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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화(和)의 영이여, 오소서!

by 한종호 2015. 10. 15.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5)

 

화(和)의 영이여, 오소서!

- 전집 5권 『일기 I』 1932~33년 일기 -

 

 

설마 진짜로 그럴까, 했다. 물론 지난 문명사에 뒷걸음질 친 사례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길게 보면 점차로 ‘앞으로 나아간’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마다 기득권자들은 그 ‘나아감’에 저항하다 결국 큰 흐름을 막지 못하고 가장 늦게 승차해오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과거사의 해석에 있어 단 하나의 ‘정답’은 없는 법이라고, 남아 있는 기록 자체가 이미 ‘승자들의 것’이기에,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는 일은 더 많은 시각과 해석을 요하며 중층적이고 입체적인 ‘읽기’를 허해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배워왔는데… 군주제였던 조선 시대의 왕들도 안하던 일을 하겠다 한다. 역사 해석은 1차적으로 전문적인 역사학자들의 몫이요, 그들이 자유혼과 학자적 양심으로 서로 깊게 파고 날카롭게 논쟁하며 결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아야, 옳다. 오늘날의 시민들은, 특히나 교육수준이 높은 한국의 시민들은 그리 다양하게 소개되는 해석들을 읽고 공감 혹은 반박할 만큼의 역량을 가졌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서 단 하나의 ‘정답’을 만들려 하는 것일까? ‘만든 답’이 ‘정답’이라고 누가 판단하는가? 독일 문인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모국어도 모른다’고 한 바 있다. 이 표현을 가져와 막스 뮐러는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다.”라는 대선언으로 비교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장을 열었다. 하나만이 아니라 둘, 혹은 셋… 같은 사건,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을 다양하게 알고 배우며 ‘비교’해보라는 이 학문적 초대는 시민들에게 동등하게 권리와 능력이 부여되는 근현대 사회의 진행과 더불어 이제는 ‘당연’이 되어버린 공동체의 삶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 큰 흐름을 기어이 되돌려 시민을 한낱 ‘우매한 백성’으로 여기고(아니 그렇게 ‘만들려고’ 하고) 있음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상상력인가?

 

역사에서 배울 일이다. 자고로 단 하나의 정답을 만들려고 했던 자들은 모두가 권력을 독점하려던 사람들이다. 그건 종교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만큼 다양한 해석과 신앙 실천이 존재했던 시절도 없었다.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신앙고백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교부들과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신앙 체험을 통해 다양하게 고백하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들을 살려내고 현재를 견디어내게 하며 나아가 죽음의 순간조차도 평안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힘을 가졌기에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그 어려운 박해의 시절에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그 다양성은 획일화된 교리로 좁아들고 굳어져갔다. ‘정통(orthodox)’의 탄생이었다. 사람을 살려야할 종교의 이름으로 이후 유럽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축출하고 고문하고 심지어 죽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성령이 진리의 영이고, 예수가 그리스도심이 정녕 사실이라면(난 그리 믿는다.) 무엇이 두려워서 ‘단 하나의 해석’을 고수하며 그것도 자신들이 만든 해석이 ‘정답’이어야한다고 고집했을까? 답은 명료하다. 하나의 제국이 된 거대 교회조직을, 아니 그 조직을 통해 유지되던 고위성직자들(그리고 그들과 결탁하여 힘을 나눈 정치적 세력들)의 기득권을 자자손손 계속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서조선』지와 동인들은 시작부터 이단 시비를 받은 공동체이다. 제도로서의 교회 ‘밖’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들을 의심케 했으며, 우치무라 간조라는 일본인 아래서 성경공부를 했다는 것도 못마땅하게 비췄다. 더구나 40호, 50호, 그 호수가 이어지며 이들의 주장이 조선 땅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자, 많은 이들이 『성서조선』의 ‘이단성’을 물고 늘어졌다.

 

김교신은 성서조선 동인들 중에서도 가장 ‘정통’신앙을 가진 이었지만, 교리가 그러하니 무조건 받아들였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산 신앙과 자유혼으로 철저하게 읽고 배우고 해석하면서 ‘아멘’할 정통신앙은 받아들여 왔던 그였다. 그러나 김교신은 칼뱅의 예정설은 인정하기 힘들었다. 어찌 구원받을 자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말인가? 성서 어디에 그런 말이 있나? 그리고 아무리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도, 그것이 사는 동안의 행위와 상관없을 리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김교신은 “구원이란 개인적 보험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후구원의 부정이라기보다는 이에 대한 교리적·추상적 논쟁은 신학자에게 일임하고 평신도인 자신은 “순간순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 매일 사람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생을 생활하여 죄와 세상을 이기고 개선하는” 구원의 현재성에 집중하겠다고 고백했다. 이런 고백과 삶이 ‘정통’에서 벗어나고 심지어 ‘하나님의 정답’에서도 벗어난다면, ‘이리 살다가 기꺼이 지옥에 가겠노라’고 선언했다. 방점은 앞에 있음을 주의하자. 지옥에 가겠다는 말이 아니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독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지막 일인까지도 이런 삶의 결단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김교신의 신앙고백이다.그런데 이런 김교신의 신앙고백을 읽고, 한 독자가 경고문을 보내왔다. ‘망상을 그치고 오직 성서에만 집중하라’고 단언하는 이 독자의 자신만만함에 김교신은 이렇게 답했다.

 

이단자 칭호를 받기는 이번까지 두 번째다. 익명이므로 필자는 헤아릴 수 없거니와, 일독한 후에 느낀 것은 심신이 아울러 건전(sound)하여야 하겠다는 것이다. 소위 찬송가와 기도만 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이 아니다. 일정한 직업 특히 농공상의 직을 가지고 이마에 땀 흘리는 생활이 심령의 보건에도 대단 필요한 듯하다. 또한 기독신자일지라도 때로는 그 독서의 범위를 성서 이외에 확장하여 지력, 시가, 자연과학 등에도 미치는 것이 보건상 불가피할 것인 듯하다. 반드시 박학 군자라야 기독신자라는 것이 아니다. 난쟁이 두골(頭骨)이나 정구 선수의 팔처럼 기형적으로 발달하기보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더 요긴한 듯하다 할 뿐이다.

 

성서 하나만 읽을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안에 담긴 유대인, 기독인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다른 학문과의 비교를 통해 읽어내야 ‘건전하다’는 말이다. 이는 보통의 의식을 가진 근대 시민이라면 동의할 보편적인 의식이다. 우리는 팔과 다리의 역할만 하면 되었던 전근대사회의 ‘신민(臣民)’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할 터이니 너희는 무조건 꿇어라, 그런다고 그냥 복종하는 이는 시민(市民)이 아니다. 신민이다. 적어도 근대 사회의 건설을 꿈꾸었던 시민 계급이 자기 삶의 터전을 이루고 그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작동 원리로 ‘합의’한 것은, 각자의 의미 추구와 삶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되 이것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법’에 의거하여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자유와 평등의 살림살이였다. 그런데 ‘하나만 하라’니, 결국 손과 발만 하라는 소리다.

 

김교신과 성조지 동인들은 어찌 보면 철저한 신앙인이요 한편으로는 철저한 근대인이었다. 평민들의 역량을 믿었고 그들의 ‘각개’ 전투를 응원했다. 32년 1월 3일자 일기에는 평양 걸인 강만영 씨의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과 같은 방식이 아닌 ‘한 전도자’의 삶을 응원했다. 목회자 자녀로서 동경 유학을 한 이가 일부러 광인 행세를 하며 걸인 무리를 지도한다고 한다. 속한 걸인들이 모두 “먹고 남은 것, 입고 남은 것이 없으면 자기는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는”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는 말에, 김교신은 비록 그의 언행에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교라고 긍정한다.

 

또한 수취인 사망의 연유로 돌아온 성조지 52호가 계기가 되어 알아본 독자 김운경 형제의 사연에도 김교신은 긍정의 끄덕임을 했다. 무지함에 음주는 일상이고 심지어 부친을 구타하기도 하는 이였는데 한번 회개하자 악행하던 열과 기로 전도에 열이 붙은 사람이었다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는데 “날 봐라, 날 봐라” 고성으로 악을 쓰며 얼마나 열심을 내었는지 인후를 상해 토혈을 하고 결국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이 사연을 들으며 김교신은 그의 무모함을 판단하는 대신 “오호라, 무학한 악인 김 형은 ‘날 봐라, 날 봐라!’ 하는 힘이 있었다.”고 그 삶과 죽음을 기렸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특정한 집단 이익을 옹호하거나 지킬 필요가 없는 평민, 평신도는 각자의 신앙대로 제 삶을 살 자유를 누린다는 말이다. 반드시 하나의 방식, 하나의 외침이어야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1932년 12월의 일기는 이런 자유 때문에 평생 평민, 평신도의 삶을 살고자했던 그의 의지가 보인다.

 

이 점으로 보아 나는 일평생 신앙의 전문가 되지 말고 소인(素人) 되기를 원하며, 평신도인 것을 감사하는 바이다. 우리에게는 일가의 지설(持說)을 고집하여 전문가와 싸울 만한 아무 이유도 없고 체면도 없는 자이다. 배울 만한 것이면 언제 누구의 설이라도 수납할 수 있고 불가해의 것이면 학도의 양심으로 모른다고 할 뿐이다. 다만 그리스도를 주로서

 섬기는 이면 함께 할 것뿐이다.

 

 

김교신의 막역한 친구요 동인이었던 함석헌의 말마따나 “성령은 화(和)하는 영이지 동(同)하는 획일주의의 영이 아니다.”(전집 3: 18) 자유혼으로 각자 외쳐도 공동체의 와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성령이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 안에서 맘껏 뛰노는데 무엇이 걱정이랴? 그럼에도 굳이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정답’을 고집하는 이가 있다면 이들은 성령을 모르는 자요, 사람 안에 깃든 이 ‘신성한 하나’를 불신하는 자다.

 

때문에 획일을 강조하는 황당한 제안을 당하여, 신앙인이라면 ‘프로테스트’해야 한다. 『성서조선』을 열심히 구독하던 독자, 황해도 계명학원의 김형도가 보내온 글의 일부를 인용하며 개신교 정신, 즉 ‘프로테스탄트’의 소망을 되새겨본다.

 

풍전등화 같은 저 불들이 꺼지지 아니하도록 우리 성조지는 기름의 대용(代用)이라도 되소서. 그리하여 사나운 광풍에도 꺼지지 않고 더 일어날 강한 불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완전히 타버리고 성서조선 즉 성화낙원(聖化樂園)이 되기를! 마른 풀밭에 불의 대용(代用) 곳불을 놓고 있는 신프로테스탄트들의 소망이다. 현대의 교회야! 너는 인간극의 종막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느냐?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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