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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유철의 '음악정담'

두 거장의 클래식 산책

by 한종호 2015. 2. 16.

 

지강유철의 음악 정담(8) 

두 거장의 클래식 산책

 

무라카미 하루키가 재즈에 관심이 많다는 건 오래 전 읽은 그의 책에서 알았습니다.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순례의 해>를 주제로 장편 소설을 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땐 그래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몇 줄 언급하는 정도가 아니라 <순례의 해>를 소재로 장편 소설을 썼다니 대단해 보였던 거죠. 주변에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클래식에 깊이 빠진 마니아들이 많아서 하루키도 그 수준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래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떠난 순례의 해를 안 읽었습니다. 최근 번역된 하루키와 오자와 세이지의 대담집 오자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를 읽고 나니 하루키가 새롭게 보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깊고 폭 넓게 알고 있을 줄 몰랐거든요.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클래식 음악이나 오케스트라에 대한 생각을 이토록 상세하게 알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세계를 상대로 공연을 하는 연주자들은 너무 바빠서 책을 쓰거나 심층 인터뷰를 하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그러나 음악 동아리가 아닌 독서 토론에서 이 책으로 나눔을 갖겠다는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키야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대화의 주제가 클래식으로 국한되는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나와 다른 세상을 전제합니다. 여기서의 다른 세상이란 유럽이나 아프리카처럼 공간이거나, 먼 과거와 같은 시간이거나, 동 시대를 살지만 취향이나 환경이 달라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권장하는 이유는, 독서가 시공과 환경을 초월하여 삶을 확장하거나 심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평생 클래식 음악을 사랑한 작가와 그 음악을 지휘하고, 훈련하고, 지도해 온 사람이 나눈 대담집이라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선택에서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릴 감동시킨 영화 중 내 직업이나 관심의 영역과 일치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떤 영화의 소재는 매우 전문적임에도 감동을 줍니다. 메시지가 또렷한데다 재미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라서 그게 가능한 측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소재에도 감동이 가능한 것이 오로지 영화이기 때문이라 한다면, 그건 누가 봐도 무리한 주장입니다. 2월의 추천 도서로 오자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를 선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나름 재미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에세이나 음반 해설집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음반이나 콘서트를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게 별로 없는 것이지요. 천편일률적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구나, 싶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클래식 관련 서적은 이 점에서 유사합니다. 음악 전공자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 평론집이 나름의 판단 근거를 갖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보통 사람과거의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말 통하는 품격있는 음악 평론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하루키와 오자와 세이지의 대담은 차원이 다릅니다. 피아노 협연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박자가 계속 미세하게 엇나가는 부분이라든지, 연주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협주곡의 카덴차에서 연주자가 거의 실수할 뻔 한 부분을 포착하여 이야기를 나눈 책이기 때문입니다. 라이브 녹음 때 홀의 잔향 여부는 물론 음반을 녹음할 당시의 오케스트라가 그 이전보다 얼마나 향상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두 거장은 말이 통합니다. 같은 곡을 독일 오케스트라와 프랑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을 때 어떻게 사운드가 다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키는 서양 음악계가 지난 수십 년 간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해서도 훤합니다. 이런 정도의 내공을 가진 무라카미를 두고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을 정도입니다. 스코어(Score, 總譜)를 읽은 경험이 없는 하루키가,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협연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신경전의 흔적을 감지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루키는 클래식 마니아인 자신과 스코어를 깊게 분석하면서 음악을 만드는 오자와 세이지의 차이를 인식하며 대담을 이어갑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문학과 음악을 비교하며 동일성과 차이를 숙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외한이라며 자신을 한껏 낮춥니다. 자긴 스코어도 읽지 못한다면서 말입니다. 어려서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악보는 조금 읽지만 브람스 교향곡 정도는 어림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하루키는 클래식 문외한이 맞습니다. 그러나 스코어 읽기만 제외한다면 하루키의 음악 내공에 웬만한 클래식 음악 평론가들은 꼬리를 내리지 싶습니다. 하루키의 훈련된 귀와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오자와 세이지조차 인정할 정도였거든요.

이 책 편집에는 아쉬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하루키와 오자와는 어떤 곡에 대해 LP 판을 계속 바꾸어가면서 대화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이 책만 읽어서는 두 사람이 음반에서 정확히 어떤 부분을 들었는지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 하루키가 책 중간 중간에 지문처럼 삽입한 문장들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루키는 이 책 81쪽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2악장에 대해 이런 지문을 덧붙입니다.

 

이윽고 오케스트라가 발소리를 죽이듯 살며시 들어온다.”

피아노가 끝나고 오케스트라가 들어온다.”

 

지문만으로는 전혀 어디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자와 세이지가 방금 세 개 전, 음이 안 맞았죠. 마쓰코 씨, 화났겠군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역시 어느 부분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음악가들도 방금 세 개 전 음이 안 맞았죠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문 지휘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끝난 연주 세 마디 전또는 세 박자 전이라고 그럴 겁니다. 저렇게 번역하면 오자와 세이지가 졸지에 문외한이 되어버립니다. 번역자나 편집자는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요. 만약 지휘자가 연습 시간에, 또는 음악 선생이 수업 시간에 저렇게 말했다면 아무도 못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179쪽에는 말러 실내도라고 번역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체임버 오케스트라라고 풀 네임을 쓰든지 아니면 약칭인 말러 체임버라고 표기했어야 할 부분입니다.

하루키와 대담하는 오자와 세이지의 솔직함이 인상적입니다. 그게 자신이 과거 녹음한 음반이든 아니면 자기와 호흡을 맞췄던 연주자에 관한 것이든 말입니다. 오자와는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 위치에서 그렇게 솔직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오자와가 살아 있을 때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추신: 이 글은 양화진 문화원 2월 추천도서 책과 함께 추천사로 작성된 글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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