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299

가을잎 푸른 하늘 길 없는 길을 하얀 뭉게 구름 흘러가는 가을날 푸른 무화과잎 소리 없는 소리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아직은 뿌리가 깊어 손인사 하듯 제자리에서 흔들릴 뿐 눈물처럼 떨군 가을잎 한 장 가을 바람이 좋아 얼싸 안으며 돌아 발길에 부대끼다 흙먼지로 돌아가도 이 땅이 좋아 푸른 하늘처럼 2021. 9. 16.
말 한 톨 내려주신 말 한 톨 어디에 두어야 하나 글을 아는 이는 종이에 적어두고 글을 모르는 이는 가슴에 심더라 종이에 적어둔 말은 어디로 뿌리를 내려야 하나 가슴에 심어둔 말은 잊지 않으려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다가 마음밭으로 뿌리가 깊어져 제 육신의 몸이 곧 말씀이 되어 마음과 더불어 자라나고 단지 말을 종이 모판에 행과 열을 맞추어 가지런히 글로 적어두었다면 다시금 마음밭에다가 모내기를 해야 할 일이다 말이란 모름지기 마음을 양식으로 먹고 자라나는 생명체이기에 마음밭에 뿌리를 내린 말의 씨앗에서 연두빛 새순이 움터 좁은길 진실의 꽃대를 지나는 동안 머리를 하늘에 두고서 발은 땅으로 깊어져 꽃과 나무들처럼 너른 마음밭에 저 홀로 서서 꿈처럼 품어 꽃처럼 피울 날을 기다리는 말 한 톨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2021. 9. 9.
오늘의 잔칫상 딸에게 차려줄 때에는 모양새에 신경을 써야 하고 아들에게 차려줄 때에는 양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차려주신 오늘이라는 밥상은 나날이 잔칫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입맛 하나 하나를 다 만족시켜 주는 자연, 그 얼마나 신경을 쓰셨으면, 심지어는 변화하는 우리의 입맛에 발 맞추어, 자연의 진화라는 방법으로 거듭 새로운 잔칫상을 차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새롭게 차려 주신 하루라는 잔칫상에 오늘도 행복한 잔칫날입니다. 어디서부터 눈을 두어야 할 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 지 2021. 9. 8.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나의 익숙한 산책길은 이 방에서 저 방을 잇는 강화마루 오솔길 하루에도 수없이 오고가는 이 산책길에 내 가슴 옹달샘에선 저절로 물음이 샘솟아 지금 있는 일상의 집이지만 물음과 동시에 낯선 '여긴 어디인가?' 나의 가장 먼 여행길은 집에서 일터를 오고가는 아스팔트 순례길 날마다 오고가는 이 여행길에 무엇을 위하여 달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숨구멍으로 보이던 마음을 펼치어 언제나 가슴으로 산과 하늘을 가득 맞아들인다 나의 입산 수행길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오르는 시멘트 돌층계 틈틈이 오르는 입산 수행길에 오르는 걸음마다 고요한 숨으로 평정심을 지키려는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되돌아오려는 이러한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2021. 9. 6.
늘 빈 곳 우리집 부엌에는 늘 빈 곳이 있다 씻은 그릇을 쌓아 두던 건조대가 그곳이다 바라보는 마음을 말끔하게도 무겁게 누르기도 하던 그릇 산더미 그곳을 늘 비워두기로 한 마음을 먹었다 숟가락 하나라도 씻으면 이내 건조대를 본래의 빈 곳으로 늘 빈 곳 하나가 있으므로 해서 모두가 제자리에 있게 되는 이치라니 이 세상에도 그런 곳이 있던가 눈앞으로 가장 먼저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하늘은 늘 빈 곳으로 이 세상을 있게 하는 듯 구름이 모여 뭉치면 비를 내려 자신을 비우듯 바람은 쉼없이 불어 똑같은 채움이 없듯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던가 가슴에 빈탕한 하늘을 지닌 사람 그 고독의 방에서 침묵의 기도로 스스로를 비움으로 산을 마주하면 산이 되고 하늘을 마주하면 하늘이 되는 기도의 사람 늘 빈 곳에선 떠돌던 고요와 평.. 2021. 8. 31.
투명한 밑줄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글을 만나면 연필로 밑줄을 그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우연히 보게 될 뒷사람을 위한 밑줄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글을 만나도 밑줄을 긋지 못할 때가 있다 어쩌면 그건 만에 하나라도 뒷사람에게 아픔이 될까 봐 긋지 못한 밑줄은 내 안으로 펼쳐진 대지의 땅으로 닻을 내린다 한 줄기 뿌리처럼 수직으로 그은 내 영혼을 위한 투명한 밑줄 그렇게 마음 깊이 새기고 새긴 밑줄들은 언제 어디선가 새로운 길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주저앉으려는 날 붙드는 하늘이 내려준 동앗줄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그리고 어느 날 내 안에서 익힌 진실이 과실처럼 영그는 날 오늘 닻을 내린 투명한 밑줄을 끌어올려 싱싱한 진리의 열매를 뒷사람과 함께 먹고 마시리라 2021. 8. 26.
박잎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네 철대문으로 드나들 적마다 박잎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네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말이 없으시던 커다란 아버지 손처럼 순하게 내가 뭘 잘한 게 있나 무심코 묻기보다 몇 날 며칠을 두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여름 내내 혼자 있을 적에 아무리 땀이 흘러도 에어컨을 틀지 않은 일 하나 그거 말곤 별로 없는데 그 때문인지 그 불볕 더위도 어느새 물러나 어제 처서를 지나며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부쳐주신다 그래서 나도 화답으로 양어깨에 맨 보따리가 아무리 버거워도 박줄기처럼 대문 위로 팔을 뻗어서 순하디 순한 박잎과 손끝으로 악수를 나누었지 내 머리꼭지 위에서 둥근 보름달이 내려다보며 순한 달무리로 가슴속까지 쓰다듬어주네 2021. 8. 24.
다 비운 밥그릇 아들이 비운 밥그릇에 밥풀이 군데군데 붙어 있습니다 개미 백 마리가 모여서 잔치를 하고도 남겠네, 했더니 에이, 거짓말이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러면서 얼른 자리를 뜨려고 합니다 쌀 한 톨이 되기까지 농부의 손길이 천 번도 더 간다, 했더니 못 이긴 척 숟가락을 들더니 박박박 긁으며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소리는 안 내면서 깨끗이,라고 했더니 우리집에 키우는 강아지처럼 핥아먹습니다 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다 비운 밥그릇을 보니 미안한 마음 한 톨 덜었습니다 2021. 8. 23.
말이 되지 못하여 목으로 삼킨 ㄱ 가슴에 고인 ㄱ은 그리움으로 흐르고 손끝에서 맴돌던 ㄱ은 글로 새겨지고 발아래 떠돌던 ㄱ은 길이 됩니다 그렇게 땅으로 내려온 ㄱ은 첫발자국을 내딛는 첫글자가 되었습니다 땅속으로 뻗으며 ㄱ으로 꺾인 나무 뿌리의 발걸음처럼 강직하게 하늘로 뻗으며 ㄱ으로 꺾인 나뭇가지의 손길처럼 푸르게 이 세상에 그리움으로 가득한 무수한 ㄱ들은 내려주신 사랑의 첫소리 글자입니다 2021.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