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제비



이속장님이 갖다 준 고추모종을 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에 놀러 온 종순, 은옥이와 함께 교회 뒤에 있는 작은 밭으로 올랐다. 


전에 살던 반장님 댁이 담배모종을 위해 뒷산 한쪽을 깎아 만든 비닐하우스가 있던 자리이다. 언덕으로 오르는 곳에 S자 모양의 계단을 만들고선 그 밭에다 토마토, 빨간 호박, 참외, 도라지 등을 조금씩 심었다. 마른날이 계속되면 물도 주고 가끔씩 풀을 뽑기도 한다. 우리끼리 아기 이름을 따서 ‘소리농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밭으로 오르는데 보니 제비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어디 잘못 벽에 부딪쳤지 싶다. 작은 몸뚱이, 저 작은 몸뚱이에서 그 힘찬 날개 짓이 나오다니.


언제 죽었는지 한쪽 날개를 집어 드니 등짝엔 벌써 개미들이 제법 꼬여있었다. 죽은 제비를 들자 종순이와 은옥이가 “엄마!” 하며 뒷걸음으로 도망을 친다. 삶의 여정이 짧았기에 아이들일수록 죽음에 익숙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죽음이라는 의미보다는 그 모양이, 축 늘어진 날개의 흉한 모습이 그들에겐 무섭게 보였나 보다.

“이리와 봐”


양지 바른 언덕에 부삽으로 작은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 안에 죽은 제비를 똑바로 눕혔다. 마음껏 날던 푸른 하늘을 바라보도록. 그리고는 조금씩 흙으로 덮는다.


“전도사님, 뭐하는 거예요?” 


쪼그려 앉으며 종순이가 묻는다.


“응, 제비가 죽었잖니. 제비가 하나님 나라로 갔으니까 우리가 묻어줘야지.”

아이들은 눈을 깜박 거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죽음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작은 나뭇가지 두 개를 철사 줄로 묶어 십자가를 만들었다. 방금 제비 묻은 곳에 작은 돌멩이로 두들겨 십자가를 세웠다.


“그건 뭐예요?”


종순이가 또 묻는다.


“십자가야. 그래야 여기 제비가 묻혔다는 걸 알지, 그래야 발로 밟지 않고 제비를 위해서 기도도 해주고.”


신기하고 생소할 뿐 아이들은 모른다. 죽은 제비를 왜 굳이 땅속에 묻는지. 죽은 그 자리에 왜 나무막대 십자가 꽂는지를. 

그러나 아이들아, 혹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너희 거친 삶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낄 때, 한없이 마음이 아래로만 꺼져들 때, 죽은 제비 땅에 묻고 십자가 세웠던 오늘 기억 떠올리며, 죽음가까이 십자가가 서 있는 것, 그게 얼마만한 위로인지 너희가 알았음 싶구나. 어렴풋한 기억으로라도.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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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을 달리는

 



저녁밥을 시켰다
빗속에 망설임도 잠시

배고프다 보채는
아들의 성화를 못 이긴다

음식을 내려놓으신 후
달아나시려는 기사님에게

시원한 거 한 잔 드릴까요? 했더니
살풋 웃으시면서 마음만 받겠다고 하신다

다른 기사님들은 테이프를 붙여서라도 
음료를 가져가신다고 했더니

그러면 시원한 거 말고
따뜻한 물 한 잔만 주세요, 하신다

온종일 비 맞고...
말씀이 뚝뚝 끊겨도 더 묻지 않는다

얼른 뜨거운 물 반 찬물 반 담아서 
커피와 설탕을 조금만 탔다

잠시라도 나무 의자에 앉아서 드시고 가시랬더니
고맙다고 하시며 문을 나가신다

온종일 그칠 줄 모르는 늦은 장맛비가 
어스름 저녁 하늘을 짙게 물들이는데

비옷 안으로 삐쩍 마른 나무처럼
오토바이 옆에 서서 떨리던 몸을 녹이는지

걷기에도 미끄러운 빗길을
또 달려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빗속을 달리는
우리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기다림

짬뽕 면줄기가 빗줄기처럼 눈물처럼 
배고픈 아들 입에서 뚝뚝 끊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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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의자

 



서재, 책상의 위치를 바꿨다. 날씨는 덥고 무료하기에 책상 위 책꽂이를 한쪽 옆으로 내려놓고 벽 쪽을 마주했던 것을 서쪽 창가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높이가 잘 맞는 건 아니지만 의자에 앉으면 창문을 통해 많은 것이 내다보인다. 교회 앞 허술한 방앗간 지붕, 아이 뒷머리 기계로 민 듯 나무 모두 잘라내고 잣나무를 심은 신작로 건너편 산, 그리고 그 너머 하늘과 맞닿은 강 건너 산, 그러니까 책상 앞에 앉으면 강원도에 앉아 충청북도의 산을 마주하는 셈이다.

의자를 조금 움직여야 하지만 학교 쪽으로 난 길을 통해서는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을 볼 수도 있다.

해질녘의 노을과 밤늦게까지 지워지지 않는 어둠속 산과 하늘의 경계선, 막 깨어나는 별들. 몹시 슬플 때에는 해 지는 모습 보기를 좋아했다는 어린왕자, 원할 때면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 언제라도 그 모습 바라볼 수 있었다는, 언젠가는 마흔세 번인가 해지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는 어린왕자.

문득 어린왕자가 앉았던 그 의자에 앉은 듯 싶은, 책상 앞에 앉는 시간을 아끼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단지 책상의 위치를 바꿈으로 얻게 된 마음의 변화, 좋은 암시였다. 그래, 주위의 작은 것부터 바꿔보자.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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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비

사진/김승범

 

 

이따금 당신들의 눈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서러운 얘기 서럽게 하다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흐르는 눈물, 혹은 쓰러져 주체할 줄 모르는 눈물, 그렇게 당신들의 눈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난 망연히 마주할 뿐 무어라 말할지를 모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쓰리고 아픈 마음, 괴롭고 힘겨운 시간들, 도대체 와 닿지 않는 생의 위로, 따뜻한 기운, 난 그저 안쓰럽게 당신들의 슬픔을 마주하며 그걸 마음으로 느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흔한 성경말씀도 그럴 땐 떠오르지 않고, 떠오르는 몇 구절은 당신들의 눈물과 거리가 느껴집니다. 못난 전도사죠.


그러고 돌아서는 길,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서는 길, 마음속엔 비가 내립니다. 늘 비가 내립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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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

 


마음에 일이 없는
심심한 날

땅의 일감을 모아 지피던
열심의 불을 끈 후

까맣게 애태우던 마음이 
하얗게 기지개를 켠다

심심함의 터널은 
호젓이 걷는 오솔길

마음이 마음을 부르는
고독과 침묵이 보내온 초대장

심심 산골 마음의 골짜기에서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면

심심 하늘에 비추어
내 마음 겹겹이 투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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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생

 

 

텅 빈, 흔들리는 직행버스.안내양이 책을 꺼내든다. 
보니 세계사 참고서.

흔들리는 글씨, 
흔들리는 내용,

흔들리는 생.

 

“안녕히 가세요.”

 

버스에서 내리려하자 어느새 책을 접고 밝게 인사를 한다.
떠나간 버스에서 한참을 눈을 못 떼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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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이 갇힌 한 마리 어린 새는 어떻게 울었는지

옛날을 잃어 버렸다가 비오는 밤,

토하듯 울어대는 제 어미의 슬픈 소리를 듣곤 생각나는 듯

방울방울 빗줄기를 목쉬게 한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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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던지 뛰어들던지


친구 아기의 돌을 맞아 모처럼 친구들이 모였다. 서울에서 수원에서 강화에서 빗길을 달린 친구들이 참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홀가분하게 아무 때나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던 전과는 달리 부인과 아이들, 어느새 우린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건 그런 외형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그 무엇,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시간을 두고 무엇이 어떻게 지나고 있었는지 우리는 몰랐다.


‘아예 외면하던지, 아니면 흠뻑 뛰어 들던지‘


영화 속 한 대사가 가슴에 박힌다. 현장과의 거리에서 오는 괴로움, 거친 괴리감, 그렇다,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이었다. 외면하던지, 뛰어들던지.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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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사님께

 



약비라 불릴 정도의 단비가 실낱같지만 계속 내립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비인지 모르겠습니다. 말랐던 건 대지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창밖으로 마주 보이는 방앗간의 참새도 젖은 몸을 말리려는지 이젠 보이질 않습니다. 강 너머 산이 비안개에 가려 연필로 그은 듯 산등성이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교인들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일손 멈출 수 있었던 교인들과 모처럼 점심을 같이 해 먹고선 식탁에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요즘 대학생들이 왜 미국 물러가라 하느냐 묻기에, 짧은 지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대답했더니, 그럼 바로 우리들을 위해 그러는 거네요 하며 새삼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잎담배를 경작하는 이곳에선 양담배 수입 문제가 심각한 일이지요. 교인들이 돌아갔고 책상에 앉았다가 문득 뵙고 싶은 마음에 펜을 들었습니다. 지금 집사님은 무얼 하실는지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한가운데를 뱅뱅 고개 흔드시며 맴도실 집사님, 왠지 제게 남아있는 집사님의 모습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이 집사님다움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도 언젠가 끝이 보이겠죠.

 

엊그저껜 원주에 나가 자전거를 한대 샀습니다. 중고 자전거였는데 값이 오만 원 하더군요. 자그마치 기어가 5단씩이나 달려있었거든요. 그래도 윗작실까지 올라가려면 두 세 번은 내려서 끌어야 합니다. 사람들하고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소파마저도 중고로 샀습니다. 거실에 놓으니 그런대로 잘 어울립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별것인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별것 아닌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려 합니다만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게을렀고 서서히 굳어져왔음을 새삼스레 느끼는 요즘입니다. 멋있는 촌장(村長)이 되어 보겠다고 떠났지만, 아직 제 가슴엔 눈물이 부족합니다. 가슴으로 끌어안기엔 눈물겨운 현실이 많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문득 눈물겹고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그게 본래의 마음 되어 살아야 할 텐데 아직은 띄엄띄엄일 뿐입니다.

 

해군으로 근무한 조카 말에 의하면 바다에 나갔다 몇 달 만에 돌아올 때면 아직 육지가 보이질 않아도 바닷바람에 실려 흙냄새 먼저 풍겨온다고 합니다. 아직은 무언지 모를 그 어떤 한 가지 것을 마지막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을 이만한 거리에서 키우고 키워, 누구보다 먼저, 누구라도 기꺼이 그리움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몇 번 쓴 편지지만 집사님께 쓰는 날은 비오는 날입니다. 건강과 평안과 얼마간의 행운을 빕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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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게 살피고, 마음을 다해 응답해요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마 7:3-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일기가 고르지 않아 생활에 불편이 많습니다. 불볕더위에 시달리지 않아 다행이기는 하지만 푸른 하늘만 믿고 우산 없이 외출했다가 비를 만나기 일쑤입니다. 이제 장마철이 다가온다니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캐나다 서부 지역의 온도가 거의 50도에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지만, 불편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용기를 내는 이들은 아직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 지붕 수리를 마쳐서 다행입니다. 지붕을 덮은 판넬의 낡은 페인트를 벗겨내고 새롭게 도색을 했고, 곳곳에 난 크랙을 메우고 방수처리를 했습니다.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다각도로 애쓰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 사람인지라 긴장한 채 여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년 6개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는 지하 친교실에 내려가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환기를 하면서 교우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그 공간에 정겨운 이야기 소리로 가득 찰 날이 언제일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7월에 접어들면서 모임에 대한 제한이 조금씩 풀리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확진자가 오히려 늘고 있는 이 상황이 걱정스럽습니다. 백신 접종이 다시 재개되면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전히 위기의 시간입니다. 예배 참석 인원을 조금씩 늘려가려 하지만, 각자가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흡기 증상이나 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분간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는 이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장소가 곧 교회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예배에 집착하는 무리들을 무섭게 질타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사 1:12) 가끔 이 말씀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배제된 신앙 고백은 허위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예배를 드릴 때는 외경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두루 피곤할 때면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드는 책들이 있습니다. 엊그제부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교 교수인 박희병 교수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창비, 2020)을 곁에 두고 아무데나 펼쳐 읽고 있습니다. 이미 <선인들의 공부법>, <연암을 읽는다> 등의 책을 통해 익숙한 저자입니다만, 이번 책은 좀 특별합니다. 제목에 들어있는 ‘엄마’라는 말 자체가 친숙하면서도 낯섭니다. 초로의 아들이 구순에 이른 어머니를 엄마라고 지칭하는 일은 별로 없거니와 그런 호칭이 제목에 활용되었다는 사실도 뭔가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2018년 10월부터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저하증에 시달리다가 꼭 1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자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어머니 곁을 지키는 데 전념했습니다. 어머니는 기억이 흐리마리한 중에도 최소한의 주체성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말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말들은 전후 맥락이 분명치 않고, 때로는 의미 없는 말처럼 보였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말들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해독되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알았기에, 단편적으로 발화되는 말 속에 깃든 어머니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사적인 경험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것을 공적인 의미를 갖는 말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 속에는 중층의 경험과 역사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 닦았나?” “네 이가 희어졌다.” 이 말은 사정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별 의미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어머니의 회한과 아픔이 배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 형편상 작은 아들의 이는 교정해 주었지만 큰 아들의 이를 교정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들의 이가 고르지 못하고 희지 않은 것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네 이가 희어졌다”는 말은 어떻게든 그 회한을 풀고 싶은 어머니의 바람을 나타낸 것일 겁니다.

“춥다. 목도리 하고 다니라.” 박희병 교수는 이 말 속에 깃든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 읽어냅니다. “나를 보는 엄마의 시선, ‘근심’과 ‘걱정’의 시선이 느껴지는 말이다. 근심과 걱정은 엄마가 아프시기 전에도 늘 갖고 계시던 것이지만 병원에 계시면서 더 커지고 더 뚜렷해진 듯하다. 생활과 의식이 극도로 제한되고 단순화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눈에는 초로의 노인인 내가 더욱 ‘아이’로 보인 듯하다.”(55쪽)

어머니의 말을 다 받아 적고 그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애를 쓴 끝에 박희병 교수는 어머니의 말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상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 봤다.”(397쪽)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늘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언어화되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유심히 살피고 염려해줄 때, 너무 노골적이지 않지만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치유 받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가끔 손녀들이 집에 오면 아이들은 신나게 놀다가도 쇼파나 서재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얼굴을 가만히 살핍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생긴 주름이며, 성긴 머리카락, 얼굴에 생겨난 검버섯, 더러더러 보이는 흰 눈썹까지 헤아리며 아이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제 얼굴을 그렇게 똑바로 자세히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 아이들이 전부일 겁니다. 따뜻한 바라 봄은 따뜻한 관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따뜻한 언어는 새로운 삶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미국의 가톨릭 노동 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의 전기를 썼던 로버트 콜스는 도로시라는 사람의 사람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고 끊임없이 그들과 엮여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잠시 동안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로버트 콜스, <환대하는 삶>, 박현주 옮김, 낮은산, p.33)

이용하기 위해서나, 또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따뜻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얼음 같은 것이 녹고 있음을 알아차릴 겁니다.

 

우리는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종으로 팔렸던 요셉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꿈쟁이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면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이들의 기색을 잘 살피고 그들의 염려를 덜어주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역시 그곳에 수감된 이집트 왕의 두 신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그들의 얼굴에 어린 근심을 보고 묻습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창 40:7b)

 

이런 관심 덕분일 겁니다. 그는 왕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해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바로의 꿈까지 해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는 두려움이나 타자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냈습니다. 나찌가 만든 수용소에 갇혔던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랬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동료 수감자들의 좋은 벗이 되려고 애썼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목사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것”(요 6:3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절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른 이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면에 숨겨진 그늘 혹은 연약함을 보시고, 그것을 조용히 품에 안으실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과 만나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와 깊이 만난 사람은 누구나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지내는 것은 예수를 만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곳곳에 무궁화꽃이 단아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능소화 역시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자기 때를 놓치지 않는 식물들의 성실함 앞에 설 때마다, 투덜거리느라 자기 때를 살지 못하는 유정한 인간의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의 말과 표정과 몸짓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슬그머니 그 부름 혹은 요구에 응답하십시오. 조금 더 인내하면서 이 어려운 시간을 유쾌하게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고, 그 기쁨으로 새로운 세상을 빚으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1년 7월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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