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일



도시의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공부해라’라면, 시골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일해라’일 것이다.


학교에서 다녀와 책가방을 놓기가 무섭게 떨어지는 말이란 도시에서는 공부해라요 시골에서는 일해라는 것이다.


서울과 수원에서 교육전도사 생활을 하며 느꼈던 건 대개의 부모들이 신앙보다는 진학문제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까짓 1,2년쯤 예배를 쉬더라도 공부만 열심히 하여 좋은 학교에 진학하면 되는 것이고, 그 후에 교회에 나가 안정된 위치에서 봉사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 대부분 부모들의 심리였다.


‘공부해라’라는 계속되는 말로 심어주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이 아니라 하나의 강박관념뿐이라고 하는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늘 달리는 시골에서는 자연히 공부보다는 일에 대한 요구가 앞서게 마련이다.


공부에 대한 무관심, 그럴 수밖에 없는 여건을 대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일이 시험이라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들에 나가 해가 저물도록 일을 해야 한다. 그런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유지하려면 잠을 덜 자는 수밖엔 없는데 일을 해본 사람은 안다. 온몸 구석구석 배어들은 피곤함을 따라 밀물 물길 따라 들어오듯 꾸역꾸역 몰려오는 잠을 쫒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절반만큼이라도 섞였으면 참 좋겠다. 도시에서는 공부하라고만 하지 말고 일도 좀 하라 하고, 시골에서는 일하라고만 하지 말고 공부도 좀 하라고.

-<얘기마을> 1987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구  (0) 2021.09.11
무모한 명분  (0) 2021.09.10
공부와 일  (0) 2021.09.09
덕이 숨어있는 마을  (0) 2021.09.08
별과 별빛  (0) 2021.09.07
가슴이 뛰네  (0) 2021.09.06
posted by

말 한 톨




내려주신 말 한 톨 
어디에 두어야 하나

글을 아는 이는
종이에 적어두고

글을 모르는 이는 
가슴에 심더라

종이에 적어둔 말은
어디로 뿌리를 내려야 하나

가슴에 심어둔 말은 
잊지 않으려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다가 
마음밭으로 뿌리가 깊어져

제 육신의 몸이 곧 말씀이 되어 
마음과 더불어 자라나고

단지 말을 종이 모판에 행과 열을 맞추어
가지런히 글로 적어두었다면

다시금 마음밭에다가
모내기를 해야 할 일이다

말이란 모름지기 
마음을 양식으로 먹고 자라나는 생명체이기에

마음밭에 뿌리를 내린 말의 씨앗에서 
연두빛 새순이 움터

좁은길 진실의 꽃대를 지나는 동안
머리를 하늘에 두고서 발은 땅으로 깊어져

꽃과 나무들처럼
너른 마음밭에 저 홀로 서서

꿈처럼 품어 
꽃처럼 피울 날을 기다리는 말 한 톨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마음밭으로 모내기를 하기도 전에
종이 모판에서 메말라버린 글씨들이 얼마나 많을까?

윤동주 시인이 우러러본 밤하늘의 별처럼 많을까?
다석이 헤아린 일평생 우리 몸을 드나드는 숨처럼 많을까?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잎  (0) 2021.09.16
말 한 톨  (0) 2021.09.09
오늘의 잔칫상  (0) 2021.09.08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0) 2021.09.06
늘 빈 곳  (0) 2021.08.31
투명한 밑줄  (0) 2021.08.26
posted by

덕이 숨어있는 마을



덕유산(德裕山)이라는 산명(山名)은 그윽했다. 덕이 넉넉하다는 뜻도 그러하려니와, 덕유라는 어감 또한 그 뜻하고 멀지가 않아 그윽한 맛이 풍긴다.


바로 옆 동네 조귀농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충청북도 땅인데 그곳 지명이 덕은리다. 충청 중원군 소태면 덕은리가 된다.


덕은리 입구에는 목판에 새긴 이정표가 서 있다. ‘德隱里’라 한문으로 써 있다. 덕이 숨어있는 마을,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은은히 덕이 배어나는 마을이라는 뜻일까.


흐르는 남한강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덕은리 마을. ‘덕은’이라는 이름이 귀하다. 늘 그 이름 감당하며 사는 좋은 마을 되었으면.

-<얘기마을> 1989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모한 명분  (0) 2021.09.10
공부와 일  (0) 2021.09.09
덕이 숨어있는 마을  (0) 2021.09.08
별과 별빛  (0) 2021.09.07
가슴이 뛰네  (0) 2021.09.06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0) 2021.09.05
posted by

오늘의 잔칫상

 




딸에게 차려줄 때에는 모양새에 신경을 써야 하고
아들에게 차려줄 때에는 양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차려주신 
오늘이라는 밥상은 나날이 잔칫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입맛 하나 하나를 다 만족시켜 주는 자연, 그 얼마나 신경을 쓰셨으면,

심지어는 변화하는 우리의 입맛에 발 맞추어, 
자연의 진화라는 방법으로 거듭 새로운 잔칫상을 차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새롭게 차려 주신 하루라는 잔칫상에 
오늘도 행복한 잔칫날입니다.

어디서부터 눈을 두어야 할 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 지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잎  (0) 2021.09.16
말 한 톨  (0) 2021.09.09
오늘의 잔칫상  (0) 2021.09.08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0) 2021.09.06
늘 빈 곳  (0) 2021.08.31
투명한 밑줄  (0) 2021.08.26
posted by

별과 별빛



“별빛을 우리가 보았을 때 그 별은 이미 죽어있을 지도 모른답니다.”


<한겨레신문> 한 귀퉁이, 늘 그만한 네모 크기로 같은 책을 고집스레 소개하는 <성자가 된 청소부>.


짧게 실리는 글들이 늘 시선을 끌었는데, 며칠 전의 글은 위와 같았다.


기쁨이나 슬픔 그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다른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때론 그것이 이미 때 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어쩜 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아픈 지적이었다.

-<얘기마을> 1989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와 일  (0) 2021.09.09
덕이 숨어있는 마을  (0) 2021.09.08
별과 별빛  (0) 2021.09.07
가슴이 뛰네  (0) 2021.09.06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0) 2021.09.05
불씨  (0) 2021.09.04
posted by

가슴이 뛰네



여름이가 곰 인형을 안고 “어 가슴이 뛰네!” 했을 때도, 고임이가 받아들고 “어, 정말 가슴이 뛰네!” 했을 때도, 그들의 성화에 사모님이 곰 인형을 받고 “어, 정말이네!” 했을 때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돌아간 후 집 사람이 “어 정말 가슴이 뛰네!” 놀라 말했을 때도 그랬다. 혹시나 싶어 손을 갖다 댔을 때 분명 곰 인형의 가슴이 쿵덕쿵덕 뛰고 있었다.


윗작실 아기 난 집 선물 하려고 오천 원에 두 마리 길거리에서 산, 한 마리 보내고 한 마리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은 노란색 작은 곰 인형, 곰 인형의 가슴이 정말로 뛰고 있었다.
덩달아 뛰는 가슴,
아, 가슴이 뛰네.

-<얘기마을> 1987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이 숨어있는 마을  (0) 2021.09.08
별과 별빛  (0) 2021.09.07
가슴이 뛰네  (0) 2021.09.06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0) 2021.09.05
불씨  (0) 2021.09.04
황금빛 불  (0) 2021.08.31
posted by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나의 익숙한 산책길은
이 방에서 저 방을 잇는 강화마루 오솔길

하루에도 수없이 오고가는 이 산책길에 
내 가슴 옹달샘에선 저절로 물음이 샘솟아

지금 있는 일상의 집이지만
물음과 동시에 낯선 '여긴 어디인가?'

나의 가장 먼 여행길은
집에서 일터를 오고가는 아스팔트 순례길

날마다 오고가는 이 여행길에 
무엇을 위하여 달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숨구멍으로 보이던 마음을 펼치어
언제나 가슴으로 산과 하늘을 가득 맞아들인다

나의 입산 수행길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오르는 시멘트 돌층계

틈틈이 오르는 입산 수행길에
오르는 걸음마다 고요한 숨으로 평정심을 지키려는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되돌아오려는
이러한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 한 톨  (0) 2021.09.09
오늘의 잔칫상  (0) 2021.09.08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0) 2021.09.06
늘 빈 곳  (0) 2021.08.31
투명한 밑줄  (0) 2021.08.26
박잎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네  (0) 2021.08.24
posted by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 저녁예배를 드리러 가시던 할머니 한 분이 교회로 가던 도중에서 살해되었다. 이곳 섬뜰에서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바로 옆동네 조귀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주일 저녁,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연결하는 다리 건너편에 있는, 새로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교회로 가던 할머니가 변을 당했다.


범인은 뱀을 잡는 30대의 땅꾼이었다 한다. 사건 당시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었지만, 술 먹은 사람끼리 싸우는 것인 줄 알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할머니를 목 졸라 죽이곤 할머니 가방 안에 들어있던 600원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살해됐다는 사실보다는 그 할머니가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 사람들의 얘깃거리였다. 


호기심조로 말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들의 신앙을 향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일종의 질문과 비아냥거림이 들어있었다. 분명 들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교회로 향하셨을 65세의 할머니. 우리가 흔히 기도하는대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저녁예배 드리러 어둠속 교회로 향하던 노상에서 할머니의 영혼을 그것도 한 땅꾼의 손을 통해서 불러 가신 일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되는 걸까.


누구 말대로 그런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게 신앙일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적당히 받아들이며 무심히 잊는 것이 신앙의 성숙일까?


우리교회 교인이 아니라는 마음속 어쩔 수 없는 한줄기 안도감과 함께, 이 세상 홀로 걸어감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엄한 교훈으로 받아들이지만 마음은 무겁다.


어쩌면 교인들은 익숙해진 두려움 때문에 말 못한다 해도, 세인들의 솔직한 말속에 담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향한 회의는 묵중한 무게로 마음으로 퍼진다.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얘기마을> 1987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과 별빛  (0) 2021.09.07
가슴이 뛰네  (0) 2021.09.06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0) 2021.09.05
불씨  (0) 2021.09.04
황금빛 불  (0) 2021.08.31
개미를 보며  (0) 2021.08.30
posted by

불씨



‘목회수첩’을 쓰기가 점점 어렵다.
실은 쓸 만한 얘기 거리들도 별로 없다.


뭔 좋은 소식이라고 어둡고 눅눅한 얘기들을 굳이 계속 쓰는가.
아프고 설운 얘기들, 결국은 나와 함께 사는 이들의 이야기인데.
그걸 나는 무슨 기자나 된 듯 끼적이고 있으니. 

그러나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한 멈추지 않기로 한다.
고발이니, 의미 부여니, 변명처럼 이유를 댈 건 없다.


그냥 하자.
화로에 불씨 담듯 아픔을 담자.
꺼져가는 불씨 꺼뜨리지 말자.

-<얘기마을> 1987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슴이 뛰네  (0) 2021.09.06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0) 2021.09.05
불씨  (0) 2021.09.04
황금빛 불  (0) 2021.08.31
개미를 보며  (0) 2021.08.30
너무 하신 하나님  (0) 2021.08.29
posted by

우리 속의 빛이 어둡지 않은가?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p.233에 나오는 권정생의 말)

주님의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벌써 9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별고 없이 잘들 계신지요? 격절의 세월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 7:14).

 

‘알지 못함’, 어쩌면 이게 유한한 우리 인생의 비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뜻한 바가 이루어졌다고 너무 으스댈 것도 없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지혜는 우리에게 당도한 삶의 현실을 잘 갈무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흐리고 힘든 날도 있지만, 맑고 상쾌한 날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날이 다가오든 우리 내면의 빛이 어둡지 않다면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우리 교우의 첼로 독주회에 다녀왔습니다. 서정적인 첼로의 선율 속에서 모처럼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와 첼로가 소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다른 소리 위에 또 다른 소리가 유연하게 포개지며 만들어내는 화음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나찌가 만든 절멸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이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지요?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저는 한 장면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날아가 그 유명한 관문인 ‘체크포인트 찰리’ 앞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인 ‘사라방드’를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억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면서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애가였을 겁니다. 저는 신문에서 그 연주 장면을 스크랩 해두고 가끔 꺼내 보곤 했습니다. 음악의 위대함을 전율하며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박하사탕’을 보았습니다. 영화 ‘박하사탕’을 원작으로 하여 세심하게 인물들을 재배치하여 만든 작품이었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작곡가 이건용 선생님이 여러 해에 걸쳐 대작을 작곡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이런 모임에 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우리 교우 가족이 오페라 제작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한 그 오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으깨지고 망가지는 지를 처연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빚어지는 사람들의 연대와 사랑의 아름다움 또한 가슴 시리게 드러냈습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극장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등을 뒤로 기대고 편히 쉴 생각이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기사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오시나봐요.”
“예.”
“무슨 공연이었나요?”
“‘박하사탕’이라는 오페라였어요.“
“요즘 공연자들의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데 그래도 공연을 할 수 있었군요.“
“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공연자들의 형편을 그렇게 잘 아세요?”
“예, 사실 우리 집 아이들 셋이 다 국악을 했어요.”
“그렇군요. 지난 2년 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큰 아이는 경기 민요를 하고, 작은 아이는 판소리를 하고, 막내는 한국 무용을 하는데요. 공연이 끊겨서 어려움이 많았지요.”
“아유, 자제분들이 재능이 많으시군요. 혹시 선생님도 국악을 하시나요?
“나야 뭐, 하하,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하는 정도지요 뭐. 내 아내는 프로는 아니지만 한국 무용을 꽤 잘해요.”

기사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큰길가에 내려달라고 하는 데도 굳이 아파트 앞까지 차를 몰면서 “차가 올라가는 거니까 내가 힘들 건 없어요”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유쾌한 저녁이었습니다. 그 기사님은 지금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아들과 딸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게 마련입니다. 내 속에 기쁨이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뒤흔들고 있을 때는 사소한 일로도 화를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세상이 온통 나에게 적대적인 것처럼 느껴져 우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치유자이신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정결법 위반이라며 나무랐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전통을 지킨다 하면서도 율법의 본 정신을 저버린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 15:11).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성급함, 난폭함, 비방, 무절제, 불평, 불경, 교만함 등은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혼돈과 어둠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권고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눅 11:35).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본本과 말末은 각각 나무 목木 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자의 자형을 보면 ‘본’은 뿌리를 가리키고 ‘말’은 열매를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이 중요하고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도 좋은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입니다. 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도 동일한 고민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제11권 14장, 최민순 역, 성바오로출판사, p.324)


시간에 대한 탐색을 거듭하던 어거스틴은 결국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 하는 것이 그럴 듯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구절이 나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앞의 책, 제11권 20장, p.330). 인간은 시간을 기억, 목격함(직관), 기다림의 형태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화하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겠지요. 과거는 믿음으로, 현재는 사랑으로, 미래는 소망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시간과 연결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삶의 토대가 될 때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위험에 직면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고통에 반응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소명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이 움베르토 에코와의 대화에서 들려준 말이 귀에 생생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책임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존엄성은 단지 내 쪽에서 내린 호의적인 평가나 인도주의적인 충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름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존재는 단지 ‘나’라든가 ‘나의 것’, 또는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움베르토 에코·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p.56)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충실한 것이 생명 존중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삶을 부단히 연습해야겠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은 바로 우리가 의젓한 사람으로 지어져가는 일종의 도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