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502 나는 밤 너는 별 이제는 괜찮아요 어둔 밤이 날 찾아와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길 어디로 가야 하나 누구에게 말을 걸까 아무도 없는데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도 몰라 그렇게 가끔 어둔 밤이 날 찾아오면 나는 그대로 고요한 밤이 되어도 좋아요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더욱 빛나니까요 긴긴 겨울밤 울며 마음속까지 시린 날 홀로 앉아 바라보던 곱디 고운 밤하늘처럼 내가 그대로 거룩한 밤이 될 수 있다면 너의 고운 두 눈에 맺힌 별처럼 빛나는 눈물이 보일 테니까요 작고 마음이 가난한 내가 그리할 수 있다면 나는 혼자서도 아름다운 밤이 될래요 이름도 없이 슬픈 너는 아름다운 나의 별이 되어서 두 눈 반짝이는 웃음을 보여주세요 2021. 11. 22. 마른잎 하나 하늘이 가을비를 내려주시는 날 나무가 가을잎을 내려주시는 날 모두가 내려앉는 저녁답 숲속 오솔길을 호젓이 걸어간다 모두가 내려앉는 이 가을날 내게도 미쳐 떨구지 못한 것이 무언가 상념의 가지끝에 매달려 허공을 간지럽히는 마른잎 하나 바람결에 비틀비틀 춤을 추다가 쉰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날숨으로 내려앉는 걸음과 들숨으로 오르는 걸음이 날숨으로 엎드리는 몸과 들숨으로 다시 일으키는 몸이 하늘의 숨과 땅의 숨이 날숨과 들숨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지상의 천국이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 사이 좋은 길로 이 가을날 마른잎 하나 걸어간다 2021. 11. 9. 한 폭의 땅 지친 내 마음이 안길 곳을 찾아서 바다로 가는 물안개처럼 흘러서 간다 떠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아서 산으로 가는 산안개처럼 흘러서 간다 그러나 나의 안길 곳은 바다가 보이는 집이 아니오 나의 기댈 곳은 깊은 산골 오두막이 아니오 그리고 나의 안길 곳은 정다운 가족이 아니오 나의 기댈 곳은 믿음직한 벗도 아니오 지친 내가 기대어 안길 곳은 산의 고독과 바다의 침묵을 닮은 고독과 침묵으로 오늘을 맴돌다가 잠시 멈춘 무리를 떠나 홀로 산을 오르시는 예수의 고독처럼 흐르는 카필라 왕궁을 떠나 온세상을 떠돌다가 비로소 앉은 보리수 나무 아래 석가모니의 침묵처럼 흐르는 그 좁은길로 흘러서 하늘문을 여는 이곳 지금 바로 내가 앉은 이 한 폭의 땅 뿐이오 풀잎처럼 두 다리를 포개어 평화의 숨을 고르는 꽃대처럼 허.. 2021. 11. 8. 가을잎 구멍 사이로 초저녁 노을빛을 닮아가는 가을잎 겹겹이 구멍 사이로 하늘이 눈부시다 흙으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려는 듯 한결 느긋해진 한낮의 바람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발아래 드리운 잎 그림자와 빛 그림자를 번갈아 보다가 어느 것이 허상인 지 어느 것이 실체인 지 사유의 벽을 넘나들다가 겹겹이 내 마음의 벽도 허물어진다 허물어져 뚫린 구멍 사이로 하늘이 들어찬다 2021. 11. 1. 시월의 기와 단장 그 옛날에는 지게로 등짐을 지고 올랐다 한다 나무 사다리를 장대처럼 높다랗게 하늘가로 세워서 붉은 흙을 체에 쳐서 곱게 갠 찱흙 반죽 기왓장 사이 사이 떨어지지 말으라며 단단히 두었던 50년 동안 지붕 위에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다가 도로 땅으로 내려온 흙덩이가 힘이 풀려 바스러진다 이 귀한 흙을 두 손으로 추스려 슬어 모아 로즈마리와 민트를 심기로 한 화단으로 옮겼다 깨어진 기와 조각은 물빠짐이 좋도록 맨 바닥에 깔았다 그림 그리기에 좋겠다는 떡집에서 골라가도록 두었다 기와를 다루는 일은 서둘러서도 아니 되고 중간에 지체 되어서도 아니 되는 느림과 호흡하는 일 일일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암막새와 수막새 더러는 소나무가 어른 키만큼 자란 기와 지붕도 보았다 기와를 다루는 일은 일 년 중에서도 시월이.. 2021. 10. 26. 목수의 소맷자락 트실트실 튼 소맷자락 엉긴 나무 톱밥이 귀여워서 모른 척하며 슬쩍슬쩍 눈에 담았다 목수의 소맷자락은 찬바람에 코를 훔치지도 못하는 바보 트실트실 반 백 살이 되는 나무 문살 백 분을 떠안기며 돌아서는 저녁답에 톱밥 같은 눈물을 떨군다 아무리 눈가를 닦아내어도 아프지 않은 내 소맷자락이 미안해서 오늘 보았던 그리고 어릴 적 보았던 트실트실 흙과 풀을 매던 굽은 손들이 나무 껍질처럼 아름다워서 경주 남산 노을빛에 기대어 초저녁 설핏 찾아든 곤한 잠결에 마음에 엉긴 톱밥들을 하나 둘 헤아리다가 오늘도 하루가 영원의 강으로 흐른다 2021. 10. 21. 배 배 하나를 돌려 깎아서 네 식구가 좋게 나누느라 누나 접시에 세 쪽 동생 접시에 다섯 쪽 아빠 접시에 세 쪽 엄마는 입에 한 쪽 저녁 준비를 하느라 잠시 고개를 돌렸다 돌아 보니 아빠 접시에 두 쪽 누나 접시에 두 쪽 이상하다 누가 먹었지 했더니 저는 안 먹었어요 아들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뚝 땐 얼굴빛으로 증거 있어요? CCTV 있어요? 엄마가 가만히 보면서 CCTV는 니 가슴에 있잖아 가슴에 손을 얹으면 CCTV가 켜지니까 지금 바로 작동시켜봐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고 있고 자기가 자기를 알고 있는데 그랬더니 순순히 제가 먹었어요 바른말을 합니다 2021. 10. 14. 하늘은 애쓰지 아니하며 놀이터에서 흙구슬을 빚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흙구슬이 부서져 울상이 되던 날 물기가 너무 없어도 아니되고 너무 많아도 아니되는 흙반죽을 떠올리며 새벽마다 이슬을 빚으시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면 이슬은 터져서 볼 수 없었겠지요 하늘은 애쓰지 아니하며 이 땅을 빚으시는지 물로 이 땅을 쓰다듬으시듯 바람으로 숨을 불어넣으시듯 오늘도 그렇게 새벽 이슬을 빚으시는 손길을 해처럼 떠올리며 저도 따라서 제게 주신 이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애쓰지 아니하기로 한 마음을 먹으며 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밤새 어두웠을 제 마음을 향하여 둥글게 2021. 10. 8. 찬물에 담그면 찬물에 담그면 한결 순해집니다. 말린 찻잎이든 줄기 끝에서 막 딴 식물의 열매든 찬물에 담그면 그 색과 맛이 순하게 우러납니다. 그러면서도 식물이 지닌 본래의 성품인 그 향은 더욱 살아나는 자연의 뜻을 헤아려 보는 저녁답입니다. 언젠가부터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하여 애써 물을 끓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찬물에 담근 찻잎은 시간 맞춰 건질 필요 없이 찬물에 담근 후 그저 시간을 잊고서 얼마든지 기다림과 느림의 여유를 누릴 수가 있으니 마음도 따라서 물처럼 유유자적 흐르고 찬물에 담근 녹찻잎을 그대로 대여섯 시간을 둔 후에도 그 맛이 별로 쓰지 않고 향이 좋아 거듭 찾게 되는 맛입니다. 선조 대대로 우리가 살아오고 있는 이 땅의 한국은 산이 많고 물이 좋아 한반도 이 땅에선 예로부터 산골이든 마을이든 물.. 2021. 10. 5.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