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없는 노동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3)

 

 

‘염려’없는 노동

- 전집 4권 『성서 연구』 「기독신자의 처세 원리」 -

 

 

 

 

임금피크제를 놓고 노사정간 의견조율이 안된다고 한참 시끄러웠다. 극적 타결을 보았다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니 결국 앞으로 차차 의논하며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가자는 데‘만’ 합의를 한 모양이다. 그럴 일이다. 서로 “네가 양보해라”라고 주장하는 협상테이블에서 무슨 실질적인 합의가 나오겠나. 직업안정성이 있는 정규직이 날로 줄어드는 이 마당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정규직 ‘부모’ 세대에게 ‘자녀’ 세대인 청년들의 고용창출을 위해 봉급을 깎자는 정부와 기업의 감성팔이는 생계형 노동현장을 살아가는 일반 시민정서에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만큼 ‘깎아서’ 청년들에게 ‘미래가 보장되는’ 어엿한 직장을 마련해준다면 모를까, 결국 더 싼 값에 유동적으로 대체가능한 임시계약직을 늘려놓고 ‘청년일자리창출’이라고 ‘아웅’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실은 그간의 진행방향을 볼 때 그 가능성은 ‘농후하다’).

 

 

더구나 함께 논의되는 ‘일반해고 규정’은 임의대로 마음껏 해고하는 수퍼갑질을 행사할 법적 권한을 기업 경영진들의 손에 쥐어주기 십상이다. 화가 난 서민들의 댓글은 한결같다. 우선 국회의원부터 임금피크제 하자, 일반해고규정은 공무원부터 적용하자는 주장부터, 일 안하고 월세로 펑펑 쓰고 사는 건물주들에게는 왜 고통분담을 요구하지 않느냐는 주장까지! 결국 성실한 노동으로 제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서민들과 노동형 중산층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읽혔다.

 

 

 

 

 

노동이 더 이상 정당하고 합당한 대가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세상! 숨 쉴 시간조차 없이 달려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은 이제 자조적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서열화한다. 바야흐로 신(新)신분제의 도래다. 부모가 누구인지, 아니 할아버지가 어떤 경제적·정치적 ‘신분’인지가 나의 미래를 보장한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적으로 떳떳하게 ‘세월호의 진실을 규명하라’고 외치던 양심적 청년들에게는 구금과 수천 만 원의 벌금형이 행사되고, 분명히 ‘불법’인 상습마약복용은 힘 있는 기득권층의 자제라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포된다. 마치 오래전 봉건제 사회처럼 이제 ‘꿈과 희망’이라는 미래보장형의 단어들은 ‘잘난 부모’ 만나 금수저 입에 물고 태어난 아이들에게만 주어져있을 뿐이다.

 

 

이런 마당에, 성실히 살아보겠다고 200만원~30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며 밤낮없이 뛰는 서민 가장들의 노동의 대가를 이리저리 융통하여 경기를 살려보겠다니... 그야말로 벽돌 밑장 빼서 위에 얹는 꼴이지 뭔가. 결국은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다. 무노동, 혹은 과대평가된 노동의 금전적 대가에 대한 합리적 세금 부과가 먼저라는 것은 너무나 ‘합리적’인 생각인데, 하필 의사결정권자들이 대부분 ‘무노동과 과대평가된 노동임에도 천문학적 대가를 받는’ 경우에 해당하다보니 그쪽 영역은 건드릴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농담이 나올까. 강남 몫 좋은 곳에 건물 몇 채 가지고 있는 집안 자손이면 그걸로 이번 생은 ‘할렐루야~’다.

 

 

이런 시절을 살아가면서, 성서적 가치를 이 땅에서 살아내고자 모인 공동체인 교회가 ‘대안’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노동 없는 부, 아니 노동의 윤리성조차 묻지 않은 채 무조건 ‘헌금 많이 내는 교인이 경건한 교인’이라는 획일적인 메시지가 선포되는 교회 강단이 여전히 많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예수의 산상수훈은 이렇게 ‘교회헌금을 많이 하라’로 등치되며 애용되는 설교의 본문으로 등장한다. 부자들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다. 구조조정을 당하여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신자들에게조차 ‘걱정말라’고, ‘믿음의 분량으로 헌금을 하면 결국은 잘 살게 된다’고 설득하는 설교에는 여지없이 이 본문이 등장한다.

 

 

정말 그럴까? 새들도 먹이시고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신 예수의 설교(마태복음 6장, 누가복음 12장)는 있는 돈 탈탈 털어 교회에 헌금을 하면 앞으로 살아갈 염려는 붙들어놓아도 된다는 메시지인가? 이 본문에 대한 김교신의 묵상을 나누어 본다.

 

 

… 염려라는 원어 merimnao는 분파, 분배 등의 뜻으로부터(고린도 전서 1. 12-13 및 동 7. 34 참조) 염려, 초려 등의 뜻이 되었다. 땅과 하늘,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 마음을 이분(二分)하는 일이 곧 가장 증오할 일이요,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제22절에 네 눈이 “성하면”이란 희랍어의 haplous 즉 ‘단일(單一)’이란 뜻이므로, 이 구는 ‘네 눈이 단일한 목적을 향하면 전신이 밝을 것이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 2개 이상의 목적을 관망하는 눈은 ‘흐린 눈’이요, 하나님이 꺼려하시는 것 중에 ‘두 마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음은 십계명의 제 1절을 보아도 잘 알 것이다. … 요컨대 믿으려거든 단일하게 믿으라. 마음이 이분(二分)하는 거기서부터 벌써 신앙이 아니요 헛된 일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다.

 

 

사람이 어찌 먹고 사는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요즘같이 아사(장기적비고용상태) 아니면 과로사(1인3역이 요구받는 노동혹사상태)를 할 경쟁적 직업 환경에서 어찌 ‘염려’가 없을까? 김교신은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의 이 말씀이, 하늘만 쳐다보면 다 해결된다는 맹목적 신앙도, 있는 돈을 다 털어 교회에 헌금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신다는 투자성 신앙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성실한 노동은 게으르면 안 될 일이다. 다만 ‘두 가지 마음’을 품는 ‘염려’가 헛된 일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괘씸한 일이라는 거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그것에 궁극적 마음을 두고 신자의 마음을 양분하고 눈을 ‘흐리게’하지 말라는 권고이다. 결과에 대한 염려는 불신앙이라는 말이다. 의롭고 성실하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서, ‘그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마음으로 성실히 제 일을 해낸 뒤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행여 ‘먹고 살지 못하게 될까봐’(소위 ‘잘릴까봐’) 일하면서 불의와 타협하고 억울한 사람들 짓밟지 말라는 말이다. 신자의 마음을 양분하여 더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바라는데 비중을 두고 투자하듯 헌금하지 말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노동 없는 부가 양산되고 ‘금수저’라고 찬양받는 이 시절에 대한 신앙적 물음 없이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신자의 눈을 ‘흐리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도바울도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하였다. …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과 ‘근로 절검하라’는 교훈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요, 참으로 신종의 생활에 있어서 그날그날에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는 받은바 천직에서 분골쇄신으로 자자근로하여 ‘아버지가 지금도 노작하시니 나도 노작하노라’(요한복음 5장 17절)는 그 아버지를 초사한 자녀의 생활이 자연히 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리고 하필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두려워해야 한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데” “솔로몬의 지극한 영광”같은 삶이라고 여호와를 찬양할 일이 아니다. 목숨을 일각도 더할 수 없는, 하는 만큼 해 보았자 들의 꽃만큼도 아름답거나 영화롭지 못할 옷과 음식을 위한 ‘염려’(두 마음을 품음)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 본문의 핵심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성스럽다.’ 성(聖)이 무엇인가?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다. 힘 있고 돈 있는 특정한 권력층이라 해도 인간이 마음대로 소유선포를 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 ‘성’스러운 것이다. 성서는 그 처음부터 노동하시는 신(神)을 고백한 텍스트다. 이 성스러운 노동은 모든 인간이 누려할 권리이며 의무이다. 많은 이들에게 성실하게 노동할 기회를 박탈하는 자, 또한 일하지 않고 입고 먹고 마시려는 자, 심지어 그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두려움으로 마태복음 6장을 다시 읽어볼 일이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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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성공주의 이데올로기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1. 9. 15. 16:19

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8:7)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9:2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4:13)

 

이 세 구절은 70년대 중반이후 지금까지 한국교회(특히, 순복음교회) 성장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인 성서의 대목이라고 할 만 하다. 이 말씀을 듣고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재기의 의욕을 불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는 이러한 의욕의 무진장한 공급처였으며 그로써 한국사회의 발전을 보다 힘 있게 지원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가 겪은 가난과 열등감과 목표상실의 현실에서 풍요와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슬로건처럼 이 세 구절은 신앙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이해는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면서 힘겨운 현실을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축복의 언어로 신앙인들을 사로잡아왔다.

 

경제성장과 교회성장의 맞물림

 

코딱지만한 구멍가게 규모로 시작한 사업이 이후에 번성하는 기업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심사는 그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비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아무래도 자신이 없을 듯한 상황이지만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니 자신감을 한 번 더 발휘해보는 시도를 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무얼 못하겠나 싶은 대단한 용기가 나오는 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들 말씀들은 좌절의 벽을 뚫고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거의 주술적(呪術的) 영향력을 행사하기조차 했다.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이로 인한 성공에의 열망은 보다 나은 계층으로 이동하기를 갈구하는 신앙인들에게 성서에 이같은 구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사했고, 자기를 드러내기를 꺼리는 유교적 전통이나 세속적 성공과 노력에 관심이 없는 불교문화적 환경이 줄 수 없는 도전적 능력을 이 말씀 속에서 길어 올렸다. 그러기에 과거 기독교인 하면 어딘가 자신 없이 겸손하기만 하고 자기를 낮추면서 제가 뭘요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자신감이 넘치고 무슨 일에든 선뜻 나서기를 서슴지 않는 유형으로 바뀌어왔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다그쳤던 경제개발정책에서 요구되었던 인간유형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고, 우린 한다면 한다는 식의 저돌적인 집행력을 갖춘 인간군이 요구되고 있던 상황에서 기독교는 그에 필요한 인간형의 성품적 기초를 마련해주고 있던 셈이었다. 한국경제의 성장과정과 한국교회의 성장과정이 서로 합치되는 상황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무형적 연관성이 존재했다. 그것은 성공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되고 풍요와 일신의 영달이 복을 받는 시스템이 마련되는 것을 의미했다.

 

허허벌판의 한국경제에 공장과 도시가 세워지고, 게으르기 짝이 없다고 스스로 한탄했던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민족 가운데 하나로 치켜지며 도대체가 한국 사람이 못하는 게 있을까 싶게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이들 성서의 구절대로 현실이 움직여지는 듯 했다. 그래서 교회는 그와 같은 현실에서 성공을 보장해주는 축복의 지침을 내리는 현장처럼 되었고, 세속적 성공을 위한 믿음의 징표는 말씀 안에서 능력을 얻고 그 능력대로 최대의 성과를 목표로 하는 적극적 인생관으로 집약되었다. 긍정적 사고에 대한 담론이 이 시기에 지배하기 시작한 것도 다 이러한 연유와 관련이 있다.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사고방식이 스스로의 인생을 보다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길러진 것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것은 세속적 현실에서의 능력과 관련이 있었고, 그로해서 성공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가 되었다. 낙오는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으며, 따라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서 능력을 얻어 현실에서 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의 정도와 내용이 높고 풍족할수록 축복을 많이 받은 존재로 인정되는 인식체계를 한국교회 안에 자라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목회자는 허가받은 축복의 배급자처럼 되는 그 위치가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특권적 위계질서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적 위계질서는 정치경제적인 특권과 연결되면서 한국교회를 기득권 세력화했으며, 그 기득권의 방어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져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권위주의가 요구하는 사회문화적 요소를 강화시켜왔으며, 이로써 이러한 체제가 추구하는 성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온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인가,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이고 도전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로써 성공주의의 윤리적 기초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와 의라는 대전제는 이러한 성공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 자리가 없었으며, 오로지 세속적 능력과 위치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가 있으면 그로써 축복이 확인되는 시스템이 가동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의 근본정신은 승승장구하는 것에서 무너질 것을 보고, 패배하는 듯 하나 위대한 시작을 보는 하나님의 섭리에 그 중심이 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섭리의 핵심이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목격했지만 신앙은 거기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그 의를 위한 헌신은 그 무엇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은 전혀 다른 평가 속에 놓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성공처럼 보여도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몰락과 패배처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접붙여진 것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광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고 그로써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간과 사회가 병들어가는 것이다. 그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우리사회의 정신적 타락과 경제적 붕괴 속에서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다.

 

빌닷의 충고가 축복의 메시지로 변질

 

욥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 그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한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욥의 탄식에 대한 위로와 신앙적 충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의롭게만 살아온 그가 갑자기 당한 고생을 보고 그의 친구는 네가 의롭고 깨끗하기만 한다면야 무슨 걱정인가,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는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니 지금 보기에 보잘 것 없이 여겨져도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바로 서리라하는 격려였다.

 

그러나 욥은 빌닷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매우 전격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의롭다 의롭지 않다는 내 자신의 입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소관이지 어찌 내가 의로우니 그런 축복을 내려주시라고 요청하며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이었다. 시작의 미미함이 결과의 미미함으로까지 가지 않는다는 빌닷의 격려 속에 담긴 무의식적인 전제, 즉 그런 축복을 마땅히 여기게 될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성서적 충격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면이라는 질문이 풀려야 한다는 점이다. 온갖 술수와 음모와 비리, 그리고 아부로 낮은 처지에 있다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에게는 이러한 말씀의 성서적 적용은 불가한 것이다. 그러한 경우 그 높은 자리가 바로 죄의 증거이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는 세상이 보기에는 자못 미미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 의로움의 열매는 인간의 헤아림을 넘는다라고 이 대목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의로움 대신에 인간의 성취를 그 중심에 놓고 은유적으로 차용했으니 이는 성서의 근본정신에 대한 파괴이다. 욥은 빌닷의 하나님 이해를 수용하면서도, 그 미미함과 창대함의 과정은 인간의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관련된 것임을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면 도리어 인간의 처지는 겉보기에는 몰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몰락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정녕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믿음의 능력은 욕망의 도구가 아니다

 

마가복음의 본문은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에게 부탁하면서 하실 수 있으시다면 어떻게 좀 도와주십시오하는 말에 대한 대응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나이의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하고 반문하신다. 그리고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나이가 예수에게 한 말은 예수의 능력에 대한 호소와 관련이 되어 있다면,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문제의 해결은 사나이 자신의 믿음과 직결되어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예수의 능력에 좌우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것은 전제되어 있고 이를 확고히 믿고 그 능력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이 아버지에 더욱 달려 있다는 논리이다. 이때의 상황은 제자들은 아이를 치유하기보다는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로써 정작 치유대상인 아이는 관심권밖에 방치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모두의 관심을 이 아이 자체에 집중시킨다. 논쟁의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귀신을 내어 쫓고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지금 결정적인 과제라는 것을 환기시키신 것이었다.

 

그 일은 실로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처럼 보인다. 누군가 능력 있는 존재가 와서 해결해주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저 참고 기다리든지 아니면 그 해법을 놓고 갑론을박하든지 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일의 해결이 모두에게 가능할 수 있음을 일깨우신다. 이후 제자들이 왜 자신들은 그러지 못했는가 하고 묻자 기도로 능력을 입지 않으면 하고 그 방도를 가르치셨다.

 

무슨 이야기인가? 믿음의 능력이란 우선 이 아이의 생명에 대한 간절한 심정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기원으로 강렬하게 집약되어 하나님의 능력과 결합되는 과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귀신은 ! 뜨거워하고 줄행랑을 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이것이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가? 성공한 이들은 대체로 이렇게 귀신들려 고난을 받고 있는 아이의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 생명이 이들의 중대한 관심도 아니며, 그에 쓸 시간도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난이 어떤 병을 일으켜 이들에게 삶의 좌절과 고통을 주는지 알바가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기도의 능력이 있을 수 없다. 우선 그런 기도가 그들의 삶에 중심 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귀신들려 가련하게 된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대로 놓아두시지 않을 것이다, 나의 믿음과 간구가 그 생명에 집중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생명을 구해내실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이다. 윤리적 정당성도 없는 일, 도리어 이웃에게 귀신들리게 하는 일들을 믿음이 주는 능력이라고 앞세워 자신의 탐욕을 채우며 야망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들을 벌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작업인 것이다.

 

믿는 자에게라는 말씀은 지금 생명이 고난을 받고 있는 존재에게 대한 일차적인 관심이 쏟아 부어지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말씀이다. 제자들처럼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앞서는 이들은 믿는 자라는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교회는 우리사회에 바로 이 고난 받는 생명을 중심주제로 삼아나가도록 하는 일깨우기가 전제된 상황에서 이 말씀이 주어져야 함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사회가 겪는 온갖 문제들이 하나씩 제대로 풀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의욕, 용기, 재기 이런 단어들과 이런 현상들이 이 생명에 대한 깊은 사랑과 상처받은 생명의 치유에 대한 열정과 관련이 없으면 그것은 개인적 욕망의 달성일 뿐이며 신앙은 이를 도우는 협력자로 전락할 뿐이다. 한국교회는 그런 죄를 저지른 과거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순교적 헌신의 고백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한 바는 어떤 의미였는가? 이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그 옥고를 사도 바울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빌립보서는 증언해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일에 쓰이는 사건이라면 그 어떤 것도 달게 받아 즐거워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귀한 일이라고 414절에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함은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고난의 한계에조차도 자신은 무너지지 않는다 라는 감격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자신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편지의 진상이 이러할 진데, 한국교회는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이루어내고 만다는식의 성공주의적 모델에 매달려왔다. 고난은 피하고, 갈채와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는 머리박고 다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이다. 그 어떤 위협과 그 어떤 불리함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라면 나의 처지가 어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게 치루겠다는 순교자적 헌신의 고백, 그 결정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에 과연 이런 모습으로 현실의 권세가 휘두르는 폭력과 불의에 맞서는 순교자가 얼마나 되었는가? 아니, 순교자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선하고 의로웠으며 아무 문제가 없었던가? 바울의 옥중서신이 담고 있는 이 신앙적 비장함과 그 놀라운 기쁨의 고백은 나의 개인적 고통을 대가로 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가고 있음에 대한 간증임을 주목할 때 비로소 그 진의(眞意)가 드러난다. 이 성서의 진면목에 대한 설교가 부재한 교회에서 자라나는 것은 자신의 불의에 대한 성서적 합리화일 뿐이다. 성서에 대한 이와 같은 간교한 유린은 실로 이제부터라도 중단되어야 한다.

 

 

졸저, <밀실에 갇힌 예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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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앞에 내 사랑은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가난한 사랑은
그대 가슴에 닿기도 전 스러지고 만다


마른 마음에 슬픔을 키우고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


품을 수 없는 표정들이
집 앞 길로 지나고
무심히 서둘러 지나고
어둠속
부를 이름 없었다

웅크린 잠
꼭 그만큼씩 작아지는 생
하늘은 꿈에나 있고
폐비닐로나 널린 이 땅의 꿈을 두고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가난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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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성 재산증식이라는 천박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땅을 홉. 작이라는 작은 단위까지 나눠 땅에 대해 갖는 인간의 강한 집착은, 유한한 인간이 갖는 무한에의 동경일 수 있으며, 죽음의 기운에 싸여 사는 인간이 땅을 소유함으로 생명의 가능성을 확인하려 하는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보상심리 아닐까. 고향을 향한 회귀본능일 수도 있겠고.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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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따뜻한 사랑



실내화를 안 가지고 학교를 갔다. 빈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간 것이다. 맨발로 교실에 있었다. 규덕이 보고 실내화를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했는데도 규덕이는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맨발로 지냈다. 집에 와서 물어보니 학교에 가지고 왔는데 잊어버리고 나한테 안 준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챙겨야지.

-그렇게도 정신이 없었니? 6.25땐 아기를 업고 간다는 게 베개를 업고 피난을 간 사람도 있었다더라.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 규애가 연필로 쓴 일기 밑에는 빨간색 글씨의 짧은 글들이 있었다. 물으니 담임 선생님께서 써 주시는 것이란다. 반 아이들 일기도 마찬가지란다. 흔히 ‘검’자나 ‘참 잘 했어요’ 도장을 찍어 주는 게 예사인 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은 달랐다. 규애의 일기 밑에는 늘 선생님의 느낌이 적혀 있었다. 

학급신문을 만들고 좋아서 ‘헤헤헤’로 끝난 일기 밑에는. 


-혀까지 내놓고 웃는 거니? 정말 학급신문이 확 달라 보인다. 규애가 쓱쓱 그려 놓은 게 아주 예뻐 보인다. 선생님이 보기엔 우리 반 것이 가장 잘 만든 것 같다. 하하하.

새로 사귄 친구가 욕을 잘하는 것을 보고 ‘난 왜 사귀는 친구마다 그런지 모르겠다’고 쓴 일기 밑에는 


-친구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야. 서로 노력 하다 보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거란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보도록 하렴.

아빠가 구두를 사준 얘기를 쓴 일기 밑에는


-아침 조회 시간에 규애 구두가 예쁘다 생각했는데 그게 새로 산 것이구나. 너무 자랑하지 마. 친구들이 샘낼 테니까.

+=무지무지 라고 날씨를 적은 날.


-날씨 표현이 재미있구나. 그런 공식이 있는 줄 몰랐어.

아이들의 일상과 생각을 선생님은 따뜻한 사랑으로 받고 있었다. 묵묵히 주어진 길을 사랑으로 걷는 일, 참 아름다웠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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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햇살놀이방> 아이들이 1일 캠프를 다녀오게 되었다. 동부선교원 어린이들이 캠프를 가는데 같이 가기로 했다. 이숙희 선생님의 배려였다. 


저 어린 것들을 보낼 수 있을까. 놀이방 엄마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하룻밤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의 대견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도 했다. 


소리와 규민이도 마찬가지였다. 울지나 않을는지, 대소변은 제대로 가릴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떠나기 전날 짐을 꾸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녀석들의 마음가짐을 도와준다.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울고 보채는 거 아냐?” 


슬쩍 말을 돌렸더니 뭔가 생각난 듯 소리가 대답했다. 


“이러면 되겠다. 엄마 아빠 옷 중에서 안 입는 옷을 하나씩 가져가는 거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으면 옷을 꺼내 보면 되잖아. 잠 잘 때도 옷을 만지면서 자면 되고.” 


엉뚱한 딸의 대답에 웃고 말았지만, 웃음 뒤 왜 울컥 눈물 한 줌 지나는 것인지. 
그런 게 식구였던 것인지.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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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그림자, 마음이 실체



대상과 마주하는 찰라 거울에 비친 듯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한 마음이 있습니다. 곧이어 생각이 그림자처럼 뒤따릅니다. 종종 그 생각은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가 됩니다.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림자가 된 생각에게 맨 첫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의식 또는 비몽사몽, 명상이나 기도의 순간에 대상과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과 동시에 마음 거울에 비친, 떠오른 그 첫마음이 바로 우리의 본성 즉 본래 마음에 가깝습니다.

곧이어 뒤따르는 의식화된 생각은 단지 본래 마음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실체는 마음입니다. 한 생각을 일으켜 이루어 놓은 이 세상은 마음의 그림자 곧 허상일 뿐입니다.

그 옛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인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석가모니와 예수가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가리키며 보여준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마음입니다. 성인들은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이 실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불경과 성경은 끊임없이 그 사실을 저에게 상기 시켜주고 있습니다. 

저에게 시를 쓰는 일은 그림자인 생각과 미명을 걷어내고 실체인 본래 마음을 포착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그 본래의 마음을 진선미 즉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체에 걸러서 알맞는 말의 옷을 찾아서 입혀 주면 그대로 시가 됩니다. 

매일 아침이면 빛이 있으라. 이 땅과 바다에서 해가 뜨는 것과 같이 아니 그보다 먼저 우리들 가슴마다 공평하게 주신 마음에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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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명분

 

 

허전함과 괴로움과 두려움.
언제부터인지 그런 감정들이 서로 뒤섞여 가슴 한쪽 거친 똬리를 틀고 신기하게 날 거기 잡아넣는다. 애써 아닌 척 하지만 그걸 느낄 때마다 가슴이 눌린다.


함께 사는 이들의 속살 보듯 뻔히 뵈는 아픔, 설움, 거짓을 두고 난 그저 무력할 뿐.
그게 두려워 괴로워 모른 척 하고.
또한 바람처럼 쉽게 헐값으로 회자되기도 하는 가벼움.
정말 내 삶은 어디에 소용 닿는 것인지.
견딘다는 건 무모한 명분 아닌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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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

 



이따금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 후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어린 생각에도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어린 마음에도 자기에게 곤란하다 싶으면, 아이들은 무심코 엉뚱한 말로 둘러대거나, 금방 들통날 적절치 않은 말이 입에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한 미흡한 말들은 당장에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고 싶다거나, 현실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둔함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일종의 거짓말인 셈이다.

그럴 때면 내 유년 시절의 추억 속 장면들이 출렁이는 그리움의 바다로부터 해처럼 떠오른다.

나의 자녀들과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똑같은 순간이 나의 유년기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겹쳐진다.

함께 뛰어놀던 동네 언니들이랑 무슨 말을 주고 받을 때면, 큰 언니들은 웃음 띈 얼굴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무슨 놀이처럼 작은 내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라는 주문을 걸었다. 그러면 나는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주문에 걸려서 어린 나 스스로는 정말로 가슴에 손을 얹던, 그 순간의 낯선 정적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내 앞에 있던 이들은 내 입만 바라보면서 조용히 기다려 주었고,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과 입을 가까이 마주대할 수 있었던 그 정적의 순간.

그 정적의 고요한 순간이란, 내가 처한 현실과 곧 내 입에서 나올 말이 서로 일치되기 위한 만남과 평화협정의 자리인 셈이다.

그런 고요한 순간에는 거짓말이 발붙일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진실의 말 하나를 내 속에서 나 스스로 찾았다는 사실을 의식함과 동시에 그러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뭔가 모르게 가슴으로 느껴지던 밝음과 개운함,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기 전에 이미 마음이 먼저 충만해져 오던 찰라의 순간을 기억한다. 

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의 말이 먼저 있는데, 어찌 그 외에 다른 말로 하늘을 가릴까?

자라오면서 엄마하고도 그와 같은 순간의 추억이 있다.
바쁘신 엄마는 간단하게 딱 한 마디만 하셨다.

내 얼굴과 두 눈과 입을 똑바로 바라보시면서, "바른말 해라."

그러면 그 한 말씀에 내 몸은 주문이 걸려 모든 걸 멈추고, 내가 처한 현실과 곧 내 입에서 새어나올 말이 일치되기 위해 내 안에선 나름의 애를 쓰던 그 느낌.

그 옛날 언니들이라 해도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무척 어렸을 나이인데, 세 살부터 앓아오시던 천식으로 산고개를 넘지 못한 엄마는 한글도 다 깨치지 못했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서 양심을 깨우는 방법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 사실이 문득 궁금해졌고, 신기했다. 그로인해서 우리나라 민속학에 관심이 모아졌고, 우리 민족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에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한국인의 심성 저변에 흐르는 그 선함과 밝음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겪어오면서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속담처럼 민중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살아서 이어져 온 한의 정서, 즉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이 우리의 DNA 속에는 유유히 흘러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크고 밝은 뜻을 담은 말인 '한'이 부처가 가리킨 '마음'과 예수가 보여준 '마음'과 윤동주 시인이 우러러본 '하늘'과 BTS의 음악 세상에서 언뜻언뜻 엿보이는 '밝음'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진실과 진실한 말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 하늘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내겐 있다. 진실은 진리이신 하느님의 또 하나의 이름이기에.

내가 성철 스님의 법문을 좋아하게 된 핵심 법문이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거짓말 하지 마라." 남에게 거짓말 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씀이다.

성경의 잠언 24장 26절에도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 적당함의 의미는 물론 진실을 내포하고 있으리라.

현실에 딱 맞는 말 한 마디에는 힘이 있다. 진실을 말함으로 인해서 당장에 손해를 볼 것 같은 순간조차도 진실을 말했을 때, 그 뒤에 뒤따르던 밝음과 홀가분함과 그전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열리며 보이던 새로운 문과 주어진 소박한 생의 선물들을 추억하며 종종 혼자서 흐뭇해하는 보석 같은 순간들이 내게는 더러 있다.

생은 진실한 선택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가장 큰 유익함은 혼자서도 좋은 마음의 평화와 자유일 것이다.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이익에 눈이 멀어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해대는 순간의 사소한 거짓말들이 나와 누군가의 마음밭에 또는 이 세상에 씨앗처럼 뿌려진 후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서 얽히고 섥히어 나중엔 자신의 삶을 얽어매는 오랏줄이 되리라는 상황들을 얼마든지 미리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볍게 거짓과 교우한 현실이란, 그 얼마나 힘에 겨울까?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나는 그런 그림을 애초에 그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 자신이 개운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술이나 중독 따위를 만들지 않았음에도 내게도 지우고 싶은 과거의 일들이 많이 있다.

실수와 넘어짐은 늘 발길에 부딪히는 돌멩이처럼 지금도 내 발아래 널려 있으며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땅의 흙처럼 돌멩이처럼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진흙처럼, 어린 시절 놀다가 문득 보면 집에까지 날 따라오며 성가시게 굴던 풀섶에 도깨비풀처럼.

가끔 방송 매체를 통해서 보이는 공직자들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카메라를 쳐다보며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는 분들에게, 누군가가 그들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에 앞서 선서의 말로 그들의 양심을 깨워줄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내 유년기에 겪었던 그 고요한 정적의 순간을 그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을 때가 있다.

국가와 자신이 처한 지금의 현실과 곧 그들의 입에서 나올 말을 서로 일치 시키기 위한 고요한 순간을 선물해 주는 말, 진실한 말 한 마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주문의 말. 하느님이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공평하게 선물로 주신 양심의 해를 깨우는 말.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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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먹는 새

한 아이가 쌀새에 대해 물었다.

“저 새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죠, 엄마? 혹시 꽃을 먹는 게 아닐까요?”(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노래>, 강은교 옮기고 엮음, 도서출판 이레, p.17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모처럼 맑은 햇빛을 보니 참 좋습니다. 마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9)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요? 가끔 삶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언덕을 넘고 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언덕이 우리를 기다리곤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꾼 꿈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께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 위에서 서서 들려주신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둘째,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땅 위의 모든 백성이 그들 덕분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내가 너와 동행하면서 너를 지켜주고 반드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감동적인 약속입니다. 큰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일상에서 직면해야 하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시간 속을 기어가야 했습니다. 시련과 고통, 서러움과 두려움을 통과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사 41:14)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처지를 빗대서 한 표현이겠지만 저는 이 속에 담긴 아픔을 읽습니다. 어린 시절,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 시골 신작로를 타박타박 걷다 보면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흙이 가라앉아 고운 바닥에 마치 들판에 난 외길처럼 긴 선이 그어진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 외줄은 지렁이가 온 몸으로 기어간 자취였던 것입니다. 흙 위를 기어간 지렁이의 자취가 왜 그리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심상 속에 또렷하게 각인된 그 이미지 탓인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구절을 볼 때마다 저는 역사의 밑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세상에는 발레리나가 몸을 솟구치듯 가뿐하고 상큼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처럼 허청거리며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짓밟히면서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거미’라는 시에서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설움과 자주 입을 맞추었다는 표현은 시인이 겪어야 했던 신산스런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으로 뻘밭을 기어가는 것처럼 살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더 고귀하고 높은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는 것, 그것이 시인의 드넓은 긍지일 겁니다. 시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의 시인들입니다.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정화하는 이들이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시인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믿음의 반대어는 불신이 아니라 숙명론입니다. 숙명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숙명론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미움을 살까 무서워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나태함입니다. 영어로 나태를 가리키는 단어는 sloth인데, 이 단어는 나무늘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무에 매달려 지내면서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사는 동물입니다. 물론 나무늘보도 급할 때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입니다.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나태는 몸이 굼뜬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메말라 활력과 생기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종의 무기력증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며 자기 일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악산 둘레길


파란 가을 하늘이 우리의 시야를 시원하게 합니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가끔 하늘도 바라보고, 나무도 바라보고, 흘러가는 강물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찰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런 느긋한 시간 경험이 우리를 신성한 시간 앞에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의 마지막 십 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괴테와의 대화>라고 하는 책은 괴테의 작품을 넘어 괴테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참 중요한 자료입니다. 물론 에커만이 괴테를 늘 경외심을 품고 대했던 것을 감안한다 해도 그 글 속에 나타난 괴테는 품격 있고 또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서 읽은 한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에커만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둥지에 들어 있는 새끼 휘파람새를 어미 새와 함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미 새는 실내에서도 쉴 새 없이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놓아주어도 다시 새끼에게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에커만은 위험과 감금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미 새의 사랑에 감동하여 괴테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괴테는 미소를 지은 채 “만약 자네가 신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네”라고 말하며 자기가 쓴 시의 한 대목을 낭송해주었습니다.

“신은 어울리게도 안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자기 안에 자연을, 자연 속에 스스로를 품어 기른다
그러므로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은
신의 힘과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괴테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신이 어미 새에게 자기 새끼 새에 관한 이와 같은 무한한 사랑의 본능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또한 똑같은 본능이 자연 전체의 일체 생물에 미치게 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지속하지 못할 게야!―그와 같이 신의 위력은 세계 어디에나 편재해 있고, 무한한 사랑은 어디에서나 약동하고 있는 것이네.”(요한 페테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곽복록 역, OLJE CLASSICS, p.142-3) 세계의 지속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 속에 불어넣으시는 무한한 사랑의 본능 덕분이라는 말에 저는 크게 감복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누군가의 덕분에 삽니다. 최초에는 부모의 사랑이 그리고 나중에는 운명처럼 다가온 이런저런 사랑이 우리 삶을 든든하게 붙잡아주는 끈이 됩니다. 괴테는 그러한 사랑을 가리켜 “편재하는 신의 상징”이라 말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본 주관식 시험 문제 중에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건 우리도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적었다고 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대답 속에는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아이의 고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게 실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설사 누가 꾸며냈다 해도 이 질문과 대답은 우리 생명이 사랑의 빚임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랑의 빚만 늘어나는 것 같아 하나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삶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겨워도 그 속에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진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 새가 혹시 꽃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묻는 아이를 보고 무지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천진함을 잃어 우리 삶이 무거워졌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생각의 무게 때문에 물속에 빠져 들어갔던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비애 속에 자꾸 잠깁니다. 도처에서 생명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데, 시름에 잠긴 채 그 사이를 절름거리며 걷는 것은 삶의 낭비입니다. 세계 교회는 창조절기 가운데  9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의 기간을  지구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는 기간으로 정했습니다. 이 기간을 지나면서 지구에 대한 문해력이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편재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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