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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끙끙 앓는 하나님

by 한종호 2015. 9. 25.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6)

 

끙끙 앓는 하나님

 

 

“너희가 무익(無益)한 거짓말을 의뢰(依賴)하는도다 너희가 도적(盜賊)질하며 살인(殺人)하며 간음(姦淫)하며 거짓 맹세(盟誓)하며 바알에게 분향(焚香)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神)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救援)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可憎)한 일을 행(行)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盜賊)의 굴혈(窟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7:8-11).

 

주님의 탄식 중에서 그 중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나의 성소에서 나를 멀리 떠나가게 하고 있다”(에스겔 8:6)는 탄식이다. 시궁창과 같은 세상 속에서 온갖 더럽고 끔찍한 악을 행하는 이들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람들 때문에 주님은 있을 곳을 잃어버리신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담벽을 헐자 우상의 방이 나타난다. 벽이 허물어지면 그 뒤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드러난다. 우상이 가득한 방에서 일흔 명의 장로가 각각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분향을 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에스겔 8:12).

 

장로들이 그랬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님의 성전을 등지고, 얼굴을 동쪽으로 하고 서서, 동쪽 태양에게 절을 하고 있다.(에스겔 8:16) 성전을 등지고 태양에게 절을 했다.

 

주님을 섬기는 성전 안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주님은 더 이상 그곳에 계실 수가 없다. 마치 못된 자식들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무작정 집을 나서는 노모처럼, 주님께서 주님의 성소를 떠나신다. 불쌍하신 주님!

 

 

 

 

예수님의 모습 중에 낯설게 여겨지는 모습이 있다. 병들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듬어 주시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성전을 찾은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을 그 짐승과 함께 내쫓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둘러엎으신다. 예수님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과격하기 그지없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요한복음 2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채찍을 휘두르신다. 로마 병정이 아닌 예수님이 채찍을 휘둘러댔던 것이다. 그것도 성전에서.

 

예수님으로서는 견딜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전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며 자기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니! 불같은 분노로 모든 것을 뒤엎는 일 밖에는, 성전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쫓아내는 일 밖에는 달리 다른 길이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만민이 기도하는 내 집을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기도하는 내 집’과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이 거칠게 대비가 되고 있다.

 

‘강도의 소굴’이란 무엇일까? 강도의 소굴은 강도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뒤 시시덕거리면서 자기 몫을 나누는 곳이다. 어둠 속에서 온갖 악한 짓을 하면서도 굴 안에 있어 안전하다 생각하며 그것을 즐긴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강도의 소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이 싫어하는 일만 하고 있다.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부자가 된다면 얼마든지 바알을 섬기고,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렇게 살면서도 주님의 성전에 들어와서는 주님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을 얻었나이다.” 했던 것이다. 성전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지 성전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님 앞에서 그들 스스로가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선물인 구원을 자기 스스로 선언을 한다. 성전을 찾았다는 그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주님 앞에 그런 모습은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새번역>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너희가 하는 짓을 나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내 말이니 잘 들어라. <공동번역 개정판>

 

여기가 그런 범죄자 소굴이더냐? 너희는 나를 예배하는 곳으로 구별된 이 성전을, 그런 곳으로 바꾸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생각을 다시 하여라. 내가 보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똑똑히 보고 있다. <메시지>

 

두렵다. 오늘 우리가 무엇이 다를까. 내 마음대로 살다가 면회하듯 주님의 집을 찾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예배당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도의 소굴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다.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최승호, <몸> 전문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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