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죽음의 세력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 그 결과 우리가 만나는 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생명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기도하라 저항하라》, 77쪽)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그 동료들이 미국 시민권 운동의 전환점으로 만든 셀마에서 진행된 영웅적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 남부로 내려갔다. 1970년대에는 반전집회에서 연설했고, 코네티컷의 트라이던트 핵잠수함 해군 기지에서 벌어진 철야 평화 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980년대에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니카라과와 과테말라에 가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레이건 대통령의 저강도 전쟁 전략과 핵무기 경쟁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네바다의 핵실험 장소에서 벌어진 항의 집회에도 참여했다. 그는 제1차 걸프전 전날인 1991년 1월 14일 저녁, 워싱턴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 앞에서 임박한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선택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는 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과 무기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구속과 투옥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썼다.(존 디어 신부의 소개글 중에서)
이쯤 되면 우리 머리에는 즉시 ‘좌파’라는 말이 떠오른다. 불순분자,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자, 데모꾼…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얼굴로 알려졌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에 있는 라르슈 공동체에 들어가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다가 1996년 홀연히 세상을 떠난 영성신학의 대가, 헨리 나우웬 신부가 바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헨리가 전해주는 라르슈 공동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헨리는 라르슈 공동체는 말이 아닌 몸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는 것은 먹이고 씻기고, 어루만지고, 붙들어주는 일이다. 그렇기에 라르슈에서 몸은 말이 수렴되는 자리이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육화를 온전히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아직도 나는 식탁을 차리고, 천천히 식사하고, 접시를 닦고, 다시 식탁을 차리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그래, 분명히 먹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먹은 후에 하는 일이다.’ 하고 생각한다.”(《새벽으로 가는 길》, 193쪽)
이렇게 연약한 이들 속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이의 모습과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에 자주 참여하는 실천가의 모습을 일치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생의 과정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그 두 가지 지향은 서로 길항하지 않는다. 그 두 가지 지향의 밑절미에는 예수가 있다. 백향목으로 상징되는 제국과 지배에 맞서 겨자풀의 나라를 가르쳤던 예수, 그에게는 신앙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불의와 폭력, 핵전쟁의 위협에 처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평화의 영성이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영성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지만 대개는 탈정치적인 맥락에 국한되고 마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헨리 나우웬의 신앙적 실천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많다 하겠다.
<당신은 바다에 많은 길을 내시어도> 중에서
김기석/청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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