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길을 나서는 이들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9. 23. 08:03

한종호의 너른마당(64)


순례의 길을 나서는 이들

 

코로나에 길고 긴 장마와 태풍, 유례없었던 무더위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계절의 변화를 그 누구도 거스를 수는 법. 어느 누구도 태양을 바닷속으로 집어넣었다가 산 위로 꺼내 올릴 수 없다. 하늘의 별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다시 나오게 할 방법도 없다. 우주의 흐름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궤도를 정해놓으셨고, 그에 따라 인간의 삶도 그 변화의 흐름과 궤도, 그 길 위에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이미 있기도 하고 아직 없기도 하다. 기존의 궤도를 돌아 움직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아직 그 위에 서 보지 않아 길은 있으나 그 길이 아직 자신이 걸어갈 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길이지만, 그 길 위를 걷는 이에 따라 그 길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결국 도달해서 얻게 되는 종국적인 뜻이 같을지라도 그 여정의 내용과 과정은 사뭇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인간의 운명과 그 길은 이미 있는 것이지만, 그 길을 처음 가는 이에게는 이미 있으나 아직 없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무수히 오간 길도 그 길을 처음 밟는 이에게는 낯선 길이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오랜 옛날 그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의 영혼, 숨결, 그리고 인생과 역사를 만나게 된다. 그들이 겪었던 고뇌, 슬픔, 좌절과 갈망 그런 것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다. <순례>는 바로 그러한 여정을 우리에게 준비시킨다.

 

순례는 다만 성지를 다녀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뇌와 절망, 그리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의지의 꿈이 존재하는 곳이면 그 어디든 우리에게 순례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영성과 깨우침이 일어나면 그 순례는 성공적이 될 것이다. 그건 무언가를 찾아 나선 길이 결국 그 무언가를 찾았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바쁘게 뛰어가면서 살아가는 때에 순례는 그 속도가 너무 느리게 보인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세월에 이 숨차게 돌아가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모두가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때에, 긴 시간을 뚝 떼어내서 그 어디론가 순례의 길을 떠난다고 하면 그건 세월의 낭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낙오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모두가 실생활에 결국 도움이 되는 것을 구하는 때에, 그보다는 고답적이고 정신적이며 생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순례자의 삶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달리기만 했다가 그 여정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과 깨우쳐야 할 것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속도는 있지만 방향은 없고, 빠르기는 하지만 결국 도달할 곳에 도달하는 것은 아닌 기이한 인생의 모순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큰 맥락을 놓치고 살아가기에 자신의 삶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 인생사의 커다란 지도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가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아는 어리석음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이에 더하여, 현실의 삶이란 그 정신적 능력에 의해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세끼 밥 먹고 자기 욕심 채우고 살면 다 되는 줄로 아는 자기 삶의 품격을 스스로 저버리고 마는 지경에 빠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순례의 길로 떠나는 것은 사실 먼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도 하다. 사랑하는 남편이 갑자기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베트남 전쟁 최일선으로 떠나자 아내는 엉터리 위문단의 일원이 되어 가수로 베트남에 가게 된다. <님은 먼 곳에>라는 영화의 줄거리 대략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남편인 님을 김추자의 노래처럼 늦기 전에만나지만 그곳에서 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도 만나게 된다. 님은 먼 곳에 있으나 그녀의 순례는 그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떠남으로써 님과 자신 모두를 동시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순례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만난 자신을 만나는 그런 여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님은 먼 곳에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신의 가슴, 영혼, 삶 속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이 순례의 여정은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자기 안의 순례로 귀결된다. 길을 가면서 순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치해야 하고 자신과 긴장해야 하며 자신과 새롭게 조우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이루어나가게 된다.

 

사실 우리는 순례의 의미를 역사 속에서 갖지 못한 민족이다. 정신적 성지가 없는 민족의 모습을 여기서 보게 된다. 그건 우리에게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나라가 힘들고 사회가 어지럽고 정치가 파행을 겪을 때, 우리에게 순례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긴 호흡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미래를 예견하는 그런 정신적 순결의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당장의 이해에만 휘둘리는 그런 저열함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고 만다.

 

세상은 한없이 변하는 것 같지만 인간이 사는 본질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행복해하고 싶고 자유와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건 그저 오지 않는다. 정신적 성지를 향한 순례로 순결해지는 영성을 가진 개인과 사회가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그것이다. 빠르기만 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집중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적이기만 하면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깊고 깊은 영성의 힘이 솟구칠 때, 이 혼란의 시대를 뚫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가을바람이 불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의 머리 위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일 것이다. 숲은 춤추며 노래하고 강은 우리보다 앞서서 달려갈 것이다. 우리는 이미 길 떠난 자이며 아직 그곳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벌써부터 축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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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 그리고 성서의 시선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5. 20. 06:00

한종호의 너른마당(63)


2020,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 그리고 성서의 시선

 

우리에게 2020년은 한일합병과 식민지로서의 전락이 이루어졌던 1910년에서 110년이요, 한반도 분단의 결과인 19506·25 전쟁으로부터 70,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19604·19 혁명 60주년, 그리고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19805·18 민주항쟁 40주년이다.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이다.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전쟁 체제의 연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희생되었는가를 증언한다. 우리 역시 그런 극단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근현대사를 이어왔고, 21세기는 그런 극단의 시대를 초극할 수 있는 역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조명은 그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성찰하면서 그 교훈을 되씹어 미래의 자산으로 삼는가에 달려 있다. 성서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의 기반이 된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아주 오래 전 겪었던 역사의 고투를 두고두고 되돌아보면서 현실의 힘으로 삼는 것을 보여준다. 유랑과 추방, 망명과 노예적 삶, 탈출과 해방, 무수한 전쟁과 평화, 분단과 통일, 패망과 재건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성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읽도록 일깨운다. 함석헌 선생이 오래 전 뜻으로 본 조선 역사를 펴냈던 것도 우리의 과거를 그런 하나님의 시선으로 통찰하자는 의미였다.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유대 역사에서 유월절이 갖는 의미는 결정적이다. 이는 억압되어 있던 피압박 족속이 하나님의 해방 사건으로 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서는 길에 대해 신념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다. 달리 말해, 영구 혁명적 신앙의 반복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출애굽 사건은 역사와 믿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며, 그것은 현실을 감당하는 능력에 대한 갈망이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기도 하다.

 

성서는 사실 거듭해서 역사의 교훈, ,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걸 깨우치지 못하거나 망각한 자들의 비극과 패배를 또한 함께 조명하고 있다. 왕들의 역사는 이걸 각성했는가 아닌가로 판명되고 평가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과거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뜻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채 있다면 그건 어리석게도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 자가 된다. 역사는 그런 뜻에서 보자면, 과거라는 시간을 통해서 미래를 위해 개봉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껏 서구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독일 역사철학의 대가 헤겔은 서구의 역사만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아시아의 역사를 열등하게 보았다는 오류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역사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정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한 인물이다. 절대정신의 근본에는 자유가 있고, 이 자유가 어떤 역사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이루어나가는가를 본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절대정신 하나님의 실체와 그 뜻을 헤겔은 추적해나간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적 방법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나, 그에게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역사를 현상으로 기억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뜻으로 푼 것이다. 이는 역사철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성서의 역사관을 철학적 용어로 재정리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의 역사관도 그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헤겔적 풀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와 다른 것은 서구 중심의 사관이 아닌, 우리 자신의 내면을 존엄하게 바라보면서 다가갔다는데 있다.

 

헤겔이나 함석헌 선생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의 깊은 심연에 흐르는 보편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성서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나 현상을 그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본질적 차원의 깨우침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서는 역사이해와 역사철학적 시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의 근현대사

 

이러한 성서적 시선을 전제로 하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총괄적으로 보자면, 19세기 중후반 조선조는 봉건체제의 모순을 경험하면서 숱한 농민들의 봉기와 사상적 전환기를 맞이했고 이 과정에서 주체적인 근대화 전략이라는 선택을 밀고 나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의 중심에 인간에 대한 존엄한 권리의 존중이라는 생각보다는, 신분과 계급적 차별의 심화로 역사의 동력을 상실했고 이기적 기득권의 방어에 치우치면서 세계적 흐름에서 동떨어져나가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도 기회는 있었다.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등 시대의 모순을 뚫고 주체적 근대화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역동적인 시기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1853년 미국 페리호의 위협 아래 식민지로 전락할 상황을 결국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서 극복해내고 동아시아에서 근대전략의 수행에 일정하게 성공한다. 반면에 조선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질서에 복속된 채 시선을 밖으로 돌리지 못하고 만다. 역사의 거대한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는데, 조각배를 타고 샛강에서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세계사라는 맥락에서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이미 쌓아온 기득권, 그것도 사실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계속 움켜쥐려다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마주한 세계사의 대세는 조선을 황망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게 했으며, 그런 혼란의 와중에 일부는 저항하고 일부는 투항하면서 나라는 식민지의 늪에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조선의 20세기는 그렇게 해서 비탄과 비극으로 시작되었다.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는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시켰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쥐는 일에 보다 본격적인 능력을 얻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협력, 지원을 기초로 조선반도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1868년 명치유신 이후 40년 만에 이룬 일이었고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 성립이라는 자신감에 넘친 일본은 제국주의 체제로 질주했고 그 첫 희생자는 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조선의 근대사는 제국주의와의 접전이었으며, 이는 이후 조선 근대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했다. 식민지가 된 나라의 최대 과제는 당연히 독립이었고 그 독립투쟁의 대상은 그냥 일본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인식이 얼마나 철저한가에 따라 역사의 시대적 극복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히브리 민족에게 출애굽이 핵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따라서 이는 제국주의의 굴레와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제국주의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자 체제이며 이를 분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바인 것이다.

 

그러나 한일합병 110주년이 다가오는 때 이 나라는 반일, 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제국주의문제는 철저한 역사적 성찰의 내용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의 적대적 긴장은 우리와 일본 사이의 종족적 모순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만들어진 제국주의와 과거 식민지체제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역사적 투시는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 지배종식을 위한 역사의식이나 세계관은 성장할 사이가 없었고 그것은 강대국에 대한 의존, 종속, 굴복을 역사 속에서 체질화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바로 서는 것보다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는 것을 질타한다. 이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씀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부족한 결과로도 민족 분단에 대한 극복 의지는 견고하지 못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두 개로 갈라놓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남과 북 양 쪽에 분단정권을 세워 전쟁의 시작을 만들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남과 북에 각기 독자적인 분단정권이 성립하면 전쟁이 필연적이라며 이를 치열하게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은 북의 남침이 그 직접적인 시작이었으나 보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관리하고 해결하지 못한 결과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들 일본 제국주의 잔재 세력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움켜쥐고 유지하기 위해 분단정권 성립에 광분했으며 이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을 거의 모두 빨갱이로 몰아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 제국주의 청산이나 민족 분단의 극복을 위해 일어나야 할 남쪽의 민족적 역량은 결정적으로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은 전쟁의 끔찍한 비극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함을 아직도 낫지 않는 상처와 응어리로 남겨놓았다.

 

7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한국전쟁은 남과 북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내는데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당시 만들어진 휴전체제는 평화체제로 전환되고 있지 못하다. 전쟁이 한참인 때에는 휴전이 평화지만, 이 휴전이 길어지면서 그것은 전쟁을 다시 할 수 있는 역량의 비축기간이 되었고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대치를 결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평화는 성서의 근본사상인데, 한국전쟁 70주년은 그런 차원에서 생명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일깨우는 기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한국전쟁은 여전히 대북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에서는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것보다는 북한 붕괴론에 기여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패망했던 히브리 역사를 돌아봐도 민족분단과 상호 적대감의 지속이 얼마나 민족 전체에 비운을 가져다주는지 분명한데, 한국전쟁 70년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그 의미를 재정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604·19 혁명은 이러한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제국주의 잔재 청산의 실패가 축적한 민주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역사의 에너지였다. 이승만 독재는 제국주의 잔재 존속과 전쟁의 논리가 만들어낸 기득권 체제였고, 이로 인해 억압당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가난과 정치적 부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억압 등 당대의 현실은 민중 전체에게 숨 막히는 사태의 연속이었다. 쌓이고 쌓인 불만과 모순의 심화는 결국 발화지점을 만들어냈고 4·19 혁명은 그 발화의 현장이 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 논란에서 이승만 체제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려는 세력이 있는데 이는 4·19혁명으로 극복하려 한 역사의 과제를 모멸하는 것이며 역사의 역주행을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러한 역주행은 곧바로 이어졌다. 19615·16 군사쿠데타는 정치적 혼란, 경제적 빈곤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독자적 근대화 전략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에서는 고강도의 억압과 역사의 후퇴를 가져왔다. 4·19 혁명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로써 사라졌고, 군사 쿠데타 주역이 일본 관동군 소속의 친일분자였다는 점에서도 역사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게 이어진 역사의 퇴행적 전개는 18년간 이 나라를 괴롭히다가 무너져 내렸고 새로운 역사의 공간이 열렸다고 기대했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군사주의 세력의 반격으로 19805월 광주는 피로 물들게 된다. 80년 광주의 역사적 경험은, 이 나라가 여전히 분단, 지역주의, 빨갱이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걸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역사의 발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광주의 5월이 벌써 40년이라니 세월의 흐름도 무상할 따름이나, 문제는 이 사건의 의미가 우리 대중 전체의 역사의식에 분명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는 광주지역의 문제라는 식의 시선이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이를 전국적 차원의 고뇌와 역사인식의 성찰적 단계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수준의 지점에 놓여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는 셈이다.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는 역사를

 

하지만 이런 역사의 단계가 다 비관적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암울했던 식민지의 역사도 막을 내렸고,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고 남과 북의 평화체제 성립을 위한 노력도 그간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의 문제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내려는 의지 역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 나라에서 다시는 군사주의자들이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시대는 불가능하도록 하는 역사의 기반도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진화해왔고 발전해왔다. 중요한 단계 하나하나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역사가 가야 할 길에 대하여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경험을 우리의 역사적 혈관 속에 기억하고 살아온 것이다. 이제 실로, 지난 110년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을 힘차게 펼쳐야 할 때가 왔다. 나라는 자주해야 하며, 정치는 민주주의가 바로 서야 하고 민족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제 국민의 의지를 거스르는 친일세력은 붕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의 격동 그 밑바닥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 쉬고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의 무수한 격랑 속에서 하늘의 뜻을 믿고 자신을 던져 희생한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음도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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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의 영원한 친구 김장환 목사

  • 천국에서 볼수 있을런지 모르겠네

    2020.06.22 18:29

한종호의 너른마당(62)

 

권력자의 영원한 친구 김장환 목사

"그를 만나면 권력이 보인다"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극동방송 사장일 뿐만 아니라,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이었던 김장환 목사의 성장기는 흥밋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의 화마(火魔) 속에서 헤매고 있던 가난한 나라의 한 소년이 당시에는 꿈꾸기 어려웠던 미국에 건너가 중·고등학교와 신학대학원까지 마치고 돌아와 이제는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큰 것은 실로 입지전적인 이야기이다. 아무런 신앙적 배경도 없던 소년이, 이역(異域)에서 난관을 뚫고 실력을 쌓아 고국에 돌아온 후 영적 사역에 힘쓰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간증이 된다.

 

이와 함께 그가 오늘날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교계 지도자로서 굳건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목사 김장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전기 <김장환 목사 이야기-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출판 기념식에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운집한 것도 김장환 목사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영향력이 막대한 개신교 목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랑이요,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현실에서 소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과 위상이 과연 우리 사회를 위해서 바람직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김장환 목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개인적 성장사에 담겨 있는 고난과 노력 그리고 이후 그가 괄목할 만한 지위를 가지고 여러 일을 해온 것은 결코 가볍게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의 삶과 그의 가치관과 그의 행적, 그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의 성격은 이 나라 이 사회의 불의한 기득권과 깊이 얽혀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중대한 질문이 된다. 

출세지향적 처세관으로 일관한 인생

 

 

침례교세계연맹의 총회장이 될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그 대단함이 담고 있는 진정한 내용을 보자면 우리는 그의 인생 전체에 걸쳐 일관된 출세지향적 처세관과 이를 이루기 위한 '야망의 열정'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한 역사관에 투철한 자세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언제나 힘이 있는 곳에 그의 자리를 정하며, 그러한 일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권력자와의 교분을 통해 그가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는 과정은 뒤집어보자면 그 권력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희생을 치르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연결된다. 그의 전기 <김장환 목사 이야기-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를 읽어보면, 역사의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이라든가 이 땅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한 아픔과 관련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그에게 관심 밖의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이 겪고 있는 불의와 고난의 현실에서, 그는 다소 신랄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골프가 싱글인 목사요, 권력자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유명세를 누리는 상류층 인사일 따름이다. 세상은 상류층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지만 목사는 상류층에 속하는 순간부터 낮은 자리의 섬김과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그가 우리에게 있어서 귀감의 모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가 가난한 나라의 소년으로 전쟁의 과정에서 미군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목회 현장에 자신의 삶을 투신한 것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교회와 방송국을 키우고, 선교 영역을 계속 확대해온 것에 대해 역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보였던 그의 삶과 행적이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기울어 역사의 정의를 외면하고 백성들의 고난과는 거리가 있는 방향으로 치달아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그가 오늘날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기본 성격, 특히 권력자들과의 연결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유념해서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의 목사로서의 정치사회적 위상은 그가 살아온 삶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절, 미국 순회하며 반한 여론 잠재우는데 앞장

 

그의 책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특별히 자서전 출판기념회 서평을 맡아주신 존경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20년 전 우리의 5월은 바로 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된 폭력으로 온 나라가 깊은 질고를 겪었으며, 그로써 역사의 진전은 가로막혔다. 또한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 나라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잃었고, 막강한 폭력 체제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은 좌절되었다. 그런 현실에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던 김장환 목사가 권력자가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여 움직였던 행적은 그의 오늘이 누리는 사회적 영광의 배경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불의한 권력의 죄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위로하며 용기와 희망을 북돋게 하는 대신, 그 권력과 친밀한 것을 과시하는 목사에게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기는 그가 '각계각층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서 당사자인 김장환 목사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전도 대상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얼핏 옳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데 김장환 목사는 전도 대상인 권력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과의 친분 쌓기에 주력하는 전도 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결코 전도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권력자의 벗이 되려는 출세지향적 자세이며, 그로써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는 야망의 표출 외에 다름 아니다.

 

각계각층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는 것이 전도가 되려면, 불의한 정치사회 지도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삭개오처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자들의 불의를 불의로 인식하게 하는 대신, 자신에 대한 이들의 인정을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삼는 일에 골몰했다.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시절, 미주 전역을 순회하면서 당시 이른바 반한(反韓) 여론을 잠재우는 일을 맡는다. 이때의 반한 여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박정희 독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반한 여론 잠재우기란 결국 박정희 독재 체제에 대한 옹호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여 당시 박정희 정부의 관리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김영광 전 의원은 "이들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대통령 특사'나 다름없었다"라고 한다. 당시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나 박정희 정권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사람들의 저항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을 때, 김장환 목사는 불의한 권력자의 편에 서서 폭력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실로 역사의 정의라든가, 폭력과 독선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선함과 평화에 대한 신앙적 신념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5월 폭력'에도 침묵으로 방관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교분은 그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서 차장보로 있을 때 예배에 참석한 후였다는 것이다.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5월의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과의 만남을 가진다. 그의 책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월 초 신록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김장환 목사의 인계동 집 정원에서 전두환 위원장은 실로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보안사 요원들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어 바깥 분위기는 긴장이 감돌았지만 식사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이때가 어떤 때인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로에 서 있고, 군부의 폭력이 역사를 짓밟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정권이 끝나자 이제 새로운 독재자로 등장한 전두환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김장환 목사가 가진 화기애애한 시간에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이 나라 백성들은 피를 묻힌 군홧발에 숨죽여야 했다는 사실을 그가 오늘날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5월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김 목사에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김 목사는 군목을 광주로 내려보내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군목과 광주 현지에 내려가 현장의 소리를 듣고도 그는 전두환에게 이를 직접 알리지 않고 군목에게 떠넘긴다. 폭력 진압을 중지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그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광주 현장이 "한마디로 무법천지였어요"라는 식으로 규정될 뿐이었다. 불의한 권력자의 폭력에 대해 침묵했던 것이다. 

 

"어떻게 대처할까요" 하는 권력자의 물음에 침묵한 것은, 그가 그의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과 다름이 없고 따라서 그는 전두환 체제 성립에 협력한 셈이었다. 그가 이후 전두환 체제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정치 활동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정권 당시 수원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면서, 시애틀 총영사로 있던 죽마고우 안세훈을 대신 천거한다. 전두환 폭력 체제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죽마고우를 활용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권력 교체기인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를 옹호하는 선거관련 강연을 하고 다닌다. 그는 대선 후보의 자격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미국 우방이 믿어주는 후보, 둘째로 군대가 믿어주는 후보, 셋째로 북한이 무서워하는 후보, 넷째로 가정이 건전한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요." 여기서 우리는 그의 국가관이나 역사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김장환 목사는 이 나라의 대권이 미국이 신뢰하고 인정하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얼마나 사대친미적 식민지 근성을 가진 인물인가를 자인하고 있다. 이 나라 대통령이 되어야 할 사람의 제1 조건은 이 나라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여야지, 어찌해서 미국이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김장환 목사가 얼마나 미국에 대한 정치적 사대근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의 생각과 신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대적하는 삶…청산할 구시대의 유산

 

또한 그는 군부의 정치적 개입을 공식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군대가 믿어주는 후보란 군부가 지원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군부독재 체제를 청산해야 할 시대적 과제는 그에게 아랑곳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가 건강한 민주적 시민의식과는 완전히 거리가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 아니라 북한에 대해 적대적 공포를 주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냉전 체제의 존속을 바라는 자세를 보였다. 결국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체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었고, 미국의 지배와 냉전시대의 유지 그리고 군부의 통치에 복종하는 사회를 갈망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의와 평화, 선한 다스림과는 전면으로 대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짓밟고, 나라의 자존은 생각도 아니하며 대국에 머리를 굽히는 자를 지도자로 내세워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김장환 목사가 누려왔던 불의한 기득권을 지켜줄 사람과 질서,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첫째 역사의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바칠 사람, 둘째 백성들의 고난과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면서 섬김의 헌신을 할 사람, 셋째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나라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 넷째 가정의 물질적·영적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등을 내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장환 목사에게는 미국의 관심과 군부의 관심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나라 백성들의 고난과 절박한 현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그가 이 나라 교계의 지도자연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불행이며 수치이다. 그는 우리에게 귀감의 모델이 아니라, 극복의 모델이며 구시대의 유산으로 청산해야 할 유형인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사렛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하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고 질타하셨다. 김장환 목사가 불의한 권력자들과 상류층의 교분을 맺으면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의와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올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의한 기득권층의 벗이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시피 한 김장환 목사의 그간의 행적은 그의 살아온 인생사를 보면 매우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권력과 출세의 정상을 향한 끊임없는 야망, 그것을 위해서라면 주변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강요하는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 처신 등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상류층의 권력적 실세가 되기 위한 이기적인 줄달음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하여 그의 입지전적 삶이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낮고 천한 이들의 삶에 다가가려는 목자보다는 높고 강한 자들의 우군이 되려는 과정이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책제목처럼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오는" 사람들은 불의한 삶을 살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이 김장환 목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자기 자신의 "위선적 은폐"라는 점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 친교 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한 바 없으며 그들의 삶에서 이 땅의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의 인생을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는 결단을 끌어 낸 바도 없다는 것은 김장환 목사가 무엇을 지향하면서 이들과 어울리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들인 것이다. 이런 그가 침례교 세계연맹의 총회장까지 된 것은 사실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헌신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이 깊기 때문이다. 

 

‘하우스보이’ 빌리

 

우리는 앞에서 그가 맺어온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해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성장사에서 중요한 대목을 짚어 김장환 목사의 처세관의 기반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대목은 아무래도 그가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 '빌리'로 그의 삶이 바뀐 그 역정이 경계선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미국 유학이라는 길이 열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란 이 나라가 겪은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와중에서 가난한 백성들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던 일종의 별천지의 축복이기도 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주둔군의 하인'이 되는 일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종의 권력이었고 주변에게 물질적인 은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초콜릿과 껌, 그리고 그밖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 하우스보이는 그런 선망의 대열에 낀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장환 목사는 소년 시절, 수원교도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들어가 가난한 소년 시절의 삶을 지탱하게 된다. 그 후 그곳에서 '빌리 김'이 된 그는 미국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건, 잡지의 상품들은 모두 빌리 김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열망의 재료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이라면 거의 누구에게나 있었던 공통의 사회심리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빌리 김은 '선택된 소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택된 처지는 마침내 미국 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평생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에게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지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그에게 어디까지나 은혜의 나라요, 기회의 땅이었으며 그를 가난에서 구출해준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면서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하우스보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절박하게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 그의 정신은 미국인의 마음과 정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며, 밥존스라는 극우적 학교의 유학은 이러한 성장사의 가치관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만다.

 

하우스보이 빌리가 아무런 기독교적 이해와 경험도 없이, 미국의 극우적 정신세계에 곧바로 끌려들어가, 진정한 인간의 내면적 자유보다는 율법적 권위주의와 미국의 패권적 정치관을 배우게 된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장환 목사의 미국 유학이 그의 개인사에 있어서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는지는 모르나, 그 자신과 이 나라를 위해서는 하우스보이의 굴종적 민족관과 극우적 신학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극우적인 신학교에서 극우적인 가치관 심어져

 

밥존스는 미국에서 가장 극우적인 신학을 지향하는 학교이다. 김장환 목사가 다닌 시절에는 그러한 극우적 성향에 대한 사회적, 신학적 비판과 견제가 더 더욱이나 약했던 때였기에 김장환 목사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돌아볼 기회가 없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교회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던 그가 밥존스에 가서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고통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는 학교생활에 곧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발군의 실력을 나타냈다고 그의 자서전은 적고 있다. 그런데 밥존스가 어떤 학교인지를 보여주는 보기를 책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었을 때 당시 존슨 대통령이 한 달 동안 조기를 달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당시 총장이었던 밥존스 2세가 목사 한 사람이 죽었는데 미국 국기를 한 달 동안 달 필요는 없다며 하루만 게양했다. 그러자 흑인들이 밥존스 재단에 성조기를 계속 달지 않으면 보일러실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학교에서 주 정부에 보호 요청을 하면서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주 정부에서 '공립학교도 다 못 지키는데, 어떻게 사립학교를 지키느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밥존스 재단에서는 성조기를 게양하는 대신 기관총을 사들여 방어에 나섰다."

 

밥존스 대학은 애초부터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에 적대적이었으며,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들의 입학은 아예 봉쇄하고 있다. 이후 김장환 목사가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해서 졸업자 명단에서 제명이 될 정도로, 교단적 폐쇄성이 강한 학교인데다가 위에서 보듯이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겠다는 식의 극우적 백인주의의 가치관이 가득한 학교이다. 이 학교 출신들의 극우적 성향은 미국 사회에서 종종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런 학교에서 교육받은 김장환 목사의 가치관이 어떠할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그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극우적인 군사주의 세력과 아무런 갈등 없이 어울리게 되는 것도 이러한 그의 성장사를 보면, 하등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김장환 목사의 유학과 그의 귀국은 한국 사회에 미국의 극우적 가치관을 심어나가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극우세력이 극우적 종교관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라는 점을 주시하면, 김장환 목사와 전두환·노태우 등 이 땅에서 극우적 폭력을 휘두른 세력 간의 친교와 연대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미국이 이 땅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김장환 목사는 하우스보이 빌리 시절의 역할을 계속해서 톡톡히 수행해나간 셈이라고 하겠다.

 

권위주의적 품성, 혁대로 자식을 때려 순종을 가르치다

 

부인의 입에서 나온 남편의 단점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목사님은 성격이 급해요." 대담자가 이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하자 그녀는 하나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불평하는 것을 조금도 못 참아요." 이것은 사실 그의 권위주의적 품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밥존스에서 받은 엄격한 규율 교육,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행운의 청년, 자신의 성취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 등등이 이러한 권위주의적 자세를 길러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나 권위에 대한 이견을 용납하지 않으며, 이러한 그의 자세는 다른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나 격려의 결여로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수나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보다는 정죄와 질책을 매우 강력하게 드러내는 품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아들 요셉과 요한은 물론 딸 애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김장환 목사에게 혁대로 맞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교육관은 순종에 대한 훈련이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순종에 어긋나면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었다. 순종을 폭력으로 가르쳤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은 여전히 극우적이며, 억압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게 자란 아들 김요셉 목사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에게 자신이 받은 교육과 마찬가지로 혁대로 체벌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혁대로 맞은 경험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손으로 때리지 않고 꼭 혁대로 때리셨어요. 어떻게 아이를 혁대로 때리느냐고 놀라는 분들이 있지만, 사실은 대단히 좋은 기능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버지가 무섭기보다는 혁대가 무서웠어요. 아버지가 혁대를 매지 않는 날은 굉장히 기쁜 날이었어요. 야단 안 맞을지도 모르니까요." 

 

과연, 혁대로 때리면 아이는 그 두려움을 아버지보다는 혁대에게 돌릴까? 사람을 가죽 띠로 때리는 전통은 주인이 노예를 때리는 역사에서 연유한다. 노예는 자신을 가죽 띠로 잔혹하게 때리는 주인보다는 그 가죽 띠에게 두려움과 적대감을 느끼게 될까? 사람을 때려서 순종을 가르치겠다는 발상 자체도 문제거니와, 그 체벌의 수단을 자신이 차고 있는 혁대를 선택하는 품성의 냉혹함은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폭력적 권위에 저항하는 민중에게 자신이 차고 있던 총을 휘두른 세력과, 자신이 차고 있던 혁대를 휘두르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아버님의 성격이 급하십니다. 그래서 말실수를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에 잘못을 나무라고 꾸짖는 반면 격려나 칭찬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와 함께 일을 한 직원들의 공통된 이야기도 그가 격려나 칭찬보다는 질책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우적 교육의 가학적(加虐的) 인간관의 결과이다. 따뜻하고 자상하며, 격려가 풍요한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을 어떤 목표를 위해 짓누르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권력 지향적 권위주의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권세가 강한 이에게는 도리어 매우 따뜻하고 자상한 듯이 군다. 인간에 대한 이중적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장환 목사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매우 엄격하고 질책이 우선되는 사람이자, 두려운 존재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반면에 권력자들은 그로부터 마음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 이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김장환 목사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거나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반면에, 자신의 권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이에게는 굴종적 처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자에겐 군림으로, 강자에겐 굴종으로 일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의 이러한 자세가 주변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신의 출세와 권위를 도모하는 삶을 살아오게 한 동력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일일까? 극동방송 내부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 대한 깊은 불만과 인간적 적대감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있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느낄까?

 

그의 경영관이 이른바 공격적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이러한 공격적 자세는 아들 요셉 목사가 말했듯, "관계 중심보다는 업무 중심"으로 말하자면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향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동원하는 일에 열중하는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해서 성과를 달성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 자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김장환 목사는 깨우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권력자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고 있다는 점, 바로 이러한 면모를 혹 김장환 목사는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김장환 목사의 삶을 짧은 지면을 통해서 분석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출세와 명성은 그가 이 땅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권력자들의 교분을 깊게 하고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온 사람이라는 점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이 한국 교계의 지도적 인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자신이 받은 은사와 기회를 다시 새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도한다. 권세자들과의 교분이 아니라, 진정 이 땅에서 아우성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위해 새로운 헌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생은 완전히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 교회에 중대한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생은 이후 그가 바라는 대로 평가를 받기에는 아마도 참으로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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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9. 9. 28. 09:48

한종호의 너른마당

 

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

 

난폭한 시대다. 검찰은 죄를 찾는 게 아니라 죄를 발명해내고 있는 것만 같고 언론은 받아쓰기 외에는 하지 못한다. 교육에서 받아쓰기를 아예 없애야 할 판이고, 발명은 과학과목에서 폐기해야 하는 걸까?

 

한 나라의 법무부장관 임명과 관련해서 온통 이런 난리를 겪은 적이 있을까? 대선급 소용돌이다. 그만큼 검찰개혁이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생결판이 나야 끝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이다.

 

적폐지속인가, 개혁추진인가?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물러서는 순간, 개혁세력의 몰살이 닥친다. 강력해진 검찰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우리 사회를 관리하려 들 것이다. 어찌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어디 정치판만 그런가? 대형교회 세습에 한 교단이 아예 몰빵을 했다. 기막힌 일이다. 무얼 더 가져야 속이 시원하다는 말일까? 주구장창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세력의 권세가 추하다. 이미 그곳은 성전이 아니다. “강도의 소굴”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선교역정에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의 위선을 매우 강렬하게 미워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더욱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신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닌 사회적 위치와 종교적 권위가 폭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구도 감히 그러한 작업을 할 용기나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지도자적 권위에 순종하는 일종의 종교적 세뇌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이 자신들의 종교적 선행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다. 이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선전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장해주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종교생활의 기준을 거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이유는 낙타를 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그 대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낙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순수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정직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학식이 높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희생해 왔습니다, 나는 이만큼 선행을 베풀어 왔습니다.” 등등은 사실은 전부다 낙타를 삼켜먹기 위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 욕심이 없으시군요. 아,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희생해 오셨습니까?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오로지 높은 지혜에만 관심을 보이고 살아오셨군요.” 등의 평가를 얻어내어 낙타를 먹어치우기 위해 위장하는 자들은 도처에 있다.

 

가령, 정치판이 벌어지면 이렇게 ‘나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발전의 선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표와 자리가 주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의 위 속에 수 십 마리 낙타가 들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소위 기독교 인사들이(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지만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위선과 탐욕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교단선거뿐만 아니라 연합기관이나 자신의 교단과 기관에서 자리를 보전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실은 낙타를 겨냥하면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덕을 선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마음은 낙타에 가 있고 하루살이는 그걸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지금 우리는 나라의 운명을 감당하겠다는 이들의 말과 삶 속에서도 하루살이가 낙타를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바가 하루살이를 걸러내며 살아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욕없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만을 위해 나섰다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과 재물과 삶의 스타일, 그 자손들의 행실은 낙타를 삼킬만한 위가 있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발견한다.

 

조국 장관의 자녀 문제로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정치인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이미 뱃속에 낙타 몇 마리는 너끈히 집어삼키고는 하루살이조차 걸러낸 듯 재고 있다. 참으로 두꺼운 낯짝이다. 그걸 벗기려면 보다 예리한 칼이 필요할 것이다.

 

당대의 현실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시면서 ‘눈먼 인도자’라고 공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게 된다. 그가 낙타, 즉 거부하기 어려운 크기와 강도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포기하는가, 아닌가이다.

 

아, 이 어리석음여, 하나님 나라를 낙타에 비길까? 정작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면서 낙타를 삼키겠다는 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뱃속을 해부해야 하는 임무까지 맡았다. 참으로 고단하구나. 그래도 해야겠다. 욕심에 눈먼 자들이 인도하는 세상을 종치기 위해서.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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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준의 ‘말바꾸기’와 차인표의 ‘당당함’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9. 7. 16. 11:25

한종호의 너른마당

 

유승준의 ‘말바꾸기’와 차인표의 ‘당당함’

- 신앙양심을 내세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처신 -

 

연예인들의 병역문제는 언제나 세간의 관심이 된다. 인기와 병역은 당사자에게는 중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한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중에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게 되면, 당사자는 대중들의 뇌리에서 자신이 잊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연예인의 병역문제는 병역이 젊은이들에게 가하는 현실적 압박과 제약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연예인들이 병역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상당히 비중 있는 영향을 미친다. 다 같은 젊은 놈들이 누군들 시간이 아깝지 않고, 누군들 자신의 꿈이 소중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그 만큼의 시간을 희생한다, 이것이 병역의무를 감당하는 논리가 된다. 그러기에 이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사람취급 받기 어렵다.

 

유승준의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이 이토록 신랄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까닭도 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준은 자신의 인기를 철저하게 사적 영역의 문제로 받아들여, 공적 의무를 저버렸고 더욱이 병역의무 준수에 대한 공적 발언을 결국 스스로 깬 셈이 되어서 그 비난의 정도가 더 심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방송 매체와 잡지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해 왔던 그는 “당당한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의 출발”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 왔기에 그에 대한 실망은 크나큰 실망으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한편, 차인표의 경우, 국제적인 스타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관점에서 007 시리즈 물에 출연할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기문제를 사적인 차원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소화해낸 모범을 보였다. 사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메가톤 급 인기의 기회를 민족적 양심을 기준으로 결정한 그의 모습은 돈과 인기를 연계하여 살아가는 연예가의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대조적 처신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병역 의무를 당연히 감당하겠다고 강조했던 사람이 막상 그 병역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자 말을 바꾸고 자신의 사적 이해를 쫓아간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실망시킨 사례였다. 신앙과 신조가 어긋나고 만 것이었다. 반면에, 국제적 수준의 스타급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거부하고 자신의 평소 신앙과 신조에 충실하게 행동한 차인표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한 현실에서 매우 귀중한 본이 되었다.

 

 

 

 

병역문제는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의 논란으로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냉전형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논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유승준의 경우 그가 이러한 논리를 세워 병역의무를 거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민권 신청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병역의무 대신 다른 방식의 의무를 감당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대체 의무도 없는 유승준의 경우는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병역문제는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오늘날 보다 심층적이고도 반성적인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는 병역 의무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논의를 하려는 장은 아니다.

 

유승준의 경우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는 병역의무가 날이 갈수록 비특권 계층의 의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아들이 병역문제로 이후 정치, 사회적 홍역을 치른 것도 다 특권층의 병역 의무 기피에 의한 문제제기였다. 병역의 의무는 신성한 국가적 과제인 것처럼 교육되고 있지만 실상은 너나 할 것 없이 특권적 지위가 없으면 할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고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권층들의 병역 기피는 한국사회의 권력질서가 가지고 있는 부당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군대는 이른바 빽 없는 놈들만 가는 곳이 된다면 그런 군대의 심리적 지위는 날이 갈수록 열등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병역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권력질서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권력 질서의 불평등은 반드시 병역비리를 낳게 된다는 것과 통한다. 유승준의 경우, 시민권자의 병역의무 면제는 당연한 법적 현실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이를 사회적 특권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은 실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이는 다른 무수한 시민권 취득자들에게 엉뚱한 비난이 돌아가게 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함께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본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자기만 빠져나가서 특권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신앙양심을 내세울 수 없는 경우가 된다. 긴 안목에서 볼 때 유승준이 잠시의 특혜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신앙인의 위상을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상실해버린 것은 그래서 안타깝다.

 

차인표의 경우, 그가 톱스타이면서도 평소 겸손하고 또 이번에는 냉전체제 해체를 추구하는 민족의식까지 분명하게 나타내어 그를 기르고 있는 신앙적 토양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적 지위에 오르면 자신의 신앙적 의지를 매우 가볍게 버리고 현실적 이익을 추종하는 것과 그는 대조적인 선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승준과 차인표,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렇듯 대조되는 신앙의 결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유승준이 차라리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면, 그래서 평소 자신의 병역의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설파했다면 이번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보통 때에는 병역의무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다가, 하루아침에 병역 의무 거부의 논리를 세운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유승준이 군대를 다녀오겠다고 한 것도 인기논리요,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도 인기논리라는 점에서 그 인기논리의 막강한 힘을 거부한 차인표는 그의 정신적 내면이 얼마나 강고한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병역 의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논의가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유승준에 대한 돌팔매를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날 재능 있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병영의 소품으로 몰아놓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다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승준은 물론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한 선택이긴 했으나,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차원도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처한 고뇌의 일단을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선 이후에, 우리는 병역의무의 특권적 기피와 냉전체제의 현실을 하나로 엮어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다. 유승준이나 차인표 모두, 이 냉전체제의 군사시스템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대중들 앞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그 선택의 의미를 보다 심화시켜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이번 사건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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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와 함께 한 ‘떠돌이 신학자’의 생애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9. 3. 10. 10:04
  • 기사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문목사님 연세를 잘못 세셨는지 틀리게 쓰셨어요. 1921년생이시면 99세 아니면 98세로 쓰셔야 하는데 87세로 적혀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수정 요청을 안 하신거 같아서 이 글 공유하면서 댓글 남깁니다.
    아...2008년에 작성하신 글이었군요.
    상단에 오늘 날짜가 있어서 헛갈렸습니다.

    참새 2019.03.10 16:22

민족사와 함께 한 ‘떠돌이 신학자’의 생애

 

문동환(87세)은 1921년 만주 북간도 명동 출생이다. 서로 인접해있던 명동이나 용정 모두 구한말, 일단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교육현장을 일구어나가겠다는 대단히 이례적인 개혁적 열정을 가지고 떠나 정착했던 곳이었다. 고종은 이 지역의 선비들에게 교육재정까지 지원해줄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나라 안은 어지럽고 힘들었으니, 밖에서라도 새로운 동량을 길러내라는 조선조 마지막에 해당하는 왕의 애처로운 심사였다.

 

1921년이라면 이미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가 극에 달해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조선반도에서 벌어졌던 시기였다. 나라가 망하고 만주지역에 떠도는 이들이 넘치기 시작하고 장래를 제대로 도모하기 막막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문동환이 태어나 자란 북간도 명동이나 용정은 좀 달랐다. 정세도 그랬고, 그가 자라나던 명동과 용정의 기운은 민족주의적 기상이 드높았기 때문에 그곳은 걸출한 인물들을 꽤나 많이 키워냈다. 온 마을이 교육, 교육 하고 있었으니 이곳에 정착했던 이들의 2세들이 그저 아무렇게나 자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시인 윤동주는 단연 용정의 아름다운 별이었고, 문익환, 안병무 등 이후 한국의 민중신학에 토대를 닦은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문동환 역시 이러한 기운을 타고 태어났는지, 일찍이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의 혁신적 변화에 기여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목사가 될 것인가, 교사가 될 것인가 했던 그는 결국 두 가지 모두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소년시절의 꿈과 이상은 그의 평생을 걸쳐 일관되게 이어져나갔다. 그래서 문동환은 훗날, 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으며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게 된다. 꿈을 잃지 않은 청년은 어지러운 현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감수성이 뛰어난 자애로운 형님 문익환과 함께 민족 사랑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형님은 아주 어진 분이셨어. 어학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 구약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번역했는데, 번역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 장준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 그 때 긴급조치 9호가 떨어지고 형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와 악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 그러면서 서슬퍼런 독재권력에 맞서기 시작했지. 어려서부터 형님과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헛된 삶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자랐어. 형님은 그 가르침을 죽을 때까지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사셨지.”

 

한편, 문동환이 자라나던 시절 용정학교 학생들은 “일본(日本)말”을 “왈본(曰本)말”이라고 해서, 일(日)자를 발로 밟아 넓적하게 한 왈(曰)자로 부르면서 놀리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교육의 가치를 몸에 익히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안에서는 일본의 등살과 위세에 눌려 자칫 주눅이 들기 쉬운 형편에 있었다면, 이들 북간도의 청년들은 드셌다. 좀체 기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역시 문동환에게 일생을 통해 영향을 끼치는 일상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뿌리 뽑힌 채 떠돌이처럼 살아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목회의 현장에서, 고난 받는 조선백성들에게 펼쳐진 복음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곳이었지만 명동이나 용정은, 근대교육에 열을 올렸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든 모셔오는 열성을 보였다. 아버지 문재린도 이러한 환경에서 민족교육과 목회를 했으니 이곳의 신학적 관점이라는 것이 구태의연하기란 어려웠다.

 

“나의 아버지는 고지식할 정도로 순수하고 지극히 겸손하신 분이었어. 민족애와 독립정신으로 불타 있는 명동이라는 민족공동체에 살면서 그의 마음은 민족애로 불타고 있었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북경에 유학 보내면서 정치를 공부하라고 권했지만 자기는 정치를 할 자질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셨어. 고지식하고 정직하기만 한 그가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었겠어? 그래서 생각한 끝에 민족의 건강에 이바지하려고 청도에 있는 독일 계통의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을 했었거든. 그러나 일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학교가 문을 닫자 아버지는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하셨지.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신 아버지를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귀하게 써주셨어. 아버지가 당시 김약연 목사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은 이유는 그분의 순수함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머리가 그지없이 총명하셨지. 새로 창립된 YWCA 회장이 되어 동네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세우시고 밤마다 부녀자 교육에 전념하셨지. 그 동안 남편은 유학을 가고 시아버지는 일찍 사별하셔서 가정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되셨지. 과부가 된 두 시어머니, 시할머니를 모시고 자녀를 기르면서도 야학에서 가르치셨거든. 그리고 여자 결사대에도 참여해서 민족운동에 기여하셨지.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학원에 가서 배우는 일에 등한시하지 않으셨지. 해방 후 남한에 와서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두 아들이 감옥에 간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지. 우리 아버님이 세상 떠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원산은 지났다. 아직 평양은 멀었지.’였어.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한 말씀은 ‘통일은 다됐다.’였어. 어머니는 감옥에 가 있는 나와 형님의 몫까지 감당하신 분이야.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문동환은 훗날 자신이 전개해나간 민중교육신학이나 이민자들의 삶에서 압축해낸 떠돌이 신학의 모태를 여기서 이미 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용정 초등학교와 은진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오로지 민족 교육의 내일을 어떻게 일구어날 것인가를 위해 선택했던 길이며 그로서 교사의 삶은 그에게 천직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왔던 그는 용정의 만보산 초등학교나 명신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지만, 해방이 된 이후 그는 다시 신학의 길에 몸을 묻게 된다.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신학교(한국 신학대의 전신)에서 그는 신학수업을 받았으나 결국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은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전쟁 중에 미국으로 유학 갔던 그는 프린스턴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이후 하트포트 신학대에서 종교 교육박사를 마친 뒤 한신대 초빙으로 귀국하게 된다.

 

문동환의 귀국은 한국 신학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신학교의 권위주의적 삶을 타파하면서 철저하게 민주주의적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했고, 이후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미국 진보신학의 요람인 유니온 신학대에서 잠시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흑인신학, 남미 해방신학을 접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억눌리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하나님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민중신학의 교육적 차원을 열어나간다.

 

민족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문동환이 제1기의 문동환이었다면, 일본과 미국 유학 이후의 문동환은 첨단신학의 문동환이었다. 그러다가 제3기 문동환은 억압과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오늘까지의 문동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앞의 시기에 형성된 문동환이 있었기에 그 이후의 문동환이 가능했겠지만, 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억압적 현실과 신학이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를 그는 매우 명백하게 깨우쳤던 것이다.

 

 

 

                                   사진/김승범

 

문동환이 나이 40이 되어 돌아간 고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급한 시기에 처해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었고 민중의 한은 급기야 전태일의 분신에서 목격하게 되듯이 극에 달했다. 신학은 더 이상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신학은 현장에 달려가야 했고, 행동해야 했으며 이러한 신학의 주체들은 민중과 함께 고난 받아야 했다. 키 크고 잘 생긴 미남 교수 문동환은 이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이 땅의 문동환으로 성장해나갔다.

 

문동환은 학교에서 내어 쫓기고 거리로 몰렸으나 그의 신학은 더더욱 깊어져 갔다. 고난의 현장이 관념적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문동환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깨움을 주시는지 각성해가게 된다. 교육과 신학이 일치했고, 신학과 역사가 일치했으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현장이 곧 신학의 출생지가 되었던 것이다.

 

책상에 앉아 서적에 둘러싸인 신학자가 아니라, 현장의 요구에 절실하게 대답하는 그런 실천신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문동환의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의 형 문익환, 그의 벗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이 이 나라 역사 속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변화의 힘을 뿜어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민중들은 끊임없이 자본과 권력의 술수에 걸려들어 세뇌당하고, 본래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바를 망각한 채 이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벗들을 도리어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모순된 현실과 문동환은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옥에 갇히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고난의 밑바닥에 처해 있는 민중의 실체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이러한 밑바닥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감옥은 그에게 또 하나의 교육 현장이었고, 선교신학의 모태가 되었다. 옥중서신으로 성장해간 바울의 모습이 문동환에게서도 어리는 그런 지점이었다.

 

이렇게 문동환의 발자취를 읽어나가노라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만주 명동과 용정시절을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서구신학에 지배당한 한국 신학과 교회가 자신의 역사적 현실, 자신의 언어로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신학의 태동에 열정적인 기대를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지 신학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제도 기독교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역사의 숨결을 말하고 노래하며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 이해는 기존의 기독교 이해와 충돌한다. 인간의 생명과 자유, 해방에 기여하지 않는 기독교는 본래의 예수 운동과 다르다는 줄기찬 주장으로 문동환은 기성 교회로부터 배척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배척이 문동환을 위축시키지 못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물신적 지배와, 시장의 힘과 결합한 교회에 대해 싸움의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교회는 교인들에게 다만 당장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의 역할밖에 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세계화라는 것이 크게 화두에 오르고 있는데, 한 때는 이 세계화가 인류를 빈곤에서 구한다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거든. 제1세계의 대 자본가들이 제3세계에 자본을 대주어 산업화를 도와주면 제3세계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였어. 말하자면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 자본을 나누어주고 산업화하는 기술을 제공해서 도와주면 온 세계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지. 그 결과 제3세계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공장들이 돌아가 무엇인가 이룩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이것은 다 속임수였음이 드러난 거지. WTO 나 IMF을 통해서 모든 법을 다 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서 이윤을 흡수해가거든. 뿐만 아니라 기업을 위한 그 나라의 법과 조건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할 때는 언제나 자금을 다른 곳을 빼 돌려 그 나라의 경제에 일대 혼란을 일으켜. 결국 날이 갈수록 제1세계와 3 세계 사이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빈부 격차가 늘어나게 돼.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이 주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야. 모두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지.”

 

그는 자본의 물신적 지배를 유지하게 하는 자본주의체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질서에 반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의 지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내어 쫓아 떠돌이 유랑자로 만들고 있는가를 고발한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게 된 그의 신학이 “떠돌이 신학”이다.

 

“미국에 가봤더니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말이 전 세계적인 시야에서는 ‘떠돌이’란 말로 써야한다, 그렇게 느껴졌어. 산업문화와 신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떠돌이들을 양산하고 있거든. 한국에도 동남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잖아. 중국만 해도 2억이야.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거든. 아! 이 사람들이 떠돌이구나, 이젠 민중신학을 인류사적인 각도에서 봐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떠돌이들인 민중을 살펴봤더니 엄청난 게 미국이었어. 전 세계적인 떠돌이들의 참상을 생각해보고 왜 그렇게 떠돌이를 양산됐는가 생각해보고 성서를 봤더니 성서에도 떠돌이 천지더라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세 가지는 사실, 모든 떠돌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야 먼저, ‘네게 땅을 주마’했잖아. 그건 ‘당신 없으면 아무도 존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창성하는 후손을 주마’는 서로 위하고 아끼는 공동체가 있어야 삶의 기쁨이 있다는 거야. ‘네 후손을 통해서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하리라.’는 민족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아야 땅도 공동체도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이룩하시려는 역사 경륜이야. 그런데 이 약속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어. 이 떠돌이들은 애굽 바로 왕의 노예가 되어 쓰라린 고생살이를 해. 남자들은 애굽 군병들의 채찍 밑에서 쓰러지고, 태어난 남자 아이들은 나일 강에 던저져. 남은 과부와 고아들의 삶이란 비참하기 그지없었지.

 

그 후 모세라고 하는 한 청년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 이런 악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마음에 단(斷)을 하고 일어섰어. 주먹을 휘둘러 포악한 애굽 군병을 쳐 죽이잖아. 그리고 싸우는 동족을 깨우치려고 했어. 그러나 존명하기에 급급한 떠돌이들은 모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항거했지. 다급해진 모새는 미디안 광야로 도주해갈 수밖에 없었지 무려 40년 동안 말이야. 미디안 광야에서의 칩거 후 모세는 다시 가서 떠돌이들을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떠돌이들은 애굽을 떠난 길고 긴 고생살이가 그들을 깨우쳐 악을 악으로 보고 새로운 내일을 갈망하게 되는 데 십계명이 바로 그들이 깨닫고 단을 내린 내용이지. 결국 저들은 홍해를 건너 과부, 고아 등 떠돌이가 안심하고 사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새 내일을 창출한 것이야. 어두움이 빛에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지. 그러나 어둠의 세력은 다시 격하게 다가 왔거든.

 

다윗 왕에게서 시작한 힘의 철학에 노예가 된 왕들이 야웨의 이름까지 도용하면서 민중들을 수탈하여 세상은 다시 어둠에 뒤덮인 캄캄한 밤이 되었지. 이렇게 되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예언자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고 결국 저들은 주전 4-500년에 남북조가 다 망하여 정처 없는 떠돌이가 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지.

 

예수님은 30년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떠돌이들의 한을 껴안고 아파하시다가 어두움의 사자인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나눔과 용서, 섬김과 화해의 삶으로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공동체의 횃불을 밝히셨잖아. 그리고 이 횃불이 지중해 연변으로 확산되니까 당황해진 어둠의 세력은 서둘러 이 횃불을 끄려고 했거든. 예수를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비방을 하는가 하면 그는 악마의 괴수 바알세불의 힘으로 악령을 추방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를 확산시켰지. 이것을 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채찍을 들고 악마의 소굴인 성전을 숙청하셨지. 이와 같은 도전에 놀란 어둠의 괴수들은 당황한 나머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무덤 속에 가두어 버려. 그리고 그들은 어둠이 빛을 이긴 줄로 착각하고 환호성을 올렸지만,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가 없었어.

 

사흘 후에 무덤은 깨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야. 부활하심으로 모두의 눈에 악의 정체가 밝혀져 하루에 3천 명씩이나 빛의 공동체에 들어오거든. 이것을 본 요한복음서 기자는 목소리를 높여 외쳐.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그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 빛의 승리를 보아왔잖아. 세계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해방운동에서도 그렇고 우리 한국에서도 이 빛은 동학혁명으로 의병항쟁으로, 독립운동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통일운동으로 어둠의 세력들을 밀어냈거든. 이 생명의 빛은 역사의 긴 안목에서 보자면 과정 과정에서 패배와 후퇴 같은 우여곡절이 있긴 하지만 결코 꺼지는 법이 없거든.”

 

그런데 사실 이 떠돌이 신학은 그저 태어나지 않았다. 한국 정치의 격변기에 온 몸을 던졌던 문동환은 정계에 잠시 있다가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 그의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의 부인 페이 문은 미국인이다. 평생을 남편의 활동 속에서 격동의 시기를 거쳤던 그녀는 생애의 나머지는 자신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아직도 그의 할 일이 많은 조국이었지만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70이 넘은 그에게는 매우 새로운 인생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생활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부인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이미 이방인, 또는 떠돌이의 서러움을 한껏 안고 살아가는 재미동포들의 삶을 그의 삶으로 살아낸다. 거기서 그는 오래 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와 살아가는 떠돌이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한 존재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고난과 기쁨에 눈뜨게 된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여전히 조국통일의 문제에 참여해온 까닭도 떠돌이의 삶에서 깨우친 바 크다. 그것은 그가 어디에 있든 생명의 길로 가려는 믿음의 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그가 있는 자리는 무게를 가진다. 그의 목소리는 정정하고, 그의 주장은 선명하며 그의 논리는 정연하고 따스하다. 민족이 갈라져 살아가는 현실을 이겨내는 힘을 그의 목소리는 담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실 때 사탄이 시험을 하잖아. 사실, 이 시험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사탄의 시험이요 대부분의 경우 모두 이 시험에 빠지고 말아.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에 이기셨어.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로 잡으시어 생명을 살리시는 길에 들어서셨거든. 이렇게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선 그분의 심중에는 간절한 기원이 있으셨지.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야.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은 이 기도문이 예수님의 삶을 지배하는 삶의 목표요 기도문임을 말해 주지. 그러기에 이 두 가지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어.

 

시험의 첫째는 광야의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야. 물질이 풍부해야 행복해 진다는 것이지. 사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세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이 풍부하게 있어. 문제는 강자들이 이를 독점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일용할 양식에 걱정할 것 없이 살게 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셨어. 물질이 많음으로 행복해 지지 않는다는 것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 명확히 알 수 있잖아.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천하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게 하면서 사탄에게 절을 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을 해. 그러나 권죄에 앉은 자들은(제사장과 바리새 파 사람들을 포함해서) 자기들을 신격화하여 자기 배만 채우면서 수탈당하는 자들을 천시하고 죄인 취급하거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을 살벌한 도살장으로 만들어. 그래서 예수님은 아래로 내려가서 서로를 용서함으로 인정공동체를 이룩하라고 하시지.

 

셋째로 사탄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했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돌이 발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속삭이잖아.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라는 것이지.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야.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이용하는 것이지. 우리가 취할 바른 태도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요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는 우리들의 삶에 언제나 이 세 가지 유혹이 온다는 거야. 오늘날에는 이것이 화려한 산업문화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은 유혹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이 세상의 물결에 역행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를 때에는 우리에게 박해가 있게 마련이지. 그러기에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신 거야. 예수님은 이렇게 끈질기게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시다가 악의 세력에 사로 잡혀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그러나 그의 고난은 패배가 아니라 빛나는 승리였어. 하나님 나라가 당시 온 세계라고 알려진 지중해 연변에 널리 확산이 된 것이지.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셔. 제자가 되어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이야.”

 

그는 이제 87세를 넘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강건하고 힘차다. 그의 정신세계는 역동적이며 젊다. 90이 가까워져가는 나이에도 그의 지적 탐구력은 젊은이를 능가할 정도이다. 한번 터져 나오는 육성은 언제나 생명력 출렁이는 열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 그를 만나 이야기하고 있자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는 영원히 젊은 청년이다. 문동환의 이야기는 그렇게 이 시대의 영혼에 울림을 준다.

 

“지금 일어난 촛불 시위에서 우리는 다시 의의 승리를 볼 수 있어야 해. 이 촛불 시위는 그냥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시위가 아니야.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 나는 이 촛불 시위를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21세기의 악령에 대한 시위라고 봐.

 

그것은 가는 곳마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빈부 격차를 조장하여 수억의 떠돌이들을 산출하는 다국적 기업을 앞장세운 신자본주의에 대한 시위거든. 생태계를 살리고 모두가 나누어 먹으면서 평화롭게 살자는 생명문화를 갈망하는 자들의 시위요 외침이지. 빛의 승리를 염원하는 시위거든.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이란 신자유주의를 확산하려는 이들일 뿐이지. 일견 그 어둠의 세력은 감당할 수 없이 커 보일 수 있어.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어. 빛이 승리하기 때문이지. 한 처음부터 타오른 생명의 빛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해.”

 

문동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다. 영원히 젊은 청년의 육성은 그런 기쁨을 주는 법인가 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루어내는가를 우리는 문동환에게서 너무나도 뚜렷이 본다. 그런 그를 가진 우리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존재의 아름다움이 그에게서 빛난다. 영원한 청년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한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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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8. 6. 1. 09:23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늦봄 문익환, 그 이름 석 자는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이다. 퇴색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요, 늘 푸른 힘을 주는 생기이다. 책상물림으로 앉아 있던 구약성서학자가 들판에 나와 광야의 소리로 변신하자 역사는 꿈틀거렸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고난의 시대를 기운차게 뚫어내었다.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


그 문익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20여 년이 지났다. 산천은 변했으나 그 맑은 미소와 청아한 꿈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뜨거움으로 있다. 목사이면서 목사로만 머물지 않았으며, 시인이면서 시인으로 그치지 않았고 학자이면서 학자로 멈추지 않았다.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야욕이 없었고, 존경의 상석 위에서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내면에 쏟아져 내린 하나님의 영과 시대의 소리에 맞추어 자신을 던졌고, 그로써 역사로 존재하게 되었다. 모두가 지쳐 스러질 때에 우뚝 선 우리의 마음이 되었고, 막히지 않은 길이 되었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20년의 세월이 먼 듯 하지 않으며,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 같기만 하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존재의 모습은 모두 그러한가 보다.


‘재야인사(在野人士)’라는 말이 주었던 무게가 시대를 울렸던 때가 있었다. 백발 휘날리며 포효하듯 민중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의 모습 한 자락이라도 보이면 권력이 긴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노년의 몸을 청년처럼 움직이면 모두가 어느새 일제히 일어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독재의 성채를 향해 진군했던 역사가 있다.


손에 수갑을 차고 옥에 들어서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옥 밖에 있는 이들을 도리어 위로하던 그의 넉넉한 웃음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가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토해내면 그것이 곧 역사의 육성이 되고, 그가 훌쩍 발걸음을 옮기면 그것이 곧 역사의 한 걸음이 되었던 충격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익환은 시대의 선봉이었으며, 우리 모두의 횃불이었고 내면의 감격이었다.


1989년, 김일성 주석과의 전격적인 만남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그 놀라움은 사실 그의 순수한 꿈의 연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김일성 주석과의 뜨거운 포옹이 그 어떤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사랑과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그에게 가해진 고통은 그에게 역설적으로 힘이 되었고, 달려갈 길을 줄기차게 달려가는 자로 만드는 동력이었다.


어찌 그 만남 하나로 통일이 되고 남북이 통하며 세상 천지가 바뀌겠는가 만은, 누군가 앞장서서 길을 내지 않으면 결국 길은 언제고 영영 생기지 않는 법. 문익환은 없는 길을 만들어 뚫었고, 그 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 길을 밟았으니 역시 선각자는 달리 있던 것이었다.


소년 문익환을 길러낸 자양분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문재린, 김신묵의 첫아들로 태어난 문익환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시대의 문명에 대한 깊은 일깨움이 있었던 그곳 이주 조선인촌에서 이미 장래의 문익환으로 자라난다. 북간도 명동은 일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곳으로 떠난 일군의 선비들이 모여 만든 동네.


그곳에서 교육과 기독교의 열정은 소년 문익환을 길러내는 자양분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의 모습을 통해서 그는 평생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목사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서를 통해서 만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소년 문익환에게 꿈을 불어넣었고, 그로써 그는 성서의 세계에 일찍 탐닉하게 된다. 무척이나 성숙한 소년이었다.


민족혼이 강렬했던 명동의 분위기에서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과 신앙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을 그때 하게 된다.


그런 명동인지라 이후 이곳에서는 민중 신학 교육자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정치에 나섰던 그의 아우 문동환, 이후 민중신학의 태두가 되는 안병무 등이 배출된다. 명동은 아이들에게 민족의 존엄을 배우게 한 현장이었고, 기독교 신앙이 역사와 하나로 어울려야 함을 일깨운 자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처음 접한 기독교는 그가 이후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서 외쳤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로 치면 보수적 신앙의 원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신앙의 틀에서 그의 뼈대는 굵었고, 웬만하면 물러서지 않는 강단이 생겨났다. 이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히브리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한 힘이었고, 결국 그런 예언자적 삶으로 살아가게 한 근력이 되었다.


일본 동경의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신학수업을 했고, 만주 북간도에서와는 다른 자유로운 사상적 흐름 속에 있게 되었다. 일본 동경시대의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보수적 신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써 한 단계 발전한 신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설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학병 소집을 거부, 만주 봉천 신학교로 이적하여 만보산 한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게 된다. 아직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공부에 관심이 깊은 젊은 청년 신앙인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그는 평생의 가약을 맺은 박용길과의 삶이 시작되고, 해방 후 한국신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학구열은 중단되지 않아 목사 안수를 받고 난 이년 뒤인 1949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0년대의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프린스턴에서 수업하던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귀국, 그가 배운 영어실력 탓으로 꼬박 3년을 판문점과 동경의 유엔 사령부에서 근무한다.


남북 대결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현장에서 보았던 역사는 그가 이후 통일의 길을 향해 가게 되는데 중요한 밑거름의 경험이 된다. 3년간 계속된 전쟁이 휴전으로 미완성된 종결을 하자, 그는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열망을 주체치 못하고 다시 유학길에 올라 프린스턴에서 석사 학위를 끝낸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당시 “프린스턴 신학대”라는 이름이 차지했던 영광을 떠올려본다면 청년 문익환이 전란에 휩싸였던 조국에 돌아와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처지가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신대와 연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는 한편, 한빛교회의 목회자로서 어찌 보면 얌전한 길을 걸었던 그에게 1965년에서 1966년의 유니온 신학대 유학은 의미 있는 충격으로 남는다. 민권운동이 한참이었던 그 시기에 유니온 신학대학은 흑인 해방신학의 산실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요람이기도 했다.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의 흐름과 이 해방신학의 만남은 그에게 역사의 지평을 열어주었고, 이후 실천의 능력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이후 그는 십년간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책임 위원으로 살면서 히브리어와, 그 언어의 세계를 통해서 성장했던 예언자들의 삶 속에 그대로 푹 파묻힌다. 시대의 중심에 살면서 소용돌이치듯 세월을 보냈던 윤동주, 장준하의 꿈속에서의 부름도 마다한 채, 그는 히브리 성서의 번역에 미친 듯 몰두했던 것이다.


그가 윤동주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이후 고백하지만, 그의 구약 성서 번역 작업은 그러한 열등감의 극복을 넘어 그에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주게 된다. 아무튼, 그는 1976년에 이르기까지 일찍 일본과 미국에 유학을 하고 온 탁월한 성서학자였고,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예술적 재능을 가진 한 목회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는 그의 이러한 신학적 헌신의 세계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예언의 언어를 번역하고 있기만 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시기나 하시려는 듯, 역사는 문익환을 성서번역의 외로운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전격 불러낸다. 진정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이른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라고 불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연루된 그는 처음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애초에 이 사건은 그가 연루되지 않게 기획되어 있었다. 필력이 좋은 그가 구국선언문을 기초한 사실은 아무도 불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구약성서의 번역작업이 거의 다 마쳐가고 있다는 중대과제가 있기에, 이 일과 관련되었던 이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 문동환은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문익환 이름 석 자가 나오지 않도록 인내했던 동지들의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될 수는 없다고 판단, 형의 이름을 내놓는다.


다른 누가 그리했으면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 되었겠지만, 아우가 동지들의 고통을 덜고자 형을 역사의 현장에 끌어들였으니 이를 어찌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재야 민주화 투쟁의 지도급 인사는 오히려 그의 아우 문동환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졸지에 엮이게 된 문익환은 그간 히브리 성서 번역의 과정과, 해석의 훈련 속에서 다져온 믿음의 내공을 이른바 초식으로 펼쳐보이게 된다.


1977년 전주교도소에서의 24일간 옥중 단식은 약골로만 여겼던 문익환 목사에 대한 당국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재야 민주화 운동을 그를 중심으로 하는 판으로 집결시켜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재야인사로서 뒤늦게 입문하여 스스로를 늦봄이라고 불렀고, 그 사로잡힘의 자리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렸으니 그야말로 사도 바울의 모습대로 산 셈이다.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


1977년,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그를 더 이상 구속 수감할 수 없어, 박 정권은 그를 형 집행 정지로 석방시켰으나 이내 그는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형 집행 정치 취소로 재수감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감옥 생활의 긴 세월이 시작된다.


첫 투옥이 22개월, 형 집행 정지 취소로 재수감 되어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유신체제 붕괴에 이르기까지 옥살이는 한 것이 15개월, 1980년 5월 광주 연루혐의로 이른바 “내란 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되어 31개월 만에 출옥하게 된다.


1985년에는 5.3 인천항쟁사건으로 네 번째 투옥되어 형 집행 정지로 26개월 만에 나오고 1989년 평양을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다섯 번째 투옥, 형 집행 정지로 19개월 만에 출옥한다.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에서의 활동 혐의로 형 집행 정지로 여섯 번째 투옥되어 21개월 만에 옥에서 나오게 된다. 이렇게 1976년에서 1993년까지, 17년 세월 동안 그가 옥에서 보낸 세월은 도합 134개월, 그러니까 11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랜 세월의 투옥 생활도 그의 총기와 열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그는 투옥의 고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 강한 존재가 되어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도무지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펄펄 넘치는 “자유청년”이었다.


그러기에 그에게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힘겨운 영어(囹圄)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디에 갖다놓아도 불길이었고, 역사의 산 현장이 되었으며 곳곳에서 시대를 일깨우는 소리요, 무딘 마음을 깨는 타고난 교사였다.


그래서 그가 수감되면 그 자체로서 역사는 격동했다. 문익환을 감옥에 집어넣는 시대가 그냥 온전하게 자기보신을 하고 지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온 몸으로 부딪혀 깨려는 어둠의 장벽은 그렇게 하나하나 무너져내려갔다.


그를 가두는 횟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민중은 그로써 깨어났으며, 현실의 모순을 명확하게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이 시대의 눈을 뜨게 했다. 눈 먼 시대를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개안(開眼)시키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익환의 명망(名望)은 민주주의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어갔다. 그의 명성은 개인적 출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시대의 고난을 뚫고 가려는 이들에게 자랑이요 용기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마치 열정의 암호처럼 사람들의 영혼에 와 박혔던 것이다.


문익환이 하는 일이라면, 문익환이 하는 말이라면, 문익환이 가는 곳이라면 문익환이 목숨을 거는 일이라면, 그것은 곧 이 시대가 반드시 해야 하고 귀 기울여야 하며 함께 가야하고 그로써 생명을 거는 사건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혼신을 다한 뜨거움과 그 어떤 위협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사는 모습은 이 시대의 예언자가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모두에게 성찰할 수 있는 재료를 주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삶을 껴안고 평생을 살아왔던 그가 어느새 그 자신의 형상을 예언자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 이사장 이재정 신부는 문익환의 발걸음을 “가나안땅을 향하여 모진 고난을 무릎 쓰고 걸었던 모세의 길이었으며, 마른 뼈로 뒹굴며 죽어 있던 동족을 살려내기 위하여 골짜기를 헤매던 에스겔의 길이었고, 정의를 위하여 권력에 맞서 몸을 던졌던 예레미야의 길이었으며, 살라진 민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 남북을 통일하려고 설파하던 아모스와 호세아의 길이었다”고 회고한다.


민중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 한번 열지 않으며 거동조차 하지 않은 무수한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는 하나님이 외치라는 소리만 있으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토해냈던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미 그 안에 십자가의 죽음과 삶을 품고 있는 그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으며 죽기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데 무엇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그가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예언자 정신의 삶과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그 말씀을 대언할 뿐이라는데, 실로 무얼 가지고 그를 꺾을 수 있었겠는가?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


그렇게 살았던 그에게 1992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그건 그에게 감사였다. 노벨 평화상을 받고 안 받고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이 인류사회로부터 주목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역사의 한계를 밀어나가는 것이 인류에게 평화의 꿈을 나누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것이 그에게 감사의 이유였다. 1989년 그가 북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났던 일도 다 이렇게 고난의 민족에게 살 길을 열겠다는 심정 하나로 이루어낸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어도 그것이 그에게 아무 상처와 좌절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것 자체로서 그는 기뻤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는 믿음이 더욱 깊어갔던 것이다.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나 마지막 투옥 생활을 마치고 난 1993년, 그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을 제창하였다. 그에게 통일은 이미 온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맛보는 복”과도 같은 개념이었다.


기도하면 이미 주어진 것이니,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도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것으로 받아, 통일된 조국의 삶을 살아내는 연습과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언제나 앞서 있었다.


사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우리의 현대 민족사의 반성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1945년 해방은 왔으나, 그 해방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혼란과 위기, 그리고 마침내 분단의 세월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느 때인가 통일의 역사가 열리면, 그것이 우리에게 혼란과 위기로 치닫는 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통일된 나라의 백성답게 성숙하고 힘 있게 현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건너지 않은 요단강 저편의 가나안을 미리 보고 산 위에서 이미 기뻐한 모세처럼 그렇게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생의 사업으로 바로 이 일을 해야겠다고 팔을 걷어 부친다. 통일을 부르짖지만, 각기 방식과 노선이 달라 분열되어 있던 통일운동을 하나로 묶어내고, 그로써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정세(政勢)에 대한 인식도 서로 다르고, 운동방식에 대한 생각도 차이가 나며 인적 구성이나 조직의 내력도 틀린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가면서 통일 운동의 핵을 키워나간다는 일이 어찌 쉬운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에스겔의 계시에서처럼 두개로 나뉘었던 막대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그 통일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주변의 오해나 때로의 중상모략, 그리고 비난에도 마다하지 않고 한 길로 뚜벅 뚜벅 나간다.


그의 가슴에는 이미 가야 할 땅이 보였고, 그 땅을 가기 위한 대열만 정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일의 열매는 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후대가 맛볼 열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에게 상관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진심을 이 시대가 이해하고 그로써 통일의 기운이 대세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꾸리는 것은 흩어졌던 통일운동의 기운을 견고한 하나의 힘으로 만드는 일이었고, 통일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준비였던 것이었다.

그는 이 일에 밤낮으로 매달렸다. 주변에서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고, 때로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모략과 중상을 걱정했다.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그러던 중, 1994년 1월 그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을 한 바탕 겪더니, 잠을 자고 있던 중 심장마비로 인해 그가 그렇게 사랑하고 뜨겁게 열정을 쏟았던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모두에게 놀라운 충격이었고, 한 시대의 통곡이 그의 죽음을 향해 쏟아 부어졌다.


님이 가신 것이었다. 어두운 역사의 밤을 지새우며 예수의 길을 따라, 좁은 길만 찾아다니고 그로써 형극(荊棘)의 삶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 떠난다고 떠나지는가? 문익환은 그저 떠나고 만 것이 아니라, 이 분단의 시대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였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주시는가를 보도록 하였다. 민족의 현실과 만난 신앙이 어떤 불꽃을 피워내는가를 목격하게 하였다. 그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웠던 것이다.


한반도의 정세가 새로운 고비를 맞이하고 있는 이 때에 ,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적 야망, 또는 출세의 자랑을 모두 접고 한 시대의 절절한 요구 앞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아름다운 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그의 삶이 이 땅에 뿌린 그 무수한 씨앗이 보이지 않게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며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민중의 거대한 함성이 그날 그때에 울리면 “역사의 여리고성”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믿는다.


문익환, 그는 바로 그렇게 그 날을 준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전령(傳令)이자,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가 흔든 깃발, 우리도 뒤따라 흔들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고자 하니, 한 시대의 스승으로 그를 가진 우리는 정녕 복 받은 존재들이 아닌가?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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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의 섬, 끝자락에서 일구는 가없는 사랑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8. 5. 8. 08:03

소외의 섬, 끝자락에서 일구는 가없는 사랑

- 40평생 누워 있는 아들 돌보는 한 노모의 애절한 사연


전남 여수 앞 바다의 거문도(巨文島). 이름하여 “큰 글을 닦은 섬.” 옛날 중국인들이 이 섬에 우연히 상륙하여 필담(筆談)을 나누다가 의외의 지식수준에 놀라 부른 이름이 내려오게 되었다는데 글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보다야 자랑스럽기는 하겠지만 다른 말로 뒤집자면 중국 문화의 영향이 이 섬에까지 파고들은 것이라고나 할까? 남의 나라 글을 아무리 잘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글이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것은 아니니 만큼 그 거문도라는 이름은 어떻게 보면 이 섬의 ‘소외된 운명’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찾아볼 이 섬의 한 늙은 어머니와 그 늙은 어머니 못지 않게 늙어버리고 병든 아들의 기막힌 사연은 그 운명의 실타래 속에 버려진 채 우리의 마음에 뼈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거문도는 우리의 근대사에서 19세기 후반, 중국을 집어삼키고 있던 영국이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점한 역사로 유명한 섬이다. 하고 많은 섬 가운데서 그 조그만 섬을 우리의 허락도 없이 차고앉아서 러시아가 내려올 뱃길을 가로막겠다고 수를 둔 저 멀리 서양(西洋)의 섬나라 영국과 이 동방의 작은 섬이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는 것은 이 섬사람들의 삶의 간단(間斷)없는 풍파를 말해준다. 역사에 등장할 정도로 주목되었던 땅이었으나 정작 그곳에 사는 이들은 역사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그저 이름 없는 백성들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해타산을 위해 자신의 운명이 잠시 볼모로 잡혔던 그 섬은 여수에서 뱃길로 2시간, 한려수도(閑麗水道)를 펼쳐내는 복잡한 곡선의 남해(南海), 그 언저리에 외롭게 떠있다. 그리고 그 섬 안에 살고 있는 조경백이라는 60이 넘은 아들은 꿈쩍도 못한 채 2평 짜리 비좁은 방에서 오늘도 몸을 한 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40년 이상 누운 그 자세로 80대 중반에 접어든 노모의 눈물겨운 수발을 받으며 지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매어있는 사랑의 볼모일까? 누구도 상대를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온 세월은 어찌 보면 기한 없는 형벌이고 인고(忍苦)의 슬픔이다.


이춘덕, 조경배 씨 모자의 기구한


어머니 이춘덕(85세, 거문교회 집사)씨가 아들에게 ‘꽁꽁 묶이게’ 된 것은 46년 전, 스물 셋의 아들이 류마티스성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부터. 병균을 막아야 할 항체가 제 몸의 관절 세포를 나쁜 세균으로 인식해 공격하고 파괴하는 질병이 닥쳤다. 엉덩이뼈와 다리뼈를 잇는 고관절에 처음 증세가 나타난 아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후 병마는 계속 퍼져서 지금은 목 아래 모든 뼈마디가 오그라들고 비틀어진 채 굳어버렸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나날을 보내왔다. 그렇게 46년… 전신마비로 46년 동안 문밖을 나서보지 못한 아들. 어머닌 그 아들의 손발이 되어 반평생을 사셨다. “진작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한국 전쟁이 막 끝난 당시 2남 4녀를 둔 이 씨 부부는 “끼니 때울 일을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다. 남편은 조각배로 고기잡이를 하고 자신은 떡을 빚어다 팔았다. 거문도에는 지금처럼 보건지소도 없었고, 1000km 남짓 떨어진 여수항까지 여객선도 없었던 때여서 아들 치료에 도저히 엄두를 못냈다고 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아들은 16살 때 발병했다. 반년쯤 누워 있다 일어났지만 3년 뒤 더 심하게 재발했고, 쑥뜸을 여러 날 맞고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세번째 병이 닥치자 아들은 하늘을 원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이 무렵 떡방아에 머리를 부딪혀, 지금까지도 이마에 파스를 붙이고 산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어머니를 괴롭히는 두통. 약도 소용없다며 어머닌 늘 이마에 파스를 붙이고 산다. 외진 섬에서 어머니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마에 훈장처럼 파스를 오려붙이는 일뿐이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아들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이제 아들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대나무 꼬챙이를 움직여 공중에 매달아 놓은 성경을 보는 일이다. 책을 읽는 것 보다 책장을 넘기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아들. 그래도 조경백 씨는 신구약 성경을 여덟 번이나 읽었다. 요즘은 하루에 20장씩의 성경을 읽으며 보낸다. 욕창 방지한답시고, 10cm 높이의 간이침대에 누워 천장에 매달려있는 성경책을 읽고 있는 조 씨와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늙은 어머니. 훅하고 바람이 불면, 두 분 다 그대로 재가 되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조경백 씨는 요즘 아침, 저녁 하루 두 번만 식사를 한다. 한 끼 식사에 걸리는 시간은 30분.그건 허리 아픈 어머니에겐 너무나 큰 무리이다. 그래서 아들은 배가 고프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점심을 거르기로 했다. 어머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흰머리가 나지 않는다. 당신이 늙지 않아야 자식을 건사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는 어머니. 머리가 허연 아들은 어머니의 검은 머리가 그래서 또 가슴 아프다. 좋은 일도 많고 나쁜 일도 많은 넓디넓은 세상. 그러나 아들은 그 세상을 바라만 볼 뿐 만질 수가 없다. 그래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들은 버릴 수가 없다. 두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방안. 그 속에 갇혀 사는 아들에게 어머닌 유일한 말동무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다.


조경백 씨는 새벽 4시면 하루를 맞이한다. 첫 아침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이 눈을 뜨면 처음 맞아주는 것이 샛별의 반짝거림입니다.” 그렇게 시리도록 별을 보고 눈이 맑아져서 밝아오는 아침, 한밤 내 긋던 별똥별만큼 많아진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과 커다란 광주리 하나 가득 세월 이시고 홀로 서신 어머니를 바라본다. 우리는 누구나 엄마의 풍 안에서 늘 세상이 따뜻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늘 바람 부는 쪽으로 등을 돌리고 계셨던 어머니의 세월은 늘 등이 시리지 않았을까. 외딴 섬 거문도, 그 속에서 또 다른 섬처럼 외롭게 살아온 모자의 방에 불이 꺼지면 또 하루가 지나간다.


어머니는 당신 것보다 먼저 아들의 수의를 마련해 놓으셨다. 당신께서 먼저 가면 돌봐줄 이 없는 아들 생각만 하면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저 사람이 먼저 가야 내가 마음놓고 갈텐데… 내가 먼저 가면 어떡하나. 그 생각하면 내가 잠이 안오요.” “또 나가 만일 어쩌고 보면… 너가 나 앞에 가야 할 것인데…” “불쌍한 말로 나 앞에 가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눈을 감고 간다.” 아들을 앞서 보내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는 어머니. 그러나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말을 듣지 않는 몸. 어머닌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어머니의 마음이 아들의 마음일까. “어머니가 먼저 가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불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 자식에 대한 동물적인 사랑으로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 어머니가 아프시면 성경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어머니가 건강하시고 밝은 모습이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아들에게 늙고 초라한 어머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모진 세파 속에서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아들을 지켜온 어머니. 46년! 세상은 참 무섭게 변했는데, 모자의 46년은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어머닌 또 내일 아들을 위해 정성껏 밥상을 차리실 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비탈거미는 일생에 단 한번 40개의 알을 낳는다고 한다. 초여름,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온다. 어미는 커다란 곤충들을 잡아먹어 스스로의 몸을 살찌운다. 추운 겨울이 되고 먹이가 줄어들면, 어미 거미는 수 십 마리의 새끼들에게 자신의 몸을 뜯어먹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배 밑에 새끼를 놓고 톡톡 두드리면서 주위를 환기하는 것이다. 굶주린 새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미 위에 올라타고, 어미의 몸을 뚫어 독액과 소화액을 주입한다. 어미는, 어미는, 순식간에 우글거리는 새끼들의 밥이 된다. 비탈거미는 더 이상 생식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비정한 운명을 잘 알고 있다. 하여 의미 없는 육체를 새끼들의 자양분으로 헌납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다. 극한의 사랑이다. 거문도의 사연은 ‘비탈거미’를 생각나게 한다. 어머니가 감당한 두터운 세월의 무게에 한숨을 몰아쉬며, 지독한 사랑이라 생각했다.


고개조차 마음대로 돌릴 수 없이 꼼짝 못하고 누운 그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동물과 구별되는, 일어설 직립 능력을 박탈당한 식물인간적 상태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의미가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처지는 비극적이다.


건장하고 활기 넘치는 시기를 보냈어야 했을 그는 이 병마의 시련 속에서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과한다. 누구도 그의 삶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지팡이 하나를 갖고 하나님에 의존해서 홍해를 가르고 바위의 물을 낸 모세와 다를 바 없이 오로지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인생을 살아낸다. 모세와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세는 히브리 노예들의 삶을 해방시키는 일에 부름 받았다면 조경배, 그는 무엇보다 그 자신의 병든 육신에 갇힌 영혼의 자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의 광야의 삶은 처절했고 그 처절함이 그를 성서와 신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육신의 지독한 질고(疾苦)가 끝나는 날, 그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유일한 소망으로 견디고 있다. 그런데 그 견딤은 좌절의 종점에서 피할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견딤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의 85세의 늙은 어머니 이춘복 집사의 사랑과 헌신의 삶이다.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자신의 고통도 심하건만 어머니는 아들의 삶을 지켜내는 것을 스스로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들 노모자(老母子)의 삶은 그래서 마치 섬 가운데 또 하나의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섬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의 바다이다. 그 바다의 깊이만큼 생긴 부력(浮力)은 그 섬을 가라앉지 않게 하고 있다. 그로써,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라는 세상의 판단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어떤 생명도 그 생명이 끝나기 전에 먼저 저버림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파도이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파도와 만나고 있는 것일까? 이들 두 노모자의 모습은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밝고 편안했다. 이들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평안이 있었다. 세상은 이들의 삶을 외면하고 소외시켰지만, 이들 노(老)모자는 그 소외의 섬, 끝자락에서 생명의 시간을 일구어 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까? 아파하는 자의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들 두 노(老)모자는 바로 그런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고난은 이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의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렇게 말하기는 쉬워 보여도 얼마나 간단치 않은 일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들의 장래를 소망스럽게 기원하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날벼락이 떨어진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육신, 그리고 자신의 영혼까지 아들의 삶에 쏟아 부어 왔다. 세상이 보기에는 도저히 가망이 없고, 그래서 그 사랑의 헌신이 결과적으로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 어머니의 병든 아들에 대한 사랑은 꺾일 줄 모른다. 자신의 생애 절반을 송두리째 바친 지난 세월이 그녀에게 한과 억울함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이 어머니는 아들의 안위를 먼저 걱정한다. 방 한 켠에 덩그라니, 마치 오래된 짐처럼 놓여 있는 아들의 육신은 이춘복 집사에게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전체의 무게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그 무게를 능히 지고도 아무런 불평과 탄식이 없다. 세상에 진정한 강자가 있다면, 바로 이런 어머니가 아닐까? 이 어머니의 사랑을 무너뜨리게 할 것이라고는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어떤 좌절스러운 현실이 맞닥뜨린다 해도 어머니는 그러한 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 달도 아닌 무려 46년의 세월을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성인이 된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온갖 시중을 들면서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해내는 늙은 어머니가 현실에서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에 제기되는 모든 하찮은 불평과 불만을 잠재우고 만다. 평범한 시골 아낙네에 불과했던 이 어머니에게서 그렇게 강한 힘이 솟아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가누지 못하는 몸을 건지는 생명줄


자신의 이러한 신세를 한탄하고 눈물을 쏟을 듯 한데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결국 그 아들에게 영원히 평안한 자리로 가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사는 것이 잠시의 고난이나, 그 고난의 강을 건너면 이제까지의 고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감사가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육신으로 사는 아들의 하루하루가 감사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어머니가 손을 놓는 순간, 그 아들은 지옥을 경험할 것을 아는 어머니는 혼신을 다해 그 아들의 삶에 더 이상의 고통과 아픔이 가해지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몸이 곧 자신의 몸이요, 아들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인 이 어머니에게 하여, 사랑은 가누지 못하는 몸을 건지는 생명줄이다. 생명줄을 놓아버리면 그 결과가 무엇이 될 것인지 아는 어머니는 세상의 동정이나 세상의 어쭙잖은 조언에 대하여 조용히 눈과 귀를 닫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 가닥이라도 남은 생명의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그로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인 것을 그녀는 은연중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자신에게 이 고통은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비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의 생명과 삶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상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에 이어지는 잠시의 통로이다. 그 통로로 들어가는 길이 힘겹다 해서 하나님의 처사에 비난을 더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멀어지는 첩경일 뿐이다. 세상의 눈으로는 사는 의미가 어디에도 없는 듯 하지만, 이러한 육신을 지니고 이러한 고난을 겪는다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들은 안다. 그 앎이 이들에게 믿음의 뿌리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늘에 닿아 있는 감격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버리셨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지경에 있는 자신들에게조차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앞서는 것이다. 실로, 온전한 육신을 지니고 있어도 그 영혼이 병들고 하나님 나라와는 인연이 없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에게 이들 두 노 모자는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는 하나님의 사자(使者)이다.


그 어떤 생명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버림받지 않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들의 삶이 이 절망과 좌절의 시대에 희망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게 하는 힘이 되는 이유이다. 하여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외면과 방치 가운데 외딴 섬에 갇혀 지내는 상황일지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평안의 힘을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신앙에서 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이들 두 모자는 서로에게 볼모가 아니라, 서로의 생명을 건지는 은혜의 터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소외시키나 하나님은 품으시는 이 놀라운 사랑의 현장은 끝없는 하나님의 바다를 보여준다. 모든 아픔과 고난을 품으시고 그것을 생명의 힘으로 나누어주시는 하나님 말이다.


거문도의 밤은 바닷바람이 차가 왔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에 끝까지 의지하는 이들 두 모자의 존재로 하여 마치 별이 빛나는 느낌이었다. 아, 누가 인생에서 실망할 것인가? 아, 누가 자신의 삶을 저주할 것인가? 거문도에 가보라.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사랑의 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끈에 매어 있는 배는 인생 어디에서도 표류하지 않을 것을….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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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 그리고 서지현 검사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8. 2. 5. 09:11

영화 <밀양>, 그리고 서지현 검사

- 어디서 구원은 올꼬?


최근 ‘미투’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가 된 서지현 검사의 지난 1월 29일 JTBC 뉴스룸에서  “가해자가 최근 종교를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한 비판은 새삼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밀양>은 절망의 끝자락에 선 한 여인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려 하는가를 보여준다. 주연 배우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래 새삼 주목받은 작품이라는 점을 빼놓고, 이 영화는 사실 영화적 재미나 흥행의 기대를 갖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이 대체로 어두운 삶을 드러내면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희망의 출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쪽은 아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답답함을 숨기기 어렵다. 영화 <밀양>도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서 시작해서, 쓰레기가 뒹구는 땅으로 카메라 앵글을 옮기지만, 그것이 반드시 명쾌한 돌파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적어도 기독교에 보내는 메시지만큼은 그저 지나칠 수 없다.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온 주인공은 그곳에서 다시 자식을 유괴당하고 자식의 죽음 앞에서 혼이 나간다. 밀양에 왔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있었고, 그녀에게 교회는 (겉으로는) 전혀 다른 인생의 출구가 된다. 하지만 자식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편안한 얼굴로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에 그녀는 절대자에게 항거하는 존재로 뒤바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청춘의 소설로, 광주 학살 이후 이 시대가 과연 이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하는가라는 고뇌가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그런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고 다만, 한 인간이 좌절의 극점에 서서 어떻게 다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또한 영화 <밀양>은 그런 고통에 휩싸인 존재에게 교회가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면모로 들어가자면 다소 유치하고 이해가 너무 일반적으로 편향된 바가 있긴 하지만, 영화는 교회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고통 보다는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일에 더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밀양>에서 교회가, 기독교가 직시해야 할 자신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밀양>은 보는 이에 따라 다층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교인들은 주인공의 고통과 슬픔에 동정적이다. 그러나 상대의 고난을 불행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가 하면, 그 고통의 깊이에 함께 스며들어가는 방식보다는 교회에 나오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리고는 교인이 되어 변모한 모습에 열광한다. 이 세상 도처에 깔린 고통과 슬픔의 정체에 그대로 다가서기보다는, 예수를 믿으면 그런 고통과는 결별하게 되고 그저 행복한 감정에 푹 빠지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교인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상대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상대가 교회를 나오든 아니 나오든 관계없이 같이 있어주려는 마음이 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영화는 그러나 이보다는, 교인 하나가 생겨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교회의 실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영화적 서술은 사실과 백 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에는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도 냉랭해졌다.


교인의 수를 늘리는 총동원 체제가 여전히 가동하고 있고, 그 안에서 각종 프로그램으로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현실과 발을 붙이며 함께 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니라, 천상의 조직이 되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 천상의 조직에 속한 장로는 여인의 유혹에 위선의 가면을 쉽게 벗어버린다. 이 장면은 논란거리가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점에서 적당히 타협해버린 인상을 주지만 어쨌든 간에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 그 내면에 진실하게 자신의 몸과 영혼을 스며들게 하는 존재는 목격하지 못한다.


도리어 어찌 보면 껄렁패처럼 여겨지는 카센터 주인이 주인공의 아픔에 동참한다. 물론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러한 상황을 주도하지만, 교회는 이 사나이가 보이는 사랑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해력과 감성으로 고통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자식의 유괴와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태 앞에서 교회는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슬금슬금 눈치나 보면서 뒤로 물러나고 만다.


정신 요양원에서 나온 주인공이 머리를 자르러 갔다가 미장원에서 만난 미용사, 그러니까 유괴범의 딸과 만나는 장면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하다. 주인공이 이 유괴범의 딸을 만났을 때 그렇게 독기를 품고 뛰쳐나오게 하기보다는, 그 딸도 소년원에서 나와 기술을 배우고 생존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은 아픔의 공유가 최소한 가능한 대목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영화 <밀양>은 영어 제목이 Secret Sunshine으로 되어 있다. ‘밀양’ 의 한자풀이로는 ‘빽빽한 볕’이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햇빛이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인생과 대조되는 역설적 반어법으로 다가온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는 자신의 출발점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필요성 앞에 직면한다. 천상의 조직이 아닌, 지상의 공동체로서, 그리고 가장 아프고 험난한 삶의 자리에서 교회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을 찾는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상처 받아 신음하고 있는 자를 위해 얼마나 위로와 치유의 능력이 있는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이에게 뜨겁고도 실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빛이 되는 지혜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미움과 대결의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로서 여러 가지 비평과 함께 아쉬운 점을 지적하기는 쉬우나, 오늘날 교회가 고난에 처한 이에게 비밀스러운 햇볕으로 다가가 그 인생에 빽빽한 광명을 채우는 힘을 갖지 못하면 영화 <밀양>의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영화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되풀이 되는 슬픔이다. 교회는 그 자신이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햇볕 또는 빽빽한 빛, “밀양(密陽)”이 되어야 한다는 걸 망각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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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떤 성품이 주도하는가’이다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7. 6. 12. 12:31

 한종호의 너른마당(61)


문제는 ‘어떤 성품이 주도하는가’이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세기 21:9-10)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모계사회의 종식과 더불어 부차적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을 생산하는 존재였고, 인간이라기보다는 남자에게 종속된 재산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여성에 대한 억압은 구조화되었고 문명의 생리처럼 되어갔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사렛 예수의 선교는 그러한 이스라엘 문명의 여성관에 대한 놀라운 도전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들끓었다. 여인들의 고난과 천대에 대한 그의 따뜻한 다가섬이 그런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선교가 그토록 힘 있게 전개되었던 것도 짓눌림 당했던 여성들의 신앙적 각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새로운 자아상을 구성해 가면서 잃었던 자신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중대한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온갖 굳은 일들은 여성들이 떠맡으면서도 정작 교회의 진로와 책임있는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남성들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여성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무래도 현실타파적인 공격성이 전면에 조명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이 때로 거칠어지는 점은 조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면을 시비 걸어 여성운동 전체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 자체가 새로운 해방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일까? 핍박받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 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일체의 위상을 그대로 보장해주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사라와 하갈의 대립을 목격하게 된다.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약자인 여성 사라가 같은 여성인 하갈에게는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가혹한 결과로 나타난다. 하갈에게 최대의 적은 사라였고, 사라에게 최대의 적은 하갈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대립이 성차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사라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갈의 존재를 주변부로 축출한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서도 보듯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아들 이삭을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는 여인 하갈에게 가혹한 종의 주인이며,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는 악랄한 원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여인들의 닮은꼴을 보게 된다.


“저 가난한 자들의 자식과 내 아이와는 이 시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소, 저 공부 못하고 지지리도 못난 놈들과 내 아이와는 이 사회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저 출신이 미미한 여자와 내 아이와는 결혼하여 우리 집안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감히 우리와 어깨를 함께하려고 하는가? 내 자식만큼은 이 사회에서 가장 높고, 크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오.”


그렇게 해서 명문학교와 부촌 근처에는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세워질 수 없고,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계산 앞에서 깨지기 일쑤이며, 출신이 낮은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돈 없는 가정에서 시집 온 며느리는 구박덩이가 되고, 그 반대는 며느리가 상전이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구도가 해결되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을 지배자로 설정하고 자신의 자식도 지배자로만 키우려하는 여성이 어머니인 한, 우리 사회는 그런 ‘모성’에 기대어 자란 인간들로 계속 채워지게 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광야로 쫓겨나는 이들이 양산된다.


남성은 언제나 지배자이며 여성은 언제나 피지배자인가?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떤 성품이 그 사람을 주도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어떤 성품이 그 사회의 구조적 중추를 지배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내정자에 대해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한다’고 언급한 국민의당 이언주 원내수석부대표의 ‘성차별적인 발언’에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차원의 인식이 아닐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하려는 사랑과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가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부당한 지배는 지속될 것이며, 억울하게 쫓겨나는 이들은 늘어만 갈 것이다. 하갈에 대한 사라의 비정함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라와 그 사라에게 축출 당하고 있는 하갈, 이스마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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