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성지(聖地)를 가졌는가?

신동숙의 글밭(241)


마음의 성지(聖地)를 가졌는가?



초가집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스케치북에 그리고 그리던 제 마음의 고향집입니다. 어린날의 그림 속에는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있고, 오른편엔 초가 지붕을 훌쩍 넘는 나무 한 그루, 왼편엔 장독대가 있고, 둘레에 싸리와 나무로 엮은 울타리는 키가 낮으며 성글고, 집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집 앞으로는 작은 개울물이 흐르는 그런 마음속 풍경을 그림으로 그릴 때면, 언제나 마음이 따스해져오면서 평화로웠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의 성지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좋아하는 그림을 따라서 비록 혼자서 걸어온 길이지만, 그 길에 만나게 된 벗님들에게서도 나와 같은 마음의 성지(聖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가는 일은 별을 발견한 듯 경이로운 일입니다. 중학생 시절 건물 귀퉁이 작은 동네 서점에 처음으로 들어가 머물며, 서점 안에 책들을 모두 살피어 비로소 마음에 들어와 손에 잡은 한 권의 책은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이었습니다. 처음 본 어느 스님의 단정한 인상이 마음에 들어오던 순간입니다. 


스무살 초반엔 초가집과 함께 막사발이 참 좋아졌습니다. 깊은 묵상 중에 인간의 문명을 하나씩 거두어내고 있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고대로부터 인류가 만든 건물과 유물들, 자동차, 우주선, 샴푸, 칫솔까지 정말로 필요한 것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모든 유·무형의 문화와 문명을 하나씩 마음의 체에 거르고 걸렀던 때입니다. 주위에선 취업에 신경 쓸 시절에 저 혼자서는 속으로 깊이 앓던 때입니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몰라주는, 길 없는 길을,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 길을 혼자서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청춘의 가슴에는 한 점 별빛처럼 미세하지만 빛나며 손짓하는 영혼의 부름이 있고, 물처럼 구름처럼 가슴 가장 밑바닥으로 유유히 흐르며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득 대상을 만나면 일어나는 그리움이 되기도 하고 방황이 되기도 하는. 


배흘림 기둥으로 올린 한옥의 멋스러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기와집을 볼 때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지배와 피지배가 낳은 건축 양식이 어쩌면 고래등 같은 한옥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닿고부터는 아름다운 한옥도 제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가을 하늘의 쪽빛을 담은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선 어딘가 애써 잘 보이기 위한 인위적인 한 마음이 거슬렸습니다. 그에 비해 막사발은 자연적이고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본성을 닮았습니다. 


눈먼 장님이 한 걸음씩 길을 더듬어 한발짝 내딛듯 제 마음이 걸어가는 길은 가족도 평범한 주위 사람들의 관심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이미 물길이 난 그 길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 마음의 길이 아니고선 이 땅을 살아가는 몸이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십 대 초반 가슴으로 읽은 윤동주 시인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의 시인의 마음이, 저에겐 몸을 받아서 살아 숨 쉬는 일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먹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방식의 모순. 




* 시와 구름이 머무는 황간역의 강병규 역장님의 돌그림


2002년 월드컵의 열기도 제 가슴에 불을 지피지는 못했습니다. 법정 스님의 오두막과 소로의 월든 숲에 오두막이 가슴으로 들어오고, 2003년 어느 봄날엔 저 역시 그러한 삶을 살기로 뜻을 세우고 인생의 방향키를 조정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가 혼자만 잘 살아선 아무 의미가 없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돕는 삶, 나누는 삶이라야 비로소 인간으로써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한 생각이, 아궁이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듯 풀무질을 하는 바람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울타리는 헐어버리기 쉬운 성근 싸리와 나무 울타리도 아니고, 단숨에 뿌리 뽑힐 나무도 아니었습니다. 딸아이의 행보에 엄마는 당뇨가 왔고, 아버지는 한 쪽 귀가 안들리고, 약혼자는 자신의 삶까지 접고서 인도에 가면 저를 만날 수 있단 희망 하나로 비행기표를 끊어둔 상황과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것입니다. 


그렇게 삼십 대가 되었습니다. 큰 아이가 품에서 내려와 집 앞 골목길을 자박자박 걸어다닐 무렵 다도(茶道)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다도가 몸에 익숙했던 건,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익히 들어온 밥상머리 예절과 다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신혼 살림을 고르던 시절 그 예쁜 커튼들을 다 제쳐두고 장식도 없고 고운 색으로 물도 들이지 않은 광목천으로 된 단순하고 소박한 커튼을 고른 저를 두고 같이 따라간 친구와 가족들의 반응은, "발품 팔고서 기껏 고른 게 저거냐"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제 마음은 무명의 광목천에서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집 창문에 걸어둔 그 천덕꾸러기 광목천 커튼이 다실에 걸려 있는 걸 보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그토록 좋아하던 막사발을 훔쳐간 일본이 고려청자가 아닌 막사발을 그들의 국보로 모셔 놓았으며, 초가집을 닮은 초의선사의 일지암이 한국 다도의 성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동안 혼자서 걸어온 길이 영 틀리지는 않았구나 하는 확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잡초요리연구가인 고진하 시인 목사님과 아내 권포근 선생님의 자연 속에서 공생하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생명과 이웃을 헤치지 않으려 선택하신 불편당의 삶, 한국 다도의 성지가 된 초의선사의 일지암, 초가집을 닮은 소로와 법정 스님의 오두막, 권정생 선생님의 안동 조탑리의 가난한 생가, 한희철 목사님이 단강 마을 이웃들과 함께 힘을 모아 서로를 배려하며, 느린 호흡으로 주위에 흔한 나무와 흙으로 담을 쌓아 만든 인우재의 기도실이 제겐 마음의 성지입니다. 


그런 제 마음속 그림이 글에서도 간간히 드러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숨인가봅니다. 제 글에서 오두막이 나오는 글을 보시고,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을 손수 돌에 그림으로 그려서 선물로 보내주신 분은, 기차가 지나치던 작은 간이역을 시(詩)와 구름이 머무는 역으로 가꾸신 강병규 황간역장님입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셨지만, 마을 사람 누구든 그리고 동행하는 우리는 시동(詩同)은 역장님으로 부릅니다. 


커피 물을 들인 고목의 나무틀 속에 놓인 돌그림의 빛깔이 더불어 따스하게 번집니다. 마치 돌그림이 거하는 안식처, 오두막 같습니다. 그림이 가슴으로 들어옵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의 성지와 점점 하나로 물이 듭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제 마음의 성지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평화가 흐르고 숨을 쉬고 있는 이 몸에 깃드는 지금 이 순간이 제 영혼의 집이 되는 따스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집니다. 벗님들은 어떤 마음의 성지를 가졌을까? 하고요.





posted by

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

신동숙의 글밭(237)


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

나무골이 진 마루바닥으로 아침해가 빛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아침, 이렇게 가을이 옵니다. 해의 고도가 낮아져 집안으로 깊숙히 들어오는 만큼 이제는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눅눅하던 가슴으로 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오늘 같은 토요일 아침엔, 숲이 있는 한적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머물러, 그동안 안으로 여몄던 가슴을 활짝 펼쳐 널어놓고 싶은 그런 날씨입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하는 헤아림으로 잠시 가슴속 여기저기를 들추어보았습니다. 지난 초여름 밀양 표충사 작은 암자 뒷마당에 보리수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계곡물에 산딸기를 헹구어 먹던 날, 친정 엄마하고 약속했던, 가을이 오면 해인사에 함께 가기로 한 일이 떠오릅니다. 울산에선 밀양과 창녕을 지나는 국도로 가는 길이 무난하여 해인사까지 갔다가 하룻밤 그곳에서 묵고 다음날 천천히 돌아올 수 있는 알맞은 여정입니다.


그리고 저 혼자서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곳이 몇군데가 있습니다.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장경각 뒷편에 가면 있다는 작은 법보전은, 젊은 수도승이었던 법정 스님이 일평생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인 기도의 터전을 닦으신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었고, 잠시라도 머물러 앉아서 그 시절 스님이 누리셨을 그곳의 정취를 한 움큼이라도 가슴에 담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고승 희랑대사의 어진 모습과 성철 스님의 백련암 일주문을 먼 발치에서라도 잠시 머물러 바라보면서 암자 주위를 둘러싼 가야산과 가야산의 하늘을 한폭의 그림처럼 마음에 담아오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 순간마다 언제든 맘껏 꺼내어 볼 수 있는 영원한 저장소는 언제나 가슴속 하늘이니까요. 



칠순이 넘으신 친정 엄마에게 차 안에서 드시고 싶은 간식을 여쭈니, 포도입니다. 줄기가 싱싱하고 잘 익은 머루포도를 어디에서 헹구어 먹을지 길을 떠나봐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엄마는 언제나 제 뒷좌석에 앉으십니다. 어느날 나무밑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던 얘기를 하시며, 몇 해 전부터 교회를 다니시며 알아가고 있는 하느님은 참 지혜롭다 하십니다. 자연의 도토리에서도 하느님이 하셨다 하시는 엄마의 마음이 어린 아이 같습니다. 


가을날 산에 가보면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데, 도토리를 한창 줍고 난 다음에야 그 잎이 떨어져 온 땅을 다 덮으시는 이유를 헤아리는, 엄마의 눈길이 바라보는 하늘은 어디쯤인지, 맑은 하늘에는 마음이 가닿는 벽이 없는데도 그 울림은 커다랗습니다. 


급하게 달리는 고속도로보다는 느리게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시골길을 따라서 가는 여정이 정겹습니다. 천천히 달리며 창밖으로 스치듯 바라보는 국도변의 풍경은 느린 여행길에 덤으로 주어지는, 과정이 그대로 소풍길이 되는 선물입니다. 가다가 어느 마을 도로변 천막 노점에 잘 익은 밤과 감이라도 보이면 잠시 내려서 추석 준비를 해둘 수도 있습니다. 


소망하는 법보전과 희랑대와 백련암에 머물 잠깐의 한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지나온 모든 순간순간이 또한 그 한 순간 만큼의 무게를 지닐 수 있다면,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이 땅의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불교의 여덟가지 바른법인 팔정도와 예수를 따르는 좁은길이 향하는 삶이란 순간에서 영원을,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천국이 되는, 토마스 머튼이 얘기한 관상의 기도를 통해 미리 맛보는 천국의 삶이자 본래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태초의 삶이 되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진리의 삶으로 향하는, 불고 싶은데로 부는 바람 성령이 이끄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 성령은 가슴에서 불어오는 가을 바람 같다는 생각들을 두루두루 가을 하늘에 펼쳐놓으며 엄마와 함께 가는 가을날의 소풍입니다.


법정 스님의 법보전 마루바닥에는 이미 오후의 햇살이 저보다 먼저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내려앉은 빛이 오래 사귄 정겨운 벗인냥 살갑습니다. 엄마는 해인사 장경각 경내 어느 하늘 아래 한가로이 계신지 잠시 보이지 않고, 저는 햇살 곁으로 다정한 벗인냥 아무 말없이 앉았습니다. 마루바닥으로 들어와 앉은 햇살이 이어서 가슴으로 들어오는지 무심했던 구석까지 따스해져옵니다.



posted by

붉은 하늘 저 너머에는

신동숙의 글밭(235)


붉은 하늘 저 너머에는 


달밤을 떠올리면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에 수련장으로 계시던 진 토머스 신부님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샌 독일인 신부님입니다. 이 이야기는 진 토머스 신부님을 아주 존경하시는 한국인 박 안셀모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카톨릭 수도승으로 구도의 삶을 살고 계시는 진 토머스 신부님은 젊은 시절부터 한국의 불교에도 관심이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스님들을 직접 만나뵙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는데, 그 중에는 그 옛날 가야산의 호랑이 성철 스님도 계십니다. 그렇게 많은 스님들과 만나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말다툼이 되고 꼭 자기하고는 싸움이 되더라는 얘기를 하십니다. 그런 스님들과의 만남 중에서 가장 좋았던 만남은 법정 스님과의 만남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진 토머스 신부님이 법정 스님의 오두막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도 늦어서 법정 스님이 하룻밤 묵어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한 말씀을 기대했으나, 법정 스님을 따라서 조용히 달빛 아래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분이 아무 말없이 그렇게 달밤에 앉아서 보내던 그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주는 내면의 충만감을 내내 잊을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마틴 슐레스케는 이야기합니다. "한적한 곳에서 보내는 고요한 시간은 자기 가치를 되찾는 조율의 시간입니다."(130쪽) 


요즘처럼 마음이 어수선할 때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안타까운 소식들이 끊이질 않아 마음이 무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산불로 지금 이 시각에도 사투를 벌이고 있을 소방대원과 지역주민들의 고투에 물 한방울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심정입니다. 평화를 바라는 물 한방울의 염원이 구름처럼 모여서 생명의 비가 되고, 불길을 다 잡을 수 있을 만큼 내리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미국 서부에서 일어난 산불의 영향으로 바다 건너 영국의 하늘도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지구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유기체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금 미국의 서부는 하늘이 붉게 변하고 연기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집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이웃들의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에도 그 마음에 두려움과 불신이 내려앉기보다는 매 순간마다 자기의 가치와 평화를 되찾는 고요한 시간이 되기를, 저마다 평화의 씨앗이 되기를, 나 한 사람으로부터 평화가 시작된다는 그 고귀한 사실을 호흡마다 기억할 수 있기를.


붉은 하늘 저 너머에는 언제나 침묵이 가득한 우주가 흐르고, 달이 있고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지구를 품에 안고 있는 커다란 침묵의 우주는 평화입니다. 그 커다란 평화의 손길이 어루만져 인간의 불길을 잠재우기를.



posted by

고구마 속이 익기까지

신동숙의 글밭(234)


고구마 속이 익기까지



마당에 모처럼 숯불을 피웠다. 검은 숯 한덩이가 알이 굵은 감자만 해서 불을 지피는데도 시간이 배나 걸리지만, 한 번 불이 옮겨 붙기만 하면 오래오래 타오르기에, 불을 지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기도 굽고 햄도 굽느라 모처럼  남동생 손이 바쁘다. 마당 가득 하얗게 피어오르는 숯불 연기가 어스름한 저녁 하늘로 평온한 이야기 물길을 터 서로의 가슴으로 잔잔한 물길을 내어준다. 


남동생은 처음 회사에 들어갈 때부터 스스로 고기를 구웠는데, 아직도 굽고 있다고 한다. 이제와서 안 구으면 승진했다고 그러는가 건방지다고 생각할까봐 집게를 내려놓을 수가 없다는 얘기에, 어려서부터 누나보다 헤아리는 속이 깊은 남동생이다. 때론 호랑이 같은 지점장 자리도 어디까지나 섬기는 자리라 여기는 동생이 미덥다.


배를 채운 아이들은 외숙모를 따라서 우르르 강변으로 밤산책을 나섰다. 불가에 둘러앉은 건, 처남과 매형 그리고 친정엄마와 딸이다. 하얗게 이슬이 내린다던 백로가 지난 9월의 밤공기가 내겐 으슬으슬 추운 한기를 일으킨다. 고기 굽기가 끝나고서야 남동생이 몸을 일으킨 빈 자리에 얼른 가서 앉았다. 이제는 혼자서 타는 숯불의 온기가 화롯가에 앉은 듯 따스하고 정겹기만 하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앉은 방안에 피운 작은 촛불이 좋고, 지금도 어느 깊은 산골 오두막집에선가 저녁밥을 짓느라 그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서 지필 아궁이불이 좋은 것이다. 숯불 위에는 아무거도 없지만, 저도 모르게 응어리진 마음을 녹이기엔 그만이다. 동생이 옥수수 과자를 가지고 오면서 구워 먹으면 더 맛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 과자를 아예 어릴적 교실처럼 줄을 세워 구웠다. 과자를 숯불에 구웠더니 정말로 바삭하니 더 맛이 난다. 밤공기가 쌀쌀해져 거실로 이야기 자리를 옮긴 후 남편이 문득 일어나더니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햇고구마를 구해온다. 이미 다들 배가 부르지만 아직도 붉은 숯불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은색 호일로 고구마를 감싸서 숯불에 올려놓는데, 고구마가 내 팔뚝만하다. 언제 다 익을까 싶었는데, 고구마가 익기도 전에 어느덧 친정 식구들이 강 건너 친정 엄마댁으로 잠자러갈 시간이 된 것이다. 언제까지고 타오를 줄 알았던 숯불도 어느새 붉은 숨을 다 토해 내고 회색 재만 남았다. 오븐에 옮겨 굽기엔 시간도 너무 늦었고, 아이들 입에서 고구마가 먹고 싶다는 목소리도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은, 그새 외삼촌이 주문 떡볶이로 배를 채워준 다음이다.



다음날 만 하루가 지나서야 굽다가 만 고구마 생각이 났다. 호일을 벗기니 색이 약간 거뭇한 거 말고는 단단한 고구마다. 오븐에 넣고 30분을 돌려도 젖가락이 들어가질 않는다. 거기서 10분을 더 돌려도 젖가락에 저항이 느껴진다. 그러기를 한 시간이나 넘기고도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호일을 벗겨내기로 했다. 생고구마를 구웠어도 이미 다 굽혔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넘긴 것이다. 고구마를 굵직굵직 썰었더니 속살이 노란빛이 아닌 생기가 죽은 회색빛이다. 어쩌다 노란 부분은 남겨서 아이들 주고 나니 못 먹는 부분만 수북하다. 아깝지만 무화과나무 아래에 파둔 구덩이 흙에 뭍기로 했다. 내년에 무화과 열매라도 많이 맺으라며.


만약에 고구마를 첫불에 끝까지 구웠다면, 고구마 속까지 노랗게 다 읽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서 드는 생각은, 마음에 일어난 한 생각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가슴속까지 익기도 전에 꺼져버린 생각의 불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의 불꽃이 붙을만 하면 끼니 때가 다가오고, 깊어질만 하면 세탁기가 다 돌아가고, 찻잔 속에 차를 건져내어야 하는 조각난 일상의 시간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보편적인 생활 모습이란 것이 어쩌면 영혼을 익히기엔 모자란, 해와 달의 흐름과는 

어쩔 땐 따로 흐르는, 시간은 뚝뚝 잘려나가고 언제까지고 인생의 겉만 맴돌게 하는 하루하루가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닿을 때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들여온 근대 산업화 방식의 학교 구조와 함께 회사 구조와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 영혼의 성숙을 위해선 모자란, 익기도 전에 종소리가 울리는, 가슴이 일으킨 한 생각의 흐름을 뚝뚝 끊어놓는 시간의 나열들. 타오르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스스로 꺼버려야 하는 촛불의 시간처럼 말이다.


먼 유년기엔 종일 굶었어도, 밤이 되도록 내게 밥 먹으러 오라며 날 부르는 사람도 없이 산새처럼 자유롭던 그 시절이 문득 가슴에 해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온 마을과 뒷산으로 쏘다니던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물질의 풍요 속에선 누릴 수 없는, 가난이 선물처럼 주는 영혼이 맑아지는 시간. 지혜로운 숲의 인디언들이 자녀에게 선물처럼 주는 혼자만의 숲 속 시간. 인터넷의 거장 스티븐 잡스와 빌게이츠가 그들의 자녀에게 한 달에 한번 문명을 벗어나, 핸드폰과 인터넷과 문명의 기기 없이 손수 불 피워 밥을 지어 먹게 한다는 자연 속의 원시적 시간. 토머스 머튼이 그리워한 은수자의 오두막에서 보낸 호젓한 시간.


아직 가본적 없지만, 때론 소로와 법정 스님의 오두막이 있던 울창한 산과 숲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자연만이 가득한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플 때가 있다. 생각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올라 낮과 밤을 잊은 채 앉아서, 육신의 배고픔마저 잊고서 오래오래 타올라, 세상을 향한 저항으로 응어리진 가슴속이 익을 때까지. 그래서 육신이 영혼 만큼 가벼운 빛으로 이 땅이 비로소 하느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에덴 동산이던 그날처럼.




posted by

지나온 하루를 알처럼 품고서

신동숙의 글밭(232)


지나온 하루를 알처럼 품고서




언젠가부터 스쳐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잠이 깨려는 순간

눈도 채 뜨지 못한

비몽사몽 간에

새벽녘이나 아침 나절에


잠들 무렵이면

낮동안 있었던 일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

해결되지 못한 일

후회스러운 일

아쉬운 일

잘못한 일

그리운 일


다 기억나지 않는 꿈 속의 일이지만

밤새 내 몸은 웅크린 채

지나온 하루를 품는다


그렇게 내 안의 나는

지나온 하루를 알처럼 품고서

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고 

꿈 속에서 게워내고 게워내고


해가 뜰 무렵이면

가장 커다란 한 알로 오롯히 영글어

잠시 스치듯 감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얼굴이기도 하고

장면이기도 하고

빈 가슴에 태양처럼 떠 안겨 주고는

돌아온 새날을 또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용서 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함께 해 주세요


나는 매일 아침

눈도 뜨지 못한 채

간절한 짧은 기도로 하루를 열고


눈을 뜨고 본 세상은 

온통 밝고 새롭고 아름다운 것이다

온통 감사한 일 뿐이다



posted by

"빛으로 물들일꺼야, 다이너마이트처럼" -BTS

신동숙의 글밭(231)


"빛으로 물들일꺼야, 다이너마이트처럼" -BTS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중 제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한국의 방탄소년단(BTS)의 <다이너마이트>가 세운 빌보트 싱글 차트 1위라는 이 영광스러운 소식을 더불어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이 한없이 생각난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배달민족('배달'은 '밝다'의 옛말)의 밝고 커다란 하나의 하늘인, '한'의 정신(얼)을 유유히 지켜온 선조들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별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는 우리의 선조들과 별이 되신 대한독립운동가들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분들께 차 한 잔을 올리고 싶은 그런 소박한 마음으로 이 환한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특히 한민족이 가장 암울했던 시절인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오늘날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고마운 그분들은 가슴에 영원히 빛나고 있는 별빛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민족의 정신을 지키며 맑은 윗물이 되어주신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필자와 오늘날 지구별에서 밝은 빛의 다이너마이트가 된 방탄소년단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여 이 세상에 별과 빛이 되신 아름다운 영혼들에게도 두 손을 모아 고마운 마음을 올립니다.


BTS의 <다이너마이트> 음원을 유튜브에 올린지 삼칠일도 안되어 3억 명이 넘는 전세계인들이 영상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회수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는 이 영상 아래로 흘러나오는 건 한글 자막입니다. 쉬운 우리말로 적힌 한글 가사를 따라가다 보니, 외솔 최현배 선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한글은 우리의 자랑, 문화의 터전". 언어학자들과 언어에 밝은 분들은 같은 얘기를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영성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언어가 바로 한글이라고. 한글을 쓰는 우리들에겐 숙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전부터 방탄소년단의 한국어 노랫말을 따라서 익히려는 전세계에 걸쳐진 아미팬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아오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의 숙제를 세상에 당당히 제출한 BTS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것도 전세계적으로 드리워져 있는 '코로나 블루'라는 새로운 말이 태어난 오늘날의 이 지구별에서.


노랫말 작사부터 춤 안무와 음원 작업 전반에 직접 참여한다는 BTS의 맴버들은 새로운 문화의 창작자들이기에 더욱 박수를 보냅니다. 그들은 제소리 즉 제 가슴과 제 생각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난 그 하나의 소리가 전세계인 모두의 가슴에서 한글로 공명이 되고 있는 놀라운 현실입니다. 독립운동가 차마리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얘기하신,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 한국의 자연과 한글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내가 승려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바램이 어둔 가슴에 빛나는 영롱한 별빛 같습니다. 한민족의 조상은 태양신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의 신 '환인'인 것입니다. 밝고 커다란 하나 곧 하늘인 '배달'은 '밝음'과 '하나'와 '한'으로 이어져, 이스라엘의 유일신 야훼를 '하느님', '천주님', '하나님'으로 부르기에 한글 성경과 믿음 있는 한국인들에겐 처음부터 주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이너마이트>의 처음 화면은, 파스텔톤의 노을이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제각각 의미심장한 표정과 몸짓을 짓고 있는 여섯 명이 한데 모여 있다가 흩어지며 화면에서 사라지자, 뒤에 보이지 않던 한 명이 나타납니다. 점점 얼굴이 가까워지는 한 명에게선 흰빛의 옷과 십자가 귀걸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총을 쏘는 듯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는 손가락 끝에선 전쟁의 총성이 아닌 평화의 밝은 빛이 발사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면은 혼자만의 방입니다. 코로나 블루와 산업 노동자의 어둔 단면이 떠오르는 청자켓을 입고 있는 또 다른 한 명이 마시는 건 투명한 컵에 담긴 순수의 상징인 하얀 우유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전세계의 남녀노소 어느 누군들 무장해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순수한 우유의 흰빛은 청자켓 안에 입고 있는 언뜻 보이는 흰빛의 옷으로 눈길을 이어줍니다. 소품과 옷색깔에서도 엿볼 수 있는 그들이 걸었을 고민의 흔적들 앞에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벌써부터 따스한 햇살 아래 앉아서 밀크티를 마시는 듯한 깨끗하고 밝은 기분이 드는 건 저만 그런가요? 




이 노래의 주된 메시지이기도한 그들의 첫 메시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밤 난 별들 속에 있으니

내 안의 불꽃들로 이 밤을 찬란히 밝히는 걸 지켜봐"

그들은 별들 속에 있지만, 그들의 처음 시작은 '내 안의 불꽃'인 것입니다. 모든 일과 꿈과 소망의 시작이 그러하듯, 그 처음 시작은 한 개인의 내면인 것입니다. 언제나 씨앗처럼 작고 약한 내 가슴의 한 점 불꽃, 하나의 마음, 한 생각인 것입니다. 불교에선 한 생각을 돌이키는 일의 무거움을 언제나 중요하게 다룹니다. 첫 가사에서 언뜻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보이기도 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인데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가 겹쳐집니다.  BTS의 가슴에도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별이 빛나고 있었던가요?


그 불꽃의 씨앗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사는 "아침에 일어나 신발을 신고 우유 한 잔, 이제 시작해볼까" 신발을 신고 우유를 한 잔 마시고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다리는 건, "딩동, 전화 줘. 아이스티 한 잔과 탁구 한 판" 그리고 이어지는 배경은 아침입니다. 이른 아침 가게 문이 열리기 전, 레코드 가게와 버거 도넛 가게 안이 그들의 새로운 무대입니다. 그리고 내면의 빛은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난 다이아몬드 빛나는 거 알잖아 ", 버거와 도넛처럼 "펑크와 소울이 이 도시를 밝혀" 그리고 이어지는 무대는 경쾌함과 흥겨움으로 밝음이 빛을 뿜어댑니다. 보기만 해도 덩달아 신이 납니다. 




춤을 추며 흥에 겨운지 블루의 청자켓을 벗어서 하늘로 던져 날려보냅니다. 그리고 흰빛 옷의 흥겨운 춤이 이어집니다. "친구도 불러 여기 모여봐. 오고 싶은 사람 누구든지." 그들의 메시지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 친구가 되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어우러짐은 그대로 빛의 사랑을 뜻합니다. 독립운동가 김원봉님의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오."의 말씀이 이 순간에도 빛이 나는 건 여전히 오늘날에도 무기한 유통이 되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겠지요. 




하늘로 날으는 비행기의 날개처럼, 하늘로 날아가는 새의 깃털처럼 그들의 가벼운 몸짓은 바람과 물처럼 흐르는 풍유, 화랑의 자유를 닮았습니다. 자유의 노래와 춤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들에게 세상은 "낮에도 밤에도 하늘은 눈부셔", '꿀처럼 달콤한 인생', '디스코 파티', '부티 나는 비트'. 계속해서 그들이 뿜어내는 한결같은 메시지는 환한 빛이 되어서 구석구석 우리의 가슴을 물들입니다. 그 빛은 어둔 가슴을 환하게 밝히는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사랑의 빛입니다. "환하게 불을 밝힐거야", 하늘처럼 투명한 프리즘이 된 그들 내면을 통과한 흰빛은 무지개 빛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비춥니다.




맨 처음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던 흰옷을 입은 한 명이 손가락 총으로 쏜 씨앗 같은 흰빛은 나아가 땅에서 하늘로 쏘아 올리는 일곱 명, 일곱 빛깔의 무지개 빛으로 찬란한 빛의 기둥이 됩니다. 순수하고 밝은 하나의 커다란 밝은 빛은 세상으로 향하며, "빛으로 물들일거야 다이너마이트처럼", "온 도시를 물들일거야 다이너마이트처럼". 밝고 자유로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그들이 전하는 다이너마이트는 더 이상 전쟁과 파괴가 아닌 평화와 사랑의 생명의 밝은 빛입니다. 만해 한용운님의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에서처럼 그들의 다이너마이트는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빛이 되어서 오늘날 세상을 물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오래 오래 밝고 진실되고 선한 흐름이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

신동숙의 글밭(230)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


들숨 날숨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 같은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왠지 그 물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포괄적이고 우주의 조화에 걸맞는 물음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몸은 인간의 몸이지만,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 중에서 보다 가까운 물질은 무엇인가 하고요. 지구의 구성 원소인 물(水),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의 오행과 연관 지어서 거듭 되묻고는 합니다. 어딜 찾아가서 생년월일시에 따른 사주로 알아보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묻고 거듭 주의를 기울이는 이러한 일은 마음을 바라보는 일, 즉 명상에 가깝습니다. 


밖에서 구하기보다는 내면에서 구하고자 하는 답입니다. 아주 원초적인 본래의 답을 구하는 길은 밖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이라고 선각자들은 한결같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도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감동과 울림이 아니고는 외부의 힘으로는 일시적으로 움쩍할 지는 모르나 사람은 그런 타성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작은 깨달음도 부합합니다. 물론, 타인과 모든 대상은 나를 비추어 주는 좋은 거울로 삼으며 언제까지나 고마운  존재들이자 또 다른 나 자신인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런 근원적인 물음들은 대부분 단시일에 또는 몇 년 만에 답을 내겠다는 데 욕심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질문 하나가 평생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는 지푸라기 한 올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씨앗처럼 마음밭에 심겨진 질문 한 알이 어느새 점점 자라나서 굵은 나무둥치로 제 곁에 듬직히 서 있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습니다.


물, 나무, 불, 흙, 쇠. 이 오행 중에서 답은 딱히 어느 하나라고 지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제 내면은 출렁이는 물이 되었다가 끓어오르는 불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색 중에 뭔가에 막힐 때면 단단한 돌이 되기도 했고요. 유독 나무를 좋아해서 집안에 있는 몇 안되는 가구 중 책상, 식탁, 책꽂이, 의자 하나까지 대부분의 가구가 원목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요즘은 딱딱한 나무의자가 베겨서 방석을 깔지 않고는 오랜 시간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방석이나 작고 도톰한 담요를 깔고 앉아서 끼니도 때우고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이렇게 글도 쓰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깝게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와 목련나무, 무화과나무, 길가의 가로수 또는 나무로 만든 연필이나 자그마한 도구까지 나무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무만 보면 마음이 평온해져 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거듭 태초의 질문인 듯 묻고 또 묻는 물음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나무는 청정한 숲에서 스스로 제 본래의 성품대로 잘 자라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 나무 곁에 가까이 가고 서성이거나 바라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나뭇잎 사이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는 행복감을 표현하기에는 늘 언어란 것은 바닷 속에서 건져 올린 조개껍데기 하나 밖에는 되지 못하다는 걸. 윤동주의 귀여운 조개껍데기로 바다를 떠올릴 수는 있어도, 바다는 그보다 훨씬 깊고 그 생명력은 한이 없으니까요.


나무는 뭔가 저에게 부족한 성품을 보완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나무를 가까이 곁에 두고 묵상을 하다 보면 점점 끝없는 나무의 덕성을 닮아 가고픈 소망이 가슴 속 깊은 밤하늘로부터 소망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의 친구', 나무도 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나무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나무 둥치 곁에 깃들어 살아가는 작은 풀꽃과 강아지풀도, 하나의 나무를 돌돌 감고서 오르는 나팔꽃이나 작은 나무 줄기를 보자면 꼭 껴앉고 있는 이유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해보지만, 당시의 답은 여전히 마음을 스쳐 지나는 바람 한 자락일 뿐입니다.  


그리고 숲의 자잘한 식물들이 귀엽고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 가운데 종종 문득 차를 몰아서 산으로 들어갑니다. 목적 없이. 단지 그 장소에 저를 데려다 놓습니다. 제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열심은 그뿐입니다. 그리고 깨어서 바라보는 일. 그러면 자연이 알아서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저 산이 좋아서 찾는 것이지요. 산과 나 사이에  끌어당기는 그 자력은 산의 힘 때문인지 제 힘인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평온히 산에 기대는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가운데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를 사귐에는 오로지 정신을 깊이 하는 일 말고는 딴 뜻을 두지 말라.' 


법정스님의 풀이로 거듭 마음에 새겨 보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가 정신을 깊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망스러운 일이다. 정신을 깊이 하는 일을 통해서, 서로가 힘이 되고 빛이 되어 한없이 승화할 수 있다. 형식 논리로는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밖에 안된다. 그렇지만 정신을 깊이 하는 창조적인 우정에는 둘을 넘어 열도 백도 될 수 있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열도 백도 되다 보면 그 만큼 둘레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덕스러운 우정이 된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법정스님은 거듭 구체적으로 우정에 대해서 충언을 해 주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절과 신의와 창조적인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서로에게 아무런 덕도 끼칠 수 없다. 빈꺼풀끼리는 이내 시들해지고 마는 법이니까. 그러니 상호간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그 사이가 날로 새로와져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된다.'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도 상식이 되어버린 칼릴 지브란의 말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사랑으로 얽매지는 말게. 마치 한 가락에 울리는 거문고 줄이지만 그 자리는 따로 따로이듯이.' 우정의 소망을 떠올릴 때면 이만큼 좋은 지침도 없다 싶습니다. 하지만, 이 맑은 말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면 일그러진 한 영혼이 비쳐질 뿐입니다. 


사람에게 냉정하고, 판단하고, 상대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모르면서 스스로가 편한대로 성급하게 안정적인 답을 내어버리는 교만이 늘 고개를 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교만으로 인해 의식 무의식 중에 제가 상처 준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앞산 뒷산입니다.


청년 시절 제 책꽂이에 꽂혀 어둔 마음에 등불이 되어준 전우익 선생님의 메시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전우익 선생님의 한 마디와 칼릴 지브란의 글과 법정스님의 글은 저에게는 그냥 글이 아니라 생생한 육성 아니 영성(靈聲)에 가깝습니다. 한 영혼이 한 영혼에게 말하는 살아있는 영혼의 소리로 생생하게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처음의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첫 물음에 이어서 저에게 주어진 삶의 이유와 사명에 대한 그 다음 물음이 이어집니다. '나는 무엇하러 왔는가?'. 그동안 지나온 세월 중에 저를 스쳐간 인연들, 곁에 머물고 있는 인연들을 해처럼 떠올려 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위나 작은 돌멩이처럼 마음을 막히게 하고 무겁게 하는 인연들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많이 있겠지만 먼저는 저의 교만함이라는 장애물이 먼저 떠오릅니다. 더 기다려주고, 더 마음을 내어주고, 더 마음을 열어놓지 못했을까 하는..


예전의 아버지께선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시간을 들여서라도 한 올 한 올 풀면서 오랫동안 앉아 계시곤 하셨습니다. 그때는 실이나 모든 물품들이 귀하기도 했지만, 자연을 닮은 어른들의 성품에는 뚝 끊는 행위보다는 정성을 들여 풀어내는 편이 심성에는 더 자연스러웠을 터입니다. 


언젠가부터 식당에서 냉면이나 고기를 가위로 싹뚝 자르는 모습을 자연스레 봅니다. 씹는 행위의 편리함을 위해 스스럼 없이 저지르는 일. 저 자신에게서도 무심코 자행되는 그런 일. 인연의 줄을 그런 식으로 끊어낸 제 모질고 교만한 마음을 제 곁으로 가까이 데려 오기로 합니다. 교만하고 모진 마음을 데려와 손잡고서 함께 자연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가 손을 잡고서 화해를 하는 일입니다. 처음 물음 뒤에 이어진 그 다음 물음에 대한 답인 돌덩이 같은 교만을 보드라운 흙으로, 순한 물로 흐르게 하고, 꽃으로 피우는 일, 어쩌면 이 땅에 태어난 저의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게서 풀냄새, 나무 냄새, 흙과 푸른 하늘 냄새를 맡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과 묵상으로 깊어진 고요한 고독의 방을 내면에 지닌 이가 있습니다. 그 내면에 너른 대지와 푸르게 펼쳐진 하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내면의 텅 빈 충만감 속으로부터 맑고 푸른 바람이 불어오는 사람. 드물지만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는 비록 사람의 몸이지만, 그런 사람으로부터는 자연을 닮은 본래 맑고 천진스러운 마음이 있어, 생생한 생명력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친구는 서로의 때가 익으면 만나게 될 테지요.


자연과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또 그런 사람을 친구로 둔다면, 칼릴 지브란과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서로가 정신을 깊이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다면 함께 가되, 없다면 혼자서 가겠지만, 사람은 제 눈에 제 그릇 밖에는 볼 수도, 담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늘 자연과 마음으로 눈을 돌리고, 귀를 열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거듭 교만의 자리에 겸손을 앉혀 놓으려 숲에 기대어 숨결을 고릅니다. 그 걸음에 제가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 중에 좋은 방법이 바로 시(詩)쓰기입니다.


오늘은 9윌 9일 중구절입니다. 중양절이라고도 하는 이날은 어릴 적 집에서는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거나 오래된 조상들의 제사를 모아서 일 년에 단 한 차례 지내던 조촐한 제삿날이었습니다. 또 중양절에는 국화주와 국화전을 나누어 먹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추수를 마무리하던 24절기 중 한 절기입니다. 이날 저는 가을에도 빛을 잃지 않은 꽃들을 보면서 그 앞에 교만함을 내려놓습니다. 그루터기가 되어서도 둘레에 많은 생명이 깃들어 살아가게 하는 나무의 그 덕성을 떠올려봅니다. 국화주 대신 국화차라도 한 잔 마셔야겠습니다.



posted by

먼저 비우면 저절로 채워지는 호흡

신동숙의 글밭(229)


먼저 비우면 저절로 채워지는 호흡


모든 생명은 숨을 쉬면서 살아갑니다. 숨이 붙어 있으면 산 목숨이오, 숨이 끊어지면 생명이 다했다고 흔히들 얘기합니다. 평생 우리 몸에서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 호흡이지만, 오장육부의 자율신경계와는 달리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자율 의식으로 그 완급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또한 호흡인 것입니다. 


숨을 내쉬고 이어서 숨을 들이쉬는 그 사이에 삶과 죽음이 있으며 또한 그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는 선각자들의 말씀이 마음을 환하게 합니다. 그보다 앞서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는 천지창조의 말씀에서도 생기 즉 숨의 생명력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날숨이 먼저인지 들숨이 먼저인지 그 이치를 가만히 헤아리다 보면, 호흡이라는 뜻글자를 만들 때 선각자의 그 지혜로운 깨달음 앞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의 지혜는 우리네 삶의 모든 순간마다 빛을 비추어 매 순간의 구슬을 꿰어서 온전한 하나의 고리로 엮어 주는 투명한 실이 되기도 합니다. 호흡에 따라서 얼마든지 삶의 결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맨 처음의 호흡(呼吸)은 내쉴 호(呼)입니다. 뜻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에 온 우리들 첫 순간의 숨은 날숨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호흡은 들이마실 흡(吸)입니다. 우리들 마지막 순간의 숨은 들숨입니다. 이 세상에 온 아기가 처음 터트리는 울음은 날숨의 커다란 비움인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무수한 일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태풍 마이삭으로 인한 피해 복구가 미쳐 끝나기도 전에 북향하고 있다는 태풍 하이선 소식에 모두들 한동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를 시행한 후 다시 일주일이 더 연장이 되고 있는 이 와중에 들려오는 의료 파업과 이웃을 등지고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일부 교회 등 어지러운 소식들은  한순간도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을 수 없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는 태풍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위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태풍과 내 안에서 한데 뒤섞이어 쉼없이 서로 충돌하며 끊임없이 일으키는 생각의 소용돌이는 마치 내면의 태풍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순간 뭉쳐져 태풍이 되기도 하고 온화하게 흘려 보내어 순풍이 되기도 하고, 겸허한 물방울이 되기도 하고 때론 슬픔에 잠겨 마음에 홍수가 나기도 하고, 무심코 쌓아두고 참았던 둑이 한순간 무너져 소중한 이에게 불같은 화를 쏟아내고야 마는 우리들 내면의 풍경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나를 스쳐 지나가는 대상과 현상과 자연은 나를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거울이자 고마운 스승이 되어줍니다. 몸을 받아서 태어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구별에서 사랑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터전으로 삼으며, 내가 이 땅에 온 이유와 목적을 거듭 헤아리곤 합니다. 그 순례자의 여정에 다정한 벗이 되어주는 어둔 밤하늘의 먼 별과 꽃은 언제나 온전한 아름다움이 분명 있다며 우리에게 소리없는 소리로 말없는 말로 그 존재만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헤아림으로 비추어 보는 우리 내면의 속뜰은 별과 꽃 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음인 진리를 이미 씨앗처럼 공평하게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저에게 있어서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언제나 살아 있어서 잠잠할 줄을 모릅니다. 마치 우리 몸에서 숨이 끊어진 적 없듯이, 한순간도 생각이 멈춘 적 없듯이, 태초에 불어넣어 주신 내면의 바람 즉 숨은 곧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가슴 떨리는 증거입니다. 


그 와중에도 우리를 스쳐 지나는 온갖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태풍에 날려가지 않도록 내 몸과 마음과 의식에 고삐를 매어 주는 자율 방편이 바로 호흡인 것입니다.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는다면 호흡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도 입의 말도 크게 도리에 어긋날 정도로 거칠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순간 태풍의 눈이 될 수도 있고 평화의 눈이 될 수도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어하는 자율 장치가 바로 호흡인 것입니다. 


나 한 점으로부터 출발하는 평화의 눈이 되기 위한, 호흡을 잘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들숨보다는 날숨을 더 오래 천천히 길게 내쉬는 것입니다. 누에가 명주실을 뽑아내듯 조금씩 길게 낮게 내쉬는 마지막 숨 끝까지 바라보며 알아차림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저절로 따르는 들숨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굳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기쁨과 감사의 샘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깊이 내쉬는 그 깊이 만큼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들숨인 것입니다. 


한 점 끝까지 숨을 내려놓으며 나를 비운 만큼 저절로 채워지는 들숨은 저절로 부어지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문제란 채움보다는 비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에게 채워주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로의 말처럼 자연은 모든 생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지 너희는 멈추어 하느님을 알기 위해, 먼저 나를 비우라 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 비움이 날숨과 다르지 않기에 이미 우리 몸에 주어진 생명의 호흡과 자유 의지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먼저 비우면 저절로 채워지는 호흡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기도의 시간이 곧 비움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걷거나 앉거나 때론 멈추어 가만히 호흡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런 공평하고 평범하게 주어진 호흡 가운데 내게 선물로 주신 자유 의지로 조절하는 평온한 숨으로 이어지는 평온한 발걸음일 수 있다면 세상은 한발짝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새벽녘입니다.



posted by

眞人, 참된 사람의 우정

신동숙의 글밭(227)


眞人, 참된 사람의 우정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걸어가는 길이 더 풍요로워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 만남이란 사람과의 만남일 때도 있고, 책이나 다른 인연의 스침으로 만난다고 해도 그 울림이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면 한순간이 영원이 되기도 한다. 


개인과의 만남을 넘어 조금 더 크고 넓은 범위에서 보면, 동양과 서양의 만남 만큼 풍요로운 울림도 없는 것 같다. 200년 전 미국의 시인이자 초절주의 자연주의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동양의 <주역>을 만났다. 미국에 유학을 간 인도의 간디는 소로의 책을 읽은 영향으로 비폭력 평화주의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간디와 톨스토이를 스승으로 삼아 일평생 존경했으며, 법정스님은 책에서 만난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영성과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과 나치의 불의에 대항한 본회퍼와 <월든>의 소로를 책으로 만났으나, 일평생 머리맡에 두시며 구도의 도반이자 스승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의 영성 작가이자 토마스 머튼 신부는 <장자>에 매료되었고,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와 맺은 우정으로 일본의 선불교를, 달라이 라마와의 우정으로 티벳 불교를, 그 당시에 평화주의 영성작가인 틱낫한 스님은 직접 머튼의 겟세마니 수도원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 옛날에도 이미 종교와 국경을 초월한 동·서양의 직간접적인 만남들은 아름다운 우정으로 이어졌고, 풍요로운 영성과 사상, 진리를 향한 같은 구도의 지향, 사랑과 평화의 흐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그런 선현들에게서 좋은 이정표를 보는 것 같다. 어둔 세상에 별이 된 선현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으면 어둔 밤하늘 즉 어둔 마음에 빛나는 별자리가 된다.



성무일도를 드리듯 매일의 기도처럼 느긋하게 필사를 하면서 가슴에 새기고 있는 <시편사색>을 더 온전히 읽고 이해하고 싶었다. 시편은 가톨릭 수도승이 매일 드리는 기도문인 성무일도의 본문이기에 그 의미가 깊은 것이다. 그러자면 개역개정, NIV 한·영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민순 신부님이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잘 살려 번역한 <시편·아가>를 함께 보면서 모호하던 한자어가 우리말로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가톨릭 성경 시편이 최민순 신부님의 우리말 번역을 참고하여 개편이 되고 그전에 개신교 성경을 참고하면서도 더욱 현대적인 우리말로 풀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 가톨릭 표준 성경인 NAB까지 다함께 비교하면서 <시편사색>을 읽으니 애매모호하던 의미들이 더욱 또렷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최민순 신부님의 저서와 토마스 머튼을 소개 시켜준 인연도 참된 사람과의 우정이었다.


일편단심이 좋다지만, 한 권의 성경만을 일생 동안 품고서 진리의 바다를 건널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히브리어 성서 번역 작가님이 소개 시켜준 Bible gates에 의하면 전세계에는 50개의 언어로 번역된 150개 버전의 성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마다 해석과 표현 방식에서도 국가와 문화적인 다양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하기에 성경의 문자적 오류란 언제든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때 조심해야 할 점은 내 손 안에 있는 한 권의 성경만을 절대시 하고 나머지를 배제하려는 독선적이도 이기적인 타성이다. 중요한 점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사랑과 진리'를 등불로 삼으며 아울러 예수가 주신 성령 즉 자기 안에 양심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다. 석가의 自燈明  法燈明(자등명 법등명)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는 가르침은 곧 예수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가리키던 복음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시편사색>의 저자인 오경웅의 저서 중에서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된 선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선禪의 황금 시대>에 소개글을 써준 토마스 머튼에 대한 오경웅의 말이 내게도 커다란 울림을 준다. 오경웅의 글을 그대로 옮기자면, "토마스 머튼 신부가 쓴 소개글은 선의 본질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머튼 신부는 이 글에서도 핵심을 건드린다. 머튼 신부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하나이며, 하나의 근원에서 모두 귀하게 태어났다. 본문을 읽기 전에 머튼 신부의 소개글을 먼저 읽어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머튼 신부가 쓴 소개글에 담긴 심오한 생각에 길게 주석을 달아놓은 것이 이 책의 본문이랄 수도 있다. 귀한 글을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을 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머튼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최근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내게 이 '참된 사람 眞人'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오경웅 저자는 1967년 초판본에 이어 1975년에 5판 본에서 "내 가장 절친한 친구인 토마스 머튼과의 풍요로운 추억에 이 책을 바친다."는 인사를 남겼다. 머튼 신부와 오경웅 저자의 근본적 일치란, '인간은 모두 하나이며, 하나의 근원에서 모두 귀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 필자의 근본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인간이란 하나에서 파생된 개체라는 사실이다. 


하나 그리고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의 순례길에 참된 사람 眞人과의 우정이란 그야말로 참으로 복된 선물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우정을 나누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자기 자신과 진리를 등불 삼아야 보이는 길이다. 그처럼 아름다운 우정은 별과 별 사이에 거리 만큼 풍요로운 울림으로 온세상에 널리 퍼지리라.



posted by

어수선한 마당 뒷설거지

신동숙의 글밭(226)


어수선한 마당 뒷설거지


태풍 마이삭이 지나간 후 잇달아 올라오는 태풍 피해 소식에 마음이 무거운 날이다. 난생 처음으로 밤새 무섭게 몰아치는 강풍에 잠이 깨어서 내내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맞이하였다. 날이 밝은 후 내가 살고 있는 집 마당에도 어김없이 밤새 태풍이 할퀴고 간 흔적들로 마음이 어수선하기만 하다. 언제 다 치울까 싶다.


자정 무렵 태풍이 지나가기 전 그날 오후에 친정 엄마가 마당에 있는 깻잎대와 고춧대를 뽑아내시면서 한바탕 마당 대청소를 하시느라 땀 흘리신 정성은 흔적도 없다. 최근 코로나19 재확산을 수습하느라 최전선에 계신 분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까? 이제 겨우 숨돌리는가 싶었는데.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올 2월에 신천지 교인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울산에서는 7월 25일까지 58명의 확진자가 울산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울산은 100일간 확진자 0명을 기록하기도 하며, 이후의 전염은 여름이 되면서 필리핀 등 해외 입국자를 통한 전염이 몇 차례 있었을 뿐이다. 


자녀들은 6월부터 등교를 시작하면서, 여름 방학 전까지 마스크를 쓰고서 안전 수칙을 잘 지키며 학교와 학원을 자유로이 다니며 친구들과 시내에서 떡볶이도 사먹고 영화도 보며 평범한 일상을 누려왔었다. 그러는 동안 필자가 받은 울산시 안내 문자 내용은 대부분이 자연 재해 방지와 코로나19 안전 수칙에 대한 거듭 당부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광복절 아수라장 집회 이후 오늘까지 안내 받은 확진자는 111명이다. 그날 집회 이후 곧바로 끊임없이 집회 참가자에게 검사를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대절해서 올라간 버스가 16대~20대라고 하는데, 자진해서 검사를 받는 인원수는 턱 없이 모자란 실정이다. 보름 여 만에 확진자 수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두 자녀와 집 안에만 있기로 하는 것이다. 


일곱 군데의 학원을 못 보내고 있는 실정에서, 모두가 원치 않는 이 상황이지만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 선결재 학원비를 모두 다 입금해 드렸다. 그리고 지금은 급속도로 올라가는 확산세가 누그러지기를 잠잠히 집안에 머물며 기다릴 뿐이다. 집회 참가자 분들이 속히 자진해서 검사를 받으셔서 치료와 도움을 받으시기를 권면하는 입장이다. 대절한 버스에 올라 타고 서울에 다녀오신 그분들도 누군가에겐 부모이자 소중한 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두 아이들의 개학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지난주부터 온라인 등원을 하고 있는 두 자녀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앗아간 것 같아서 답답한 마음이다. 아주 어릴 때 같으면 책이라도 읽어주면 되겠지만, 큰 자녀들에게는 책보다는 텔레비젼과 핸드폰이 강세다. 이것저것 주위를 둘러보면 마음 무거운 일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모질던 태풍이 지나간 하늘 자리는 맑고 푸르기만 하다.

 

동남향으로 앉은 집이라 마당에 그늘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 3시 경이 되어서야 담밑에까지 그늘이 진다. 그제서야 태풍 뒷설거지를 하러 마당으로 나갔다. 바로 전날 대청소를 했던 친정 엄마의 손길은 흔적도 없지만, 그 정갈한 마음 만큼은 내 가슴에서 사라지지도 않는지 맑은 하늘처럼 되살아난다. 


4미터가 넘는 굵은 감나무가지가 뚝뚝 잘려 나가서 널부러져 있고, 익지도 전에 떨어진 푸른 대봉감에는 햇살이 닿아서 윤기가 돈다. 가을 단풍이 물들기도 전에 떨어진 푸른잎들이 부러진 잔가지와 함께 여기저기 수북하다. 거듭 빗자루로 쓸어 담아서 나무 아래로 가서 부어주었다. 단풍이 물들기도 전에 떨어진 잎들이지만, 세월 속에서 흙과 섞이어 좋은 거름이 될 줄 알기에 나뭇잎들은 마음에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어수선한 나뭇잎을 쓸어 나무 아래로 돌려보내고, 쓰러진 자전거들을 일으켜 세우고, 날아간 복순이 집 지붕을 다시 씌워주고, 대문 밖에 종이와 플라스틱 쓰레기와 엉킨 잎과 풀도 쓸어서 쓰레기 봉투에 담고, 내친김에 쥐똥나무 가지치기도 해주었다. 이 모든 과정을 평온한 숨으로 한 걸음씩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수선함과 오물을 치우는 마음이 한결 정리가 되는 것 같다. 비록 허리와 어깨는 무거워도 마음에는 새로운 기운이 돋아나는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이다. 


태풍 마이삭과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본 우리집의 미약한 피해에 비하면, 그보다 훨씬 큰 피해를 보신 분들을 생각하다 보면, 한순간도 마음이 높아질 수가 없다. 부디 회복 되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마다의 가슴 가장 낮은 밑바닥으로 흐르는 평온한 마음을 기억하면서, 이 시기를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이 어수선함들을 수습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 저녁이 되는지 마당에 그늘이 짙어진다. 좀 더 어두워지면 청소도 힘들 것 같아서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마당을 방안처럼 쓸고 닦은 날이다. 어수선했던 마음을 정리하는 일과 동떨어지지 않고자 숨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매 순간 깨어서 평온한 숨으로, 한 걸음씩 한 마음씩 한 호흡씩 내쉬고 들이쉬면서, 가슴이 텅빈 하늘로 채워지기까지.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