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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사람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

by 한종호 2016. 2. 21.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46)

 

사람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人)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捕虜)를 이 좋은 무화과(無花果)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引導)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全心)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百姓)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예레미야 24:5-7).

 

《탈무드》에 굴뚝청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굴뚝청소를 하러 두 사람이 올라갔는데 청소를 마치고나니 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고 한 사람은 깨끗했다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얼굴을 씻겠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얼굴을 씻는다면 당연히 얼굴이 시커먼 사람이 아닐까 싶지만 그렇지가 않다. 탈무드에 의하면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씻는다.

 

청소를 마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얼굴이 시커먼 사람은 깨끗한 사람 얼굴을 보며 자신도 깨끗한 줄로 생각한다. 반면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먼 사람을 보면서 자신도 시커먼 줄로 알고 얼굴을 씻는다는 것이다.

 

 

 

 

어느 날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개의 광주리를 보여주신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광주리가 성전 앞에 놓여 있는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아주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너무 나빠서 먹을 수도 없는 무화과가 담겨 있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나무였다. 24장에서 ‘무화과’가 늘 복수로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무화과를 보여주신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의 포로들을 이 좋은 무화과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5절)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그들을 세우고 헐지 않겠다고, 심고 뽑지 않겠다고 하신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도 하신다.

 

나쁜 무화과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과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이집트 땅으로 간 사람들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는 무화과처럼 만들어 주겠다.”(8절)

 

그들을 세계 만국으로 흩어 혐오의 대상이 되게 하며, 그곳에서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라 하신다.

 

나라를 빼앗긴 뒤 유다 백성들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포위한 뒤 그 성에 사는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와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갔다(1절, 열왕기하 24:14). 그 결과 예루살렘에는 비천한 자 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바벨론 사람을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피신을 간다(열왕기하 25:26).

 

그렇다면 두 개의 광주리에 담긴 서로 다른 무화과는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일은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비극 중의 비극이다. 형벌로 치자면 가장 무섭고 무거운 형벌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에 남는 것은 죽음의 길이고, 항복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예레미야를 통해 일러주셨다(21:1-10).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이 바벨론 땅에 이른 것을 두고 ‘붙잡혀 갔다’ 하지 않고, ‘내가 이곳에서 옮겼다’ 하신다(5절). 포로로 붙잡혀 간 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주님이 제시한 길을 걸은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해 여전히 예루살렘에 남아 있거나 이집트로 도망간 이들은 사람이 볼 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비춰 생각하면 스스로가 살 길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드는 생각이 있다.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들은 붙잡혀가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붙잡혀간 이들을 주님께 심판을 받은 것이라 여기지 않았을까?

 

반면 바벨론으로 붙잡혀간 이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얼마나 큰 불행으로 여겼을까? 두렵고 무서운 심판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고난을 통하여 비로소 자신들을 뼈아프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정직하게 뉘우치며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전심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7절).

 

두 개의 광주리에 담긴 서로 다른 무화과, 사람이 볼 때는 포로로 붙잡혀간 이들이 당연히 나쁜 무화과요, 예루살렘에 남아 있거나 안전한 땅 이집트로 피한 이들이 좋은 무화과로 보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 정반대였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교회요,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이라 하여 안심하고 우리 밖에 있는 이들을 걱정하고 정죄한다면, 그러느라 정작 회개할 줄 모르고 주님께 돌아갈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린 영락없는 나쁜 무화과일 뿐이다.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왔음을 아프게 깨달으며 참된 마음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가 땅 끝에 있다면 아무리 그가 멀리 있다 하여도 그는 좋은 무화과이다.

 

사람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 마음을 두렵게 한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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