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씩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5)

 

하루씩

- 전집 5권 『일기 I』 1930년~31년 일기 -

 

 

살다보면 엉겁결에 맡게 되는 일들이 있다. 물론 ‘하기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상황이 되지 않는데, 공동체의 처한 정황상 ‘독박을 쓰는’ 경우다. 더 우아한 말이 있겠으나 개인에게는 이만큼의 부담이다. 김교신에게는 『성서조선』 편집주간이 된 일이 그러했다. 1930년 5월부터 김교신은 거의 단독으로 잡지의 편집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동안은 정상훈이 했던 일이다. 나라도 어수선했지만 한창 젊은 나이의 6인이었다. 직업면에서도 가정면에서도 이동이 잦은 시기였다. 양인성은 평북 선천에, 함석헌은 오산에, 류석동은 소격동에서 이렇게 저렇게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성서모임을 열어가며 ‘버티던’ 한중간의 일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함께 모여 진행했던 성서연구의 결과물들을 한데 모아 출판하며,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해주던 잡지가 『성서조선』이었다. 그런데 이 잡지가 주간의 몫을 담당했던 정상훈의 개인사정으로 1930년 4월호가 휴간된 마당이었다. 그야말로 잡지 존폐 문제에 봉착했다.

 

 

 

 

물론 인습이나 껍질뿐인 전통의 승계에 연연하지 않는 모임이니, 잡지를 그친들 그것 자체로 자괴감이나 죄책감을 가질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다른 열정과 목표를 가지고 조선의 젊은 신앙인 여섯이 마음과 뜻을 모아 시작한 일이었다. 조선 팔도를 다 다닐 수는 없는 일이나 제 자리에서 치열하고 진지하게 묵상한 살아있는 말씀을 활자화하여 방방곡곡에 전할 수는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시작한 잡지 출간. 15호로 그칠 수는 없었다. 하여 이미 교사 일을 전직으로 하고 있던 김교신이 그야말로 ‘엉겁결에’ 책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때의 심정을 김교신은 이렇게 말한다.

 

제16호부터는 내가 그 임(任)을 위선(爲先) 담당하게 되었다. 집필자는 전과 다름이 없으나, 잡지에 관한 일체 책임을 일신(一身)에 지려 할 때 새로운 주저가 없지 아니치 못하였다. 금후(今後) 본지에 대한 책망이나 수욕(受辱)은 나 홀로 당할 작정인 까닭이다.

 

김교신으로서는 그야말로 ‘재능기부(?)’요 ‘자선사업’에 해당하는 노동이었다. 평신도 신앙인으로서도 주체적인 성서 묵상이 가능함을 알리며 시작한 제 소리이지만, 하여 그 결과물들을 모아 출간하기로 한 것이지만, 편집 일이야 말로 문외한인 영역이었다. 오탈자가 나도, 편집의 미(美)가 어설퍼도 다 김교신이 당할 몫일 터인데, 그야말로 득(得)은 없되 실(失)만 있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김교신은 이 ‘자선사업’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자선사업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배하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모임이나 주장을 영구히 하려는 욕심을 가질 때 형식화와 제도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또 이를 경계했던 무교회 신앙인들이었던지라, 김교신은 편집 주간을 맡으면서도 언제든 ‘그칠’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 잡지는 기백 호의 기념호까지 발간하리라는 아무 성산도 없고, 기어코 성공하리라는 고집도 안 가졌다. 그저 여적이 있으면 수집될 것이고, 없으면 언제든지 폐지될 것이다.

 

그렇게 ‘한 회씩’ 해보자며 이어간 잡지가 142호까지 출간되었다. 물론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김교신의 ‘고집’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세월이 너무 악하고 조선인들의 처한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생명을 나누듯 그렇게 산 신앙의 호흡을 나누려하다보니 그리 되었다. 모아 놓은 금전력이 탄탄한 것도 아니었다. 박봉에 식구도 많은 김교신의 교사 월급이 수월찮게 그리로 들어갔다. 바쁜 일정에 원고를 모으고 5회 이상 통독을 하며 교정을 보는 노동은 또 어떠한가. 더구나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여야만 비로소 인쇄소에 넘길 수 있던 시절이었다. 교열교정이 끝난 원고는 경무국 도서과에서 원고 검열을 마친 후 찾아가야 했다. 보통은 편집이 완료된 이후에도 2주쯤 걸리는 까닭은 이 검열 때문이었다. “어느 날에나 편집자의 손에서 신선한 원고를 직접 인쇄소에 회부하는 세상에 살아볼까” 그리 한탄하는 김교신의 일기를 읽고 있자니, 그 “어느 날”을 살아가면서도 마감일을 툴툴거리는 우리네 일상이 부끄러웠다. 인쇄소의 상황도 지금 같지 않았다. 새벽 한 두시까지 인쇄소 직원과 함께 앉아 최후 인쇄상태를 점검하는 일도 오롯이 김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자식처럼’ 귀하게 만들어낸 잡지를 구독자들에게 우편물로 보내고 서점에 가져갈 때면 마음 한 가운데 뿌듯함도 일렁였을 터인데, 서점에서 일하는 이들의 수근거림은 김교신에게 또 하나의 상처였다.

 

제27호 나오다. 부업으로 하는 일이라 학년말 신학년을 당하여 부득이 늦게 되었다. 잡지를 시내 서점에 배달할 때마다 ‘이것도 잡지라고’ ‘팔리지 않는 잡지’ 등등의 말이 귀에 거친다. 때로는 모욕에 가까운 광경도 당한다. 물론 조선 사람들이요, 예수 혹은 기독이란 것을 그 간판에 관계한 서점들이다. 저편에서는 사실을 말할 뿐이겠지만, 이편은 부흥회나 참석하는 셈으로 매삭(每朔) 이 경멸을 당하기를 향락하니 감사. 가장 유효한 신앙 부흥은 예수의 이름 연고로 모욕 받는 때에 온다.

 

『성서조선』의 본 뜻과 무교회 신앙인들을 오해하여 받게 되는 수모들도 많았다. 권위나 자격을 의심하는 ‘무자격론’부터 교회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음모론’까지, 그가 당한 모욕을 다 합치면 참으로 장수하였을 터인데, 그리 보면 김교신의 짧은 생애가 안타깝기만 하다. 애정을 가진 지인들도 ‘말’로 거드는 일이 많았다. 금전적으로도 체력 면에서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만 그치라는 충고도 진심이었을 거다. 그 단단하던 이가 무리한 일정으로 종종 병도 앓았고, 병석에서도 책임감에 교정을 보고 인쇄소에 넘기는 모습을 보며 어찌 그런 조언이 나오지 않았겠나!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나? 김교신의 이 신심(信心) 가득한 ‘자선사업’은 일 년을 넘기면서 소망스런 결실을 맺게 된다. 신학교에 다니는 한 학도는 도서실에서 접한 『성서조선』을 보고는 소급하여 보고 싶은 마음에 김교신에게 편지를 쓴다. 집에서 용돈이 다음달 20일에나 오는데, 그럼에도 얼른 사서 보고픈 마음에 쓰노라고. 미리 보내주면 반드시 금액을 지불할 것이요, 만약 그리 안한다면 자신이 다니는 신학교 교장선생님께 편지를 보내 자신을 책망해도 된다는 양심어린 고백까지, 한 호도 빠지면 안 된다는 ‘깨알’ 당부까지 담긴 그 편지에 김교신은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 교회 개혁에 뜻을 가지고 있었던 이용도 목사에게도 연락이 왔다. 『성서조선』을 읽었다는 그의 초대로 ‘제도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기회도 있었다. 간도 용정촌의 한 감리교회 목회자로부터 감사편지를 전해 받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이용도 목사의 손을 거쳐 나에게 도래한 『성서조선』은 나로 하여금 크신 은혜를 맛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좋은 편달과 좋은 등대가 되옴을 느끼어, 동지들에게 전하여 그들에게까지도 크신 은혜가 되었음을 내가 믿습니다. 이제 저에게 더욱 크신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귀한 글을 주옵시니 선생님의 후의에 감사하오며 아울러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되어지는 일임을 깨달아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 은총이 내내 계시사 주님의 참뜻을 드러내시는 사명을 다하시이다.

 

한 목회자는 ‘매일 정오 포소리가 날 때마다 이 잡지와 독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약속까지 전해왔다. 그야말로 일 년 여간 성실과 인내로 김교신이 뛰어온 노력에 위로와 힘이 되는 글들이었다. 물론 인간의 ‘알아줌’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러나 사람은 ‘감응’하는 동물인데, 돌아오는 응답 없이 어찌 이 고단하고 벅찬 일을 감당하겠나! 이런 저런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하루씩, 한 호씩, 그렇게 일 년 여를 버텨낸 김교신은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자신의 각오를 다졌다.

 

『성서조선』은 필경 종말까지 소수일지는 다수일지는 모르나, 이 방법으로써 벗을 구하리라.”(1931년 7월 8일 일기)

 

그리고 그의 이 결심은 그의 동시대뿐만이 아니라 반세기후 아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벗들의 감응과 응답을 받고 있는 중이다. 1996년 어느 늦가을, 낯선 미국 땅 하버드 옌칭 도서관 한국관 지하의 어둡고 축축한 한 구석에 뭉텅이로 쌓여있던 먼지 가득한 모습으로 『성서조선』을 만나 ‘벗’이 된 나 역시 그에게 감사한다. 그의 성실과 인내가 만들어준 선물이 오늘 ‘숨을 다하고도 아직 저 죽을 줄 모르는 말기 환자 같은 한국 교회’에게 살리는 숨구멍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의 벗된 우리가 살려내야 할 것은 어쩌면 ‘김교신’이라는 이름 석자 보다는 그가 ‘독박’을 쓰면서도 고집스레 이어갔던 그 사명처럼, 우리 역시 제 자리에서 제 목소리로 토해내는 책임 있는 산 신앙을 스스로 지어내는 그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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