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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만난 듯 소탈한 시골약사 이야기

나는 더 먼 길을 걷는 꿈을 꾼다(1)

by 한종호 2021. 4. 23.

사진/김승범

 

                                                     
몇 년 전부터 나는 친구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약국에 매여 있는지라 시간을 자주 낼 순 없지만 그래도 계절마다 걷기 좋은 길을 찾아 종일 걷곤 한다. 올해는 석가탄신일을 이용해 1박 2일 코스로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작년에 2박 3일 동안 지리산 둘레길 중 운봉에서 동강구간를 걸었는데 그 느낌이 좋아서 ‘지리산 둘레길 완주’를 나의 버킷리스트에 추가시켰다. 그러니 다리 후들거리기 전에 틈틈이 찾아가야 할 곳이 지리산이 되었다. 5월 21일 새벽 5시 30분 구례구역행 KTX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두른 덕분에 도시락까지 챙기며 여유롭게 기차에 올랐다. 호남선KTX가 생기고 서울에서 남원까지 2시간이면 가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엔 고향인 정읍과 서울을 오갈 때 4시간씩 걸리곤 했는데 이젠 1시간 30분이면 갈수 있단다. 참 빠른 세상이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느리게 사는 법>이란 책을 보고 빌릴까 말까 고민했는데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에 느림을 택하고 싶어진다면 난 세상을 역행하거나 뒤쳐지는 사람이 될까?  빠른 세상이 좋으면서도 싫다. 


기차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금세 구례구역이다. 광명역에서 구례구역까지 1시간 50분이 걸렸는데 우습게도 구례구역에서 둘레길23코스가 시작되는 산동면까지 2시간이 걸려서 도착했다. 산동면엔 편의점은커녕 허름한 구멍가게조차 없다. 구례구역 슈퍼를 그냥 지나쳐온 것이 못내 아쉽다. 어쩌겠는가! 돌아갈 수 없다면 그냥 가야지. 예상대로라면 오늘 8시간은 족히 걸어야한다. 5월의 해는 길지만 그래도 산길이니 부지런히 걸어야 해지기전에 주천면에 도착할 수 있다. 부디 중간에서 맛있는 밥집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처음 가본 길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솔직히 별 생각은 없다. 그저 오늘 마주할 길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 


누군가는 생각을 하기 위해 길을 걷고 누군가는 생각을 버리기 위해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함도, 생각을 버리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순간을 호흡하며 걷는 것이 좋을 뿐이다. 지리산은 생각 없이 걷다가 사로잡힌 순간에 잠시 머물러 숨을 들이쉬기에 딱 좋은 길이다. 그것이 내가 지리산을 걷고 있은 이유다. 이것도 흔쾌히 함께 걸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가능한 일인데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복된 인생이다. 이 길을 걷기로 작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친구를 가진 복을 깨닫지 못했으리라. 


인생 반을 살고 나서야 겨우 알아지는 것은 ‘용기를 쥐어짜 한걸음 내딛어 삶의 반경을 넓힐수록 깨달아지는 것이 생기고, 그것이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도전과 이유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삶의 매순간 용기를 내야겠다.


한참을 걸어 큰 나무 밑 정자가 있는 현촌마을에 도착했다. 예전엔 이곳에 100가구쯤 살았다는데 지금은 40가구도 안 남았단다. 그것도 요즘 비어가는 시골을 생각하면 나은 형편일지도 모른다. 어느 시골마을엔 청년회장님 나이가 65세라고 하니 어쩌다 아이가 태어나기라도 하면 아이는 온 동네의 웃음이고 꽃이란다.


길 위로 어릴 적 자주 먹던 덜 익은 오디와 산딸기가 보인다. 변변한 구멍가게도 없는 시골마을 아이들은 5-6월이면 들과 산으로 뛰어다니며 간식거리를 찾았다. 아카시아꽃, 삐비, 찔레줄기, 오디, 산딸기... 어쩌다 야생하는 딸기밭이라도 발견하면 대박이다. 오디는 6월-7월 최고의 간식이다. 어른이 되어도 오디를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리 좋아하는 과일도 아니건만 아마도 어린 시절에 새겨진 반사반응인가보다.  


주변으로 산수유나무가 많은 것을 보니 이 길은 산수유 꽃이 피는 3월에 걸으면 멋지겠구나 싶다. 마을길 지나 시냇물이 흐르는 편백나무 숲을 가로지르고 때죽나무 흰 꽃잎이 뿌려진 고운 숲길을 사뿐히 걷는다. 숲을 벗어나니 차 1대 다닐 정도로 닦여진 길이 나오고 넘어야할 밤재 고개가 보인다. 누군가 편히 다니고자 닦아놓은 길인데 땀 씻을 물 한 방울 없고 쉴만한 그늘조차 없는 야박한 그 길이 나에겐 팍팍하다.  

 

오후 2시가 넘도록 우린 밥집을 찾지 못했다. 나이 들수록 밥심이라 했는데 아침을 6시에 먹고 여직 굶으려니 이젠 걸을 힘마저 없다. 밤재를 넘어 내려오니 커다란 아카시아나무아래 양봉통 옆에 선  남자가 “아가씨들 꿀물한잔 하고 가유!”라며 손짓을 한다. 위험한 사람들은 아닐지 살짝 인상을 흝어 내려 보지만 사실 난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볼 심안이 없다. 마흔이 넘어도 나는 아직 사람 속을 모르겠다. 어쨌든 중년의 우리를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그들에게서 진한 꿀물과 컵라면까지 얻어먹으며 꿀벌과 양봉에 대해 한수를 배웠다.

 

역시 세상은 교실보다 넓고 교과서보다 리얼리티가 있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교실 밖 세상에서 배우면서도 정작 우리 아이들은 왜 좁은 교실 안에 묶어 두려는 걸까?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해야하는 어른의 책임을 쉽게 하려는 꼼수이자 합리화는 아닐까? 실패와 고통만한 스승이 없건만 겁쟁이 엄마는 자녀를 그 스승 앞으로 보낼 용기가 없다. 정금같은 자식은 두려움을 삼킬 줄 아는 부모의 용기에서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자식을 걸고 용기를 내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고개를 넘어 마을로 접어드니 100년쯤 됨직한 옛 기와집과 선이 고운 배롱나무가 있다. 그 품은 사연을 추측하려니 나무 옆 정자에 앉은 할머니가 ‘저것은 문중 제각인디 문중이 기우니께 요세는 관리가 지대로 안 되지. 배롱나무는 천년이 넘은 보호수인디 내가 열여섯에 아랫마을에서 시집 올 때도 키가 저만혔는디 팔십이 넘어도 여적 저만혀’ 라며 마을이 품은 역사 한 자락을 풀어주신다. 팔순노인의 기억은 머지않아 땅에 묻혀 사라지겠지만 배롱나무 천년 나이테는 열여섯 새색시의 연지곤지와 산골 아낙의 거친 손을 기억해주었으면 싶다.


저녁 6시가 넘어 오늘 목적지인 주천면에 도착해 인심 좋은 밥상 앞에 앉아 시원한 맥주한잔을 들이키니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온다. 허름하지만 나그네 하룻밤 머물기엔 그리 나쁘지 않은 잠자리가 있고 허물없는 벗이 함께하니 더없이 좋은 하룻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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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다. 얼마전 사별 카페에서 만난 네 분과 함께 사별 이야기를 담은책 <나는 사별하였다>를 출간하였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 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금은 화성에서 작은 시골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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