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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만난 듯 소탈한 시골약사 이야기

에셀도서관에 부는 바람

by 한종호 2021. 5. 30.


나에게 특별한 두 편의 동화를 고르라면 <성냥팔이 소녀>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다. 이 책은 내가 글을 배운 이후 내가 처음 읽어 본 동화책이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인 부모님은 5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산골마을 떠나 정읍으로 나오셨다. 고향의 논밭을 팔아 변두리에 작은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착했지만 학력이 낮은 부모님이 고를 수 있는 돈벌이는 제한적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아버지는 끊임없이 일을 하셨다. 가족이 먹을 양식은 직접 농사 지으셨고, 5남매를 가르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던 것 같다. 보일러공, 집짓는 일, 수레에 과일과 야채를 싣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파는 노점상, 공장직공, 청소부 등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까지 합친다면 아버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어린 내게 아버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큰 사람처럼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식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던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를 다재다능하고 용감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언니들의 기억 속엔 수업료를 제때 납부하지 못해서 교무실로 불려 다니던 옛 기억이 있다. 수업료 내기도 빠듯한 형편이었으니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사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셨을 것이다. 요즘은 지역마다 도서관이 많고 학교 교실에도 읽기 좋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지만 내가 어릴 적엔 정읍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 내겐 한글을 깨우쳐도 교과서 외엔 읽을 책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고교 졸업 후 서울로 간 큰언니가 성탄절 선물로 <성냥팔이 소녀>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 함께 실린 동화책 한 권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 책을 얼마나 재밌게 읽었는지 모른다.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성냥팔이 소녀>를 읽으면서 불쌍해서 울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읽으면서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그 책은 나의 첫 번째 책이었고, 초등학교 6년 동안 내가 가져본 유일한 동화책이었다. 스무 살 큰언니의 가난한 지갑을 털어서 산 한 권의 동화책이 어린 막내 동생에겐 어떤 부자의 지갑으로도 살 수 없는 따뜻한 기억이 되었다.

 

사진/김승범


작은 시골교회의 사모로 살고 있는 친구가 도서관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친구의 글 중 일부를 옮겨보면 “내가 이곳에 도서관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게 된 것은 할머니 손에 크고 있는 작은 여자 아이 때문인데, 학교를 마치면 갈 곳도 없고 매일 매일이 그냥 너무 심심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 아이의 눈이 너무 쓸쓸해 보였어. 양육비조차 보내지 않고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이혼한 부모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아이에게 매일 부담 없이 찾아가 놀다갈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결심의 시작이었어. 나의 청소년 시절이 불우했고 힘들었기에 난 예전부터 청소년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길 바라고,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어.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행복해지고, 따뜻함을 느끼고, 좋은 멘토를 만나 인생을 함께 고민해주고 기도해주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전까지 있었던 도시의 큰 교회가 아닌 낙후된 지역의 작은 교회에서 그 꿈을 시작하게 되었네. 이제 시작이야! 친구야, 나의 꿈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응원해줘.” 

학창시절 말이 없고 수줍음 많던 친구가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따뜻한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감히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나는 조금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다시 무언가를 꿈꾸기 시작한다거나, 오랫동안 꿈꾸던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엄두가 나지 않은 일인지 나는 안다. 그것도 내가 먹고 사는 일이나 내 일신의 편안한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런 일을 교인이 100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교회 목사님의 가난한 아내로 사는 친구가 시작했다. 

 

나는 분명 마음 가득 친구를 응원해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누군가가 ‘마음만으론 안 되지. 네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지.’라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친구는 우선 4,000권을 수납할 수 있는 책장과  1,400여권의 책을 준비 했노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도서관에 필요한 것들이  많을 것인데 도서관이 친구의 소망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공간이 되려면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먼저 집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장을 정리하다보니 제법 깨끗하고 좋은 책들이 많았다. 이젠 그 책들을 우리 집 책장에 모셔두는 것보다 에셀 도서관에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도서관으로 책을 보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많은 동화책이 읽고 싶었지만 책이 없어 읽을 수 없었던, 일찍 철이 들어버려 가난한 엄마에게 동화책 사달라는 말을 감히 꺼낼 엄두도 낼 수 없었던,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던 친구를 호기심과 부러움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던, 큰언니가 보내준 한 권의 동화책이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었던 어린 정숙이들에게 어른이 된 내가 이제야 책을 보내주는구나!  친구가 언제라도 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린 동네 도서관을 만들어 주니, 이제 어른이 된 정숙이는 그곳에 살고 있을 어린 정숙이들에게 좋은 책을 선물해 주면 되는 거구나. 어쩌면 가난한 언니가 보내준 한 권의 동화책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따뜻한 어린시절 추억을 얻은 나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에셀 도서관에서 만나는 좋은 책과 따뜻한 마음을 통해 평생 접어 간직할 수 있는 어린 시절 고마운 기억을 얻어 갈 수도 있겠구나.’ 


나는 그곳으로 책과 컴퓨터를 보냈고, 책을 받은 친구는 “네가 내 기도의 응답이고 하나님의 기적이야”라고 말했다. 작은 일에 이런 말을 듣는 것이 부끄럽지만 아마도 도서관을 처음 꾸리면서 힘든 부분이 많았을 친구에게 응원이 되어준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네가 기도의 응답이고 기적”이라는 친구의 말이 되씹어지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이 정도가 기적이면 하나님의 배포가 너무 작지 않나요? 적어도 제 친구 입에서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게 하시려면 도서관의 책장이 가득 차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정도는 돼야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친구의 말이 내 마음을 흔들었고 나를 또 다시 행동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에셀 도서관의 책장에 책을 다 채울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따뜻한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친구의 결심과 행동이 나를 흔들었고 나는 더 크게 흔들리어 또 다른 누군가를 흔드는 바람을 만들 수 없을까 생각했고 기도했다. ‘하나님! 내게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재주가 있다면, 내가 보낸 글을 읽고 마음이 흔들린 누군가는 도서관에 책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주세요. 에셀 도서관의 책장이 가득 채워지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나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에셀 도서관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고, 그들이 그곳에 기적을 만드는 따뜻한 바람이 되어주길 부탁했다. 그리고 기적을 만드는 바람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편지를 받은 많은 이들이 도서관에 후원금을 보내주었고, 또 다른 이들에게 바람이 되어주길 부탁했으며, 많은 이들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책을 선물해 주었다. 한달 후 에셀도서관의 책은 두 배로 늘었고 작은 여자아이는 학교가 끝난 후 그곳에서 놀기 시작했다. 

바람은 풀잎을 간질이고 나무를 흔들며 구름과 물을 흐르게 한다. 모든 바람은 자신이 만난 크고 작은 세상을 흔들며 생동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흔들고 싶다면 우리는 바람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람의 시작은 오늘 나의 작은 결심과 행동이며, 누군가와 나누는 짧은 대화와 한 편의 글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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