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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땀방울 한희철의 얘기마을(61) 땀방울 “빨리 빨리 서둘러! 늦으면 큰일 난단 말이야!” 하루 종일 내린 비가 한밤중까지도 계속되자 숲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점점 불어난 물이 겁나게 흘러 산 아래 마을이 위태로워진 것입니다.그칠 줄 모르는 장대비에 마을이 곧 물에 잠길 것만 같습니다. 깨어있던 나무들이 잠든 나무와 풀을 깨웠습니다. “뿌리로부터 가지 끝까지 양껏 물을 빨아들여! 빈틈일랑 남기지 말고.” 나무마다 풀마다 몸 구석구석 물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좀 더 많은 물을 빨아들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숨쉬기초차 어려울 만큼 온몸에 물을 채웠습니다.한밤이 어렵게 갔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개울물 소리가 요란했을 뿐 마을은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아침 햇살은 거짓말처럼 찬란했.. 2020. 8. 21.
이중 잣대 한희철의 애기마을(60) 이중 잣대 어린 딸 소리와 함께 들로 나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곳곳에 들국화가 참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보아주는 이 없어도 여전히 피어나 대지를 수놓는 들꽃의 아름다움, 방에 꽂아둘까 하여 그 중 몇 개를 꺾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빠, 그럼 꽃이 아야야 하잖아!” 눈이 동그래진 소리가 꽃 꺾는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예전에 소리가 교회 주위의 꽃을 꺾을 때, 그렇게 꽃을 꺾으면 꽃이 아파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어린 딸 앞에서 내가 꽃을 꺾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이중 잣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한, 드물긴 하지만 남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한 이.. 2020. 8. 20.
아픔 배인 삶 한희철의 얘기마을(59) 아픔 배인 삶 “이적지 살아온 얘기 전부 역그문 책 서너 권도 넘을 게유. 근데 얘기 할려문 자꾸 자꾸 눈물이 나와. 그래 얘기 못 허지.” 뭉뚝 뭉뚝 더듬어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팔십여 평생, 굽이굽이 아픔 배인 삶입니다. 어쩌면 그리도 삶은 할머니 한 평생의 삶을 눈물과 한숨으로 물들였는지. 진득한 기쁨으로부턴 늘 그만한 거리로 격리돼 온 백발의 삶이 아립니다. “그래도 할머닌 밝게 사시잖아요?”“속상한 일 있을 적마다 꿀꺽 꿀꺽 삼켜 썩혔지. 이적지 남 미워하지 않구 살았어.” 삶이 얼마나 단순한 것이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덤덤한 이야기 끝 끝내 소매로 눈물 훔치는 할머니를 통해 배웁니다. - (1990년) 2020. 8. 19.
늙은 농부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58) 늙은 농부의 기도 나의 몸은 늙고 지쳤습니다. 텅 빈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서너 번 서리 맞은 호박덩이 마냥어디 하나 쓰일 데 없는 천덕꾸러기입니다. 후둑후둑 벗겨내는 산 다랑이 폐비닐처럼 툭툭 생각은 끊기고 이느니 마른 먼지뿐입니다. 이제 겨울입니다. 바람은 차고 몸은 무겁습니다. 오늘도 늙고 지친 몸으로 예배당을 찾는 건까막눈 상관없는 성경책 옆구리에 끼고 예배당을 찾는 건그나마 빈자리 하나라도 채워 젊은 목사양반 허전함을 덜려는 마음 궁리도 있거니와볼품없는 몸으로 예배당을 찾는 건거친 두 손 모아 남은 눈물 드리는 건 아무도 읍기 때문입니다. 내 맘 아는 이 내 맘 아뢸 이아무도 읍습니다. 하나님 아부지. 여기엔 아무도 읍습니다. - (1992년) 2020. 8. 18.
은하수와 이밥 한희철의 얘기마을(57) 은하수와 이밥 서너 뼘 하늘이 높아졌습니다. 밤엔 별들도 덩달아 높게 뜨고, 이슬 받아 세수한 것인지 높아진 별들이 맑기만 합니다. 초저녁 잠시뿐 초승달 일찍 기우는 요즘, 하늘엔 온통 별들의 아우성입니다. 은빛 물결 이루며 강물 흐르듯 밤하늘 한 복판으로 은하수가 흐릅니다. 제각각 떨어져 있는 별들이 다른 별에게로 갈 땐 그 길을 걸어가지 싶습니다. 옛 어른들은 은하수를 보며 그랬답니다. 가만히 누워 은하수가 입에 닿아야 이밥(쌀밥) 먹을 수 있는 거라고. 교우들을 통해 들은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은하수를 보며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즉 햅쌀을 먹을 ‘때’에 대한 가르침일 수도 있고, 은하수 흐드러질 만큼 맑은 날씨, 그래야 한낮엔 뜨거운 볕에 벼가 익어갈 .. 2020. 8. 17.
영원의 의미 한희철의 얘기마을(56) 영원의 의미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 날 마주하는 두 개의 문자가 있습니다.알파(Α) 와 오메가(Ω), 처음과 나중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늘 그 사이에 앉게 됩니다.처음과 나중 그 사이의 어느 한 점.내 삶의 시간이란 결국 그뿐이며 그것이 내겐 영원입니다. - (1990년) 2020. 8. 16.
해가 서산을 넘으면 한희철의 얘기마을(55) 해가 서산을 넘으면 해가 서산을 넘으면 이내 땅거미가 깔립니다. 기우는 하루해가 갈수록 짧습니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 예배당 십자가에 불을 밝힙니다. 털털거리는 경운기에 하루의 피곤을 싣고 어둠 밟고 돌아오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따뜻한 기운으로 그들을 맞고 싶기 때문입니다. 떠나가고 없는 식구들 웃음처럼, 따뜻한 불빛처럼, 땀 밴 하루의 수고를 맞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매일 저녁, 해가 서산을 넘으면 깔려드는 땅거미를 따라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불을 밝힙니다. - (1990년) 2020. 8. 15.
물빛 눈매 한희철의 얘기마을(54) 물빛 눈매 5살 때 만주로 떠났다 52년 만에 고국을 찾은 분을 만났다. 약간의 어투뿐 조금의 어색함이나 이질감도 안 느껴지는 의사소통, 떨어져 있는 이들이 더욱 소중히 지켜온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놀라웠다. 헤어질 때 7살이었던, 지금 영월에 살고 있는 형님 만날 기대에 그분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강산이 변해도 수없이 변했을 50년 세월. 그래도 그분은 52년 전, 5살이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동굴 있는 곳에 가서 제(제사)를 드리던 일과, 강냉이 밭 산짐승 쫓느라 밤마다 형하고 빈 깡통 두들기던 일, 두 가지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했다. 50년 넘게 이국땅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며 외롭고 힘들 때마다 빛바랜 사진 꺼내들 듯 되살리곤 했을 어릴 적 기억 두 가지... 2020. 8. 14.
살아도 안 산 한희철의 얘기마을(53) 살아도 안 산 “그냥 살다 죽지 이제 살리긴 뭘 살려, 세금만 더 낼 텐데.” 치화 씨 어머니는 호적이 없습니다. 십여 년 전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치화 씨 어머니도 부산 어디 수용소에 갇히는 등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인데 그러는 사이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호적 이야기가 나왔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까짓것 그냥 살다 죽지 뭘 하러 죽은 호적을 살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십년 넘어 만에 아들 치화 씨를 만나 기구한 삶 오늘에 이어오지만 그렇게 살아도 이 세상 안 산 걸로 돼 있는 치화 씨 어머니. 언제 한 번 생이 따뜻이 그를 맞아줘 살 듯 산 적 있었겠냐만, 살아도 안 산,.. 2020.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