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과 십자가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31)

 

연꽃과 십자가

 

 

모름지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거든 하나가 되십시오!

 

서울의 어느 교회의 대학생들이 주최한 문학의 밤 행사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하여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질문은 젊은이들답게 생기발랄하였고 거침이 없었다.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 학생이 당돌한 질문을 던져왔다.

 

“시인께서는 기독교 목사님이기도 하신데, 시 속에 연꽃이나 불상 등의 불교적 이미지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십니까?”

 

그 당시 내 시집 속에 수록된 시들이 불교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꽃이나 불상, 또는 불두화 같은 불교적 상징이 강한 언어들을 이따금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제도종교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았고,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예수도 종교의 외피에서 자유로운 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회적으로 답변할 요량으로 질문을 던진 학생에게 되물었다.

 

“연꽃과 불교 가운데 무엇이 먼저 생겨났다고 생각하지요?”

 

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연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연꽃을 꼭 불교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시는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기독교인이라고 왜 연꽃을 시적 재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느냐?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연인’이라면, 연꽃 또한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는 사랑스러운 연인이 아니겠냐? 이렇게 거듭 되묻자 질문을 던진 학생은 납득할 수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이런 생각엔 변함이 없다. 연꽃이 불교적 상징인 것이 틀림없지만, 연꽃은 불교를 넘어 누구에게나 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꽃이 아니던가. 전라도 무주의 아름다운 백연지를 가본 적이 있지만, 거기 흐드러지게 핀 연꽃들이 예수가문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자기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지 않던가. 나는 예수가문에 속한 사람이지만, 왜소한 나를 넘어서 우주적 자아로 거듭나기를 꿈꿀 때 진흙탕에 핀 연꽃을 떠올리곤 하는데, 이런 관상의 자유를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고은비 그림

 

 

종교를 ‘으뜸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하지만 으뜸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이가 그 으뜸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사는 것 같지는 않다. 더러는 으뜸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취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왜 목사시인이 연꽃 같은 상징을 취하느냐고 황당한 질문을 던진 학생을 가르친 종교 지도자가 예수의 종지를 제대로 받드는 사람이었다면, 그 학생이 그처럼 사유의 부피가 작은 존재로 자라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어떤 종교, 어떤 교리보다 사람이 더 귀하고 크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어떤 종교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가 속한 종교를 넓히는 것이다.

 

예수의 종지가 좁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왜소해지고 편협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왜소함이 그들이 따르는 분의 종지를 왜소하고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부단한 마음공부를 통해 자기를 확장하여 자비와 관용의 정신을 지닌다면, 그런 정신으로 사는 이들의 삶이 기독교를 자비와 관용의 종교로 드높여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몇 년 전 나는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부님이 상대방의 사원을 방문하며 진리의 법을 아름답게 나누는 것을 보고 <연꽃과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자기보다 크고 둥근 원(圓)에

눈동자를 밀어 넣고 보면

연꽃은 눈흘김을 모른다는 것,

십자가는 헐뜯음을 모른다는 것,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는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는 것,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는 것.”

 

지금도 늦지 않았다. 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귀하고, 늦은 어울림이라도 어울림은 향기로운 법. 우리가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 좀더 너그러워지고 서로를 품어 안을 수 있다면, 우리보다 앞선 선각자들이 나란히 앉아 진리의 법을 나누던 대화와 관용과 협력의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드높은 진리의 산봉우리를 함께 오르다가 이쪽에서 ‘야호!’ 소리치면 저쪽에서 ‘야호!’ 화답하는 산울림처럼 종교간의 그런 어울림의 목소리가 이 산 저 산에 두루 메아리쳐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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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욕망의 무게를 줄이지 않고는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56)

 

세속적 욕망의 무게를 줄이지 않고는

 

 

* 하나님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됩니다.

 

나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제 몸의 무게를 덜어냅니다. 이파리로 향하던 수분을 뿌리로 보내어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수분이 빠진 잎은 울긋불긋 물들어 떨어지고 맙니다. 물론 나무들이 지상에 노출된 가지에서 수분을 덜어내는 이유는 동사(凍死)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지요.


나무들은 그렇게 제 몸의 것들을 덜어냄으로써 겨우살이를 대비할 뿐만 아니라 파릇파릇 잎새가 피어날 새 봄을 준비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순리(順理)지요. 나무들은 이 순리를 거스른 적이 없습니다. 덜어냄을 통해서 나무들이 새 생명의 날을 준비하듯이, 우리 인생에도 덜어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땅 위의 것들을 자꾸 덧붙임으로서 세속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는 그 영혼이 날로 앙상해질 뿐입니다. 욕망의 전차에 싣고 가는 지상의 양식으로는 영혼을 살찌울 수 없습니다. 인간은 덜어냄을 통해서만 자기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덜어냄, 즉 자발적인 금욕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습니다.

 

피둥피둥 살찐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세속적 욕망의 무게를 줄이지 않고는 하늘을 나는 비상(飛翔)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고진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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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별 도리가 없으시다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7)

 

하나님도 별 도리가 없으시다

 

나는 확신합니다. 만일 나의 영혼이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 안에서도 드넓은 공간을 찾아내기만 하신다면,

나의 영혼을 이 강물로 가득 채우시리라는 것을.

 

글을 쓰다가 뒤뜰로 나가 밝은 달 아래 서니,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시 한 수가 문득 떠오른다.

 

“저 강상(江上)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갖고자 해도 금할 이 없고 쓰자 해도 다 할 날 없으니

이것이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다.”

 

이 무진장한 바람과 달빛도 사람이 그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면 스며들 길이 없다. 맑은 바람을 마시면서도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헐떡거리고, 고즈넉한 달빛 아래 앉아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헐뜯고 험담이나 하고 있다면, 그 무진장한 조물주의 은덕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태백도 “청풍명월은 한 푼이라도 돈을 들여 사는 것이 아니다”(淸風明月不用一錢買)라고 노래했다. 그 마음이 물(物)의 집착을 벗어나 한가롭기만 하면 청풍명월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청풍명월은커녕 하루에 하늘 한 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지날 때가 많다. 이런 딱한 우리를 바라보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이 철부지 인간들아, 맨날 돈, 돈, 돈 하지만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돈을 들여 사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가져도 아무도 금할 이 없으니, 공짜 바람 공짜 달구경 더러 하며 살도록 하여라. 맑은 바람 밝은 달이 일 년에 몇 날 되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는가. 그러고도 뭐 하나님, 야훼님 어쩌구 내 이름자를 운운하니, 참 딱하기도 하다!”

 

하여,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내면이 숱한 물질과 형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면, 무진장의 하나님도 별 도리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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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치매와 과다한 설교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57)

 

영적 치매와 과다한 설교

 

 

하나님은 영혼이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영혼에게 많은 것을 받을 기회를 줍니다.

그렇게 해야만 몸소 많은 것을 줄 기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넓힐 기회는 많지 않다. 지상 위에서의 우리 생은 영혼을 넓힐 유일한 기회이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넓이보다 교회 건물의 넓이에 관심을 기울이고, 영혼의 확장보다 교세의 확장을 원한다. 사실상 교회 건물의 넓이와 교세의 확장은 영혼의 확장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교회 건물이 넓어질수록 그 영혼은 위축되고, 교세가 확장될수록 사람들의 영적 관심은 엷어지지 않던가.

 

근자에 한국교회 어느 교단에서 교단장을 차지하기 위해 치졸한 다툼을 벌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과연 그들은 우리의 영혼이 넓어지기를 바라시는하나님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가브리엘 바하니안이란 신학자의 표현을 빌면,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이 아닐까?

 

오늘날 모든 이들이 치매(癡呆)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권력과 금력 따위의 악령에 사로잡힐 때 나타나는 병리현상인, 영적 치매보다 더 두려운 게 있을까.

 


 


 

 

너무 많은 설교

 

이따금 나는 영혼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침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영혼 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영혼 역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무 많은 설교, 너무 지루한 설교, 너무 졸리는 설교, 자기 확신도 없이 구토하듯 토해내는 시끄럽기만 한 설교, 자기 자신도 감화시키지 못하면서 남을 감화시키려는 설교, 말로는 하나님과 진리를 들먹이면서도 장사꾼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설교, 학문의 그물에 갇힌 윤똑똑이의 공허한 설교,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양 억지를 부리는 설교, 내면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가 떠벌리는 설교, 무한한 모름의 신비로 이끌지 못하는 설교, 내적 침묵으로 안내하지 못하는 설교, 자기 안에 자기보다 크신 분이 시퍼렇게 살아계심을 알지 못하면서 성령의 감화를 빙자하는 설교, 영혼이 없는 듯한 설교.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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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당신을 낳을 성스러운 태(胎)라니요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7)

 

우리가 당신을 낳을 성스러운 태(胎)라니요

 

하나님은 그 속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모신 영혼,

곧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영혼을 찾아

그곳에서 낳고 싶어 하십니다.

 

아, 그렇군요. 하나님, 당신께서는 여전히 가임(可姙)의 욕구를 지니고 계시군요! 그렇겠지요. 당신께선 늙음이나 쇠락을 모르는,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당신께선 당신의 형상을 가장 쏙 빼닮은 사람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낳고 싶어 하신다지요.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분주하여, 낳고 싶어 하시는 당신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듣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짓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신을 모실 여백이라곤 없답니다.

 

 

첨단의 기계를 다루는 일에 능해진 인간의 기심(機心)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어디서나 손가락 하나로 숫자를 눌러 사통팔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도 많아졌지만, 오늘 우리의 삶은 당신을 아는 ‘불멸의 지식’을 섭취하는 일엔 한없이 게으르고, 소멸할 지식을 쌓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형국이지요.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

 

당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본(本)이고 나머지는 말(末)인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그 본말이 뒤집혀져 있지요. 피조세계에 대한 숱한 지식은 당신을 아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데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피조세계에 대한 앎과 단(斷)해야 한다는 거지요.

 

단(斷)!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조세계의 것들을 당신을 아는 지식의 칼로 단호히 잘라냄(斷)으로서 우리 속에 하나님 당신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넓혀야 하는 데 말입니다. 그런 ‘순수해진 영혼’의 터라야 비로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낳을 수 있는 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당신이 곧 우리의 ‘참 모습’(眞我)이지요. ‘영으로 난 것이 영’(요한복음 3:6)이란 말처럼 전적으로 새로 난 생명인 것이지요.

 

이 신생(新生)의 기쁨,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불완전하고 허물투성이인 우리가 당신을 낳을 성스러운 태(胎)라니요. 아, 우리 속에 당신이 태어나시다니요.

고맙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는 당신을 아는 일 말고는 세상에 대한 그 숱한 앎이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도 말했지요.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삶이 불안정한 가운데 세밀하고 파멸하지 않는 존재이니, 이제 학문의 그물을 버리고 참(진리)에 대해 명상하라.”

 

고진하/시인,한살림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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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내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4)

 

“하나님, 내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하나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십니다.

여러분의 존재는 피조물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여러분 안에 모셔 들이기만을 바라십니다.

 

《어린 왕자》에서 생떽쥐베리는 “본질적인 것은 소용없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본질적인 것은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작가의 말을 따르면, 우리의 본질을 가리키는 분, 하나님은 소용없는 분입니다. 진리, 사랑, 하나님 같은 절대가치를 세속적 가치에 물든 눈으로 보려는 이에게 하나님은 도무지 유용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일러스트/고은비

 

                   

우리가 다 알 듯이, 모세가 호렙산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간 틈에 백성들은 아론을 졸라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기들의 물욕(物慾)에서 비롯된 기도를 들어줄 법한 유용한 하나님을 만든 것이지요. 사실 그건 우상이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이런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소용되는 존재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신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도 ‘피조물’을 끝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피조물인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런 사람들에게 엑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기도는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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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2)

 

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지극히 높은 신성은 겸손이라는 심연 이외의

모든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1970년대 내가 다니던 신학대학 화장실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었다.

 

“신은 죽었다―니체”

 

그 밑에는 이런 낙서가 이어졌다.

 

“니체는 죽었다―신”

 

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고뇌하던 어떤 신학도들은 이런 낙서조차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어떻게 그런 불경스런 농담을 지껄일 수 있느냐는 ‘확신파’도 있었지만!

 

 

하여간 인간이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절감하는 것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우리의 생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는가를 묻는, 소위 신의 부재(不在)에 대한 의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광활한 어둠’이며 ‘숨어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당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이 ‘나는 당신을 찾았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다 아는 체하는 교만보다 더 건강한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

 

회의를 거치지 않은 신앙적 태도는 얕고, 모름을 긍정하지 않는 신앙은 깊이가 부족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인식에만 머무르는 ‘앎’은 우리를 아주 왜소하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에 대해 ‘모름’을 머금은 채 나아가는 앎은 우리의 왜소한 자아를 넘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하지만 오만한 지성은 그 알량한 ‘앎’의 희열만 알았지 ‘모름’의 희열은 모른다. 즉 ‘모름’을 머금은 ‘앎’의 희열을 모른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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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구한다고?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1)


기적을 구한다고?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길에서 벗어나

바깥일에 지나치게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깥에는 빛과 진리가 없건만,

수많은 사람이 빛과 진리를 찾으면서도

끊임없이 바깥에서만 찾고 있다.


“제게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초심자가 성자에게 애처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죽은 아이를 보면 ‘일어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병든 이들을 보면 ‘당장 나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꼬부랑 할머니를 만나면 ‘똑바로 서세요!’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슬픕니다, 저는 낙원에 있는 막대기 같은 존재입니다. 스승님, 저에게 초자연적인 권능을 주지 않으시렵니까?”


성자는 화를 내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가 나와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냈건만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느냐? 네가 나를 안 지가 이렇게 오래 되었건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잘 듣거라, 나는 이 땅에서 80평생을 살았지만, 한 번도 죽은 아이를 살린 적이 없고, 한 번도 병든 자를 낫게 한 적이 없으며, 한 번도 노인의 등뼈를 바로 편 적이 없다. 냉엄한 운명 아래 아이들은 죽고, 사람은 병들며, 늙은이는 스러지게 마련이지.”



                           일러스트/고은비


성자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기적을 구한다고? 내 말을 잘 듣거라. 가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돌을 쪼아라. 그게 기적이 아니더냐? 이 땅에서 5년, 50년, 80년을 살되 그 누구도 속이지 않고 저주하지 않으며 살인하지 않은 자가 참으로 복된 자로다!”


작자 미상의 이 이야기는 종교인들이 지녀야 할 바른 마음가짐을 일러준다. 바깥일에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는 어떤 성취를 위해 골몰하기 쉽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거나 선한 일을 한다는 아무리 그럴 듯한 대의명분이라도, 그런 명분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자기의 참된 본성에서 멀어지기 쉽다. 그래서 엑카르트는 자기 ‘영혼의 터’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당부하는 것이다.


“빛을 찾고, 모든 진리를 알아보는 통찰력을 얻고자 하거든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터 안에서 일어나는 이 탄생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영혼의 모든 기능과 속사람도 환히 빛날 것입니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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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인들이 성직을 깔볼까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50) 


왜 세인들이 성직을  깔볼까


여러분이 의로우면, 여러분의 행위도 의로울 것입니다.

거룩의 바탕을 행위에 두지 말고, 존재에다 두십시오.

왜냐하면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어떤 직분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나 장로, 그런 직분이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만들어주던가. 오히려 우리의 의롭고 거룩한 삶이 우리의 직분을 드높여주는 것이다.


총회장, 감독, 아니 교황이라 하더라도 그런 대단한(?) 직분이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해줄까. 그런 직분을 맡은 이의 삶이 의롭고 거룩하지 못하다면, 도리어 그의 삶이 그 직분을 더럽히고 그 직분을 맡은 이를 썩게 만들지 않을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는 교황? 그것은 사무직이 아니던가. 목사들이 그토록 오르고 싶어 온갖 추태를 부리는 감독, 혹은 총회장? 그것도 사무직이 아니던가. 사무직을 깔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의롭고 거룩한 이가 사무직을 수행한다면 그 사무직이 빛날 것이다.


오늘날 왜 세인들이 성직을 깔볼까. 그 이름과 존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외치는 말, 그가 부르는 노래가 그 존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직분이든 그 이름과 존재, 그 말과 행위가 일치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광채를 발할 것이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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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나눔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49) 


사랑의 나눔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영적인 것과 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이

영적이었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영적인 것과 복을

자기를 위해서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사람은 자기 몸과 영혼 안에 지닌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남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주어야 합니다. 


비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어느 날 밤,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성 프란체스코의 오두막으로 찾아왔다.


“너무 배가 고프고 추우니, 먹을 것과 잠자리를 좀 마련해 주세요.”


프란체스코는 얼른 그 거지를 데리고 들어와서 불빛에 비춰 보니, 그 거지는 얼굴과 코가 문드러진 문둥이였다. 그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해서 정성껏 대접한 뒤, 자기의 잠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침대에 들어간 거지는 그러나 잠시 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당신의 몸으로 자기의 몸을 데워 달라고 했다.


프란체스코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더러운 몸에 자기의 몸을 비벼 그의 몸을 덥혀 주었다. 잠이 든 거지를 보고 프란체스코도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기도 시간이 되어 일어나 보니, 침대에서 자던 거지는 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피고름이 흐르던 그 문둥이의 몸을 감싸고 잤는 데도 프란체스코의 몸과 침대에는 그 더러운 이물질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하느님, 어찌하여 나병환자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주님과 같이 동침했으니, 이 죄인의 기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리요!”


밭에 뿌려진 씨앗의 죽음처럼 자기 무화(無化)의 삶을 살았던 프란체스코의 이 이야기는 아주 미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이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난 뒤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가.


가장 작은 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프란체스코는 예수의 이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자기보다 큰 존재와 하나 되는 신비를 몸소 체험하는 은총을 얻은 것이다. 진흙으로 빚어진 보잘것없는 유한한 한 인간이 우주적 신성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눔이 갖는 신비요 은총이다.





우리는 내가 지닌 것을 나누면 내 소유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너무 좁은 안목이 빚어내는 편견이다. 풍요(affuence)란 단어에는 ‘풍부히 흐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삶을 순환하는 부와 풍요를 누리려면,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지 말고 흐르게 해야 한다.


현대과학이 밝힌 것처럼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에너지는 멈추지 않고 항상 흐른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순환을 멈추는 것은 피의 흐름을 멈추는 것과 같다. 피가 응고되어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나눔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씨앗 속에는 수천 개의 숲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씨앗은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 씨앗은 기름진 땅에 그 지성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주게 되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흘러 물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줌으로써 우주의 풍요한 흐름을 당신의 삶 속에 순환시키는 것이 되므로.”(디팍 쵸프라)


디팍 쵸프라의 말처럼 나눔은 작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썩어야 싹을 틔우므로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썩어 없어짐[無化]으로써 숲을 이룰 수 있다. 예수나 프란체스코처럼 스스로 낮아지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려면, 이러한 식물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신이 선물로 베풀어 준 당신의 소유를 나누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원하면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라. 사랑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주목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주목하고 인정하라.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거든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도우라. 당신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수천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어떤 씨앗의 죽음도 헛되지 않다. 우주는 단 하나의 쿼크[quark:물질의 최소 단위]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주가 빚어내는 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배가될 것이다. 그 참여의 한 방법은 곧 나눔이다.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어주는 사랑의 나눔은 결코 헛되지 않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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