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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299

오두막 숲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산새 소리에 새벽잠을 깨우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집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내려앉는 집 월든 숲속 소로의 오두막 법정 스님의 오두막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 초의 선사의 일지암 다산 초당 초가집과 막사발과 박꽃 그곳에서 나뭇가지 줏어 모아 불을 때서 밥 해먹고 입던 옷 기워 입고 침묵으로 밭을 일궈 진리의 씨앗 한 알 품고서 없는 듯 있는 바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오두막에서 맞이하는 저녁 그 이상을 꿈꾸어 본 적 없이 어른이 되었는데 지금 내 둘레엔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 2021. 7. 13.
삼 세 번의 평화 진입로로 끼어드는 찰라 측방 거울을 스친다 속도를 늦추는 차가 보이면 얼른 진입을 한 후 삼 세 번 비상등으로 뒷차에게 보내는 신호 속도를 늦추어줘서 고맙다는 뜻 그러면 신기하게도 뒷차는 알아들었다는 듯 우리는 사이좋게 달린다 그리고 가끔은 횡단보도 중간에서 보행 신호등을 놓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때도 비상등으로 삼 세 번 이 순간 도로가 멈추고 뒷차가 고요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걸음 속도에 삼 세 번이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러면 또 삼 세 번 또 삼 세 번 삼 세 번 한 점이 되어 숨을 고르면 인도에 올라서서 평화의 숨을 고르신다 하늘 땅 사람 가슴에는 늘 삼 세 번의 숨이 머문다 2021. 7. 9.
빗속을 달리는 저녁밥을 시켰다 빗속에 망설임도 잠시 배고프다 보채는 아들의 성화를 못 이긴다 음식을 내려놓으신 후 달아나시려는 기사님에게 시원한 거 한 잔 드릴까요? 했더니 살풋 웃으시면서 마음만 받겠다고 하신다 다른 기사님들은 테이프를 붙여서라도 음료를 가져가신다고 했더니 그러면 시원한 거 말고 따뜻한 물 한 잔만 주세요, 하신다 온종일 비 맞고... 말씀이 뚝뚝 끊겨도 더 묻지 않는다 얼른 뜨거운 물 반 찬물 반 담아서 커피와 설탕을 조금만 탔다 잠시라도 나무 의자에 앉아서 드시고 가시랬더니 고맙다고 하시며 문을 나가신다 온종일 그칠 줄 모르는 늦은 장맛비가 어스름 저녁 하늘을 짙게 물들이는데 비옷 안으로 삐쩍 마른 나무처럼 오토바이 옆에 서서 떨리던 몸을 녹이는지 걷기에도 미끄러운 빗길을 또 달려야만 집으로 돌아.. 2021. 7. 8.
심심 마음에 일이 없는 심심한 날 땅의 일감을 모아 지피던 열심의 불을 끈 후 까맣게 애태우던 마음이 하얗게 기지개를 켠다 심심함의 터널은 호젓이 걷는 오솔길 마음이 마음을 부르는 고독과 침묵이 보내온 초대장 심심 산골 마음의 골짜기에서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면 심심 하늘에 비추어 내 마음 겹겹이 투명해진다 2021. 7. 6.
사방의 벽이 없는 집 사방의 벽이 없는 집 바람의 벽이 있는 방 오랜 세월을 견뎌낸 나무들이 네 개의 기둥이 되고 나이가 비슷한 나무들이 가지런히 지붕이 되고 누구는 신발을 신고서 걸터 앉아 손님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신발을 벗고서 올라 앉아 주인이 되어도 좋은 에어컨도 필요 없고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벽이 없는 집 부채 하나로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면 스스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신선도 되고 먼 산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물 같이 구름 같이 그리 흘러가는 운수납자도 되고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보고 있으면 그대로 보리수 나무 아래 앉은 부처가 되는 지고 가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서 십자가 나무를 생각하는 바람의 방 이곳에 머무는 사람은 누구든지 길 위의 나그네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2021. 6. 21.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입바람에 날아갈까 손바람에 흩어질까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셋이서 잠잠히 있었지 몸으로 숨 한 점 잇는 일이 허공으로 손길 한 줄 긋는 일이 땅으로 한 발짝 옮기는 일이 순간을 죽었다가 영원을 사는 바람의 길이라며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셋이서 숨 한 점 나누었지 하지만 한 점도 모르는 이야기 몰라도 훌훌 좋은 숨은 바람의 이야기 2021. 5. 31.
펼치다 펼치다 책의 양 날개를 두 손의 도움으로 책장들이 하얗게 날갯짓을 하노라면 살아서 펄떡이는 책의 심장으로 고요히 기도의 두 손을 모은다 느리게 때론 날아서 글숲을 노닐다가 눈길이 머무는 길목에서 멈칫 맴돌다가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내 안으로 펼쳐지는 무한의 허공을 가슴으로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이 감당이 안 되거든 날개를 접으며 도로 내려놓는다 날개를 접은 책 책상 위에 누워 있는 책이지만 아무리 내려놓을 만한 땅 한 켠 없더래도 나무로 살을 빚은 종이책 위에는 무심코 핸드폰을 얹지 않으려 다짐한다 내게 남은 마지막 한 점의 숨까지 책과 자연에 대하여 지키는 한 점의 의리로 하지만 내게 있어 책은 다 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돈 냄새가 나지 않는 책 탐진치의 냄새가 나지 않는 책을 .. 2021. 5. 27.
박모종 좋아요 참 좋아요 너무 좋아요 우리집 마당 돌담 밑에는 엄니가 딸을 위하여 어렵사리 구해오신 올해만 세 번째로 여차저차 이렇게 심어 놓으신 어린 박모종이 살고 있어요 정말 좋아요 비가 오는 날도 좋아요 해가 쨍한 날도 좋아요 아무리 외롭고 쓸쓸한 저녁답이라도 하얗고 순한 박꽃은 새벽답까지 어둠과 나란히 밤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길벗이 되어주지요 초여름부터 둥근 박이 보름달을 닮아 익어가는 늦가을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박꽃은 하얗고 순한 얼벗이 되어주지요 고마워요 참 고마워요 너무 고마워요 2021. 5. 26.
한 음의 빗소리 구름이 운을 띄우면 하늘이 땅으로 빗줄기를 길게 드리우고 무심히 지나던 바람이 느리게 현을 켠다 낮아진 빗소리는 풀잎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로 작아진 빗소리는 거룩한 이마에 닿는 세례의 손길로 땅에 엎드려 울음 우는 모든 생명들을 어르고 달래는 공평한 선율로 낮게 흐르는 한 음의 빗소리에 기대어 가슴으로 깊고 긴 침묵이 흐른다 2021.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