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646

아낌만한 것이 없다 아낌만한 것이 없다 이군,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아침입니다. 불기 없는 사무실에 앉아 아침을 맞는 일이 조금씩 힘들어지네요. 하지만 밤과 낮의 경계선이 무너지며 아침 햇살이 조금씩 비쳐드는 이 시간, 새로운 삶을 살라고 주신 이 복된 순간이 흔감(欣感)할 따름입니다. 주위가 참 고요합니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정겨운 얼굴들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문득 이군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고많은 얼굴 중에 왜 이군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사람들처럼 목마른 표정으로 나를 찾아오는 이군이 나를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엔 일상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2023. 7. 18.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바보처럼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윤 집사님, 이제쯤엔 귀래에도 여름의 기운이 가득하겠네요. 무더운 한낮에는 사방 뻐꾸기 울음 한가하겠고, 밤꽃 향기 진동하는 밤은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소쩍새 울음으로 지나가겠지요. 산벚꽃 피고 진 산도, 막 땅내를 맡은 논의 모도 온통 초록빛이겠다 싶습니다. 마당 한 구석 우물가에 선 앵두나무에선 올망졸망 앵두가 잘 익었을 테고요. 어디를 둘러봐도 초록빛 세상인데 어디에서 붉은빛을 길어 올린 것인지, 자연의 매 순간은 그저 경이롭고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귀래에서 원주로 넘어가는 양안치 고개에도 녹색의 기운은 넘치기 시작했겠지요. 자작나무에서 돋는 연초록 잎새들의 아우성이 얼마나 눈부실까, 손을 흔들듯 윤기로 반짝이던 작은 손길들이 눈에 선합니다. 여전히 바쁘시지요? 연락을 드릴까 하다가 행여 바쁜 일정.. 2023. 7. 17.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의사 최초이자 하나뿐인 평전 『장기려 평전』은 『한국의학 인물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과 의사 8인 중 한 명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가 과학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여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2018)한 성산 장기려(張起呂, 1911-1995) 평전이다. 정부보다 10년 앞서 의료보험(현 국민건강보험)의 성공적 실시로 가난한 환자를 위해 살다 간 장기려 관련 저서는 2023년 7월 현재 32권(성인 16, 아동 16)이 검색된다. 『장기려 평전』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장기려를 서술했다. 이전의 연구나 전기들이 지나쳤거나 외면했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고, 사안에 따라서 그의 선택이나 결정을 문제 삼았다. 그의 유족, 의사 제자, 그의 이름이나 아호를 앞세운 유관 단체의 일관.. 2023. 7. 14.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 어제 모임을 마친 후 잘 들어가셨는지요? 모처럼의 만남이 참 반가웠습니다. 더 깊은 대화의 자리에 동참하지 못한 것이 영 아쉬웠습니다. 요즘 저를 사로잡고 있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자꾸 설치다 보니 몸에 면역력이 떨어져서인지 컨디션 조절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찬 바람에 연신 옷깃을 여미면서도 젊은 시절을 반추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만났으니 벌써 30년도 더 되었네요. 생각해보면 미숙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참 치열했습니다. 진실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열망과 시대가 빚어내는 우울이 미묘하게 뒤섞여 우리는 비틀거리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사는 모습도 자리도 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같은 중심을 향해.. 2023. 7. 3.
무거운 삶 가볍게 살기 무거운 삶 가볍게 살기 잘 지내고 계시지요? 이제 장마철이 되어서인지 대기가 축축한 게 후텁지근해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몸은 나른해져요. 그럴 때면 밖으로 나가 마당가에 심겨진 여러 식물들과 눈맞춤을 하지요. 요즘은 나리꽃과 백합화가 한창입니다. 키 작은 옥매(玉梅)나무에는 오종종 붉은 열매가 매달려 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포도도 많이 맺혔습니다. 초가을이 되어 보라색으로 익어갈 것을 생각만 해도 흐뭇해집니다. 매실은 따지 않고 두었더니 하나 둘씩 저절로 떨어지더군요. 가을에 알밤을 줍듯 화초 사이에서 매실을 줍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매실을 손에 쥐어보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보고 그 오묘한 빛깔과 모양에 눈길을 주다가 가만히 베어물기도 합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 2023. 6. 27.
사명을 망각한 자의 비운(悲運) 현재 촛불행동 상임대표로 있는 김민웅 목사의 설교 “어리석은 싸움, 진정한 목표”는 이스라엘의 분열이 솔로몬 이후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다윗의 통치기에 이미 그 씨앗이 뿌려진 것을 주목하고 있다. 애초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라는 최고의 사명이 뚜렷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보다는 권력을 관리하고 이를 강화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둔 최고 권력자의 모순을 성서가 폭로하고 있음을 김민웅 목사는 일깨우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의 신화적 예찬에 집중하기 쉬운 해석과는 달리, 그는 이들의 본질적인 실패를 주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예수운동의 진정한 목표를 조명하고 있다. 권력이 진실로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가 택한 본문은 사무엘하 19장 40-43절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 2023. 6. 26.
돈의 전능성을 해체하라 돈의 전능성을 해체하라 독서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까?” 답답해서 던진 질문이겠지만 그 질문 속에 담긴 쓸쓸한 비애를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돈에 포획된 교회의 현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교회를 사고파는 사람들, 목사 선정 과정에서 후임자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지요? ‘저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겠지’ 하는 생각에 쉽게 정죄하지 않으려고 애써 보지만 결국 도리질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익의 원리가 의의 원리 혹은 신앙의 원리를 대체할 때 거룩함은 가뭇없이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부끄러움조차 없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종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부끄러움은 자기 평가적 감정입니다... 2023. 6. 19.
이디오테스(idiotes) 이디오테스(idiotes) 평안하신지요? 가장 빛나는 계절인 봄을 우리는 늘 고통의 기억과 더불어 지내게 됩니다. 접동새 우는 4월에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세월호 참사자들이 떠오르고, 5월이면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넋들을 떠올리게 되고, 6월에는 이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뜬금없이 유치환의 ‘깃발’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아마도 저 광장과 길가에서 나부끼고 있는 노란 리본과 배너 때문일 것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형용 모순의 표현 때문에 어떤 절절한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옵니다. 언제쯤 되면 우리는 이 봄을 한껏 경축할 수 있을까요? 노루처럼, 사슴처럼 .. 2023. 6. 18.
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 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 평안하신지요? 집에서 사무실로 나오다 보니 숙대 뒤뜰에 있는 산딸나무가 희고 정갈한 꽃을 피워냈더군요. 몇 해 전에 고려대학교에 계신 어느 교수님이 네 갈래로 피어나는 꽃잎이 십자가를 닮았다며 교회 마당에 심어보라 일러주던 꽃이기에 반가움이 더 컸습니다. 이집 저집 담장을 흘낏거리며 걸었습니다. 탐스럽게 핀 장미꽃들이 싱그러웠습니다. 문득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했던 릴케가 떠올랐고, 곧 마음속에서 이미 상투어로 변해버린 그 문장을 떨치려고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루 살로메가 떠올랐고, 그 매혹적인 여인을 향한 릴케의 연정이 되짚어졌습니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 2023.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