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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3)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욕망과 지배 마지막 계명 역시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닌 마음에 품고 있는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성서에서 ‘욕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인 창세기 3장 16절이란 사실을 아셨습니까? 한글성경이 이 구절은 다양하게 번역해서 원래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영어성경을 참고해야겠지요. 우선 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개역개정판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공동번역은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2016. 5. 23.
타부의 경계선이 없는 사회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40) 타부의 경계선이 없는 사회 “타부”라는 말은 본래 폴리네시안 즉, 태평양 군도의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말입니다. 그 뜻은 “금기”, 또는 “접촉하면 안 되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애초의 의미에는, “신성한 존재”, “신적 두려움”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타부”란, 그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사회적 금기로까지 확대된 문화인류학적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부”는 그 사회의 정신적 중심에 무언가 성스러운 영역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시상태에서부터 문명의 상태로 진화해나가는 과정의 현상입니다. 그것이 그 사회의 질서를 나름대로 유지하고 그 구성원들에게 자신을 보다 깊이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2016. 5. 20.
하나님의 칼을 맞으려는가 하나님의 칼을 맞으려는가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하는 말은 그가 매우 선량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사람은 법이 없다면 어디 보호받을 데가 없어 곤경에 처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뭔가 석연치 않다. 왜인가? 그건, 법이 선량한 사람들, 약자들을 보호한다는 전제가 서 있을 때 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법이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놓고 그 권리를 박탈해버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본다. 법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법도(法道)가 아니 법도(法刀)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법은 돈과 권력의 기초 위에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법의 탄생은 언제나 권력자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법은 그 권력자의 이익을 지켜내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을 족쇄에 걸기 위.. 2016. 5. 19.
구원(救援)의 지평, 기어서 넘기 구원(救援)의 지평, 기어서 넘기 - 김기석 목사의 《아슬아슬한 희망》 - 가을의 끝자락, 초겨울의 문턱에서 김기석 목사의 열 번째 책 《아슬아슬한 희망》을 만났다. 꽃들은커녕 곱게 단풍이 든 나뭇잎들에게조차 암담한 계절, 이제는 추운 바람과 눈서리 겪는 일만 남은 계절에, 이 책은 ‘아슬아슬’하게 우리에게 왔다. 이기적으로 저만 챙기게 태어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신학을 하면서 겨우겨우 애써가며 배워온 것들을, 김기석 목사는 그냥 ‘타고난’ 것 같다. 조개 잡고 갈매기 쫓으며 팔랑팔랑 뛰어다니느라 바닥 볼 일 없이 바빴던 어린 시절 나의 개펄에의 추억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려서부터 시선을 바닥에, 땅에 두며 살았다. “온 몸으로 바닥을 기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상한 연민”(12쪽)이 있었다 한다. 개.. 2016. 5. 18.
난도질당한 말씀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5) 난도질 당한 말씀 “왕(王)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書記官) 엘리사마의 방(房)에서 가져다가 왕(王)과 왕(王)의 곁에 선 모든 방백(方伯)의 귀에 낭독(朗讀)하니 때는 구월(九月)이라 왕(王)이 겨울 궁전(宮殿)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火爐)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三篇) 사편(四篇)을 낭독(朗讀)하면 왕(王)이 소도(小刀)로 그것을 연(連)하여 베어 화로(火爐)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왕(王)과 그 신하(臣下)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王)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懇求)하여도 왕(王)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王)이 왕(王)의.. 2016. 5. 18.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구약성서의 대량학살(5)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여호수아 10:1-15 만일 정말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하느님이 이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 난 그렇게 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하느님께서 내게 이러저러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지만 하느님이 남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실 리 없다고 생각하지요? 현대사회에선 국가가 사법권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조차 법률의 판단을 받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신념이 있다고 해도 사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신념이 존중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 십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고대.. 2016. 5. 15.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해 설교비평 모음(4)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해 편집자 주/예전에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는 성서의 ‘비판하지 말라’는 대목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설교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옥한흠 목사는 마태복음의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각도에서 자신의 설교를 구성하고 전개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대목은 교회 내에서 교권적 권위 방어를 위해 비판적 발언을 봉쇄시키려는 자의적 목적으로 자주 등장시키는 수가 많다는 점에서, 본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긴요하다. 옥한흠 목사가 이 설교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바가, 비판이라는 명목 아래 날이 선 말로 형제들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 2016. 5. 13.
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2) 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지극히 높은 신성은 겸손이라는 심연 이외의 모든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1970년대 내가 다니던 신학대학 화장실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었다. “신은 죽었다―니체” 그 밑에는 이런 낙서가 이어졌다. “니체는 죽었다―신” 회의와 신앙 사이에서 고뇌하던 어떤 신학도들은 이런 낙서조차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어떻게 그런 불경스런 농담을 지껄일 수 있느냐는 ‘확신파’도 있었지만! 하여간 인간이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절감하는 것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우리의 생이 .. 2016. 5. 12.
위대한 종님 이현주의 최후의 심판(4) 위대한 종님 놀라운 신유(神癒)의 은사를 받아 숱한 환자를 고쳐 주던 목사님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받고 절망 가운데 헤매던 환자들이 그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다시 살아난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죽은 지 여섯 시간이 지난 소녀를 소생시켰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 사실은 헛소문이었습니다만, 사람들은 그 소문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고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죽을병에 걸린 환자들을 고쳐주어도 사람들은 치료되는 숫자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병에 걸리고 그러다가 끝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놀라운 신유의 종님도 마침내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 2016.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