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에 담그면




찬물에 담그면 
한결 순해집니다.

말린 찻잎이든 
줄기 끝에서 막 딴 식물의 열매든

찬물에 담그면 
그 색과 맛이 순하게 우러납니다.

그러면서도 
식물이 지닌 본래의 성품인 그 향은 더욱 살아나는
자연의 뜻을 헤아려 보는 저녁답입니다.

언젠가부터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하여
애써 물을 끓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찬물에 담근 찻잎은 
시간 맞춰 건질 필요 없이

찬물에 담근 후 
그저 시간을 잊고서 

얼마든지 기다림과 느림의 여유를 누릴 수가 있으니 
마음도 따라서 물처럼 유유자적 흐르고

찬물에 담근 녹찻잎을 그대로 대여섯 시간을 둔 후에도
그 맛이 별로 쓰지 않고 향이 좋아 거듭 찾게 되는 맛입니다.

선조 대대로 우리가 살아오고 있는 
이 땅의 한국은 산이 많고 물이 좋아 

한반도 이 땅에선
예로부터 산골이든 마을이든 물이 흔했기에 

물이라 하면 말 그대로 
바로 떠서 마실 수 있는 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물이란 
우리들 삶의 둘레에 아니 삶의 중심에
가장 흔한 우리들의 생명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10~20년 사이에 
무분별한 경제 개발로 인해 땅은 파헤쳐졌고, 

무구한 세월 동안 
우리의 산을 지켜오던 소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지금도 어딘가에선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돌림병으로 인해 산채로 땅에 묻힌 동물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오늘의 사색은 여기서 그만 두고 싶어집니다.

불과 십여 년 전에만 해도 
마을 어귀마다 긴 줄을 서서 물을 받던 약수터의 익숙한 행렬들

저마다 집에서 준비해 간 물통들마다 넘치도록 
지하수와 약숫물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던 어르신들의 듬직한 발걸음들이 이제는 먼 나라의 풍경처럼 그립습니다.

그때 그 물로 저녁 밥상에 오를 국물과 보리차를 끓여 먹던 이야기들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약수터의 물을 더이상 마실 수가 없게 되던 날로부터
지금껏 저희 집에서도 정수기를 사용해 온 지 
십여 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렇게 정수기를 통과한 물이란
생명수가 되던 자연의 물로부터
미네랄과 자연의 식물성을 다 빼버린
마치 몸에서 혼백이 빠져나간 그저 H2O일 뿐입니다. 

기업들마다 판매하는 생수에선 
제품마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올라와
목넘김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몸은 
늘 물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도 저는 정수기에서 내린 찬물 그대로 
찻잎을 담그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잘 말려서 덖은 후 차가 된 우엉차
손수 딴 국화꽃을 잘 말려서 찌고 덖은 국화차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우리집 둘레에 흔한
모든 식물의 잎과 뿌리와 줄기와 열매와 꽃들이 모두 차가 될 수 있는 오늘날입니다.

차가 되는 제다과정이란
식물이 지닌 독성은 낮추고 약성은 그대로 살려서
색향미를 고루 갖춘 하나의 몸체 곧 사람으로 치자면 진선미를 고루 갖춘 하나의 인격체로 나아가는 과정과 닮았습니다.

그러면서 목넘김이 물처럼 순한 것이 
좋은 차와 좋은 커피와 좋은 음료의 조건입니다.

자연의 식물을 
말리거나 찌거나 덖기도 하고
때론 식물 그대로 찬물에 담그다 보면 

어떤 식물의 잎은 우러나는 속도가 빠르지만
말린 오미자와 로즈힙처럼 속도가 느린 열매도 더러 있습니다.

제각각 식물이 지닌 성품이 저마다 다른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식물이든 
일단 찬물에 담근 후에는 

무엇이든 일찍 변화되기를 바라며 보채고 채촉하던 
그 성급한 마음인 불의 기운들을 누그러뜨리며
하나 둘 욕심을 지워가는 비움의 시간으로 
들뜨던 숨을 내려놓으며 몸은 평화의 땅으로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자유의 몸짓으로
내게 오는 하루가 저절로 흐르는

그저 자연과 물과 마음이 함께 흐르는 시간으로
제 몸도 순하게 흐르는 시간을 홀로 누리면 그만입니다.

저에게 있어 차를 마신다는 건
문명의 이기가 빼앗아간 자연을 
도로 물에 담는다는 생명 부활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게 다시금 자연이 된 물을 
홀짝홀짝 그저 몸속으로 흘려보내다 보면

제 몸은 흐르는 강물이 되기도 하고
한순간 제 가슴은 샘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되기도 합니다.

자연을 찬물에 담근 순한 물이 
늘 제 곁에서 반려차 즉 길벗이 되어주니
오늘도 순하게 하루가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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