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96)


어느 날의 기도



외로운 영혼을 이젠

믿습니다.

숨 막히는 이유

빈틈없는 소유

뿌리 없는 비상보다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텅 빈

외로운 영혼들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외로워서 외롭지 않은

아무것도 없어

꾸밈없는 영혼을

축복하소서,

주님.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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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

한희철의 얘기마을(95)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


어릴 적 교회학교는 따뜻한 교실이었다. 들로 산으로 쏘다니다가도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놀던 것을 그만 두고 교회로 향했다.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린 때다. 이제쯤 생각하기로는 성경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회에 가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책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시절, 우리들 가슴엔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여름이었다. 마침 그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요란하게 내렸다. 빗소리에 가려졌는지, 선생님이 안 계신 건지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교회로 갔다. 검정 고무신에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비를 쫄딱 맞은 채였다.


뚝뚝 빗물을 떨구며 기와지붕 허름한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예배당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텅 빈 것이 아니었다. 어둑한 제단 저쪽 누군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보니 선생님이었다. 그날 예배는 선생님과 둘이서 드렸다.


그날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 선생님 이름이 무엇인지 난 지금 기억이 없다.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어두컴컴한 제단 앞  무릎을 꿇으셨던 선생님은 지금도 날 가르치고 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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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한희철의 얘기마을(94)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지금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에 이야기합니다. 안갑순 속장님이 담배를 대한 건 놀랍게도 일곱 살 때부터였습니다. 충(회충)을 잡기 위해 담배를 풀어 끓인 물을 마신 것이 담배를 배운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 옛날,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속장님은 시집을 갈 때에도 담배를 챙겨갔다 합니다. 끝내 고집을 부려 풀지 않는 보따리 하나를 두고선 모두들 땅문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담배꾸러미였습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담배를 핀다는 것을 우연히 눈치 챈 시아버지는 노발대발하는 대신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담배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시아버지가 어디 밖에 나갔다 오신 날 서랍을 열면, 말없이 약속된 서랍을 열면, 거기엔 언제나 담배 몇 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가장 좋은 담배가. 



그렇게 담배와 벗한 것이 어느새 6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환한 불빛이 자신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연이틀 꾼 것이 속장님에겐 교회를 찾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곰곰이 그 범상치 않은 꿈을 생각하다가 스스로 교회를 찾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도 담배는 못 끊었습니다. 60년 동안이나 인이 박힌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세례를 받던 날, 그날부터 속장님은 거짓말처럼 담배를 뚝 끊었습니다. 놀란 건 며칠이나 가나 보자 했던 주위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좋던 담배가 냄새조차 역겹더랍니다. 속장님이 놀랐습니다.


속장님은, 눈물 많은 속장님은 지난 이야기를 하며 또 주르르 눈물을 흘립니다. 담배를 끊고 나서야 담배 냄새가 그렇게 역겹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걸 알고 나니까 돌아가신 어머니가 겪으신 고초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어머니 계신 방에서 담배를 피우면서도 어머니 생각은 조금도 못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결국 담배를 모르시던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못하신 채 담배 냄새의 역겨움을 그냥 참고만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후회스러움. 삶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방법 중엔 그런 게 있나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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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언제인지

한희철의 얘기마을(93)


그날은 언제인지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시 42:4)


말씀을 읽다 가슴이 미어지는 건, 시인의 마음 충분히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간 이들 모두 돌아와 함께 예배할 그날은 언제일지, 이 외진 땅에서 그려보는 그 날이 옛 일 그리는 옛 시인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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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92)


고마운 사랑




심방 다녀오는 길, 사택 김치거리가 떨어졌다는 얘길 들었다시며 김천복 할머니가 당신 밭에 들러 배차(이곳에서 배추를 배차라고 부른다)를 뽑는다.


“올 김장 어뜩하나 걱정했는데 나와 보니 아, 배차가 파-랗게 살아있질 않겠어유. 을마나 신기하고 감사하든지. 그러고 보면 곡식이 사람보다두 더 모진 것 같애유.”


지난 번 물난리에 며칠간 물에 잠겼던 강가 밭. 포기했던 배추가 살았다며, 그렇게 하나님 아부지는 먹고 살 길을 다 마련해 주신다며, 배추를 뽑으며 연신 고마워한다. 당신네 김치 할 땐 아까워 못 뽑은 통배추를 쑥쑥 뽑아 짚으로 묶는다.


고마운 사랑,

고마운 사랑.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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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주름들

한희철의 얘기마을(91)


깊은 주름들



“아무데구 자리 좀 알아봐 조유. 당체 농산 못 짓겠어유. 남의 땅 부쳐봐야 빚만 느니.”


해 어스름, 집으로 돌아가던 작실 아저씨 한 분이 교회 마당으로 올라와 ‘취직’ 부탁을 한다. 올해 58세.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라도 좋으니 아무 자리나 알아봐 달란다.


힘껏 빨아 무는 담배 불빛에

어둠 속 각인되듯 드러나는 깊은 주름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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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발 못 떼는

한희철의 얘기마을(90)


한참을 발 못 떼는


“작년에는 수해 당했다구, 얘들 학비도 줄여주구 하더니, 올핸 그런 것두 없네유. 여기저기 당해선가 봐유.”


“하기사 집까지 떠내려 보내구 이적지 천막에서 사는 이도 있으니, 그런데 비한다면 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작년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망하니까 사실 힘이 하나도 읍네유.”


“강가 1500평 밭에 무수(무)와 당근이 파란 게 여간 잘된 게 아니었어유. 그런데 하나도 남은 게 없으니. 지금 봐선 내년에도 못해먹을 거 같아유.”



집에 다녀가는 출가한 딸과 손주를 배웅하러 정류장에 나온 한 아주머니가 물난리 뒷소식을 묻자 장탄식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입술이 부르텄다. 


가끔씩이라도 고향을 찾는 자식들.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는 양식이나 마련하고 나머진 자식들에게 먹거리, 양념거리 전하는 게 그나마 외로이 사는 맛인데, 그게 부모 도리일 텐데 갈수록 그 일도 쉽지 않다.


떠난 버스 바라보며 한참을 발 못 떼는 반백의 아주머니.


 -<얘기마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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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 된 믿음이

한희철의 얘기마을(89)


나중 된 믿음이



수요 저녁예배 후, 캄캄한 작실까지 올라가야 하는 할머니가 안쓰럽습니다. 


작실에서 아무도 안 내려와 혼자 가시게 된 것입니다. 


“어떡하죠?” 


걱정스럽게 말하자


“괜찮아유. 성경책 꼭 끌어안구 가면 맘이 환한 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유.”


나중 된 믿음이 먼저 된 믿음을 밝힙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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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힘

한희철의 얘기마을(88)


붙잡힘




체념을 다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뿐인지도 모른다고, 

농촌목회의 의미를 묻던 한 선배에게 대답을 했다.


불쑥 내뱉은 말을 다시 수긍하게 되는 건 쌓인 생각 때문이었을까.

답답하구, 

괴롭구, 

끝내 송구스러워지는 삶,

이렇게 가는 젊음의 한 시절.

무엇일까, 


이 붙잡힘이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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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저녁

한희철의 얘기마을(87)


혼자만의 저녁



동네서 가장 먼 집 출장소를 지나 

외따로 떨어진

끝정자 맨 끝집, 

완태네 집

저녁녘 완태가 나와 우두커니 턱 괴고 앉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 꿈을 그리는 것일까.

모두 떠나간 형들을 생각할까.


언제 보아도 꾸벅 인사 잘하는 6학년 완태.

흐르는 강물 따라 땅거미 밀려드는

완태가 맞는 혼자만의 저녁.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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