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불

 

 

저녁 하늘 가득 홍시 빛 노을
시샘하듯 그 빛에 반해
황금빛 불 벌판에 번진다.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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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빈 곳

 

그림 : 강병규 화가




우리집 부엌에는 
늘 빈 곳이 있다

씻은 그릇을 쌓아 두던
건조대가 그곳이다

바라보는 마음을 말끔하게도
무겁게 누르기도 하던 그릇 산더미

그곳을 늘 비워두기로 
한 마음을 먹었다

숟가락 하나라도 씻으면 이내
건조대를 본래의 빈 곳으로 

늘 빈 곳 하나가 있으므로 해서
모두가 제자리에 있게 되는 이치라니

이 세상에도 그런 곳이 있던가
눈앞으로 가장 먼저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하늘은 늘 빈 곳으로
이 세상을 있게 하는 듯

구름이 모여 뭉치면 
비를 내려 자신을 비우듯

바람은 쉼없이 불어 
똑같은 채움이 없듯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던가
가슴에 빈탕한 하늘을 지닌 사람

그 고독의 방에서 
침묵의 기도로 스스로를 비움으로

산을 마주하면 산이 되고
하늘을 마주하면 하늘이 되는 기도의 사람

늘 빈 곳에선
떠돌던 고요와 평화의 숨이 머문다

고요와 평화는
숨은 진리와 사랑의 본래면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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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를 보며



전에 없던 개미가 방안을 돌아다닌다. 처음에는 보이는 대로 밖으로 집어 던졌지만, 그래도 없어지질 않아 파리채로 잡기 시작한다.


왜 갑자기 개미가 생겼을까? 개미를 불러 들일만한 맛있는 음식을 방안에 둔 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이유를 미루어 깨닫는다.


여름을 보내며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는 파리 잡기였다. 주위에 소를 키우는 집이 많다보니 파리가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파리채로 잡은 파리들을 뒷문을 열고 뒤꼍에 버리곤 했는데 그게 바로 개미가 생긴 이유였을 것이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개미가 그곳에 밥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뒤 한두 번 더 지날 때도 먹을 것이 풍족히 있음을 알게 되자 친구들을 불렀지 싶다. 그 깨달음이 묘하게 나를 흥분시킨다. 조급하게 결과에 집착하여 실망해선 안 된다. 외진 시골목회에선 더욱 더.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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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하신 하나님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그래도 살아 볼려구 들에 나가 곡식을 심었는데, 어제 나가보니 때 아닌 서리로 모두 절딴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먹을 게 없습니다. 이번 추석만 지나면 어디론가 나가야 되겠습니다. 식모살이라도 떠나야지요.”


새벽 기도를 하던 한 성도가 울먹이며 기도를 했다. 그의 기도는 늘 그런 식이다. 미사여구로 다듬어진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다 말할 뿐이다.


한 여름 내내 비로 어렵게 하더니, 이제는 뜻하지 않은 서리로 농작물을 모두 태워 죽이다니, 두렵지만 하늘이 야속하다.


땅에 곡심 심고, 그리곤 하늘 바라고 사는 사람들, 더도 덜도 없는 땅의 사람들.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지고 밤사이 서리가 내린 것이 도시 사람에겐 그저 뉴스거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생존과 관계된다. 식모로라도 떠나야겠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아찔함이 지난다.


기도가 끝난 후 매일 새벽 그러했듯 요한복음을 읽었지만 더듬더듬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던 예수님, 그리고 들려주신 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오늘 기도한 교우에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하늘이 하는 일을 사람이 어쩌겠냐고, 새벽예배 마치고 나오며 한 성도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 뒤에 남아있는 체념의 앙금이 아리다.


“하나님. 큰 잘못 범하고도 떵떵거리며 사는 놈들 지천에 많은데 무엇 큰 잘못했다고 흙과 함께 욕심 없이 사는 사람들 괴롭히십니까? 일찍 내린 서리 하나로 생계가 막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시는 겁니까. 굽어 살피소서.”


그래도 그 교우는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멀리 자식 네 다니러 간 적 외에는 빠진 적이 없다. 아직 하나님께 할 말이 많은 것이다.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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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과정



미영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올해 94세시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동네를 다니기도 하고, 가끔은 잔 빨래도 하고, 또 가끔씩은 햇볕을 쬐기도 하던, 연세에 비해 귀가 무척이나 밝으신 분이셨다.

곡기를 끊은 지 며칠째 되는 날, 곧 돌아가시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뵈러 갔다. 자리에 누워 계신 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시고 호흡이 가빴다. 물도 마시지 못하셨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유심히 살피시는 것이었다.


군에 간지 얼마 안 되는 맏손자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두곤 쉬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떠나는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결국은 맏손자를 보지 못하신 채 다음날인 추석 오후 1시경에 돌아가셨다.


모두들 할머니의 죽음을 두고 호상이라 했다. 무병장수 하신 것도 그러하지만, 좋은 날 좋은 시간 택하셔서 돌아가셨으니 복도 많다는 것이었다. 만약 추석 전날이든지, 추석 새벽에 돌아가셨으면 동네 사람들 제사도 못 드리게 할 뻔 했는데, 모두들 제사를 마친 오후에 떠나셨으니 얼마나 잘된 일이냐는 것이다.


어쩜 그건 후손들에게 준, 한평생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준 할머니의 마지막 따뜻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건강하게 한 평생을 산다는 것,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겠지만, 떠나며 남는 이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지 싶다. 뜻하지 않은 예배를 드리며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이 의외로 자연스러운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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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아침에 눈떠서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받기만 했다고, 받은 것들을 쌓아놓기만 했다고, 쌓인 것들이 너무 많다고, 그것들이 모두 다시 주어지고 갚아져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살아야겠다고……”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p.94)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수신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고전 1:2)라고 말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구절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특히 ‘각처’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간간이 기도를 부탁하러 교회에 들르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여럿이 모일 수는 없지만 제 사무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혼잣소리로 여러분께 인사를 건넵니다. “거기 다 잘 계시지요?”

 

처서 절기인데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늦장마처럼 흐린 날이 많습니다. 남녘에는 태풍 오마이스가 스쳐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렸습니다. 건물이 침수되고 도로가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매해 반복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자연 재해를 겪을 때마다 인간의 작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효창 공원을 천천히 걷다가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가 얕아서인지, 그 자리에 노박이로 서 있는 것이 지루했는지 나무는 뿌리를 드러낸 채 벌렁 누워 버렸습니다.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텅 비었습니다. 조금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그 광경에 또 익숙해지겠지요? 세상 사는 이치가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교우들이 차마 그가 머물던 공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치 그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겁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그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삶의 다양한 풍경들이 빚어집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재하는 현존? 하나님을 우리는 그렇게 경험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도쿄에서는 패럴림픽이 진행 중입니다. 하계 올림픽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스포츠는 세계와 미래를 바꾸는 힘이 있다’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이 대회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평화의 제전입니다. 신체장애, 지적장애, 시각장애, 뇌성마비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 자기들이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현장은 그 자체로 감동입니다. 장애를 안고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입니다. 몸에 조그만 고통이 찾아와도 우리는 전전긍긍합니다. 당연하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아주 조금 겸손해집니다. 그런데 장애를 안고 태어나거나, 중도 장애를 입은 이들의 고통과 어둠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깊은 좌절의 늪에 빠져들 수도 있고, 원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를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발휘하려는 이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저는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로부터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이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철학적 우회를 거쳐야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존재의 용기란 우리를 공허와 무의미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려는 현실을 경험하면서도 기어코 자기 존재를 지속하고 또한 긍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용기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고백하든 고백하지 않든,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이들은 위대합니다. 많은 이들이 패럴림픽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아내와 길을 걷다가 본 광경이 떠오릅니다. 비둘기 몇 마리가 오졸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도시의 풍경입니다만 어느 순간 아내가 ‘어머, 저기 좀 봐요’ 하고 말했습니다. 비둘기의 가슴께에 광고 전단지 테이프가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어쩌다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둘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걷는 방향을 이러저리 바꿔보고, 깃털도 움직거려 보지만 테이프가 떨어질 리가 없었습니다. 도와주고 싶어 조금 다가서면 위협으로 느꼈는지 비둘기는 다른 방향으로 황급하게 달아났습니다. “한번 날아봐. 그러면 떨어질지도 몰라.” 얼마 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아픈 새끼를 입에 물고 동물 병원을 찾아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살다보면 정말 암담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한계상황처럼 여겨지는 일들 말입니다.

 

주님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는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눅 10:36) 주님은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으로 바꾸셨습니다. 이웃은 지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보복의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처지가 더욱 딱하게 되었습니다. SNS를 통해 탈레반이 기독교 선교사들을 처형하려고 하니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유포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대개 가짜 뉴스로 드러났습니다. 이슬람 신자들을 테러리스트로 특정하려는 의도 때문일 겁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받아들일지의 문제가 국제사회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일단 우리 정부는 탈레반의 보복 위협 아래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 400명을 군용기로 데려오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프간 재건에 협력한 대사관, 병원, 직업 훈련원 직원 및 가족들입니다. 잘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설 땅이 없는 이들에게 설 땅을 제공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피렌체 대성당 건너편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 건물은 청동문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물과 내부의 정교한 모자이크로 유명합니다. 안드레아 피사노가 남쪽문에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관련된 부조물을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희망’(Spes)입니다. 날개 달린 천사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희망을 잡으려고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치 나비나 잠자리를 잡으려고 발 끝을 세운 채 조심조심 걷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등 뒤로는 날개가 달려있지만 천사는 다만 손을 뻗고 있을 뿐입니다. 희망은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피사노는 희망이란 본래 희박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데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이 작품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천사가 잡으려 하는 공중에 있는 어떤 주머니가 희망인 줄 알았지만, 실은 날개를 가진 저 존재가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발터 벤야민의 말, 즉 “희망은 날개를 갖고 있다”는 말을 힌트 삼아 그 천사가 희망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왜 희망일까? 무엇인가 ‘곁으로’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되려면 ‘곁으로’ 움직여야 한다. 손에 닿지 않더라도 ‘곁으로’ 움직이는 순간, 날개 달린 존재는 희망이 된다. ‘곁으로’ 움직이는 순간, 거기에 진실이 있다.”(김응교, <곁으로>, 새물결플러스, p.27)

 

‘곁으로’ 다가서는 움직임이 곧 희망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암시합니다. 다가섬으로 내게 유익이 될 만한 사람 곁으로 가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다가섬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을 때, 그 다가섬은 희망이 됩니다. 누군가의 곁에 다가가 그의 설 땅이 되어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이렇게 힘들고 지친 사람들 곁으로 다가서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인정의 황무지인 이 세상에 희망을 파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재라는 시간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채우는 이들입니다. 온몸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돌보는 분들은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갈 6:2)라고 말했습니다. 남의 짐을 지는 행위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울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8월 마지막 주일이 다가옵니다.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고,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려고 애쓰십시오. 그분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늘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손이 되어 가슴 시린 이들을 감싸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8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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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꽂이



최완택 목사님의 엽서. 말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무엇보다 사람들을 情으로 만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짧지만 좋은 격려였다.


누런 서류 봉투를 이용해 편지꽂이를 만들었다. 앞면엔 민들레 그림과 함께 짧은 글을 썼다.

먼 길 달려와
민들레 꽃씨로 가슴에 안기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
우리 기억하는 사람들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
고향 산 마주하고 ‘훠-이‘ 부르면 
언제나 대답하는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의 그리운 얘기들 차곡차곡 쌓였으면 
포도주 단맛 들듯
깊숙이 사랑 이야기 익어 갔으면.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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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밑줄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글을 만나면
연필로 밑줄을 그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우연히 보게 될 
뒷사람을 위한 밑줄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글을 만나도
밑줄을 긋지 못할 때가 있다

어쩌면 그건 
만에 하나라도 
뒷사람에게 아픔이 될까 봐 

긋지 못한 밑줄은
내 안으로 펼쳐진 대지의 땅으로 닻을 내린다

한 줄기 뿌리처럼 수직으로 그은
내 영혼을 위한 투명한 밑줄

그렇게 마음 깊이 새기고 새긴 밑줄들은 
언제 어디선가 새로운 길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주저앉으려는 날 붙드는
하늘이 내려준 동앗줄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그리고 어느 날
내 안에서 익힌 진실이 과실처럼 영그는 날

오늘 닻을 내린 투명한 밑줄을 끌어올려
싱싱한 진리의 열매를 뒷사람과 함께 먹고 마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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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갈의 기쁨



비가 오셔야 한다고, 꼭 오셔야 한다고, 새벽예배시간 최일용 성도님은 울먹이며 기도를 했다.


잎담배 밭에 비료를 줬는데 오늘마저 비가 안 오면 담배가 타 죽고 말거라고 애원하듯 울먹였다.


이러단 모판마저 마를 것 같다고, 어제 준이 아빠를 통해 비가 급함을 듣긴 들었지만 그렇게 다급한 줄은 몰랐다. 마루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그래 와라. 신나게 좀 와라.”


그러나 잠시 후 비가 멈추고 날이 갠다. 일기 예보엔 10mm 온다고 했다는데 그것마저도 안 오려는가 보다.


아침상을 물리고 아내와 둘이 마루 끝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어린아이 생떼부리 듯 항의를 한다.


“하나님, 이것 갖고 될 줄 알아요. 어림없어요. 하나님 노릇 하기가 그리 쉬울 줄 아십니까. 하나님 체면이 서려면 훨씬 많은 비가 와야 된다고요. 아셨어요?”


어리석음을 안다.
그런 투정의 어리석음을 안다.
그러나 그건 말장난이 아니다.


일손 멈추고 비 그친 하늘 망연히 쳐다 볼, 이곳 농부들의 한결같은 마음 아니겠는가. 하나님도 투정엔 약하신가 보다. (한두 번은 해 보시라)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굵은 비가 저녁 늦게까지 무섭게 왔다. 낮엔 우산도 없이 저수지에 올라가 쫄딱 비를 맞으며 찬송을 불렀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찬송 끝에 두 눈이 뜨겁다. 해갈, 해갈의 기쁨. 이런 순간을 위해서라면, 때로 목마름을 목마름으로 지켜도 좋으련만. 젖은 머리 사이론 빗물이 아니라 따뜻한 님의 사랑이 쉼 없이 흘렀다.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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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벽



돌아가는 손님을 배웅키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더니 동네 아이들이 거의 다 나와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일하러 나갔던 마을 언니가, 글쎄 학교에 계속 다녔으면 고등학생쯤일까, 모처럼 집에 들렀다가 가는 길, 언니를 배웅하러 나온 것이다.


한 사람이 다녀가는데 동네 많은 아이들이 나와서 배웅하는 것도 그러했지만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그 언니에게 쏠려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그러나 안다. 아이들은 모처럼 돌아온 그 언니의 모습 속에서 곧 다가올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옷차림에서 말투까지 그리고 표정까지도 모두 도시에서 묻어 온 것이며 얼마 후 자신들도 배울 것이기에 눈여겨 두는 것이다.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도시의 공장으로 나가는 단강의 아이들, 그렇게 농촌은 등져야 하는 땅이 되어가고 있고, 젊은이들은 고향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 큰 벽, 그 앞에 난 너무도 작고 약할 뿐이다.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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