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삶으로의 초대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당신 옆에 앉을 은총을 구합니다. 지금 하던 일은 뒷날 마치겠습니다. (중략) 지금은 말없이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 조용하며 넘치는 안일 속에서 생명의 헌사를 노래할 시간입니다.”(타고르, <기탄잘리>, 김병익 옮김, 민음사, p.18)

긴장된 시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지뢰밭 위를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합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아도 긴장된 표정이 역력합니다.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보면 불편합니다. 함부로 지적했다가 시비에 휘말릴 것 같아 얼굴만 찌푸리고 재빨리 지나칩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마주 선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 일을 삼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자유는 위험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한 밤중에 등불을 밝혀 들고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분별하지 못하는 당신이 등불을 들고 가는 까닭이 뭐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등불을 밝혀든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이 배려의 마음일 겁니다. 배려는 우리 일상에서 꼭 드러나야 할 사람됨의 드레입니다. 

교회 예배도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갔습니다. 겨우 석 주 대면 예배를 드리고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가자니 속이 쓰렸습니다. 허탈한 느낌도 들었구요. 학교나 유치원, 어린이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난감해 합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비상한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다면 좀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 역시 벼랑 끝에 내몰린듯 위태로운 나날입니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만, 심리적인 압박감 역시 큽니다. 다들 어떻게들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친밀한 이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긴장도 좀 풀어지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도 좀 덜어지련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 무더위 한복판을 통과하며 겨울을 떠올리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가끔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칼바람을 피하며 겨울을 견디는 로제트 식물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민들레, 질경이, 냉이, 꽃다지, 달맞이꽃, 개망초 등이 여기에 속한다지요? 로제트 식물은 아니지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잘 자란다는 인동덩굴도 떠오릅니다. 가끔은 식물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곧잘 비애에 빠지는 것은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만, 고통은 피하려고 할수록 고통의 장악력은 점점 커집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인생은 본디 고달픈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가지런하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을 풀어야 할 과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살아내야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향이 분명하다면 명백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순간순간 성실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한 걸음만 나아가도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먼 미래를 그려볼 것 없이 지금 당장 절실한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박지성은 세계적인 축구 선수였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도 슬럼프로 위기를 겪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플레이가 좋지 않으니 홈 관중들도 그가 공을 잡기만 하면 야유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들어가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공을 받고 그 공을 다시 동료에게 패스하는 것은 축구 선수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는 패스를 연결시킬 때마다 자기 스스로를 칭찬했다고 말했습니다. ‘잘했어.’ 어처구니없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런 자기 긍정이야말로 남들의 평가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집중할 수 있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기를 향할 때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로 귀결되고, 타자를 향할 때는 ‘선망’이나 ‘원망’을 낳습니다. 어느 것도 건강한 감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루 중에 몇 번이라도 자기 마음을 살피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을 살피노라면 별 것도 아닌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자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들어보셨지요?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런저런 말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 오롯이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이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금방 다른 생각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맙니다. 그것을 일러 분심이라 합니다. 나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떠돌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다시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기도에 몰입하기 전에 단어 하나를 선택하고, 분심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 단어를 조용히 떠올림으로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평화, 자유, 하나님, 고요…’ 등 어떤 단어라도 괜찮습니다. 그 단어를 일러 ‘거룩한 단어’(sacred word)라 합니다. 흙탕물을 가만히 놔두면 흙이 가라앉듯 우리 마음도 고요함 속에 머물 때 가지런해집니다. 마음이 가지런해졌다는 말은 단순함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닐까요?

 

 



화가인 장욱진 선생은 ‘나는 심플하다’라는 말이 자신의 단골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속뜻은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입니다. 그 마음을 찾으려 했기에 그의 그림이 순박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들뜨고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리라는 중심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질문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진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단순함과 정직함을 실천합니까?” “함께 예배드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조화를 잘 나누고 있습니까?”(로버트 L. 스미스, <퀘이커 지혜의 책>, 박기환 옮김, 사월의 책, p.67) 질문은 우리를 성찰로 이끕니다. 스스로 묻지 않을 때 삶은 더러워집니다. 단순함을 실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세상 안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욕구, 최상의 상태로 나아가려는 욕구를 좇을 자유를 허락하는 것을 말합니다.”(로버트 L. 스미스, 같은 책, p.88)

삶은 복잡하고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욕망의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삶은 늘 뿌리가 없기에 늘 흔들리고, 중심이 없기에 늘 고단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욕구야말로 단순한 삶의 요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박이약지(博而約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폭넓게 섭렵하되 하나의 초점에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빌 3:8b-9a)

이런 목표가 있었기에 바울은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팬데믹 상황은 부산하기만 한 우리 삶을 단순하게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님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산타 치아라 채플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 가운데 하나는 프란체스코 성인과 그의 형제들이 읽던 성무 일과서입니다. 그 책의 앞 페이지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평생의 동료였던 레오 수사가 적어놓은 글이 있습니다.

“복되신 프란체스코는 그의 동료인 안젤로 형제, 레오 형제를 위해 이 성무 일과서(breviary)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늘 이 성무 일과서를 가지고 수도 규칙에 따라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병 때문에 성무일도(聖務日禱 *시편, 찬송, 기도, 낭독으로 구성되어 하루에 여러 번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수도자들의 공동 기도)를 드리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분은 누군가 낭독하는 음성이라도 들으려고 하셨습니다. 일평생 동안 그는 그 직무에 신실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복음서 사본도 가지고 계셨는데 병이나 다른 사유로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면 누군가 그날의 복음서 말씀을 낭독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죽는 날까지 그 신실함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부님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면 나는 예배 중에 늘 그러했던 것처럼 기도 중에 내 영혼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경배하곤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 사부께서는 복음서의 말씀을 읽거나 경청하고 나면 늘 주님에 대한 존숭의 표시로 그 성경에 입을 맞추셨습니다.(하략)”(Theophile Desbonnets, , Porziuncola, p.103)

이런 태도와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그리스도 이후에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분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저 자신도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힘겨운 나날입니다. 며칠 후부터는 한반도가 열섬에 갇힐 거라는 보도도 접했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때야말로 우리 믿는 이들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야 할 때입니다. 주변에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허위단심으로 올라간 산마루에서 만나는 서늘한 바람이 지친 몸과 마음을 소생시키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시원한 바람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주님이 주는 평안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7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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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못한 지게



지게를 지고 논두렁길을 걸어오는 사람, 작은 키에 독특한 걸음, 아직 거리는 멀지만 그분이 신집사님임을 안다. 당신 키보다 높은 나무를 한 짐 졌다. 좁다란 논둑길을 걷는 걸음새가 영 불안하다. “집사님!” 땅만 쳐다보고 오던 집사님이 깜짝 놀라 섰다. 이마에 알알이 땀이 맺혔다. 장갑도 없이 꺼칠한 손. “힘드시죠?” 뻔한 질문이 송구하다. 많은 말은 필요 없다. 겉치레도 그렇다. 다시 웃고 마는 집사님. “제가 한번 져 볼게요.” “안 돼요! 전도사님.” 


집사님은 놀라 막는다. 조금만 져 보겠다고 몇 번을 얘기한 끝에 지게 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을 수 있었다. 지게에 등을 대고 두 팔을 집어넣어 어깨띠를 양쪽 어깨에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깨끈이 어깨에 걸리질 않는다. 주르륵 팔뚝으로 내려와 엉성한 모양으로 걸릴 뿐이다. 오랫동안 지게를 안 져서 그런 거겠지 싶어 바싹 당겨 앉으며 다시 한 번 져 본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집사님이 깔깔 웃는다. 알고 보니 그 지게는 집사님의 작은 체구에 맞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게도 여느 지게보다 작았고, 어깨끈 역시 짧은 것이었다. 덩치가 큰 내게 맞을 리가 없었다.


아직 어린, 초등학교에 다니는 병관이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집사님. 남편은 오랜 병치레 끝에 지난 해 세상을 떠났고, 다 큰 자식들은 소식이 안 닿는다. 자식 약속 믿고 줄줄 비가 새는 초가지붕을 스레트로 갈았는데, 곧 갚아준다기에 그 말 믿고 빚 얻어 하긴 했는데, 세상에, 소식이 끊겨 버리다니. 빗 독촉에 못 이겨 아들 있는 서울 올라가니 셋방 집에도, 다니던 공장에도 아들은 없고 또 어디로 옮겼는지도 모른단다. 말 안 하고 옮겼단다. 모두 털어 갚고 나니 남은 게 십팔만 원. 하루 품값이 사천 원. 없는 살림에 십팔만 원은 왜 그리 큰지. 어려울 때, 지독히 어려울 때 왜 가깝던 사람들은 멀어지는 것인지. 많은 이들의 외면 속에 정말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지게를 지겠노라는 전도사의 빈말을 뒤로 하고 다시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집사님, 문득 지게가 더욱 무겁게 보인다.

‘집사님, 사람에겐 저마다의 짐이 있나 봅니다. 다른 사람이 져 줄 수 없는, 자신만이 질 수 있는 고통이 있나 봅니다. 내가 얼마나 작아져야 당신 고통의 자리, 그 자리에 닿을 수 있는 것인지, 집사님, 오늘지지 못한 당신의 지게를 두고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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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

 



두 다리를 포갠 
꽃잎의 평화

허리를 세운 
나무의 고요

하늘을
머리에 인

고독이라는
가장 커다란 방을 채우는

침묵이라는
가장 커다란 울림

멈춤의 흙그릇에 
머무는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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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걷는 게



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바닷가 갯벌에 사는 흔한 게 중의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도 생각지 않은 것을 혼자 생각하면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우린 왜 옆으로 걸을까. 앞으로 걸을 순 없는 걸까?’

 

그는 앞으로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옆으로 아니라 앞으로야.’


맘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을 했습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여 마신 후 조심스레 발을 뻗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떨렸습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참고 다른 한 발을 마저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발은 옆으로 가 있었습니다. 처음이니까 그렇겠지 하며 다시 한 번 해 보았습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생각뿐 발은 옆으로 갔습니다. 몇 번을 더 해보았지만 때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옆으로 갈 뿐이었습니다. 무리하게 힘을 써서인지 뼈마디가 쑤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다른 게들이 그를 놀렸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연습하려 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바람도 갈매기도 알았으니까요. 바보같이 이상한 모습으로 뒤뚱거리는 그를 깔깔 웃어대며 둘러싸기도 했고, 괜히 혼자 잘난 체 한다며 비웃기도 했습니다. 나이 많은 게들은 그를 나무랐습니다. 옆으로 걷는 것이 게의 올바른 걸음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걸으려는 건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며 되바라진 것이라며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볕을 피해 모두들 자기 집으로 들어간 한낮, 그는 갯벌에 혼자 남아 연습을 했습니다. 때론 모두가 잠든 밤 혼자 깨어 일어나 밤하늘별을 벗 삼아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 눈을 집 밖으로 내밀고 구경하던 것도 한 때. 이젠 모두들 무관심해지고 말았습니다.

짧지도 쉽지도 않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마침내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앞으로 걷게 된 것입니다. 모양이 어색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는 분명 앞으로 걸었습니다. 처음엔 한발씩 앞으로 내디딘 후 몸뚱이를 힘들게 끌어 당겼지만, 이내 익숙해져 두 발을 쑥 앞으로 내밀곤 내딛은 두 발에 힘을 주어 몸을 가볍게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놀라지 않은 게들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을 그가 마침내 해내고만 것입니다. 언제 놀림 받았느냐 싶게 그는 갯벌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모든 게들이 한결같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활동의 폭을 넓혔노라고 나이 많은 게들도 칭찬했습니다. 그의 주위엔 많은 게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앞으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많은 게들이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동안의 수고도 달래주며 앞으로 걷게 된 장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옆으로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뿐. 앞으로 걸어서는 다른 게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낮에는 그럭저럭 다른 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그는 혼자 자기 집에 들어가 홀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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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강병규 화가의 돌그림)




숲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산새 소리에 새벽잠을 깨우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집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내려앉는 집

월든 숲속 소로의 오두막
법정 스님의 오두막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
초의 선사의 일지암

다산 초당
초가집과 막사발과 박꽃

그곳에서 
나뭇가지 줏어 모아

불을 때서 밥 해먹고
입던 옷 기워 입고

침묵으로 밭을 일궈
진리의 씨앗 한 알 품고서

없는 듯 있는 
바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오두막에서 맞이하는 저녁

그 이상을 꿈꾸어 본 적 없이
어른이 되었는데

지금 내 둘레엔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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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총까무리



아프기 잘하는 박종석 성도가 또 감기에 걸렸다. 해수병이라 말하는, 늘 바튼 기침을 하는 터에 감기가 걸렸으니 연신 된 기침이다. ‘크렁크렁’ 속에서부터 나오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다.


지난번처럼 또 혼자 누워 계셨다. 좁다란 방안 가득 산수유를 말리며 아랫목에 좁다랗게 누워 계셨다. 기도하고 마주 잡은 꺼칠한 손, 놀랍게도 그분의 엄지손톱은 V자 모양으로 움푹 패여 있었다.


산수유 씨 빼느라 손톱이 닳은 것이다. 새총 까무리, 깊게 패인 손톱을 보며 떠오른 건 어릴 적 새총까무리였다. 아기 기저귀 할 때 쓰던 노란 고무줄을 양쪽으로 묶어 만든 새총.

 


힘껏 고무줄을 잡아 당겨도 나무가 휘거나 부러지지 않아야 되는 Y자 모양의 튼튼한 나뭇가지를 우리는 새총 까무리라 불렀다. 새총 감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늘 그런 식인지도 모른다. 바튼 된 기침, 움푹 패인 손톱을 보면서도 어릴 적 새총을 떠올리는, 아픈 현실을 두고 낭만기를 키우는, 이곳에서의 내 삶의 방식은 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오는 길, 머릿속에 떠오른 건 움푹 팬 손톱보다도, 불에 그슬린 어릴 적 새총까무리였으니까. 젠장!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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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습



그 분은 늘 그곳에 있었습니다. 원주 A도로와 B도로 사이 중앙시장 골목, 해가 한 중간에 떠올라야 잠시 햇빛이 건물사이로 비집듯 비취는 곳입니다. 몇 가지 과일을 상자에 담아 펼쳐 놓고 장사를 하는, 주름이 많은 아주머니입니다.


가끔 나는 그곳을 지나게 되는데 골목을 지날 때마다 멈칫 발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아주머니는 과일을 팔고 있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다른 모습입니다. 조그만 좌판 위 그분은 정갈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읽곤 했습니다.


낡은 성경책입니다. 표면의 붉은색이 허옇게 변해버린, 아주 낡은 성경책이었습니다. 읽던 곳 바람이 덮지 못하도록 성경 귀퉁이엔 빨래집개를 꽂아 두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오가는 사람들 마다하지 않고 틈틈이 성경을 읽는 그분의 모습은 내겐 성스러움입니다.


제단 위 제복 입고 성경 든 사제보다도 내겐 더 거룩한 모습입니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선 저만치 그분을 봅니다. 생의 거룩한 자리에 무릎 꿇은, 한 거룩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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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개통



작실까지 들어오는 버스가 드디어 개통됐다. 선거 때마다 들어온다 했다가 선거 끝나면 조용했던, 그때마다 길을 닦았던 온 마을사람들의 수고가 헛수고가 됐던 버스가 지난 6월10일 개통을 한 것이다.

이번에 한 번 더 속아보자 하며 개통식을 준비했던 작실 주민들에겐 정말 버스가 들어오고, 테이프를 끊고, 고사를 지내고 하는 것이 여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듯싶었다.

작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신작로에서 윗작실까진 걸어서 30분 내지 40분 거리, 누구보다도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버스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몇몇 기관장들의 축사를 듣고, 박수를 치고, 떡과 돼지머리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고, 돌아가며 절을 하고, 버스에 술을 붓고, 푸짐히 차린 점심을 나눠먹는 모습을 보았다.

버스가 들어옴으로 마을에 퍼진 생기. 외진 구석까지 버스가 들어오고,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고, 그럼으로 사람이 찾는 동네가 되었으면. 

점심을 먹고 행사를 위해 들어왔던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길 문득 마음이 쓰리다. 오늘이 6월 10일, 남쪽 학생들이 북쪽 학생을 만나러 판문점에 간다는 날이다. 세월 따라 이곳 외진 마을 작실까지 버스가 들어오고 마을엔 생기가 가득한데, 잘린 조국의 허리엔 언제나 새로운 길이 뚫려 차가 오가며 사람이 서로 오고가 생기가 가득할까. 문득 그런 마음이 들어.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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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세 번의 평화

 


진입로로 끼어드는 찰라
측방 거울을 스친다

속도를 늦추는 차가 보이면
얼른 진입을 한 후 삼 세 번

비상등으로 뒷차에게 보내는 신호
속도를 늦추어줘서 고맙다는 뜻

그러면 신기하게도 뒷차는 알아들었다는 듯 
우리는 사이좋게 달린다

그리고 가끔은 횡단보도 중간에서
보행 신호등을 놓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때도 비상등으로 삼 세 번
이 순간 도로가 멈추고 뒷차가 고요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걸음 속도에
삼 세 번이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러면 또 삼 세 번
또 삼 세 번
삼 세 번

한 점이 되어 숨을 고르면
인도에 올라서서 평화의 숨을 고르신다

하늘 땅 사람
가슴에는 늘 삼 세 번의 숨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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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되어



“참으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이십니다.”(사 25:4)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소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전례를 중시하는 교회는 지난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켰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탈출공동체가 땅에 파종하여 거둔 첫 번째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여름에 수확하는 곡물이 보리라 하여 맥추절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래저래 7월은 농부들에게 분주하고 힘든 달입니다. 보리, 밀, 귀리를 베어내고, 가을 농사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 때의 풍경을 이렇게 그립니다. “大雨도 時行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머구리(참개구리) 소리로다.”

남부 지방에는 벌써 큰 비가 내려 많은 피해가 났다고 합니다.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볼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서울에도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화단을 관리하는 권사님은 아끼는 백합꽃이 세찬 비에 스러질까봐 지지대에 우산을 묶어 꽃 위에 씌워 주었습니다. 우산을 쓰고 있는 백합화를 보며 저는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최영철 시인의 ‘우짜노’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어, 비 오네/자꾸 비 오면/꽃들은 우째 숨쉬노/젖은 눈 말리지 못해/퉁퉁 부어오른 잎/자꾸 천둥 번개 치면/새들은 우째 날겠노/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흥건히 고인 흙탕물/몸 간지러운 햇빛/우째 기지개 펴겠노/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우째 먼길 가겠노”

시인의 오지랖이 넓습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꽃과 잎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새들이 젖은 깃으로 날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흙탕물을 슬쩍슬쩍 어루만지던 햇빛이 기지개를 펼 수 있을지 걱정하고, 먼 길 가야 하는 바람까지 염려합니다. 시인 반칠환은 이 시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세상사람 모두가 저런 ‘우짜노’를 연발했으면 좋겠다. 창문 밖 장맛비를 내다보며 정치인이, 군인이, 장사꾼이, 도둑놈이, 시인이 모두 손을 놓고 꽃잎 걱정, 풀잎에 매달려 빗방울 뭇매를 맞을 왕아치, 풀무치, 때까사리, 소금쟁이 걱정을 하다가 제가 정치인인지 사기꾼인지 도둑놈인지 시인인지 몰라 잠시 멍청해지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전쟁광이 좀 손해보고, 무기상이 셈하다 갸우뚱하고, 도둑놈 장물 수입이 줄고, 히히- 시인은 시 한 편 더 건지는 그런 시간이 많이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반칠환, ‘이 아침에 만나는 시’, 동아일보, 2003/08/22 자)

이악스러운 마음들이 빚어내는 살풍경 속에 살다보니 이 마음이 더 없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가끔 산책길에서 만나는 민달팽이나 지렁이를 풀 속으로 슬쩍 던져주는 것도 이 시가 떠올라서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산을 쓴 백합화 이야기의 후일담입니다. 하룻밤 지나고 나자 우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느 취객이 우산이 필요했던지 화단의 꽃을 밟으며 기어코 그 우산을 뽑아 가져갔던 것입니다. 몇 해 전에는 활짝 핀 해바라기를 댕강 꺾어간 분도 있습니다. 화단에 심긴 화초를 뽑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사소해 보이는 그런 도둑질이 밉게 여겨집니다. 염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은 선의를 품고 사는 이들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만듭니다. 영혼의 빈곤은 물질의 빈곤보다 심각합니다. 물질의 빈곤은 채울 수 있지만 영혼의 빈곤은 치유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낙심하거나 세상을 어둡게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은 좋은 마음으로 사는 이들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에 띄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있음 그 자체로 우리 삶이 허무의 벼랑으로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이들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정적 기억일 수도 있지만 긍정적 기억일 때도 많습니다. 탄식시편의 시인들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세태에 멀미를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워 있어 보니, 그들의 이는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도 같았습니다.”(시 57:4)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 그의 입은 엉긴 젖보다 더 부드러우나, 그의 마음은 다툼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 55:13, 21)

이 시편 기자들의 마음을 실감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이 절로 쏟아져 나올 때 우리 영혼은 황무지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자기들의 그런 마음을 속에 쌓아두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 정직하게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 순간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던 무거움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중첩된 어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비쳐듭니다. 그 빛은 기억을 통해 다가옵니다. 생의 고빗길에 처할 때마다,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허둥거릴 때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힘이 되어주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떠올리는 순간 비애는 줄어들고,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설 힘이 스며듭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계 1:8)께 소망을 둔 사람은 생의 시련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시련에 압도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런 근원적인 희망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화요일에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부산 YWCA 창립 75주년 감사예배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에 부산 인문학 아카데미 회원들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부산이 아주 먼 곳처럼 여겨졌지만 고속열차가 생긴 이후에는 그 거리가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기차에서 읽으려고 제가 선택한 책은 통일 부총리와 교육 부총리를 역임하셨던 사회학자 한완상 박사님의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였습니다. 책 제목이 이사야의 비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다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가는 기차 안에서 그 책을 다 읽은 후 든 생각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던 지식인인 그는 자신의 사상의 근저에 기독교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세상을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꾸려는 열망을 그의 속에 심어준 것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도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에 이르는 역사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육 부총리 시절에 그는 교육이 비정하고 잔인한 승자만을 축복해 주는 기능으로 전락한다면 짐승의 세상보다 못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짐승은 배가 부르면 맛있는 사슴이 지나가도 잡아먹지 않지만, 인간 정글의 강자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계속 약자들을 착취하고 약탈하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욕구는 생물학적으로 자동 조절되지만 인간의 탐욕은 그렇게 조절되기 힘듭니다. 가질수록 더 가지려하기 때문입니다.”(한완상,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후마니타스, 2017, p.302)

한완상 박사님은 진정한 평화의 세상은 갑이 을의 입장에서 상황을 생각하고 해석하는 단계인 역지사지(易地思之)나, 갑이 을의 가슴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단계인 역지감지(易地感之)를 지나 갑이 을의 주식을 먹으며 자기의 체질을 을의 체질로 바꿀 때 열린다고 말했습니다(한완상, 앞의 책, p.340-341). 사석에서 만났을 때 한 박사님은 그것을 일러 역지식지(易地食之)라 명명한 바 있습니다. 험하고 난폭한 세상이지만 한 번 품은 그런 꿈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 속에도 이런 신앙의 불꽃이 타오르면 좋겠습니다.

7월을 맞이하며 품었던 우리의 기대는 점점 탄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점점 나아져서 곧 일상이 회복될 것 같은 기대를 품었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확진자가 아주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각심이 다소 흐트러진 데다가, 전염력이 강한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활동적인 젊은이들의 감염이 늘고 있는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입니다. 정부와 방역 당국은 수도권 상황이 매우 위급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열었던 예배당 문을 다시 닫아야 할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습니다. 저도 긴장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도 정말 조심스럽게 이 상황을 이겨내시기를 빕니다. 병과 사고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어디에 부딪쳐서 다치고, 넘어져서 골절상을 입고, 뜻밖의 질병이 찾아와 혼란을 느끼는 모든 분들에게,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모두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평화.

2021년 7월 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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