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숨은 하느님



나는 마음을 보며 산다
하늘을 보듯 마음을 본다

눈빛에 깃든 마음을
말투에 깃든 속내를

보이지 않지만 있는
숨은 마음을 보는 일

성경에서 본
'너희는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는 

고려팔만대장경을 두 글자로 함축하면
'마음(心)'이라는 

예수가 끊임없이 가리킨 마음
'마음으로 범한 일은 범한 일이라'는

이처럼 숨은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들은
스러지려는 나를 일으켜 태우는 불꽃이 된다

마음을 보는 일은 
마음을 지키는 일

마음을 지키는 일은
숨을 바라보는 일

하루 온종일 놓치지 않는 숨줄
생의 숨줄을 붙드는 기도

숨을 바라보는 일은 
온전함과 하나되는 일

숨을 바라보는 일은
나의 리듬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순례길

너와 나가 둘이 아님을
서로가 숨으로 하나될 수 있음을 아는 평화

나를 온전하신 그분 안에 머물게 하는 고요
침묵만으로도 충만한 기도

우리의 숨은 하느님
숨은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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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에서 깨달은 자유의 의미



언젠가 원주 자유시장 앞을 지나다 자전거를 탄 청년을 본 적이 있는데, 자전거 뒤엔 리어카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연신 자전거를 빵빵거리며 자동차와 사람 붐비는 시장 길을 빠져 나가느라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청년의 모습은 내게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자전거만이라면 좀 더 쉽게 틈새를 빠져 나갈 수도 있고, 빨리 달릴 수도 있을 터이지만 뒤에 매단 리어카를 잊으면 안 됩니다.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의 기준은 자전거가 아니라 리어카입니다.


자유란 그런 것입니다. 혼자만의 사색이나 행동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을 잊지 않는 것, 혼자만의 출구가 아니라 모두의 출구를 찾는 것 말입니다.


혼자라면 어디라도 자유로울 수 있지만 함께 사는 이들의 입장에 서는 것, 그들의 입장을 잊거나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리어카를 매달고 자전거를 탄 자유시장의 청년은 문득 자유의 의미 하나를 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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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더 좋아진 노래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단강에 와서 새로워진 노래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리라.
이 봄도 산허리엔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단강에 와서 더 좋아진 노래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 있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단강에 와서 다시 좋아진 노래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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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쉬십시오



당신 떠나시는 날 찬비가 내렸습니다. 을씨년스럽게 불어대는 바람과 함께 흩뿌린 겨울비는 가뜩이나 당신 보내며 허전한 우리의 마음을 더욱 어렵게 했습니다.


질컥질컥 내리는 겨울비가 여간 궂은 게 아니었지만 어디 당신 살아온 한 평생에 비기겠습니까.


부모님 세대는 아무래도 불행한 시절을 사셨습니다. 일제며, 난리며, 보릿고개며, 이래저래 8년씩이나 당신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나무장사 품 장사로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아주머니의 설움과 눈물. 병상에서 아주머니 눈물 흘리며 지난 시절 말하실 때 “뭘 지난 일을 갖고 그려” 하셨던 당신.


초등학교 그만둔 자식들이 “엄마, 호멩이질이 모두 글씨로 보여.” 했다며 재주 많은 자식들 못 가르친 한(恨) 눈물로 말할 때 깊이 팬 두 눈만 껌벅이셨던 당신.


바튼 된 기침을 두고도, 그토록 야윈 몸을 두고도 죽음의 기운까진 몰랐던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당신 대신 한복을 입고 정월 초하루 병원을 찾았을 때만 해도 그렇게 며칠 쉬시면 곧 나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 며칠을 두고 떠나시다니요.

가족들의 울음소리에 놀라 병원으로 뛰어갔을 때, 당신은 병실 밖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양 손과 양 발이 침대에 묶인 채 무척이나 괴로워하셨던 당신, 매달린 병들로부터 나온 어지러운 선들과, 당황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바쁜 손길이 겨우 당신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저만치 망연히 서서 두 손 모았을 뿐 너무도 무력했습니다.


“저만치 나가계시죠.” 


의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내 무력함은 내 스스로 당신으로부터 멀기만 했습니다. 지켜달라는 기도를 뒤로 하고 앰뷸런스에 실려 서울로 가신지 삼일, 꼭 삼일 만에 당신 떠나셨다는 소식을 늦은 밤 망연히 들었습니다.

유난히도 심했던 지난 여름 장마, 산에서 마구 쏟아져 내려오는 물이 땅콩 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물길 만들며 함께 비 맞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 땅콩 옆에 있는 밭, 제법 큰 밭에서 혼자 고추를 따던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지난가을, 유난히 저녁놀 붉었던 시간도 기억납니다.


2년여,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도 당신은 내게 한없이 선한데 한평생 같이 살아온 이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김천복 할머니는 눈물도 많으시죠. 당신 돌아가실 때 잊지 않고 하셨다는 말, 그 노인이 병원까지 찾아오셔서 여간 고맙지 않았다고 꼭 전해 달라시던 당신의 그 말을 김천복 할머니는 몇 번이나 더 하시며, 그때마다 눈물을 닦았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많은 이가 몰래 몰래 눈물을 닦았습니다. 산수유 씨 빼느라 움푹 손톱이 닳은 당신을 두고 어릴 적 새총까무리를 떠올렸던 제 철없음을 이젠 용서하십시오. 홀로 누워계신 당신을 두고 이내 자리를 뜨곤 했던 제 정 없음도 용서하십시오. 그런 절 두고 좋은 이라 했다니 당신의 마음이 넓습니다.

당신과 함께 한 시간들, 그 짧은 시간들, 악수한 손에 체온 남아있듯 왠지 따뜻합니다. 고통도 병도 없다는 하늘나라, 당신의 바튼 된 기침도 말끔히 멎었으려니 생각하면 저도 기쁩니다.


예배당 난로 뒤쪽, 당신이 늘 앉던 그 자리,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 그때도 당신 자린 그 자리입니다. 따뜻했던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박종석 성도님.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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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그리고 숨쉼

 

숨을 쉰다
숨을 쉰다

숨은 쉬는 일
숨은 쉼이 된다

너무 빨라지지 않도록
너무 가빠지지 않도록

숨으로 고삐를 매어
몸과 마음의 황소를 길들이는 일

숨을 쉬는 순간마다
숨은 쉼이 되는 일

숨은 몸에게 쉼을 준다
성성적적(惺惺寂寂)

깨어서 숨을 바라보는 일이 
오늘 하루 나의 주업무

나머지 몸을 위해 먹고 사는 모든 일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업일 뿐

숨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숨이 중용을 잃지 않도록

숨을 쉬는 일
숨은 쉼을 준다

영혼의 탯줄인 숨줄에 매어 
순간과 순간을 새롭게 살아간다

고요한 숨은 우리의 본래면목
숨은 우리의 하느님

숨을 쉰다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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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사랑


주일 저녁예배, 오늘은 특별히 박종구 씨 가정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박종구 씨는 변정림 씨 남편인데 얼마 전 발에 심한 동상이 걸렸다. 술에 의지해 살아온 박종구 씨,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큰 소리가 작실 골짜기에 밤늦게까지 가득하다.


얼마 전 동네에 결혼식 잔치가 있던 날, 몹시 춥던 날이었는데 그날 동상이 걸렸다. 한낮에 술에 취한 채 나간 박종구 씨를 밤 11시가 되어서야 윗작실 논배미에서 발견을 했다. 마실을 갔다가 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동네 아주머니가 발견을 한 것이었다.

 

 

연락을 받은 집배원 아저씨가 놀라 달려갔을 땐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짚단에 불을 놓아 한참을 녹인 다음에야 겨우 등에 업고 집으로 내려올 수가 있었는데, 그 사이 발에 심한 동상이 걸린 것이다. 이야길 듣고 찾아가 보니 발은 양쪽 모두가 퉁퉁 부은 채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딱한 사람들, 부인에, 서른 넘은 두 아들에, 아버지 쓰러져 있는 걸 알면서도 집으로 모셔올 줄 몰랐다니. 그렇게 부인은 갑상선으로, 남편은 심한 동상으로 가뜩이나 어렵고 막연한 생활이 더욱 어렵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느 분은 방송국에나 알려보지 그러냐고 했지만 아픔을 나눠야 할 이를 뛰어넘은 도움이 결코 올바른 일은 아니지 싶었다. 회의를 통해 그 가정을 위해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사랑의 헌금을 모으기로 했다. 적더라도 정성껏 참여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저녁예배, 많지도 않은 우리는 모여 눈물 속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는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아 숙연하기까지 했다.


손을 내민 걸인에게 전할 돈이 없어 “미안합니다. 형제여. 아무 것도 전할 게 없군요.” 하며 걸인의 손을 잡았다는 투르게네프. 그런 투르게네프를 향하여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한 가장 좋은 것을 선생님께 받았습니다.” 했다던 걸인. 설교 시간에 마태복음 25장과 함께 투르게네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사랑의 헌금시간. 어렵긴 매한가지인 신 집사는 도무지 돈이 없어 대신 쌀을 가져왔노라며 제법 쌀이 담긴 비닐부대를 바쳤다. 안쓰러운 표정과 함께. 이식근 성도는 모르고 왔노라며 오천 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아내는 돼지를 바쳤다. 소리 돌 때 바이올린 사준다며 한 푼 두 푼 키워왔던 돼지.

 

그렇게 정성이 모인 헌금함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기도를 한다. 드린 헌금이, 헌금 속에 담긴 우리들의 작은 사랑이 어려움 당한 박종구 씨 가정을 일으키는데 도움 되게 해달라고, 우리의 부족함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우리가 드린 헌금은 모두 82,900원이었다. 누구하나 넉넉한 이 없이 어려움 속에서 드린, 어려움 속에서 어려움 나눈 거룩한 액수다. 사랑이여, 우리들의 이 작은 사랑이여, 큰 아픔 감싸기엔 손바닥만 한 작은 사랑이여.

불쑥 전하고 말 일이면 오히려 쉬운 일, 이제부터의 모든 일이 부디 의무감에서가 아니기를.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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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멀미를 하며

 



보건소장이 써준 소견서를 읽고 이리저리 부어오른 목을 살펴 본 의사는 너무 늦게 왔노라고 쉽게 말했다. 접수, 대기, 그토록 한참을 기다려 만났는데도 대답은 간단했다. 환자 먼저 나가 있으라고 한 후 나눈 이야기는 어두운 내용이었다. 방법은 수술뿐, 수술도 장담할 수는 없겠노라는 것이었다. 약으로서 치료나 병의 악화를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수술을 하면 얼마나 들까요? 의료보호카드가 있는데요.”
“글쎄요 그걸 제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진찰비가 20-30만원, 수술비는 50-60만원 정도 될 겁니다.”


머릿속에 얼핏 100만원의 숫자가 지난다.


“중요한건 돈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수술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결정일 거요. 돈이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소.”
“실은 저희들에겐 돈도 문제가 됩니다.”


왠지 눈물겨웠다. 의사는 문제가 안 된다는 돈이 우리에겐 눈앞의 문제 아닌가.


“다른 처방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의사의 말은 단호했다. 젊은 전도사양반, 당신이 하는 일이 혹 객기 아니요 싶은, 왠지 내겐 의사의 말과 태도가 그렇게 비쳐졌다.


“더 늦기 전에 신청하십시오. 수술이 밀려있어 지금 신청해도 3주 후에나 가능할 겁니다.”


의사의 말을 뒤로하고 힘없이 병원을 빠져 나왔다.

변정림 씨는 광철 씨 어머니다. 지난해부터 가끔씩 교회에 나오는 우리 교우다. 변정림 씨는 갑상선으로 불쑥 목이 부어있는데 오육 년 됐다고 기억할 뿐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지 본인은 물론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가 없다. 가끔씩 보건소에서 약 타다 먹고, 가끔씩 교회에 나와 기도도 하며 목이 부었다 내렸다 했는데, 이젠 제법 부어오른 목이 가라앉을 줄 모른다.

안타까워 할 뿐 가족도, 친척도 어느 누구도 병원에 함께 갈 생각을 못했다. 모두 여섯 식구가 사는 위태한 오두막집, 가보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외면하고 싶은 현실, 그럴 순 없어 찾아갔던 병원. 어두운 이야기만 듣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 실컷 멀미를 하며.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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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그리고 멈춤

 


하늘과 땅 사이
숨으로 피어나는 춤

비와 바람의 북장단이 울리면
가슴이 들썩인다

발뒤꿈치에서 움터
손끝으로 흘러 춤으로 피어나는 숨

춤은 멈춤에서 시작하여 
멈춤으로 끝나는 숨

춤을 찰라로 쪼개면 
멈춤의 이어짐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

신에게 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춤은

화목 제물이 되는
스스로 온전한 춤은

온전한 사랑 안에 머물러 
비로소 쉼을 얻는 멈춤

바깥에서 헤매이며 구하기보다는
멈추어 안으로 시선을 거두는 기도

한 점 숨으로 머무는 고요
침묵의 기도와 사랑의 숨쉼

꽃과 나무의 춤 그리고 멈춤의 평화
사람의 본래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의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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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작실속 속회, 유치화 청년 집에서 모이는 날이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해져야 일손을 놓고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 그제야 씻고 저녁 먹고 하면 어느덧 시간은 저만큼이다. 일찍 모이자고 약속했으면서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치화 씨가 주변에 모임을 알리러 나간 사이 치화 씨 어머니가 툇마루에 촛불 하나 밝히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아직 유치화 청년 집에는 전기가 없다. 오랫동안 비어 있어 전기가 끊긴 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둘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사는 내력은 길고도 슬프다. 삶이란 저리도 기구하고 질긴 거구나 싶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며 흔들리는 촛불 앞에 둘러 앉아 나누는 이야기는 불에 관한 이야기였다.

 

“옛날엔 등잔불 아래서도 명주 올이 잘 보였는데.”

“기름 있기 전엔 산에 가 산초라는 열매를 땄지요. 그 열매를 짜 그 기름으로 불을 켰어요.”

“그러고 보니 동네에 전기 들어 온지 이제 막 10여년이 됐네요.”

 

흐린 불을 핑계 삼아 공과 책을 덮고 그날 예배는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잘 아는 찬송을 두 곡 부르고 ‘가난하지만’이라는 말씀을 나눴다. 웬일인지 예배를 드리는 동안 마음은 어느 때보다 넉넉했다. 가난하더라도 넉넉하고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엔 온통 개구리 울음소리, 푸른빛의 군무, 반딧불이 나는 밤이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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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감지기가 울렸다

 



열 감지기가 울렸다
가게 문 입구에서 37.4도

순간 나는 발열자가 된다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지 않았던 것이 원인임을 스스로 감지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집 안에서는 선풍기를 돌리고
창문을 조금 열어둔다

차 안에서는 뒤에 창문 두 개를 다 열고
보조석 창문을 반쯤 열고
운전석 창문은 이마까지만 내린다

비록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맺히더래도
여름인데 몸에서 땀이 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런 나는 가족들 사이에선 꼰대가 되기도 하고
밖에선 발열자가 되어서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인도 델리의 재래 시장인 빠하르간즈
5월로 접어들던 무렵의 무더위를 몸이 기억한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선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무더움

그곳의 초여름 더위는 무더움을 넘어선 무서움이었다
무더위로 인해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던 생명들

나 한 사람이 에어컨을 틀 때마다
지구의 체온이 티끌 만큼 올라간다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다

입구에서 잠시 땀을 식히신 후 들어오시라는 
사람의 말소리가 한 줄기 바람처럼 들려온다

혼자 가게 입구에 서 있으면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지만 속마음은 이렇게 반응을 한다

여름에 땀이 나고 체온이 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왜들 호들갑인지

내 몸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며
여름엔 풀잎들도 땀이 맺혀 꽃망울을 틔우는데

땀이 맺힌 이마를 스치며 지나는 한 줄기 바람의 손길을
하늘을 울리며 곧 쏟아질 것 같은 비의 속 깊은 울음을

이렇게 살아 있는 지구를 온몸으로 느끼며
비와 함께 울다가 해와 함께 맑게 갠 하늘의 둥근 무지개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도의 두 손을 모으리라

마당에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듯
한낮에 내 얼굴도 빨갛게 익었다가

저녁이면 돌담 위에 박꽃처럼 하얗게 피어
밤하늘에서 달과 별을 찾다 보면 

무더위도 함께 지낼만 하다며
이마를 스치는 바람의 손길이 가슴속까지 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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