끊기면 불안함을 느낍니다. 통성기도, 방언기도만 제대로 된 기도처럼 느껴지고 기도를 할 때도 음악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언제든지 울부짖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울부짖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고조됨과 여운이 없는 이러한 기도가 진정한 기도인지, 집단적 히스테리인지, 혹은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세상의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깊이 있고 가장 강렬한 기도였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3~44)

 

하지만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복음 26장 시작부터 준비되어 그 여운이 십자가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강렬한 기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리 내어 외치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소리를 치시며 기도했다면 지척에 있던 세 제자들이 단잠에 빠져들 수 없었겠지요. 예수께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기도, 성대가 아닌 마음을 찢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홀로 기도하셨고 그러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조됨과 여운이 있는 깊이 있고 강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얼마만큼 누리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주일은 가장 피곤하고 가장 분주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뜩이나 피곤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그렇게 우리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매일 밤 누리셨듯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또 다른 강렬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소리들이 모여 음악이 되었다고 쉽게 생각하고 소리가 크거나 많을수록 멋진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리의 바탕은 침묵입니다. 음표가 없는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쉼표가 있어야 할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음악을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심연의 고독과 연결되지 않고는 음악의 깊은 맛을 누릴 수 없습니다. 소리로서의 음악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연주자와 작곡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화려한 연주라 하더라도 그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홀로 고민하고 연습한 연주자의 고독과 투쟁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독일어 ‘Einsamkeit/아인잠카이트’는 ‘고독’이라고 번역하기에는 그 충만함과 지금 머물고 있는 배경이 소외되기에 부족하고, 누군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홀로됨’이나 ‘외로움’이라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묘한 단어입니다. ‘숲, 바다, 공간, 우주, 하나님의 품 등 커다란 실존 안에서 먼지만큼 작은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충만하게 느끼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인잠카이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깊은 ‘아인잠카이트’를 누리셨습니다.

 

바흐의 음악도 그 바탕에는 침묵과 아인잠카이트가 서려 있습니다. 일전에도 마태수난곡의 곡과 곡사이의 침묵의 미학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언어가 없는 기악곡에서 ‘침묵의 소리’를 더 가까이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연주한 평균율 1권을 들어보시면 이 음악의 바탕이 차라리 우주의 침묵이며, 울려 퍼지는 소리는 바흐와 연주자의 대화요, 듣는 우리를 포함하여 이 음악과 연결된 모두가 ‘아인잠카이트’에 깊이 빠져들게 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youtu.be/Dkt75juxvxw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산에 오르는 또 다른 이유는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함이기도 하지요. 예수께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사랑하셨고 감람산에서 조용히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제자들도 그분의 조용함에 압도 되어 ‘조용히’ 예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마가복음 13:3)

 

예수께서는 때로, 감람산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누가복음 13:34)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 예루살렘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예루살렘에 가게 된다면 감람산 올리브나무 우거진 동산에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있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쉬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마 그곳에서는 그 어떤 종교적인 것도 사족이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그가 쉼을 누렸던 그 곳에서 그와 함께이고 싶습니다.

 

                                            겟세마네, Walter Mittelholzer, 1934년

 

고민하고 슬퍼하신 예수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인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나아가셨을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은 앉아 기다리라고 하시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아마 예수께서는 최대한 자신이 당하실 고난을 숨기시고 홀로 감당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홀로 지고 가시기에는 십자가는 너무나도 큰 무게였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기에 위로가 필요했고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 등 보다 깊은 것을 나누었던 세 명의 제자들을 대동하셨습니다.

 

마태수난곡의 대본에 쓰인 루터 성경은 이 부분을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고민하고 슬퍼하시기를 시작하셨다’라고 번역했는데 이 번역이 원문(에르사토/ἤρξατο/시작하다)에 더 가깝고 그렇게 읽을 때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는 간신히 참고 있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홀로 되어 기도하려니 고민과 슬픔이 엄습하듯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인성을 지녔던 예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아야 하는 십자가는 고민과 슬픔이었습니다.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써 그의 유일한 연약함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되어 십자가에서 겪어야 할 완전한 외로움은 예수의 고민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십자가의 순간이 다가오고 막상 홀로됨이 시작하게 되자 고민과 슬픔이 갑작스레 밀려오고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구절은 베드로의 배신 장면과 함께 에반겔리스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민하고 슬퍼하다’라는 뜻의 ‘zu trauern und zu zagen'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유심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음악적으로 ’trauern‘은 고민과 슬픔의 감정을 쏟아 놓는 표현으로 ’zagen'은 그 감정을 다시금 누르고 참아내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토록 애절하게 작곡한 바흐도 놀랍지만 그 오선지를 소리로 펼쳐낸 에반겔리스트의 노래는 임방울의 ’쑥대머리 구신형공‘에 비견될 서양 성악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듣고 계신 음반의 에른스트 해플리거는 마태 수난곡 녹음 역사상 최고의 에반겔리스트이며 제가 이 음반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내러티브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만, 마태 수난곡을 듣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무성영화에서의 변사처럼, 판소리에서의 아니리처럼 에반겔리스트는 이 이야기의 흐름을 쥐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석하고 깨달으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에 마음을 맡길 때 우리는 이야기에 빠져 들며 예수의 수난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에서 두 번 등장하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앞선 대사에서는 마지막 단어 ‘bete’에 주목해야합니다. 이 단어는 ‘기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beten/베텐’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는)기도하라’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가사로 표현되는 순간 모든 악기들은 엄숙하고 간절한 느낌으로 기도를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사는 반주가 보다 적극적으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부터 현악 모든 파트가 8분 음표 연음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이 8분 음표 연음들은 고민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요동치기 시작하는 예수의 마음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만나게 될 테너의 레치타티보 ‘O schmerz!/오 그 고통이여!’로 이어지면서 8분 음표 연음은 16분 음표로 바뀌어 두 배 의 속도로 빨라집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주님의 고민과 슬픔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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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웃지 마소서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3)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3 나를 비웃지 마소서

 

마태수난곡 1부 22번~23번

마태복음 26:33~37

http://음악듣기 : https://youtu.be/i-1X8zrka8o

내러티브

16(22)

에반겔리스트

33. Petrus aber antwortete und sprach zu ihm: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대사

베드로

Wenn sie auch alle sich an dir ärgerten, so will ich doch mich nimmermehr ärgern.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4. Jesus sprach zu ihm: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대사

예수

Wahrlich, ich sage dir: In dieser Nacht, ehe der Hahn krähet,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5. Petrus sprach zu ihm:

35. 베드로가 이르되:

대사

베드로

Und wenn ich mit dir sterben müßte, so will ich dich nicht verleugnen.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Desgleichen sagten auch alle Jünger.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기도

17(23)

코랄

Ich will hier bei dir stehen,

Verachte mich doch nicht!

Von dir will ich nicht gehen,

Wenn dir dein Herze bricht.

Wann dein Herz wird erblassen

Im letzten Todesstoß,

Als dann will ich dich fassen

In meinen Arm und Schoß.

나 여기 당신 곁에 서 있습니다.

주여 나를 비웃지 마소서.

당신 곁을 결코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산산이 부수어질 때,

마지막 죽음의 고통이 당신을 엄습할 때,

나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내 팔에, 내 품에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항변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네가(du)’ ‘오늘 밤(In dieser Nacht)’, ‘닭이 울기 전(ehe der Hahn krähet)’, ‘세 번(dreimal)’, ‘부인하리라(wirst verleugnen)’ 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쓰시며 베드로가 자신을 버릴 것을 다시금 확인시키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마주 보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토록 분명한 표현으로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를 부인 한 후 베드로는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의 행위를 변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역시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의 뜻을 저버리게 될 때 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처럼, 우리는 말로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를 팔고, 예수를 잡아들이고,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죽인 사람들을 우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로 여기고 우습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연약함 그리고 절망적인 죄인인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이와 상반된 다른 이유는, 그렇게 생기게 된 자신을 향한 절망에 함몰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그가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과 앞서 유다에게 그가 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특별한 예언의 능력을 선보이려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한 절망과 죄책감과 후회에 함몰되지 않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있단다. 나는 괜찮단다. 내가 다 이해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의 연약함을 함께 감당할테니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구나.’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고 유다는 결국 죄에 함몰되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

 

리히터의 58년 음반에서 베드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막스 프룁스톨입니다. 생각 보다 몸이 앞서고, 몸 보다 마음이 앞선 사람 베드로, 갈릴리 어부 출신의 거친 사람 베드로를 잘 표현하는 목소리입니다. 마태수난곡 모든 음반을 통 털어 가장 인상 깊은 베드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태수난곡에서는 대부분 한명의 베이스 가수가 유다와 베드로, 빌라도와 대제사장 역할을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한 두 마디 대사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가수가 여러 배역을 맡는 것은 오페라처럼 의상이나 분장이 필요 없는 수난곡이나 오라토리오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간혹 합창단원 중에서 한 사람씩 맡기도 하지만 수난의 이야기에서 이들은 결코 작은 배역들이 아니기에 실력 있는 솔리스트를 한 사람 세우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한 사람의 가수일지라도 배역마다 다르게 부르려고 노력하겠지만 유다나 베드로, 빌라도나 대제사장 한 가지 역할에 특화 될 수밖에 없겠지요. 막스 프룁스톨은 베드로에 특화된 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유다의 경우에서 프룁스톨의 목소리가 비열하고 똑똑한 사람 유다를 표현하기에는 조금 아쉽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는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의 수난 이야기와 마태수난곡에서 베드로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탁월한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2부에서 만나게 될 베드로의 부인 장면에서 세 번째에 이르러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Ich kenne des Menschen nicht.”라고 지쳐버린 채 오열하듯 말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외젠 뷔르낭, 부활의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1898)

 

십 오 년 전 파리 오르셰 미술관을 찾아 간 것은 순전히 이 그림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길을 헤매다 늦어서 결국 못 보게 될 것을 알면서도 찾아갔었는데 그날이 마침 단 하루 야간 개관을 하는 날이었었지요. 반 고흐의 유명한 작품도 많았지만 마치 운명의 작품을 마주한 떨림으로 이 그림 앞에 홀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으로 많지만 오늘은 베드로의 얼굴만 바라보겠습니다. 리히터 음반의 막스 프룁스톨의 목소리와 외젠 뷔리낭의 그림 속 베드로의 얼굴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만약 뭔가 어울리지 않음이 느껴지신다면 아마 그것은 그림 속의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 한 후 자기 자신에 철저히 절망하고 십자가 사건을 겪은 후의 얼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예수

 

다시 예수를 바라봅시다. 베드로로 시작하여 모두가 하나 같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는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다시 한 번 빼도 박도 못할 예언을 하심으로 제자들을 끝까지 몰고 가셨을까요?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이 이야기가 제자들의 마지막 말에서 뚝 끊겨 버립니다. 저는 이 끊김이 예수의 침묵, 예수의 받아들임으로 들립니다.

 

예수께서는 다 알고 계셨지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말과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달리 제자들을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씀 없이 그들의 마음을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행동과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마음과 의도를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제자들을 비웃지 마십시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니, 우리는 제자들 보다 더 비웃음을 받아 마땅합니다. 제자들을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우리는 예수 수난의 의미와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의 신비를 안다고 하면서도 삶의 곳곳에서 예수를, 그의 뜻과 그의 길을 배신하며 사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도 비웃지 않으시고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작은 마음도 다 받아 주십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있단다. 나는 괜찮단다. 내가 다 이해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의 연약함을 함께 감당할테니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꾸나!’

 

그 음성을 들은 우리는 이 장면에 이어지는 코랄을 우리말로 함께 부르며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도망하지 않겠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주님의 고통이 있는 곳에서, 당신 곁에서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난과 슬픔이 있는 곳에 당신이 계시니 그곳에서 저도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나 주님 곁에 서니

날 받아 주-소서

나 주와 함께 하며

그 아픔 함께하리

주님의 깨진 마음

주님의 찢긴 몸

나 주-와 함께 하며

내 품에 안으리.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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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목자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2)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2 사랑의 목자 예수

 

유월절 성찬을 마친 예수와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성경에는 감람산으로 나아갔다로 쓰여 있지만 마태 수난곡은 이 구절에 공간감과 움직임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에반겔리스트가 ‘gingen sie hinaus/그들은 나와서 갔다라고 노래하기 직전을 들어 보면 오르간과 콘티누오(통주저음)의 반주가 갑자기 스타카토로 한 음씩 옥타브 위까지 빠르게 상행하는 것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수난곡에서 이 부분을 들을 때 청중들은 그들이 서두르듯 산을 올라갔음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영화처럼, 살아 움직이는 성경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수난에 참여토록 독려하는 것이 수난곡의 목적입니.

 

 

 

악보 에반겔리스트가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노래하는 부분. 윗줄 맨 아래의 오르간&콘티누오 파트 마지막 마디에 산을 오르는 듯한 스타카토 옥타브 도약이 있다.

 

 

실제로 감람산은 예수살렘 성 동쪽에 있는 800미터 정도 높이의 산입니다. 하지만 예수살렘 성이 해발 7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보기에는 100미터 남짓의 언덕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공간을 좋아하셔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면 거의 매일 밤 오르셨습니다. 철야 산기도를 하러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는 쉼이 기도였고 기도가 쉼이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일하셨지만 밤에는 꼭 하나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누가복음 21:37

   

사랑의 목자 예수

 

감람산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배신할 제자들을 원망하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양으로 바라보셨다는 것 자체가 예수 스스로 목자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서 예수를 바라보지만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 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마태수난곡 120~21

마태복음 26:30~32

음악듣기 : https://youtu.be/BRaQm4M6r7g

내러티브

14(20)

에반겔리스트

30. Und da sie den Lobgesang gesprochen hatten, gingen sie hinaus an den Ölberg. 31. Da sprach Jesus zu ihnen:

30.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1.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사

예수

In dieser Nacht werdet ihr euch alle ärgern an mir, denn es stehet geschrieben: 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 32. Wann ich aber auferstehe, will ich vor euch hingehen in Galiläam.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코멘트

15(21)

코랄

Erkenne mich, mein Hüter,

Mein Hirte, nimm mich an!

Von dir, Quell aller Güter,

ist mir viel Gut's getan.

Dein Mund hat mich gelabet

Mit Milch und süßer Kost,

Dein Geist hat mich begabet

Mit mancher Himmelslust.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젖과 맛난 꼴이 되어

나를 위로하셨으며

당신의 영은 나를

천상의 만족으로 채우셨나이다.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부인당하여 끌려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마가복음 6:34)’라는 마가복음의 표현처럼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은 그 자체로 깊은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의 마음을 뜻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계신 그가, 그 양떼로부터 배신당할 것을 아셨던 그가, 목자 없는 양떼가 되어 유리하게 될 제자들을 걱정하여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라고 부활하시어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노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바흐 시대의 신앙도 이 사랑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흐와 대본을 쓴 피칸더는 예수의 말씀 뒤에 다음과 같은 코랄을 연결시켰습니다.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함께 부르는 마태 수난곡

 

이번 시간부터 새로운 시도를 해 볼까 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우리말로 부르면 어떨까요?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마태 수난곡에서 코랄은 주로 코멘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청중으로서 수난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코멘트에 동참하며 코랄을 함께 부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27411일 성금요일,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에서 마태 수난곡이 처음 연주 될 때에도 청중들은 코랄을 함께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을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른다는 것은 썩 권장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작품일수록 언어와 음악이 하나로 움직이며 바흐 또한 가사에 음악을 입혀 그림을 그려내듯 섬세하게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예수의 대사에 있습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는 치다라는 의미의 슐라겐(schlagen)’흩어지다라는 의미의 체어슈트로이엔(zerstreuen)’입니다.

 

우선, 음악적인 악센트가 이 두 개의 동사에 맞아 떨어지면서 이 동사들의 표현은 극대화합니다. 또한 이 두 동사를 시작과 끝으로 하여 음악이 갑자기 비바체(vivace)로 빨라지고 현악기들은 목자에게 채찍질을 하고 양떼를 흐트러트리듯이 스타카토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부른다면 독일어와 우리말의 어순 차이 때문에 바흐가 독일어 동사의 자리에 섬세하게 준비한 음악적 악센트의 자리에 우리말의 동사를 위치시키긴 힘들 것입니다.

 

바흐는 이렇게 가사에 음악을 그려 입히는 방식(Word painting)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 수난곡을 깊이 있게 듣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독일어와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매 시간마다 독일어 가사를 함께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코랄만큼은 우리말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코랄 자체에 그러한 DNA가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을 계속해서 함께 하고 계신다면, 마태 수난곡에서 몇 개의 코랄 멜로디가 반복되어 쓰이고 있음을 눈치 챈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태 수난곡에 쓰인 코랄 멜로디들의 작곡자는 바흐가 아닙니다.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면 표절에 돌려막기로 보일 수 있겠지만 루터교 전통에서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바흐 당시에는 음악을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기에 음악에 있어서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코랄과 콘트라팍툼

 

루터교 전통에서 코랄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성공에는 코랄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코랄은 루터교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교회음악으로 루터교 음악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린이 성가대원 출신의 미성 테너였고 류트와 플롯도 능숙하게 연주했었던 루터는 음악을 신학에 견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일반 신도들은 성가대가 부르는 라틴어 다성 음악이나 사제들이 부르는 라틴어 성가를 수동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본인의 음악성과 새로운 시대의 요청을 코랄이라는 새로운 교회음악을 통해 결합시켰습니다. 일반 신도들이 익숙한 멜로디에 신학적 신앙적 핵심 내용을 담아 독일어로 함께 부르는 코랄이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코랄을 직접 부름으로써 예배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신학적, 신앙적 핵심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코랄의 멜로디는 새롭게 작곡되기도 했지만, 이미 있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콘트라팍툼(contrafactum) 형태로 많이 만들이 졌습니다. 코랄의 선율은 그레고리오 성가, 비전례적 종교 노래, 세속 선율 또는 민요들로부터 다양하게 차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동해물과 백두산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오랫동안 사귀었던등의 가사로 불러진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의 코랄 선율 역시 원래는 세속적 사랑노래였습니다.

 

한스 레오 하슬러가 1600년 경 작곡하여 유명해진 내 마음 떨려오네/Mein G'müt ist mir verwirret’의 선율에 루터교 목사요 신학자인 파울 게르하르트가 오 피투성이 상하신 그 머리/O Haupt voll Blut und Wunden’라는 가사를 붙였고 1680년에는 바흐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디트리히 북스데후데가 우리 주님의 몸/Membra Jesu Nostri’이라는 작품에서 주님의 상하신 머리를 표현하는데 이 멜로디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이 멜로디를 마태 수난곡에서만 총 여섯 번 사용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메인 멜로디라고도 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바흐의 작곡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러한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고 그래서 찬송가 145장 오른편에는 이례적으로 작곡자 이름에 하슬러와 바흐의 이름이 함께 오르게 되었습니다.

 

, 그럼 오늘 소개해 드린 부분을 처음부터 들으시다가 이 코랄이 울려 퍼질 때 우리말로 함께 불러 보면 어떨까요? 코랄 멜로디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다듬어 보았습니다. 참고로, 음악은 윗부분에 있는 가사 해석표의 음악듣기링크를 통해 리히터 58년 녹음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합창단의 노래처럼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사무치도록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내 목자이신 주님 날 지켜 주-소서

날 먹여 주시시고- 날 채워 주-셨네

생명의 말씀으로 날 먹여주시고

하늘-의 기쁨으로 날 채워주셨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또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예수의 잡히심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위한 교리적 필연이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매우 협소하게 합니다.

 

예수는 눈앞에 놓인 사랑하는 양들의 위험을 두고 달아 날 수 없으셨습니다. 눈앞의 놓인 양들의 위험과 양을 향한 즉흥적 사랑을 위해 그는 죽음을 향하여 뛰어드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없기에 그 즉흥적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되었으며 영원하고 필연적인 사랑이 된 것이지요. 이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사랑의 목자’, ‘선한 목자라고 부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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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1)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1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성찬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성찬의 자리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몹시 근심하는 목소리로 주여 나는 아니지요(Herr, bin ich's)?’라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수난곡 117~19

마태복음 26:23~29

음악듣기 : https://youtu.be/9IWgq3cTick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3. Er antwortete und sprach:

23.대답하여 이르시되

대사

예수

Der mit der Hand mit mir in die Schüssel tauchet, der wird mich verraten.

24. Des Menschen Sohn gehet zwar dahin, wie von ihm geschrieben stehet; doch wehe dem Menschen, durch welchen des Menschen Sohn verraten wird. Es wäre ihm besser, daß derselbige Mensch noch nie geboren wäre.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5. Da antwortete Judas, der ihn verriet, und sprach:

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대사

유다

Bin ich's, Rabbi?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Er sprach zu ihm:

대답하시되

대사

예수

Du sagtest's.

네가 말하였도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6. Da sie aber aßen, nahm Jesus das Brot, dankete und brach's, und gab's den Jüngern und sprach: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대사

예수

26. Nehmet, esset, das ist mein Leib.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7. Und er nahm den Kelch, und dankete gab ihnen den, und sprach:

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대사

예수

Trinket alle daraus, 28. das ist mein Blut des neuen Testaments, welches vergossen wird für Viele, zur Vergebung der Sunden. 29. Ich sage euch: Ich werde von nun an nicht mehr von diesem Gewächs des Weinstocks trinken, bis an den Tag, da ich's neu trinken werde mit euch in meines Vaters Reich.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코멘트

소프라노 서창

Wiewohl mein Herz in Tränen schwimmt,

Daß Jesus von uns Abschied nimmt,

So macht mich doch sein Testament erfreut:

Sein Fleisch und Blut, o Kostbarkeit,

Vermacht er mir in meine Hände.

Wie er es auf der Welt mit denen Seinen

Nicht böse können meinen,

So liebt er sie bis an das Ende.

예수께서 떠나신다니 내 마음 눈물 속을 맴돕니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 기억하며

내 마음이 또한 기뻐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

그 고귀함을 내 손에 얹어 주셨으니

주께서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에게 베푸셨던 사랑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 사랑은

세상 끝날 때까지 변함없을 것입니다.

기도

소프라노

아리아

Ich will dir mein Herze schenken,

Senke dich, mein Heil, hinein.

Ich will mich in dir versenken,

Ist dir gleich die Welt zu klein,

Ei, so sollst du mir allein

Mehr als Welt und Himmel sein.

내 마음 당신께 드리오니

나의 구세주시여, 내 마음에도 오시옵소서

나 자신을 당신께 바치오리니

당신께 비하면 세상 모든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온 세상과 하늘보다

당신은 내게 더욱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근심과 당황을 깊이 숨긴 채 잠잠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한창 시끄럽게 예수께 묻고 너니 내니하면서 소란스러울 때, 조용히 눈동자를 굴려가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엽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Bin ich's, Rabbi)?’

 

그가 선택한 계산의 결과는 다른 제자들과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 끝자락에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랍비여라는 호칭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이 부분을 놓치기 쉽습니다만, 우리말과는 달리 헬라어와 독어 성경에서는 랍비여라는 호칭이 질문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질문에 집중하다가 마지막의 호칭에서 본심이 튀어나온 것이지요. 22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Herr)’로 부르고 있지만 유다는 랍비(선생)’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를 존경하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 신앙인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듣자마자 즉흥적으로, 사뭇 거칠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달랐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는 신중했고 말과 행동보다 계산을 먼저 했습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신중한 것이 미덕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따름에 있어서 때로 우리는 투박하고 단순할 필요가 있습니다. 투박하고 단순할지언정 진실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대부분 그런 부류였습니다. 예수께서 기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1958년 리히터 음반의 아쉬움 중의 하나는 유다의 목소리가 육중한 악당의 목소리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그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1958년은 아직 선과 악이 명확하게 나뉘던 시대였습니다. 오히려 리히터의 1971년 영상에서 지그문트 님스게른이 들려준 간사하고 날렵한 유다나 1998년 녹음된 헤레베헤 음반(HARMONIA MUNDI 레이블)의 최대한 자신을 숨기고 있는 조심스런 유다도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앞선 예수의 말씀에서 기록된 대로(wie von ihm geschrieben stehet)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Es wäre ihm besser...)은 예수 자신과 유다,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하나님에 의해 강제 된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께서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선택했듯이 유다 역시 그의 가치관과 자잘한 삶의 일상들이 집약되어 예수를 팔아넘기는 일을 운명처럼선택 했던 것입니다.

 

에반겔리스트의 레치타티보로 장면이 이어집니다.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성찬은 이어집니다. 우리말 성경 26절은 그들이 먹을 때에라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루터 성경은 여기에 접속사 'aber(그러나)'가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aber'라는 접속사가 다시금 성찬의 식탁을 정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예수와의 거룩한 교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성찬은 계속 되어야합니다! 

 

 

 

                최후의 만찬, 프릿츠 폰 우데(1886)

 

 

빵을 떼어 주시고 잔을 채우시며 성찬을 베푸시는 예수의 음성은 결연하게 들립니다. 바흐는 성찬의 은혜와 따스한 이미지를 음악에 담았고 지휘자 리히터는 성찬의 거룩함에 초점을 맞춰 이 부분을 굉장히 느리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전인적인 감성의 층을 채우기

 

성찬이 끝나고 코멘트와 기도의 역할을 하는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이어집니다. 둘째 시간에 성경 본문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고 기도는 말 그대로 그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레치타티보는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에 슬퍼하면서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 함께 성찬을 나누겠다는 약속에 기뻐하는 내용의 코멘트 입니다. 또한 주님이 손에 얹어 주신 살과 피를 세상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여기어 손바닥에 새기겠노라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아리아는 코멘트에 이은 기도입니다. 우리도 성찬을 받을 때 마다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마태수난곡의 성찬 장면은 이렇게 우리에게 성찬식의 참된 의미와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내 마음 당신께 드리오니

나의 구세주시여, 내 마음에도 오시옵소서

나 자신을 당신께 바치오리니

당신께 비하면 세상 모든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온 세상과 하늘보다

당신은 내게 더욱 귀한 분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 모든 솔로 음악은 우리의 개인적 마음의 감정과 결단과 기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알토의 목소리로, 때로는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때로는 테너나 베이스의 목소리로 불러지는데 이 모든 목소리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자아의 여러 감성적 층을 의미합니다.

 

소프라노는 순수한 감성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알토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모성적 사랑을 상징하고, 남성파트인 테너와 베이스는 열정을 나타내는데 테너는 보다 감성적인 횡격막 위의 열정을, 베이스는 보다 본능적인 횡격막 아래의 열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여덟 번째 시간에 만났던 베다니 여인의 노래는 알토였고 곧 만나게 될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통에 반응하는 아리아는 테너가 부릅니다. 마태 수난곡 중반부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분노하며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Gebt mir meinen Jesum wieder!’를 부르는 파트는 베이스이며 순수한 감성과 사랑을 나타내는 오늘의 아리아는 소프라노를 위한 곡입니다.

 

남녀나 개인적 성향을 떠나 우리 안에는 이 모든 감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지능지수처럼 감성지수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고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층의 감성을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수난곡의 모든 솔로 음악을 여러분 자신의 노래로 부른다고 상상하시며 가사를 음미하며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음치여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말로 하다가 박자가 틀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이 노래들을 여러분은 노래로 부를 수 있다면 전인적 영적 감수성이 깨어나 여러분들을 더 풍성한 신앙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고난을 묵상하면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수난곡에서 이렇게 밝은 노래가 흘러나올 줄은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의 수난 속에서도 밝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사랑이 지금 내게 있고 세상 무엇보다 귀하고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신실하신 주님께서 하신 다시 오시겠노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스런 소녀가 되어 이 밝은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Ich will dir mein Herze schenken!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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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나는 아니지요? -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10)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0 주여 나는 아니지요? -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장면이 바뀌고 유월절 성찬이 준비 되고 있습니다. 지난 장면에서 그려진 유다의 배신과 예수의 피투성이가 된 마음도 유월절 성찬 앞에서 차분하게 바뀌며 거룩한 분위기가 다시금 감돕니다.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이 부분을 노래하는 에반겔리스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내러티브를 노래하느냐가 아니라 두 장면 사이에 놓인 침묵을 어떻게 노래하느냐 입니다. 지휘자는 이 부분에서 에반겔리스트와 오르간 콘티누오에게 큐 사인을 주기 전에 침묵을 연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음반 녹음으로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의 아쉬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곡을 트랙별로 쪼개어 음반에 실어야하기 때문에 곡과 곡 사이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에서 곡과 곡 사이에 있는 침묵의 순간을 지휘자가 의도한 대로 정확히 들을 수 없지요. 마태수난곡에서는 소리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침묵을 음악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베이스 콘티누오처럼 계속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마태수난곡을 직접 듣거나 공연실황을 담은 동영상을 볼 때 이 침묵의 순간에 귀를 기울이신다면 색다르고 깊은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수난곡 113~16

마태복음 26:17~22

 음악듣기 : https://youtu.be/GKyWzMfuFjg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7. Aber am ersten Tage der süßen Brot traten die Jünger zu Jesu und sprachen zu ihm:

17.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대사

제자들(합창)

Wo willst du, daß wir dir bereiten, das Osterlamm zu essen!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8. Er sprach:

18.이르시되

대사

예수

Gehet hin in die Stadt zu einem, und sprecht zu ihm: Der Meister läßt dir sagen: Meine Zeit ist hie, ich will bei dir die Ostern halten mit meinen Jüngern.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9. Und die Jünger taten, wie ihnen Jesus befohlen hatte, und bereiteten das Osterlamm. 20. Und am Abend satzte er sich zu Tische mit den Zwölfen. 21. Und da sie aßen, sprach er:

 

19.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대사

예수

Wahrlich ich sage euch: Einer unter euch wird mich verraten.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2. Und sie wurden sehr betrübt, und huben an, ein jeglicher unter ihnen, und sagten zu ihm:

22.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대사

제자들(합창)

Herr, bin ich's?

주여 나는 아니지요?

코멘트

코랄(합창)

Ich bin's, ich sollte büßen,

An Händen und an Füßen

Gebunden in der Höll'!

Die Geißeln und die Banden,

Und was du ausgestanden,

Das hat verdienet meine Seel'.

그 사람은 바로 나,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지옥에서 손발을 묶이고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채찍질과 멍에

당신께서 당하신 그 모든 것은

내 영혼이 짊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찬과 유월절 어린양

 

제자들이 예수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Wo willst du, daß wir dir bereiten das Osterlamm zu essen!’라고 묻는 합창은 영어의 ‘where/어디서에 해당하는 의문사 ‘wo’를 세 번 반복하면서 거룩하고 정성스럽게 성찬을 준비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관악기들이 하나의 소리로 아르페지오를 그려가며 부드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단순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임에도 이 합창은 음악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바흐는 왜 이 부분에 이토록 공을 들였을까요? 그 비밀은 독일어 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수난곡의 내러티브와 대사는 루터판 독일어 성경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말 개역개정 성경은 헬라어 원문에 맞게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이라고 번역했지만 루터가 번역한 바흐 시대의 성경은 ‘das Osterlamm zu essen’ 유월절 어린양을 잡수실 것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어린양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루터에 의해서 추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바흐는 단순히 먹을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음악을 입힌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해의 첫 달인 니산월 열흘날에 새끼 양을 취하여 간직하고 있다가 열나흗날 해 질 때 양을 잡아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양은 불에 구워 쓴나물, 무교병과 함께 먹었습니다. 손질된 고기를 사는 것은 쉬어도 살아 있을 때 함께 지낸 생명을 죽이고 먹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양을 사흘 동안 집에 두는 이유는 생명과 피의 희생이 얼마나 어렵고 귀한 것인가를 깊이 새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먼저 떠올리지만 성찬에서 유월절 양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병행구절에는 무교절 첫날다음에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마가복음 1412)

 

루터는 아마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마태복음을 번역할 때, ‘유월절 양/das Osterlamm’이라는 표현을 추가했고, 바흐 역시 그 표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우리말 성경으로 읽었을 때는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이 부분에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적 표현을 정성스레 덧입힌 것입니다.

 

분명, 그날 최후의 만찬 자리에는 빵과 포도주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고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 전통을 비롯한 몇몇 그림들은 성찬의 식탁에 빵과 포도주만 놓여 있습니다. 이는 유월절 어린양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강조하기 위한 배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 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고 빵은 양의 고기를, 포도주는 문설주에 발라진 양의 피가 되어 우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성찬, 온 마음과 온 몸에 되새기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

 

최근 교계 여기저기에서 예전적인 성찬식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예전과 성찬을 구교의 폐습으로 여겼던 교회가 변해가는 모습이 반갑기도 하지만 이것이 유행처럼 지나가거나 영적 허영이나 또 다른 형식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연회의 한 행사에서 열린 성찬에 참석하신 한 분이 빵을 받을 때 오른 손과 왼손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성찬 집례목사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고 뒷줄로 다시 돌아갔다며 뭐가 잘못된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잘못된 것은 그 목사님이며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머무는 마음으로 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찬은 형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기억하는 성찬으로 인해 유월절 전통의 율법적 형식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성찬이 또 다른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모든 행위를 통해 우리를 살리신 예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씻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나누고 쉬는 행위를 통해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성찬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와 함께 했던 아름답고 소중했던 기억들을 소환하여 정성스레 되새기는 것이 성찬입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유월절 성찬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최후의 만찬, 첫 성찬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담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Einer unter euch wird mich verraten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합창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몹시 근심하는 목소리로 주여 나는 아니지요(Herr, bin ich's?)?’라고 예수께 묻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자리 한쪽 벽에 그려 있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림 속에서 제자들의 합창 소리가 들러오는 듯합니다.

 

 

 

 

자기의 일인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예수께 묻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자들의 자리에 있다 한들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리 위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하기에 이리 저리 흔들리느라 자기가 무슨 일을 할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여 몹시 근심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적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예수께 고백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코랄에 참된 신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센스 있는 지휘자라면 제자들의 합창이 끝난 뒤 긴 텀을 두지 않고 바로 코랄을 시작할 것입니다. 첫 시간에 코랄은 주님의 수난의 장면을 바라보는 극 밖의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코멘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아니지요?’라고 떠들어 대는 제자들을 본 신자들은 제자들에 대한 답답함과, 예수에 대한 애련함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차올랐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코랄을 통해 갑자기 터져 나오듯 표출되는 것이지요.

 

참된 신자라면 이 코랄의 가사처럼 주님을 판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라고 고백 할 수 있어야 합니다. ‘bin ich es/나는 아니지요?’ ‘Ich bin es/나 입니다!’로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고작해야 단어 위치 하나 바뀌는 쉬운 일 같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요하고 주입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며, 말로 그렇게 고백했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과 십자를 깨닫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죄인 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존재의 근원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죄 없는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한 마디 변명 없이 다 받으셨건만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명백한 죄마저 부인하고, 잘못을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만큼은 하지 않으려했는데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하는데, 말 하지 않으려했으면 끝까지 안하면 된다.” “마지막 말은 하지마라! 안고 살아라! 주님을 통해 풀어라! 그게 신앙인이다

 

세상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발뺌을 하고 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진정 회개하고 시인하는 것이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죄에 따른 징벌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죄 값을 대신 지신 예수님과 자비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척, 거룩한 척 하지 마십시오. 진짜로 십자가의 은혜를 믿으신다면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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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수난곡 No. 9 가룟 유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9)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9 가룟 유다

 

오늘 만나게 될 장면은 마태수난곡 111~12번 곡으로 마태복음 26:14~16에서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넘기기로 한 장면입니다. 내러티브와 가룟 유다의 대사 그리고 마태 수난곡의 유명한 독창곡 중의 하나인 소프라노의 아리아 ‘Blute nur/피투성이가 되는구나가 이어집니다.

 

 

마태수난곡 111, 12

마태복음 26:14~1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4. Da ging hin der Zwölfen einer, mit Namen Judas Isharioth, zu den Hohenpriestern und sprach: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대사

유다

15.Was wollt ihr mir geben? Ich will ihn euch verraten.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5.Und sie boten ihm dreißig Silberlinge. Und von dem an suchte er Gelegenheit, daß er ihn verriete.

15.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코멘트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

Ach, 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

Droht den Pfleger zu ermorden,

Denn es ist zur Schlange worde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사랑했던 주님의 마음이여!

! 당신이 키우시고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그 양육자를 죽이려 하다니

그 아이가 뱀이 된 것입니다.

 

유다는 악인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운 매우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열 두 제자의 하나였고 스승을 배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배신은 십자가 구원의 길을 위한 길의 연결고리가 되었지요. 그는 이토록 야릇한 운명을 지고 있습니다. 그는 뱀과 비견되는 배신자, 돈 때문에 예수를 판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는 타고난 악마였을까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였다

 

우리 모두 익숙한 관점을 내려놓고 다시금 유다를 만나봅시다. 제게 유다를 향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마태수난곡이었습니다. 오늘의 장면 중 유다의 배신 후에 이어지는 알토 아리아에서는 유다를 일컬어 당신이 젖 먹여 키운 아이/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EBS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모든 개의 문제들이 개들의 타고난 성향 때문이 아니라 주인과 주변 환경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누군가가 정말 밉고 미울 때, ‘그래, 이 사람도 한 때 아이였었지! 티 없이 맑았던, 존재 자체로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던, 사랑 받았던 누군가의 아이였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마태 수난곡은 유다를 아이/das Kind’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 한마디가 저로 하여금 가룟 유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습니다.

 

가룟 유다, 그는 한때 나름의 부푼 꿈을 안고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돈을 벌거나 출세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면 예수를 따르는 것 말고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역시 한 때 아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소프라노 아리아의 가사처럼 그 역시 예수의 사랑하는 아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나름의 부푼 이상을 품고 예수를 따랐을 것입니다. 돈 관리를 맡았을 정도로 그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스승을 배신하고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돈을 던져 버리고 자살했습니다. 예수를 배신하는 것이나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자살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무언가 꼬인 것입니다. 무언가 그의 생각과 달리 흘러 버렸던 것입니다. 한 아이 유다! 그는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갑자기 그가 측은해 집니다.

  

유다,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

 

한 마디로 유다는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이었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머리가 좋아 계산과 판단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비열하다는 것은 단순한 욕지거리가 아닙니다. 계산하고 판단하되 자신의 이익과 이용가치에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개인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공동체인 교회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했지 자신이 그 공동체의 일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수긍했기에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옆에서 예수의 기적을 수 없이 목도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왜 예수를 팔았을까요? 그는 똑똑했기에 스스로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그의 길에 대해서 이만하며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유다가 보기에 스승 예수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기적의 능력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교회를 이루고 예루살렘을 접수하고 자기 이름도 높아지면 좋겠는데 스승은 계속하여 낮은 곳의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세상의 지혜와 계산에 서투르기만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만은 아닌듯합니다. 유다를 대할 때, 너무 은 삼십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돈을 남긴 것은 기회가 될 때마다 돈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다는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돈을 돌려주려 합니다. 조심스런 상상이지만, 어쩌면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예수가 자기 앞에서 행했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바램을 이루기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 빠르고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뒤틀어져버렸습니다. 예수는 잡혀가는 순간부터 무력했고 도살장의 어린 양 같이 잠잠했습니다.

 

 

우리 모습 속의 유다

 

이만하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들의 교회 안에 흔히 있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유다는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들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끝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하지 않으면, 예수를 이용해 교회를 키우고 유명해 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의 유다가 고개를 들고 우리도 모르게 말과 행동과 삶으로 또다시 예수를 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몸입니다. 교회를 파는 자는 예수를 파는 자입니다. 교회를 파는 자가 바로 유다입니다. 목사가 되고 후회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평신도 시절에는 잘 몰랐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법한, 교단과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듣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인맥과 돈으로 교회를 사고파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중개업자처럼 교회를 소개하고 소개비를 받는 목사들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대부분 계산이 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벌입니다. 그리고 절대 스스로를 비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교회건 교인이건 신앙이건 예수건 간에 자신의 이익과 이용가치에 따라 값을 매기고 사고파는 비열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될지언정 스스로를 절대로 교회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철저한 개인들입니다.

 

예수를 판 유다나 예수의 몸 된 교회를 파는 자들이나 제가 보기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 시절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지금 모든 것이 뒤틀려 버렸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죄를 전가할 좋은 재료로 그토록 유다를, 아니 스스로의 그림자를 저주하고 있는 그들이 더욱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예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유다입니다. 그런 욕망, 그런 모습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예수를 바라 봐야합니다.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나중에는 예수를 배신했습니다. 예수를 외면하여 도망치거나 그를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금 예수를 바라보고 돌아왔습니다. 죄에 있어서는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대신 제물이 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차이였습니다. 이어지는 곡을 만나게 되면 우리 주님이 그런 우리 모두를 안타까워하시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주님의 마음이여

 

이어지는 유명한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사랑했던 주님의 마음이여!’는 유다의 모습과 유다를 향한 예수의 마음을 바라보는 소프라노의 코멘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난 번역들은 대부분 이 곡의 가사를 유다를 향한 피의 징벌로 해석하는데 이는 크나큰 오해입니다. 아마 이 아리아가 유다의 배신 장면 다음에 이어지기 때문에 /Blut’라는 단어의 강렬함이 그런 해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오역은 우리의 본성이 사랑과 용서보다는 분노와 복수에 더 가깝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제대로 해석된 가사는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본성과 달리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유다에 대한 분노와 저주는 여기에 없습니다. 이 피는 예수의 피 입니다. 유다가 흘렸어야 할 피를 예수께서 대신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자살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용서와 사랑을 믿지 못하여 거부하고 스스로 징벌한 것입니다. 이 아리아는 사랑하는 아이의 배신과 그의 타락을 슬퍼하며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으로 연결됩니다. 이 아리아의 도입부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뿐만 아니라 절뚝절뚝 피를 흘려가며 외롭게 십자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을 연상케 합니다. 플롯과 바이올린의 스타카토는 흘러내리는 피의 열기와 끈적끈적함까지 표현 하고 있으며 저음에서 들리는 묵직한 현의 소리는 십자가의 무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악보1).

 

 

악보 1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의 도입 부분. 플롯과 바이올린의 스타카토는 피투성이의 모습을, 비올라의 묵직한 선율은 십자가의 무게를 표현한다.

 

 

  가사가 바뀌어 ‘Ach, 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 당신이 키우시고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라고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반주의 분위기도 완전히 바뀝니다. 모든 현 파트는 사라지고 통주저음과 플롯만이 남아 푸른 언덕을 거니는 듯 아이의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던 그 시절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 중간 중간에 현악이 끼어들어 피투성이의 테마를 이어갑니다(악보2). 마지막으로, 다카포 형식인 이 아리아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피투성이가 된 주님의 마음과 몸을 노래 한 후 마무리됩니다. 처음과 똑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만 피투성이 주님의 마음과 몸은 이런 음성으로 들려옵니다. “그래도 너는 내 아이며,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악보 2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의 두 번째 주제. 풀루트와 소프라노와 통주저음만이 어우러져 주 님의 아이의 모습을 노래하지만 셋째 마디에서 현악 파트가 끼어들어 피투성이 테마를 연주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였고 주님의 품에서 자란 주님의 아이입니다. 한 때 우리는 순수한 삶과 순수한 신앙과 순수한 교회와 순수한 목회를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유다를 정죄하고 때때로 자신 안에 꿈틀대고 있는 유다의 모습에 몸서리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유다를 저주하고 우리 안의 유다를 미워하며 정죄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변함없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절망한 자리 바로 옆에 주님의 사랑이 놓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절과 2절을 보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과 유다의 배신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 어떤 문학적 표현 보다 강렬한 대비가 이렇게 무심한 듯 가장 가까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그리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 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복음 13:1-2)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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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수난곡 No. 8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7)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8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칸더와 바흐는 이 부분에 알토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그 여인의 마음을 남깁니다. 알토 솔로의 서창은 코멘트 역할을 하고 있고 이어지는 아리아는 ‘기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시인과 작곡가가 이루어낸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콜라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레치타티보의 첫 부분 가사를 통해 예수와의 ‘Ich und du’의 관계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이 레치타티보 가사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부디 나에게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이 가사를 처음 본 순간 저는 완전 무방비상태에서 충격을 받고 왈칵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딱딱할 줄로만 알았던 바흐의 교회음악에 이토록 깊은 감성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격적이고 감성적이고 표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과 예수의 사랑의 관계를 몰랐기에 이 여인의 행위를 물질적으로만 해석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제자들처럼 여인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이니 뭐니 하면서 이 여인이 깨뜨린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지 않았던가요? 아니면 은근히 헌금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여인의 이야기를 사용하지 않았던가요? 이 여인의 향유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발단된 회개가 마음을 찢을 때 흘러내린 진심어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뿌려 준 향유였고, 자신을 친구로 대해 주었던 단 한 사람 예수를 위해 모든 계산을 뛰어 넘어 내어준 사랑의 보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준 그 분의 사랑의 향기로 남기에 합당한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That’s why


문득,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 한 자락이 떠오릅니다. ‘You gave me Love’라는 곡으로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라는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미국의 팝 가수 B. J. Thomas의 곡입니다. 대중적 인기의 허무함을 느낀 그가 예수를 친구로 만난 은혜를 노래한 곡이지요. 이 베다니 여인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You gave me time when no one gave me time of day

당신은 내게 시간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무도 내게 시간을 주지 않을 때에


You looked deep inside while the rest of the world looked away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외면했을 때에


You smiled at me when there were just frowns everywhere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모든 이가 나를 행해 얼굴을 찡그릴 때에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That's why I call You Saviour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 call You Friend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You touched my heart

당신은 내 마음을 만지셨고


You touched my soul

당신은 내 영혼을 만지셨습니다


And helped me start all over again

그리곤 내가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셨죠


That's why I love You, Jesus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ll always care

그것이 바로 내가 항상 간직하는 이유입니다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플롯이 흘리는 눈물방울 소리


이어지는 아리아는 두 대의 플롯이 시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흐는 왜 이 아리아에서 플롯을 사용했을까요? 그 비밀은 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아리아의 가사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6번

6

기도

알토

아리아

Buß und Reu

Knirscht das Sündenherz entzwei,

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

Treuer Jesu, dir gebären.

참회와 후회의 마음이

죄지은 이 마음을 짓이기고 찢을 때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

오 신실하신 예수여, 당신께 드립니다.


그 날, 베다니 시몬의 집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전주가 흐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과 거룩함이 혼재된 그 방의 공기가 아리아의 전주에 스며있는 듯합니다. 노래 중간 부분에서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라고 노래하는 부분의 기악파트를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의 놀라운 영감에 바흐가 더 놀라운 음악적 영감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두 대의 플롯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향유와 여인의 눈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마태수난곡 악보에는 이 페이지 위편에 ‘아, 지고한 아름다움이여!’라는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알토아리아 악보 중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하는 부분. 맨 위 스타카토로 표현된 부분이 플롯 파트임.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이 부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태수난곡을 재생시켜야 할 음악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노래의 멜로디가 아름답기 때문에 텍스트와의 조화를 생각하지 못하고 이 곡을 매우 빠른 템포로 끌고 갑니다. 성악가 입장에서도 이곡은 빠른 템포가 노래하기 좋습니다. 그러나 이 곡의 핵심은 눈물방울이 한 방울 씩 떨어지는 플롯 파트입니다. 예수와 이 여인만이 알고 있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함과 그 여인의 진지함과 아름다운 사랑의 동작에 압도되어 얼어 버린 제자들이 만들어 낸 적막 속에서 귀한 향유가, 회개의 눈물이 예수의 머리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똑 똑 떨어집니다. 이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템포를 매우 늦게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것은 칼리히터의 58년 음반뿐입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이며 영적 메신저였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리는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노래는 원전연주로서 이 곡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연주입니다. 원전 연주에서는 바흐시대의 전통을 따라 여성 알토 대신 남성 카운터 테너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아래에 링크한 칼 리히터의 58년 음반과 비교해서 들어보시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https://youtu.be/y5Xuc_Q4IW4 (안드레아스 숄이 노래하는 ‘Buß und Reu’)

https://youtu.be/8y6x1wj0bxM (칼리히터의 58년 음반, 17분27초에 시작)


첫 목회지에서 헌금 봉투를 만들어야 했을 때 마태수난곡의 이 구절을 빌렸습니다. 재생지로 만든 봉투였는데 그 앞면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 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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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7 예수를 위한 대명사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7 예수를 위한 대명사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 부터 2018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년 뒤에 끝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매 년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 순례를 계속해서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몇몇 분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조용히 따라 걸으며 마태수난곡을 묵상하려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 올해에는 다소 갑작스레 평화교회연구소의 요청으로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40일간의 영적순례’라는 작은 사순절 묵상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마태수난곡 전 곡을 QR코드를 통해 들으며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나누는 것만큼의 이야기를 이 작은 묵상집에 다 담을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의 전 곡을 만나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순례를 위한 작은 가이드북으로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순례의 길로


그럼, 계속해서 순례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될 곡은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오늘은 이에 대한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만나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설명 드렸듯이 마태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며 오늘의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부르는 성부는 알토입니다.


알토의 목소리


여성 목소리의 저성부인 알토는 모성과 슬픔과 공감과 눈물을 상징합니다. 일반적인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에서 소프라노가 여성성과 기쁨과 사랑과 미소를 상징하고 테너가 열정을, 베이스가 남성다움과 진중함을 표한 것처럼 마태수난곡에서도 각 성부의 음색은 고유한 표현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녀에 대해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인지 비슷한 별개의 사건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7장 37절은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좀 더 상세하게 그녀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회적 약자로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인의 장면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알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화자를 이 베다니 여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수난곡에서의 각 성부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감성적 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가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5번

5

코멘트

레치타티보

알토

Du lieber Heiland du,

Wenn deine Jünger töricht streiten,

Daß dieses fromme Weib

Mit Salben deinen Leib

Zum Grabe will bereiten,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사랑하는 구주여

당신의 제자들은 어리석게도

이 고귀한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당신 몸의 장례를 준비한 것을 막았지만

부디 제게는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방울들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du’의 시적의미와 관계적 의미


레치타티보의 시작 부분에서 노래하는 이는 예수를 ‘Du lieber Heiland du/사랑하는 구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와 예수가 이미 구원을 통한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문자적인 우리말로는 이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습니다만 독일어 가사에는 ‘너/당신’에 해당하는 의미인 ‘du'가 두 번 반복됩니다. 이는 시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먼저, 시적인 면에서 화자는 ‘du’를 두 번 강조하여 표현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구원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예수뿐이라는 표현이지요.


관계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예수를 대명사 ‘du’를 사용하여 칭했다는 것이 의미가 깊습니다. 영어에서는 2인칭 대명사가 ‘you’하나 뿐이지만 독일어에서는 우리말의 ‘너’와 ‘당신’의 차이처럼 2인칭 대명사로 ‘du/두’와 경어 ‘Sie/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노래 알토의 코멘트에서는 예수님께 경어체인 ‘Sie’ 대신 ‘du’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풍경입니다. 하지만 ‘du’라고 해서 우리말과 같은 반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du’는 친근함의 표현, 관계가 맺어진 사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du'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와 그로 인한 경직성은 엄격한 존댓말 때문에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위에 상관없이 서로를 닉네임이나 영어이름으로 편안하게 부르면서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맥락이 아님에도 예수라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지 않았다며 시비를 거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높이기 위한 그 분들의 신앙과 정성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럴 때면 굳이 그분들을 설득하거나 항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뒤에 무조건 ‘님’을 붙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예수와의 친밀함의 관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실재로 ‘님’자에 집착하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권위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님’자에 대한 집착이 단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기독교의 가장 특별하고도 경탄스러운 부분은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신과 대결을 하든, 불교처럼 자기 수행을 통해서든, 무속신앙처럼 무엇을 바치거나 간절한 기도를 하든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노력 없이, 오직 은혜로 신이 인간을 향에 먼저 내려온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과 인간이 이토록 가깝게 연결된 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놀라운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십자가의 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 배신, 홀로됨, 인간으로서 인간이 받아야할 극도의 고난을 주님께서는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헨리 나우엔의 표현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친구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여러분과 공통분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 공통분모를 통한 공감이 우정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부사이 보다 더 비밀이 없는 관계가 친구사이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신 이유도,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부활하신 이유도 우리에게로 내려 오사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고 본디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기독교는 원래 이처럼 세상의 생각을 뒤집어 하나님의 뜻을 펼쳐내는 품격 있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 18:17)과 모세(출 33:11)를 친구처럼 대하셨듯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와 친구 되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


시편 25편 14절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유진피터슨은 이 구절을 ‘God-friendship is for God-worshipers’ 라고 읽었습니다. ‘프렌드쉽/friendship’은 말 그대로 ‘우정’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서상 ‘하나님과의 우정이 그를 예배하는 사람에게 있음이여‘라고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어 이름으로는 상사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데 한국 이름에는 그 뒤에 직함과 ‘님’자를 꼭 붙여야 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프랜드쉽’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도무지 깨닫기 힘들어하는 이 관계를 우리는 알고 체험해야합니다.


마르틴 부버는 그 유명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짧은 책을 통해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와 ‘나와 너/ich und du’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부버는 ’만남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이야기했지요.


부버의 방식으로 생각 해 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예수를 만났고 그 만남과 이어지는 만남의 연속을 통해 그와 ’나와 너/ich un du'의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시작에서 ‘Du lieber Heiland du’라고 ‘du’를 두 번 강조하여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님’이라는 글자에 집착하다보면 예수와의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신’과 ‘하찮은 피조물’과의 관계인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베다니 여인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이 곡의 다음 장면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부를 때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끝까지 예수를 ‘du'로 만나지 못했고 ‘es'로 대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잘못은 여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와 어떤 관계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만남이고 관계입니다.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위한 ‘es'입니까? 아니면 아직 친밀함의 관계에 이르지 못한 ‘Sie’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du’로 만나고 그렇게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조건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친밀함의 관계를 맺어 나가야합니다. 'es'도 아니고 ‘Sie'도 아닌 ’du'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사실, 그 만남은 예수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성육신 사건과 그 분의 말씀과 삶, 그리고 죽음의 과정까지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와 ‘ich und du'의 관계를 맺기 위한 선제적인 다가오심이었습니다. 이 수난곡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친구, ‘du’로 만나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앞서 우정에 관해 말씀드렸듯이 당신과의 친밀함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기 위해 예수는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고귀한 여인/fromme Weib’


이 레치타티보에서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은 노래하는 이가 이 여인을 ‘고귀한 여인/fromme Weib’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은 이 여인을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수난곡에서는 ‘고귀한 여인’이 되어 있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을 고귀한 여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기독교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는 예수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만나 그것을 ‘프렌드쉽/friendship’이라 하건 ‘우정’이라 하건 ‘친밀함’이라 하건 간에 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어떤 비밀도 서로 없는 대화를 나누고 공감대를 나누는 가운데 현실로 펼쳐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거하는 상태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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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수난곡 No.6 거룩한 낭비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5)


BWV 244 Matthäus-Passion/

마태 수난곡 No.6 거룩한 낭비


장면이 바뀌고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 열립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이를 보고 분개합니다.


폴 틸리히는 이 여인의 행동을 일컬어 ‘거룩한 낭비(a holy waste)’라 하였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계산에 있어서는 합리적이었고 상황에 있어서는 분석적이었습니다. 좀 멀찍이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제자들의 모습은 현대인들이 표준으로 삼고 있는 상식적이고 균형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교회가 과도하게 기적을 구한다고 비판 받지만 솔직히 기적 없는 종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적,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희생입니다. 십자가가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기적이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희생의 기적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몰상식이 믿음으로 포장되고 육신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의 노력 없는 획득이 기적으로 취급받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런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은 미덕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의 타락에 열을 올리고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을 내세우는 가운데 어쩌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가장 아름다운 기적, 가장 위대한 기적인 ‘거룩한 낭비’ 즉 ‘희생’을 잃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균형 있다고 생각하며 비판하기 좋아하는 신앙인들의 실루엣을 봅니다.



마태수난곡 1부 6번~8번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 Da nun Jesus war zu Bethanien, im Hause Simonis, des Aussätzigen, 7. trat zu ihm ein Weib, das hatte ein Glas mit köstlichem Wasser, und goß es auf sein Haupt, da er zu Tische saß. 8. Da das seine Jünger sahen, wurden sie unwillig und sprachen: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7

대 사

제자들

8. Wozu dient dieser Unrat! 9. Dieses Wasser hätte mögen teuer verkauft und den Armen gegeben werden.

8.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8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0. Da das Jesus merkete, sprach er zu ihnen: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8

대사

예수

10. Was bekümmert ihr das Weib! Sie hat ein gut Werk an mir getan. 11. Ihr habet allezeit Armen bei euch, mich aber habt ihr nicht allezeit. 12. Daß sie dies Wasser hat auf meinen Leib gegossen, hat sie getan, daß man mich begraben wird..13. Wahrlich ,ich sage euch: Wo dies Evangelium geprediget wird in der ganzen Welt, da wird man auch sagen zu ihrem Gedächtnis, was sie getan hat.

10.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함께 들어보실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제자들의 대사를 담고 있는 합창곡인 7번곡입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가사인데 마태 수난곡에 쓰인 1545년 루터 성경은 제자들의 대사를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개혁의 선상에 있었던 루터가 이 부분에 감정이입을 과하게 한 것 같습니다.

‘Wozu dient dieser Unrat!’은 번역하면 ‘이 쓰레기를 이제 어디다 쓴단 말인가?’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귀한 향유는 소비된 순간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하는 말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돈으로 환산하는 그들의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 향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향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이 이야기가 기억되는 곳에서 여전히 그 향기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볼 때 바흐는 매우 기발한 방법으로 이 부분을 표현합니다. 먼저 앞서 언급한 Wozu dient dieser Unrat!’라는 가사의 합창은 에반겔리스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한꺼번에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이는 제자들의 흥분되고 분개하는 감정을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대사 ‘Dieses Wasser hätte mögen teuer verkauft und den Armen gegeben werden /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는 한 파트씩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는데 마치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의 1막에서 사람들이 주인공을 조롱하는 장면처럼 ‘이것(향유)’을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이 부분을 부드럽게 넘기지만 칼 리히터는 그의 음반에서 바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이 부분을 한 음 한 음 끊어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삿대질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의 대사가 나옵니다. 26장 10절부터 13절입니다. 두 번째 등장이긴 하지만 첫 번째 대사(2절)가 너무 짧았기에 예수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마태수난곡 음반을 선택할 때 지휘자와 에반겔리스트 그리고 예수역할을 누가 부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칼 리히터의 첫 음반의 아쉬움을 굳이 꼽으라면 예수역할을 들 수 있겠습니다. 성악가의 역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만으로 따지면 칼 리히터 음반에서 예수를 노래한 키스 엥겐(Kieth Engen)이 가장 뛰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에는 키스 엥겐의 노래는 너무 무겁게 들리고 고난 받는 어린 양 예수가 아니라 완벽한 예수를 그려 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녹음 당시의 보편적인 예수상이 반영되었고 원전연주로 녹음한 다른 음반과 달리 반음 더 높게 불러야 했기에 더 부담스럽게 들린 면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입니다. 청년 예수는 저음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일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아버지의 뜻 앞에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가 감당해야할 십자가의 잔 앞에서 흔들리는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레온하르트 1989년 음반에서 막스 반 에그몬트(Max Van Egmond)는 가장 이상적인 예수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에서도 키스 엥겐의 예수는 덩치가 크고 남성다운 완벽한 모습의 예수께서 제자들을 혼내는 목소리로 들립니다. 반면 반 에그몬트의 노래는 여인의 정성과 희생에 감동하는 마음과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떨림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뒤섞인 청년 예수의 목소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zhzNL7LBkQc



저만의 상상이긴 하지만 가끔 마태 수난곡 녹음의 드림팀을 구성해보곤 합니다. 칼 리히터가 원전 연주로 지휘를 하고 에반겔리스트는 프레가르디엔과 헤플리거 사이에서 잠시 고민한 후에 헤플리거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예수 역할은 당연히 막스 반 에그몬트이며 소프라노는 바바라라는 이름의 두 명의 성악가를 다 부르고 싶습니다. 바바라 슐릭과 바바라 보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Erbarme dich mein Gott’은 캐슬린 페리어의 목소리여만 합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마태 수난곡과 함께 복된 사순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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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수난곡 No. 5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5)


BWV 244 Matthäus-Passion

마태 수난곡 No. 5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장대한 코랄 판타지아 합창이 끝나면 잠시 적막이 흐른 후 예수 수난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감상하실 부분은 마태 수난곡 2번부터 5번곡이며 이에 해당하는 마태복음 본문은 26장 1절부터 5절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라는 예수의 말씀에 반응하는 코멘트,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코랄입니다.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오, 사랑의 예수시여…

대체 무슨 죄를,

어떤 잘못을 범하셨단 말입니까?’


장면이 바뀌고 가야바의 관정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는 모습은 합창으로 표현됩니다.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성경에서 ‘민란’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Aufruhr’인데 ‘격동, 혼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의 대사를 표현하는 여기저기에서 떠들어 대는 듯한 합창을 들어보면 정작 혼란스럽고 소요하는 것은 바로 예수를 죽이려 하는 그들의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2번~5번

내러티브

EVANGELIST

1. Da Jesus diese Rede vollendet hatte, sprach er zu seinen Jüngern: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 사

JESUS

2. Ihr wisset, daß nach zween Tagen Ostern wird, und des Menschen Sohn wird überantwortet werden, daß er gekreuziget werde.

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코멘트

CHORAL

Herzliebster Jesu, was hast du verbrochen,

Daß man ein solch scharf Urteil hat gesprochen! Was ist die Schuld, in was für Missetaten bist du geraten!

오, 사랑의 예수시여 당신이 무슨 죄를 지셨기에 그토록 엄한 판결을 받으시나이까? 대체 무슨 죄를, 어떤 잘못을 범하셨단 말입니까?

내러티브

EVANGELIST

3. Da versammleten sich die Hohenpriester und Schriftgelehrten und die Ältesten im Volk in den Palast des Hohenpriesters, der da hieß Kaiphas. 4. Und hielten Rat, wie sie Jesum mit Listen griffen und töteten. 5. Sie sprachen aber: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아전에 모여 4.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대 사

CHOR

5. Ja nicht auf das Fest, auf daß nicht ein Aufruhr werde im Volk.

5.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서곡의 역할을 하는 코랄 판타지아에 이어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것은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에반겔리스트의 가사는 루터판 독일어 성경 마태복음 본문의 내러티브의 가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실 복음서를 성경으로 읽을 때 우리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 부분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보석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하나로 연결하는 줄이기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복음서의 내러티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과 같은 예수 어록의 형태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하나의 이야기로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내러티브의 역할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26장 이후는 단편적인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극적인 전개가 시간 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내러티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쩌면 복음서가 예수 어록의 형태에서 오늘날의 내러티브와 대사로 구성된 복음서로 발전하게 된 것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라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수난-십자가-부활이라는 드라마틱하고 긴박한 이야기를 전하자니 내러티브가 필요했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위해 복음서 전체에 내러티브가 삽입되었다고 말입니다. 실재적으로 복음서의 초기 형태인 도마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내러티브의 역할은 복음서 자체에서 보다 마태 수난곡에서 조금 더 부각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마태 수난곡은 우리의 판소리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판소리의 구성요소가 창(소리) 아니리(사설, 말) 발림(혹은 너름새, 몸짓)인데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는 이 중 아니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요. 판소리를 실재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리 듯이 수난곡 연주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역할이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에반겔리스트를 위한 테너, 에른스트 헤플리거

판소리의 아니리에 해당하는 에반겔리스트 역할은 선율적인 아름다움은 없지만 곡의 시종을 이끌어야 하며 너무 감정에 몰입되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거나 가창에만 신경 써서도 안 되는 역할입니다. 노래하기도 매우 까다롭고 가사를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적 전달자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테너가수 한 명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이 중요한 부분을 전부 다 감당해야 한다니 에반겔리스트의 중요성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수난곡에서는 지휘자도 중요하지만 에반겔리스트가 누구인가에 따라 전체적인 곡 해석과 분위기 그리고 몰입도가 달라집니다.


일전에 설명 드린 대로 칼 리히터는 1958년, 1971년, 그리고 1979년 총 세 번에 거쳐서 마태 수난곡 음반을 남겼는데 첫 번째로 녹음된 1958년 음반이 가장 명연주로 손꼽히는 이유는 전쟁 직후라는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에반겔리스트를 노래한 에른스트 헤플리거 때문입니다.


헤플리거의 노래에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영성과 떨림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그의 에반겔리스트는 오래된 어머니의 성경책으로 성경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에른스트 헤플리거(Ernst Haefliger ,1919~2007)는 스위스 테너입니다. 그는 저에게 성악가는 소리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음사이의 여백을 느끼며 심지어 침묵으로도 노래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해 준 진정한 예술가이며 리트와 오라토리오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정통한 대가입니다. 그의 노래에는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테너인 슈라이어나 분덜리히처럼 영롱한 음색은 아니지만 좋은 발성에서 나오는 풍부함과 자연이 만들어 낸 듯 엷은 스크래치가 서려있는 음색은 깊은 영성과 떨림 그리고 애잔함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음악적 해석은 매우 뛰어납니다. 그가 부르는 슈만의 ‘Der Nussbaum Op 25 N3(호두나무)’을 가사와 함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https://youtu.be/E2KBpTbJxtU


그가 부르는 리트(독일가곡)를 듣노라면 이것이 시를 읊는 것인지 노래를 하는 것인지 혼동될 정도로 진정 시와 음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예술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스위스인이지만 그의 노래는 역사상 누구보다 가장 독일적인 테너의 연주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덕목인 자연주의, 꾸밈없는 소박함, 경건함, 진실함이 그의 노래에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데뷔 무대는 바흐의 요한수난곡의 에반겔리스트였는데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서인지 헤플리거는 평생에 걸쳐서 바흐 음악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56년 마태수난곡 녹음을 진행하던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인 귄터 라민이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토마스 칸토르라는 직책은 바흐의 적통 후계자로서 지휘는 물론이고 여러 악기와 작곡에도 정통해야 하는 개신교 음악가에 있어서 최고의 명예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 프로젝트에 에반겔리스트로 참여했던 에른스트 헤플리거는 귄터 라민의 후계자로 칼 리히터를 꼽았고 비록 칼 리히터는 장고 끝에 뮌헨에서의 교수직과 자신이 만든 합창단을 위해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마태수난곡 녹음 프로젝트는 승계하여 결국 58년 음반이라는 명반을 낳게 된 것입니다. 결국 58년 음반은 그 프로젝트를 완성해 내고 최고의 에반겔리스트로 참여한 헤플리거에게 숨은 공로가 있습니다.


헤플리거 노래의 명장면들

헤플리거 노래의 진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리히터음반 58년 녹음의 겟세마네 장면을 들어보셔야 합니다. ‘Da kam Jesus mit ihnen zu einem Hofe, der hieß Gethsemane, und sprach zu seinen Jüngern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라고 부탁하신 후 에반겔리스트는 ‘Und nahm zu sich Petrum und die zween Söhne Zebedäi,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Da sprach Jesus zu ihnen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라고 노래합니다.


이 부분에서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 고민하고 슬퍼하시기 시작하사’ 를 주목해 들어 보십시오. 물론 그렇게 작곡한 바흐에게 일차적인 찬사가 돌아가야 할 것이지만 헤플리거가 부르는 ‘고민하다’이라는 의미의 ‘trauern'과 ’슬퍼하다‘라는 의미의 ’zagen'이라는 단어에는 주님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합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 구신형용’에 버금가는 성악 예술의 백미가 바로 이 부분에 담겨 있습니다.https://youtu.be/3icLbxogeV4 (49분47초에 시작)


헤플리거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더불어 음악을 위해 자기 자신마저 내려놓을 줄 아는 성악가입니다. 성악가로서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있지요. 앞서 제가 그의 노래에는 여백이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관객을 바라보며 자기의 목소리로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해야만 하고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소리로 채워야 하는 성악가에게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 그리고 여백을 느끼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어느 새 극과 음악마저 넘어 성경 속으로 들어 가 버리곤 합니다. 이 장면에 관한 수많은 설교를 듣고 겟세마네의 기도를 담은 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58년 녹음의 이 부분만큼의 감동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테너 솔로의 ‘기도’와 합창의 ‘코멘트’로 이루어진 ‘O Schmerz! Hier zittert das gequälte Herz! ...Ich will bei meinem Jesu wachen’은 마태수난곡에서 가장 극적으로 아름다운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또 하나, 헤플리거의 노래에서 도무지 빼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미리 소개드립니다. 바로 동일한 음반에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장면입니다.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 /그리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 이 부분을 헤플리거와 같이 표현할 수 있는 테너가 과연 또 다시 있을까요? 베드로의 찢어지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 ’바로 앞에 나옵니다. 즉 이 유명한 알토 아리아는 베드로의 통곡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선율이 너무나도 애달프고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이어서 알토가 ‘주여 나의 눈물을 보아서라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바이올린 선율과 교차하며 노래합니다. 알토 성악가 헤르타 퇴퍼 (Hertha Töpper) 의 노래도 흠잡을 데 없지만 바이올린의 연주도 일품입니다. 우리의 죄를 눈물로 다 토해 내고 주님의 사랑으로 정화되는 느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곡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바이올린 솔로 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하고 독창회의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마태수난곡의 일부로서 베드로의 통곡에 이어지는 ‘기도’로서 이 노래를 들을 때 가장 감동이 됩니다. https://youtu.be/qP3RF6KrzII (38분 40초에 시작)


때로 마태 수난곡의 에반겔리스트가 옛 시절 변사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사의 톤을 잠시 빌려서 말씀드리자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노래와 이야기’가 바로 58년 음반의 헤플리거의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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