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으로 사색의 원을 그리며

신동숙의 글밭(25)

 

찻잔으로 사색의 원을 그리며

 

예쁜 찻잔을 보면, 순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먼저 마음으로 가만히 비추어 봅니다. 찻잔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사색의 원을 천천히 그려보는 것입니다.

 

나 하나가 가짐으로 인해 지구 한 켠 누구 하나는 못 가질세라. 희귀하거나 특별한 재료보다는 주위에 흔한 흙이나 나무 등 자연물로 만든 찻잔인가.

 

나 혼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집에 오는 손님이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내놓을 수 있는 평등한 찻잔인가. 간혹 놀러온 어린 아이에게도 건넬 수 있는, 설령 깨어진대도 아까워하거나 괘념치 않을 마음을 낼 수 있는가.

 

만약에 깨어진대도,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 후손에게 쓰레기를 남기지 않을 자연물의 찻잔인가. 이렇게 찻잔 하나로 사색과 묵상의 둥근 그림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찻잔을 만든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단지 돈과 생산만이 유일한 상위 목적이 되어 만든 것은 아닌지. 누군가에게 애써 잘 보이기 위해 기교를 부려 억지스레 만든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 찻잔에는 그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어 그 파장은 알든 모르든 사용하는 이의 마음에까지 어딘지 불순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흙과 찻잔이 좋아서 즐겁고도 무심한 듯 평온한 순간의 마음으로 빚은 것이라면, 사용하는 마음에도 알든 모르든 좋은 파장이 전해져 평화로운 마음이겠다 싶은 것입니다. 이어서 찻잔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서 선을 그려봅니다. 잔잔한 마음으로. 마음에 비추어 보고 또 비추어 보는 무심한 일.

 

이런 사색과 묵상이 좀 별스럽고, 쓸데없는 짓이라 탓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이런 사색이 제게는 습관이 되버렸기도 하지만, 경험상 손해보다는 유익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내면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러한 사색과 묵상의 힘은 때때로 일상 생활과 일터에서 창의력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누군가는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은 느리고 퇴행적이고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사색과 묵상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바쁜데, 할 일도 많은데, 그럴 시간에 청소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 뭔가 눈에 보이는 일로 소중한 일상을 채우는 게 더 낫지 않나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런 시간 밖에 시간, 사색과 묵상으로 깊어지는 시간은 그대로 기도와 예배로 이어집니다.

 

비로소 마음을 내는 일, 마음을 주는 일이 되니까요. 어쩌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만나는 길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재미보다는 의미를 찾는 일. 내면을 의미로 채우는 일은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일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재미는 덤으로 따라올 테지요. 이런 시시해 보이는 사색과 묵상을 즐기게 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영 먼나라의 얘기는 아닐 테지요.

 

이렇게 찻잔으로 사색의 원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찻잔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스르르 저절로 내려놓게 됩니다. 그러고도 꼭 필요하다면 사야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음으로 인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따뜻하고 잔잔한 평온함이 제겐 더 소중하니까요.

 

소유하지 않음으로 잠시 마음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여백이 있습니다. 그 빈 가슴에 시원한 바람 한줄기 무심히 지나고, 따뜻한 햇살 한줄기 은혜비처럼 내리면 마음은 괜히 따뜻하고 즐거워 혼자서도 실실 실없는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발길에 흔한 마른 강아지풀이 귀엽고, 겨울날 새벽아침 출근길에 하얀 서리가 보석보다 반짝이는 모습이 생생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소소한 감사가 되고, 소박하고 행복한 노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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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

  • 흔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고 처음인듯 감탄하는 시선, 그런 눈이 있어서 오늘도 세상은 넉넉히 아름답습니다.

    신동숙 2019.12.07 13:4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4)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희끗희끗 뭔가 허공에 날리는 것이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눈이었다. 작은 눈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눈이 오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보는 눈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는데 생각하니 마침 절기로 ‘대설’, 자연의 어김없는 걸음이 감탄스러웠다.

 

 

 

 

잠시 서서 눈을 감상하고 있을 때 담장 저쪽 끝에서 참새 몇 마리가 날아오른다. 언제라도 참새들의 날갯짓과 재잘거림은 경쾌하다. 참새들의 날갯짓과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하는 눈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맞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이처럼 가벼운 것들이다. 대설과 눈, 눈가루와 참새,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어울려 세상은 넉넉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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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그릇에 손가락 담그기

신동숙의 글밭(24)

 

개밥그릇에 손가락 담그기

 

식구들이 진돗개 새끼 한 마리를 데려와 키우자고 했을 때 결사 반대를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에게 강아지는 오롯이 꼼짝 못하는 갓난아기를 돌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던 어느날 집에 오니 아들이 드디어 자기한테도 동생이 생겼다며 신이 나서 눈까지 반짝인다. 성은 김 씨고 이름도 지었단다. 김복순. 진돗개 강아지 한 마리. 품 안에 쏙 안기는 강아지를 아들과 딸은 틈나는 대로 안아 주고, 밥도 챙기고, 똥도 치우고, 주말이면 강변길로 오솔길로 떠나는 산책이 즐거운 가족 소풍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서너 달이 못갔다. 하루가 다르게 덩치가 커지는 복순이. 일년이 채 안되어 복순이의 덩치는 아들만큼 커진 것이다. 똥도 엄청나다. 한 학년씩 올라간 아이들은 집으로 오는 시간도 늦어졌다. 예상했던 일들이 하나 둘 현실로 일어나고. 개밥을 주는 일도, 똥을 치우는 일도 나와 친정엄마의 숙제가 된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하루도 빠질 수 없는. 한 생명 살리기.

 

문제는 겨울이 되고부터 고민이 생겼다. 늘 마당에 묶여 있어야 하는 복순이. 개집에 안 입는 옷가지를 깔아 주면, 복순이는 도로 물고 나온다. 왜 그런지 나는 아직도 몰라서 답답하다. 밤새 비라도 내리는 날엔 기어이 축축하게 만들어 놓고는 그러길 수차례. 춥든가 말든가 포기를 했다가 또다시 헌옷가지를 새로 깔아준다.

 

 

 

 

묶여 있는 짐승에게 겨울나기란 어떤 경험일까? 털이 있어서 추위를 덜 타는지. 요즘 나에겐 숙제다. 찬물을 주다가 12월이 되면서 온수를 타서 따뜻하게 온도를 맞춰 개밥과 흰밥을 섞어 말아주고 있다. 혹시나 혀라도 데일까 봐, 싫지만 개밥그릇에 손가락을 살째기 담근다. 따뜻한 정도로 바로 먹기 좋게 온도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2년 동안 나는 복순이를 안아준 적이 없다. 매정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동물의 몸이 영 어색한 것이다. 기껏 큰 맘 먹고 쓰다듬어 주는 정도. 그렇다고 미워하지는 않는다. 개가 싫어하는 짓을 안할 뿐. 동물보다는 식물이 좋은 것이다. 나무가 좋고 꽃이 좋고 달과 별이 그저 좋은 것이다.

 

처음엔 사람만 보면 좋아서 펄쩍거리며 덤비듯 앞발을 들던 복순이를 똑똑하다고 인정하게 된 것은 집에 온지 몇 달이 지난 후였다. 밥을 주려고 다가가면, 여지없이 앞발을 세워 안기려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는데, 그러기를 수차례 어느샌가 복순이가 얌전히 앉아서 밥을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복순이에게 마음이 열린 것도 그 일이 있고부터다. 복순이도 점점 내가 싫어하는 짓은 안하는 것이다. 마치 내 마음 안다는 듯한 그 순한 눈으로.

 

나는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복순이 눈을 쳐다보며 인사를 하곤 한다. 그러면 복순이는 그 순한 눈으로 슬쩍 나를 봤다가 눈두덩이를 찡긋거리다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곤 한다. "복순아, 갔다올께", "복순아, 잘 있었어?", 겨울이 되고부터 하나 더 늘어난 인사말, "복순아, 안 추워?". 먼저 말이 없으니, 먼저 물어볼 수밖에.

 

하나님이 개를 만드실 때, 야생의 개가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개는 겨울이라도 물을 끓여 먹진 못했으리라. 그러니 짐승에겐 찬물이 자연스런 마실 물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얼마 전까지도 찬물만 줬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편칠 못했던 것은. 옛날 어른들이 소죽을 끓여줬다는 얘기가 있지않던가. 한겨울에도 마당에 묶여서 추운 개한테 찬물을 줘도 되는지 고민은 이어지고 깊어지고.

 

그러다가 한 생각에 가닿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에덴동산에서 살 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후, 추운 겨울이 생기게 된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짐승은 사람으로인해 겪지 않아도 될 혹한의 겨울을 겪게 된 건 아닌가 하고.

 

그렇담 털이 있는 복순이라도 나처럼 추위를 오롯이 느낄 것이기에, 개밥을 데워 줘야 하는 게 맞는 것이다. 사람으로인해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면. 그것도 우리집처럼 목줄에 묶인 채로 어쩔 수 없이. 복순이에게 밥을 주면서도 늘 미안한 마음이 강물처럼 내 마음 밑바닥으로 흐르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오늘 저녁에도 싫지만 개밥그릇에 손가락을 담근다. 너무 뜨겁거나 차지 않도록. 혀로 먼저 감지하는 복순이가 혹시나 피치 못해 약간이라도 뜨거워 혀끝이라도 데이면 말 못하는 짐승이 밤새 추운 마당에서 영문도 모르고 혀까지 얼얼해선 안될 테니까.

 

말 못하는 짐승, 말 못하는 갓난아기, 표현 못하는 아이들.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의 이야기들이 나는 신경이 쓰인다. 말이라도 할 줄 알면 그대로만 해주면 될 텐데, 관심을 기울이고 살피고 또 살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겨울 나무가 그렇고, 들에 꽃이 그렇고, 밤하늘 먼 별이 그렇다. 어째서 자연은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곁에 말없이 한결같이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말없이 선하고 아름다운 생명들, 게중엔 여린 생명 앞에선 더 마음이 작아져 내려앉는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사랑만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그 좁은 마음길을 따라서 오늘도 살째기 한 걸음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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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니겠지요?

  • 설마가 사람 잡죠.!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06 14:01
  • 맞아요,
    사람을 잡는 것 중에는 설마도 있지 싶답니다.

    한희철 2019.12.06 18:3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3)

 

저는 아니겠지요?

 

녹은 쇠에서 나와 쇠를 삼킨다. 눈물겨운 사랑도 눈물겨운 배신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어느 것보다도 고맙고 아프다.


십자가를 앞둔 최후의 만찬자리, 음식을 먹던 중에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주님이 말씀하시던 중 ‘진실로’라 하면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듯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진실로’를 다른 성경은 ‘진정으로’(새번역), ‘분명히’(공동번역)로 옮겼다.
 

 

 


나를 파는 자가 너희 중의 하나라는 말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나는 아닙니다.” 하지 못하고, “저는 아니겠지요?” 했던 데서 제자들의 당혹감과 두려움이 읽힌다. 그들은 돌아가며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유다 차례가 되었을 때 유다는 어떻게 했을까? 유다도 다른 제자들처럼 같은 말을 했을까?


예수님으로부터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다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무도 모르게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고, 예수를 넘겨주기로 거래했고 흥정했다. 모를 줄 알았다. 아무도 모르게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는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지 않는가?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말을 유다도 했다면 그의 목소리는 어땠을까? 사시나무 떨 듯 떨었을까? 들릴락 말락 기어들어가는 개미 목소리였을까?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처럼 드는 생각이 있다. 그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자신 있게 그 말을 했을 것이다. 목소리도 컸고, 당당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는 더욱 더!

오늘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한다.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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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씨 한 알

신동숙의 글밭(23)/시밥 한 그릇


풀씨 한 알

  

발길에 폴폴 날리우는
작고 여린 풀씨 한 알

 

풀섶에 이는 잔바람에도
홀로 좋아서 춤을 추는
하늘 더불어 춤을 추는
작고 여린 풀씨 한 알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갈 줄만 알아
그 어디든 발길 닿는 곳
제 살아갈 한 평생 집인 줄을 알아

 

작고 둥근 머리를 누이며
평온히 눈을 감는다

 

 

 

 

 

땅 속으로
사색의 뿌리를 내리며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작은 생명들의 소리 들으려

 

가만히 귀를 대고
가난한 마음이 더듬으며
사람들 무심히 오가는 발길 아래로
고요히 기도의 뿌리를 내린다

 

발아래 피어날 푸르른 풀잎
그 맑고 푸르른 노랫 소리 들으려
겨울밤 홀로 깊어지는
풀씨 한 알

 

(2019.1.9. 詩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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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 반을 마중 나가는 '반보기'라는 말이 정겹습니다.
    어릴 적 제 평소 걸음걸이가 새 날 듯이였답니다 ㅎ
    심지어는 내리막길에서도...

    신동숙 2019.12.05 13:49
    • 내리막길을 새날 듯이 가다가는 넘어지기 십상이었을 텐데요.
      그래도 활달한 모습이 선합니다.

      한희철 2019.12.05 19:41 DEL
  • 감사합니다. 좋은 속담 담아갑니다.

    이진구 2019.12.05 15:26
    • 의미 있는 속담이다 싶습니다.

      한희철 2019.12.05 19:42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2)

 

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대림절을 시작하는 주일, 우리 속담 하나를 소개했다. ‘친정 길은 참대 갈대 엇벤 길도 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간다’는 속담이었다. 참대와 갈대가 있는 곳을 지나면 신을 제대로 신어도 발이 베이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친정을 찾아갈 때는 발이야 베든 말든 신을 벗어들고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간다는 것이다. 친정을 찾아가는 집난이(시집간 딸)의 기쁨이 마치 숨결까지 묻어나는 듯 고스란히 전해진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신을 벗어들고 갈까? 길이 멀 터이니 당연히 신을 신고 가야  하고, 참대 갈대가 있는 길이라면 더욱 더 신을 단단히 신어야 하는 법, 그런데도 왜 신을 벗고 간다고 했을까?

우선 드는 생각은 맨발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걸음 아니었을까 싶다. 급한 마음에 자꾸 벗겨지는 신을 신고 가느니 단숨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는 누가 뭐라 하든 맨발이 어울릴 것이다.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신을 아꼈다가 친정집 가까운 곳에서 신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모처럼 친정을 찾는 딸의 신이 다 닳거나 헤진 것을 보면 친정 부모님과 형제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친정집을 찾는 딸의 마음으로 퍼뜩 지나가는 생각 중에는 그런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 적어도 우리가 반을 마중 나가는 ‘반보기’를 하자고, 주님을 맞으러 가는 우리의 걸음이 참대 갈대 엇벤 길도 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가는 집난이의 걸음이 되자고 했다. 귀한 분이 먼 길을 찾아오시는데 가만히 자리에 앉아 편하게 맞는 것은 영 도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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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가까이, 마음에 가까이'

신동숙의 글밭(22)/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자연에 가까이, 마음에 가까이

 

하루를 보낸 후 내 방으로 들어옵니다. 가만히 돌아보고 둘러보는 시간. 정리되지 않은 일들, 사람과의 관계들이 때론 무심한 들풀처럼 그려집니다. 참지 못한 순간, 넉넉치 못한 마음, 후회스러운 마음은 하루의 그림자입니다.

 

무심한 들풀 사이에도 소소한 즐거움이 들꽃처럼 환하게 미소를 띄기도 하고요. 이런 저런 순간들이 모여 색색깔 조각보의 모자이크처럼 하루를 채우고 있답니다. 낮 동안에도 잠시 잠깐 틈나는 대로 차 안이나 어디서든 홀로 적적한 시간을 갖지만, 밤이 드리우는 고요함에 비할 수는 없답니다.

 

우선 천장의 조명을 끕니다. 그래도 간간히 책을 읽고, 글도 쓰려면 책상 위 작은 스텐드 조명은 켜둡니다. 종지만한 유리 찻잔 안에 티라이트 양초를 넣고 심지에 불을 붙입니다. 쑥병차 한 개를 찻잔에 넣고서 쪼로록 뜨거운 물을 가득 부우면 찻잎이 빙그르르 춤을 춥니다.

 

그윽한 쑥향이 피어오르면 어수선하던 가슴에 한줄기 아득한 그리움이 흘러 물길을 냅니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거칠던 숨결이 가지런해지고요. 또다시 마음이 순간 어수선해지려 들면 작은 촛불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비좁던 가슴 한 켠이 조금씩 여백으로 차오르는 것입니다.

 

어둔 방, 촛불 하나와 쑥차 한 잔으로 따뜻하고 고요한 시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내 곁에는 마음에 맞는 좋은 책이 있답니다. 제게 좋은 책이란 고독과 묵상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익어간 마음과 삶이 담긴 책입니다.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지만, 차 안이나 혼자 있을 땐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음악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바람과 숲과 별의 소리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작곡가와 연주자의 내면에서 무르익은 자연의 소리. 클래식 음악과 고전 속에는 언제나 자연과 마음이 담겨 유유히 흐르고 있기에 제 마음도 따라서 깊이 흐르곤 한답니다.

 

 

 

한밤 중 홀로 이렇게 적적하게나마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행복한 마음이 차오릅니다. 자동차와 불야성의 소음들로부터 외떨어진 덕분에 제가 사는 작은 마을엔 그러한 소음이 없는 것에도 감사하고요. 도심에서 한발짝 물러난 작은 마을이 때론 섬처럼 고립된 쓸쓸함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제 내면에 흐르는 여린 소리는 자연에 가까이, 마음에 가까이입니다.

 

어느 처사님이 법정 스님에게 여쭈었다고 합니다. 세상엔 넘쳐 나는 정보와 지혜로운 길도 많은데, 그 속에서 잘 살아가려면, 사람이 나이가 들어 후회를 적게 하려면 어떻게 살면 되나요?

 

섣불리 씨앗을 뿌린 젊은 날의 기도와 꿈이 나중에 때가 되어 이루어졌을 때, 조화로운 삶 속에서 그 이루어진 꿈을 관망했을 때, 만족스러울 수 있다면 정말로 다행이지만, 이게 아닌데! 라는 후회가 밀려든다면 그만큼 안타까운 경우도 없을 테니까요.

 

그에 대한 법정스님의 답변은 '자연에 가까이, 마음에 가까이'. 저 역시 하루에도 수차례 마음이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아차! 싶은 순간들을 맞이하면서도 촛불의 심지처럼 간직하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말입니다. '자연에 가까이, 마음에 가까이'. 저는 법정스님의 마음에서 예수의 마음을 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 옛날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인 줄만 알았던 구약 시대의 그들에게 예수는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마음으로 범하면 범하는 것이라며, 예수의 손끝이 끊임없이 가리키는 곳은 마음이었기에. 자연과 진리의 말씀은 그 마음, 본향으로 잘 찾아오너라고 주신 마음의 지도가 될 테지요.

 

오늘도 촛불 하나, 차 한 잔, 좋은 책 한 권이 주는 변함없는 선물은 마음에 평온과 감사와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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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생각

  •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보통 먹을 것이나 다른 것을 쟁여 놓지 않나요? 가난한 이들에게서도 그때는 향유가 필요했었나요?

    이진구 2019.12.04 09:52
  • 어머니께 받은 것이라면,
    어머니는 또 당신의 어머니께 받은 것이라면,
    더없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한희철 2019.12.05 06:33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1)

 

어리석은 생각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일을 두고 예수님은 ‘좋은 일’이라고 한다. 노동자 1년 치 품삯에 해당할 만큼 값비싼 향유, 제자들의 불만처럼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가난한 자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품었던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여인을 책망하는 제자들의 입장에 동조를 하실 것 같은데, 그 일을 ‘좋은 일’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뜻밖이다. 주님의 말씀은 이어진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님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과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신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어느 때나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일은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진 때가 있어, 그 때를 놓치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은, 그런 점에서 어리석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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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하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자유로운 영혼

  • 어떠한 경우에든 나를 지켜주는 것은 사랑이다~♡ 가슴에 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한길 2019.12.04 01:42
    • 늘 사랑일 수 있기를요. 감사드립니다.

      신동숙 2019.12.05 22:39 DEL

신동숙의 글밭(21)/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순환하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자유로운 영혼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자연 곳곳에서 보이는 모든 움직임은 순환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펄럭이는 돛, 흐르는 시내, 흔들리는 나무, 표류하는 바람, 이런 것들에서 우리는 건강과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나무 그늘에서 건강하게 뛰놀고 장난치는 것만큼 더 품위 있고 신성한 건강과 자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의심 따위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이 이를 알고 있었더라면 대리석이나 다이아몬드로 성전 따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고, 성전 건축은 신성 모독 중의 신성 모독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낙원을 영원히 잃지 않았을 것이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 192쪽) 
 

고전을 읽다 보면 이렇게 종종 보석 같은 명문장을 발견한 기쁨에 가슴이 뛴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인 '자유'를 두고, 과연 나 자신이 소로우만큼 천진난만하게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난 소로우. 그는 183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합니다. 학점에는 무관심했으나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한 소로우. 그는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숲 속에서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며 밭을 일구고 자유롭게 여가를 즐깁니다. 독서와 산책과 명상과 일기를 쓰며, 숲 속 생활을 자발적으로 꾸려나간 구도자. 200여 년 전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그로 인하여 미국의 의식이 100년은 앞당겨졌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답니다.

 

 

 

 

 

소로우에게는 시인, 시인박물학자, 초절주의 사상가라는 칭호가 따릅니다. 직업으로는 지구별을 거니는 '산책가'로 불려지기를 그 자신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소로우의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 한가운데 있어서 그에게 산책이란 자연 속을 거닐면서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으로 충만한 호젓한 시간이 됩니다.

 

고독과 자연과 사색에서 길어올린 그의 사유의 깊이와 영성이 주는 울림은 지금 현재도 저에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숲입니다.

 

'소로가 고요하게 자연과 교제를 나누는 시간,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로 "주의 영"이 자신을 축복하는 시간을 서술하고 있는 일기들이 훨씬 더 신선하고 상쾌할 것이다.'(같은 책 28쪽)

 

*'파릇파릇 강둑 아래서 헤엄치는 송어처럼 맑은 생각에 잠기길 원했다.'(같은 책 359쪽)

 

*'정오가 조금 지나자 하늘이 맑아진다. 산책을 나간다. 한 열흘 가까이 무척 가볍고 물기 없는 눈만 내린다. 막 해가 나서 눈으로 덮인 숲을 환하게 비춘다. 멀리 떡갈나무 숲이 장엄하다. 온천지가 맑고 꿋꿋한 겨울의 얼굴을 달고 있다. 눈 덮인 소나무들이 의연하게 서 있다.'(같은 책 362쪽)

 

나무와 숲, 물 속 송사리, 흙에 묻힌 인디언의 화살촉을 발견한그의 시선은 어린아이와 시인의 시선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매 순간 처음 발견한 듯한 기쁨으로.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은 그의 일기장에서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기도의 편지를 봅니다. 소로우의 일기는 에머슨의 권유로 대학을 나온 직후부터 거의 죽는 날까지 이어집니다.

 

저는 소로우로부터 자연과 최고의 지성과 그 너머의 영성과 태초의 인간을 봅니다. 톨스토이가 극찬을 하고,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소로우. 법정스님이 돌아가시기까지 애장하셨던 소로우의 [월든]은 저에게도 보물책이랍니다. 소로우의 일기를 읽다 보면, 곳곳에서 법정스님의 삶과 사유의 모습과도 겹쳐져 빙그레 웃음 짓기도 하고요. 좋아하면 닮아간다는 이치를 시대를 달리한 두 선구자의 저서를 통해서 그대로 보게 되는 즐거움을 누린답니다.

 

소로우와 법정스님,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한 삶'을 인생의 지향점에 두었던 두 선각자들. 그 이유에 대해서 소로우는 생전에 썼던 39권의 일기장에 낱낱히 기록해 두고 있답니다.

 

성경까지 가기 전에 소로우라는 고전의 거울에다 현 기독교와 종교인과 신앙인과 영성 생활인의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연과 예수로부터 멀리 떠나왔는가 하고요. 건물 성전과 소유에 묶인 부자유한 의식과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저 자신을 돌이켜, 자연과 예수와 고전의 맑고 청정한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봅니다. 내 마음 한치라도 더 가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를 지켜주는 근거는 바로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이에 근거해서 나를 만나라. 그러면 나도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정신에 의지하자." 그 점에서 나는 아주 긍정적인 사람이다. 이 점에서 나는 하느님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같은 책 190쪽)

 

한 인간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로우가 보여준, 그의 사랑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을 닮았습니다. 고독과 자연과 사색으로 무르익어간 그의 심연은 맑고 깊고 밝고 커다랗습니다. 넉넉히 나누고도 남을 자연만큼이나 넘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답니다.

 

지구별을 순례하는 저와 더불어 이 글을 읽으신 분들과도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연과 우리들의 소박한 일상 속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유로운 영혼이기를. 이 겨울에도 건강함으로 평온한 산책으로 매 순간 행복한 삶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라는 초대를 받는다."(같은 책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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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것이 없다면

  •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왔을 때,
    주님은 손주와 달리 울고 떼쓰지 않으시니..
    단지 손주와 주님의 공통점은 '사랑의 구심점'인 듯합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내면의 힘은
    결국은 처음부터 긑까지 '사랑'이네요.

    신동숙 2019.12.03 15:15
    • 사랑의 구심점,
      귀한 공통점입니다.

      한희철 2019.12.03 19:34 DEL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03 17:05
    •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12.03 19:35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0)

 

 달라진 것이 없다면

 

온유 지역이 부른 찬양은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였다. 대림절이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으로 다가왔다. 찬양을 들으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구는 손주를 중심으로 돈다는 말이 있다. 손주가 태어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마음도 달라지고, 생활의 우선순위도 달라지고, 집안의 서열도 달라진다. 집안 가구도 달라지고 얼굴표정도 달라진다. 늘 입이 귀에 걸린다. 기회만 되면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이다. 손주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일 때마다 만원씩을 내야 한다고 해도 십만 원을 선불로 낼 의향이 있다.

 

 

 


오랜만에 손주가 찾아와도 마찬가지다. 일정도 손주를 중심으로 짜고, 약속도 손주를 최우선으로 정한다. 음식점 앞에서건 장난감 가게 앞에서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온유’에 대한 덕담에 이어 짧게 이야기를 보탰다. 손주 한 명만 태어나도 세상이 달라지고, 손주가 찾아오면 집안이 달라지는데,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왔을 때 우리는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주께서 내 마음에 오셨는데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일까? 그런 고민들이었다. 조용한 시간에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찬송을 부르며 곰곰 생각해 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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