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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다친 손 한희철의 얘기마을(79) 다친 손 지난 봄철 홍역으로 시작된 규성이의 병치레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쁜 일철, 논둑 밭둑에서 잠들어야 했던 어린 규성이가 막 홍역이 끝나자 이번엔 손을 덴 것입니다. 뜨거운 김이 하얗게 오르는 밥솥에 엉금엉금 기어가 손을 얹고 만 것입니다. 겨우 걸음마를 배워 밥솥 잡고 일어설 나이, 뜨겁다고 이내 손을 떼지 못한 것인데 그러느라 손을 제법 데고 말았습니다. 좋지도 못한 교통 사정, 규성이 엄마가 서너 달 혼났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병원을 다니며 다 나았다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다친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웅크리고 펴지지 않는 손, 손이 아물며 안으로 오그라든 것입니다. 처음엔 엉덩이 살을 떼어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는 등 엄두가 안 나는 이야기라 낙심천만이.. 2020. 9. 9.
규성이 엄마 한희철의 얘기마을(78) 규성이 엄마 작실에서 내려오는 첫차 버스에 규성이가 탔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 규성이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감기가 심해 원주 병원에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엊그제 들에 나가 고추며 참깨를 심었는데, 점심을 들에서 했다고 합니다. 솥을 돌 위에 걸고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인 것이지요. 먼 들판까지 점심을 이어 나르기 힘든 것도 이유였겠지만, 시어머니며 남편이며 몇 명의 품꾼이며, 어쩜 일하시는 분들께 따뜻한 점심을 차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새댁인 규성이 엄마가 점심을 차리는 동안 어린 규성이는 밭둑 위에서 혼자 버둥거리며 누워 있어야 했는데 흐리고 찬 날씨, 감기가 되게 걸린 것입니다. 어린 규성이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어린 .. 2020. 9. 8.
그리운 햇살 한희철의 얘기마을(77) 그리운 햇살 가물어 물을 대던 기다란 호스가 곳곳에 그대로인데 이번엔 물난리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 삽을 들고 물꼬 트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비도 좀 어지간히 와야지. 밤새 빗소리에 한잠도 못 잤어.” 간밤에 잠을 못 이룬 건 투정하듯 말하고 있는 한 사람만이 아니다. 김영옥 집사님 네 강가 밭은 또 물에 잠겼다. 뽑을 때가 다 됐던 당근이 그대로 물에 잠기고 말았다. 드넓은 강가 밭의 대부분은 당근, 당근을 팔 때가 되었는데 다시 물난리다. 하루가 다르게 굵어가던 당근이 빗속에서 짓무른 탓인지 뿌리로부터 썩어 들어오는 것이다. 미리 선금을 주고 이 밭 저 밭 밭떼기로 산 사람은 아예 앓아누웠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팔았으니 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2020. 9. 7.
치악산 오르기 한희철의 얘기마을(76) 치악산 오르기 치악산에 올랐다가 탈진해서 내려왔다. 아무려면 어떠랴 했던 건강에 대한 과신이 문제였다. 아침 점심 모두 거른 빈속으로 치악은 무리였다. 그럭저럭 물도 떠 마시며 올라갈 땐 몰랐는데, 내려오는 길에 몸이 풀어지고 말았다. 같이 올라간 김기석 형과 손인화 아우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민망했다. 기대한 대로 마음이 텅 비기는커녕, 빈속엔 밥 생각이 가득했다. 그나마 형이 들려주는 신선한 이야기가 흐느적대는 몸을 지탱해 주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의 어리석음과, 도전할 만한 정상을 스스로 포기한 채 살아가는 내 삶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달은 하루였다. - (1991년) 2020. 9. 6.
“뭘 해도 농사보다야 못하겠어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5) “뭘 해도 농사보다야 못하겠어요?” 버스에서 정용하 씨를 만났다.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있었다. 용하 씨는 요즘 문막농공단지에 취직을 하여 다니고 있다. 기골이 장대한, 30대 중반이긴 하지만 작실마을에선 힘쓸만한 몇 안 되는 젊은이였는데 농사를 그만두고 얼마 전에 취직을 했다. “힘들지 않아요?” 버스에서 내려 같이 들어오며 용하 씨에게 물었다. “할만 해요. 근데 딴 건 다 괜찮은데 배고파서 힘들어요. 새참 먹던 버릇이 있어 그런가 봐요.” 웃으면 두 눈이 감기는 그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흙 일궈 삼십년 넘게 살아온 사람이 공장에 나가 쇠를 깎는다는 게 어찌 할 만 한 일이겠는가. 어머니 가슴 같은 흙 일구던 손으로 쇳조각을 깎아대니, 어찌 .. 2020. 9. 5.
어느 수요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4) 어느 수요일 광철 씨가 아프단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폐가처럼 썰렁한 언덕배기 집, 이미 집으로 오르는 길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잡풀이 수북이 자라 올랐고, 장마 물길에 패인 것이 그대로라 따로 길이 없었습니다. 흙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좁다란 방에 광철 씨가 누워있었습니다. 찾아온 목사를 보고 비척 흔들리며 힘들게 일어났습니다. 가뜩이나 마른 사람이 더욱 야위었습니다. 퀭한 두 눈이 쑥 들어간 채였습니다. 이젠 학교에 안 가는 봉철이, 아버지 박종구 씨, 광철 씨, 좁다란 방에 둘러 앉아 함께 두 손을 모았습니다. 빨리 낫게 해 달라 기도하지만, 내 기도가 얼마나 무력한 기도인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며칠의 몸살보다는 몸살이 있기까지의 어처구니없는 삶이 더 크기 때.. 2020. 9. 4.
더딘 출발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3) 더딘 출발 요 며칠 동안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사택에 들러 숙제를 했다. 섬뜰의 승호, 종순이, 솔미에 사는 지혜 등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었다. 그들로선 하기 힘든 숙제였다. ‘화장실에 가서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면 ‘줄을 섭니다.’ 하고 답하는 문제는 단순하고 쉬운 것이었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아직 글을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데 있었다. 아이들은 문제가 무얼 요구하는지 읽질 못했다. 아내가 문제를 읽어주면 그제야 아이들은 대답을 한다. 그러나 대답한 내용을 쓰질 못한다. 아내가 써 주면 그걸 보고서야 그리듯 답을 쓰는 것이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 한글은 물론 덧셈, 뺄셈, 피아노 심지어는 영어까지도 미리 배워 학교에 들어가서는 다 아.. 2020. 9. 3.
고르지 못한 삶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2) 고르지 못한 삶 “날씨가 고르지 못해서 힘들지요?” 수요 저녁예배 성도의 교제시간, 피곤이 가득한 교우들께 그렇게 인사했을 때 김영옥 집사님이 대답을 했다. “날이 추워 걱정이에유. 담배가 많이 얼었어유.” 잎담배를 모종하고서는 비닐로 씌웠는데도 비닐에 닿은 부분이 많이 얼었다는 것이었다. 날이 추우면 얼어 죽고, 비가 안 오면 말라죽고, 많이 오면 잠겨 죽고, 그나마 키운 건 헐값 되기 일쑤고. 고르지 못한 일기.고르지 못한 삶. - (1991년) 2020. 9. 2.
짧은 여행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1) 짧은 여행 마을에 결혼을 하는 이가 있어 모처럼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좋은 날, 아침부터 찬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고생고생 키운 딸을 보내는 어머니의 기쁨과 보람, 그 뒤에 깔린 아쉬움을 보았습니다. 신명나는 춤을 췄지만 춤사위에 담긴 마음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서점에 들렀습니다. 모처럼 찾은 서울, 잠깐이라도 내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찾아간 종로서적엔 책도 많고 사람도 많습니다. 2층 한 쪽 구석에 나란히 쌓인 책도 보았습니다. 내가 쓴 책이 낯선 이를 맞듯 서먹하게 나를 맞았습니다. 이제야 찾아오다니, 내 무관심에 쀼루퉁 화가 난 듯도 싶었습니다. 산책하듯 책과 사람 사이를, 말과 침묵.. 2020.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