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4)
김교신의 그리스도‘론’
- 전집 4권 『성서 연구』 「골로새서 강의」 -
‘이단(異端)’이란 ‘다르게 서 있다’는 말이다. 같은 이름으로 혹은 비슷한 주장을 하지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끝이 달라지므로 따르는 이들을 미혹케 한다. ‘기독신앙이란 교리 논쟁이 아닌 삶으로 살아내는 산 신앙’이라고 주장했던 김교신과 성서조선 동인들에게는 물론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던 단어다. 허나, 김교신과 성서조선 동인들이 끝내 바로잡으려했던 기독 신앙과 정신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바로 서’ 있도록 함이었으니, 결국 큰 범주에서 김교신은 ‘다르게 서 있는’ 이단과의 한판 겨루기를 피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교신은 이단과 치열하게 겨루었던 ‘정통(正統)’이다. 바르게 통하는 이다. 특히 그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는 ‘정통’의 범위를 기독론 교리논쟁을 통해 ‘합의’를 본 신조로 ‘좁혀’ 보더라도 ‘바르게 서’ 있다. 골로새서 1장을 “간결하고도 충족하고 조직적인 기독론”이라고 평가하는 김교신은 그리스도를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로새서
1:15) … 그러므로 예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고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도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채의 형상이시라”(1:3)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환영이요(요한 1:18) 그리스도를 보고도 하나님을 못 본 자는 영적 맹인이다.(요한 14:9) ‘먼저 나신 자’란 것이 원문에는 prototokos인데 관사가 없다. 관사가 없는 것은 장자(長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층 밀접한 것으로 표현한 것인데, 우리 역문에는 나타낼 수 없다. … 먼저 나신 자 즉 장자는 하나님이 ‘낳으신’ 것이요, 만물은 ‘만드신’ 것이므로 그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러스트/고은비
이렇듯 김교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본체’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들과 같지 않다는 신앙고백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 ‘예수’와 하나님의 육화된 영(얼)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로 보았던 류영모는 “우치무라와 김교신은 정통이고 톨스토이와 나는 이단이다”라고 말했다.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한 본체라고 고백한 ‘칼케돈 신조’(451년)에 의거하면 류영모의 평이 맞다. ‘정통’ 기독신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인성에서는 죄 없으신 것 외에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심을, “신성에서는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에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야 하니 말이다.
분명 김교신은 ‘장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에 참여한 존재로서 모든 피조물을 “그의 손으로 지은” 존재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공교한 말”로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케하는 이들, 즉 이단을 배격해야함을 역설하는 바울의 논조에 적극 동조하면서, 김교신은 골로새서 묵상에서 그 어조를 재차 강하게 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2:4) …이 절의 ‘공교한 말’은 성서중에 여기 한번만 쓰인 자이다. … 남을 ‘설복시키는 언사’이다. 납득시키는 힘을 가진 언사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지적이요, 변증적이요, 철학적 또는 신학적으로 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예컨대 그리스도나 석가나 공자나 마찬가지로 성현으로 치고 그 교훈을 배우면 가(可)하고, 그 진리를 내 생활에 섭취(攝取)하면 족한 것이지, 하필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를 구주로 숭배하며, 특히 그 십자가상의 피의 속죄라느니, 부활이니, 재림이니 하는 기괴한 일을 말할 것은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다. 즉 인간 고유의 오만심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에게 종속하는 일 없이 이성의 무한 발전과 인격의 수양, 완성을 시사하려는 것이니 이것도 ‘공교한 말’의 하나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한국에도 ‘구약’이 있고, 동양의 성현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노라고 인정했던 김교신이, 아니 무엇보다도 ‘장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며 우리도 ‘차자(次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된 삶이라고 고백했던 그가,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합’함으로써 모든 인간 실존의 불안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불안과 고통의 현장에 담대하게 당당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설 수” 있다고 천명했던 그가, 예수와 그리스도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장자’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이루어냄을 어찌 ‘이만큼’만 설명하고 말았을까?
이 질문은 같은 성서조선 동인이면서 김교신의 막역한 친구였던 함석헌도 가졌었나 보다. 하여 오랜 기도와 묵상과 신학적 고민 끝에 함석헌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따로’ 보기로 결론지었다. 하여 그는 소위 ‘정통’ 교회들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받게 되었다. 류영모의 영향이 제일로 컸다. 류영모는 ‘삼위일체’라는 논리가 서양 교리사의 특수 정황에서 나온 인간적 궤변이라고 비판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 안으로 온전히 육화되어 인간과 연합한 신성을 류영모와 함석헌은 ‘그리스도’ ‘얼’ ‘하나님의 속사람’이라고 보았다. 루아흐와 다르지 않고 실은 성령과도 동일하다는 말이다.
어머나, 이러면 큰일이다. 삼위(三位)가 이위(二位)로 줄어드니 말이다. 무엇보다 예수의 신성이 위협 내지는 치명적인 손상을 받으니 그야말로 끝이 달라 보인다. 김교신이 바울과 더불어 그렇게나 경고했던 ‘공교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태초부터 존재했고, 하여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함께 참여했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일 뿐이라면, 예수의 선재성이나 유일성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으니 그야말로 ‘이단’사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 점에서 예수와 그리스도를 한 번도 ‘떼어서’ 생각해본 바 없는 김교신은 ‘정통’이라 평가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럼에도 김교신이 같은 본문에서 남긴 다음의 구절들은 내게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20세기의 오늘날에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만 임한다’느니 ‘교회 외에 구원이 없다’느니 하면서 잠꼬대를 부리는 편견자가 한둘뿐이 아닌 것을 생각할 때에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벌써 황차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의 지파이며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것을 자랑하던 바울이 이 진리-비의(秘意)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풍성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은 첫째로 바울의 신경 계통이 지극히 건전하였다는 것과 둘째로 과연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깨달음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하나님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간격을 두시지 않고, 구교도가 생각하는 것처럼[최근에는 바꿔야하는 표현이겠다. ‘근본주의적 개신교도’가 생각하는 것처럼] 구교와 신교 사이에 장벽을 세우지 않으시며, 교회인이 생각하듯이 교회와 무교회 사이에 구제와 멸망의 거구(巨溝)를 세우지 않는다.
교회 ‘밖’에서도 구원상태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예수와 그리스도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은 내 신앙과 신학적 프레임에서는 ‘여전히’ 옳다. 예수 그리스도가 ‘장자’였음 역시 그렇다. 구약의 시대에, 아니 언어가 생기고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을 제 안에 받아 ‘연합’하여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 인간들이 전무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는 ‘임마누엘’의 삶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살아낸 ‘장자’다. 하여 ‘상징’이 되고 ‘의미’가 되고 ‘중심’이 된 유일의 존재다.
마치 광야의 구리뱀이 높이 들리듯이 십자가의 예수가 높이 들렸다는 것은 그의 피가 마술적 힘이 있어 우리 죄를 씻어낸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다. 무한이요 절대인 하나님을 인간이 어찌 다 드러낼까. 오직 제 안에 하나님의 영을 받고 연합한 삶과 죽음(그리고 다시 삶)으로 표현함을 통해서만 그 분을 보일 수 있을 뿐이니,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속사람은 오직 그와 연합하여 살아간 인간을 통해서만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세 번 째 위(位)’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한 인간의 자리이다. ‘차자(次子)’는 오고 또 올 것이다. 그러나 ‘임마누엘’된 삶의 의미를 전하고 힘을 부여하는 상징은 첫 아들, 장자 하나면 족하다. 그래서 여전히 ‘예수는 그리스도다.’ 그래서 결국 다시 ‘삼위’는 ‘일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받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비밀을 깨달은 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반드시 제도교회 안, 특정 교단 안이 아니어도 말이다. 이렇게 고백한다면, 이 말들은 김교신이 못 다한 신앙고백의 끝을 잡고 이은 설명일까 아니면 그가 그리도 경계했던 ‘공교한 말’일까?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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