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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299

첫눈으로 하얗게 지우신다 신동숙의 글밭(290) 첫 눈으로 하얗게 지우신다 첫 눈으로세상을 하얗게 지우신다 집을 지우고자동차를 지우고길을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먼 산을 지우고사람을 지우신다 첫 눈 속에서두 눈을 감으며하얀빛으로 욕망의 집을 지우고떠돌던 길을 지우고한 점 나를 지운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보이는 건 하얀빛 오늘 내린 첫 눈으로 세상을 하얗게 지우시고아침햇살로 다시 쓰신다 2020. 12. 13.
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신동숙의 글밭(285) 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앞으로 2주 동안 엄마의 집은 빈 집입니다.냄비에 남은 찌게를 버릴까 하다가 냉장고로 보냅니다. 수저 한 벌, 밥그릇 하나, 작은 반찬 접시아침 밥그릇이 담긴 설거지통을 비웁니다. 엄마가 여러 날 동안 우겨 담으셨을 종량제 봉투에화장실 쓰레기통 휴지까지 마저 눌러 담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해를 지내오면서도엄마의 아파트 종량제 봉투 버리는 데를 모릅니다. 문을 나서며 처음 마주친 아주머니께 여쭈니"앞쪽에 버려도 되고, 뒷쪽에 버려도 되는데,이왕이면 가까운 뒷쪽에 가세요." 하십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며 뒷쪽으로 가니태우는 쓰레기통, 안 태우는 쓰레기통이 나란히 두 개 태우는 쓰레기통 손잡이를 위로 당기니 열리지 않아서 아파트는 쓰레기통도 비밀번호를 .. 2020. 11. 25.
충만한 하늘 신동숙의 글밭(282) 충만한 하늘 빈 하늘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기에아침마다 이렇게 환하게 밝아오는지 태양이 비추는 우주 공간은언제나 어둠인 채로 아침이 오지 않습니다. 들숨으로 들으킨 하늘이뼈와 피와 살이 되는 신비로움 몸이 하늘에 공명하여울리면 노래가 되고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서몸짓은 춤이 되기도 합니다. 비로소 잎들을 다 털어낸 빈 가지를 하늘이 고이 품에 안고서 이 겨울을 지나며 겨울 바람이 웅웅 자장가를 불러주는 겨울밤은촛불 하나만 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긴긴밤 황금빛 햇살을 걸쳐 입은 빈 가지마다새 움을 틔우는 이 충만한 하늘의 사랑을 2020. 11. 22.
하늘 그릇 신동숙의 글밭(279) 하늘 그릇 그릇에 담긴 물을 비우자마자얼른 들어차는 하늘처럼 나를 채우려는 이 공허감과 무력감은얼른 들어차려는 하늘의 숨인가요? 나를 비우고 덜어낸 모자람과 패인 상처와 어둔 골짜기마다 하늘로 채우기를 원합니다.나의 몸은 하늘 그릇입니다. 더 가지려는 한 마음이 나의 모자람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남을 헐뜯으려는 한 마음이 나의 패인 상처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높이 오르려는 한 마음이 나의 어둔 골짜기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를 채우려는 이 없음이없는 듯 계시는 하느님인 줄 스스로 알게 하소서. 나의 몸은 하늘을 담는 하늘 그릇입니다. 2020. 11. 19.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신동숙의 글밭(278)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글을 다 쓴 후자꾸만 손이 갑니다열 번도 가고 백 번도 가는 일 바르게 고치고 또 고치고부드럽게 다듬고 또 다듬으며 글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쉼 없는 일 문득 이 세상에서 일필휘지가 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사색으로 흐릅니다 한 순간 떨군 눈물 한 방울한 순간 터트린 웃음 한 다발풍류 장단에 춤추는 민살풀이 우리들 모든 가슴마다이미 공평하게 있는 샘물이 샘솟아 올라 순간이 영원이 되는 일 본래 마음이 휘 불면일필휘지(一筆揮之)아니할 도리가 없답니다 2020. 11. 18.
구멍 난 양말 묵상 신동숙의 글밭(277) 구멍 난 양말 묵상 -라오스의 꽃 파는 소녀, 강병규 화가- 몸에 작은 구멍 하나 뚫렸다 하여멀쩡한 벗님을 어떻게 버리나요 내 거친 두 발 감싸 안아주느라맥없이 늘어진 온몸이 미안해서 어디까지나 나의 게으름 탓에 제때 자르지 못한 내 발톱에 찔려 아픈 님을 작은 틈으로 비집고서 세계 구경 나온 발가락은 웃음도 되고 서러움도 되었지요 실과 바늘로 한 땀 한 땀꿰어주시던 어진 손길은 묵주알처럼 공굴리는묵상의 기도손입니다 2020. 11. 17.
달빛 가로등 신동숙의 글밭(276) 달빛 가로등 집으로 가는 밤길길 잃지 마라 가로등은고마운 등불 달빛에 두 눈을 씻은 후 달빛 닮은가로등 보면은 처음 만든 그 마음 참 착하다 달과 별을 지으신 첫 마음을 닮은 2020. 11. 15.
"엄마, 오다가 주웠어!" 신동숙의 글밭(275) "엄마, 오다가 주웠어!" 아들이 "엄마, 오다가 주웠어." 하며왕 은행잎 한 장을 내밉니다. "와! 크다." 했더니"또 있어, 여기 많아." 하면서 꺼내고꺼내고또 꺼내고 작은잎찍힌잎푸른잎덜든잎예쁜잎못난잎찢어진 잎 발에 밟혀 찢어진 잎 누가 줍나 했더니 아들이 황금 융단길 밟으며 엄마한테 오는 길에 공평한 손으로 주워건네준 가을잎들 비로소 온전한 가을입니다. 2020. 11. 14.
침묵의 등불 신동숙의 글밭(271) 침묵의 등불 초 한 개로 빈 방을 채울 수는 없지만 초의 심지에 불을 놓으면 어둡던 빈 방이 금새 빛으로 가득찹니다 백 마디 말씀으로 하늘을 채울 수는 없지만 마음의 심지에성호를 그으며 내 안에 하늘이 금새 침묵으로 가득찹니다 촛불처럼나를 태워 침묵의 등불을 밝히는고독의 사랑방에서 2020. 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