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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284

하얀 구절초 곁으로 하얀 구절초 곁으로 가을걷이를 다한 빈 들녘 빈 들녘 곁으로 옛 서라벌 토함산 능선을 배경으로 하얀 구절초를 찍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서 곁에 앉았더니 흰빛을 잃은 구절초 내 그림자가 그랬구나 보이지 않던 해가 바로 내 등 뒤에 있었구나 토함산 자락을 넘어가는 저 하얀 구름을 따라서 나도 슬쩍 푸른 동해로 고개를 기울인다 이 땅 어디를 가든 해를 등진 순간마다 회색빛 그림이 되는 한 점의 나를 보며 착한 길벗 하얀 구절초가 하얗게 웃어준다 2022. 11. 18.
지구별 학교, 이태원 교실 얘들아 있잖아 엄마가 어릴적에 뛰놀던 골목길에선 동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지 아침 밥숟가락 놓자마자 뛰쳐나가서 뛰놀던 그 옛날 엄마의 골목길은 신나는 놀이터였고 생의 맨 처음 배움터였지 아랫집과 윗집을 이어주는 앞집과 앞집을 이어주는 놀이에서는 그 누구든지 친구가 될 수 있는 어디로든 통하는 길 그 골목길 사이로 우물만한 하늘이 보이는 우리들의 땅 오늘도 골목길에서 언니들을 따라부르던 동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노래를 부르며 자라난 온 세상 아이들이 오늘은 친구와 친구끼리 .. 2022. 11. 13.
가을에는 밥만 먹어도 맛있지 칠십 노모 주름진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말소리 오십을 바라보는 딸이 입으로 저절로 받는 메아리 가을에는 밥만 먹어도 맛있지 경주 토함산 자락 사금처럼 빛나는 가을 들녘 천년의 고도 이곳 황금의 땅에서 황금벼가 누렇게 익어갑니다 옆으로는 푸릇푸릇 배춧잎들이 가을 하늘을 우러르며 키가 자라니 덩달아 입과 입이 춤을 춥니다 겨울에는 밥하고 김치만 먹어도 맛있지 들녘을 달리던 가을 바람이 구절초 꽃잎에 머물러 옳지옳지 맞장구를 칩니다 2022. 10. 26.
석류 중학생 아들이 마루에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단다 핸드폰 문자도 못 보낸단다 석류를 발라먹느라고 아, 가을이구나 한 알 한 알 석류알을 석류알을 매만지는 두 손이 석류 열매보다 큼직하다 문득 고개를 들더니 벽시계를 읽더니 "열 시네" 아침 햇살도 덩달아 좋아서 엄마손에 먼저 떨구어 준 석류알이 보석같다 2022. 10. 1.
다시 쓰고 싶은 인생이지만 지우고 다시 쓰고 싶은 인생이지만 평범한 오늘 이 하루가 내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란 사실을 밤새 어둔 가슴 해처럼 떠올린다 숨으로 허공을 더듬어 가슴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지 순수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매순간 숨으로 가늠해본다 한 톨의 먼지처럼 일어났다가 떠도는 이 모든 것들이 머물러 안식을 얻는 숨 이 평안한 집에서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단 하나는 영혼의 탯줄과도 같은 가슴에 드리우신 숨줄 내게 있어 숨은 하느님이 다시 새 숨을 불어넣으시며 처음 마음을 잊지 말라 하시면 상한 심령이 숨으로 이 순수에 기대어 2022. 8. 26.
이 침묵에 기대어 한 생각이 풀썩 일으키는 있음 이어서 있음 이 틈새로 흐르는 늘 고요한 없음 없는 듯 있는 이 침묵에 기대어 쉼 없는 생각이 쉼을 얻지요 2022. 7. 28.
나무 곁에 앉아서 나무 곁에 앉아서 나도 나무가 되고 싶은 날 움직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멈춤과 침묵이 이상하지 않은 이 곳 어느 사람들의 나라에서 숨과 숨으로 구석구석 몸을 지우며 한 톨의 없음으로 돌아가는 좁은길 좁은문 나를 멈추어 침묵과 침묵으로 지구의 심장으로 뿌리를 내리며 푸른 떡잎처럼 포갠 두 발끝을 돌아 맑은 수액이 냇물처럼 흐르는 숨과 숨으로 제 몸을 살라먹으며 타오르는 촛불처럼 푸르게 그리고 붉게 하늘을 우러르는 한 송이 불꽃처럼 숨과 숨으로 걸어 들어가는 무심한 길 실핏줄 같은 뿌리와 뿌리로 묵묵히 이 땅을 끌어 안으며 기도하는 언제나 평화로운 한 그루 나무처럼 나무가 되고 싶은 날 나무 곁에 앉아서 2022. 7. 21.
낡고 오래된 양말 낡고 오래된 양말을 신을 때면 앞선 선각자들의 삶과 만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간소하게 살 수 있을까 날마다 똑같은 검고 해진 바지를 입을 때면 보다 더 단순하게 살 수 있을까 늘어진 양말의 목 주름이 좀 헐거워도 색이 바래고 올올이 낡았어도 여전히 소중하여 어진 마음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옷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한정된 지구 자원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탐진치 마음의 몫으로 밀어둔다 이마를 스치는 한 줄기 바람이 고마운 날 나의 얼굴과 작은 몸은 바람이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길이 된다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걸로 보아 가슴속으로도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있는지 쉼 없이 움직이던 바람도 가슴속에선 오래도록 머물러 쉼을 얻고 겹겹이 바람은 아무리 불어도 하늘엔 주름이 지지 않으며 늘 새롭다 낡은 옷 주.. 2022. 6. 27.
창녕 우포늪 화장실에선 맑은 향기가 난다 일회용 플라스틱 물컵 속엔 네잎클로버 두 송이 두 손 닦는 휴지 위엔 솔방울이 둘 여긴 창녕 우포늪 화장실 누가 했나 문득 고운 향기를 따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그리움으로 출렁이는 한 마음 너머 옛 선사의 한 말씀 넘실넘실 물소리 바람소리로 깃든다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지금 있는 바로 이곳이 진리의 세계이니라." 바로 어젯밤에도 밤하늘에 먼 달처럼 그리던 얼굴 하나 그리던 한 마음인데 그리던 한 사람인데 문득 내 등 뒤에서 선사의 지팡이인듯 밀대걸레를 들고 서 계신다 "화장실이 참 깨끗합니다." 표현이 이것 밖에 안 되나, 속으로 되뇌이며 저쪽에서 비추는 말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비추는 말 "감사합니다." 그 이상의 말을 이을 재주가 없는.. 2022.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