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0)
율법의 완성, 은혜
- 전집 4권 『성서 연구』 「율법의 완성」 -
“이 바리새인 같으니라고!” 만일 이런 말을 들었다면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는 매우 불쾌할 것이다. 바리새인에 대해 선입견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바리새인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꾸짖으셨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신약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사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냉정한 율법주의자로 묘사되었기에, 기독 신자들은 일단 ‘심정적으로’ 바리새인들을 싫어한다. 더 극단적인 경우는 반(反)하나님적이고 불신앙적이며 위선자, 안하무인에 거짓신앙인과 동의어로까지 생각하면서 반감과 혐오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바리새파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졌던 대안적(혹은 대조적) 삶의 기준이었던 ‘여호와의 규례’(율법)를 어느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경건하게 지켜내려던 종파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마케도니아에서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강대국의 지배를 연이어 받는 동안, 사실 이 바리새파보다 더 ‘경건’하게 ‘여호와의 규례’를 붙든 사람들도 드물었다. 기원전 2세기 즈음 헬레니즘 문화와 그리스적 종교 행태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며’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협하던 시절,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하시딤의 정신과 실천을 이어받으며 생겨난 신앙의 사람들이 바리새파이다. ‘헬라적’인 삶을 따라야 출세하던 시절에, 나아가 유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종교적 탄압과 고달픈 삶으로 이끌던 때에, 그야말로 여호와의 율법대로 세상을 살아내려 스스로를 시대적 조류로부터 ‘분리’(‘바리새’의 뜻)해낸 이들이 바리새파였다.
이교적 신앙 제의에 사용되었던 고기나 음식들은 아무리 싸도, 아무리 맛나도, 아무리 쉽게 구입할 수 있어도 먹지 않겠다. 반드시 십일조를 떼어드리고 난 음식들, 유대율법에서 ‘정결하다’고 명시된 먹거리만 먹겠다. 아무리 큰 이익을 보는 일이라 해도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겠다. 여호와께서 쉼의 거룩성을 선포하신 날이다. 말씀 묵상과 금식 기도를 쉬지 않겠다. 이런 경건한 신앙과 선한 의도, 엄격한 실천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칭찬과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 예수도, 김교신도 이점은 인정했다.
근래에 ‘복음’이라는 말이 다종다양으로 혼용케 되었으나 본래의 의의는 바리새교인과 같이 엄격하게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완전한 의(義)에 달하려는 율법주의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신앙의 의에 달하는 은혜주의를 칭하여 복음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새교인의 노력이 있는 후에라야 복음다운 아름답고 반가운 소식으로 들리며, 율법 밑에서라야 은혜가 고마운 줄 알게 된다. … 결코 바리새교인의 진지한 노력 그것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복음답게 알기 위해서는 우선 바리새주의에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려 ‘분리’ ‘구별’의 기준들을 세부적으로 나누었던 율법조항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향한 경멸과 비난의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나 실천이라 해도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와 적용된 결과에 대한 예측 없이 언제나 지켜야하는 ‘교리’나 ‘주의’로 굳어버리면 오히려 ‘악한’ 도덕적·종교적 칼날이 되어 사람들을 옥죄고 죽이는 법이다. 토라만을 경전으로 여기던 사두개파와 같은 보수적 전통주의자들에 비해, 바리새파 사람들은 구전 율법과 랍비들의 해석도 광의의 율법으로 받아들인 부류다. 예수께서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표현하신 내용들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고 싶어 그들이 범위를 넓히고 해석에 해석을 더하는 동안, 어느덧 613개의 범주로 늘어나버린 율법 조항들은 1세기 평범한 유대인들의 삶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굴레가 되어버렸다.
당시 평범한 유대인들은 삼중의 세금을 내야만했다. 성전세, 유대지방정부에 내는 세금, 거기다 로마식민정부가 강탈해가는 세금까지 ‘빼앗기고’ 나면 먹고 살 돈도 빠듯했던 시절이다. 아니 그 세금 낼만큼을 벌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체납되는 날수가 많아지면 불법자가 되고, 하여 산으로 도망을 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안식일이라고 어찌 쉼이 가능할까. 오히려 이들에게서 안식을 빼앗은 사람들을 향해 ‘율법 정신을 지키며 살아라’ 큰소리쳐야 할 상황에, 세부 율법조항에 매여 일하는 생계형 평민들을 죄인 취급하며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고 ‘의롭다’ 자족했던 사람들이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다. 심지어 자신들은 ‘의롭게’ 안식법을 지키느라 손 하나 꼼짝하지 않으려고 품삯 일꾼들에게 대신 일을 시킨 탓에 생계형 노동자들을 ‘죄인’ 만들었던 바리새인들도 적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이 결코 율법을 나노단위로 쪼개고 세부적인 항목들을 더 늘려서 일거수일투족을 ‘율법적’으로 수행하여 완전에 이르자는 의미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예수께서도 그러셨지 않았나? 성전 한가운데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자신은 율법을 하나도 어긴 적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모습보다, 한 구석에 어정쩡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고 통곡하며 회개 기도하던 세리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 의로운 사람이라고. 오히려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누가복음 18:9-14)
하지만, 어찌 그것이 가능한가? 율법이 정한 금지조항대로 따르고 경건함을 위한 금식과 규례를 모두 다 지킨 바리새인을 놔두고 어찌 ‘죄인’인 세리가 더 의롭다하심을 입을 수 있나? 그게 ‘복음’이라면 세상사는 일이 참 쉬워지겠다. 막 살고 성전에 와서 가슴을 치며 회개만 하면 ‘의롭다’ 인정받겠네? 어이없지만 실제로 많은 개신교도들이 예수가 전한 복음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도 ‘안 지킨’(적어도 ‘값싼 은혜’에 고무된 개신교 신자들이 보기엔) 율법을 우리라고 지킬 이유가 무엔가? 더구나 이 은혜의 시대에? 할렐루야! 구원받기 참으로 쉽구나~.
사실 예수 역시 언뜻 보기에는 ‘율법의 파괴자’처럼 보였다. 안식일의 세부 율법사항들을 지키지 않았던 일들, 그러니까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거나 밀 이삭을 까부러 먹는 ‘일’을 한 제자들을 변호해주었던 사건들만 해도 그렇다. 정결 의례에 어긋난 행동을 한 이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먹는 일도, 율법에 불경건하고 ‘더럽다’고 분류된 일들을 하는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말을 섞고 어울리는 것도, 예수는 여러 면에서 “구(舊)도덕의 파괴자요, 반역자”로 불릴 만했다.
그렇다면 모순 아닌가? 자신은 율법 조항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서 어찌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복음 5:17)고 하셨을까?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아뢰기만 한다면 죄사함을 입는다는 이 ‘은혜’의 복음은 어떤 점에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인가? 다수의 개신교도들이 마술 지우개와도 같은 값싼 은혜로 해석하고 무책임하고 뻔뻔하기까지 한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김교신은 “율법을 완성하러왔다”는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읽어냈다.
도덕률은 표면의 문제가 아니요, 저류의 문제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요, 내심의 문제다. 현대라 할지라도 도덕률은 엄연한 하나님의 부여물이다. 일점일획이라도 폐하기를 용납지 않는다. 완성하고야 말 것이다. … “완전케하러 왔노라”는 원어 plero는 영어의 fulfil 즉 충실, 영일(盈溢)의 뜻이다. 파괴나 배척이 아니라 진화, 발전, 완성케 한다 함이다. … 이렇게 하는 것[세부조항들에 얽매인 율법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하면 그 율법을 완성하는 소이(所以)였다. 그 형식으로서는 파괴하고 내용으로서는 더욱 충족한 의의로써 성취하였다. 개개의 조목을 다기다지(多岐多枝)로 세분하여 서기관보다 더 많은 조목을, 바리새교인보다 더 세심하게 실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반 율법의 행위에 근본 되는 ‘사랑’을 충실케 하는 것이 곧 도덕률 전체를 완전히 실행하는 바이었다. … 사랑이 충실할 때에 우리가 성결함을 얻고 자유함을 얻고 율법은 자연히 행하여지고, 도덕은 형해(形骸)를 벗고 생명이 약동하게 된다. … 그리스도는 능히 그 형해를 털어 버리고 그 핵심만을 끄집어내어 지극히 충실하게 완성하신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넣어 살게 하신 생명이 이 땅에서 제대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율법 정신의 핵심이요 “도덕률의 저류”요 “인간의 내심”이어야할진대,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헤세드’(은총, 은혜)이다. 정죄함이 아니고 용서함이요, 분리가 아니라 감싸 안음이다. 성실하고 착하고 순한 민초들의 일상이 ‘죄’가 되는 환경에서라면 세부율법항목쯤은 훌훌 털고 오히려 ‘은혜’로 인간의 내심을 가득 채우라. 그것이 율법의 핵심이요 완성인 까닭이다. 하나님의 본성인 ‘헤세드’를 내 안에 받아 이를 내 안에서 차고 흘러넘치게 할 때 ‘여호와의 규례’는 ‘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살리는 힘으로 나의 일상 한가운데서 작동할 것이다. 그러니 규례라서, ‘나’만 의롭기 위하여 행하지 말지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생명의 삶을 누리므로 말미암아 그 헤세드로 이웃을 살리는 은혜를 베풀어라. 그게 ‘살아라’하는 창조명령과 ‘살려라’하는 구원명령을 태초부터 인간에게 부여하셨던 하나님의 율법 정신의 핵심이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교신의 그리스도‘론’ (0) | 2015.09.23 |
---|---|
‘기도의 자살(自殺)’ (0) | 2015.09.07 |
온유한 자가 차지하는 땅 (0) | 2015.08.04 |
권위 나눔, 소유 나눔 (0) | 2015.07.29 |
도(道)는 ‘평범하고 밝다’ (0) | 2015.07.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