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음악!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2015. 3. 11. 07:24

지강유철의 음악정담(11)

고맙다, 음악!

 

즐겨찾는 동호회 사이트가 있습니다. 6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미국의 AR이란 스피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사이트입니다. 그 사이트를 방문하면 숱한 세월 하이앤드 오디오를 하다가 뒤늦게 AR로 회심한 사람들의 참회기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빈티지 오디오에 빠지면 신앙 수준으로 집착하는 마니아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른 스피커나 앰프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지만 AR 마니아들의 AR에 대한 충성도는 유명합니다.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오디오를 우습게 보는 태도를 보였다가 말썽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AR이란 스피커를 알게 된 것은 2007년입니다. 당시 저는 경남 진해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자가용이 없는 제가 마산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서 고속버스 화물로 도착한 스피커를 택시로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그 무거운 스피커나 앰프를 낑낑거리며 뻔질나게 팔고 사는 저를 보며 아내는 혀를 찼습니다.

 

 

처음 들였던 스피커는 AR2AX란 모델이었는데 한동안은 이놈에게 거의 넋이 나갔었지요. 그 이후엔 오케스트라 대편성을 주로 듣는 터라 AR3A란 모델로 교체했고, 양화진으로 출근을 하면서는 AR7이란 작고 귀여운 스피커를 들으며 감탄했습니다. 그 다음엔 보컬에 그만이라는 AR2A를 거쳐 더는 바꾸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AR3를 들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AR 스피커를 단 한조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AR매니아’란 오디오 사이트엔 참 부지런하게도 드나듭니다.

오디오 동호회 회원 가운데 맘 착한 분을 만나 600-700만 원짜리 AR1이란 스피커를 몇 달 무료로 빌려 들었던 일이 있습니다. 제 수준에서 결코 살 수 없는 가격이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조건 없이 대여를 해 주어서 호사를 누렸던 것입니다. 다른 동호회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40대 이상이 모인 오디오 동호회에는 이런 훈훈한 에피소드들이 널려있습니다. 제가 오디오 사이트에 발길을 끊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은 거의 멸종된 60-70년대의 훈훈함이 오디오 동호회원들에게는 아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디오를 사고 팔 때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밤 12시에 집에 들여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디오 이야기를 합니다. 참 별난 사람들입니다.

빈티지 오디오를 좋아한다는 것은 언제나 고장날 수 있다는 불안까지 사랑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AR 동호회 회원들 가운데는 스스로 웬만한 고장은 고칩니다. 그런 정보들은 즉시 사이트를 통해 공유됩니다. 그들이 50-60년 전의 AR 스피커 자료들을 찾아 올리는 걸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어떤 모델이 언제 출시되었다는 건 기본이고 시리얼 넘버나 상태만 보면 이 제품이 언제 출시된 것인지, 그리고 고음 스피커가 그 이후 제품으로 교체된 사실까지 귀신처럼 알아냅니다. 50-60년 전 모델이라고 사기를 쳤다가는 단박에 탄로가 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다수 오디오 동호회 회원들에게서 느끼는 아쉬움은 소리에는 거의 병적으로 집착을 하면서 정작 음악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디오는 꽤 비싼 제품을 가지고 있고, 그 제품들이 수시로 교체되는 데도 집을 방문해 보면 음반은 초라할 만큼 소장하고 있지 않은 거죠. 그래서 이 분은 대체 이 좋은 악기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러다보니 동호회 사이트에 중고 오디오 매물이 올라오면 조회수가 치솟습니다. 거기에 비해 음악 이야기가 올라왔을 때는 상대적으로 조회수가 떨어집니다. 일부 회원들이 오디오 그만 좀 사고팔고 제발 음악 좀 들으라고 악다구니를 써도 그때뿐입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존재하는 오디오에 집착하면서 음악을 잘 모르거나 듣지 않는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하기 쉽진 않지만, 그 또한 그분들의 선택이고 즐거움일 테니 어쩌겠습니까.

이 사이트를 드나들면서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되더군요. 소리 그 자체보다는 음악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겠다는 다짐 말입니다. 연주자에 대한 감탄도 중요하지만 그런 음악을 작곡한 이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말자고 말입니다.

 

 

가끔은 사무실로 출근하거나,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갔을 때 오디오를 켜지 않고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을 이어폰이나 헤드폰 없이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빴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저 조그만 기기가 이토록 선명한 음악을 들려준다는 점을 신기해하면서 고가 오디오가 주는 장점들을 잊곤 합니다. 물론 그때 선택하는 음악이 솔로나 듀엣이나 트리오나 쿼르텟 이상을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스마트폰이나 MP3로 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은 무리죠. 소편성 음악을 들려주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참 좋다”를 연발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오디오 시스템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빈곤속의 풍요란 레토릭이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스마트폰을 실제의 스마트폰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거의 주변에서 없어진 카세트테이프나 수십 년 된 고색창연한 유성기에서 가냘프게 들려오는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구두 닦는 아저씨가 깨져서 테이프를 칭칭 감은 라디오가 들려주는 음악도 근사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찬사는 소리 그 자체라기보다는 음악에 돌려져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 행복한 순간에 저는 생각합니다. “내 삶에 어떤 급작스런 일을 당해서 오디오를 다 잃는 날이 오더라도 이 스마트폰 하나면 있으면 살겠구나”라고 말입니다. 가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민방위 훈련처럼 그날을 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엇이든 미래에 대한 대비는 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거든요. 가늘고 나약한 스마트폰 소리에서 더 자주 음악 자체에 대해 고마움을 느낍니다. 역설입니다. 평소 오디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음악은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기기가 들려주는 소리를 통해 현현(顯現)합니다. 고맙다, 음악!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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