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9

말 안 하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2) 말 안 하기 며칠 전 ‘더욱 어려운 일’이란 제목으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제 입이 모르게 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세상이 놀랄 만한 좋은 일을 남모르게 하는 일도 어렵지만, 그 일을 하고서 입을 다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누군가가 댓글을 달았다. “제 입이 모르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대하는 순간 오래 전에 읽었던 글 하나가 떠올랐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 명의 수도자가 기도를 드리기 위해 동굴로 들어가며 한 가지 서약을 했다. 일 년 동안 기도를 드리되 기도를 마치는 날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이.. 2019. 9. 14.
바보여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0) 바보여뀌 누구 따로 눈길 주지 않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일부러 멈춰 손길 주지 않으니 얼마나 자유로운지 졸졸졸 흐르는 개울가 풀숲이나 벼 자라는 논둑 흔한 곳 사소하게 피어 매운 맛조차 버린 나를 두고 바보라 부르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나는 괜찮다 은은하고 눈부신 누가 알까 내가 얼마나 예쁜지를 하늘의 별만큼 별자리만큼 예쁜 걸 사랑하는 이에게 걸어줄 목걸이로는 사랑하는 사람 기다리는 등불로는 이보다 더 어울릴 것 어디에도 없는데 아무도 눈여겨보는 이 없어 아무도 모르는 몰라서 더 예쁜 이름조차 예쁜 바보여뀌 2019. 9. 14.
무임승차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8) 무임승차 몇 번 KTX를 탄 적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놀란다. 운행하는 횟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런데도 이용하는 승객이 많다는 것, 달리는 기차의 속도가 엄청나다는 것 등이다. 오후에 떠나도 부산 다녀오는 일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또 하나 놀라게 되는 것이 있는데, 기차를 이용하는 과정이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 창구에서 따로 표를 끊지 않아도 된다. 기차를 타러 나갈 때 ‘개찰’을 하는 일도 없어, 플랫폼에서 기다렸다가 알아서 타면 된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표 검사를 하는 일도 없고(물론 승무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체크를 한다 싶지만), 목적지에서 내렸을 때도 표를 검사하지 않은 채 역을 빠져나간다. 표를 괜히 구매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중고.. 2019. 9. 14.
묻는 자와 품는 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7) 묻는 자와 품는 자 가을이 되면 습관처럼 꺼내 읽는 책이 있다. 릴케의 이다. 겹겹이 친 밑줄들 중 대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묻는 자는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눈길로 당신은, 당신을 가슴에 품은 자를 바라봅니다.” 이 가을엔 물음을 멈추고 다만 품게 해달라고, 같은 기도를 바친다. 2019. 9. 14.
겸손의 밑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 만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7) 겸손의 밑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 만이 샤를르 드 푸코는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는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만 살겠다고 다짐을 한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기 위해 성지 나자렛으로 떠났던 그는 사하라의 오지 투아렉 부족들 사이에서 살다가 그들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삶은 하나의 씨앗이 되었다. 프랑스의 몇몇 젊은이들이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에서 그의 삶을 따라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은 샤를르 드 푸코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찌 그 대답이 쉬울 수 있을까. 사막을 지난 자 만이, 겸손의 밑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 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지 싶다. 2019. 9. 13.
더욱 어려운 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6) 더욱 어려운 일 기회가 되면 교우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이 놀랄 만한 일을 하되,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조용히 즐기라고. 그것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태복음 6:3) 하는 것 아니겠냐고. 목사는 불가능한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선수다. 말이 좋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도록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 어쩌다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해도 그보다 더 어려운 것 하나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제 입이 모르게 하는 것! 2019. 9. 12.
시간이라는 약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5) 시간이라는 약 정릉교회 목양실은 별관 2층에 있는데, 창문에 서서 바라보면 바로 앞으로는 삼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겨우 자동차 교행이 가능한 길 세 개가 서로 만난다. 여러 번 때운 자국이 남아 있는 도로에는 부황을 뜬 자국처럼 맨홀 뚜껑들이 있고, 대추나무에 연줄 걸린 듯 전선이 어지럽게 묶인 전봇대 여러 개, 자동차보다도 애인 만나러 가는 젊은이가 걸음을 멈춰 얼굴을 바라보는 반사경 등이 뒤섞인 삼거리엔 늘 차와 사람들이 오고간다. 삼거리라 했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 개의 길이다.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길까지 합하면 사거리가 되는 셈이어서 열십자 모양을 하고 있다. 정릉에는 유난히 언덕이 많고 골목길이 많은데 예배당 앞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복잡한 길 주변.. 2019. 9. 10.
저만치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4) 저만치 우연히 소월의 시 ‘산유화’를 대하는 순간, 떠오른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험에 나왔던 문제가 있다. 당시 시험문제의 예문으로 주어진 시가 소월의 ‘산유화’였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라는 시에서 소월과 두보의 시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아서 쓰고, 그 이유를 쓰라는 문제였다. 문제를 대하는 순간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한국과 중국을 대표할 만한 두 시인의 시 세계를 어찌 단어 하나로 찾아내라는 것일까, 그런 일이 가당한 일일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답은.. 2019. 9. 10.
폭우 속을 걷고 싶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2) 폭우 속을 걷고 싶은 태풍 링링의 위력이 대단하다. 귀엽다 싶은 이름을 두고 어찌 저리도 당차고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지. 하긴, 세상에는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들이 많은 법이니까.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이 땅 이 계절, 너무 심하게 할퀴지는 말라고 당부를 하고 싶다. 보통 바람이 아닐 것이라 하여 예배당 입구의 화분도 바람을 덜 타는 곳으로 미리 옮겨두었는데, 때가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람이 상륙작전을 하는 것 같다. 비의 양은 적지만 불어대는 바람은 실로 대단하여 이런 날카롭고도 묵중한 바람의 소리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지 싶다. 동화 ‘소리새’를 쓰며 썼던, 잘 되지 않는 긴 휘파람 소리를 낸다.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 .. 2019.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