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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톺아보기

가면과 맨 얼굴

by 한종호 2017. 4. 11.

김기석의 톺아보기(31)


가면과 맨 얼굴


●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


“난 점점 기독교가 싫어져요.”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하더라.”


“그래서 행복하세요?”


“뭐야? 내가 왜 행복해?”


“기독교인들의 뜻대로 되었으니 말이에요.”


“얘가 노골적으로 비꼬네. 트럼프를 당선시킨 그 세력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려니와, 기독교인들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과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승리주의와 편협한 도덕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참 유감스러워요.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타겟으로 삼아 동성간의 결혼과 낙태에 반대한다는 도덕주의적 캠페인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렇다더라. 문제는 그들의 도덕주의가 다른 인종, 다른 이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포용할 여백이 없다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보면 그들은 매우 선량한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진실에 충실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역사를 꿰뚫어보는 비전이 없어. 그건 좀 잔인한 말일수도 있지만 죄야. 무지함이야말로 악이 기생하는 텃밭이기 때문이야. 바로 보지 못하면 언제나 악하고 영리한 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마련이야.”


“가장 눈을 크고 뜨고 있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안목이 협소해지고, 생각이 천박해졌지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일 거야.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뭔가를 지키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거든. 부자들이 보수적인 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싶어.”


“언젠가 교회가 단순한 평안을 받아들이자마자 이내 권력에 의해 부패된다고 하셨지요?”


“그건 내 말이 아니라 쟈크 엘룰의 말이야. 콘스탄틴 이후의 교회의 범죄는 정치권력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정당화 과정을 통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힘 있는 사람들 편을 들면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편드는 하나님을 배반하기 시작한 거지.”


“하나님이 편을 든다는 말씀이 좀 낯설게 들리는데요.”


“낯설 것 없어.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이 더 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한 공동체 속에서 소외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야. 고아, 과부, 나그네…. 예수님은 심지어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 이야기를 하시잖아. 그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야.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기독교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보수적인 어느 신문의 논객이 일어나 ‘애국 기독교계’가 다 들고일어나 이 좌파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하겠니. 나는 아주 모멸감을 느꼈어. ‘아, 우리가 여기까지 전락했나’ 하는 생각에 아득해지더라.”





●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에 한 말도 생각나네요. ‘미국 대통령이 하겠다고 일단 말을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 낫다.’ 저는 당시의 그 기사를 보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 떠올랐어요. 바다에서 나오는데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 개나 된다는 짐승 말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 구절이지요?”


“13장일 거야. 한번 찾아서 읽어보렴.


“아, 여기 있네요.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치 아닌가요?”


“그래도 조심해라. 어떤 사람을 곧바로 묵시록에 나오는 이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단다.”


“미국이 반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오폭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무고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들도 다 살고 싶은 생명인데 말이에요. 그 속에서 다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그들은 마음에 새겨진 지옥의 풍경을 평생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야 하겠지요? 어쩌면 그것은 죽음보다도 잔인한 일일 거예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게 아도르노이지요? 정말 세상에 희망은 있나요? 우리는 남산에서 만난 단풍의 고움을 마음껏 노래해도 되는 건가요? 테러를 물리치기 위한 방법이 꼭 폭력이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묻는구나. 그게 질문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이야. 최근에 저 아픔의 땅 시리아에서 사린 가스로 보이는 화학무기가 살포돼 아이들 20명을 포함해 7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어. 특히 볼이 불그레한 예쁜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어.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야. 꾀꼬리가 하나님께 가서 불평을 했다더라. 개구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대. ‘가서 노래를 계속하려므나.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시끄럽잖니.’ 맞아. 그런 거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불러야 할 아름다움의 노래를 포기해서는 안 돼.”


“……”


● 맨 얼굴을 보는 용기


“세상이 가장 어두운 것은 꿈이 사라지는 때일 거야. 정현종 선생의 <요격시 2>가 떠오르는구나. 내가 몇 차례 읽어준 적이 있는 데 기억날 거야.”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떨어지면서 새가 되어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크게 뉘우쳐 자폭했습니다.

재규어 미사일은 떨어지는 순간 꽃이 되었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비둘기가 되었습니다.

지이랄 미사일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도라이 미사일은 사막에 떨어지면서 선인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악마 미사일은 어떤 집 창앞에 떨어지면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디스페어 미사일은 어떤 집 부엌으로 굴러들어가 숟가락이 되었습니다.

플레이보이 미사일은 어떤 아가씨 방으로 숨어들어가 에로스가 되었습니다.

머어니 미사일은 어느 가난한 집 안방에 들어가 금이 되었습니다.

우라누스 미사일은 땅에 꽂히는 순간 호미가 되었습니다.

제구덩이 미사일은 저를 만든 공장으로 날아가 그 공장을 날려버렸습니다.

머커리 미사일은 아주 작아져 어떤 아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속삭였습니다: 이걸로 엿이나 바꿔 먹어.

……

우리는 저 시체들의 폐허 위에서 부르짖습니다

(UN의 힘을 훨씬 더 강화하면서)

UN은 무기 개발을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중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


“정말 발사된 미사일을 새와 나비와 비둘기와 물고기로 변하게 하는 시스템이 개발되면 좋겠네요.”


“허황한 꿈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꿈을 끝끝내 버리지 않아야 그런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결국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이겠구. 문제는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거야.”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오작동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지 않나요? 미움과 불신과 멸시를 생산하고 또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 말이에요.”


“그 시스템이 붕괴된 까닭은 뭘까?”


“욕심 때문이겠지요.”


“욕심?”


“예, 더 가질 욕심, 더 지배하려는 욕심 말이에요.”


“그렇겠구나. 한 번만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면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텐데. 굶주린 아이들의 슬픈 눈망울, 공포에 질린 여인들의 퀭한 눈망울, 몸이 찢기고 잘린 사람들의 이지러진 눈망울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그리고 그 눈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의 인내력만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 난장판이 되지는 않을 텐데….”


“사실 우리는 그런 얼굴과 마주칠 기회조차 박탈당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분들과 맞닥뜨리게 되면 저도 그 눈길을 피할 것만 같아요.”


“왜?


“그 눈은 뭔가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에 색칠을 하나봐. 그들을 비인간화시킴으로 자기들의 지배 욕망을 정당화하는 거지. 피에로는 슬픈 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웃거든. 누군가의 맨 얼굴을 대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화장기 없는 얼굴을 말하는 거 아니지요? 그래요,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도 무거운데 남의 고통과 슬픔과 대면한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인 것 같아요.”


“예수님은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기 눈에서 먼저 티끌을 빼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언제부터인가 우리 이웃들의 남모를 고통에 눈길을 주고 그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어.”


“그게 잘 안 돼요.”



● 가면 쓰기, 가면 씌우기


“자기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고 욕하고 없애려는 이들은 그들에게 어떤 가면을 씌우는 것 같아.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원수이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다’, ‘그들은 사탄이다.’ 이렇게 가면을 씌움으로써 그들은 맨 얼굴을 대하는 고통 없이 그들을 파괴하는 거지. 그런데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을 철저히 타자화시키고 물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얻는 것은 세상의 평화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야. 강자의 이익일 뿐이지.”


“그들은 자기 스스로도 가면을 쓰는 것 아닌가요? '나는 의롭다'는 가면 말이에요?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도록 해주는 보호막으로서의 가면 말이에요.”


“맞아. 그런데 가면 쓰기를 전략으로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략에 부화뇌동하면서 가면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 가운데 <예언자>라는 중편이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가면놀이를 여왕봉이라는 술집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해서 보여주고 있어. 이야기는 여왕봉이라는 살롱에 새로운 마담이 오면서부터 시작되는 데, 마담은 이상한 술집 규칙을 강요하지. 밤 10시가 되면 손님들과 여급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일제히 가면을 써야 한다는 거야.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단골손님들도 어느덧 그 규칙에 익숙해지지. 가면을 쓴 사람들은 맨 얼굴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스스럼없이 해. 그건 손님들이나 여급들이나 마찬가지야. 가면은 인격이 없으니까. 손님들은 일단 가면을 벗으면 가면을 쓰고 했던 행동과 무관한 사람처럼 행동했지. 작가는 이렇게 말해. ‘가면이란 이를테면 우리들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발산을 규범화시켜 주는 풍속적 방편이지요. 그 서양의 가면 무도회라든가 우리 나라의 탈춤처럼…. 가면은 어떤 추악스런 본능적 욕구의 발산도 그것을 덮어씀으로 하여 하나의 당당한 풍속으로 용납받을 수 있습니다. 음흉스런 지혜지요.’ 기가 막힌 통찰 아니니? 가면은 결국 현실을 ‘허위’의 놀이로 바꾸는 기제인 셈이야. 손님들은 그 가면놀이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홍 마담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다는 걸 짐작조차 못하고. 철저한 타자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마담은 손님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한 도붓장수 개 후리듯 그들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거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렇게 가면이 씌워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정치인들이 대표적이지.”


“그들은 가면을 씌우는 사람들 아닌가요?”


“씌우는 사람인 동시에 씌워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거야. 그들은 자기들이 쓴 가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면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필요에 따라 그 가면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그 가면을 자기 얼굴인 줄 알고 사는 거야. 철저한 자기 소외가 일어나는 거지.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하고 모멸감을 안겨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자기들의 위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말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진실을 드러내기는커녕 진실을 은폐 혹은 호도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우가 많아.”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들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요. 그들은 절망과 환멸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들을 정치인이 아닌 맨 얼굴의 이웃으로 만나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글쎄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전칭명제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동시에 정신적 폭력이야. 감정적으로는 나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나의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가끔 실수도 하고, 오버도 하면서 사는 거지요.“


● 다지면서 가야 할 길


“물론 그래. 하지만 타인이 숨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돼. 그의 가면 속에는 분명 말랑말랑한 맨 얼굴이 있지 않겠니? 게다가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의 실체를 온전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거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야.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되는 걸 거야.”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폭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아주 많겠네요?”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성스러움과 폭력은 이웃사촌이야. 예수님은 그런 인과 관계를 끊는 길을 보여주신 거고.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죽음은 철저히 무고한 자의 죽음이고, 가공할 폭력의 사슬을 사랑과 관용으로 녹여버림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일전에 내가 이야기했지?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을 보면서 내 내면에 들려왔던 소리 말이야.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누가복음 19:42). 용서와 사랑과 포용, 그리고 나눔이 아니고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이 없어.”


“옳은 말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건 너무 더딘 길 아닌가요?”


“더디더라도 다지면서 가야 쉽게 깨지지 않지.”


“여하튼 미사일을 새와 나비, 비둘기와 물고기로 바꾸는 시스템이 빨리 가동되면 좋겠어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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