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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권위 나눔, 소유 나눔

by 한종호 2015. 7. 29.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8)

 

권위 나눔, 소유 나눔

- 전집 4성서 연구』 「산상수훈편 -

 

 

저 이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질까?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고 배고픈 이들에게 떡을 먹인 이라는데, 저이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아닐까? 예수를 따라 산 위에 오른(마태복음), 혹은 한적한 평지에 다다른(누가복음) ‘무리들은 온 존재를 집중하여 예수의 입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필시 살리는 말을 할 것이니, 필시 숨통이 트이는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니, 그 첫 마디가 어찌 기대되지 않으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복스럽도다, 가난한 이여!” 어이없을 일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가난한삶이 얼마나 비참한데, 어찌 가난한 이들이 복되다 하는가?

 

천국이 저희 것인 까닭이다.” 이건 또 무슨 역설인가? 더구나 3인칭 단수 현재형 동사(estin)를 사용하여 가난한 이가 지금 천국을 소유한다.’고 선포하고 있으니 이 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요즘 청()년들의 표현에 따르면 ‘21세기 대한민국헬조선이라는데, 용어의 적절성이나 기원 분석에 대한 부분은 일단 접어두고라도, ()년들이 느끼는 현재적 삶에 대한 응시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우리의 현재가 지옥같다는 말이니, 예수의 저 복음은 오늘 이 땅에서 선포되어도 고스란히 당혹감을 자아냈을 일이다. 지금 여기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더구나 가난한 이가? 이렇게 모인 무리들을 당황시키며 시작된 예수의 산상수훈은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메시지들로 이어져 갔다.

 

 

 

 

김교신은 산상수훈이 예수 사역의 정점에서 선포되었다고 보았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전했다기보다는, 시간 순서로 따지자면 도회지에도 가보고, 소위 랍비와 바리새인, 제사장들도 만나보면서 소위 가진 자들의 오만과 편견과 아집을 온몸으로 경험한 뒤에 비교적 후반기에 이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론이었다. ‘이런 심오하고 핵심적인 말씀이 예수 사역의 초반기에 나왔을 리 없다. 서생의 이상론이나 천재의 직감이 아니라 땀과 피로써 실험한 [예수의] 인생 기록이다.’ 이것이 김교신의 이해였다.

 

마태복음은 신약성서의 초두에 있고, 산상수훈은 기재된 설교 중 제일 처음에 있으므로 이것을 예수 전도 시초의 설교라 하여, 그 교훈의 고원(高遠) 완벽함을 도리어 신학교 교문을 갓 나온 전도자가 세고인정(世故人情)과 교회 관습에 통함이 없이, 실행성이 결핍한 궤변의 공상으로써 공연히 고도의 도덕률만 제창한 것이라고 교훈의 진가를 얼마씩 할인하려 함은 불소(不少)한 오해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도회지 전도 실패의 경험과 복음전도자로서 두루 다니는 동안 만났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성찰하며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어떤 이들에게 주로전달되는지를 체험적으로 깨닫고, 자기 인격 안에 체화시킨 일종의 자서전적 고백이 산상수훈이라는 주장이다. 평소 자신을 전문가가 아닌 공부하는 소인(素人)’이라 여겼던 김교신인 만큼, 여기서 산상수훈의 선포시기를 놓고 그의 추론이 성서학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한 시도이다. 다만 김교신의 이러한 추론을 읽다보니, 온전히 그리스도이시나 또한 온전히 한 인간이셨던 예수가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치열하게 율법을 묵상하고 진지하게 사람들을 만나며 청년의 때를 지냈을 지가 떠올라, 산상수훈의 말씀이 더욱 팔딱팔딱 살아서 전달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 시절의 무리들처럼 가난한 조선 백성들의 입장에서 8복의 첫 구절을 읽으며, 김교신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가난한 이가 천국을 소유할 복을 현재 누릴 수 있다면, 김교신의 표현마따나 이것이야말로 운행하던 태양이 서게 되고 고정하였던 지구가 공전하게 된 것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인류 사회를 전도시키는 혁신이다. 이 반전과 역설 가득한 문구를 접하여 역시 기도하고 공부했을 김교신은 누가와 마태를 비교하며 천국을 소유할 가난을 묵상했다. 먼저 누가복음 기자가 강조한 물질적 가난이다.

 

빈자의 고통은 빈자라야 안다. 이 일구가 궁중에 기거하는 법왕의 훈유가 아니고, 구유에서 생장하여 목공의 집에서 장성한 나사렛 예수의 말씀인 데에 중량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그것이 곧 천국을 획득하는 필연적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나 천국에 들어감에는 부자보다 빈자가 유리함이 많다. 예수께 와서 영생의 도를 묻던 청년은 그 소유 재산이 많음으로 인하여 얼굴이 변하고 근심하며”(마가복음 10:17-22) 물러갔다. 가난한 것이 오히려 천국을 향하는 자극을 주는 것이니, ()은 소원할 만한 처지요, 가난한 자는 복스러운 것임을 알 것이다.

 

성서를 읽으며 나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권위 나눔소유 나눔이라고 요약해왔다. 그것이 권력이든 소유든 내 것을 확장하고 축적하는 삶은 ()하나님적이다. 그런 욕망은 이 땅에 수직적 구조를 공고히 하게 되고 소수의 권력자와 부자들만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건 아브람이 떠났던 갈대아 우르로부터 이집트, 바벨론, 군주제 시절의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 시절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아니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의 시절인 오늘날에도 한결같다. 하나님 보시기엔 아름답고 고귀한 레바논의 백향목과도 같은 순수하고 착한 평민들을 절대적 가난으로 몰아넣고서 꼭대기에 오른 왕과 부자는 결코 쉽게 자발적으로 권위를 나누고 소유를 나누지 않는다. 하여 그들은 천국으로부터 멀다.

 

그러나 영화 <카트>에서도 보지 않았나? 내 아이 수학여행 갈 돈을 마련하느라 악착같이 일을 한 가난한엄마는, 아이가 급작스레 아파서 병원 응급실에 가 동동거리는 동료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 그 피 같은돈을 쥐어주고 돌아온다. 아니까. 아픈 아이를 둔 가난한 엄마의 심정을 아는데 어찌 내 소유를 나누지 않나! 현실에서도 그렇다. 평생 모은 돈을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선뜻 내어놓는 이들은 대개 가난한 이들이다. 이웃의 어려움에 작은 힘을 보태고, 그러고도 내가 했다 우쭐거리며 스스로 높이지 않는 이들은 대개가난한 이들이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아버지를 일찍 여읜 집안의 장남으로,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나고 자라며 그들이 기꺼이 권위와 소유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을 예수라서, 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란 별 것 없다. 이웃과 평등하게 형제자매로 살아가면서(권위 나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소유 나눔) 현재를 살아내라는 복음을 가난한 자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빨리 받아들이는 것을 체험하면서, 예수는 단언할 수 있었으리라. 복스럽도다! 가난한 이여! 천국이 지금 그의 것이다! 김교신도 이 지점을 보았지 싶다. 이웃을 짓밟아야만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반()하나님적 시스템에서 가난하다면 차라리 그게 복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형제자매와 권위를 나누고 소유를 나누며 천국을 살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한편 김교신은 마태복음 기자가 강조한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에서도 천국을 지금 가진이의 품성을 묵상했다.

 

성 마태는 주의면밀하게 심령이 가난한 자라 하였다. 학식으로나 제반 덕행으로나 내심에 자긍할 아무 것도 인식한 것이 없는 자가 제일 심한 빈자(貧者)이다. 이렇게 보아서 최대 빈자의 하나는 사도 바울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은 고백하여 말하기를 대개 내 속 곧 육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오니, 선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그대로 이루는 것은 없는지라.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로마서 7:18-24)

 

하나님 안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했노라고, 유명 학자나 유명 목회자 밑에서 성서공부를 했노라고, 교회(와 사회) 안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교만에 빠진 이들은 보통 자기 권위를 내세우기 마련이다. 이웃 위에 우쭐대는 심성과 태도를 가지게 된다. 마태복음 기자와 함께 김교신은 이 역시 천국으로부터 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심령이가난한 자, 도대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내 안에서 그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이는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겸손할 것이므로 그는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하나님 나라는 권위를 나누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내가 이웃 위에서주장할 나만의 권위라는 것이 전혀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내 마음 가운데 받은 이라면 누구나 평등한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나라이다. 그러니 가난한 이여, 또한 심령이 가난한 이여! 복되도다. 지금 천국이, 그 통치 질서가 그의 것임이기에.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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