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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무대는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가?

by 한종호 2015. 3. 22.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7)

 

무대는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가?

- <동화독법>을 공연에 올리면서 -

 

 

뉴욕 TKTS, 그리고 명 연기자들

 

뉴욕 브로드웨이 42가에는 ‘TKTS’라고 쓰인 부스가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나 연극표를 4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할인해서 살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늘 붐빈다. 한없이 기다랗게 늘어선 줄을 보면 미국이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의 대중적 기반과 저력이 느껴지곤 한다. 미국인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도 이 행렬에 한 몫을 한다. 연극표를 사는 외국인들은 드물다. 당연히도 대사를 제대로 알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기 배우가 등장하면 그를 보기 위해 외국인들도 기꺼이 연극표를 산다.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그래서 연극판에 있다가 영화로 가 인기를 모은 뒤 다시 브로드웨이로 귀환한 배우가 된다. 우리의 대학로와 비슷한 셈이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한 알 파치노라든가 <고도를 기다리며>나 <벵갈 타이거>에 출현했던 로빈 윌리엄스의 연극은 표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혼자 무대에 나와 순전히 말발로 웃겨야 하는, 엄청난 실력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스탠드 업 코미디언으로 시작했던 로빈 윌리엄스의 경우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말았는데, 그의 연기는 코믹하면서도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묘한 축축함이 있었다.

 

영화 <로얄 어페어>에 나온 덴마크 배우 매드 디트만 미켈젠은 본래 무용수였다가 연기자가 된 경우인데, 그는 무용만 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연극배우로도 손색이 없는 치밀한 연기력을 뿜어낸다. 미켈젠은 2012년 깐느 영화제에서 최고 남우연기자 상을 받는다. <로얄 어페어>에서 그는 덴마크 군주의 개혁정치를 돕는 독일 출신 진보파 의사로 나오는데, 영국계 왕비와의 밀애가 들통이 나면서 결국 사형당하는 인물의 비극적 면모를 빈틈없이 그려낸다.

 

안데르센과 극장 무대

 

아무래도 덴마크 하면 역시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떠오르는데, 그도 코펜하겐 극장가에서 연기자로 입신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인물이었다. 안데르센은 십대에 이미 스스로 희곡도 쓰고 노래와 춤을 추면서 무대에 섰으나 당대 귀족사회가 결국 그를 광대 이상으로는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다가 동화작가로 변신한다. 그의 작품 <미운오리 새끼>는 그런 자신의 뼈아픈 인생사를 그려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당대 귀족계급의 특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담고 있다.

 

무대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면서 지금의 현실을 벗어난 상상력으로 새로운 미래의 현실을 꿈꾸는 현장이다. 그런 점에서 무대는 언제나 기존질서에 도전하는 전복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 돌파력 있는 무대에서 관객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암시받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된 무대는 본질적으로 불온할 수밖에 없다. 햄릿이 자신의 숙부가 벌인 암살을 궁궐 밖의 광대를 불러 재연토록 한 것도 이런 "불온"한 기획의 산물이기도 하다.

 

냉전 시기 반체제 지식인이었다가 나중에 체코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의 이력에서 희곡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의 삶은 빼놓을 수 없다. 뉴욕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캐롤 모카로마는 하벨의 무대 인생을 가리켜 “용기가 가득 찬 막(幕)/Acts of Courage”라고 불렀다. 여기서 영어의 ‘Acts’는 연극무대의 1막, 2막이기도 하면서 행동, 행위를 의미하는 이중의미구조를 지녔다. 그렇지 않아도 하벨은 연극 무대란 “현실의 갈등과 부조리를 그대로 껴안고 고투하는 인간들이 관객들 앞에서 생생하게 시비를 거는 현장”이라고 부르면서, “이런 것들을 슬쩍 피해가려는 순간, 무대는 스스로 값싼 소비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라고 강조한다.

 

 

 

 

 

 

하벨, 무대를 “반란의 실습장”으로 꿈꾸다

 

하벨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겪으면서 “이 싸움에서 이기는가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싸움에 참여하는가”라고 갈파했다. 모든 문화예술의 분야가 이런 싸움에 불꽃이 되어야 하는 시기에 이를 포기하는 것은 공적 가치의 포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공적 인생에 들어선 순간은 내 안에서 반란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였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보자면 그에게 무대란 반란의 실습장이기도 했다.

 

법과 제도가 인간을 포박해버리고 인간 이하의 자존감 해체로 굴러 떨어지게 하는 현실에 대해 해부용 메스를 댄 카프카 문학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했던 하벨은 “극장무대야 말로 모든 예술 분야 가운데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구성한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 무대가 갖는 현실적 울림의 강도를 강조했다. 그의 연극이 냉전시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금지대상이 되고 무대를 잃었던 상황은 무대와 권력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공연예술의 현실과 미래

 

요즈음 대학로가 앓고 있는 통증은 공연예술에 대한 국가와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우선 순위의 척박한 상황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무대 예술가들이 극장을 빌리지 못해 설 곳이 없어지고, 더군다나 반란을 꿈꾸는 무대는 아예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정신세계 내부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대자본과 대극장이 마련하는 뮤지컬과 대학로의 격차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편, 최근 교육 운동을 하는 이들이 교육과 공연의 융합적 기획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교육의 현장감을 보다 높이고 현실의 갈등과 부조리에 대해 교육적 대응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만들어갈 것인가의 고민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하겠다. 인문학 역시 출판물을 통해 일정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여러 형태의 콘서트를 발전시켜왔다. 이제 이 역시도 무대 위의 공연이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진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싶다.

 

이렇게 쓰면서 결국 내 이야기로 마무리 짓자니 독자들이 어, 낚시다, 하고 항의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 연기인이 아닌 내가 조만간 공연예술에 도전하는 이유와 내용을 간단이라도 풀면 이해를 받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동화독법>을 공연에 올리면서

 

2년 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 민담을 소재로 <동화독법>이라는 책을 냈다. 어느 새 7쇄를 넘고, 그간 교육 현장이나 기타 모임에서 이에 대한 강연만도 100회를 넘게 했다. 강연을 하면서 현장에서 연극적 요소를 도입하고, 그걸 통해 동화가 태어난 현실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보았더니 반응의 강도가 달랐다. 동화가 아이들만 읽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성찰의 거리를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숲속의 잠자는 미녀는 대체 몇 년을 잔건가? 그렇게 자고 난 뒤 만난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어느 쪽이 바보인가? 심청의 성, 심은 무슨 심 자인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만 문제 삼고 나면 이 이솝 우화는 다 이해된 것일까? 햇님과 달님 이야기는 어찌해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일까?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왕자가 신데렐라의 얼굴을 확인하고 찾는 이야기는 한 대목도 나오지 않는데?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는 왜 허수아비, 깡통 아저씨, 사자랑 한 팀이 되어 길을 떠난 것일까? 그리고 그녀가 신은 은 구두는 대체 뭔 뜻이 담겼지? 헨젤과 그레텔은 부모가 아이들을 버린 이야기인데 그걸 왜 동화라고 하면서 애들에게 들려줄까?

 

해설해야 할 대목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에서 목소리를 잃거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은 것은 그런 현실을 절박하게 증언해준다.

 

 

 

교육 문화제를 주로 기획해왔던 기획사 소릿길(대표 윤미진)이 동화독법을 읽고 인상이 깊었던지 지난 해, 음악과 인문학 강연이 결합하는 콘서트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게 시작이 되었다. 인문학 강연이 아닌 공연으로 무대를 꾸미자는 생각이 번쩍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는 3월 28일 (오후 6시)과 29일 (오후 5시) 양 일 간에 걸쳐 대학로 홍대 아트센터에서 동화독법 무대가 올려 진다.

 

가면극, 복화술 인형극, 판토마임 등 모노드라마적 요소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진 새로운 무대를 기획, 연출해볼 생각이다. 시사 만화가로 이름 높은 박재동 화백과 시인이자 정치인인 도종환 시인이 우정 출연, 특별 게스트로 참여해준다. 세월호의 아픔도 나눌 것이다.

 

관객들이 난데없는 무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고 싶다.(공연안내 바로보기)

 

 

 

 

동화 속의 힘

 

지난 10년 동안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를 수없이 보고 연구해온 덕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역시 중요한 것은, 무대 연출의 기교나 새로운 시도를 넘는 메시지의 존재다. 즐거우면서 불온하고 싶다. 하벨이 했던 말처럼 "반란의 실습장"이 되어 기존의 논리와 힘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이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고 유쾌하게 극장 밖을 나서는 것을 꿈꾼다. 아마추어로서 너무 과도한 의욕과 기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소망을 강하게 갖고 시작한다. 이 나이에 엉뚱하게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를 무대에 올리면서 연극인생을 갈망하는 철없는 자유인의 치기로 그치고 싶지 않다.

 

하벨은 “내가 연극에 눈 뜬 것은 동화를 읽으면서 였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연극무대를 알 수록 내 안에 동화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도 말년에는 동화나 민담의 세계에 빠져 대작 <전쟁과 평화>가 아닌 동화작가로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하기도 했다.

 

동화, 우리에게 의외의 비수를 드러내 정신이 번쩍 나게 해줄 것이다. 공연? 그건 최선을 다해볼 작정이다. 우리의 대학로가 뉴욕 브로드웨이 못지않은, 공연예술가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생동감 넘치는 현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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