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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너희를 껍데기로 만들겠다

by 한종호 2016. 2. 29.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47)

 

너희를 껍데기로 만들겠다

 

 

“내가 그들 중(中)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新郞)의 소리와 신부(新婦)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燈)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荒廢)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七十年) 동안 바벨론 왕(王)을 섬기리라”(예레미야 25:10-11).

 

신혼 초의 일이다. 부엌을 지나가다 창문가에 유리잔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같은 키의 파란 싹들이 아우성을 치듯 앙증맞게 담겨 있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뜻밖에도 콩나물이라 했다. 반찬을 하면서 콩나물을 한 움큼 꽂아둔 것이었다. 콩나물이 빛을 쬐니 화초처럼 파랗게 바뀐 것이었다.

 

며칠 뒤였다. 싹이 담긴 유리잔에 물이 거반 줄어 있었다. 얼른 물을 채워 주는데 이상하게도 물은 밖으로 샜다. 아직 다 차지를 않았는데 물이 새다니, 무슨 일인가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유리잔의 뒷부분이 깨져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 잔의 한쪽이 깨지자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콩나물을 담아둔 것이었다. 깨진 쪽을 뒤쪽으로 하여 몰랐던 것이었다.

 

순간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잔이 커도 잔에 물을 채울 수 있는 높이는 깨진 부분까지였다.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곳이 깨져 있으면 거기까지가 잔으로써의 한계였다.

 

‘리비히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리비히는 독일의 식물학자로 1840년 질소 인산 칼리 등 식물성장에 필요한 필수 영양소 중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넘치는 영양소가 아니라 가장 부족한 영양소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나무통 법칙’이라는 말도 있다. 높이가 다른 여러 개의 나무판자를 연결해서 통을 만들 경우, 통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나무통을 이루고 있는 가장 긴 나무판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짧은 나무판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리비히법칙’이라 부르든 ‘나무통 법칙’이라 부르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아무리 그릇이 커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지 않는 어딘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그의 한계가 되어 더 이상은 채울 수가 없게 된다.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에게 등을 돌렸을 때, 악을 그치고 돌아오라고,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제라도 용서하겠다고, 너희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를 격노하게 하지 말라고 거듭해서 전한 경고의 말을 끝내 듣지를 않았을 때(25:1-7), 결국 주님은 그들을 벌하기로 하신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서 북녘의 모든 민족을 불러다가 당신의 백성들이 사는 땅과 백성들을 치기로 하신다. 놀랍게도 주님은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 하신다. 당신의 백성을 치기 위하여 이방 왕을 당신의 종으로 삼는 심정은 어떠셨을까.

 

백성들이 살던 땅을 쳐서 영원한 폐허가 되면, 주님의 백성들은 이방 사람들 앞에 놀라움과 빈정거림과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주님을 섬기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순간에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주님의 백성들이 살던 땅이 폐허가 될 때 그 땅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흥겨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 맷돌질하는 소리, 등불 빛’이 그것이다.(10절)

 

기뻐서 노래하며 흥겹게 노는 소리도, 즐거운 신랑 신부의 소리도, 맷돌질 소리도 더 이상 나지 않으리라. 다시는 등불이 켜지지 않으리라. <공동번역 개정판>

 

기쁨의 소리란 소리는 모조리 걷어낼 것이다. 노랫소리, 웃음소리, 결혼 축하연소리, 일꾼들의 흥겨운 소리, 등불을 켜고 저녁식사를 즐기는 소리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메시지>

 

살고 있는 곳에서 기쁨의 소리란 소리는 모두 사라지게 하겠다고, 모조리 걷어내겠다고 하신다. 기쁨의 노래, 웃음소리, 사랑과 꿈을 나누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맷돌질 소리…, 삶을 기쁨으로 채우던 모든 소리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기쁨의 소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도 끔찍한데, 사라지는 것은 소리들만이 아니다. 빛도 사라진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어도 등불 빛이 보이지를 않는다. 어둠이 찾아와도 어둠을 밝힐 빛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사방 어둠뿐이다.

 

결국 폐허의 땅이란 마땅히 있어야 할 소리와 빛이 모두 사라진 땅이다. 기쁨의 소리와 빛이 사라진 땅은 ‘깡그리 끔찍한 폐허’일 뿐이고, 끔찍한 폐허의 삶은 원치 않았던 종과 노예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주님을 등진 삶은 끔찍한 폐허일 뿐이다. 말씀을 듣지 않을 때 모든 기쁨의 소리가 사라진다. 말씀 앞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 어둠이 덮인다. 여전히 많은 것이 남아 있다고 해도 주님을 등진 삶은 더 이상 기쁨이 없는, 더 이상 빛이 없는, 다만 빈 껍데기 삶일 뿐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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