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그림자, 마음이 실체



대상과 마주하는 찰라 거울에 비친 듯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한 마음이 있습니다. 곧이어 생각이 그림자처럼 뒤따릅니다. 종종 그 생각은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가 됩니다.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림자가 된 생각에게 맨 첫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의식 또는 비몽사몽, 명상이나 기도의 순간에 대상과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과 동시에 마음 거울에 비친, 떠오른 그 첫마음이 바로 우리의 본성 즉 본래 마음에 가깝습니다.

곧이어 뒤따르는 의식화된 생각은 단지 본래 마음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실체는 마음입니다. 한 생각을 일으켜 이루어 놓은 이 세상은 마음의 그림자 곧 허상일 뿐입니다.

그 옛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인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석가모니와 예수가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가리키며 보여준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마음입니다. 성인들은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이 실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불경과 성경은 끊임없이 그 사실을 저에게 상기 시켜주고 있습니다. 

저에게 시를 쓰는 일은 그림자인 생각과 미명을 걷어내고 실체인 본래 마음을 포착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그 본래의 마음을 진선미 즉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체에 걸러서 알맞는 말의 옷을 찾아서 입혀 주면 그대로 시가 됩니다. 

매일 아침이면 빛이 있으라. 이 땅과 바다에서 해가 뜨는 것과 같이 아니 그보다 먼저 우리들 가슴마다 공평하게 주신 마음에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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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

 



이따금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 후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어린 생각에도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어린 마음에도 자기에게 곤란하다 싶으면, 아이들은 무심코 엉뚱한 말로 둘러대거나, 금방 들통날 적절치 않은 말이 입에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한 미흡한 말들은 당장에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고 싶다거나, 현실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둔함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일종의 거짓말인 셈이다.

그럴 때면 내 유년 시절의 추억 속 장면들이 출렁이는 그리움의 바다로부터 해처럼 떠오른다.

나의 자녀들과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똑같은 순간이 나의 유년기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겹쳐진다.

함께 뛰어놀던 동네 언니들이랑 무슨 말을 주고 받을 때면, 큰 언니들은 웃음 띈 얼굴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무슨 놀이처럼 작은 내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라는 주문을 걸었다. 그러면 나는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주문에 걸려서 어린 나 스스로는 정말로 가슴에 손을 얹던, 그 순간의 낯선 정적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내 앞에 있던 이들은 내 입만 바라보면서 조용히 기다려 주었고,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과 입을 가까이 마주대할 수 있었던 그 정적의 순간.

그 정적의 고요한 순간이란, 내가 처한 현실과 곧 내 입에서 나올 말이 서로 일치되기 위한 만남과 평화협정의 자리인 셈이다.

그런 고요한 순간에는 거짓말이 발붙일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진실의 말 하나를 내 속에서 나 스스로 찾았다는 사실을 의식함과 동시에 그러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뭔가 모르게 가슴으로 느껴지던 밝음과 개운함,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기 전에 이미 마음이 먼저 충만해져 오던 찰라의 순간을 기억한다. 

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의 말이 먼저 있는데, 어찌 그 외에 다른 말로 하늘을 가릴까?

자라오면서 엄마하고도 그와 같은 순간의 추억이 있다.
바쁘신 엄마는 간단하게 딱 한 마디만 하셨다.

내 얼굴과 두 눈과 입을 똑바로 바라보시면서, "바른말 해라."

그러면 그 한 말씀에 내 몸은 주문이 걸려 모든 걸 멈추고, 내가 처한 현실과 곧 내 입에서 새어나올 말이 일치되기 위해 내 안에선 나름의 애를 쓰던 그 느낌.

그 옛날 언니들이라 해도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무척 어렸을 나이인데, 세 살부터 앓아오시던 천식으로 산고개를 넘지 못한 엄마는 한글도 다 깨치지 못했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서 양심을 깨우는 방법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 사실이 문득 궁금해졌고, 신기했다. 그로인해서 우리나라 민속학에 관심이 모아졌고, 우리 민족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에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한국인의 심성 저변에 흐르는 그 선함과 밝음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겪어오면서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속담처럼 민중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살아서 이어져 온 한의 정서, 즉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이 우리의 DNA 속에는 유유히 흘러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크고 밝은 뜻을 담은 말인 '한'이 부처가 가리킨 '마음'과 예수가 보여준 '마음'과 윤동주 시인이 우러러본 '하늘'과 BTS의 음악 세상에서 언뜻언뜻 엿보이는 '밝음'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진실과 진실한 말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 하늘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내겐 있다. 진실은 진리이신 하느님의 또 하나의 이름이기에.

내가 성철 스님의 법문을 좋아하게 된 핵심 법문이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거짓말 하지 마라." 남에게 거짓말 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씀이다.

성경의 잠언 24장 26절에도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 적당함의 의미는 물론 진실을 내포하고 있으리라.

현실에 딱 맞는 말 한 마디에는 힘이 있다. 진실을 말함으로 인해서 당장에 손해를 볼 것 같은 순간조차도 진실을 말했을 때, 그 뒤에 뒤따르던 밝음과 홀가분함과 그전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열리며 보이던 새로운 문과 주어진 소박한 생의 선물들을 추억하며 종종 혼자서 흐뭇해하는 보석 같은 순간들이 내게는 더러 있다.

생은 진실한 선택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가장 큰 유익함은 혼자서도 좋은 마음의 평화와 자유일 것이다.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이익에 눈이 멀어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해대는 순간의 사소한 거짓말들이 나와 누군가의 마음밭에 또는 이 세상에 씨앗처럼 뿌려진 후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서 얽히고 섥히어 나중엔 자신의 삶을 얽어매는 오랏줄이 되리라는 상황들을 얼마든지 미리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볍게 거짓과 교우한 현실이란, 그 얼마나 힘에 겨울까?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나는 그런 그림을 애초에 그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 자신이 개운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술이나 중독 따위를 만들지 않았음에도 내게도 지우고 싶은 과거의 일들이 많이 있다.

실수와 넘어짐은 늘 발길에 부딪히는 돌멩이처럼 지금도 내 발아래 널려 있으며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땅의 흙처럼 돌멩이처럼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진흙처럼, 어린 시절 놀다가 문득 보면 집에까지 날 따라오며 성가시게 굴던 풀섶에 도깨비풀처럼.

가끔 방송 매체를 통해서 보이는 공직자들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카메라를 쳐다보며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는 분들에게, 누군가가 그들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에 앞서 선서의 말로 그들의 양심을 깨워줄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내 유년기에 겪었던 그 고요한 정적의 순간을 그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을 때가 있다.

국가와 자신이 처한 지금의 현실과 곧 그들의 입에서 나올 말을 서로 일치 시키기 위한 고요한 순간을 선물해 주는 말, 진실한 말 한 마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주문의 말. 하느님이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공평하게 선물로 주신 양심의 해를 깨우는 말.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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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그릇과 찻잎 찌꺼기

 

 

엄마가 일하러 나간 후
배고픈 아이들만 있는 빈 집으로

짜장면, 짬뽕, 마라탕, 베트남 쌀국수, 떡볶이 국물이
이따끔 지구를 돌고 돌아가며 다국적으로 배달이 된다

늦은 밤 높이 뜬 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면
한 끼니용 플라스틱 그릇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공장에서 기름으로 만든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먹다가 남긴 배달음식들도 죄다 기름투성이들

주방세제를 열 번을 뭍혀가며 제 아무리 문질러도
기름과 기름은 서로 엉겨붙어 미끌미끌 나를 놀린다

그냥 대충 헹구어 재활용 폐기물로 버릴까 하다가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는 플라스틱이라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나 하나라도 
하나의 쓰레기라도 줄이자는 한 생각을 씨앗처럼 숨군다

주방세제를 뭍히고 또 뭍히고 
씻겨내고 또 씻겨내어도 미끌미끌

저 혼자서 기름과 씨름하다 보면
이렇게 쓰는 물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집 앞으로 흐르는 강물과 바다한테까지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자연한테 미안한 마음에 속울음을 울면서도
그렇게 미련한 짓을 쉬 멈출 수 없는 이유를 찾느라

기름과 물 사잇길로 사색의 풀숲을 헤치며 나가다 보면
저 멀리 사색의 길 끝으로 한 점의 별빛이 보인다

농사의 신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름 모를 풀을 먹고서 죽어가는 민초들을 불쌍히 여겨
백 가지의 풀을 먼저 먹어본 후 알려주었다는 신농

그 자신도 독초인 줄 모르고서 뜯어먹은 후 죽어가다가
우연히 바로 옆에 있던 나무의 잎을 뜯어먹게 된 신농

그 잎으로 해독이 되어서 다시 살아났다는
신농과 차나무의 이야기가 해처럼 떠오른다

차를 마신 후 무심코 버리던 찻잎 찌꺼기를 
그냥 개수대 한 곳에 모아두기로 한 후

기름으로 엉겨붙은 플라스틱 그릇을 살살 문질렀더니
찻잎 찌꺼기 점잖게 지나간 자리마다 맑게 갠 하늘이다

깨끗하게 씻긴 플라스틱 그릇에는 무엇을 담을까?
앞으로 기름기가 있는 음식은 되도록이면 피해야지

여름날 수박과 토마토를 잘라서 담아두기로 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갈증도 나고 배가 출출한 아이들 

가볍고 밀폐도 잘 되는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은
아이들이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과일 그릇으로 딱이다

그리고 물로 기름때를 씻느라 설거지를 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숨어 있는 내 몸속의 길이 아득하다

지구를 세 바퀴 돌고 도는 만큼의 길이라는
내 몸속의 길로 무엇을 흘려보낼지 말지 생각하게 된다

문득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도
마음은 이렇게 씻기어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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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가 끝나면 <조국의 시간>을 읽기로 했다




요즘은 학생들 기말고사 기간이라고 한다. 학교에서도 코로나 안전 수칙을 잘 지키느라 등교하는 날이 많지 않다. 

고1이 된 딸아이가 가끔 침대에 모로 누워서 귀로만 듣는 온라인 수업이 절반이래도, 돌아오는 시험날은 나가는 월세와 월급처럼 어김이 없다.

그 옛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면, 혼자서 집으로 걸어가는 밤길이 어둑했다. 동대신동 영주터널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추어 서면, 언제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먼저 살피다가, 머리 위에는 달이 혼자서도 밝고, 바로 옆으로 우뚝 보이는 혜광고등학교 창문들마다 그 늦은 시간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거기서 그대로 북녘 하늘로 가로선을 그으면, 저 멀리 대청공원 6·25충혼탑 꼭대기에 작은 불빛들이 마치 작은 별빛 같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두 눈도 따라서 깜빡이다가 지우듯 고개를 돌리고, 언제쯤 저 학교 창문에 불빛들이 꺼질런지, 달이 가는 길을 궁금해하다 보면 잠시 무서움도 잊을 수 있었다.

밤새 어둡고 쓸쓸한 시간을 어떻게 견디나, 방바닥에 누워서도 그런저런 생각을 꽃 피우다가 잠이 들던 나의 학창시절 이야기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서대신동과 동대신동은 산새와 지새가 둥그런 교육 마을이라 불리었다. 그대로 둥근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가던 조용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무분별한 재개발로 인해 곳곳에 고층 아파트가 볼썽사납게 세워지면서, 나의 어린 시절 그 끝없는 한 폭의 하늘을 뚝뚝 끊어놓았다. 하지만 가슴속에선 언제든지 어릴적 뛰놀던 서대신동 바위산 위에서 바라보던 그 커다랗고 밝은 하늘이 펼쳐진다.

고향 마을을 감싸 돌던 구덕산과 푸른 부산항 앞바다도 밤에는 잠을 자는지 늘 깨어 있는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오늘밤에도 달은 어김없이 그 밤길을 혼자서 걷고 있겠다.

 



고1 딸아이가 얼마 전에 <나철 평전>을 다 읽었는데, 기말고사가 끝나면 <조국의 시간>을 읽기로 했다.

남편이 온라인 예약으로 주문한 6쇄 본을 단숨에 내가 먼저 읽고, 그동안 가슴에 옮겨 붙은 불꽃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저 혼자서 가슴 먹먹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2주도 안 지나서 25쇄을 찍었다는 기사를 본다. 아마도 대한민국 출판 역사 이래 처음 찍는 놀라운 기록일 것이다.

흔들리며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길을 잃고 헤매이기도 하는 이 땅의 길이, 내가 걸어온 길이고 또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이 풍진 세상이다. 

다른 한 쪽에선 진실과 정의를 덮으려 기를 쓰고 있지만, 이제는 조국이라는 한 사람이 그저 한 점의 불쏘시개와 촛불을 넘어서, 바른 마음으로 바른 눈을 뜨게 해주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맑은 별빛 같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마음의 짐을 편히 내려놓으시고, 가족들과 함께 그저 평안하고 자유롭게, 이 땅 어느 곳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그 마음 만큼은 자연인과 자유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랄 뿐이다.

상록수의 푸른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져온, 이 한 점의 별빛을 묵묵히 생각하면서 그리고 가슴에 먹먹히 씨알처럼 품고서 살아가려는 이들이 이렇게도 많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쁘다.

지금도 밤길을 걷는 듯 이 어둔 세상, 오래 쉬지도 못하고서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또 걸어가야 하고 살아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가슴 가슴마다, 진실과 정의와 사랑이 불꽃처럼 번지고 있는 모습을, 내가 있는 곳에서도 평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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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섬나라가 아닌, 대륙과 하늘의 나라다

해외 여행이라 하면 비행기가 먼저 떠오른다. 지금은 코로나 비상시기로 출입국이 엄격한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비행기를 타고 가는 하늘길이 아니고선, 지구상의 그 어느 다른 나라든 갈 수 없는, 땅의 길이 막힌 처지가 현재 한국의 입장인 셈이다. 

세삼스레 이런 현실을 떠올리다 보면 가슴 한 구석이 갑갑해진다. 마치 지구촌의 대륙으로부터 한국이라는 나라가 뚝 떨어져 섬처럼 고립된 것 같아서 스스로의 입지를 돌아보게 된다. 

마치 일본처럼 섬나라가 된 한국은 아닌지. 그래서 국민들의 정서까지도 섬나라의 폐쇄성을 은연중에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를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구한말 한국이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겪으며, 광복 직후 열강들이 이 땅에서 일으킨 6·25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겪으며, 나라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당장에 주린 배부터 채우느라 급속한 경제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한국이 한반도의 반토막 짜리 좁다란 땅에서 정신없이 몸부림 치는 동안, 섬나라의 고립된 정서를 닮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주된 원인이 주변국들의 이득권으로 갈라놓은  한반도의 허리인 휴전선과 청산되지 못한 일제와 친일 잔재들임을 거듭 잊지 않으려는 입장이다. 이 사람이 한반도의 끝자락에 살든 서울에 살 적에도 이런 생각과 마음은 변함이 없는 푸른 하늘과 같다.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 거울은 언제나 유유히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해처럼 떠올려 본다. 맑고 시리도록 투명한 역사의 거울은 가리워진 적이 없다.

땅에는 땅따먹기 놀이라는 것이 있지만, 하늘에는 하늘따먹기 놀이란 것이 없다. 하늘따먹기 놀이란 것이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도 놀이가 되었던 적은 아마도 유사 이래로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엉뚱한 한 생각을 일으킨 필자가 스스로 우습기도하다. 나는 땅에서 길을 잃거나 내가 설 땅 한 켠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그리고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 하늘 끝자락까지 바라보려 애쓰던 무거운 한 마음까지도 이제는 내려놓으며,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돌이켜 내면으로 향한다. 그러면 내 안으로 그와 같은 무한의 하늘이 펼쳐진다. 우리들 머리 위에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든지 언제나 우리가 선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느님은 하늘을 펼쳐놓으셨다. 끊임없이 펼쳐진 이 크고 밝은 하늘이 우리들 머리 위에 늘 있어서 우리를 내면의 하늘로 인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정신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고 한다. 뿌리가 썩은 나무는 세월의 풍파를 거치면서, 탁하게 말라가는 어느 한쪽 가지는 잘려나가기도 하고, 또 맑은 수액이 흐르는 가지에선 새순이 돋아나기도 하는 것이 나무의 일생인 자연의 이치라는 법정스님의 법문이 별처럼 빛난다. 

일제강점기 때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 선생의 '조와(弔蛙)'라는 글 속의 문장에서처럼 '얼어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전멸은 면했던 것처럼,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열강들의 이권으로 인한 6·25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 이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잔재와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던 친미제국주의의 물질만능주의의 악영향으로 인해, 단군의 한민족 정신의 뿌리가 썩었다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그래도 이렇게 다 썩은 것은 아닌 것이다.

한국은 섬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그 뿌리로부터 대륙의 나라이자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 민족인 것이다. 지리상으로 남한의 중심이 되는 황간역 2층 마실 카페 벽에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도 그림이 있다. 지금은 은퇴하신 강병규 역장님의 부연 설명이 잊혀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의 여정이다. 손기정 선수는 양정고보 시절 김교신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담임선생님이기도 했던 그는 직접 자전거를 타며 손기정 선수를 훈련시켰고, 동경 예선전까지 따라가서 그를 코치했었다고 전한다.

황간역장님의 이야기를 옮기면, 손기정 선수가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역을 경유하여, 독일의 베를린까지 열차표 한 장으로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순간 깨어났다. 한국은 애초에 대륙의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통일의 날이 오면,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훌쩍 기차표 한 장을 끊고 기차에 몸을 싣고서, 울산을 출발해서 서울과 평양을 거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만주와 울란바토르 대평원을 지나며, 끊임없이 펼쳐지는 대륙의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헤아리다가 잠이 들고, 또 북인도를 경유해서 윤동주 시인이 사랑한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향까지도 갈 수 있는 입장에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셈이다. 

스무 살 중반에 인도 전역을 6개월간 둘러본 적이 있다. 뭄바이에 내려서 방갈로르, 뿌네, 첸나이, 캘커타, 비하르, 델리, 리쉬케쉬, 티벳의 임시정부 다람살라까지. 그냥 잠시 스치듯 어느 마을을 지나치기도 하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선 방을 빌려서 한 달여간 머물기도 하면서, 요가 아쉬람과 요가 센터 등지에서 명상과 아사나 수행을 익히던 시절, 그때는 한치의 앞날도 알 수가 없는 마치 망망대해 망망대천을 표류하던 시절, 잠시 머물고 떠남을 반복하며 길 위에 선 나그네처럼, 가슴으로 마른 모래바람이 지나가던 순례길을, 암흑 속에서 언뜻 보이는 별빛을 따라서 걷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떠돌며 책과 수련 경험을 통해서 여러 구루들을 알게 되었지만, 가슴에 남아 있는 한 분은 라마나 마하리쉬다. 그는 언제나 한 장소에서 오래 앉아 있으면서 깊이 내면으로 들어간 수행자다. 언제나 떠올리면 떠오르는 그의 평온하고 인자한 얼굴과 눈빛이 평온을 준다.

인도의 대륙은 외국인에 대해서 관대한 곳이었다. 지금은 무방비 상태로 덥쳐 오는 코로나 사태에 힘겨워하고 있는 인도인들의 모습이 많이 애처롭다. 게중에 최근 본 고마운 뉴스가 북인도의 하이데라바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시바라는 한 남학생이 코로나19확진 판정을 받은 후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이 좁아서 스스로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가격리를 하였다는 소식이다. 인도인들의 의식이 하늘로 그리고 우주로 열려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한 모습이다. 

오래전 인도 곳곳에서 만난 그들은 참으로 순박한 사람들로 추억한다. 각지를 순례하면서 만났던 인도 사람들과 유럽인들과 미국인 또 우리와 같은 한국인 여행자들도 생각난다. 그리고 다들 만남의 첫인사로 먼저 나오는 질문이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이었다.

"한국"이라고 대답을 하면, 곧장 되돌아오는 대답이 "북한? 남한?"이라는 또 한 번의 질문이었다. 처음엔 그러한 질문 자체가 어색했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외국인이 어디 한 두 명이어야지. 그러면서 우리가 속한 나라 한국의 처지를 다시금 재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미있었던 건,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부터 주입되다시피한, 한국인들이 그렇게도 동경하는 미국에서 온 어느 미국인의 태도였다. 한국, 독일, 이탈리아, 이란 등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은 리쉬케쉬의 어느 식당 테라스에서 서로 나누었던 인삿말이 지금까지 화두가 되기도 한다.

다들 자기의 출신 나라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미국인 샘의 차례가 되었을 때, "I'm sorry, I'm American." 그러면서 정말로 샘은 자신이 미국인인 것을, 우리가 세뇌되었던 것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닌,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꽁지머리의 샘은 리쉬케쉬의 요가 아쉬람에 숙소를 정하고서 그곳에서 장기간 머물며 생활하고 있던 미국인, 그의 인삿말이 내내 가슴에 남는다. 그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때부터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이 열린 셈이다.


어제는 <나철 평전>을 딸아이에게 읽어보도록 권했다. 딸아이는 책장을 펼쳐 읽기 시작하더니, 재미있어하기도 하고 놀라워하는 눈치다. 간간히 익숙한 이름들과 사건들이 나온다며,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제 방 책장에 꽂혀 있던 중3 국사책을 가지고 온다. '나인영과 무장단체', '을사오적'이라는 말을 기억한다고 했다. 

함께 국사교과서를 펼쳐서 읽어보았다. 수업 시간에 국사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셔서 딸아이가 필기를 해둔 이름으로 '나인영, 오기호'라는 이름이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딸아이는 '나인영'이라는 이름을 외우면서 여성의 이름인 줄 알았다며, '나철'의 옛 이름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중3 국사 교과서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단군 숭배 사상을 기반으로 한 단군교(대종교)는 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씌여 있다. '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단군교(대종교)'라는 문장은 이번에 새로 읽게 된 <나철 평전>에서도 보았던 문장이기도 하다.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의 학창 시절에 그토록 밑줄을 그어가면서 외우고 시험 때마다 백 점을 받았는데도, '나인영'이란 이름도 '단군교'와 '대종교'라는 이름은 낯선 이름이었다. 현 국정 국사교과서에 실린 역사의 문장이 바르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인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썩은 뿌리로부터 오른 가지는 때가 되면 세월의 풍파에 저절로 떨어져 잘려나갈 테고, 맑은 수액이 흐르는 마른가지에선 새순이 돋아나리라는 자연의 이치가 수천 년을 지나온 나무의 일생이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좁고 잘려나간 국토의 막다른 땅이지만, 이 땅의 역사를 크고 밝게 비추는 하나의 거울 같은 하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서, 언제든 땅에서 길을 잃으면 하늘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예수와 석가모니의 손가락이 가리킨 우리의 내면으로 펼쳐진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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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하늘, 그 원맥을 <나철 평전>에서 찾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일본인도 사랑하는 세계 평화의 시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하늘이 아름다운 시인, 그런 윤동주 시인의 하늘이 나는 늘 궁금했었다. 그 하늘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학술서와 문학서에선 어린 시절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마을인 북간도, 그곳 마을에 살던 이웃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라서 그렇다고들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윤동주 시인의 하늘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펼쳐지는 하늘은 분명히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이다. 시에서 크고 밝은 한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시인이 윤동주인 셈이다.

나는 늘 그의 하늘이 궁금했었다. 그 하늘의 원맥이 궁금했었다. 그동안 윤동주 시인과 관련한 대부분의 책들 그 어디에서도 안타깝지만 그 원맥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철 평전>을 읽으면서 북간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의 선각이 된 인물인 '나철'을 알게 되었다.


<삼일신고>, <신리대전>, <신단실기>, <천부경> 민족의 경전과 그에게로 이어지는 대종교를 통해서 윤동주 시인의 하늘 그 원맥을 찾게 되었다.

'대종교'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그 당시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으로, 단군의 '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선각이 되었다.

 



<나철 평전>을 통해서 알게 된 하늘의 원맥은 윤동주 시인만이 아니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좋아하신 올바른 역사학자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조소앙, 손기정,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지청천, 조선의 말과 글을 지킨 주시경, 지석영, 외솔 최현배. 많은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나철의 대종교인들이었다. 나철 그는 독립운동의 선각이다.

역사의 진흙탕 속에 숨어 있던 보화를 발견한 자의 떨리는 심정으로 딸아이에게 물었다. "딸아~ 3·1독립운동을 아느냐?", 딸아이는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표정을 짓는다.

"딸아~ 그러면 3·1독립운동이 있기 이전에 도화선이 된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딸아이는 그런 것도 있느냐는 표정이다. 

"바로 일본 동경의 유학생들인 YMCA 한인 기독교 청년들에 의해서 일어난 2·8독립운동이다. 2월 8일은 너의 생일날이기도 하니까. 평생 잊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런데 그보다도 앞선 2·8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무오독립운동이 이미 만주와 북간도에서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번에 엄마가 알게 되었다며,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자녀들 앞에서 선포하었다.

3·1독립선언문과 그보다 더 앞선 2·8독립선언문에 친일 인사들의 입김이 섞여 있다면, 순수한 조선인의 입김으로 씌여진 독립선언문은 만주와 북간도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나철의 대종교인들에 의해 씌여진 무오독립선언문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딸아이와 아들 앞에서 거듭 말해주었다. 

어린 자녀들이 당장은 그 뜻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어린 자녀들의 마음밭에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는 봄날의 가벼움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역사의 거울을 밝히지 못한 민족에게는 나아갈 미래가 선명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 온세상을 이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단군의 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하늘을 통해서 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 고조선의 화랑과 선맥의 풍류를 보고, 부처의 불성을 보고, 공자의 군자를 보고, 예수의 성령을 보고, 참자아, 본성, 진리의 온전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인의 DNA 속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크고 밝은 세계 평화의 하늘을,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시뿐만이 아니라, BTS의 춤과 노랫말에서도 본다. 

크고 밝은 하나의 하늘빛을 무지갯빛으로 꽃 피우고 있는 다이너마이트의 한국과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하늘과 진리의 원맥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철은 한국의 역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으로 독립운동의 선각이다. 조선인 최초로 자신의 명함에 한글과 한자와 영문의 이름을 나란히 새긴 멋스러운 이름, 아름다운 하늘을 윤동주 시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이어준 이름, 그리고 알게 모르게 오늘날의 우리 후손들에게로 유유히 이어준 원맥의 이름인 것이다. 

이곳에 다 담지 못한 숨은 보화 같은 이야기들은 새로 꽃 피운 <나철 평전> 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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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복순이가 무서운 쿠팡맨



우리집 대문에는 열쇠가 없다. 대신 못 쓰는 비닐 포장지를 꼬깃꼬깃 접어서 문틈에 끼워두면, 아무렴 태풍이라 해도 대문을 덜렁 열지 못한다. 

바로 옆집과 앞집에는 cctv까지 설치해 두고서 대문을 꽁꽁 걸어 잠궈두고 있지만, 우리집 마당에는 낯선 낌새만 채도 복순이와 탄이가 골목이 떠나가라 시끄럽게도 집을 지킨다. 이 점이 이웃들에겐 내내 미안한 마음이지만, 다들 별 말씀은 안 하신다.

대문을 열쇠로 잠그지 않는 이유는 배송 기사님들이 다녀가시기 때문이다. 부재시 따로 맡길 장소가 없다 보니, 예전엔 담을 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대문을 열쇠로 잠그지 않고, 그 옛날집들처럼 엉성한 잠금 장치를 둔 것이 비에 젖어도 괜찮은 비닐 포장지인 셈이다. 

기사님들은 그냥 대문을 살째기 밀고서 들어오시면 된다. 그리고 나가실 때, 본래대로 꼬깃한 비닐을 문틈 사이에 끼워두시는 것도 다들 잊지 않으신다. 

전날에 쌀독에 쌀이 떨어져 옹기 항아리 밑바닥이 보이길래, 남편에게 전달을 하니 온라인으로 쌀 주문을 해놓은 것이다. 바보 같지만 나는 이적지 온라인 주문을 할 줄을 모른다. 

배송 기사님은 개가 하도 짖어서 대문 안에 못 들어간다는 전화 한 통 남기시곤, 쌀 20kg을 대문 안이 아닌, 대문 밖에 세워두고서 사라지셨다고 한다. 그렇게 밤까지 쌀자루가 든 택배 박스는 대문을 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골목길 가로등 불빛에 어슴푸레 비춰보아도, 종이 박스를 포장한 모서리들이 영 엉성한 것이, 곳곳에 테이프가 벌어져 있길래 살짝 벌려서 보니, 바닥에 고꾸라져 있던 쌀가마 입구 한쪽이 터져 있고, 하얀 쌀알이 쏟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 마침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혹시 택배 박스를 열어보았더냐고 물으니 손도 안댔다고 한다. 그런데 낮에 집 안에 있으면서, 택배 기사님이 다녀가시는 것도 보았고, 참새들이 모여드는 것도 다 보았다고 한다. 

놀란 가슴에 혹시 참새가 박스 틈새로 들어갔더냐고 물으니, 그냥 박스 밖에만 모여있더란다. 그래서 "그 참새들 참 영리하네!" 했다. 보이지도 않는 그 박스 속에 쌀알이 있었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보다 신통하기도 하다며. 자연에는 여전히 인간의 의식이 닿지 않은 신비의 영역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저녁 바람처럼 가슴께를 스치니 겸손한 마음이 인다.

순간 배송장을 확인하고 배송 기사님께 전화를 걸어볼까도 했지만, 쌀가마 입구가 터지거나 말거나, 쌀이 쏟겨진 곳은 그나마 박스 안이니까, 쌀에 참새나 쥐만 다녀가지 않았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앞선다. 

 

 

20kg 쯤은 아이 하나 번쩍 들어서 안는다는 마음을 내면 무거운 무게가 아니다. 쌀이 더 쏟기지 않도록 쌀자루를 세워서 먼저 안으로 옮기고, 박스 안에 쏟긴 쌀은 그냥 버릴까 하다가 양이 제법 많길래, 박스를 조심스레 기울여 양재기에 쏟아 담아보았다. 돌이 섞이진 않았을까 혹시 작은 벌레가 기어나오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살펴보니, 방금 쌀독에서 막 퍼낸 쌀 같다. 

우리집엔 쌀 뿐만이 아니라, 계란과 두부까지도 새벽 배송을 받기도 한다. 따로 장을 보러갈 시간도 아끼고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이렇게도 참 편리한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는 있지만, 일회용품 쓰레기를 달고 오는 택배 물품들이 도착할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는 무거운 돌을 하나씩 얹어 놓는 듯하다. 이처럼 편리하고 빠른 삶의 방식으로 인해 이 땅에 빚을 지고 있다는 부채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주위에서 들은 소식통에 의하면, 이런 경우에 쿠팡에 전화 한 통이면, 밑이 터지지 않은 멀쩡한 쌀을 다시 보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주문의 편리함에 더해지는 그 서비스의 무한 책임감 밑에 깔렸을 저들의 속뜻을 슬며시 밀어내며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인다. 

당장 내 눈 앞에 드러나 보이진 않지만, 당장 나에게 플러스가 되는 물적 서비스가,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겐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라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을 이루는 물적 자원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선현들의 말씀이 늘 가슴으로 샘물처럼 흐른다. 현재 대한민국을 삼키듯 점령하고 있는 쿠팡과 배민의 손길에서 자유로운 지역이 어디 있을까? 나는 그곳이 영혼의 숨통이 트이는 자유의 영토일 것만 같다.

이 참에 말이 나온 김에, '배달의 민족'이라는 이름자에 대해서, '배달'은 크고 밝다는 뜻인 '한'의 옛말이다. 그 고귀한 본뜻을 퇴색시킨 듯한 브랜드명이 한반도의 변두리 사람인 이 사람의 마음에는 미덥지 못하다. '이순신'이란 훌륭한 이름을 우리 후손들이 자녀들의 작명으로 잘 짓지 않는 이유는 그 이름자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리라. 

국민적 동의 없이 국가적 차원의 명예로운 이름을 차용한 이 브랜드명이, 이토록 고귀한 본뜻인 '크고 밝다'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려면, '배달'의 본뜻을 실천하는 길인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곧 세상의 모든 만물을 널리 이롭게 하며, 자연의 이치와 순리대로 살아가는 세계를 만드는 참된 기업이 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두고두고 그만큼 사회에 끼치는 공헌도와 영향력이 하늘 만큼 크고 밝아야 할 것이다. 

그 옛날 전세계를 지배하려던 알렉산더 왕의 야욕과 정복욕을, 쿠팡과 배민에서도 겹쳐져서 보이기도 한다. 전세계와 나라를 제국·식민주의로 만들려는 야욕은 파괴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대량 소비와 개발로 인해 지구의 유한 자원을, 가장 빨리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다름 아닌 편리함과 빠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편리함과 빠름이라는 노선에서 가끔씩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이런 마음일 수 있다면, 직통과 직선의 편리함이 아닌 구불구불 불편함과 곡선이 주는 삶의 미학을 선택하려는 마음, 빠름과 풍요함이 아닌 느림과 가난이 주는 정신의 맑음을 선택하려는 마음 말이다. 

소로우와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그런 간소함과 단순함이 낳는 삶의 진실성과 선함과 아름다움, 그런 조화롭고 균형 있는 삶이 결국에는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인간의 길, 자연의 이치라는 생각을 하면서 쌀을 씻는다. 

그리고 어깨를 짓눌렀을 쌀가마가 든 택배 박스, 그 무거운 짐을 힘에 부쳐 한순간 떨어뜨리듯, 땅에 내려놓으며 한 숨 돌리자마자 또 로켓처럼 내달렸을, 쿠팡맨의 하얀 한 숨을 생각하면서, 오늘 저녁에도 평화의 쌀을 씻으며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저녁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한 말소리,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손주들이 평소에 할아버지로부터 내내 들었다는 가장 기억에 남는 참된 가르침이 하나 있다. "아껴라, 아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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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와 길상사




한겨울을 지나오며 언뜻언뜻 감돌던 봄기운이 이제는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요즘입니다. 길을 걸으며 발아래 땅을 살펴보노라면 아직은 시들고 마른 풀들이 많지만 그 사이에서도 유독 푸릇한 잎 중에 하나가 로즈마리입니다. 

언뜻 보아 잎 모양새가 소나무를 닮은 로즈마리는 개구쟁이 까치집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손으로 스치듯 살살살 흔들어서 그 향을 맡으면 솔향에 레몬향이 섞인듯 환하게 피어나는 상큼한 향에 금새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로즈마리를 생각하면 스무살 중반에 신사동 가로수길과 돈암동 두 곳의 요가 학원에서 작은 강사로 수련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고시원 방이 삭막해서 퇴근길에 숙소로 데리고 온 벗이 바로 작은 로즈마리 묘목입니다.

언제나 로즈마리와의 인사법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듯 손으로 잎을 살살살 쓰다듬으며 향을 맡는 일입니다.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에게 물도 주고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날이 더해 갈 수록 로즈마리는 언뜻 보아 위로 키가 자라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키에 비해서 잎은 살이 찌지 않고 오히려 풀이 죽은 듯 보였습니다. 어떻게 살릴까 몇 날 며칠 궁리를 하였습니다.

 



낮에는 요가를 가르치고, 길벗처럼 원성스님의 그림책에서 본 해맑은 동자승의 얼굴을 마음에 담기도 하고, 법정 스님의 삶과 월든 숲 소로우의 삶을 생각하면 혼자 길을 걸으면서도 외롭지 않던 맑은 나날입니다. 

요가를 공부할 수록 명상과 생명과 생태에도 관심이 가게 된 것은 요가의 대체의학인 아유르베다와 한의학에 깃든 자연의 진실하고 선한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자연히 섭생은 자연식에 가까워졌고 몸도 따라서 저절로 기울어 순응하듯 물처럼 도시에서 자연으로 흘렀습니다. 

당근과 감자와 오이와 사과만 먹고도 몸이 만족해 했습니다. 물통이 있고 찻잎이 있으면 어디든 평안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언제나 물통과 찻잎을 지니고 다니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때는 요가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원장님이 다려주시던 따끈한 보이차가 몸을 보호해 주던 따뜻한 기억이 있습니다.

작은 방에서 로즈마리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자니,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의 처지와 나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즈마리가 이 작은 화분이 아닌, 산속이나 산자락 어디쯤에다 뿌리를 내렸다면 훨씬 더 생기를 뿜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빽빽한 도심 속에서만 살아온 나의 처지도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의 생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 한 생각이 들고부터는 마음이 더욱 자연과 산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휴일날, 로즈마리라도 먼저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이른바 로즈마리 출가를 시키자는 결심을 낸 것입니다. 생각 끝에 지하철을 타고 마을 버스를 갈아 타고서 도착한 곳은 법정 스님의 성북동 길상사입니다. 길상사의 시민선방으로 오르는 길 우측 화단 나무 아래에 작은 로즈마리 묘목 하나를 허락도 없이 모셔둔 것입니다. 

그때의 일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 작은 로즈마리가 여전히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벌써 뽑아버렸는지, 아니면 저절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무리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길상사를 떠올릴 때면 저와 잠시나마 벗이 되었던 로즈마리의 향기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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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보스 차와 아버지



아버지는 루이보스 차가 좋다고 하셨다. 딸이 드리는 이런 차 저런 차를 다양하게 맛보시더니 그중에 루이보스 차를 드시면 속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식사는 되새김질로 마무리를 하셨다. 풀밭에 앉은 황소가 우물우물 풀을 씹어 먹듯이 소눈을 닮은 아버지의 큰 눈망울은 끔벅끔벅 먼 고향 하늘가 어드메 쯤인가를 그리시는 듯 보였다.

그러면 함께 밥을 먹던 엄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던 한소리가 "추잡구로" 아버지의 되새김질에 뒤따르는 엄마의 추임새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처럼 점잖구로 어릴 적에 소여물을 먹이시던 묵은 얘기를 또다시 처음처럼 풀어놓으셨다. 

그러면 어린 내 눈앞으로 누런 황소가 보이고, 우물우물 움직이는 소의 되새김질이 보이고, 순한 소의 눈망울 속으로 푸른 풀밭을 닮은 푸른 하늘이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시골의 어느 작은 초가집이 우리집이 되고, 저녁밥 짓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옆으로 지붕 위에는 하얀 박이 밤하늘의 달님을 닮아 있었고, 달님의 순박한 얼굴은 엄마의 얼굴이 되고 아버지의 얼굴이 되고, 순한 한국 사람의 얼굴이 되고 하나의 커다란 얼, 하늘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장이 약한 조카 아들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루이보스 차를 좋아한다. 한참 성장기에 있어서 생우유를 물처럼 마시는데, 간혹 고모집에 놀러올 때면 루이보스 차를 우려서 루이보스 밀크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조카 아들에게도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차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스스로의 몸으로 자기의 체질에 맞는 똑같은 차를 찾았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루이보스 차 티백 하나를 찬물에 담궈두었다. 가족들이 잠자는 동안 밤새 잘 우러나서 아침이면 투명한 보리차 빛깔로 반기며 아침에 가족들의 빈 속을 깨워줄 것이다. 

내 체질에 맞는 차를 하나 알고 있다는 것은 편안하고 좋은 길벗을 곁에 둔 것과 다르지 않다. 몸이 잠을 자는 동안 밤새 비운 속으로 물처럼 순해진 루이보스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첫물길을 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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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신동숙의 글밭(317)


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 교회가 맹신앙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지가 되지 않기를 -



코로나 바이러스와 탐진치 삼독의 전파지가 된 일부 교회와 선교기관들로 인해서, 교회가 더욱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요즘이지만, 한 시절 교회에 몸 담았던 나에게 있어 교회 생활은 참 달콤했다. 


그런 달콤한 교회당을 떠나온 일을 비유하자면, 카필라 왕국을 떠나오던 석가모니의 일에 비할 수 있을까. 5년 동안 뿌리를 내린 교회에서, 마지막 갈등의 순간에, 지나온 과거를 깊이 되돌아보았고, 다가올 미래를 거듭 내다보며 뼛속까지 자녀들의 영혼까지 짐작해보았다. 


이대로 교회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면 두 자녀들은 겉으로는 순조롭게 자랄 것이고, 우리 가정은 평안할 것이었다. 하지만 맹신앙으로 영혼은 잠들 것이고, 마음은 거듭되는 기복의 욕망에 젖어들어 비대해질 것이었다. 성경은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느님을 볼 것임이오.'라고 마태복음 팔복은 말한다. 다른 것보다 내게 두려운 하나는 눈이 가져려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되는 일이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전혜성 박사님의 자서전을 읽었던 때는 큰 아이가 두 살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섬김'이라는 단어는 내게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큰 아이가 7살이 되던 해에 유치원 선택을 앞두고 또 한 번 깊은 인생의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 유치원과 개신교 선교원을 두고 어디를 보낼까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앞으로 삶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는 인생의 중대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때까지도 가슴에서 내려놓은 적 없던 화두인 '섬김'과 '사랑'으로 인해 자연히 선교원으로 기울게 되었다. 큰 딸아이의 유치원 선택을 두고 갈등하던 당시에 라디오 불교 유나 방송에 사연을 올린 어느 지체 장애인을 대하던 비구니 스님의 답변이 내게 브레이크를 밟고서 기독교로 노선을 바꾸게 한 계기가 되었다. 장애 인식에 대해서 모난 불교와는 달리 기독교에선 장애인을 대할 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은총의 몸이라 했다. 그런 둥근 시선이 내 본성이 가리키는 진리에 더 가까웠다.


큰 아이를 선교원에 보내면서도 엄마인 나는 그 뒤로도 라디오 불교방송을 들으며 일 년을 보냈다. 이미 힉창시절부터 도서관에서 읽어오던 책들은 기독교와 불교의 종파를 초월해 있었고, 동서고금의 양서들을 넘나들고 있을 때였기에 내면에 별다른 혼돈과 갈등은 없었다. 누가 물어보면 자녀는 선교원에 보내고, 엄마는 불교방송을 듣는다고 얘기하곤 했었다.


큰 아이가 선교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레나 마리아>와 이어령 선생의 <지성에서 영성으로> 두 권의 책이 계기가 되어서 인생의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작은 아이가 태어날 무렵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개척교회 사모님이 나를 전도하기 위해서 3년을 기도했다던 그 시기에도 그분들의 유혹적인 도움의 손길을 조심스레 거부했었다. 도움을 받으면 교회를 나가야할까봐 매이고 싶지 않았다. 친정과 시댁이 멀어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섬처럼 고립된 집에서 혼자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비록 몸이 상했지만, 내가 손길을  내밀기만 하면 지척에 있었던 교회지만 도움을 받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기도가 고마운 터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두 자녀의 손을 잡고서 제 발로 주일날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이다. 교회를 정하기 위해서 작은 개척 교회와 집에서 가까운 대형 교회와 집에서 조금 먼 중형 교회 중에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앙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중형 교회를 선택하게 되고, 5년 간 그곳에 몸담았다. 


처음 교회를 방문한 그때가 빼빼로데이를 앞둔 11월의 주일이었기에 선물로 빼빼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두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진정한 섬김을 배우기 위해서, 이 결심은 이미 20대 가슴에 품은 뜻이기도해서,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자 혼자 가슴에 품었던 씨앗이 맺은 하나의 결실과도 같았다.


예수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섬김을 받으러 교회에 간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배우며 섬기기 위해서 교회에 간 셈이다. 그 섬김이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와 세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랬다. 부끄럽지만 교회의 환영식은 떠들썩했다. 새신자 교육을 받던 4주 동안, 문자 몇 통을 주고받던 어느 집사님의 추천으로 문서사역부로 가게 되었다. 교회에 다닌지 한 달 뒤부터 교회 안에서 꿈꾸던 나의 섬김이 작으나마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교인들을 만나서 '칭찬 원고'를 의뢰하고 글을 받아서 원고 교정을 보고 담당 집사님께 이메일로 넘기는 일이 내가 담당한 일이었다. 그 사명은 내가 교회당을 떠나올 때까지도 계속된 섬김이었다. 그리고 더 커다란 교회로 나아가는 걸음이었다.


함께 문서사역을 담당했던 이 권사님은 지금도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한다. 이 권사님은 서울의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후, 울산대 교수인 남편을 따라서 울산으로 내려오신 분이다. 교직에 있다보니 총 열한 분의 목사님을 모셨는데, 학교에서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다 보니 지금의 교회로 오시게 되었고, 권사님은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물고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교회당을 떠나온 후로 일 년에 한 차례씩 잊지 않으시고 나를 불러내셔서 밥을 사주신다. 작년엔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하고,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재작년 가을엔 이 권사님을 만나서 통도사 앞 식당에서 사주시는 산채비빔밥을 먹고 무풍한송로를 함께 산책하면서 한희철 목사님의 <어느 날의 기도> 시집을 선물해드렸었다. 


우리 딸아이를 위해서 닭을 잡아주시던 장 집사님은 우리 가정을 위해서 목장의 목자 가정이 되어줄 테니, 교회에 다시 나오라고 하신 게 코로나 펜데믹 전의 말씀이다. 성가대실에 함께 있어도 별다른 대화를 나눈 적 없던 방과후 아동 쉼터 '반올림'의 이집사님은 지금껏 일 년에 한 두 차례 안부 전화를 주시는데, 지난 주 아침에도 전화를 받았다. 내겐 고마운 분들이고, 여전히 교회다.



2016년 교회당을 떠나올 때의 답답한 심정을 가슴에 담아둘 수 없어서, 2017년 4월에 시작한 페이스북, 내게 온 첫 친구 신청은 같은 교회에 다닌 박 집사님이다. 교회 안에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처음엔 친구 신청한 분이 누군지 몰라서 프로필과 포스팅을 살펴보니, 교회를 떠나오기 직전 주보에 실을 원고를 문자로 의뢰했던 분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으신 후 울산대 교수로 가시게 된 사연을 전교인들과 함께 나눌 신앙 간증이 주보 원고 청탁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우리 가정이 삶과 마음을 나눈 교회의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내겐 교회에 내린 뿌리였다. 삶의 중심에 두었던 뿌리를 뽑아내는 일은 또 한 번의 죽음과도 같았다. 석가모니가 카필라 왕국을 떠나올 때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지 어땠을지 지금도 가끔 헤아려본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자본주의의 물질과 문명 사회를 벗어나서 스스로 20대에 산과 인도로 향하던 떠남이 내겐 먼저 있었다. 그것은 이 생에서의 성공과 풍요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나그네 길이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려서도 마음에 성공과 풍요를 꿈꾸어본 적이 없다. 굶기를 밥 먹듯이 보낸 유년기였지만, 하늘을 보면서 자랄 수 있었고 나에겐 늘 마음이 문제였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 후 목장을 선택할 때에도 또래 자녀를 둔 가정이 아닌 선교원 원장이신 권사님이 계신 목장을 선택했다. 그곳이라면 섬김을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섬김'이 나에겐 화두였기에, 목장 생활에서 받을 수 있는 섬김과 혜택은 애초에 접어두었다. 우리 가정은 목장 식구들과 따로 나들이를 간 적이 없다. 그전에 목장 생활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다들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 고지식한 엄마로 인해서 자녀들에겐 목장의 추억이 없다. 목장 모임은 나 혼자서 낮시간에 선교원에 잠깐 들러서 가졌던 짧은 기도와 식사 모임이 전부였기에.


어려서부터도 재미보다는 의미를 찾아온 삶이다 보니, 목장 생활에서 오는 재미와 안락은 관심 밖이었다. 주일 학교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까지 사역을 담당하시고, 주중엔 선교원의 원장님이기도한 권사님은 늘 바쁘셨고 나는 그분의 뒷모습에서 섬김을 배웠다. 함께 점심을 먹을 가정도 안정적이진 못해서 주일 예배가 끝나고 목장별 점심식사 시간엔 혼자 밥을 먹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나에겐 외로울 틈이 없었다. 외로움은 나에겐 이미 익숙한 옷이었고, 내 곁엔 언제나 책이라는 좋은 길벗이 있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지금도 내겐 고마운 선물이 된다. 


주중엔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씀 공부'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해서 참여했었다. 그리고 5년 간 매 주 있는 목장 모임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비교적 단순한 삶을 살아오던 내겐 따로 정리할 생활이나 버릴 습관이랄 것도 없어서, 내 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었고, 그외 자녀의 학교와 가정과 집안 일들은 자연히 교회 일정을 중심으로 순조롭게 조정이 되었던 것이다. 신년 다이어리에는 예배와 기도 모임과 목장 모임과 말씀 공부 날을 일 년 단위로 먼저 표기해두고 교회를 중심으로 나머지 삶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살았다.


새신자였지만, 일 년이 지난 무렵부터 십일조를 하기로  결심했다. 교회는 매 달 절기마다 행사는 왜 그렇게 많은지 감사 헌금 봉투와 절기마다 특정 헌금 봉투와 주일 헌금, 작정 헌금, 선교 헌금, 십일조 봉투까지 보태면 주일 아침마다 최소 서너 개의 봉투를 들고 예배당이 있는 3층까지 천사처럼 오르곤 했었다.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주일이면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또래들과 함께 춤추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기도를 배우는 삶이 그대로 행복한 섬김의 삶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기에 교회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 생활을 3년을 넘게 해오던 내게 목사님은 '집사'라는 안수를 주셨다. 그리고 그날 바로 고 집사님은 내 손을 잡더니 성가대실로 향했다. 40여 명의 성가대원 중 총무 집사님이 나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시더니, 바로 그날 오후에 처음으로 교회에 성가대 밴드 모임방이 만들어졌다. 그곳에 간간히 글을 올리는 일이 내겐 소소한 즐거움이었고, 교인들과도 작은 소통의 창이 되었다. 나에게 교회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얘기하라면 성가대 생활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가대원을 하면서 종교 생활에 더욱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받은 사랑과 기쁨으로 넘치던 사랑방이었다.


주일 아침이면 싫다는 아이들을 깨워 일찍 챙겨서 성가대실에 모여 주일 예배 1시간 전에 찬양 연습 후 헌금 봉투 서너 개를 챙겨서 3층 예배실로 향했다. 성가복이 내겐 천사의 날개옷 같았다.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은 경쾌했고 우아했고 마치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착각에 스스로 빠지기도 했었다. 우리 가정에게 있어 교회는 위험하고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노아의 방주가 되어있었고, 이생에서 누리는 천국이자 구원의 직행 열차였다. 


삼복 더위 복날 딸아이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닭을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엄마에게 주문 통닭이 아닌 엄마가 해주는 삼계탕이 먹고 싶다는 말을 했고, 어떻게 그 얘기를 어깨 너머로 들으신 장 집사님은 밀양 시골집에서 손수 키우신 닭을 잡아서 가마솥에 넣기도 하셨는데, 성가대 전체 모임 외에도 우리 가정과 또 한 가정을 따로 초대해서 바베큐 파티를 해주시던 고마운 마음들, 어린이날 체육대회, 가을 야유회, 전교인 삼겹살 파티, 성가대 연말 음악회를 위해서 카페를 통째로 빌려 음대 교수인 바이올리스트를 초대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려준 집사님 등등 교회 생활은 풍요로웠고 생활은 기름졌고 달콤한 나날이 쉼없이 돌고돌아서 일 년이 가고 또 일 년이 금새 흘렀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안정적이고 윤택한 생활을 해오던 나와 우리 가정의 종교 생활은 그렇게 순조로웠고 행복했다. 교회 행사 때면 반복되는 불신자 가족 초대의 자리를 통해서, 자판기 커피를 함께 마시며 얘기를 나눌 친구를 한 명 사귀게 된 남편까지도 마음을 돌이켜 온가족이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자녀들까지 각자의 주일 학교 자리에서 또래 친구들과 행복한 교회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그랬던 천국이자 행복의 왕국과도 같았던 교회당을 떠나온 것이다. 어쩌면 더 넓은 교회, 세상으로 나아가는 열린 걸음이다.


행복에 잠든 나를 흔들어 놓은 건, 뿌리를 내린 달콤한 교회와 교인들이 아니었다. 신약을 읽으면서 만난 예수였다. 내 양심 깊은 곳으로부터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때론 바늘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처럼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이 있었다. 신약 성서의 예수에 비추어 내 양심의 거울은 더 닦여졌는지, '이게 아닌데, 신앙 생활과 섬김의 삶이 이게 다가 아닌데'하는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게 신약 성서를 눈 앞에 펼쳐서 읽던 경험은 밝은 태양빛 아래 선 것처럼 눈이 부셔서 거듭 눈을 감아야 했으며, 가슴이 깨어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 예수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온전한 진리의 몸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해의 바탕에는 그동안 읽어온 불교 서적과 동서고금의 인문서적과 수행서와 경전이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신약 성서는 내 가슴으로 곧바로 못이 박히듯 파고들었고, 하늘에 박힌 별처럼 지금도 못이 빠지지 않고서 나와 함께 살아서 생명의 숨을 쉬고 있다.


예수는 외식하는 자 교만하며 풍요로운 엘리트 바리새인을 두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으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가까이 하며,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에게 대접한 것이 나에게 대접한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분명 세상과 단절된 노아의 방주 같은, 내가 다닌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설교하는 기복 신앙이 되는 자녀의 성공과 가정의 부유함과 물질의 풍요와 안정된 삶과 교회의 부흥과 성공, 그것은 예수가 보여주는 마음과 내면의 세계와는 분명히 노선이 달랐다. 예수는 그렇게 나를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었다. 


교회와 목사라는 이름이 요즘처럼 욕을 먹는 시대가 종교 개혁을 꿈꾸던 루터의 중세 시대 쯤에나 있었을까? 콘슨탄티누스 황제의 야욕으로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오늘날 개신교회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하니, 괜스레 한 인간이 뿌린 탐진치 삼독의 씨앗이 이만큼 자라서 우리 사회에 이 만큼 끼치는 해악을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내겐 한 생각 일으키는 일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이 언제나 있다. 그래서 기도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온전치 못한 기도가 이루어질까봐. 온전치 못한 기도조차도 이루어질 줄을 알기에.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과 머리가 무겁기만 하다. 그럴 수록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곳곳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음을 본다. 


그 빛은 비록 작을지라도 밤이 깊고 어두울 수록 작은 별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가난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 신부님과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신 법정 스님과 바보 김수환 추기경님과 무리를 떠나 홀로 산으로 오르시던 고독한 예수의 뒷모습이 내겐 어둔 세상 별이 되었고, 오늘도 우러러보면서 걸어가는 별자리가 된다. 김기석 목사님의 선한 연대처럼, 별은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하늘에서 거리두기를 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한 하나의 별자리가 된다.


내가 몸 담았던 교회의 목회자와 경상도 지역의 일부 극우 개신교의 목회자들과 일부 정치인들과 장사치들의 의식은 참 많이도 닮아 있다. 그들을 볼 때면 마치 사고뭉치 어린 아이를 보는 심정과 같다. 내가 몸담았던 담임목사의 설교도 자세히 보면,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주고 가신 성령이 아닌 탐진치 삼독에서 허우적거리는 목회자의 독재체제로 교회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밑에서의 달콤한 안정과 풍요였다. 영혼이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하늘을 가리는 그 달콤함의 구름을 걷어낸 것이다.


내가 달콤한 교회당을 떠나온 일은 어찌 보면 때가 되어 스스로 열매가 익어서 신앙과 구도의 유치원을 졸업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예수의 이름을 간판에 두지만 예수와는 상관없는 교회, 한국 교회는 성공과 부흥을 외치는 기복 종교로써 의식 수준은 여전히 구약의 모세와 다윗과 야곱의 유치한 물질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깨어나고 있는 개신교인들과 몸부림 치고 있는 목회자들이 어느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고 별자리가 되어서, 이 어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빛나는 길이 되어주고 있다.


그저 성공과 부흥과 물질의 부유함과 세상과 자기 자신을 구분 짓는 맹신앙의 거룩함에 도취 되어서 스스로 세상과 둑을 쌓고 침체된 체 영혼과 생명의 심지가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든, 꺼져가고 있는 병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개신교회가 또한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탐진치의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또한 나 자신이기도 하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겉모습을 말함이 아니다. 성도의 마음과 영혼과 내면 세계를 말함이다. 예수가 그토록 가리켰던,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처럼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일로 숨을 쉰다.


그리고 지금도 개신교와 불교와 천주교와 한국의 풍류를 넘나들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길 위의 나그네가 나의 모습이다. 마음이 가리키는 길, 양심이 비추는 길이다. 이제는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이 길은 위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고, 나를 채우려는 배움이 아니라 나를 비우려는 배움이다. 탐진치의 세상과 거꾸로 가려는 몸부림이다. 내 마음으로 온전히 들어온 진리는 오직 예수의 마음 밖엔 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내려서 등에 짐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 성령의 해처럼 씨알처럼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다. 


만약에 개신교의 담임목회자가 안정된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불경도 읽는다면, 신약의 예수가 하신 말씀을 더욱 온전히 이해함으로 성도들에게 예수의 마음과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람과 아쉬움이 늘 있다. 진리의 구도자로써 불타 석가모니는 시대를 앞서 간 모범생이기도 했기에 나는 부처로부터도 하느님의 숨결, 공성의 하늘을 본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나처럼 종교를 넘나드는 이들이 참 많이 있다. 이런 이들에게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이전에 제발 공부 좀 하시기 바란다. 욕심을 채우려는 물질의 성공과 부흥을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을 비워서 저절로 하늘이 드러나게 하는 마음 공부를 말함이다. 성경과 불경과 동양의 경전이 쉼없이 지금도 살아서 그 길을 가리키는 등불이 되고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지, 목회자가 성경을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서 한 구절만 뽑아 읽고서 설교 시간에 팔아먹는 자는 세상에 독을 뿜는 바리새파 같은 독사의 자식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또한 나 자신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맹신앙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숙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만물에 깃든 진리, 내가 찾으며 바라보고 있는 하나는 그런 하느님이다. 신약 성서의 예수가 끊임없이 가리킨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이다.


이렇게 정처 없는 듯 자유롭게 종교를 넘나들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와 성령이 있고, 구도자의 모범생인 부처의 불성이 있고, 진리와 양심의 성령이 해처럼 때론 샘물처럼 나를 비추고 있다.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집에 있든지 밖에서 누굴 만날 때에도, 자유이신 바람은 언제나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자유의 바람이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에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숨은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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