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사랑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 사랑

- 전집 3권 『성서 개요』 호세아 편 -

 

 

“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저 사람이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나의 짝이 맞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지방에서 열린 한 청년 모임에서 받은 질문이다. ‘교회를 교회되게’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특강 시간 말미에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 내 특강 논지를 열심히 들은 뒤의 질문인 것은 맞았다. 그리스도인 두 사람이 이룬 가정이라면 가정도 ‘교회의 최소단위’이기에 이미 교회의 작동 원리나 관계 방식이 그 안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진지하고 순수한 청년에게 되물었다. 가장 이상적인 두 사람의 만남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건강한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반드시 둘 다 건강해야할까요?” 내 질문에 청년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참석자들이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물론 결혼은 ‘자선사업’이 아니다. 불쌍해서, 저 사람은 나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결혼’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결혼하여 이룬 가정 공동체가 ‘교회’라면, 예수께서 가르치셨고 사도 바울이 누누이 설교했던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라면, 결혼이 ‘손해는 보지 않고 이익은 극대화하는 무역활동’이 아니어야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서에서 가장 ‘불공정한’ 결혼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호세아가 탑 랭킹에 들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내 ‘고멜’의 외도는 호세아를 고통스런 결혼생활로 이끌었다. 김교신이 호세아와 감정이입하여 풀이한 부분은 호세아의 애통함을 생생하게 전한다.

 

일찍이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열정적인 호세아의 성격으로 보아서 저가 그 신부에 대한 사랑은 꿀송이보다 더 달큼하였을 것이며, 저의 경건한 생애로 보아서 저는 그 신처(新妻)의 영혼이 날로 더욱 성결하여지기를 아침저녁에 쉬지 않고 기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결혼생활 중에서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서 3남매까지 낳았다. 그러나 호세아의 가정에는 명랑한 행복이 오기보다 침울한 의운(疑雲)이 가리우기 시작하였다. 의심을 금하고자 힘쓰면 힘쓸수록 처의 행동은 이상하였다. … 호세아에게는 날로 이 괴로움이 더하여 갈뿐더러 드디어 최후의 날이 왔다. 고멜은 … 남편을 버리고 가출하여 버렸다. 순정열애의 사람 호세아의 흉중이 어떠하였으랴. … 저는 광인처럼 분하였고 절망자처럼 사나워져 배반한 처가 나간 문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잡을 바를 못 얻었고 몸의 둘 곳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김교신이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했던가? 「호세아」 서두를 읽으면서 나 역시 어려서부터 늘 의문이 들었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2절)는 구절이 쉽게 지나쳐지지 않았다. 물론 예언자들이야 제 임의로 생각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預)’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었으니, ‘가서 음란한 여자랑 결혼하라’는 계시를 내리신다면 황당하고 고통스런 일이나 ‘아멘’으로 받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자주’ 인간의 상식을 넘어 있다는 것 또한 신앙의 사람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십분 이해심을 발휘하여 ‘공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서의 결혼’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어린 시절의 내게 하나님의 이 계시는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전혀 인격적 끌림이 없는 여자를, 그것도 앞으로 음행할 것이 예언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지만 김교신의 저 놀라운 상상력은 내가 막연하게나마 ‘그랬을 거야’라고 생각해왔던 행간 사이의 간격들을 멋지게 채워주었다.

 

한 여자를 사랑하여 결혼하고, 신앙의 경건함을 함께 누리고자 했던 열망이 컸던 남편의 마음을, 그리고 그런 기대들이 ‘배반’당했을 때의 분노와 애통함을 절절한 언어로 담아내었다. 그래. 그랬을 거야.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을 거야. 그래서 결혼했고 그녀와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그의 이상이 어그러지지 시작했을 거야. 그녀를 사랑한 만큼 버림받은 분노가 컸을 거야. 필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을 거야. 왜냐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고.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는 그 때 받았을 거야. 여전히 몸은 분노하고 있는데도, 자복하고 엎드려 온전히 자신의 실존을 주 앞에 내어놓은 호세아에게로 ‘하나님의 뜻’이 스며들어 왔을 거야.

 

때에 노도와 같이 저의 가슴에 일조(一照)의 광명이 비추이며 가늘고 고요한 소리가 들리기를 “호세아야, 네가 배반한 아내로 인하여 분하냐. 발광할 듯하냐. 당연한 일이다. 진정 사랑하는 까닭에 노할 것이다, 분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라. 배반한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 호세아의 수족은 분노의 경련을 금치 못하였을 때이나 저의 양심에는 ‘아멘’의 응답이 생겼다.

 

그리고 ‘아마도’ 호세아는 이 불행한 개인의 결혼사를 체험하면서 고통가운데 받았던 계시를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가지셨을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아내’ 이스라엘과의 황홀한 밀월에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자꾸 곁을 떠나는 그들을 보며 ‘남편’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얼마나 아프실까? 또 얼마나 분하실까? 그 고통만큼, 그 아픔만큼, 그 분노만큼 우리 이스라엘에게 갚으신다면, 우리가 어찌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호세아의 삶이 ‘불행한 남편’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의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개인적 아픔을 승화시켜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로 읽어내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읽고 나니 비로소 마음 가운데 자유함과 기쁨이 넘쳐났다. ‘내’ 하나님이 그러실 리 없었을 거라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소망에 확신을 가져다 준 풀이었기 때문이다. 호세아 한 사람의 삶 역시 아끼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이신데, 설마 ‘공동체적 교훈’을 주시려고 호세아의 자유의지와 선택과 사랑의 관계성을 몽땅 희생하셨을 리가.

 

호세아가 고멜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 것은 여느 남녀가 그러하듯 자연스런 일이었을 터이다.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그 이후에, 그리고 오직 호세아‘만’이 받아 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호세아가 여전히 고통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는데도, 만일 옆에서 누군가가 제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훈계한다면(설사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는 ‘정답’을 먼저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그건 ‘폭력’이다. 호세아 스스로, 호세아의 자유 영혼으로, 그의 산 신앙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하다 받은 계시의 말씀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그 말씀은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었다.

 

간통죄 폐지가 결정된 이후 신문사나 지인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았다. 기독교사회윤리학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고. 찬성이냐고, 반대냐고. 그들에게 되물었다. 만일, 그동안 간통이 위법행위였기 때문에 외도를 못했던 커플이라면, 꾹꾹 참았던 커플이라면 그 둘은 과연 바른 관계 안에 있는 커플이겠느냐고. 구약시절처럼 ‘돌로 칠 것인가’ 모세의 법처럼 ‘이혼 증서를 써 줄 것인가’ 아니면 현대사회의 개신교 윤리처럼 ‘합법적이고 신앙적인 결혼은 한 번에 한 사람만!’(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방식으로)을 적용할 것인가는, 이 놀라운 사랑의 관계적 혁명을 체험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호세아의 선포에 직면하여 모두 무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감사하게도 특강에서 이런 해석을 나누는 동안 청년들의 눈빛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죽기까지 ‘타인을 위한 나’이셨던 그리스도를 ‘가장’ 삼아, 두 사람은 존재와 삶을 나누며 서로를 건설해가고자(오이코도메인) 끊임없이 ‘너’를 부르고 기다리고 섬기는 ‘공동체’를 꾸려가고 싶다고.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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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乙)의 지형학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5)

 

을(乙)의 지형학
-「조선지리소고」 1934. 3 -

 

김교신의 전공은 지리 박물이었다. 19274월 함흥의 영생여자고등학교를 첫 부임지로 하여 이후 양정고등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마지막 송도고등학교까지 약 15년 간 강단에 섰다. 양정에서의 12년이 가장 긴 시간이었고, 사상이 의심된다거나 불온하다는 눈초리를 받다 결국 1942<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되면서 교사 생활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

 

그에게서 지리 박물을 배운 학생들은 회고하기를 그저 딱딱한 지형에 대한 수업이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나 한국 지리를 배울 때면 각 지역에 얽힌 조상들의 얼을 함께 가르쳤으며, 일제가 한글 수업을 금지했음에도 당당하게 조선말로 조선혼을 심어주셨다고 전한다. ‘무레사네라는 모임을 통해 우리 강과 산을 학생들과 함께 탐사하며 땅에 스며든 민족정기를 느끼도록 애쓰기도 했다 한다. 지리 전공자로서 조선의 산천을 바라보며 그가 남긴 짧은 논문인 조선지리소고는 그가 가르치고 싶었고 결국에는 세상에 내어놓고 싶었던 조선의 정신을 노래한 연가(戀歌).

 

우황 산세와 평야의 배열 균형의 미를 논할진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화에나 비할까, 뉴욕 부두에 높이 솟은 자유의 여신상에다가 비할까. 낭림산 머리 위에 하늘을 향한 좌완을 백두산 저편까지 높이 뻗치고 장산곶 끝까지 우완을 드리워 어루만지려는 듯, 우각의 태백산은 거제까지 굽혀 올리고 좌각의 소백산은 진도까지 뻗쳐 디딘 듯. 지구대는 허리에 잘룩하고 금강산은 가슴에 드리운 노리개인 듯, 몸을 가리운 능라(綾羅)가 동풍에 나부끼어 녹색 평야를 이루었으니 엷고도 가볍다. 선녀 바야흐로 구름 위로 솟아오르려는 자태인가 혹은 자유의 여신이 대륙을 머리 위에 이고 일어서려고 허리를 펴는 형상인가.

 

나는 전공자가 아니니 김교신의 한국 지형학에 대해 학문적 판단을 할 재량은 없다. 또한 페미니즘적 잣대를 들이대어 여성과 땅의 타자화운운 할 생각도 없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내 마음에 박힌 것은 지배적인 식민사관 아래 한반도의 지형조차 부정적으로 평가받던 시절에, 같은 지형을 저리 아름답고 찬란하게 응시할 수 있었던 김교신의 소망스러움이다. 왜곡이나 맹목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지형에 담은 소망이었다. 땅의 협소함이나 백성 수의 적음, 평야의 부족함과 산천의 작은 규모에 대해서는 부정보다 달리봄을 택했다.

 

 

대동여지전도 (소장: 숭실대학교 박물관, 연대: 1860년대(김정호 제작), 형태: 목판본, 보물 제850호)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해안선에 대한 묘사에서도, 온대지방에 위치하여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음에도, 김교신은 하나님께 감사에 감사를 더 했다. 아니, 실은 이미 감사하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시선이었다. 강수량이 빈핍한 까닭에 서양보다도 200여년이나 앞서 측우기를 발명할 수 있었고, 공중에 운량(雲量)이 희박한 까닭에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되었다며, ‘화를 복으로 이용하는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칭찬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형론이 흥미롭다. 지정학적 결정론도 아니요 정신의 승리만을 외치는 관념론도 아니다. 이미 주어진 우리의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이 땅에 살고 있음으로 해서 겪는 모든 일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복된 땅을 만들자는 주장이니 말이다. 김교신의 지형론은 소위 반도론이다. 반도로서의 우리 땅은 결코 대륙에 붙어 큰 외세에 의지해 살아야만 하는 비주체적 공간도 아니요, 섬나라 일본의 대륙진출 야망에 길목을 내어주는 도구적 공간도 아니다. 고대의 희랍-이태리 반도가, 근대 초기의 덴마크 반도가 가졌던 소통의 활발함을 상기시키며, 김교신은 근대 사상사에서 한반도가 갖는 지형론적 소명을 굳게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다. 겁자에게 안전한 곳이 없고 용자에게 불안한 땅이 없다고.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요, 무릇 범을 잡으려면 호굴에 가야 한다. 조선 역사에 영일이 없었다 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 없다. 만약 눈을 돌려 정신적 소산, 영적 생산의 파악에 향한다면 반도에는 특이한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상이나 발명은 모르나 지고한 사상, 즉 신의 경륜에 관한 사상만은 특히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생래의 교만의 뿌리까지 뽑힌 자에게만 계시되는 듯하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주집(湊集)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 낸 엑기스(精素)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제국주의적 선언이 아니다. 이 논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 단짝이었던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를 함께 읽어야 할 것 같다. 스무 개의 시리즈 논문으로 <성서조선>에 실었던 함석헌의 한국사 풀이가 진행된 시점이 19342월부터이니, 동인이요 편집장이었던 김교신이 함석헌이 주장하는 고난의 메시아적 해석을 함께 나누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함석헌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세계열강의 침략 대상이 되어온 한국의 역사를 세계사를 위해 대신 진 가시면류관으로 표현했었다. 현재의 한반도는 욕심투성이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이 퍼다부은 쓰레기들이 모여 들어오는 세계사의 하수구라고 말했다.(전집1: 73) 뜻 모르고 겪는 고난은 재난이지만, 악이 응집된 이 땅에서 이를 그치려는 정신으로 고난을 승화시킬 수 있다면 이 고난은 옥을 닦는 돌이요 세계를 구하는 힘”(전집1: 303)이 될 것이라, 함석헌은 그리 믿었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없다는 김교신의 선언이나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 낸 엑기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는 그의 당찬 소망은 함석헌이 믿었던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의 메시아적 선포와 맞닿아 있다.

 

한 마디로 김교신의 한반도론은 ()의 지형학이다. 그러나 이유 불문 꿇어야하고 제 뜻은 없애고 강자에게 귀속되는 그런 이 아니다. 김교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른 사상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기를 원하는 질서에 대한 사상이라면, 이를 상상해내고 깨달을 인식론적 특권은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생래의 교만의 뿌리까지 뽑힌 자들만이 누리는 것임을!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삶의 자리가 의 자리인가? 그렇다면 기뻐하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대에게 더 가까이 있다. 오늘날의 한국 땅이야 말로, 일찌감치 사라졌어야할 봉건주의적 잔재와, 사람을 갈아 끼우는 기계 부속품쯤으로 여기고 효용가치에 따라 쓰고 버리면서 이를 고용 유연성이라 이름하는 투자-금융자본주의의 폭력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어서 세속적 욕망을 포장하는 기업-교회들의 구조적 불의가 그야말로 집약되어 작동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더 이상 물러나 은둔할 공간도 없지 않나. 주저앉아 넋 놓고 당하면 재난이지만, 애통하고 연대하는 주체로 서서 이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현재의 시스템을 극복할 사상을 내어놓을 수만 있다면, 지금 우리들 의 위치는 은혜다. 감사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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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라, 버티자

  • 이제 마지막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갈 학생들에게 스승으로서 끝까지 참고 버티자는 말은 맞지 않는것 같다.
    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균형과 노.사 관계의 불평등한 구조체제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민시대도 아니고,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 노비로 팔려가는 시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 하나 20년 세월을 기돈의 불평등과 비인권적인 대우를 참고 견디라고 밤낮 참고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Linda 2015.06.09 04:22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5)

버텨라, 버티자
(조와(弔蛙), <성서조선> 1942년 3월)

 

‘한 시간에 740만원을 쓸 수 있는’ 사람이기에 주차요원을 꿇릴 수 있는 정당성이 있다던 ‘백화점 모녀’마저 사회정의를 외치는 시절이다.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단다. 한참 동면 중인 ‘개구리’도 들었다면 웃을 이야기다. 그들이 ‘바로 잡고’ 싶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의 사회적 배치 속에서 VIP(아주 중요한 사람)로 자리한 사람에게는 무한 존경과 절대 복종을 표시하는 사회,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바른’ 사회였을까?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다는데, 그랬다면 740만원 씀씀이나 남편의 권력에 대한 언급은 불필요했을 일이다. ‘내 남편 한 마디면 너희들 다 잘려!’가 어찌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성을 만들 수 있는 선언일까!

 

 

세상이 온통 꽁꽁 얼음판이다. 생명이 버텨내기에 너무나 버거운 시절이다. 지난 연말, 새로운 계약을 많이 체결하여 영업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2주 동안 시린 손 언 발로 뛰어다녔을 젊은 ‘수습’ 사원들은 정직원 승급 평가가 있던 날 전원 해고되었다. 회사는 모두가 자격미달이었다고 변명했지만, 이 시절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아, 새로운 계약 건수가 필요했구나, 하여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2주 동안 바짝 뛰어줄 ‘알바’ 인력을 구했던 거구나, 하지만 ‘알바’라 하면 설렁설렁 대충 뛸 터이니 성과를 보고 승급기회를 결정하는 ‘수습’사원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었던 거구나! 고용하던 때부터 이미 회사는 ‘쓰고 버릴’ 생각이었고, 이에 더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고용의 기술’을 발휘한 거구나!

 

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세상이다.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는 이제 ‘쓰고 버릴 물건’이다. 최근 ‘땅콩 회항’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세간의 화재가 되었던 항공사의 오너 일가는 기내의 직원들을 ‘기물(비행기 안의 사물)’이라 불렀다 한다. ‘쓰이고 너무나 일찍 버려지는’ 까닭에 생명들이 죽어나간다. 스스로 죽고, 남도(가족도) 죽이는 세상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두 딸의 목을 조르는 가장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허나 그의 참담한 심정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알겠다. 그동안 ‘폼 나게’ 쓰였겠으나 결국은 그도 쓰고 버려진 존재다. 일단 버려지면 하찮은 존재, 실패자로 배치되는 이 사회에서, 그는 현재의 배치와 굴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한 것이겠지. ‘쓰고 버려지는’ 참담함을 나 역시 겪어보았기에 요즘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마음이 무겁다. 아리다. 하여 결국은 엎드린다. 기도조차 애가(哀歌)다. 한참을 엎드려 있자하니, 김교신의 기도 글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만든 성전이다. 이 반상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 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가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조와(弔蛙)’ 앞부분이다. 늘 기도하던 신앙의 사람이었으니 이 장면이 새로울 건 없다. 다만 1942년이라는 시점과 조용한 산중에서 홀로 무릎 꿇고 그가 했을 기도의 내용들을 상상해보니 그 역시 절절한 애가(哀歌)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가 『성서조선』을 시작한 것이 1927년이었다. 시절이 악하고, 그래서 사람들도 자꾸 악해지거나 약해지지만, 성서에 담긴 자유혼을 외치며 전하다보면 조금씩 소망스런 일들이 생겨날 거라 믿었으리라. 그러다가 1942년! 무려 16년의 긴 세월동안 그가 간곡함을 담아 ‘들어라! 제발 들어라!’ 외쳤던 복음(福音)이 땅에 심기우고 자라기도 전에, 휘몰아치듯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일제의 폭력이 조선인의 마음을 정신을 영혼을 꽁꽁 얼려버리는 사태를 목도했으리라. 하늘로부터 받는 힘과 용기가 그치지 않았으나, 현실을 보며 어찌 애통함과 절망감이 없었을까!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도했다는 그의 표현이 오늘따라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간구하다가 절규하고, 소망을 담다가 순간 절망하고, 바위 위에 엎드린 그는 필시 그랬을 거다.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성서조선>의 외침이 조선인들에게 들리는지 아닌지, 거대한 일제의 탄압에 행여 동면하는 개구리들 마냥 하루하루 생명의 기력을 다해가는 것은 아닌지, 그의 안타까운 심정이 한 구절 한 구절 살아서 전해진다. 젊은 시절에는 읽으면서도 몰랐다. 개구리들이 들어봤자 기도와 찬송을 이해나 하나? 뭐, 이런 걸로 일제는 잡지를 폐간하고 12명의 지인들과 함께 1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했나? 그러고 보면 일제의 검열 담당자들은 문학적 이해와 사회학적 성찰이 꽤나 깊었던 것 같다. 행간을 읽어낸 그들은 다음의 마무리에서 이 글의 힘을 제대로 보았다.

 

봄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 이런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두려웠을 일이다. ‘봄비가 쏟아지는 날’ 말이다. 지배자들이 만든 폭력적 시스템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봄비, 그 따듯한 은혜의 비가 살살도 아니고 ‘쏟아져’ 내린다면, 하여 자신들이 곤고하게 설계해놓은 세상의 질서와 사회적 배치가 다 허물어져버린다면, 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잊고 그냥 숨죽이고 머리 조아리고 동면한 듯 지내던 사람들(조선인들)이 생명의 기운을 얻고 스스로 살아내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들에게는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일까. 자신들의 위용이 아직 단단한 시절에도 소망을 버리지 않고,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미래를 현재로 불러오며 당당하게 외치는 저 믿음이, 소망이, 각오가 어찌 두렵지 않았겠나! 하여 자신들이 만든 세상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들에게, 김교신의 이 글은 ‘읽혀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을 거다.

 

봄은 온다, 어김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단단한 얼음 같은 이 시스템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쓰고 버리는’ 노동력으로 대하는 이 악한 제도도 녹아내릴 것이다, 결국은! 그러니 개구리 같이 미약한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여, 당신이여 나여, 우리여, 버텨라. 버티자. 이 얼음 빙벽의 틈에 봄을 불러오는 팔팔한 산 신앙을 꽂아 넣으며,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며, 기다리자. 어느 날 은총 같이 내릴 봄비를...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애로 서로를 동등하게, 존귀하게 여기며, 함께 모두가 사는 시스템을 건설하게 될 그 날을...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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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의 윤리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4)

 

응시의 윤리

- 전집 4권 『성서 연구』 「율법의 완성-간음과 이혼」 -

 

 

내가 김교신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거의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윤리와 도덕에 엄격하다는 점이다. 나 역시 ‘율법주의자’는 아니지만(글쎄 내 생각이기만 할지도),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꼴’은 나나 남이나 잘 못 견디는 편이다. 그게 고스란히 드러나는지, 미국에서 목사안수과정을 밟는 중에 받았던 인성 테스트에서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평가인즉, 내가 목회를 한다면 교인들에게 너무 엄중한 윤리적 잣대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가정사로 인해 결국 안수를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족이 길었지만, 내 성향이 그러하다보니 김교신의 ‘극단의 도’가 나는 참 좋았다.

 

김교신의 엄격한 윤리적 수행성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 배경을 말해야할 것 같다. 김교신은 아주 어려서(네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었다. 홀로 되신 어머니는 행여 아버지가 없어 버릇없이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셨던 것 같다. 하여 더욱 엄격하게 도덕적 훈련을 시키신 것으로 안다. 유교적 지식에 해박하신 분이셨기에 훈련의 준칙은 유교적 도덕률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 더하여 스무 살 무렵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김교신에게 기독교적 가르침은 ‘전적(全的) 기준’이 되어버렸다. 가정과 일터, 성경공부 모임과 『성서조선』 간행에 이르는 벅찬 일정 가운데서도 성실하고 규칙적인 일상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삼중겹의 도덕 훈련 덕분이었을 거다. 오죽했으면 동료교사와 바둑을 두다 보내버린 세 시간의 여가를 놓고도 산상수훈을 적용했을까. 그만한 일로 ‘손을 잘라버리고 싶은 만큼’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일상을 어찌 살겠나,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일이다.

 

 

 

 

 

그런 김교신이었으니, 만약 그가 요사이 매일 들려오는 사건·사고들을 듣는다면 어찌 반응했을지 궁금해진다. 얼마 전에는 놀이시설 여자 탈의실과 샤워장을 몰래카메라로 찍어 동영상을 팔다 잡힌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그런 행위로 생활비를 마련하겠다는 발상도 어이없지만, 그걸 또 돈을 주고 사겠다는 사람은 뭔가 싶다. 하긴 ‘하의 실종’이니 ‘시스루 룩’이니 ‘입다 만 것 같은’ 패션도(음, 나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인가보다.) 결국엔 입는 이나 보는 이나 ‘몸’의 응시를 염두에 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여, 오늘날의 문화를 ‘육체문화’라고 부르는 사회학자도 있다. 사람이 언제 육체를 가지지 않은 적이 있었나? 왜 오늘날을 유난히 ‘육체문화’라고 이름붙이는 걸까? 인간 육체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전통사회에서 육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생식과 노동이었다. 때문에 튼튼한 몸이 기대되었고 그 몸은 감상용이 아니라 매일 바쁘게 움직이는 몸이었다. 그러나 소위 ‘현대(modern)’ 사회로 진입하면서 생산 수단으로서의 몸의 기능은 상당부분 축소되었다. 여전히 다수의 서민들은 노동을 하지만 그것이 꼭 ‘육체적 힘’과 직결되는 노동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노동이나 신체의 부분노동 측면이 더 많다. 또한 ‘생산’하는 자녀들의 숫자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남은 몸의 활용도는 ‘즐기는(성적 쾌락을 포함하여)’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 거다. 상업적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후기 상태에 와 있다 보니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몸은 이제 소비의 도구를 넘어 사람을 ‘등급매기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나의 몸을 경이롭게 쳐다봐 준다면 그것이 ‘경쟁력’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이다. 타인의 시선을 훔쳐라! 나를 보게 만들어라! 이러한 응시의 명령이 마치 도덕률이라도 되듯 우리의 문화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너도 나도 ‘탐나는 몸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니 맞다. ‘육체문화’의 도래다. 이제는 몸에다가 도덕 판단을 부여하는(‘착한 몸’이라는 표현)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마당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라니! 예수의 윤리는 과연 이 ‘육체문화’의 한가운데서 적절한 윤리적 선언일까? 아니 세상을 살며 이 원칙을 적용할 수는 있는 걸까? 이에 대해 김교신의 생각은 단호했다.

 

간음(moicheia)이란 유부녀와 그 본 남편 이외의 딴 남성과의 불륜의 관계를 칭함이니,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즉 타인의 처는 범할 것이 아니며, 인처(人妻) 된 자는 다른 남성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이 모세 계명의 주안점이었다. …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에 대하여 ‘오직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여, 예와 같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진개(陳開)가 시작된다. 즉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벌써 간음을 범한 것이라고. 행위의 말엽(末葉)을 논함이 아니요, 그 동기의 대두(擡頭)하는 곳을 다스리신다.

 

그러게 말이다. 모세의 법 지키기도 힘든 시절에 예수는 더 근본적인 것을 요구하신 게 아닌가?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던 당시 문화권에서는 실제로 율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처첩을 거느리는 욕망을 실현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은 ‘경건한 유대인’입네 자부심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 많았다. ‘임자 없는 여인’이라면 ‘보고’ 품는 음욕쯤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나? 더한 일도 가능할 터인데... 지참금을 내고 데려오면 될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응시’의 윤리성이 더 근본적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간통이 형사법 상의 효력이 있던 당시에도 법적인 관건은 현장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했어?” 부부 관계의 신뢰성이 깨진 마당에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 역시 이게 제일 중요한 집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김교신이 읽어낸 예수의 윤리는 이런 법적 실체성을 넘어선다. 문제는 오히려 ‘동기’요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무릇 여인(혹은 남자)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는 유부녀에 한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볼 때에 사념을 품음은 이미 간음을 행한 것이다. 예가 아닌 언사와 몸짓이 간음인 것은 물론이다. 누가 능히 핑계할 자인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 백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유익하고,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베어 버려라. 네 백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유익하니라. … 눈과 손을 운운한 것은 육체 중에서도 가장 근이(近易)하게 사념(思念)의 중개를 하는 기관인 까닭이다.

 

또 나왔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빠지느니 눈과 손을 우리 몸에서 떼어 내어 버리는 것이 낫다는 ‘극단의 도’ 말이다. 더구나 김교신은 남녀 쌍방에게 이 ‘극단의 윤리’를 제안했다. 이를 ‘율법주의적’으로 적용한다면 성한 눈과 손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아가 ‘이혼 금지’라는 더 엄격한 도덕규범을 제시한 김교신이고 보면, 오늘날 그의 윤리가 많은 기독 신앙인에게 은혜롭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김교신이 예수의 윤리에서 발견한 것은 ‘무조건 따라야하는 형식주의적 금지조항’이 아니었다. 김교신이 페미니즘을 모르던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그 시절 기독교적 결혼의 근본 원리에 대한 그의 해석은 여성신학자의 입장에서도 솔깃한 부분이 있다.(물론 부분적으로)

 

기독교의 결혼관은 금전, 권세 등을 위한 책략 결혼이 아님은 물론이요, 단지 생식(生殖)을 위한 것도 아니므로 생남(生男)하지 못한 것으로써 칠거지악의 하나로 셀 수 없으며, 쾌락을 중심으로 한 것도 아니니 연애지상주의도 아니요, 우애결혼도 아니다. … 인간의 제반 관계 중에 부부의 관계처럼 오묘하고 심원한 것이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 직접 관계한 원시적 제도였다. “사람이 홀로 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도와주는 짝을 만들리라.”(창세기 2:18)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 ‘돕는 배필’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곁에 서서 동등하게 마주보고 응시하며 도움을 주는 짝’이라는 말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오고가는 관계의 신비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거야 다른 동물들도 받은 축복이니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다. 허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독처’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자유와 창조성을 자꾸 자기 확장과 타인소유에 사용하려 할 유혹을 가진다. 그걸 서로 견제해주면서 과한 욕망은 눌러주고 포기하려는 마음은 격려해주며 전인격적 관계 안에서 서로를 건설해가라고 만든 최초의 공동체가 바로 ‘나-너’(마틴 부버)라는 짝-공동체이다.

 

이 창조원리를 아는 신앙인이 아무런 사이도 아닌 몸을 뭐하러 훔쳐보겠나? 뭐하러 탐하겠나? ‘소비할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니기는 내 짝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예수의 윤리를 ‘극단적’으로 읽어낸 김교신의 원칙은 이 시절에도, 아니 오히려 이 시절이기에 더욱 더 강조되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응시에도 윤리적 시선이 필요하다. 전인격체로 바라보고 ‘너’로 마주할 윤리적 의무 말이다. ‘응시의 윤리’!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뽕띠도 말했던 이 윤리적 시선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꽉 차 있을 때에야 자연스럽고 성실하게 일상 가운데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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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

 

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9-

 

 

첫째로 손 군은 우리 학교의 생도요, 우리도 일찍이 동경-하코네 간역전경주의 선수여서 마라톤 경주의 고()와 쾌()를 체득한 자요, 손군이 작년 113일 동경 메이지 신궁 코스에서 2시간 2641초로써 세계 최고 기록을 작성할 때는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동차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 모시오하는 요구에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하면서도 이 때에 생도는 교사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어 버렸다. 육향교 절반 지점부터 종점까지 차창에 얼굴을 제시하고 응원하는 교사의 양 뺨에는 제지할 줄 모르는 열루(熱淚)가 시야를 흐리게 하니 이는 사제 합일의 화학적 변화에서 발생하는 눈물이었다.

 

김교신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을 기뻐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1936년이니 일제치하의 한 중간, 나라 잃은 백성이라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그 가슴에 품은 마음이야 어찌 자유 잃은 종의 마음이었을까! 올림픽 우승 후 손기정 선수가 우승의 비법이 작전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더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김교신은 제자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다.

 

동경 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박물을 전공하고 양정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의 제자가 손기정이다. 체격이 좋고 만능운동가였던 김교신은 스스로도 마라톤 선수로 뛴 경험이 있었다. 비록 체육교사는 아니었지만 본인의 경험과 사제 간의 신의로 김교신은 손기정 선수의 훈련을 도왔다. 스승과 사제 간의 간절함과 서로간의 믿음이 얼마나 두터웠으면, 늘 함께 해주신 선생님에게 한 발 앞서 얼굴을 보여 달라그리 청했을까. 김교신도 자문하듯이,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싶을 일이다. 선생은 자동차로 앞서 갈 뿐인데 상식적으로 그것이 제자의 뜀박질에 물리적 힘을 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날 스승과 제자는 사제 합일의 화학적 변화를 느꼈다 한다. 스승의 얼굴을 보며 뛰는 제자의 다리만 힘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필사의 힘으로 뛰고 있는 제자를 보며 자동차 안에 있는 스승 역시 함께 뛰는 양, 뺨이 상기되고 뜨거운 눈물과 함께 제자의 가쁜 숨을 함께 느꼈다.

 

 

손기정 선수 동상 (출처: InSapphoWeTrust (https://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줄탁동시!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이 사자성어가 생각났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올 때쯤 되면 안에서 밖을 향하여 껍질을 쪼면서 어디가 얇나, 어디로 뚫고 나가나부리질을 한다고 한다. 그게 이다. 한편 이제나 저제나 아기병아리를 기다리면서 달걀을 살피는 어미 닭이 아하, 요 녀석이 여기를 쪼고 있구나!’ 발견하고 바깥에서 함께 같은 곳을 쪼아주는 것이 이다. ‘이 동시에 일어날 때 생명은 탄생하는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넉넉한 살림도 아니요 떳떳한 참가도 아닌,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발달이 남다른 서양인들 사이에 끼어서 인간에게 극한의 한계를 경험하며 마라톤을 뛴다는 것. 선생도 제자도 그 물리적 고통을 알고, 이 소망 없는 상황을 아는데, 그래도 기어이 뛰겠다는 제자의 간절한 으로 응답하는 스승은 어느덧 서로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는 체험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날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641초의 세계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같이 뛰어 가능했을 일이다. 두 사람의 진심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으니 가능했을 일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그 기억으로 손기정 선수는 다음 해 베를린에서도 자신의 스승과 함께 뛰었을 것이다. 비록 몸은 함께이지 못했으나 고국에서 스승 김교신도 마음을 모아 제자와 함께 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특한 제자가 승패는 작전과 체력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정신의 겸허함에 있더라고백하는 것을 접하며 감사하고 감격했을 일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의 경쟁력이 국제적이라는 소리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손기정 선수 때부터 알아보았을 일이고 김연아, 박태환, 손연재는 장한 배달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도 아니다. ‘줄탁동시의 사제 관계가 상실된 오늘의 교육 현장 한복판을 지내면서 이 글을 읽자하니 내 심장에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아련한 슬픔마저 휘감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절 소신을 가지고 교단에 섰던 김교신이 일제의 탄압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은 15년으로 교사 생활을 접고 말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산 신앙과 민족혼을 오롯이 담아 교단에서 전했던 지식은 또렷또렷한 정신과 몸을 가진 젊은 생명들을 탄생시켰다. 훗날 그의 제자들이 스승 김교신을 회고하며 쓴 책을 읽으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한국 근대사의 모든 자리에서 올곧고 바른 정신으로 살아낸 사람들이 거기 다 모여 있었다. , 한 사람의 힘, 아니 줄탁동시를 끌어내는 한 스승의 힘이 이렇게나 컸던가!

 

비교할 수 없이 모자란 스승이지만, 어느덧 강단에 선지 10. ‘’ ‘몸짓을 해도 ’ ‘마음과 행동을 맞춰주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한탄을 하다가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본다. 비인격적 개별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몬 이 시스템 때문이야, 사제 관계가 사라지고 학습소비자-정보제공자의 자본주의적 기업이 되어버린 대학이 문제야, 그렇게 속상해하다가, 다시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김교신의 시절에 비할 바이던가, 모국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조차 허용치 않던 그 험한 시절에도 줄탁동시로 젊은 생명들을 알에서 깨우고 팔팔하게 세상에 내어놓은 참 스승이었는데부끄러움과 함께 또한 힘을 얻는다.

 

마라톤에도 무엇보다 인내력이 제일이다. 때에 공중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저의 심사에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강한 자를 꺾으시고 약한 자를 세우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속성, 태초 이래로 계속 ’ ‘하시면서 피조물 간의 화해와 평등의 공동체를 만들 제자들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답이로구나. 그 인내를 기억하며, 그 얼굴을 바라보며, 숨이 깔딱거리지만, 지금이라도 멈추고 그냥 주저앉고 싶지만, 그래도 결국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스승과 임마누엘하면서 화학적 변화로 살아내야 하는 거구나! 하나님께는 ’, 내게 온 예쁜 아이들에게는 하면서 그리 하루씩 살아내야 하겠구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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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https://fzari.tistory.com/4?category=615549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 응답하라. 2021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 응답하라. 2021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1927년으로부터 온 편지 - <성서조선> 창간사 - 1927년 7월, 6인의 조선 젊은이들이 <성서조선>이라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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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https://fzari.tistory.com/21?category=615549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 <성서조선>, 1940년 3월호 - 해가 바뀌는 즈음이라 그런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음에 가득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마음이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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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 <성서조선>, 19403월호 -

해가 바뀌는 즈음이라 그런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음에 가득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가다보니 어느 덧 안산 하늘공원이다. 가늘게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맞으며 홀로 서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 앞에 마주했다. 한 이름, 한 얼굴씩 눈에 새기고 마음에 담으면서 기도하며 한 걸음씩 움직이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안타까움이 클수록 또 분했다. 어이없는 죽음이라서, 너무 어린 죽음이라서, 무엇보다 어른들의 탐욕과 부정직함과 무책임이 빚은 참사라서, 기성세대로서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납덩이처럼 마음을 짓눌렀다.

 

어느덧 저 아이들은 마치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김교신의 표현이다. 1940, 일제 치하의 막바지에 김교신은 한 일본 무교회 잡지를 읽다가 큰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시즈오카에 사는 한 일본인 쌀장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선인 근로자들이 주요 고객이었는데 주로 일거리를 따라 1~2년씩 거주하다가 타지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들은 모두 마지막 쌀값을 갚지 않고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쌀장수들은 조선인들에게 쌀을 팔 때에는 아예 그것을 계산에 넣고 저울추를 속여서, 그러니까 말을 적게 되어서 쌀을 팔았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었던 그 쌀장수는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어서 그냥 정확하게 되어 쌀을 팔았고, 언제나 마지막 쌀값은 받지 못한 채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인가 놀라 일본에 있는 지인에게 물은 뒤 김교신의 통탄어린 글이 이러하다.

 

혹시나 하여 쿠와나시 거주의 지우에게 물었더니 바로 그대로이고, 그 중에는 상당한 자산을 만들어 고향에 토지를 살 정도의 여유가 있는 생활을 하면서도 역시 최후의 쌀값은 미불한 채 도망치는 동포가 상당히 많고, 그 때문에 정직한 사람끼리 누명을 쓰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실로 기막힐 소식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쌀알 하나하나가 지금 성스러운 하나님 앞에서 외친다. 쌀알 하나하나의 대가가 지불되어 이 소리가 멈출 때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라? 김교신은 정통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네!’라며 비난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현재적 차원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교신의 저 통탄에 찬 외침은 예수께서 성전 중심의 속죄제의 의식을 무력화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과 우러름(信仰))이 구원의 삶을 얻게 할 것이라선언하신 참 의미와 맞닿아 있다.

 

 

 

예수 당시 평범한 유대인들은 참으로 궁핍하고 처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에도, 유대 지방 정부에도, 그리고 유대교 성전에도 삼중으로 세금을 내야하는 까닭에 일상이 늘 빚쟁이이던 삶이었다. 변변치 않은 벌이에 강제로 걷어가는 세금을 채우자 하니 안식일이라고 쉴 형편이 아니었다. 안식일 법을 철저히 지키고 나는 경건하다 떳떳이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은 소위 있는 자들뿐이었다.

 

누군들 쉬고 싶지 않겠나! 안식일의 정신이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숨을 돌리게 하라는 지상명령 아니었나. 숨이 무엇인가? 루아흐, 생기, 하나님께서 무릇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에게 불어넣어주신 그 숨을 돌릴 틈을 주는 것, 그게 안식일의 정신이었는데. 예수 시절, 하나의 형식적 규례로 굳어진 안식일 법은 오히려 그 법으로 가여운 평민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숨통을 조이는 올무가 되었다. 죄를 지었으니 죄사함을 위한 제의를 드려야 할 터. 하여 속제제의를 위한 제물이라도 준비하려면 그게 또 돈이다. 준비한 제물이나마 제사장들이 고이 받아주면 좋으련만, 이 양은 흠이 있다. 이 비둘기는 결격이다. 이리 퇴짜를 놓으며 미리 뒷돈을 받은 장사치에게로 이 가여운 사람들을 인도한다. 하여 죄사함을 받기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시세보다 더 많이 주고 제물을 사야하는 사람들. 그만큼의 돈이 없으면 그냥 죄인으로 고개 숙이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예수 당시의 이웃들이었다.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죄인 만드는 성전 제사장들을 향하여 예수는 분노하셨다. ‘만인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소리치시고, 장사판을 다 뒤엎으셨다. 죄의 용서는 사랑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얻을 것이요, 구원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길로 돌이키겠다는 회개그것 하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에게 선포된 구원(소테리아)은 그가 주여, 제가 남에게 부당하게 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나이다.” 결단했을 때 도래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하나하나여, 여호와 앞에 호소하기를 잠시 유예하여 다오. 그대들에게 모조리 ・・・ 대가가 지불될 때까지 우리는 천국에의 입장권도 유예하여 노력하리라. 주 예수의 복음에 그 힘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오늘 우리가 저 하늘에, 꽃이 되고 별이 된 아이들에게 해야 할 약속인지도 모르겠다. 김교신의 절절한 고백은 식민사관의 연장선에서 한국인들의 민족성이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아니었다. 자신의 구원까지도 유예하면서 노력하겠다는 그의 각오는 회개(돌이킴)’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구원의 여정과 무관치 않음을 보여준다. 다시 볼 일 없다고 제 몫의 삶을 정직하게, 책임 있게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구원받은 이의 삶일까! 비단 그리스도인들만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무책임한 삶, 비도덕적인 행위, 탐욕스런 실천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억울한 희생이 있다면, 그 하나하나를 갚아낼 때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적 삶을 그치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예수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해서이미 대가를 지불하신 구원을, 무슨 이유로 천국 입장권마저 유예하며 노력을 하나? 모르는 소리다. 예수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해서 이미 지불하셨던 것은 유대교적 속제제의가 담보한다는 죄의 용서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용서를 위해 제의를 드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는 막 살아도 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이로써 합당한 삶, 자신이 그동안 이웃에게 행해온 부당함과 억울함을 갚아주고 다시는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하나님의 방향으로 삶을 돌이키는 것! 그것이 구원의 삶일진대, 오늘 우리가 한 생명 한 생명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쌀알은 세월호 아이들이고 송파 세 모녀이며, 곧 그처럼 될 만큼 삶이 위태로운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들의 ’()을 도적질하거나 방관하는 한 우리도 구원의 삶에서 멀리 있다. 예수의 복음이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려면, ‘나만 구원받는 사적이고 이기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https://fzari.tistory.com/43

 

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 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 - 첫째로 손 군은 우리 학교의 생도요, 우리도 일찍이 동경-하코네 간역전경주의 선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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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https://fzari.tistory.com/4?category=615549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 응답하라. 2021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 응답하라. 2021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1927년으로부터 온 편지 - <성서조선> 창간사 - 1927년 7월, 6인의 조선 젊은이들이 <성서조선>이라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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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 응답하라. 2021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

 

응답하라. 2021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1927년으로부터 온 편지

- <성서조선> 창간사 -

 

19277, 6인의 조선 젊은이들이 <성서조선>이라는 동인지를 창간했다.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되어버린 세월호 참사 이후 나라의 현재를 암담해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이 시절보다도, 더 희망이 없던 일제치하였다. 동인 중 하나였던 함석헌의 표현처럼 끌려가듯일본 땅에서 낯선 타자로 살며 바다 건너 조국을 지켜보자니, 젊은 지식인이요 신앙인인 이들의 참담한 마음이 더욱 깊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걱정을 같이 하고 소망을 일궤에 붙이는 우자(愚者) 5-6인이 동경 시의 스기나미촌에 처음으로 회합하여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고 매주 때를 기하여 조선을 생각하고 성서를 강해하면서 지내온 지 반년에 누가 동의하여 어간의 소원 연구의 일단을 세상에 공개하려 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도다. 명명(命名)의 우열과 시기의 적부(適否)는 우리의 불문하는 바라. 다만 우리 염두의 전폭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두 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신의 선물을 성서 한 권 뿐이니 둘 중 하나를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기원은 이를 통하여 열애의 순정을 전하려 하고 지성의 선물을 그녀에게 드려야 함이로다.” (<성서조선> 창간사 중)

 

 

 

 

그랬다. 주저앉아 울 수도, 숨어 탄식만 할 수도 없었던 조선의 청춘 여섯(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은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두 존재를 삶의 기반으로 양 손에 꼭 쥐고 하루씩 살아냈고, 그 치열함을 글로 담아 조국에 선물했다. 자기 실존 안에서 주체적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스승 우치무라 간조가 두 개의 ‘J’(저팬과 지저스)를 꼭 붙들었듯이, 조선의 젊은이들은 성서조선그 사이에 어느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실은 어느 하나를 더 사랑할 수 없어서 두 단어 사이에 라는 접속사마저 허락지 않았던 절절한 사랑을 <성서조선>에 담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낭만적일 수 없었다. 때론 폭력으로 때론 회유로, 일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철저히 막으며 제국이 만든 동질적 시스템에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었으므로・・・ 하여 <성서조선> 동인들은 자신들의 외침이 열매 맺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이 걸릴 지를 이미 예감했었나 보다.

 

<성서조선>,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 사람을 기다려 면담하라. 상론(相論)하라. 동지를 한 세기 후에 기()한들 무엇을 탄할 손가( <성서조선> 창간사 중).

 

하루를 버텨내기 힘들었을 그 시절에 김교신과 <성서조선> 동인들은 한 세기 후의 동지를 기다리며 인내했다. 그리고 이제 2021년이다. 김교신이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렸던 우리다. 한 세기 후의 동지들이다. 지금 우리의 시절은 어떠한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 지배로부터는 독립을 하였으되, 금융 자본주의적 질서를 앞세운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새로운 제국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노동 없는 부()와 정의 없는 권력이 득세하는 이 세상은 여전히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김교신의 시절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있었다면, 우리 시절에는 갑과 을이 있다. 그 시절에 일본인이 판단하고 조선인이 따라야했다면,

 

 이 시절에는 갑이 판단하고 을은 따라야한다. 꿇지 마라! 자유혼으로 스스로 서라! 우리가 아는 성서의 핵심 메시지는 그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인간이 어찌 다른 인간들의 판단과 명령에 의해 자기 존엄성을 포기하겠느냐. 혁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다. 자유를 빼앗기고 존엄성을 상실한 이 땅 조선에서, ‘성서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를 새기고 또 새기며 자아의 혁명을 시작하자. 이것이 김교신과 동인들이 <성서조선>을 시작하며 동포에게, 이웃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성서조선>,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들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 창간사 중)

 

뜨끔할 일이다. 어찌 한 세기전 외침일까. 오늘날 한국 교회를 돌아보아도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가 넘쳐나질 않던가! 스스로 기도하고 생각하며 팔딱팔딱 오늘로 살아 돌아오는 말씀을 찾아내려는 주체적 신앙 없이, 그저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전통이 그렇게 가르치니까하며 앵무새처럼 남의 신앙만 반복하는 행태를 향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성서조선>발의 먼지를 털며그런 자들과는 관계없음을 선포한다.

 

<성서조선>,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성서조선> 창간사 중)

 

 

 

 

성서를 평신도에게 건네기 위해, 이를 금하던 교황청을 피해 다니며 죽을힘을 다해 영어 성서를 번역했던 윌리엄 틴데일은 자신했었다. 불가타(라틴어역 성서)를 독점하고 평신도에게 성서 읽기의 권위를 허락지 않았던 교회를 향하여 당당하게 선포했다. 성서를 모국어로 번역하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하겠노라고, 결국 시골의 소 모는 목동조차도 교황보다 성서의 핵심 메시지를 더 잘 알게 만들 것이라고! 김교신의 소망이 다르지 않았다. 성서는 중심으로 위로 좁아드는 메시지가 아니다. 변방으로, 지평으로 퍼져나가는 자유의 소리다. 그걸 독점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에 반()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건물에 갇힌 교회교인들의 울타리를 넘어 훨훨 날아라. 하나님은 교회보다 크시다!

 

이 자유의 외침이 선포된 것이 1927년이다. 이 멋진 외침을 외친 산 신앙인들은 백 년 뒤의 동지를 기다렸다. 이들의 메시지가 제국의 기반을 흔든다고 직감하고 1942년 잡지를 강제로 폐간하고 이들을 투옥했던 일본 순사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성서조선> 젊은 신앙인들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산 신앙이, 민족혼이 백년 뒤, 아니 5백년 뒤에라도 싹틀 기반을 마련하는 고약한 놈들이라고 말이다. 그 터를 놓은 신앙의 선배 김교신이 우리를 부른다. 기다렸노라고, 얼굴을 마주하자고, 성서를 논하자고그의 부름은 낡지 않았다. 시대는 여전히 악하므로그러니 응답하라. 2015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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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 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 - 첫째로 손 군은 우리 학교의 생도요, 우리도 일찍이 동경-하코네 간역전경주의 선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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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https://fzari.tistory.com/21?category=615549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 <성서조선>, 1940년 3월호 - 해가 바뀌는 즈음이라 그런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음에 가득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마음이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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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됨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6)

 

친구됨

- 전집 5일기 I1935년 일기 -

 

 

다음 달은 정상적인 발행이 가능할까, 이런 식으로 과연 조선 땅 전역과 오고 또 올 미래의 세대들에게 성서의 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한치 앞을 모르면서 매달 성실함과 소망으로 이어간 성서조선지 발간이 어느덧 10년에 다다를 무렵, 김교신은 뜻밖의 친구들을 만났다. 한센병 환자들의 공간 소록도에서 보내온 문신활의 편지는 김교신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그의 인생에 큰 사건이었다.

 

문신활과 그의 동료들은 1932년 부산의 감만리나병원을 섬기던 손양원 전도사에게서 성조지를 소개받았다 했다. 전도사님이 들려주시는 말씀 해석을 재미나게, 희열에 넘쳐 들었다고. 그러나 성조지의 불순함을 지적하고 이단이라 핍박하는 무리들에 의해 손 전도사님은 쫓겨나고 600여명이나 되던 나환자 교우들도 이리저리 떨어져나갔단다. 남은 5. 돈 없고 반대에 부딪히는 고난 속에 겨우 한 권 신청하여 병원 뒷산 송목(松木)을 의지하여 은근히 모이어 읽을 때마다 썩어짐이 없는 진실한 부흥이 되었더이다.”(2105)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이후로도 기구한 사연으로 이리저리 몰리다 소록도에 모여 있다며, 김교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나환자가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될까봐 편지로 대신한다는 사연이었다. 이른 봄 소록도에서 온 소식을 받고 김교신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편집 조판까지 마친 후에 소록도 통신을 접하였다. 이것은 주필의 일생에 가장 큰 사변의 하나이다. 이 일을 지우들께 알리기를 지체할 수 없었다. 반도의 유위(有爲)한 청년들이 복음을 요구하지 않고, 유리한 전도지를 교권자 제씨가 강하게 독점하고자 할진대 우리는 애석할 것이 없이 퇴각하여 소록도의 5천 명 친구에게 가리라. 병자라야 의약이 필요하다. 단 면수의 한정으로 인하여 조군의 요한복음이 2면만으로 단축된 것은 미안 천만.

 

이 한 장의 편지는 막 조판을 마친 성조지뿐만이 아니라 김교신의 신앙과 향후 삶의 여정에도 큰 사변으로 작용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 위아래가 있겠느냐만, 기왕이면 리더십 있는 청년, 장래 촉망한 인사에게 전해 산 신앙의 영향력을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한반도에 뿌리내리게 하고픈 욕심이, 솔직히 있었다. 그런데 만날수록, 이야기를 나눌수록, 오해와 무관심에 지치고 실망하던 한중간이었다. 그런데 이후 쏟아지는 소록도 통신들은 김교신 자신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던 복음의 심오한 깊이를 가진 살아있는 복음서요 예언서들이었다. 아아, 김교신은 결심한다. “나환자의 신서를 가슴에 품고 천국 길을 돌진하리라.” 변화는 비단 김교신뿐만이 아니었다. 문신활의 사연을 읽은 성조지 한 독자의 결심은 이러했다.

 

선생님, 진체 송금 340전 하였습니다. 이는 생()의 지대 1년분과 소록도 문신활 형에게 보낼 지대 1년분이올시다. 75호 그의 논문을 보고 지대를 제가 담당함이 가함을 느꼈나이다. 이 일을 절대로 공개하지 마시고 또는 위 문형 본인에게도 저의 이름을 교시(敎示)하지 마소서. 특별 부탁합니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삶의 결단을 담은 편지들이 이어졌다.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이야기들부터 연말까지 계속된 소록도행 선물꾸러미까지. 그들은 이미 문신활의 친구였다. 남도 나도 천형이라 여기던 병을 얻는다는 것, 몸이 아픈 것도 감당키 어려운 지경인데 가족과 이웃, 살아갈 의미를 주고 힘을 주는 이들과 격리되어 외로운 영혼의 싸움까지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했던 문신활과 그의 동료들. 그들은 외딴 섬을 찾은 성조지를 통해 친구들을 만났고, 무엇보다 이들을 친구로 엮으신 진정한 친구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연인들의 편지가 이만큼 절절할까. “나병으로 인하여 외롭고 고독한 소생에게 둘도 없는 가장 유일의 벗이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기거동작 간에 가슴에 품고 틈만 있으면 들고 본다는 성조지를 통해, 이들은 하나의 에클레시아’(교회)가 되어갔다.

 

 

 

 

521일자 문신활의 편지는 차라리 한편의 예언서이다. 자나 깨나 성조지를 품고 다닌 이의 깨달음이 참으로 깊다.

 

, 오묘하도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이여, 찬송하리로다. 우주의 배후에, 조선의 역사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소록도의 배후에 절망한 나맹인(癩盲人)의 생활 위에 운동하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며, 병중에도 병을 더하여 낙망과 연민의 입장에 처한 나맹인으로서 천국의 희망을 심구할 줄이야 그 누구가 알았을까요. , 찬송하리로다, 우주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생명, 학박사야 알았느냐, 나맹인의 참담한 사변 위에서, 그 형자님들의 눈물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 창조의 묘법을, 세인들아, 너희는 몰랐으리라. , 현 교회의 신앙관은 심히 천박한지라, 우주에 충만한 복음, 삼라만상에서 생명적으로 뛰놀며 성장하는 진리, 즉 성서가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예수의 흔적만 남은 신조만 붙들고 밤낮 울고 있음을 구경하였음이다.

 

전형적인 예언서의 서문을 갖춘 그의 편지는 고통에 관하여 욥기를 뛰어넘는 문학적, 신앙적 성찰을 전한다.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듯이, 그리스도의 가혹한 사랑인 동시에 자기와 사람을 밀접한 교제를 시켜 놓고 견딜 수 없는 불행과 비운을 내리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나이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인간의 행복이 아니요 인간의 불행이다. , 그리스도의 사랑은 웃음이라기보다 눈물이었나이다. 그리스도에게 불리는 자, 그리스도에게 선택함을 입은 20세기의 복음의 종들은 자기의 소유는 빼앗기고 자기의 소망은 깨어지는 것이다. , 현 교회 사랑하는 형자들은 아직도 자기를 빼앗길 용기가 없다. 즉 땅의 것을 팔아 하늘의 것을 살 용기가 없다. 소록도 갱생원의 사랑하는 형자들이여, 나병에 시들고 남은 그 뼈, 그 살, 그 피까지를 주 예수께 바치사이다. 빼앗기사이다. 그럴 때라야 천국은 형자님들의 소유가 되리이다. 이를 못한 신자는 천박한 자기 지식과 관념에만 잡히어 영원히 죽으리다.

 

요즘 받는 편지마다 소록도 아니면 만주라는 김교신은 문신활과 동료들의 편지를 읽고 서신으로 왕래하다 726일자 일기에 그리 적고 있다. “그 중간 반도는 교권자와 신학자에게 맡기고자신은 성조지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친구들을 향해, 즉 주변으로, 변방으로, 복음의 사자가 되어 달려가겠노라고.

 

실은 인간 문명이 지어져온 이래 중심에는 산 신앙이 오래 버텨본 적이 없다. 요즘 방영되는 어느 드라마(제목은 송곳인데 웹툰이 원작이라 한다) 대사마따나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다른 법이다. 행여 복음의 생령을 가슴 뜨겁게 체험했고 그 핵심 메시지를 지식으로 안다 할지라도 인간 시스템의 심장부에 서면, 예수가 친구했던 이들과는 멀어지기 쉽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저 가난한 마음의 신앙고백이 터져 나온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문드러진 살, 쇠약해진 뼈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된다고 온전히 기쁨으로 주께 내어놓고 천국을 사겠다는 것인가! 저런 친구들을 두고서 어찌 중심을 향할까. 참으로 예수의 선언은 옳다. 가진 자는, 중심에 선 자는, 그 가진 것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가장 멀다. 문신활의 사연이 담긴 성조지를 읽고서 조선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시려거든 저이 한 사람이면 만족 만족 대만족이라고 고백했던 송두용처럼, 아마도 이때 김교신은 삶과 신앙의 방향성을 더욱 굳건히 했을 일이다. 주변에 서기로, 병자와 함께 하기로, 약하고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기로그 결심대로 살다가 결국 그는 변방의 한 공장에서 병든 조선인 노동자들을 돌보다 그들의 친구로 죽었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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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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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집 5일기 I1934년 일기 -

 

 

어려서부터 나는 유난히 잠이 많았다. 덕분에 청교도적 사명감으로 일분일초를 아끼며 사셨던 아버지로부터는 늘 게으르다는 핀잔을 들었고, 모처럼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도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이 40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선천적인 면역계통 이상으로 간과 신장이 안 좋다는 것을. 아하, 그래서 늘 저녁 8시만 넘으면 몸이 붓고 자면서도 끙끙 고열에 식은땀까지 났던 거구나. 어쩐지, 일년내내 감기일 리는 없고 이상하긴 했다. 하여 무조건 쉬는 게 답이라는 의사는 모든 환자에게 하는 조언을 내게도 전했다. 스트레스 쌓이는 일 하지 말고 무리하지 말라는 소리 말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가? 그럼에도,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병명은 나에게 자유평안을 주었다. 뒤풀이에 끌려갈 세라 서둘러 사라지고 대부분의 친교 행사에 불참하면서도 마음은 불편했는데, 병이라지 않나! 놀 기운이 없다지 않나! 죄책감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고, 내 체력에 나만의 한계가 있다하니 남들 같지 않음으로 인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선생으로서, 아내요 엄마로서, 딸로서 며느리로서, 최소한 해야 하는 의무방어전만 감당하기에도 내 체력으로는 벅찬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건강 체질이라 생각했던 김교신도 뇌빈혈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접하니, (이러면 안 되지만) 반갑기까지 하다. 1934년의 일기에는 유난히 병석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잦다. 4월 어느 날의 일기다.

 

아침에 뇌빈혈이 재발하여 와상한 채로 수일을 지내다. 의사는 명하기를 독서하지 말고 사색하지 말고 집필하지 말라고 하니, 이는 나에게 거의 사형선고와 근사한 일이다. 허약한 신체는 아니면서도 무리한 학대를 육체에 가하고는 병신노릇 한다. 그러나 소인한거위불선(小人閑居爲不善)이라 하니 우리 같은 소인은 병석에서 쉬는 것이 차라리 감사이다.

 

어느 때인들 성서조선지 발행이 녹녹했겠는가마는, 1934년은 김교신에게 그야말로 힘겨운 한 해였다. 류석동을 비롯하여 그간 주요하게 집필을 담당했던 이들이 대거 글 싣기를 거절했으며, 일제의 검열도 날로 심해져갔다. 66호는 폐기될 뻔하기도 했다. 용산경찰서에 호출당하여 취조를 받고 이게 마지막이구나 싶었던 일들을 겪었다. 경무국으로부터 뒤늦게 범죄의사 없음’(기가 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누구 기준의 범죄인 건지)으로 판명되어 속간을 허락받고 주일임에도 종일 인쇄소에 나가 교정하여 겨우 출간하였다. 1934년은 내내 늘 이게 마지막이지생각하며 한 호씩 출간하여갔던 한 해라고 적고 있다. 그 해에만 금단된 신문 잡지가 230여 종, 수입 신문 압수 1,414, 이입 신문 압수 842, 조선문 신문 압수 28, 그 외에 조선 내 발행 잡지의 삭제 402, 단행본 삭제 108”(1212일 일기)이라 하니, 성서조선지가 겪었던 수난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멀쩡한 사람에게도 뇌빈혈이 찾아올 일이다.

 

 

 

 

몸에 병까지 얻어가며 촌각을 아끼고 사투에 가까운 출간을 담당하다보니 김교신은 지인들의 편지, 제자들의 즐거운 소식에도 동참하거나 회신할 겨를조차 없이 산 날들이 이어졌다.

 

이러한[왕래는 어렵겠으나 교훈의 글월을 보내달라는] 특청(特請)에도 불구하고 축전도 못하고 엽서 한 장도 보내지 못하여 사랑의 부채만 늘어가는 것이 마음에 괴로웠다. 결혼식을 무의미한 것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그저 다망하다는 핑계 때문이다. 근래에 원로(遠路)에서 방문한 모 친구가 정거장까지 전송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냉정함을 책()하였으나, 책망을 감수하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성조지를 발간하기 위하여는 이만한 교만을 용인(容忍)하라고 자가용(自家用) 특허를 맡았다. 서신에 회답이 태만한 것도 동양(同樣)의 특허권으로 인함이니 지우에게는 특히 이 사정을 통찰하여 주기를 기망(企望).

 

1934년이면 김교신이 겨우 삼십대 중반으로 들어설 무렵이다. 물론 그 시절의 서른 중반은 지금과 다르겠으나, 여전히 젊은이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의 뇌빈혈은 구독자들조차 걱정할 만큼 잦게 찾아왔었나 보다. 좀처럼 결근이 없던 김교신이 학교를 못나가게 된 날의 원인도 뇌빈혈에 있었다. 127일의 일기다.

 

피로가 축적된 결과인가 오늘 아침에 드디어 뇌빈혈이 생겨 기상치 못하고 결근 휴양. ‘원컨대 건강이 반석 같아서 주야 불휴(不休)하고 일할 수 있었으면하기는 하지만 또한 게으른 자에게는 허약한 일도 적잖은 행복인 것을 병상에서 배우다. 건강하면서 할 일 다 하지 못하면 그 책임이 나에게 있으나, 하다가 거꾸러져서 못하는 것은 우선 나의 책임이 아니다. 몸은 약하여 누웠으나 마음에는 다할 수 없는 만족과 감사가 용연하다.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니라는 바울 선생의 구가 자연히 나의 것으로 되어 입술을 흘러나온다. 밤에 겨우 성조 제 71호를 보낼 절차가 되어서 피봉 쓰기 시작하다. 약 일주간 쓸데없이 지체되었다. 독자에게도 미안하나 주필에게도 미안함은 일반사.

 

이 어찌 미안할 일일까. 물론 혹자는 비웃을 일이다. 성조지 발간이 뭐 그리 생사가 달린 일이라고 몸이 상할 지경으로 친교도 마다 않고 진행한단 말인가. 당시에도 그런 조언 내지는 비난이 없지 않았다. 오해도 많았다. 네 자존심이지, 네 체면을 위함이지. 그러나 이에 대한 김교신의 변은 확고했다.

 

학교에서 당직. 신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새벽 3시경까지 집필하여 신년호의 준비가 거의 완결되다. 오래 전 일은 망각하여 버렸으나 금년 1년 동안에 한 번이라도 모험적인 연일 과야(過夜)함이 없이 성조지가 되어 본 적은 없다. 이 한 호까지 내놓고는 거꾸러져도 가하다는 결심이 이르지 않고 성조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안일하다. 세상에 난 것은 사업하기 위함이 아니다. 만일 할 사업이 있다면 학교 교사 노릇이다 충실히 하면 사회에 일원 된 의무는 다하는 셈이다. 성조 발간 같은 일은 누구에게 부탁 받은 것도 아니요, 감독 받는 일도 아니다. 발행일자가 늦어도 할 수 없고 폐간된대야 체면 관계될 것은 없다. 오직 참으려 해도 제지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하여 마지못하여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유희(遊戱)’라는 요소가 다()부분 개재한 일인 것은 사실이다. 고로 초조할 것이 없이, 마치 일요일마다 물에 산에 소요하는 이들처럼 슬금슬금 쉬지 않고 걷고자 할 따름이다.

 

슬금슬금 쉬지 않고 걷고자 할 따름이다.” 아하, 드디어 내게도 페이스메이커가 생겼다. 김교신의 일상이 결코 슬금슬금으로 표현될 만한 페이스는 아니었으나, 소명으로 여기며 삶의 우선순위를 매길 일들이 있었고, 촌각을 아끼며 그 일에 매진하되, 몸져누워 쉬게 되면 그 역시 행복하고 감사하다 여기다가, 회복하면 다시 쉬지 않고 걷는그이의 발걸음이 내게는 내 인생의 걸음을 함께 해주는 페이스메이커의 달리기와도 같이 느껴졌다. 마라톤에 능하던 김교신이 아니던가. 단거리야 스피드가 중요하겠지만, 마라톤의 가치는 완주에 있지 않겠나. 자기와의 싸움이고, 제 몸의 페이스를 익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실은 어제 그제 그리고 오늘까지 삼일을 끙끙 앓으면서도 줄곧 스케줄러를 쳐다보던 내 모습이 한심하던 차에 발견한 복음이었다. 머리맡에 두고 읽을 기운이 날 때마다 펼친 김교신의 일기 5에서 슬금슬금 쉬지 않고 걷고자 할 따름이다.”라는 글귀에 감명을 받게 될지, 논문 쓰느라 바삐 읽었던 십 수 년 전에는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말이 맞다. 병상에 누움도 감사다. “삶은 미정(未定)”이라던 김교신의 지인 류영모의 글귀도 생각나는 날이다. 인간사에 어찌 완성이 있고 완벽이 있으랴. 제 소명 따라 하다가 죽는 것이지. 누군가 그 뜻이 귀하다 여기면 바통을 이어받듯 받아줄 생명을 기대하며(이는 함석헌의 표현이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담아내려 했던 뜻은 158(19423월호)로 그쳤지만, 한국 무()교회 3세대들에 의해서도, 21세기 청년들의 <성서한국> 모임을 통해서도, 또한 이렇게 저렇게 제도 교회 밖에서성서를 스스로 읽는 평신도들에게 용기와 방향성을 주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져 가지 않나. 슬금슬금 쉬지 않고! 그 정직하고 성실한 걸음이 위로가 되는 날이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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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和)의 영이여, 오소서!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5)

 

화(和)의 영이여, 오소서!

- 전집 5권 『일기 I』 1932~33년 일기 -

 

 

설마 진짜로 그럴까, 했다. 물론 지난 문명사에 뒷걸음질 친 사례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길게 보면 점차로 ‘앞으로 나아간’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마다 기득권자들은 그 ‘나아감’에 저항하다 결국 큰 흐름을 막지 못하고 가장 늦게 승차해오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과거사의 해석에 있어 단 하나의 ‘정답’은 없는 법이라고, 남아 있는 기록 자체가 이미 ‘승자들의 것’이기에,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는 일은 더 많은 시각과 해석을 요하며 중층적이고 입체적인 ‘읽기’를 허해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배워왔는데… 군주제였던 조선 시대의 왕들도 안하던 일을 하겠다 한다. 역사 해석은 1차적으로 전문적인 역사학자들의 몫이요, 그들이 자유혼과 학자적 양심으로 서로 깊게 파고 날카롭게 논쟁하며 결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아야, 옳다. 오늘날의 시민들은, 특히나 교육수준이 높은 한국의 시민들은 그리 다양하게 소개되는 해석들을 읽고 공감 혹은 반박할 만큼의 역량을 가졌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서 단 하나의 ‘정답’을 만들려 하는 것일까? ‘만든 답’이 ‘정답’이라고 누가 판단하는가? 독일 문인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모국어도 모른다’고 한 바 있다. 이 표현을 가져와 막스 뮐러는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다.”라는 대선언으로 비교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장을 열었다. 하나만이 아니라 둘, 혹은 셋… 같은 사건,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을 다양하게 알고 배우며 ‘비교’해보라는 이 학문적 초대는 시민들에게 동등하게 권리와 능력이 부여되는 근현대 사회의 진행과 더불어 이제는 ‘당연’이 되어버린 공동체의 삶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 큰 흐름을 기어이 되돌려 시민을 한낱 ‘우매한 백성’으로 여기고(아니 그렇게 ‘만들려고’ 하고) 있음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상상력인가?

 

역사에서 배울 일이다. 자고로 단 하나의 정답을 만들려고 했던 자들은 모두가 권력을 독점하려던 사람들이다. 그건 종교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만큼 다양한 해석과 신앙 실천이 존재했던 시절도 없었다.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신앙고백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교부들과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신앙 체험을 통해 다양하게 고백하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들을 살려내고 현재를 견디어내게 하며 나아가 죽음의 순간조차도 평안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힘을 가졌기에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그 어려운 박해의 시절에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그 다양성은 획일화된 교리로 좁아들고 굳어져갔다. ‘정통(orthodox)’의 탄생이었다. 사람을 살려야할 종교의 이름으로 이후 유럽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축출하고 고문하고 심지어 죽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성령이 진리의 영이고, 예수가 그리스도심이 정녕 사실이라면(난 그리 믿는다.) 무엇이 두려워서 ‘단 하나의 해석’을 고수하며 그것도 자신들이 만든 해석이 ‘정답’이어야한다고 고집했을까? 답은 명료하다. 하나의 제국이 된 거대 교회조직을, 아니 그 조직을 통해 유지되던 고위성직자들(그리고 그들과 결탁하여 힘을 나눈 정치적 세력들)의 기득권을 자자손손 계속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서조선』지와 동인들은 시작부터 이단 시비를 받은 공동체이다. 제도로서의 교회 ‘밖’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들을 의심케 했으며, 우치무라 간조라는 일본인 아래서 성경공부를 했다는 것도 못마땅하게 비췄다. 더구나 40호, 50호, 그 호수가 이어지며 이들의 주장이 조선 땅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자, 많은 이들이 『성서조선』의 ‘이단성’을 물고 늘어졌다.

 

김교신은 성서조선 동인들 중에서도 가장 ‘정통’신앙을 가진 이었지만, 교리가 그러하니 무조건 받아들였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산 신앙과 자유혼으로 철저하게 읽고 배우고 해석하면서 ‘아멘’할 정통신앙은 받아들여 왔던 그였다. 그러나 김교신은 칼뱅의 예정설은 인정하기 힘들었다. 어찌 구원받을 자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말인가? 성서 어디에 그런 말이 있나? 그리고 아무리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도, 그것이 사는 동안의 행위와 상관없을 리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김교신은 “구원이란 개인적 보험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후구원의 부정이라기보다는 이에 대한 교리적·추상적 논쟁은 신학자에게 일임하고 평신도인 자신은 “순간순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 매일 사람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생을 생활하여 죄와 세상을 이기고 개선하는” 구원의 현재성에 집중하겠다고 고백했다. 이런 고백과 삶이 ‘정통’에서 벗어나고 심지어 ‘하나님의 정답’에서도 벗어난다면, ‘이리 살다가 기꺼이 지옥에 가겠노라’고 선언했다. 방점은 앞에 있음을 주의하자. 지옥에 가겠다는 말이 아니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독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지막 일인까지도 이런 삶의 결단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김교신의 신앙고백이다.그런데 이런 김교신의 신앙고백을 읽고, 한 독자가 경고문을 보내왔다. ‘망상을 그치고 오직 성서에만 집중하라’고 단언하는 이 독자의 자신만만함에 김교신은 이렇게 답했다.

 

이단자 칭호를 받기는 이번까지 두 번째다. 익명이므로 필자는 헤아릴 수 없거니와, 일독한 후에 느낀 것은 심신이 아울러 건전(sound)하여야 하겠다는 것이다. 소위 찬송가와 기도만 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이 아니다. 일정한 직업 특히 농공상의 직을 가지고 이마에 땀 흘리는 생활이 심령의 보건에도 대단 필요한 듯하다. 또한 기독신자일지라도 때로는 그 독서의 범위를 성서 이외에 확장하여 지력, 시가, 자연과학 등에도 미치는 것이 보건상 불가피할 것인 듯하다. 반드시 박학 군자라야 기독신자라는 것이 아니다. 난쟁이 두골(頭骨)이나 정구 선수의 팔처럼 기형적으로 발달하기보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더 요긴한 듯하다 할 뿐이다.

 

성서 하나만 읽을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안에 담긴 유대인, 기독인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다른 학문과의 비교를 통해 읽어내야 ‘건전하다’는 말이다. 이는 보통의 의식을 가진 근대 시민이라면 동의할 보편적인 의식이다. 우리는 팔과 다리의 역할만 하면 되었던 전근대사회의 ‘신민(臣民)’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할 터이니 너희는 무조건 꿇어라, 그런다고 그냥 복종하는 이는 시민(市民)이 아니다. 신민이다. 적어도 근대 사회의 건설을 꿈꾸었던 시민 계급이 자기 삶의 터전을 이루고 그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작동 원리로 ‘합의’한 것은, 각자의 의미 추구와 삶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되 이것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법’에 의거하여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자유와 평등의 살림살이였다. 그런데 ‘하나만 하라’니, 결국 손과 발만 하라는 소리다.

 

김교신과 성조지 동인들은 어찌 보면 철저한 신앙인이요 한편으로는 철저한 근대인이었다. 평민들의 역량을 믿었고 그들의 ‘각개’ 전투를 응원했다. 32년 1월 3일자 일기에는 평양 걸인 강만영 씨의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과 같은 방식이 아닌 ‘한 전도자’의 삶을 응원했다. 목회자 자녀로서 동경 유학을 한 이가 일부러 광인 행세를 하며 걸인 무리를 지도한다고 한다. 속한 걸인들이 모두 “먹고 남은 것, 입고 남은 것이 없으면 자기는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는”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는 말에, 김교신은 비록 그의 언행에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교라고 긍정한다.

 

또한 수취인 사망의 연유로 돌아온 성조지 52호가 계기가 되어 알아본 독자 김운경 형제의 사연에도 김교신은 긍정의 끄덕임을 했다. 무지함에 음주는 일상이고 심지어 부친을 구타하기도 하는 이였는데 한번 회개하자 악행하던 열과 기로 전도에 열이 붙은 사람이었다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는데 “날 봐라, 날 봐라” 고성으로 악을 쓰며 얼마나 열심을 내었는지 인후를 상해 토혈을 하고 결국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이 사연을 들으며 김교신은 그의 무모함을 판단하는 대신 “오호라, 무학한 악인 김 형은 ‘날 봐라, 날 봐라!’ 하는 힘이 있었다.”고 그 삶과 죽음을 기렸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특정한 집단 이익을 옹호하거나 지킬 필요가 없는 평민, 평신도는 각자의 신앙대로 제 삶을 살 자유를 누린다는 말이다. 반드시 하나의 방식, 하나의 외침이어야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1932년 12월의 일기는 이런 자유 때문에 평생 평민, 평신도의 삶을 살고자했던 그의 의지가 보인다.

 

이 점으로 보아 나는 일평생 신앙의 전문가 되지 말고 소인(素人) 되기를 원하며, 평신도인 것을 감사하는 바이다. 우리에게는 일가의 지설(持說)을 고집하여 전문가와 싸울 만한 아무 이유도 없고 체면도 없는 자이다. 배울 만한 것이면 언제 누구의 설이라도 수납할 수 있고 불가해의 것이면 학도의 양심으로 모른다고 할 뿐이다. 다만 그리스도를 주로서

 섬기는 이면 함께 할 것뿐이다.

 

 

김교신의 막역한 친구요 동인이었던 함석헌의 말마따나 “성령은 화(和)하는 영이지 동(同)하는 획일주의의 영이 아니다.”(전집 3: 18) 자유혼으로 각자 외쳐도 공동체의 와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성령이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 안에서 맘껏 뛰노는데 무엇이 걱정이랴? 그럼에도 굳이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정답’을 고집하는 이가 있다면 이들은 성령을 모르는 자요, 사람 안에 깃든 이 ‘신성한 하나’를 불신하는 자다.

 

때문에 획일을 강조하는 황당한 제안을 당하여, 신앙인이라면 ‘프로테스트’해야 한다. 『성서조선』을 열심히 구독하던 독자, 황해도 계명학원의 김형도가 보내온 글의 일부를 인용하며 개신교 정신, 즉 ‘프로테스탄트’의 소망을 되새겨본다.

 

풍전등화 같은 저 불들이 꺼지지 아니하도록 우리 성조지는 기름의 대용(代用)이라도 되소서. 그리하여 사나운 광풍에도 꺼지지 않고 더 일어날 강한 불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완전히 타버리고 성서조선 즉 성화낙원(聖化樂園)이 되기를! 마른 풀밭에 불의 대용(代用) 곳불을 놓고 있는 신프로테스탄트들의 소망이다. 현대의 교회야! 너는 인간극의 종막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느냐?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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