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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69) 밥 정릉교회에서 길 아래쪽으로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집, 도자기를 굽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비둘기 두 마리가 뭔가를 열심히 쪼아대고 있다. 실외기 아래에 놓인 두 개의 그릇, 사료와 물이었다. 길고양이를 위한 배려라 여겨지는데 그걸 비둘기가 먹고 있는 것이었다. 사료와 물을 놓아둔 누군가가 고양이밥이라 따로 써놓지 않았으니 누가 먹으면 어떨까. 고양이가 나타나기 전까지가 먹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비둘기는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감나무 위에 남긴 까치밥을 까치만 먹진 않는다. 참새도 먹고, 박새도 먹고, 직박구리도 먹는다. 자연은 나누어 먹는다. 고루고루 나누어 먹는 것이 평화다. ‘和’는 벼(禾)와 입(口)이 합해진 말, 먹을 .. 2019. 3. 10.
진심이 담기는 설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68) 진심이 담기는 설교 얼마 전 아는 권사님을 만났다. 다니던 교회에서 상처를 입어 얼마간 유랑생활을 하던 권사님이다. 권사님은 의외의 곳에서 좋은 교회를 만났다며 표정이 밝았다.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정착할 만한 교회를 만났다니 나도 반가웠다. 권사님의 이야기 중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신앙생활을 할 교회를 찾으며 예배당의 크기나 교인수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이 말씀으로 들리는 교회를 찾았는데, 그런 교회가 선뜻 눈에 띄지를 않더라는 것이었다. 정작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저는 마음이 담긴 설교를 듣고 싶었어요.” 유창하거나 뻔한 의도가 담긴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의 진심이 담기는 설교를 듣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 2019. 3. 8.
영춘화 하루 한 생각(67) 영춘화 정릉교회 담장에 영춘화가 한창이다. 봄을 맞는다는 영춘화(迎春花)는 개나리와 닮았다. 노란 빛깔이 그러하고 꽃의 작은 크기가 그러하다. 잔가지로 늘어진 것도 마찬가지여서 멀리서 보면 대뜸 개나리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꽃이 피자 지나가는 이들이 걸음을 멈춰 선다. 가만 서서 바라보기도 하고, 꽃을 보며 빙긋 웃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꽃은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날 좀 보라 잡아끈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꽃은 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라보는 이들에게 말없이 웃음을 준다. 예배당 담장을 따라 핀 영춘화, 교회라는 존재가 우리들의 믿음이 영춘화를 닮았으면. 말없이도 걸음을 멈춰 바라보는 기쁨이 되었으면. -한희철 목사 2019. 3. 7.
봄꽃 2019. 3. 6.
재를 뒤집어쓰다 하루 한 생각(65) 재를 뒤집어쓰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이다. 우리가 한 줌 흙에서 왔음을 기억하며, 참회의 길을 나서며 이마에 재를 바른다. 때마침 ‘경칩’이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은 ‘놀랄 경’((驚)에 ‘숨을 칩’(蟄)을 쓴다. 그림/고은비 땅 속에 숨어 있는 벌레들이 놀라서 깬다는 뜻이겠다. 날이 풀린 줄도 모르고 겨울잠을 자다 놀라 깬 땅 속 벌레들이 다시 한 번 놀라겠다. 겨울잠에서 깨고 나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 온 천지가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드문 재의 수요일이다. -한희철 목사 2019. 3. 6.
소금과 소금통 하루 한 생각(65) 소금과 소금통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는 1.5% 정도였다고 한다. 인구 1,600만 명 중 20만 정도가 기독교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변절한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앞장을 섰던 것은 분명하다. 수는 적었어도 소금의 역할은 충실하게 감당했다. 그 때에 비하면 오늘의 기독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금의 양이 많아졌다. 커졌고, 화려해졌다. 하지만 소금은 장식용이 아니다. 크고 화려한 통을 채우는데 존재의 이유나 목적이 있지 않다. 소금의 소용은 녹을 곳에서 녹아 사라지는데 있다. -한희철 목사 2019. 3. 6.
당신마저 아니라 하시면 하루 한 생각(64) 당신마저 아니라 하시면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예수는 우리의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을 한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가복음 7:27) 유대인 중의 하나라면 모를까, 어찌 예수가 그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그렇지, 여자라도 그렇지, 귀신 들린 딸을 두었더라도 그렇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도 잔인하고 난폭한 일이었다. 어쩌면 예수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의 간절함의 깊이는 얼마나 되느냐?’ ‘너의 간절함은 지극한 겸손에서 길어 올린 것이냐?’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욕설을 쏟아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않았다. 오.. 2019. 3. 4.
문체(文體) 하루 한 생각(63) 문체(文體) ‘문장을 통해 드러나는 필자의 개성이나 특징’을 ‘문체’라 한다. 신기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글에도 글을 쓴 사람만의 특징이 담긴다니 말이다. 문체와 관련,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저자의 문체는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통해서 그런 것처럼, 그가 피하는 단어들을 통해서도 형태를 갖춘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문체를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단어를 피하느냐 하는 것 또한 그의 고유한 문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반쪽만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가 자신의 문체를 형성한다는 것이야 누가 모를까. 하지만 우리의 문체를 결정하는 것 중에는 우리가 피하는 단어들도 있다. 피하여 사용하지 않음으로 지켜가는 나만의 .. 2019. 3. 3.
썩은 것이 싹 하루 한 생각(62) 썩은 것이 싹 ‘씨가 썩은 것이 싹’이라는 표현을 만났을 때, 걸음 멈추듯 마음이 멈췄다. 그 말은 이내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공동번역) ‘씨가 썩은 것이 싹’이라는 말은 말씀 앞에서 이내 그리고 새롭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썩다’ 할 때의 ‘썩’과 ‘싹’이라는 글자였다. 우연일까, 썩과 싹은 생김새가 비슷하다. 모음 ‘ㅓ’와 ‘ㅏ’ 밖에는 다른 것이 없다. 이미 글자에서 썩은 것이 싹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썩’으면 ‘쑥’하고 ‘싹’이 돋는다. 오직 썩은 것만이 싹으로.. 2019.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