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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첫 돌

by 한종호 2021. 6. 11.



돌아보니 까마득하다. 같은 한해가 같은 길이로 갔지만 지난 1년은 유독 길기도 하고 순간순간 선연하기도 하다.


3월 25일은 단강교회가 세워진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무모하게도 창립예배 드리던 날 어딘지도 모르는 것에 첫 발을 디딘 이곳 단강.


감리사님 차를 타고 단강으로 향하여 어딘가 땅 끝으로 가고 있지 싶었던 생각. 굽이굽이 먼 길을 돌때마다 거기 나타난 작은 마을들, 여길까 싶으면 또다시 들판 하나를 돌고. 그러기를 몇 차례, 막상 도착한 마을은 떠나며 가졌던 나름대로의 생각이 그래도 쉬운 것이었음을 한눈에 말해주고 있었다.


어딘들 어떠랴 했던 마음속 막연한 낭만기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생존의 현장이구나’ 아마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춘설이 섞인 찬바람이 어지러이 몰아쳤던 그날, 예배실로 쓸 좁은 사랑방에 다 들어갈 수 없어 마당에 둘러서서 첫 예배를 드리며, 내가 지금 어디에 선 건지, 이렇게 시작되는 내 목회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 건지, 어쩜 모든 이로부터 잊히는 삶을 살 필요가 있겠다 싶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겹쳤다.


작은 쪽지 하나에 급하게 타이프를 친, 그 순서지에도 없는 담임자 인사를 하며 난 생각지도 못했던 눈물을 떨궈야 했다.


“지금 우리가 선 이 땅을 우리의 후손들은 분명 거룩한 땅이라 부를 것입니다.”


선언하듯 인사를 대신할 때 뜨거움이 목젖으로 올랐다. 부족한 자 이 땅에 세우시는 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어느 것 하나 기억 못하지만 대부분은 위로였으리라, 손을 잡고 안쓰러움으로 말을 건넸던 많은 사람들. 예배 후 사람들은 돌아갔다. 장모님이 눈물 닦는 모습을 우연히, 그러나 착잡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걸 알기까진 얼마간의 시간이 걸려야 했지만 그때 난 휑하니 혼자 떨궈진 샘이었다. ‘떨궈진’이라는 말이 맞다. 그때 그 자리 그 시간에 대해 정말로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었다. 인간의 우연을 당신의 필연으로 바꾸시는. 그게 님의 뜻이라지만.

그게 꼭 1년 전의 일이다. 지금의 붉은 벽돌, 아담한 예배당과 사택이 있기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모두가 내겐 귀한 교훈이었다. 흔들릴수록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어려웠지만 고마운 시간이기도 하다.


보통 창립 1주년이 되면 초청장을 돌려 손님을 청하고 음식을 차려 잔치를 벌이는 것이 상례인 줄 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조용하게 지나기로 했다. 창립예배, 기공예배, 봉헌예배, 그동안 큰 행사가 계속되었는데 또 한 번 잔치를 한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에게 ‘잔치하는 교회’라는 인식을 주는 건 아닌가 싶었다.


잔치 대신 동네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셔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일하실 때 햇빛 가리시라고, 땀 닦으시라고 수건을 준비해 선물로 드렸다.


조촐하게 끝난 행사였지만 창립 1주년을 맞는 우리에겐 새롭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주님, 저희가 첫 돌을 맞았습니다. 아직 어린 것이 뭘 알겠습니까만, 엄마 얼굴 알아보고 엄마 보면 좋아 웃는 아기처럼, 우리도 당신 모습 알아보며 즐거워하게 해주소서.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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