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돌



돌아보니 까마득하다. 같은 한해가 같은 길이로 갔지만 지난 1년은 유독 길기도 하고 순간순간 선연하기도 하다.


3월 25일은 단강교회가 세워진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무모하게도 창립예배 드리던 날 어딘지도 모르는 것에 첫 발을 디딘 이곳 단강.


감리사님 차를 타고 단강으로 향하여 어딘가 땅 끝으로 가고 있지 싶었던 생각. 굽이굽이 먼 길을 돌때마다 거기 나타난 작은 마을들, 여길까 싶으면 또다시 들판 하나를 돌고. 그러기를 몇 차례, 막상 도착한 마을은 떠나며 가졌던 나름대로의 생각이 그래도 쉬운 것이었음을 한눈에 말해주고 있었다.


어딘들 어떠랴 했던 마음속 막연한 낭만기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생존의 현장이구나’ 아마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춘설이 섞인 찬바람이 어지러이 몰아쳤던 그날, 예배실로 쓸 좁은 사랑방에 다 들어갈 수 없어 마당에 둘러서서 첫 예배를 드리며, 내가 지금 어디에 선 건지, 이렇게 시작되는 내 목회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 건지, 어쩜 모든 이로부터 잊히는 삶을 살 필요가 있겠다 싶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겹쳤다.


작은 쪽지 하나에 급하게 타이프를 친, 그 순서지에도 없는 담임자 인사를 하며 난 생각지도 못했던 눈물을 떨궈야 했다.


“지금 우리가 선 이 땅을 우리의 후손들은 분명 거룩한 땅이라 부를 것입니다.”


선언하듯 인사를 대신할 때 뜨거움이 목젖으로 올랐다. 부족한 자 이 땅에 세우시는 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어느 것 하나 기억 못하지만 대부분은 위로였으리라, 손을 잡고 안쓰러움으로 말을 건넸던 많은 사람들. 예배 후 사람들은 돌아갔다. 장모님이 눈물 닦는 모습을 우연히, 그러나 착잡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걸 알기까진 얼마간의 시간이 걸려야 했지만 그때 난 휑하니 혼자 떨궈진 샘이었다. ‘떨궈진’이라는 말이 맞다. 그때 그 자리 그 시간에 대해 정말로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었다. 인간의 우연을 당신의 필연으로 바꾸시는. 그게 님의 뜻이라지만.

그게 꼭 1년 전의 일이다. 지금의 붉은 벽돌, 아담한 예배당과 사택이 있기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모두가 내겐 귀한 교훈이었다. 흔들릴수록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어려웠지만 고마운 시간이기도 하다.


보통 창립 1주년이 되면 초청장을 돌려 손님을 청하고 음식을 차려 잔치를 벌이는 것이 상례인 줄 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조용하게 지나기로 했다. 창립예배, 기공예배, 봉헌예배, 그동안 큰 행사가 계속되었는데 또 한 번 잔치를 한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에게 ‘잔치하는 교회’라는 인식을 주는 건 아닌가 싶었다.


잔치 대신 동네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셔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일하실 때 햇빛 가리시라고, 땀 닦으시라고 수건을 준비해 선물로 드렸다.


조촐하게 끝난 행사였지만 창립 1주년을 맞는 우리에겐 새롭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주님, 저희가 첫 돌을 맞았습니다. 아직 어린 것이 뭘 알겠습니까만, 엄마 얼굴 알아보고 엄마 보면 좋아 웃는 아기처럼, 우리도 당신 모습 알아보며 즐거워하게 해주소서.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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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

송대선의 시편묵상 2021. 6. 11. 08:00

 

시편 73

 

야훼, 나의 하느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공동번역)

 

容我一申辯(용아일신변)

주님 저 자신을 변호하도록 허락하소서주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시편사색, 오경웅)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겪는 이유만 알아도 그 고통이 반감되는 걸 경험합니다. 왜 지금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알면 비록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조금은 견딜 힘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피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쉬 꺽이지 않을 결심을 다지기도 하지요. 만약 어려움이 자신의 허물로 인한 것이라면 책임지는 자세를 통해 도리어 자신의 그릇을 더 넓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맹자(孟子)의 언명이 오래도록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주었겠지요.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며,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한다.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어 뜻과 같지 않게 하나니 이것은 그들의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위해서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是故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그러나 늘 이런 마음과 자세를 품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속상해서 푸념하고 털어놓을 누군가를 찾기도 하지요.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 내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이를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어려움이 무고(誣告)로 인한 것이라면 억울한 심정은 참 견디기 어렵습니다. 속된 말로 열불이 나서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마치 이 세상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니 그 어려움에는 분명 알지 못하는 숨겨진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너무도 억울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터뜨리게 되는 울분은 두서조차 없어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억울한데 갈 곳마저 없습니다.

 

찾아갈 곳이 없을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울분을 통하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시편 7편의 전반부의 간구는 마침표 없이 토해내는 시인의 속마음입니다. 정말 제가 저들의 말대로 그랬다고 한다면 능욕을 겪고 흙범벅이 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헝클어진 마음이 맘껏 솟구쳐오릅니다. 그에 비한다면 오늘의 우리 신앙은 너무 얌전하거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매우 상식적인 선에서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헝클어진 감정의 토로 가운데 시인에게서 중심이동이 일어납니다. 그의 언어는 자기의 결백에서, 원수들의 모함과 그로 인한 분노에서 점차 하느님께로 옮겨갑니다. 자신의 감정과 언어의 무게가 쏟아지는 만큼 어둠의 기운이 스러지고 이 마구잡이 토로를 받아주시는 분이 자신의 삶과 여정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떠올립니다. 마구 쏟아내던 사람이 점차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모아 이 모든 것을 들으시는 분을 향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의 고통)은 작아지고 이 모든 것을 거두시고 당신의 섭리를 펼치시는 하느님에 대한 더 깊은 신뢰에로 이끌립니다. 그러니 그는 어느새 흐트러진 자신은 잊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그분을 찬양하려 합니다. 악에 북받쳤던 감정이 가라앉으며 그 가운데서 미더운 분을 향한 고요하고 정제된 읊조림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네 당신이 옳습니다!”

 

그렇기에 자주 터무니없는 억울함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에서 가장 억울하셨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아버지께만 토로하셨던 예수님을 제대로 우리 마음에 모실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억울한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뵐 수 있지요. 바로 거기서 그분이 기다리시지요. 그런 자리에서야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모욕을 받고 버림받으셔서 구원을 이루는 신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한순간을 제대로 누릴 수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 한순간이 우리 인생 전체를 치유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히브리 시인보다 더한 감격과 찬미를 올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우징숑(오경웅)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옮기고( 《시편사색》) 해설을 덧붙인 송대선 목사는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귀동냥을 한다고 애쓰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10여 년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기독교 영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하는 어거스틴과 프란체스코,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서양 신학자와 신비가들 뿐만 아니라 『장자』와 『도덕경』, 『시경』과 『서경』, 유학의 사서와 『전습록』, 더 나아가 불경까지도 끌어들여 자신의 신앙의 용광로에 녹여낸 우징숑(오경웅)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떴다. 특히 오경웅의 『성영역의』에 넘쳐나는 중국의 전고(典故와) 도연명과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장가와 시인들의 명문과 시는 한없이 넓은 사유의 바다였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제천과 대전, 강릉 등에서 목회하였고 선한 이끄심에 따라 10여 년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귀국 후 영파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지금은 강릉에서 선한 길벗들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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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마음, 성심(聖心)에 닿는 길

시편을 순서대로 읽되 한 시편 안에서 마음에 닿는 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차례와 관계없이 공동번역과 개역개정, 오경웅의『성영역의』(《시편사색》으로 번역출간)를 중심으로 더 입에 붙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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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6절b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공동번역》) 我主識善人〔아주식선인〕 우리 주님 선한 이 알아주신다(《시편사색》, 우징숑)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에 대한 사실적인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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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2절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공동번역》) 優遊聖道中 涵泳徹朝夕〔우유성도중 함영철조석〕 거룩한 말씀 새김질하며 거닐며 종일 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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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1절 吾敵何多(오적하다) 내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시편사색》, 우징숑) 당신께 나아가기로 결심하거나 마음을 다지면 걸리는 것들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 저를 덮치면서 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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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4절 竭聲籲主(갈성유주) 온맘과 영혼으로 주님 당신을 부릅니다(《시편사색》, 우징숑) 그러니 그럴수록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렇게 제 속의 결심은 연약하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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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3절, 6절 그러나 야훼여! 당신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십니다. 내 머리를 들어 주십니다.〔3절〕 적들이 밀려 와 에워 쌀지라도 무서울 것 하나 없사옵니다.〔6절〕(《공동번역》) 護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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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2절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공동번역》 彼無神助 其命幾何(피무신조 기명기하) 하느님이 저를 돕지 않으시니 그 목숨 앗는 것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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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편 4,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공동번역》) 祈主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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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러지는 춤

시편 6편 8,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공동번역》) 我泣主已聞 我求主已聽(아읍주이문 아구주이정) 有禱必見納 有感豈無應(유도필견납 유감기무웅)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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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 16:1-3)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6월에 접어들면서 낮 기온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퇴근 무렵에도 낮 동안 달구어진 지열 때문인지 무척 덥습니다. 재킷을 벗어 들고 걷는 데도 땀이 흠뻑 뱁니다. 농부들은 보리 수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내기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땅을 가까이 하고 사시는 분들의 노동이 때로는 거룩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농부들이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사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다른 이들이 누릴 몫까지 전유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병무 선생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박 나세요’라는 덕담 아닌 덕담이 유행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끌해서라도 도심에 집을 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모르진 않지만, 그걸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모두가 인정해버리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불안이 불길한 안개처럼 우리 삶을 뒤덮고 있습니다. 불안은 섬뜩한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슬그머니 스며들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 홀로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던 우화 속의 토끼 아시지요? 어느 날 토끼가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사과 한 알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납니다. 전후좌우를 살필 겨를조차 없이 토끼는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여 질주합니다. 숲에 있던 다른 동물들도 토끼의 그 서슬에 놀라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왜 달려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기진할 정도로 달린 후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왜 달렸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화라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추곤 했다지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미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깊은 진실이 있습니다. 분주함과 서두름 속에서는 지혜가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가끔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책장에서 빼드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다가 밑줄이 그어진 부분에 눈길을 주곤 합니다. 오늘도 그 중에 한 권을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만난 구절들이 있습니다.

“시간과 맞서 싸우려고만 하지 않고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자(‘시간은 내 편이다.’라고 믿는 자)는 느림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즐겨야만 한다.”(칼 하인츠 A. 가이슬러, <시간>, 박계수 옮김, 석필, p.172)

“천천히 가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것과 당연한 것을 간과하게 된다. 인내심을 가진 자만이 마음을 열고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앞의 책, p.177)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바쁘고 일이 많으면 우리는 사랑을 잃게 되고 사랑은 노동이 된다. 시간이 있고 시간과의 전쟁을 잊을 때만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앞의 책, p.178-9)

시간의 여백을 마련하고 살자고 하면 사람들은 ‘참 한가한 소리를 다하고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의 속도는 얼마나 될까요? 출애굽 공동체는 천천히 걸어도 한 두어 달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고, 애굽을 떠난 사람 가운데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광야는 출애굽 공동체가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훈련한 수도원이자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철저한 신뢰와 인내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유기농업을 시작한 분을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벌써 30년 저편의 일입니다. 그는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려 지력을 돋우려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기자는 그 무모한 열정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래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망했지요, 뭐.” 정확한 표현은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뜻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작물들도 크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3년째 될 때부터 조금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타산에 맞지는 않았습니다. 기자가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망한다면 내 망신인가요? 하나님 망신이지요.” 제가 그렇게 오래 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은 그 고집스러운 농사꾼이야말로 참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하시지는 않을 거다. 설사 망한다 해도 나는 망한 것이 아니다. 그 분의 뜻대로 살았으니까.’ 이런 강고한 믿음이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고, 지금은 그 뜻을 잇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간 저는 아시아권 선교사들의 새벽기도회 모임에서 zoom을 통해 설교를 했습니다. 200명에 이르는 분들이 동참했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뜨거웠습니다.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은 물론이고 선교사들이 직면한 다양한 어려움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채팅 창에 올라온 기도 제목을 보며 저는 꽤 많은 선교사들이 코로나19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빚진 자 되어 이국 땅, 언어와 기후, 풍토와 문화 등 모든 게 낯선 그 땅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섬기다가 속절없이 쓰러진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절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50분 정도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도 유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팬데믹 상황 이후 실추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편협한 성경 해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예수님을 15명의 선지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지만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전해야 하는지…. 늘 생각하는 주제이면서도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지만 성심껏 대답하려고 애썼습니다.

다른 종교가 우세한 지역에서 제도로서의 기독교와 그 교리를 전파하려 할 때는 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 정신으로 사는 이들을 마다할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누군가의 은결든 마음을 깊은 공감으로 다독이고, 그들 속에 있는 존엄함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라는 선교 신학자는 선교를 가리켜 ‘매력의 감염’이라 말했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바라보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이들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소개하려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현장에서 겪는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제가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선의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바로 선교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봉사 현장에 가서 겪은 일을 들려준 바 있습니다. 기억이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아버지는 빈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가서 이발 봉사를 하곤 했습니다. 아베가 따라갔던 그날, 공교롭게도 이발기계에 한 사람의 머리카락이 끼었고, 고통을 느낀 그는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린 아베에게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베는 아버지에게 뭐하러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봉사할 자격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선의가 선의로 응답받지 못할 때도 여전히 그 일을 지속할 힘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는 꽤 오랫동안 비대면 예배를 지속해왔습니다. 6월 20일부터 현장예배를 재개하려 합니다. 감염자가 획기적으로 줄고 있진 않지만, 많은 분들이 백신 접종을 받으셨고, 교회 안에서의 예방 수칙에 다들 적극적으로 협력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우들과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대합니다. 예배당에 고요하지만 마음이 담긴 찬양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 그립습니다. 부디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6월 1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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