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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만난 듯 소탈한 시골약사 이야기

나는 더 먼 길을 걷는 꿈을 꾼다(2)

by 한종호 2021. 4. 25.

다음날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들어가니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넘나들며 무지개 꽃을 피워낸다. 꽃천사 루루가 찾던 “행복의 무지개꽃”은 오늘 우리가 만난 햇살을 잠시 바라볼 여유만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테를링크의 책 ‘파랑새’에서도 주인공 틸틸은 결국 자신의 집에서 파랑새를 찾지 않았던가. 

1코스는 접근성이 좋고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인지라 걷는 이들이 많다. 혼자 걷는 이부터 수십 명의 산악회까지 가족, 연인, 직장동료 등 길을 걷는 이들의 관계도 다양해보인다. 100년도 못사는 인생에서 우리는 참 다양한 인연의 거미줄을 치고 산다. 그 중 대부분은 돌보지 못한 세월에 사라지고, 일부는 크고 작은 풍랑에 끊기고, 남은 몇 가닥 거미줄만이 오가며 엮이어 실타래가 되고 동아줄 인연이 된다. 가끔은 동아줄 인연인줄 알았던 사람이 무심한 세월에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희미한 기억으로 남게 될 때 나는 묘한 허무함과 슬픔을 느낀다. 길이나 사람이나  왕래하는 걸음 없어지면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아끼는 사람과 길하나 만들어 두며 살고 싶거들랑 꼭 봐야 할 일 없고 꼭 해야 할 말 없어도 ‘보고 싶다고. 잘 지내느냐’고 속마음 한 걸음이라도 오가는 정성이 필요하다. 그리 대단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닌데 나또한 그 마음 한 걸음 인색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사진/김승범

1코스의 반은 숲을 지나 산을 오르는 길이고 구룡폭포를 분기점으로 나머지 반은 시원한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라 중간 중간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쉴 수 있어 조금은 여유를 갖게 하는 길이다. 봄 가뭄에 계곡물이 적다 싶지만 그래도 지리산이라 이만큼 흐르는 물을 볼 수 있지 싶다. 숨을 몰아쉬며 걷는 이, 세상일은 다 잊은 듯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노는 이,  구름다리 흔들며 장난을 치는 이, 기억이 되어줄 사진을 찍는 이,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이. 

 

나의 오감으로 사람을 느끼지만 그것이 시끄러운 소음처럼 와 닿지 않음은 큰 산이 길에 속한 모든 이들의 소리를 품고 그들을 큰 품에 안았음이리라. 큰 산과 큰 사람은 만 가지 세상사를 품고도 시끄럽지가 않다.

1박 2일 동안 6만보가 넘는 산길을 걸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길 위에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찔레꽃향기 따라, 때죽나무 흰 꽃길 따라 봄의 끝자락을 걸었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매일을 걷고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인지라 내 발자국을 따라 선을 그어보면 보수적 테두리의 작은 영역이 만들어진다. 그 안의 내 인생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나는 이 공간에 지루함을 느낀다. 그 안에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있고, 더 열정적으로 노력하며 배워야할 부분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어찌해볼 수 없는 권태로움을 느끼며 시들어 갈 때가 있다. 

 

그 지루함과 권태로움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나는 가끔씩 테두리 너머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걷는다. 낯선 길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감각과 생각은 시들어가는 나의 일부에 활력을 준다. 그 힘은 테두리안 내 일상에 새로운 균형감을 주고, 걸음의 방향을 바꾸어 삶의 확장성을 준다.  생의 한가운데... 그래서 나는 더 오래, 더 먼 길을 걷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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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다. 얼마전 사별 카페에서 만난 네 분과 함께 사별 이야기를 담은책 <나는 사별하였다>를 출간하였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 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금은 화성에서 작은 시골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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