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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만난 듯 소탈한 시골약사 이야기

화성 노인의 지구별 여행기

by 한종호 2021. 4. 22.


14평의 작은 시골약국에는 하루 종일 여러 사람이 다녀간다. 2살배기 아이부터 90세가 넘는 노인까지... 나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먹고 사는 일도 다르고 살아온 인생도 다른 사람들이 오늘도 약국 문턱을 넘나들며 인사를 나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약국 출입문 옆에 걸어 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약국에 오는 이들이 보게 될 글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많이 읽게 된다.


약국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을 습관처럼 무감각하게 대하거나, 매출을 위한 돈줄로 보게 되는 마음을 경계하고, 또 내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길 바라며 되새겨 읽게 되는 글귀이다. 평소 나는 약국을 찾는 이들에게 여러 질문을 건네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우리는 동네 골목길에서 만난 듯 소탈하게, 어느 집 부엌의 밥 짓는 냄새만큼이나 고소하게, 봄의 들꽃처럼 수수하게, 때로는 100분 토론처럼 진지하고 격렬하게 인사를 건네고 삶에 대한 애기를 나눈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음식처럼 다양한 맛을 낸다. 어느 대화는  달콤하고, 어느 대화는 씁쓸하고 또 어떤 이는 담백하다. 그리고 어느 대화는 길게 여운을 남기는 뒷맛을 지녔다.

 



오늘은 된장에 묻힌 봄나물을 투박하지만 예쁜 분청사기에 담아놓은 듯 한 맛을 내는 안 장로님 애기를 해주고 싶다. 올해 나이 84세, 네 딸의 아버지요 홀로되신지 40년이 지났다. 6.25전쟁 때 북쪽에서 피난 내려오셔서 화성에 살게 되셨는데 가진 것 하나 없어 남의 집 머슴부터 온갖 일을 하셨단다. 배운 것 이라곤 땅을 일구는 것뿐이어서 젊어서부터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그렇게 한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셨다. 10년 세월 오며가며 전해들은 애기로 가늠해 짐작컨대 이분 또한 실로 어머 어마한 인생을 살아내신 듯 보인다. 

줄줄이 어린 딸들을 두고 아내가 죽자 어린 딸들과 젖먹이 갓난아이까지 혼자 키울 수가 없어서 막내는 입양을 보냈고, 남은 4명의 딸들을 키우다 보니 그 세월이 하루처럼 가버렸단다.

 

사진/김승범


막내딸 정분씨는 아직 미혼으로 아버지와 살고 있는데 몇 해 전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1년에 1-2번씩 가까운 곳으로 해외여행을 간다. 처음엔 싫다 하시던 장로님이 아이처럼 들뜬 모습으로 들려주시는 여행담은 글 좀 쓰는 여행 작가의 베스트셀러 못지않은  재미가 있다.

“내가 말야, 이번에 대만에 다녀왔거든. 근데 거기 바닷가에 요상스런 돌밭이 있는데 구멍이 숭숭 뚫린 돌들이 버섯맹키 생긴것도 있고, 여자얼굴 같은 것도 있고... 근데 고것들이 사람이 맨든게 아니리 바람이 그랬다드만. 대만 바람은 기술도 좋아.  같이 간 사람들이 자꾸 노래를 하라고 해서 내가 또 버스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갔어. 한곡만 할라 했는데 박수를 자꾸 쳐가지고 내가 또 불렀지. 온천을 갔는데 말야 늙은 살가죽도 온천물로 씻으니 보들보들 헌 것이 아적 쓸만허데. ” 


화성 노인의 지구별 여행기는 자꾸 웃음이 난다. 

장로님은 고추농사를 전문으로 하신다. 2월이 되면 비닐하우스에 고추모종을 키워서 내다팔고 1년에 3000-4000개의 고추를 심는다. 이른 봄부터 시작된 고추농사는 10월이 되어야 끝나는데 그 많은 고추를 혼자서 심고 따고 말리고 판매까지 하신다. 나이가 드시면서 조금씩 줄이기는 하셨지만 작년에도 2500개나 심고 거두셨다. 오랫동안 고추농사를 하셨으니 장로님만의 단골고객들이 있어서 그렇게 많이 심고 거두어도 완판을 하신다. 장로님은 가장 좋은 시기에 나온 좋은 고추는 따로 추려서 제일 먼저 교회에 가져가신다. 올해 나이 84세의 노익장은 아직도 동네 최고의 고추농사꾼이다. 

하지만 내가 장로님께 놀라는 것은 노익장의 고추농사 때문만은 아니다. 내게 감동을 주고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은 그분이 내게 수시로 들려주시는 성경구절들과 찬송가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성경구절들을 줄줄이 암송하시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분이 정녕 84세인지 의심스럽다.


일주일동안 암송하고 싶은 성경 한 장을 정해서 일하는 중에... 걷는 중에.. 먹는 중에... 하루 종일 수시로 암송을 한다고 하신다. 장로님은 “주의 말씀이 꿀처럼 달다”고 말씀하시며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암송한 성경구절을 들려주시곤 한다. 

또 장로님이 불러주시는 찬송가는 정말 압권이다. 장로님만의 스타일로 재편곡된 찬송가는 ‘이 찬송가가 내가 알던 그 곡인가?’싶어 새롭고 우습지만, 찬송가를 부르시는 장로님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 미소를 짓게 된다. 


장로님을 볼 때마다 내 안에 떠오르는 예수님의 한마디는 누가복음 18장 16절이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장로님은 오늘도 내게 성경을 암송해주고 찬송가를 불러주시며 말씀하신다. “어디서...누구앞에서 부르든 찬송가를 대충 부르면 못써! 모르면 다시 배우고 다시 연습해서 지대로 정성껏 불러야제.  하나님은 태진아나 송대관이 노래하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께 찬송가를 잘 불러드리는 걸 더 좋아하신단 말여.”라며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맞다! 나 또한 대한민국의 유명한 아이돌이 불러주는 노래보다 내 아이들이 나를 위해서 정성껏 불러주는 한곡의 노래에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시리라.


하나님이 84세의 안 장로님과 44세의 이정숙을  함께 보고 계신다면 누구를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실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나는 장로님보다 40살이나 젊지만 장로님처럼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래서 장로님의 그 마음과 그 표정이 부럽다. 장로님이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그 뜨겁고 순수한 애정 앞에서 나는 매번 기가 죽는다.

오늘도 유리약국엔 사람들이 다녀가고 이야기가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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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다. 얼마전 사별 카페에서 만난 네 분과 함께 사별 이야기를 담은책 <나는 사별하였다>를 출간하였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 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금은 화성에서 작은 시골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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